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5화.가족이란 (3) (225/246)

◈ 가족이란 (3)

노력으로도 안 되는 게 있을까.

팔라딘은 노력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을지라도, 노력하지 않는 이에 비해선 원하는 바에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욕심을 버리고 많은 것을 내려놓기 위해 노력한 지 어언 십여 년.

마음의 수양을 쌓고 또 쌓아, 동양인 최초로 성스러운 팔라딘의 이름을 거머쥔 그는 적어도 오늘까진 그렇게 생각했었다.

노력으로 어지간한 건 다 이룰 수 있다고…….

“우우우욱!”

……그러나, 술은 노력으로 마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두어 시간 잠들어 있었을까.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눈을 뜬 팔라딘은 누가 자신을 방에 옮겼는지 생각할 틈도 없이 화장실로 내달렸다.

화장실에서 속을 게워 내는 소리가 들려온다.

마시면 마실수록 주량이 늘어난다고 듣기는 했는데, 팔라딘은 그 말을 부정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굳이 주량을 늘리는 노력 자체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술은 나랑 안 맞아.’

대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생전 입에 대지도 않던 술을 댄 것인지.

어쩌다 보니 분위기에 휩쓸려 그리되긴 했으나, 정신이 깨어 보니 팔라딘으로서 죄책감이 들었다.

“신이시여…… 우우욱!”

기도를 하려던 찰나, 또다시 속이 울렁거린다.

약주라더니. 약은 원래 쓰디쓰다고는 하지만 팔라딘이 마셨던 술은 약주보단 독주에 가까웠다.

“껄껄껄껄!”

“헤헤헤헤헷!”

밖에선 여태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설마, 아까부터 지금까지 계속 술을 마시고 있다는 걸까.

‘다, 다들 미쳤어. 어떻게 저걸 지금까지 마시면서도 저리 멀쩡할 수가 있는 거지?’

신께서 저들에게 영혼을 불어넣을 때 음주 관련 특성을 함께 넣은 것이 틀림없다.

그게 아니고서야 아직까지 멀쩡하다는 게 말이나 되겠는가.

‘마력으로 취기를 날려 보내지 않고도 어찌 저렇게…….’

가장 먼저 취해 버린 팔라딘은 여태 알지 못했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골탕 한번 먹여 보겠다고 큰아들, 사위와 함께 작당 모의를 했다는 것을 말이다.

“어머! 민혁아!”

팔라딘이 화장실에서 나온 그때였다.

황장미가 흥분하여 소리치는 목소리가 거실 쪽에서 들려왔다.

‘민혁이?’

아무리 폐관 수련을 오래 했던 팔라딘이라도 민혁이의 유명세를 모를 수는 없었다.

사람들이 모르는 수 씨 집안의 가정사야 팔라딘도 집을 오랫동안 떠나 있었던 탓에 몰랐던 것들이 많았지만, 트로트 황제가 된 동생의 이름은 신성회 내 신도들에게서도 자주 전해 들었으니까.

‘민혁이가 이 집에 왔다는 건, 결국 녀석도 아버지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겠지.’

처음 민혁이의 소식을 듣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바로 이거였다.

아버지랑 척을 졌겠구나.

수태광의 지원으로 버클리 음대에서 클래식을 공부하던 민혁이가 그의 뜻을 거스르고 트로트를 택했으니, 당연히 어마어마한 마찰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건 팔라딘이 이 집에 발을 딛기 전까지의 우려였다.

바보가 아닌 이상 집안 분위기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걸 모를 리가 있겠는가.

‘아마, 민혁이도 아버지랑 원만하게 해결을 했을 터.’

팔라딘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이 집에서 수태광과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건 오직 본인 한 명뿐이겠지.

“하아…….”

그래. 이제 나 하나 남았다.

나만 아버지랑 껄끄럽다, 나만!

* * *

팔라딘의 예상대로였다.

민혁이와 아버지와의 관계가 어색할 것이라는 그의 우려가 무색하게, 수태광이 민혁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없이 따스했다.

오 남매 중 유일하게 자리를 비웠던 민혁이까지 파티에 참석하게 되면서, 집안의 온기는 수태광의 눈빛만큼이나 더욱 훈훈해지기 시작했다.

“오늘 파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우리 아들 괜히 신경 쓰일까 봐 엄마가 말 했는데.”

“아버지께서 부재중 통화를 남기셨더라구요.”

“그거 하나로 파티가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고?”

“아뇨. 매형한테도 문자가 와 있었어요. 오늘 어머니, 아버지 결혼기념일이시니 잠깐 얼굴이라도 비추면 두 분이 참 좋아하실 것 같다구요.”

“전 서방이?”

황장미가 흐뭇하게 웃으며 준우를 바라보았다.

이어 수태광도 ‘역시, 내 사위’라고 말하는 표정으로 준우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모 딴에는 바쁜 아들이 방해될까 봐 못내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오늘의 파티를 숨겼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오늘 온 가족이 모이기를 바랐던 수태광과 황장미였고, 그 속마음을 준우가 읽어 낸 것이었다.

“아무래도 장인 장모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보단, 제가 말하는 게 처남에게 부담을 덜 되지 않을까 했거든요.”

장인 장모의 애정 어린 시선을 느낀 준우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찌 두 사람의 속마음을 이리도 잘 대변해 줄 수 있는 것인지. 참으로 기특한 사위가 아닐 수 없었다.

‘이번에도 매제가 일을 해냈어. 이 정도면 이 집의 대부분에 매제의 영향력이 끼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팔라딘은 또 한 번 준우에게 감탄했다.

그저 가족들의 비위를 잘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가족들이 뭘 원하는지 그 속내까지 완벽하게 파악을 한다.

수태광이 괜히 사위에게 아들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정말이지 준우가 아들 이상으로 사위의 역할을 너무나도 잘 해 주고 있었다.

‘……내 자신이 부끄러워지는군.’

문득 팔라딘이 자신을 되돌아본다.

신성회에선 세상 그 누구보다 존경을 받는 그이지만, 과연 아들로서 어떠한가?

필라 신의 뜻을 전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겠다고는 하지만, 정작 자신의 부모와 가족들에겐 소홀했던 그다.

‘이런 내가 진정 신성회의 팔라딘이라 할 수 있을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

아니다. 가족이라는 것은 절대 소에 속할 수가 없다.

팔라딘이 구원해야 할 사람들 중 일부인 가족이 비록 소수라고는 하나, 그 소수를 보살피지 못한 본인이 어찌 그 많은 이들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매제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구나.’

신도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건 팔라딘이었지만.

차가운 한기만이 가득한 집안에 온기를 불어넣어, 이 집을 구원으로 이끈 것은 다름 아닌 준우였다.

“그나저나, 민혁이 너 내일까지 스케줄 꽉 차 있는 걸로 아는데. 오늘 저녁엔 지방에 행사 있는 거 아니었어?”

“어머니께서 어떻게 제 스케줄을 그리 잘 아세요?”

“사실은 민혁이 네 매니저님이 가끔 연락을 주시거든.”

“아아, 매니저 형이…….”

“내일 오전엔 무슨 인터뷰가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인터뷰 끝나면 사인회도 한다고 했었고.”

그러자.

수태광이 모자 사이의 대화에 불쑥 끼어든다.

“인터뷰가 아니라 유명 패션 브랜드 화보 촬영이겠지. 사인회는 인터뷰 끝나고가 아니라, 저녁에 같은 브랜드 오프라인 매장에서 진행하는 거고.”

“……저, 정확하긴 한데, 아버지는 또 어떻게 제 스케줄을 그리 잘 아세요?”

“응?”

“너무 디테일하신데요. 저희 매니저 형인 줄 알았어요.”

“크, 크으으음!”

“아무튼 오늘 행사는 밖에 눈이 많이 와서 취소가 됐구요. 패션 브랜드 화보 촬영하고 사인회는 해당 브랜드 내부 사정으로 모레로 미뤄졌어요.”

“모처럼 온 가족이 한데 모일 수 있게 됐으니, 이걸 잘됐다고 해야 하나?”

“전 그렇게 생각해요. 오늘 저도 꼭 집에 오고 싶었거든요.”

“다행이네. 네 아빠가 널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는데.”

“아버지가요?”

“네 아빠가 워낙 유난이잖니. 혹시 알아? 스케줄 줄줄 꿰고 있는 걸 보면, 너한테 미행 같은 거 붙여 놨을지도!”

“내, 내가 언제 유난을 떨었다고! 그리고 미행이라니? 민혁이 녀석 사인회 열리는 장소가 우리 엑시스 백화점 내에 있는 매장이라기 우연히 들었을…….”

“당신은 꼭 애들 앞에 있으면 감정 표현에 인색하더라.”

“뭐, 뭣?”

“아니, 당신이 백화점 점장하고 통화하면서 우리 아들 피부 상하지 않게 내부 온도는 적당히 잘 맞춰 줘라, 중간에 갈증 나지 않게 음료나 물은 충분히 채워 주고, 혹시라도 사인회가 길어지면 몸이 뻐근할 수도 있으니 옆 매장에서 안마기도 하나 가져다…….”

“그, 그만! 그만!”

수태광이 새빨개진 얼굴을 하고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잘나가는 아들의 모습이 뿌듯하고 걱정되긴 하나, 이렇게 코앞에서 속마음을 들켜 버리니 조금 민망한 탓이었다.

“나는 그냥 우리 백화점에서 하는 행사니까 백화점 이미지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런 게지……으음, 난 잠깐 밖에 바람 좀 쐬고 오마.”

괜히 딴소리를 하며 자리를 뜨는 수태광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황장미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너희 아빠 진짜 웃기지 않니? 아직도 자식들한테 감정 표현하는 게 저리도 부끄러울까.”

“전 좋아요. 저런 모습마저도 예전엔 한 번도 볼 수 없었거든요.”

“하긴. 네 아빠가 많이 변하긴 했지. 엄마는 평생 네 아빠한테서 저런 모습 볼 날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엄마도 좋으시죠?”

“내가 지금 네 아빠 옆에 있는 거 보면 모르겠니?”

팔라딘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마다. 수 씨 집안에 불지 않던 훈풍이 불어오는데 그 어찌 좋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훈풍이 불던 집안에 민혁이까지 오게 됨으로써 온기가 더해졌다. 그리고 그 온기가 더해지게끔 만든 이는 역시나 이번에도…….

‘……매제.’

이것도 과연 신의 뜻일까.

흩어져 있던 가족을 모으고, 그 가족이 모여 있는 곳으로 팔라딘을 인도한 것도 신이 그려낸 그림일까.

순간, 팔라딘과 준우의 눈이 마주쳤다.

준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슬그머니 팔라딘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말을 흘린다.

“장인어른께서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시네. 밖에 눈도 많이 오고 꽤 추우실 텐데.”

수태광이 추위를 느낀다?

세상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리가.

“누가 나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장인어른 눈에 미끄러지신 건 아닌지 걱정되네.”

“…….”

“형님께서 한번 나가 보시는 게 어때요?”

“내가?”

“아무렴 혼자보단 둘이 있는 게 덜 추울 테니까요.”

“그, 그럼, 차라리 자네가 나가지 왜 나한테…….”

“아빠, 나 쉬 마려! 화장실 같이 가 주라!”

“아이쿠. 제가 나가 보려 했는데, 전 수린이 데리고 당장 화장실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서요. 다른 사람들도 다들 서로 대화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이고.”

이미 짜놓은 듯한 대본과도 같은 부녀의 어색한 대화.

그러나 준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싱긋 미소를 짓고는 수린이를 데리고 사라졌다.

이건 대놓고 팔라딘 자신보고 나가 보라는 뜻이 아닌가.

“흠, 흠!”

다른 가족들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아니, 어쩌면 다들 의식하고 있으면서 아닌 척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다들 이럴 땐 죽이 잘 맞아서들…….”

창밖을 응시하던 팔라딘이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잠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본다.

집안의 훈풍과는 달리 한기가 가득한 마당엔 새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아버지는 어느새 그 눈만큼이나 새하얗게 흰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저 멀리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추운데 뭣 하러 나와.”

“…….”

부자간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들은 아버지에게 서로 상처를 주었다는 과거의 기억 때문일 터.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게야?”

“그, 그런 건 아니고…….”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몇 년 만에 단둘이 마주하게 된 아버지 앞에서 가장 먼저 꺼내야 할 말은 무엇일까.

“죄, 죄송합니다, 아버지.”

움찔-

예상치 못한 말에 먼저 반응한 것은 수태광이었다.

아들이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낼지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나마 오늘 식사 자리를 통해 나름 서먹해진 관계가 풀렸는데, 굳이 이런 얘기를 꺼내서 다시 그걸 굳게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뭐, 뭐가 죄송하단 말이냐.”

“그냥 전부 다요. 아들 하나 후계자로 키워 내시려고 지난날 바쁜 시간 쪼개서 막대한 투자를 하셨는데, 결국 그런 아들이 아버지 뜻을 거역했잖아요.”

“…….”

“아버지의 기대가 얼마나 크셨는지 잘 압니다. 그만큼 실망도 크셨다는 것 역시 잘 알구요. 지난날처럼 이런 저를 이해해 달라며 어리광 같은 건 부리지 않을게요. 저 역시 그날의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으니까요. 다만…….”

“…….”

“제 선택이 후회되지 않게, 또한 절 지켜보고 계실 아버지께서 후회하지 않게끔 보다 많은 사람들을 좋은 곳으로 이끌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그러니 기다려 주세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께서 만족하실 수 있는 아들이 될…….”

“됐다.”

“……?”

“이해한다.”

“……예?”

“많이 늦었지만, 이젠 널 이해한다고.”

그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이던가.

팔라딘은 저도 모르게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난 네게 투자 같은 거 한 적 없다. 투자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고.”

“…….”

“넌 그게 투자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표현은 서툴렀을지 몰라도.

그것은 수태광에겐 나름 애정이었다.

“나는…….”

수태광도 아버지는 처음이었던지라 매우 서툴렀다.

자식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노력을 한다고 하긴 했지만, 그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매일 같이 고민을 거듭했었다.

“나, 나는…….”

아들을 사랑하는 방식이 서툴렀기 때문이다.

수태광은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안으로 삼켰다.

결국, 아들은 스스로 선택을 해냈다.

자신의 강요가 아닌 제 의지로서.

아버지가 되어 아들에게 올바른 길을 안내하지 못했다는 한스러움 때문인지, 아니면, 후계자 수업을 하는 그 오랜 시간 아들의 선택을 가로막고 있었다는 죄스러움 때문인지.

응원을 해 주지 못할망정 도리어 화를 내 버렸다.

‘……나는 그때도 한참 어렸군. 바보같이.’

자식을 낳으면 완벽한 어른이 된다고 생각했거늘.

안타깝게도 그때의 수태광은 어른이 아니었다.

지금은 어른이 되었나.

그것도 잘 모르겠다. 옆에 있는 아들에게 속에 있는 말 한마디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이내 삼켜 버리는 것을 보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잘 압니다. 아버지께서도 절 아끼시기에 그리 화를 내셨다는 걸요.”

“…….”

“그걸 이해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요.”

너는 나보다 더 일찍 어른이 되었구나.

수태광이 그런 아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괜히 멋쩍어 저 멀리 시선을 돌렸다.

“성직자는 마음을 다스리는 데 많은 시간을 쏟는다더니, 진짜 성직자가 되었구나.”

“아직 한참 부족합니다.”

“성직자 생활이라는 거, 할 만은 하고?”

“의미 있는 일이니까요.”

부자 사이에 다시금 침묵이 찾아왔다.

서로 할 말은 다 했는지, 당연하게도 찾아온 어색함.

“크흐으으음!”

“흠, 흠!”

눈치를 살피던 수태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전히 시선은 저 멀리 어딘가를 응시한 채.

“먼저 들어가거라. 난 좀 더 있다가 들어갈 터이니.”

“그럼 저도 조금 더 있다가 들어가겠습니다. 혼자보단 둘이 있는 게 덜 추울 테니까요.”

“추워? 내가? 참나! 싱거운 녀석 같으니라고.”

수태광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눈발은 점점 더 거세지지만, 불을 다루는 그가 추위를 느낄 리는 만무.

“따뜻하구나.”

수태광의 어깨에 내려앉은 눈이 녹기 시작했다.

이어 팔라딘의 발아래 쌓여 있는 눈 역시 서서히 녹아들었고, 어느새 마당을 새하얗게 뒤덮었던 눈마저 사라지고 봄을 맞이할 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아! 아빠! 저것 봐 봐! 눈이 갑자기 다 녹았어!”

마침,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수린이가 소리쳤다.

준우가 수린이의 옆으로 쓱 다가와 눈이 녹아 드러난 마당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가 엄청 기분이 좋으신가 보다. 눈이 저렇게 많이 내리는데 쌓일 새가 없네.”

“저거 다 할아버지가 녹인 거야?”

“그러지 않았을까?”

“왜애?”

“흐음. 마음이 따뜻해서?”

“왜애? 왜 갑자기 마음이 따뜻한데?”

“지금 여기도 따뜻하잖아. 원래 가족들하고 같이 있으면 따뜻한 거야.”

“히힛. 그런 거야? 그럼 나도 아빠랑 이렇게 붙어 있어서 따뜻한 거야?”

수린이가 준우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가 입고 있던 니트를 이불처럼 뒤집어쓴 수린이가 준우가 했던 말을 되뇌며 고개를 끄덕여 댔다.

“가족이란 그런 거구나.”

“응?”

“눈이 녹는 거. 그게 가족이라는 거지, 아빠?”

“으음, 맞아. 바로 그거야.”

굳이 사전적 의미를 말해 줄 필요는 없겠지.

가족이라는 말이 가진 의미보다 그들이 느끼는 게 무엇인지가 가장 중요할 테니까.

“헤헤헷. 그럼 우리 집엔 절대 눈 쌓이는 일은 업게따.”

준우가 품 안의 수린이를 한껏 끌어안으며 웃었다.

그래, 가족이란 눈이 녹아내리는 것과 같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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