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4화.가족이란 (2) (224/246)

◈ 가족이란 (2)

대저택에 걸맞은 넓고 화려한 식탁 위에 수 많은 음식들이 놓아졌다.

스테이크와 파스타를 비롯한 각종 양식들, 단짠의 맛을 모두 느낄 수 있는 한식 반찬들, 거기에 술안주를 겸할 수 있는 일식들까지.

수태광은 자신의 앞에 놓인 갈비탕을 빤히 바라보다가 서서히 식탁 위를 꽉 채운 여러 음식들에게로 시야를 넓혀갔다.

식탁 위를 아무리 훑어도 끝이 없다.

단지 식탁이 크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식탁 크기도 크기지만 정말이지 음식이 너무나도 많았다.

새하얀 식탁 위에 마치 자수라도 놓은 것처럼 고운 자태를 뽐내는 형형색색의 음식들…….

“……이걸 전부 새아가 네가 전부 다 했다고?”

“예, 아버님.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살짝 힘을 쓴다고 좀 써보긴 했는데.”

“허허. 살짝 힘을 썼다라.”

김 관장의 애교 섞인 목소리에 수태광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그럼, 대체 온힘을 다해 요리를 한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가히 온 집안을 다 채우고도 남겠지.

“새아가가 손이 참 크구나.”

“식구들이 많아서 넉넉히 준비했습니다, 아버님.”

“잘했다, 잘했어! 수 씨 집안의 큰며느리가 될 터인데, 당연히 이 정도는 해줘야지! 아주 만족스럽구나.”

수재혁이 힐끗 김 관장을 바라본다.

허공에서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이 뿌듯하게 미소 짓는다.

“안 그래도 결혼 식을 올리기 전에 양가 어른들 찾아뵙고 꼭 식사 대접을 해드리고 싶었거든요. 오늘처럼 뜻깊은 날 의미있는 자리를 마련하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아버님.”

“껄껄껄! 며느리가 잘 들어오면 집안이 바로 선다더니. 그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잘 알겠구나.”

“이미 아버님이 훌륭하게 이뤄내신 가정이잖아요.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이 집에 누가 되지 않게 노력하는 모습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그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처럼 직접 식사를 대접하려는 것도 이번 한 번이면 족해. 그러니 너희만 행복하게 잘 살아주면 더없이 좋겠구나.”

어쩜 말 한마디를 해도 저리 예쁘게 하는지.

불같은 수태광인지라 그의 비위를 맞추는 게 다소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김 관장은 너무나도 그 역할을 잘 해내고 있었다.

‘내가 여자 보는 눈 하나는 역시 기가 막히다니까.’

수재혁의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사실상, 오늘의 행사도 김 관장이 먼저 주최한 것이지 않은가. 그녀의 세심한 배려에 꿀이 떨어지다 못해 흘러넘칠 수밖에.

식탁 앞에 아직 자리가 하나 비어있다.

오늘 행사의 주인공 중 한 명이었는데,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다며 아직 방에서 나오질 않은 상황.

수태광은 그녀를 기다리며 잠시 주변을 살폈다.

천천히 움직이는 그의 시선이 수재혁을 시작으로 막내 동혁이, 그리고 준우네 가족까지 모두 훑는다.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김 관장과 대화할 때처럼 마냥 행복에 젖어 있는 표정은 아니었다.

뭐랄까. 굉장히 복잡미묘한 느낌이랄까.

분명히 진심 어린 미소를 짓고 있기는 한데, 어딘가 모르게 씁쓸한 분위기다.

어렸을 적 아꼈던 잃어버린 물건을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되찾은 듯한.

‘그러고 보니, 이렇게 온 가족이 다 모여서 식사를 해본 적이 있었던가.’

비록 민혁이의 빈자리가 있었지만, 그를 제외하고도 이토록 많은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정말로 처음이지 않을까.

수태광이 문득 기억을 더듬어 본다.

자식들이 아주 어렸을 때를 제외하면, 어쩌면, 동혁이가 태어나고서부터는 온 가족이 함께 식사를 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황장미의 부재. 그리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결혼과 일, 유학 등으로 각자 제 할 일이 생기고, 항상 식사를 할 때면 몇 명씩은 빠졌던 것 같다.

모이지 않은 게 아니라 모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수태광 본인도 굳이 밥 한 끼 먹는데 가족들을 한자리에 모아놓는 것에 애쓰지도 않았고.

‘흐음. 뭐가 그리 중하다고…….’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훌륭한 가장이었나. 아니, 훌륭한 아버지였나.

‘섣불리 그리 대답해서는 안 되겠지.’

엑시스의 회장 수태광으로서는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다.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일이 우선이었고, 자신의 기업을 가꾸어 성장하는데 가장 미쳐 살았던 사람이니까.

하나.

이 집안의 가장으로서는 어떠한가?

엑시스 회장 수태광은 있어도.

아이들의 아버지인 수태광은 없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수태광의 입가에 번져 있던 미소가 쓴웃음으로 이어졌다. 괜스레 눈앞의 이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어서다.

‘가족. 가족이라.’

자신에게 가족이 가진 의미는 무엇일까.

이제야 은퇴를 앞두고 뒤늦게 그 의미를 찾아보려고 하니, 무척이나 어려운 질문이 되어 버렸다.

‘나도 이제 진짜 나이를 많이 먹기는 한 모양이야. 답지 않게 혼자서 이런 추태나 부리고 있다니, 쯧.’

수태광이 상념에 잠겨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팔라딘은 괜히 뜨끔했다.

‘설마, 나 때문인가?’

그건 아니지 않을까.

아버지께서 먼저 밥 먹고 가라고 하셨잖아?

‘분명히 오늘이 무슨 기념일이라고 그랬었던 것 같은데.’

수재혁이 그랬었다. 중요한 기념일이라고.

하지만 팔라딘은 도통 무슨 날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온 가족이 다 모일 만큼 중요한 날이라는 게 과연…….

“작은형.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온 거?”

그때였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동혁이가 불쑥 물었다.

“진짜 몰라? 오늘 아빠하고, 아빠 여자친구하고 결혼기념일이잖아.”

“뭐?”

결혼기념일이라니.

그것도 아버지의 여자친구와?

‘내가 폐관 수련하고 있을 때 재혼이라도 하셨다는 건가? 그렇다면, 아버지 옆의 저 빈자리는 당연히 새어머니의…….’

팔라딘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 바로 그 순간.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설마, 지금까지 나 기다린 거야? 에고고! 그냥 나 빼고 일단 식사들부터 하지!”

어머니?

왜 어머니가 거기서 나오십니까?

팔라딘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황장미를 바라보았다.

황장미는 짙은 화장은 물론, 선화가 직접 만들어준 붉은색 드레스까지 입은 채로 가족들 앞에 섰다.

말 그대로 풀세팅.

오늘을 이 자리를 위해 단단히 준비하느라 여태 시간이 걸린 모양이었다.

‘이혼하셨던 두 분이 사이도 그리 좋지 않으실 텐데, 왜 여기 함께 있는 거지?’

재결합.

팔라딘의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오른다.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그것이 현실로 일어난 것이다.

오늘은 수태광과 황장미의 결혼기념일.

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날이었다.

이미 다들 알고야 있겠지만 수태광과 황장미가 재결합을 하는 것을 가족들에게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날이랄까.

황장미는 다신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이 집에서의 식사를 너무나도 기념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바람을 다소 성대하게 이뤄준 것은 다름 아닌 수재혁과 김 관장이었다.

많은 의미가 담긴 오늘.

조금 과하긴 해도 황장미는 오늘을 평생의 추억으로 남기고 싶어 예쁜 드레스까지 차려입었다. 수태광 역시 세미 턱시도 같은 느낌의 의상이다.

‘마치, 소박한 결혼식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인데.’

두 분이 다시 함께하신다니 아들로써, 팔라딘으로써 축복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팔라딘은 잠시 두 눈을 감고 식탁 아래 두 손을 모은 채로 부모님의 축복을 바라는 기도를 올렸다.

그나저나.

“야.”

기도를 마친 팔라딘의 고개가 동혁이 쪽으로 삐딱하게 돌아간다.

“뭐.”

“여자친구라며?”

“여자친구 맞지. 틀린 말은 아니잖아?”

“너 때문에 갑자기 새어머니 생긴 줄 알고 깜짝 놀랬…….”

팔라딘이 말을 채 잇기 전이었다.

가족들에게 우아한 자태를 뽐내던 황장미의 시선이 오랜만에 마주하는 둘째 아들에게 꽂혔다.

“우리 정혁이는 못 본 새에 더 멋있어졌네.”

“감사합니다, 어머니.”

오늘 같은 날엔 형제자매님 호칭은 빼야겠다.

아무리 팔라딘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수정혁이라지만, 괜히 호칭 문제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엄마하고 아빠도 이제 재결합했고. 네 형도 곧 장가를 가고…….”

“…….”

“네 동생인 선화는 이미 결혼을 한 상태고.”

“…….”

“순번대로라면 정혁이 네 차례는 한참 지난 것 같은데.”

“어, 어머니…….”

“정혁이 넌 정말로 결혼 생각 없니? 지금처럼 한창 멋있을 때 해야 하지 않겠어?”

“저 팔라딘입니다. 성직자가 어찌 결혼을…….”

“크으으으음!”

수태광이 힐끗 노려보며 못마땅하다는 듯 신음을 흘린다.

왜 어머니가 갑자기 멋있어졌다고 칭찬을 하시나 했다.

‘결국 또 결혼 얘기라니. 내가 성직자라 안 된다고 그리 말씀드렸는데.’

매번 만날 때마다 같은 걸 물어보시고는 했으니까. 그리고 그때마다 팔라딘의 대답도 매번 똑같았다.

“그럼 연애는? 결혼까진 안 해도 돼. 요즘 결혼 안 하고도 잘들 사니까. 그래도 연애는 해야지. 언제까지 평생 모태 솔로로 살 생각이니?”

“저, 저, 모, 모태 솔로 아닙니다!”

팔라딘이 발끈하며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옆에 있던 동혁이가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젓는다.

“쯧쯧. 맞네, 맞아. 모태 솔로 맞네.”

피식 -

여기저기서 웃음소리들이 들려온다.

어느새 고민에 잠겨 짐짓 어두워졌던 수태광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잔뜩 어려있었다.

“수동혁, 너 이…….”

“성직자는 모태 솔로만 할 수 있는가 보다. 나는 여자친구 있으니까, 아무래도 성직자는 못 하겠네.”

“……누가 너 성직자 시켜준대?”

“그러니까. 안 한다고, 모. 태. 솔. 로.”

피식피식 새어 나오던 웃음들이 빵 터지는 순간이었다.

다들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즐겁게 반전됐다.

“자, 자. 다들 그만들 웃고. 이제 식사들 하자고.”

수태광의 말에 팔라딘도 분을 삭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오늘의 식사 자리가 어째 순탄하게만 흘러갈 것 같지만은 않다고.

***

‘분명히 달라졌다. 뭔가 내가 이 집에 있을 때와는 분위기 자체가 아예 달라.’

손으로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움직이면서도 눈으로는 주변을 살피는 데 여념이 없는 팔라딘이었다.

확실히 다르다.

그가 집을 떠나기 이전과 지금의 집은 분위기뿐만 아니라, 공기에서마저도 따스하게 느껴졌다.

‘이유가 뭘까. 온 가족이 다 함께 모여 있어서?’

사람이 많을수록 온기가 더해지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팔라딘이 생각하기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옛날을 떠올려보자.

불같은 성격의 아버지는 항상 어머니와 다툼을 하기에 바빴고, 자식들에게도 일과 훈련에 관한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딱히 대화 자체를 시도하지 않으셨다.

화목한 가정?

물론, 비루한 가정은 아니었지만 이처럼 온기가 느껴지는 집안은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의 형인 수재혁도 뭔가가 다르다.

그 말 수 없던 인간이 식사 자리에서 계속 주둥이를, 아니, 입을 쉬지 않고 떠들어대고 있지 않은가.

황장미와 동생들 역시 마찬가지.

집안엔 팔라딘이 여태 느끼지 못했던 온기가 너무나도 그득했다.

“아, 참! 매제. 저번에 자네가 소개해준 스튜디오 말인데.”

“어떠셨어요, 형님?”

“어떻기는. 덕분에 웨딩 촬영을 아주 만족스럽게 마쳤어. 내 인생 최고로 멋진 순간을 사진으로 남겼달까.”

“형님은 다 좋은데요. 가끔 너무 자아도취가 심하세요.”

“뭐, 뭣?”

“농담입니다, 농담. 아무튼, 무사히 촬영 잘 마치셨다니 다행이네요.”

“하하핫! 고마워. 전부 자네 덕분이야. 자, 한잔 받게.”

매제를 바라보는 수재혁의 눈빛을 보라.

한없이 따스하고 애정이 넘치지 않은가.

‘내가 저렇게 농담을 했어 봐라. 당장 욕부터 때려 박겠지.’

팔라딘이 수재혁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쳤다.

언제부터 저 인간이 저리도 자상했다고.

누가 보면 매제가 친동생인 줄 알겠네.

질투?

그런 건 아니다. 절대!

다만.

어렸을 때 항상 자신과는 치고, 박고 싸우며 자란 수재혁이었고, 성인이 돼서도 딱히 그 태도가 별반 다를 게 없는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수재혁이 매제의 농담에도 흔쾌히 웃어 넘기는 모습을 보아하니, 그냥 좀 얄밉다. 어딘가 모르게 엄청 얄밉다.

‘신이시여.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이 또한 시련이다.

질투와 시기, 그리고 미워하는 감정을 떨쳐내기 위한 신의 시련…….

아, 괜히 목이 타네.

팔라딘이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린다.

열심히 갈빗대를 뜯고 있는 게걸스런 동혁이의 모습이 보인다.

“야.”

“뭐.”

“가서 물 좀 가져와.”

“너가 가져다 드세요.”

“…….”

“난 예전의 수동혁이 아니야. 형 잔심부름이나 하는 꼬맹이 시절은 이미 지났다고. 각성을 한 어엿한 헌터로써 신성회의 팔라딘 정도는 내 주먹 한 방에 그냥!”

“야. 잔말 말고 물 가져와라.”

“싫다 했다.”

요것 봐라? 많이 컸다, 이거지?

팔라딘이 슬그머니 신성력을 끌어올린다.

동혁이가 각성했다는 소식은 대충 들었다.

등급이 꽤 높다지. 그 말이 사실인 듯, 팔라딘이 신성력으로 살짝 제압을 하려 했으나 동혁이 역시 마력을 끌어올려 저항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능력 차가 크다.

결국, 동혁이가 몸을 움찔거리며 꼬리를 내렸다.

“사람들이 불쌍하다.”

“뭔 소리야.”

“사람들은 형이 엄청 착한 성직자인 줄로만 알 거 아냐. 그런데, 이렇게 사람을 구박하고 심부름시키고 그러는 악마인 줄 알면 형도 팔라딘 인생 끝이야. 알어?”

“야, 이……!”

메롱 -

동혁이가 혓바닥을 길게 내밀고는 재빨리 자리를 떴다.

그래, 까짓거 내가 물 한 잔 정도는 떠다 주지.

그나저나 팔라딘이 됐어도 타고난 성질머리는 어디 안 가는구나.

툭 -

동혁이가 물 한잔을 팔라딘 앞에 내려놓았다.

흡족한 팔라딘이 품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간만에 이 집에 오는 건데, 빈손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나름 아버지 용돈과 동생들 용돈 정도는 챙겨왔다.

그래서 동혁이 몫으로 챙겨온 용돈을 주려고 그랬는데.

“허튼 데 쓰지 말고, 훈련할 때 필요한 거 있으면……응?”

동혁이가 또 한잔의 물을 가지고 매제 옆으로 달라붙는다.

팔라딘이 자신의 앞에 놓인 물과 매제의 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물 색깔이 다르다.

매제의 물에는 은은한 무언가가 들어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매형. 이거 드세요.”

“물?”

“꿀물이에요. 아무래도 오늘 술 많이 드실 거 같아서 제가 좀 준비를 했습죠, 헤헤헷.”

저건 또 뭔가.

저 간사하고 간악한 막냇동생이 저리도 애교가 많았다고?

또 다시 옛날을 떠올려보자.

한창 동혁이가 짓궂을 때, 동생의 온갖 장난을 다 받아줘야만 했던 것이 바로 팔라딘이었다.

화장실에 있으면 불 끄고 도망치기도 하고.

성서에 스케치북 마냥 그림을 그려놓기도 하고.

‘낮잠 자고 있을 때 느닷없이 와서 얼굴에 방귀를 뀌고 가지 않나…….’

팔라딘이 동혁이를 몰아붙이는 게 아니다.

애당초 시작은 저 악동이 먼저 했다.

그렇다고 똑같이 대응하는 게 우습기는 해도, 이런 게 바로 형제의 모습이지 않겠는가.

‘생각해보니, 내가 성직자가 되려 한다고 가장 먼저 아버지께 이른 것도 저 녀석이었지.’

성직자 수업을 마치고 출가하던 날.

동혁이가 해맑게 웃으며 했던 말이 떠오른다.

- 메롱! 가서 필라 신 똥꼬나 닦아라!

신이시여.

팔라딘이 다시금 식탁 아래로 양손을 모았다.

다시는 어린 동생과 티격태격하지 않으리라 다짐했거늘, 아직 수양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것 같았다.

“전 서방. 자네 퇴사하고 선화랑 여행 간다고 하지 않았나?”

“다음 주에 은퇴식하고 바로 떠날 예정입니다. 사실, 은퇴라고 하기에도 뭐 하지만 협회 측에서 굳이 비슷한 행사를 해준다고 하길래 거절하기가 좀 미안해서요.”

“그렇고말고. 당장 엑시스로 오고 싶은 자네 마음은 이해한다만, 그래도 이전 직장 사람들의 성의를 거절해선 안 되지.”

“그런데, 장인어른께서도 장모님이랑 여행 가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끄응! 계획을 짜 보려고는 하는데, 이게 영 쉬운 게 아니더군.”

“장인어른께서 직접 짜세요?”

“자네도 알다시피 자네 장모가 요즘 한창 바쁘지 않나. 그래서 내가 계획을 맡고 있기는 한데, 내가 뭐 여행 같은 걸 제대로 즐겨봤어야 알지. 일에 미쳐 살던 사람이 이런 걸 제대로 할 줄이나 알겠는가?”

“으음. 제가 대신 계획 짜드릴까요?”

“자네가?”

“유럽 여행 가신다고 하셨죠? 저희도 유럽으로 갈 거라, 저도 이번에 계획 짜면서 이것저것 많이 알아봤거든요. 큰 동선만 제가 짜드리고, 두 분이서 꼭 가고 싶은 곳들만 추가하는 형식으로 하면 될 것 같은데.”

“하, 하지만, 자네도 여행 준비하느라 바쁠 테고, 모처럼 선화랑 떠나는 여행인데 준비할 게 많지 않겠나?”

“에이. 장인어른.”

“음?”

“제가 누굽니까? 장인어른의 하나뿐인 사위 전준우 아닙니까. 장인어른께서 원하신다면, 하루 만에 여행 계획 짜고도 남죠.”

“껄껄껄! 하여튼! 전 서방 자넨 항상 날 즐겁게 해주는 구만 그래! 어찌 같은 말을 해도 이리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지!”

“다 장인어른의 보살핌 덕분 아니겠습니까! 헤헤헤헷!”

“껄껄껄껄!”

아버지와 매제의 대화를 듣고 있던 팔라딘은 기가 찼다.

자신의 아버지 역시 형과 마찬가지로 매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남다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리 수재혁이 매제를 애정 넘치게 바라본다고 한들 수태광의 눈빛에 미치지 못한다.

‘대, 대단해. 대단하다는 말 말고는 떠오르는 말이 없을 만큼…….’

아까 전.

곧 형과 결혼하게 될 형수님이 수태광에게 애교 공세를 펼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눈앞의 준우를 마주하고 있는 팔라딘은 깨달았다.

‘……형수님은 매제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또 하나 깨달은 게 있었다.

집안의 온기.

가족들의 태도가 따스하게 바뀐 이유.

그것을 이제야 알아차린 것이다.

‘매제다. 매제가 이 집안의 실세가 된 거다.’

매제라는 단 한 사람이 불러일으킨 바람이 거대한 태풍이 되어 집안의 삭막함을 송두리째 뽑아 날린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이 집에 살 때와 지금의 차이가 과연 무엇이 있겠는가? 형수님이 될 분이 계시지만 결혼 시점을 보아 아직 준우보다 한참 밑일 터.

‘가족들이 매제를 대하는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어. 이 집은 완전히 매제에게 장악된 거야.’

팔라딘의 시선이 준우의 옆으로 옮겨졌다.

접시에 놓인 잡채를 흡입하듯 입안으로 빨아들이고 있는 수린이의 모습이 보였다.

“히히힛.”

그리도 맛있을까.

수린이를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 드는 팔라딘이었다.

애당초 이 집에 온 첫 목적은 수린이였다.

수린이에게 전도를 하기 위해 매제와의 친분을 쌓기 위함이었지.

안타깝게도 공공의 적을 노린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아직 희망은 있었다. 매제와 친해지는 방법이 그것 하나밖에 없는 건 아닐 테니까.

‘저 무리에 나도 끼어야 매제와 친해질 기회라도 얻을 수 있을 텐데.’

세 남자 사이에 껴야만 한다.

자신들만의 영역에서 서로 술잔을 기울이며, 속 깊은 이야기까지 서슴없이 꺼내고 있는 그들이 아니던가.

수태광, 수재혁, 전준우.

수정혁의 시선이 천천히 세 남자를 훑어갔다.

서로 허물이 없어 보이는 저들 사이에 낄 수 있다면…….

내가 과연 저 자리에 낄 수 있을까.

어째 다가갈 수 없는 커다란 벽이 있는 느낌인데.

“뭘 그렇게 빤히 보고 있는 게야?”

그때, 수태광과 눈이 마주쳤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너도 한잔하려고?”

수태광이 불쑥 술잔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수재혁이 냅다 가로막는다.

“아버지. 저 녀석이 술을 입에 대기나 하겠습니까? 성직자다, 뭐다 해서 술 먹으면 안 된다고 기겁을 하겠지요.”

“이잉! 사내놈이 술 한잔도 입에 못 대서야. 그래서 사회생활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

“아버지 요즘 그렇게 말하시면 꼰대 소리 듣습니다.”

“꼰대면 뭐 어때! 이미 꼰대인 것을!”

팔라딘이 멋쩍은 듯 볼을 긁적였다.

직장이 신성회인데, 사회생활에 술이 필요할 일이 뭐가 있다고…….

살짝 취기가 오른 탓일까.

수태광도 못내 동떨어져 있는 둘째가 안쓰러웠는지, 재차 술잔을 들이밀었다.

“거기 있지 말고 너도 여기 가까이 와서 앉아라. 전 서방이 약주라고 좋은 술 가져왔는데, 약주 정도면 성직자라도 괜찮지 않겠느냐?”

“야, 약주도 술 아닙니까. 어찌 신성회의 성직자가 술을…….”

“이놈아! 약주는 아무리 마셔도 안 취해요! 필라 신인가, 뭔가도 약을 먹는 것이니 이해를 해주지 않겠느냐! 어찌 그렇게 융통성이 없어서야, 쯧쯧.”

안 취하다니.

이미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셨는데.

“약주도 술은 술입니다. 알코올 성분이 없는 것도 아니구요.”

“네가 뭘 알아? 술 한잔도 입에 안 대본 녀석이, 반 평생이 넘도록 술을 마셔온 나보다 더 잘 안다는 소리냐?”

“그, 그건 아니지만, 천국에 가기 전에 잠시 머무르는 육체라고는 하나, 이 역시 필라 신이 주신 것이기에 술과 같은 것으로 해롭게 할 수는…….”

“에이이잉! 됐다, 이놈아!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그, 그런 게 아니라…….”

수태광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간 멀어졌던 아들과 관계를 개선해보려고 나름 자존심을 내려놓고 권해본 것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술은 아니야.’

팔라딘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던 그때였다.

잡채가 그리도 맛있는지 몇 접시째를 비우던 수린이와 눈이 마주쳤다.

“쉿.”

수린이가 검지손가락을 입에 가져간다.

쓸데없는 말 좀 그만하라는 뜻일까.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난 수린이는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다가, 후다닥 팔라딘의 곁으로 달려갔다.

“작은삼촌.”

팔라딘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간 수린이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예전에 TV에서 봤는데 사람들끼리 가장 빠르게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이 술 먹는 거랬어요.”

“하, 하지만…….”

반박을 하려던 찰나.

팔라딘의 머릿속에 대회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필라 신께서는 애당초 자네를 그 아이에게 인도하려고 하셨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건 어린 조카가 하는 말이 아니다.

어쩌면 신의 대리자일지도 모르는 수린이가 신을 대신하여 자신에게 건네는 말일지도.

팔라딘의 귓가에 또 다시 신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저도 처음 유치원 갔을 때 친구들이랑 엄청 안 친했는데.”

“그, 그랬는데……요?”

“요구르트 한잔 씩 하면서 금방 친해졌거든요.”

“…….”

이것은 곧 술을 마셔도 좋다는 신의 허락 같은 걸까.

음주마저도 매제와 친해지기 위한 과정이고, 그 끝은 신의 말씀을 수린이에게 전하기 위함이니, 오늘만은 기꺼이 허락을 해주시겠다는…….

팔라딘이 세 남자가 있는 곳을 빤히 바라본다.

그리고는 무언가 결심한 듯 세 남자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혀, 형님?”

“매제. 나도 한 잔 주게.”

“괜찮으시겠습니까? 술은 한 번도 입에 대보신 적이 없다고 하셔서…….”

“신성력으로 취기를 날려버리면 되지 않겠는가.”

수태광이 못마땅한 듯 팔라딘을 노려본다.

그리고는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 비싼 약주를 마시고 뭐? 취기를 날려? 술 아깝게 그게 뭐하는 짓이야? 그럴 거면 이 비싼 술을 뭣하러 마셔? 차라리 바닥에 뿌려버리고 말지!”

“……매제. 한잔 주게.”

팔라딘의 단호한 의지였다.

준우는 할 수 없이 팔라딘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호오? 이 녀석 봐라?”

수재혁이 고깝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어째 수태광은 꽤 만족스러워 하는 눈치다.

쨍 -

네 남자의 술잔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동시에 목을 타고 술이 꼴딱꼴딱 넘어간다.

“어떠냐?”

수태광이 물었다.

“그냥 물 같습니다만.”

“크으! 이놈 봐라? 첫 술잔에 허세를 배웠구만 그래!”

“저, 정말입니다! 알코올 맛 같은 건 조금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냥 맹물 마시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구요.”

“그렇단 말이지?”

생전 처음 둘째 아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다.

수태광은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아들의 잔에 계속해서 술잔을 채웠다.

수재혁도 한잔, 수정혁도 한잔.

그리고 준우도 한잔, 수태광도 한잔…….

그렇게 주고받는 술잔이 셀 수 없이 오고 갔다.

몇 시간이나 흘러갔을까.

쿠웅!

팔라딘의 머리가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가장 먼저 술에 취해 나가떨어진 거다.

신기한 건 입은 여전히 살아있다는 점이랄까.

“아부지이이! 교회 나오시라니까요? 에? 내가! 엉? 이 신성회의 팔라딘이 천국! 천국으로 가게 해준다니까 그러네? 딸꾹!”

“이놈 이거 엄청 취했구만.”

“헤에에. 거짓말 아닙니돠아! 에에? 내가 팔롸딘이라고 팔롸딘! 아부지를 내가 천국으로 보내주게쑵니다! 에?”

“장인어른. 이거 패륜 아닙니까.”

“그냥 밖에 가져다 버릴까요, 아버지?”

“냅둬. 이제야 좀 아들 같고 보기 좋구만.”

세 남자는 쓰러진 팔라딘을 뒤로한 채 다시금 술잔을 부딪쳤다. 묘하게 세 남자는 다소 멀쩡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마력을 사용해서 취기를 날린 거야.’

동혁이는 그 이유를 정확히 캐치했다.

팔라딘이야 가장 먼저 빠르게 취하기 시작했으니 눈치를 못 챘겠지만, 동혁이는 이전부터 술자리 주변에 일렁이는 미약한 마력을 감지하고 있었으니까.

‘신성회의 팔라딘이 술을 먹고 뻗어버리니. 신이 이런 걸 보고 가만히 계시려는지 모르겠네.’

일부러 진탕 먹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진탕 먹인 게 맞다.

수태광이 아들 한번 쓰러뜨려 보겠다고.

“괘씸한 놈. 집 뛰쳐나갈 땐 언제고 이 애비한테 사과 한번 없이 고개를 빼꼼 내밀어?”

승기를 잡은 수태광이 흐뭇하게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의 명령을 따라 작전에 동조했던 수재혁과 준우가 그의 잔에 건배를 한다.

“오늘 아주 기분이 좋구만! 이게 다 전 서방 자네가 비싼 약주를 가져온 덕분이겠지! 기분도 좋은데, 이참에 한번 아버지라고 불러보지 그래?”

“어찌 제가 장인어른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아! 아들 같은 사위라고 하지 않았나! 술 기운이라도 빌려서 이럴 때 한번 불러보는 게지! 껄껄!”

“하하핫! 아버지!”

“껄껄껄껄! 듣기 좋구만!”

“아버지이이!”

“껄껄껄껄!”

“헤헤헤헤헷!”

술자리가 더욱더 무르익어 간다.

그리고 한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동혁이가 쓰러져 있는 팔라딘과 마귀(?)들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다 큰 어른들이 참……에휴!”

집안 꼴 잘도 돌아간다.

잘도 돌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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