◈ 너만 섹시해? 나도 섹시해!
기존의 동물원을 반려몬 동물원 사업으로 확장을 하긴 했으나 아직 사업 초창기다.
자국민들은 물론 관광지로써도 유명한 영국의 반려몬 동물원과 비교하자면 갖춰야 할 게 너무나도 많은 상태였다.
사업 확장 전부터 거의 망해 가다시피 했던 동물원인지라 손대야 할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비록 선화의 가게 역시 동물원 내부로 이전을 했다고 한들, 기존 가게의 인기가 동물원의 손실을 막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자리를 잡아 놔야만 한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시작한 사업인 만큼, 또한 가족들이 자신을 믿고 맡겨 준 사업인 만큼 어떻게든 잘 해내고 싶었다.
영업 이익보다 손실이 훨씬 큰 상황.
해서 선화는 조금씩이나마 손실을 줄이는 데 목표를 뒀다.
선화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유통과 영업, 그리고 사업 기획을 함께 맡아 줄 인력이 필요하긴 했으나 일단 그건 뒤로 미뤘다.
아무래도 동물원이다 보니, 사무직보다는 현장에서 동물들과 시설들을 관리하는 쪽에 더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었기에.
이렇게 큰 사업은 선화로서도 처음이었다.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것과는 달랐다.
자신이 힘들다고 인력을 확 늘렸다가, 생각한 대로 영업 이익이 나오지 않으면 그만큼의 손실이 생기기 마련.
어쩔 수 없이 현재로서는 현장 업무를 제외한 거의 나머지 업무들은 선화와 극소수의 직원들끼리 도맡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버티면 돼. 매출은 나날이 늘고 있으니, 곧 인력도 더 충원할 수 있어.’
선화는 동물원장으로서 가장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이곳의 오너로서 자신이 응당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선화의 업무가 많은 이유 역시 그 때문이다.
소수의 인원들로만 일을 하다 일이 쌓여 가는 것도 늘어 가고, 하루하루 해야 할 일 역시 많아지는 건 당연지사다.
특히나 오늘은 그 업무량이 가히 최고점을 찍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날이었는데…….
“오오오! 대단하십니다, 부원장님!”
“서, 서류를 넘기는 손이 눈에 보, 보이질 않습니다!”
“과연 헌터 협회의 에이스! 엑시스의 자랑!”
소수의 직원들이 눈앞의 광경에 환호를 하고 있다.
과장이 좀 섞이긴 했지만, 그게 이상하리만치 과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진풍경이었다.
샤라라락-
준우는 직원들의 응원에 힘입어 더욱 빠르게 서류를 넘겨 갔다.
누군가의 말처럼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나, 확실히 속도는 직원들의 배 이상으로 빨랐다.
핵심을 빠르게 캐치하고 문제점을 찾아낸다.
한 손으로는 서류를 넘기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찾아낸 문제들을 적어 간다.
‘……뭐가 저렇게 빨라? 지금 서류 검토 제대로 하고 있긴 한 건가?’
현란하게 움직이는 진지한 눈동자와 손을 보면 분명히 일은 제대로 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도 세상 그 누구보다 열심히.
마법처럼 뚝딱! 하고 끝나는 정도는 아닐지라도, 일반인들이 보기엔 베테랑인 준우의 능력이 가히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선화처럼 의심이 들 만도 했다.
아무리 믿음직한 남편이고, 전 세계가 스카우트하려는 헌터더라도, 그가 사무 관련 업무에도 이토록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재능이라기보단 경력이지, 경력!’
자신을 바라보는 선화의 시선을 느낀 준우가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
회사 일이라는 게 세세하게 보면 분명히 다른 것들이 있긴 하겠지만, 큰 틀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세세히 봤을 때 다른 것들이 문제가 되긴 하겠으나.
‘내가 누구야? 이 전준우로 말할 것 같으면!’
회귀 전 엑시스의 길드 마스터가 되기 위해 엑시스 내의 온갖 계열사를 떠돌며 실전 경험을 쌓았던 이다.
부마스터 직에 오를 시점에는 언젠가 수재혁과 경쟁하게 될 것을 대비해, 해외에 나가 경영 수업을 받기도 했고 또다시 국내로 돌아와 계열사를 돌았다.
현장은 물론 사무 업무에서도 밀리지 않을 엑시스의 참된 인재.
좋게 말하면, 다재다능한 만능 헌터였지만.
- 에라이! 미친놈아! 일에 미쳐 사는 게 그리 좋냐! 집 좀 들어가 집 좀! 제수씨가 너 목 빠지게 기다려, 인마!
이건형에게 매번 잔소리를 들었던 사람.
그게 바로 전준우였다.
‘회귀 전에 일에 미쳐 살았던 게 선화한테 도움이 될 줄이야! 이걸 좋은 일이라고 해야 하나?’
회귀 전에 준우와 함께 일을 했던 사람들이라면, 준우의 입에서 ‘세상에서 일이 제일 쉬웠어요’라는 말이 튀어나와도 다들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리라.
서류를 살피면서도 준우에겐 여유가 있었다.
적어도 파티션 너머에 있는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을 훔쳐볼 수 있을 정도는.
빼꼼-
자신을 바라보는 선화의 시선이 또 한 번 느껴진다.
과연 선화는 이토록 일 잘하는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언젠가 함께 TV 속 드라마를 볼 때.
선화가 무심코 했던 말이 떠오른다.
- 와아, 섹시하다!
- 뭐가 섹시해? 저 남자 배우 말하는 거야? 그냥 앉아서 서류만 검토 중인데 저게 어떻게 섹시해?
- 섹시하지 않아? 서류 넘길 때 손에 힘줄 봐봐. 일에 집중하는 눈빛은 어떻고. 저렇게 앉아서 일하는 남자들도 가끔 보면 섹시할 때가…….
- 아아, 그러셔? 나처럼 현장에서 몬스터 뚜까 패면서 일하는 남자는 무식하고?
- 에이! 그, 그런 말이 아니고. 우리 오빠는 좀 더 격정적으로 섹시하다는 얘기지. 보다 화끈한 느낌?
- 됐거든! 에휴, 다음번엔 몬스터를 책상에 앉혀 놓고 뚜까 패든지 해야지 원.
그래, 그랬었지.
책상에 앉아서 서류 넘기는 남자의 모습이 섹시하다고 했으렷다?
불끈-
준우가 선화가 했던 말을 의식하듯 손에 힘을 준다.
이 손이 어떤 손인가. 수많은 현장에서 몬스터를 때려잡으며 수련해 온 손이다. 힘줄 정도는 얼마든지 컨트롤할 수 있다.
스윽-
머리카락도 한번 쓸어 올려 본다.
선화가 보고 있겠지.
그윽하게 선화 쪽 파티션을 바라보는 준우의 눈빛이 ‘어때? 나 좀 섹시하지?’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터억!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준우가 마지막 서류를 덮었다.
“후우…….”
현재 시각 오후 2시.
밤 10시는 되어서 끝날 것이라 생각했던 선화의 업무들이 점심을 좀 지난 시간에 마무리가 되어 버렸다.
“어…… 음…… 그게 벌써 끝났어요?”
“그러네요, 원장님. 이게 벌써 끝나 버렸네요?”
이곳은 직장.
직원들이 보고 있고, 상하 관계가 있는 곳이기에 서로 존칭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존칭을 한다 한들, 선화에 대한 애정이 식거나 하는 일 같은 게 있을 리는 없다. 다만 평소처럼 겉으로 드러내지만 않을 뿐.
자리에서 일어난 준우가 선화에게로 다가간다. 그리고는 마치 칭찬을 갈구하는 강아지 같은 눈빛을 애써 숨기며 입을 열었다.
“제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일들은 다 끝냈습니다. 원장님 결정이 필요한 것들이나, 꼭 봐야 할 것들은 따로 분류해 놨구요. 서류에 따로 표시해뒀으니까 찾기 쉬우실 거고, 또…….”
기존의 서류 업무뿐 아니라, 현장과 시설 직원들이 보내온 보고서들까지 싹 다 살펴본 듯했다.
“……전부 깔끔하게 정리해 뒀으니 아마 원장님께서 확인해야 할 것들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겁니다.”
“고마워요, 부원장님. 확실히 경력직이라 그러신지 일 처리가 완벽하시네요.”
선화가 검토해 본 결과 딱히 문제 될 게 없을 만큼 깔끔했다.
실로 경이로운 표정까지 지으며 준우를 바라보는 선화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참, 원장님. 점심시간이 제법 지났는데, 식사 안 하세요?”
“부원장님 먼저 하고 오세요. 저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좀 남아서…….”
“제가 도와드릴까요?”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괜히 저 도우려고 나오셨다가, 너무 고생하신 것 같아서. 이건 제 선에서 마무리할게요!”
“그럼, 아까 팀장님께서 시설 점검 가셔야 한다고 그랬었거든요? 팀장님이랑 동물원 좀 돌아보고 올게요. 이따 일 다 끝나시면 같이 먹도록 하죠.”
시설 점검을 나가기 전, 준우가 쓱 뒤를 돌아본다.
서로 눈을 마주친 부부가 기분 좋게 미소를 나누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다른 직원들도 늦은 점심식사를 하러 나간 상황.
준우와 팀장도 사무실을 나서고, 혼자라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한 선화가 히죽히죽 웃어 댔다.
“아니, 뭔 일을 이렇게나 잘해?”
속으로만 생각하자니 너무 답답했던 감탄들이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아빠도 그렇고 큰오빠도 그렇고. 우리 남편 일 잘한다고 칭찬하긴 했는데,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이야!”
어디 가족들뿐이랴.
협회에서는 물론, 전 세계의 사람들이 준우의 능력을 높이 사고 있었다.
때문에, 선화도 제 남편이 일 잘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헌터로서의 능력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은 처음 체감했다.
이건 뭐 거의 만능이 아닌가.
못하는 게 없잖아?
“하여튼, 누구 남편인지 어쩜 저리 사람이 섹시할까. 히힛.”
불현듯 서류를 넘기던 준우의 손이 떠오른다.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질 때는 보이지 않아서 몰랐는데, 멀리서 본 그 힘줄이 새삼 사람을 설레게 만들었다.
“……아잇, 몰라. 뭐야 진짜.”
선화가 괜히 달아오른 볼에 제 손을 가져다 대며 열기를 식혀낸다.
그리고는 뜨겁게 타오르던 마음을 겨우 잠재운 후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정신 차리자, 수선화!”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내가 하나를 해낼 때, 열 개 이상을 해내는 남편이 아니던가.
“그래도 명색이 내가 원장인데, 부원장인 오빠한테 앞으로도 이렇게 의지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엄연히 선화가 수장으로 있는 동물원이다.
어찌 남편만 고생하게 둘 수 있겠는가.
“일 잘하는 여자도 섹시하다는 걸 보여 주겠어.”
너만 섹시하냐?
나도 섹시할 수 있다.
무엇보다.
퇴사를 앞둔 준우가 동물원에서나마 조금은 더 편히 지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동안 고생 많이 했지, 우리 오빠.’
부부는 함께 같은 속도로 나아가는 것.
준우가 자신보다 많은 것을 짊어지고 가는 것은 선화는 원치 않았다.
남편과 같은 속도로 나아가고 싶다.
속도를 맞춰 나란히 나아가기 위해선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하겠지만, 남편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다.
더군다나 동물원장은 남편이 아닌 본인이다.
남편보다 덜 섹시할 수는, 아니, 덜 일할 수는 없다.
‘내가 여기선 덜 고생하게 만들어 준다 꼭!’
더 열심히 일해서 이제는 편히 쉴 수 있게 해 줄게.
의지를 다 잡은 선화가 고개를 격하게 내젓는다. 머릿속에 가득 찬 준우의 손, 아니, 힘줄을 떨쳐 내기 위함이었다.
* * *
대체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준우는 소파에 벌러덩 누워 공허한 눈으로 천장만을 응시했다.
“오늘도 늦게 퇴근하려나…….”
생기를 잃은 목소리가 준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퇴사 전까지 냈던 휴가 기간 동안 선화와 함께 일을 하며 실컷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황이 그와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 오빠! 사람이 쉴 땐 쉬어야지, 쉬는 와중에도 일을 하려고 그러면 어떻게 해! 정식 출근할 때까지는 그냥 집에서 푹 쉬어! 알았지? 절대! 절대! 동물원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말고!
웃으면서 말을 했지만 다소 강압적인 선화의 태도였다.
선화가 출근할 때 은근슬쩍 같이 출근을 하려고 해도, 선화가 격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반대를 했다.
- 오빠. 난 오빠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쉬었으면 좋겠어. 여태 일만 하던 사람이 또 일을 하겠다고? 그거 워커홀릭이야!
워커홀릭.
회귀 전에 준우가 가졌던 병명이었지, 아마.
그 말까지 들은 이상 준우는 선화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회귀 전에도 워커홀릭으로 많은 것을 놓쳤는데, 이번에도 또 그 소리를 들어 가며 선화를 불행하게 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 정식 출근 때까지만 참으면 된다, 정식 출근 때까지만…….’
그런데.
왜 이리도 휴가가 긴 것인지.
- 오빠 나 오늘도 야근할 것 같아. 미안한데, 수린이 하원 좀 부탁할게.
- 회의가 좀 늦게 끝나서 업무가 많이 밀렸어. 수린이랑 먼저 저녁 챙겨 먹어.
- 오늘 해외 유통사랑 미팅이 있어서. 영화는 다음 주에 보자, 다음 주에!
꿈에 그리던 동반 출근은 하루로 끝이 났다.
그리고 그날부터 나흘이나 지난 오늘, 준우는 선화와 얼굴 보기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자신이 일을 도와준대도 기어이 싫다고 반대 중이다.
계속 질척거리면 화를 낼 것 같아서 애써 참고는 있는데, 이렇게 가다가는 더 얼굴 보기가 힘들어질 것만 같았다.
‘혼자 일하는 것보단 둘이 더 빠를 텐데?’
왜 그걸 굳이 혼자서 해내겠다는 건지.
며칠 지나진 않았지만, 정말이지 일에 현혹이라도 된 사람처럼 요즘엔 일에 푹 빠져 살고 있는 선화였다.
‘아니, 나보고 워커홀릭이라며? 정작 나보다 자기가 더 일만 하고 있으면서!’
세상에 이렇게 일만 하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
아! 내가 그랬구나? 허허허.
그래도 다음날은 일찍 퇴근을 한 선화였다.
준우의 얼굴에 그나마 생기가 돋는 듯싶었으나.
“나 서류 살펴봐야 할 게 좀 남아서. 잠깐 일 좀 볼게.”
“밥은?”
“배부르면 졸릴까 봐서. 수린이랑 먼저 먹어, 오빠. 나는 이따 먹을 테니까 너무 걱정 말구.”
그리 말한 선화는 쌩하니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닫힌 방문을 바라보는 준우의 표정이 그야말로 어둠 그 자체다.
‘내가 뭔 잘못이라도 했던 건가?’
그럴 수도 있다.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어쩌면 첫 출근 날 준우가 선화를 대신했던 업무 중에 실수가 있었을지도.
‘설마, 그래서 나한테 일을 안 시키는 건가? 그것 때문에 계속 혼자서 하겠다고?’
이러다가 선화가 같이 일 못 하겠다고 그러면 어떡하지.
준우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고민들이 떠올랐다. 선화와 함께 출퇴근을 할 행복한 상상을 하며 여태 버티고 또 버텨 왔는데.
시들어버린 나무처럼 준우가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선화의 칼퇴로 잠시나마 활기가 넘쳤던 그의 얼굴에 다시금 그늘이 드리워졌다.
“에효.”
수린이가 그런 아빠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째 저러고 있는 아빠가 영 못마땅해서다.
“미심아. 아빠 말인데. 요즘 이상한 이유가…….”
키잉-?
“엄마가 안 놀아 준다고 저러는 걸까?”
키잉-!
하다못해 수린이도 놀 친구가 없으면 혼자서 잘 놀고는 하는데, 다 큰 어른이 엄마가 안 놀아준다고 저렇게 힘없이 앉아 있다니.
“쯧쯧. 엄마를 너무 좋아해도 탈이라니깐.”
고개를 내저은 수린이가 부엌으로 향했다.
엄마는 일하던 거 마무리하고 이따 밥을 먹는다고 했으니, 아빠랑 둘이서라도 밥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체 뭐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잘못한 건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아빠가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고 있으니 식사를 차리는 건 수린이의 몫이었다.
뭐, 딱히 어려울 건 없었다. 엄마가 반찬 해 놓은 거 냉장고에서 꺼내기만 하면 된다.
푸욱!
밥이야 밥솥에서 힘껏 푸면 되는 거고.
서툴긴 해도 수린이의 첫 밥상이 완성됐다.
“아빠! 밥 먹어!”
“…….”
“에효. 사람이 아무리 힘들어도 밥은 먹어야지! 얼른 일로 와!”
“…….”
“빨리 오라니깐!”
힘으로 수린이를 당할 수는 없지.
수린이에게 이끌려 간 준우가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식탁 앞에 앉았다.
역시나 아직까지 선화가 왜 자신을 멀리하는(?) 건지 이유를 찾지 못한 듯했다.
“뭔가 문제가 있으니까 나랑 출근을 안 하려고 하는 걸 텐데. 일마저도 못 도와주게 하는 거 보면 분명히 문제가 있기는 할…….”
“아빠. 중얼중얼 좀 그만하고.”
“…….”
“입 벌려 봐. 내가 먹여 줄 테니까.”
“…….”
“‘아’ 하고 크게 입 벌려 보라니깐! 유치원생도 아니고 말을 이렇게 안 들을까?”
“아아아아.”
뒤늦게 준우가 입을 떡 벌리자.
수린이가 숟가락을 준우의 입으로 쏙 집어넣는다.
“맛있네. 우리 딸이 차려 준 첫 밥상이라 그런가.”
“……아빠, 이거 빈 숟가락이야.”
“응?”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뭐가 맛있다는 거야?”
준우의 머릿속엔 선화에 대한 고민밖에 없다.
그리고 수린이는 아빠의 상태가 꽤 심각하다고 판단했다.
웃겨 보려고 했던 장난도 안 먹히질 않는가.
아니, 이게 먹힌 건가? 아무튼, 그냥 엄마 외에 다른 생각 자체가 전혀 없는 상태임엔 분명하다.
우우우웅-
지금도 옆에서 전화 오는 것도 모르고 계속 자신의 머리채를 부여잡고 엄마에 대한 고민만 거듭하고 있지 않은가.
“사랑이 이렇게나 위험한 거야. 알았니, 미심아?”
키잉-?
핸드폰이 계속 진동을 울린다.
고민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아빠를 대신해 전화는 수린이가 대신 받기로 했다.
- 어, 매제. 다름이 아니라 저번에 얘기했던 사업 건에 대해서 의논할 게 좀 있는데…….
“큰삼촌. 저 수린인데요.”
- 응? 수린이? 전화를 왜 네가 받아?
제 얼굴만 한 핸드폰을 손에 쥔 수린이가 부엌에서 멀찍이 떨어진다.
아무래도 지금 할 말을 아빠가 듣는 곳에서 해선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비록 고민에 빠져 대화 내용을 들을 여유가 없을지라도.
“큰삼촌, 아빠가 이상해요.”
- 이상하다니?
“꼭 병에 걸린 사람 같아요. 병원에 데려가 볼까요?”
- 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매제가 병에 걸려? 많이 심각한 거야?
“으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고?”
- 선화는? 매제가 아프면 선화가 어떻게든 했을 텐데, 왜 여태 병원에도 안 가고…….
“엄마도 지금 좀 아파요. 맨날 일하느라 바쁜지 아빠는 눈에 보이지도 않나 봐요.”
- 어…… 음…… 그러니까, 수린아. 삼촌이 지금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거든?
“아빠가 그랬는데 엄마의 병은 워커홀릭이라고 그랬고, 아빠의 병은…… 음? 뭐였더라?”
TV에서 한 번 본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을 보지 못해서 걸리는 병이라고 했었는데.
“아! 상사병! 아빠는 상사병에 걸렸어요!”
- ……워커홀릭? 상사병? 너희 엄마, 아빠 둘 다 절대 그런 병들엔 걸릴 리가 없을 텐데.
상사병이 아닌가?
뭔가 분명히 비슷했던 거 같은데.
- 수린아. 마침 삼촌이 수린이네 집 근처 지나가는 중이거든. 삼촌이 잠깐 집에 들를게. 아무래도 그게 낫겠다.
“천천히 조심해서 오세요, 큰삼촌!”
- 네 목소리 들어 보니까 병원에 갈 정도로 심각한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괜찮은 건 맞지?
“괜찮기는 한 것 같…….”
수린이가 힐끗 부엌 쪽을 살펴본다.
여태 고민이 풀리지 않았는지, 답답한 표정으로 손톱까지 딱딱 물어뜯고 있는 아빠의 모습이 보인다.
“……아니다. 빨리 오세요, 큰삼촌.”
- 응? 아깐 천천히 오라고……?
“다시 보니까, 아빠가 좀 많이 심각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