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2화.공공의 적 (222/246)

◈ 공공의 적

성물에서 뿜어져 나왔던 눈부신 빛의 향연은 팔라딘에게 광명 그 자체였다.

빛을 쫓다 보면 이윽고 신에게 닿을 수 있을 것만 영광스러운 빛 말이다.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한 줄기의 빛.

팔라딘에게 희망을 선사한 수린이는 신의 대리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였다.

다른 이라면 모를까, 수린이의 능력을 눈앞에서 마주한 팔라딘은 어느새 수린교의 광신도가 되어 버린 상태였다.

“가아아앗! 더어어어어! 비트으으으으!”

“우와앗! 작은삼촌 이제 진짜 사이비 같아요!”

“고맙다, 아니…… 에라, 모르겠다! 갓 더 비트으으읏!”

이제는 알아서 수린이와 사이비 교주 놀이를 해주는 팔라딘이었다.

준우는 물론, 선화와 수재혁이 없음에도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춤사위를 펼쳤다.

어째 춤 실력이 제법 는 것 같기도 하고.

준우와 선화에겐 무척이나 좋은 일이었다. 부탁하지 않았음에도 수린이를 돌봐 주겠다고 나서는 팔라딘이 아니던가.

물론, 죄책감은 마음 한구석에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신의 성물을 복원하기 위한 일.

분명히 필라 신께서도 참회의 기도를 받아 주시리라.

그러니 지금은 오직 수린교에 몸을 맡긴 채 성물 복원에 힘써야만 한다. 몸과 마음을 다 바친 팔라딘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지 않도록.

“작은삼촌! 저를 믿습니까아?”

“믿습니다!”

“정말 믿습니까아아아!”

“믿습니다아아앗!”

갓 더 비트를 외치며 방방 뛰기를 일주일째.

부서진 성물이 완전히 복원을 마쳤다.

* * *

자그마치 성물을 복원하는 일이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만, 필라 신의 분신과도 같은 성물이기에 복원을 마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작 일주일만에 복원이 끝나다니. 대체 수린이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정말 신의 대리자인 드래곤이라도 된다는 건가?’

도저히 모르겠다.

만약 수린이가 드래곤이라면, 드래곤을 낳은 선화는 또 뭐가 된다는 건지.

욱신-

팔다리가 아려 온다.

수린이와 함께 갓 더 비트를 외치며 얼마나 격렬하게 몸을 흔들어 댔으면, 폐관 수련을 거듭해온 팔라딘의 팔다리에 근육통이 올 수 있는 건지.

‘일단, 성물부터 제 자리에 돌려놓자.’

수린이의 정체와 그 배경이 너무나도 궁금했으나, 당장 팔라딘에겐 끝마쳐야 할 일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신성회 본당.

신성회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거대하고 웅장한 대회당 안에 팔라딘이 들어섰다.

언제 사이비 교주 놀이를 했냐는 듯, 그 모습이 무색할 만큼 반듯하고 경건한 예복을 갖춰 입은 팔라딘이 기나긴 복도를 지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의 앞에 멈춰 섰다.

“신성회의 팔라딘. 임무를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흐뭇하게 팔라딘을 바라보던 누군가.

대회주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고생했네, 팔라딘. 자네가 신성회의 명예를 지켜냈어.”

“아닙니다. 신의 가호가 함께 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 이 모든 역시 신의 뜻이리라 믿습니다.”

“허허.”

얼마나 간절했는가.

또 얼마나 마음 졸였던가.

신성회의 상징인 성물을 되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쳐 가며 기도에만 몰두했던 대회주다.

자신의 명예도 명예지만, 성물을 되찾지 못한다면 신의 이름에도 먹칠을 하는 꼴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신성회 신도들의 비난과 원망을 받아 마땅한 일이었으며, 또한 오랜 신성회의 역사 속에 유일한 오점으로 남을 일이기도 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필라 신께서 인도하는 길만을 따랐을 뿐입니다. 대회주님의 기도가 신께 닿아, 그 길이 더욱 밝게 빛났습니다.”

팔라딘의 든든한 어깨.

대회주가 그간 막중한 책임감에 지쳐 있을 그의 어깨를 작게 다독여 주었다.

성물을 건네받은 대회주는 차분히 눈을 감았다.

팔라딘 역시 그를 따라 눈을 감고 자연스레 기도를 올렸다.

“팔라딘. 하나만 물어봐도 괜찮겠는가.”

“예, 대회주님.”

“예정된 복귀 시간보다 많은 시일이 걸렸네. 혹시 그 이유를 말해 줄 수 있겠나?”

“그, 그건…….”

팔라딘이 머뭇거렸다.

당연히 물어볼 것이라 생각했던 질문이긴 했지만, 아직 마땅한 대답을 정해 놓지 못한 상황이었다.

성물이 부서졌던 일에 대해선 숨기고 싶은 생각이 없다.

다만, 사이비 교주 놀이에 관한 일은 어찌해야 할까.

‘……대회주님 앞에서 거짓을 고할 수는 없는 노릇.’

결국, 모든 걸 사실대로 털어놓기로 했다.

성물이 부서졌던 일과 수린이의 도움을 받은 일까지 전부 다.

“그,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팔라딘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에 대회주가 눈을 부릅떴다. 사이비 교주 놀이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 역시 성물을 복원하기 위한 과정이었으니, 필라 신께서도 팔라딘의 노력을 미루어 이해해 주실 터.

대회주가 놀란 눈으로 목소리까지 떨어 대는 이유.

그것은 다름 아닌 수린이라는 존재 때문이었다.

“신성회의 성서와 옛 기록에도 성물을 복원하는 것은 오직 신의 대리자만이 가능하다고 나와 있거늘…….”

“저도 무척이나 놀랐습니다. 그 아이가 가진 기운이 제가 가진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정순한 것이더군요.”

“팔라딘 자네의 눈에 그리 보였다면 그런 것이겠지. 신성회의 가장 뛰어난 성기사의 눈을 속일 수는 없을 테니까.”

“복귀하면서 오랜 시간 고민을 거듭했지만, 해답에 도달하진 못했습니다. 어찌 그 아이가 그런 신성한 힘을 지닐 수 있는 것인지는…….”

“아닐세. 그게 아니야.”

“예?”

“어쩌면 필라 신께서는 자네에게 해답을 원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네.”

“그럼……?”

“성물이 부서진 것은 하나의 시련. 그러나 필라 신께서는 팔라딘 자네가 시련을 이겨 낼 수 있도록 길을 내 주셨네. 그리고 자네는 그 길을 따라 그 아이에게 인도받았지.”

“…….”

“자넨 그 아이를 통해 성물을 복원해 냈어. 또한, 그 아이의 곁에서 함께 하며 신의 뜻을 보다 가까운 곳에서 느낄 수 있었겠지. 그렇지 않나?”

팔라딘이 지난 일주일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면, 수린이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 자신의 능력 또한 발전을 이룬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는 했다.

그의 힘은 신성력.

신성력을 곧 필라 신의 전언.

팔라딘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신의 뜻을 헤아리기엔 아직도 너무나도 부족한 나이지만 말일세. 나는 지금 문득 그런 의문이 드네. 필라 신께서는 애당초 자네를 그 아이에게 인도하려고 하셨던 것이 아니었을까.”

“아!”

큰 깨달음을 얻은 것과도 같은 충격에 팔라딘의 동공이 확장됐다.

눈앞에 신의 대리자가 있었음에도 그 자체를 의심했었다니. 또한, 그런 존재에 감히 의문을 품었다니…….

“……팔라딘. 혹시 그 아이를, 아니, 그분을 만나 뵐 수 있겠는가?”

“대회주님께서 말입니까?”

“이 또한 신의 뜻이라면, 신의 말씀을 전하는 것도 우리의 숙명이 아니겠는가?”

“옳으신 말씀입니다만…….”

대회주의 말에 숨은 속뜻은 수린이에게 전도를 하겠다는 뜻이다. 딱히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종교를 강제적으로 권할 수는 없으나, 전도 정도는 시도해 볼 수 있는 일이니까.

너무 과하고 깊지만 않다면 성서에 관한 이야기쯤은 조금이나마 나눠 볼 수도 있는 일이다.

‘다른 분도 아니고 대회주님께서 직접 전도를 언급하신 적은 이번이 처음인데.’

그만큼 대회주 또한 수린이가 가진 의미에 대해 신성하게 생각하는 것일 터.

수린이가 신성회를 대표하는 대회주, 아니, 그 이상의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신성회가 품어야 할, 나아가, 신성회를 품을지도 모르는 인재.

대회주는 팔라딘의 어렸을 때 모습을 마주했을 때보다 한껏 더 기대에 차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충분히 그럴 만도 하지. 다른 것도 아니고 자그마치 성물을 복원했으니.’

팔라딘 또한 수린이의 능력을 의심치 않는다.

그저 능력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것으로는 신의 대리자라는 말도 과언이 아닌 존재다.

“자네가 난처하다면, 자네가 신성회 대회주인 나를 대신하여 그분께 말씀을 전해 보는 것이 어떠한가?”

“제가 어찌 감히 대회주님의 이름으로…….”

“가족이지 않나. 자네의 조카로서 모습을 드러내신 분이니, 나보다는 자네가 편하시지 않겠나?”

“흐음.”

전도가 가능하기나 할까?

팔라딘이 겪어 본 수린이는 천방지축 꼬맹이였다.

자칫 꼬맹이라는 표현도 죄악이 될지도 모르겠으나…….

‘……성서에 대해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전혀 이해 못 할 것 같단 말이지.’

어쨌거나 지금의 수린이는 어린아이다.

그리고 팔라딘은 아이를 다루는 데 능통하지 않았다.

수재혁이야 가끔 동혁이를 돌봐 주기라도 했지, 일찍 집을 나서 신성회 내에서 거주하게 된 팔라딘은 그 정도의 시간도 막냇동생과 함께하지 못했다.

특히나 동혁이가 수린이 또래의 나이였을 때는 밥 먹듯이 폐관 수련을 거듭하지 않았던가.

“강요는 하지 않겠네. 자네가 할 수 없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일 테니까.”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호오?”

“이 또한 신의 뜻이라면, 신의 말씀을 전하는 팔라딘이 응당 해내야만 하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허허허허!”

대회주가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팔라딘도 그의 앞에서 옅은 미소를 짓고 있긴 했으나, 사실 속마음은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수린이에게 신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지금으로써는 불가능에 가깝다. 필라 신의 말씀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

가까운 곳에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

앞서 직접 경험하지 않았던가. 잠들어 있던 수린이의 힘을 놀이 하나로 일깨운 준우라는 존재가 말이다.

‘매제라면 분명히 수린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날 대신해서 필라 신의 말씀을 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만.

마음이 불편한 이유가 하나 있다면.

‘매제랑 나의 관계가 어색하다는 것이 시련이 되겠군.’

그 하나의 이유가 가장 큰 문제였다.

수재혁처럼 매제와 가깝다면 자연스럽게 이야기라도 해 볼 법한데, 그게 아닌 이상 무턱대고 종교 이야기를 꺼내기가 매우 불편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무교인 대다수의 사람들은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마냥 달갑게만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족이라도 한들, 오히려 더 사이가 멀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자신의 아버지인 수태광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종교 이야기를 언급하는 순간 일단 언성을 높이고 소리부터 지르고는 했다. 뭐, 일찍이 가업을 마다하고 집을 나온 탓이기도 하겠지만…….

아무튼.

이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면 팔라딘으로서 어떻게든 해내야만 하는 일이다.

‘매제랑 친해질 수 있는 방법부터 생각해 봐야겠군.’

필라 신이시여.

이번에도 광명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다음 날.

새벽부터 대회당을 나선 팔라딘은 다시금 한국으로 향했다.

* * *

한국에 도착한 팔라딘은 자신의 주변에서 매제와 가장 친한 사람을 찾아갔다.

선화처럼 아내이기에 당연히 친할 수밖에 없는 사람 말고, 자신과 가장 비슷한 관계에 서 있는 한 사람.

“너 왜 한국에 있어? 성물 복원했으면 곧장 이탈리아로 돌아가야 할 거 아냐?”

“이탈리아엔 이미 다녀왔습니다, 형제님.”

“오, 그래? 이렇게나 빨리?”

“대회주님께서도 형제님께서 말씀하신 사업과 관련해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계십니다. 곧 검토를 마치신 후, 직접 형제님께 연락을 하실 거구요.”

“당연히 그래야지. 내가 신성회의 보물을 복원했는데.”

“허허. 말씀은 바로 하셔야지요. 성물은 형제님이 아닌 어린 자매님이 하시지 않았습니까.”

“어쨌든 내가 방법을 생각해 낸 거 아냐. 근데, 어린 자매님은 또 누구야?”

“누구겠습니까?”

“설마, 지금 수린이 말하는 거?”

그러자 팔라딘이 씩 웃는다.

수린이가 아니면 누구겠냐는 듯.

“이제 하다, 하다 조카까지 자매님이라고?”

“필라 신 아래 우리 모두는 형제자매이니 당연히 조카님도…….”

“형도 형이라고 못 부르고, 아버지도 아버지라고 못 부르고. 네가 무슨 홍길동이냐? 홍길동처럼 살려고 팔라딘이 된 거였어?”

“홍길동은 의적. 그렇다면, 그 말씀은 칭찬?”

“아니. 반역자라는 뜻.”

“…….”

“아무튼, 됐고. 대회주님께서 사업 계획에 대해 더 좋은 쪽으로 생각하실 수 있게 네가 옆에서 아양도 좀 떨고 그래. 너도 알다시피 이 사업이 개인이나 기업의 이익만을 위해서 하는 일은 아니라는 걸 알잖아?”

“그렇습니다. 모두 세계의 평화를 위한 일이지요.”

“그래. 너희 신성회가 추구하는 평화. 그러니까 너도 최대한 힘을 보태야 한다고. 나랑 계약했잖아. 사업에 대한 계약 말고 너랑 나랑 개인적인 계약.”

“맞습니다. 성물만 복원해 주신다면 수재혁 형제님의 뜻을 최대한 따르기로 하였지요.”

수재혁이 만족스럽게 웃는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겉옷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 어디 가십니까?”

아직 본론은 꺼내지도 못했는데?

매제와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을 물어보려 했지만, 서두가 길어지면서 타이밍을 놓쳐 버린 것이다.

“나 오늘 약속 있어. 아버지 댁에서 같이 식사하기로 했거든.”

“수태광 형제님 댁에서요? 오늘 무슨 기념일이라도 되는 겁니까? 수재혁 형제님이 언제부터 그리 효자셨다고…….”

“기념일은 기념일이지.”

“무슨 기념일인지?”

“넌 몰라도 돼. 말하자면 길어.”

손목의 시계를 확인한 수재혁이 걸음을 재촉했다.

아직 본론의 본 자도 꺼내 보지 못한 팔라딘은 그를 따라 집무실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자, 잠깐만!”

당황한 팔라딘이 복도로 뛰어나가 수재혁을 돌아 세웠다.

“아, 왜? 나 지금 바쁘다니까. 아버지랑 약속한 시간 거의 다 됐다고.”

“호, 혹시…….”

“혹시 뭐! 빨리 말해!”

“전준우 형제님도 오십니까? 그 식사 자리에?”

“몰라. 나랑 효정이가 개인적으로 마련한 자리라 다른 가족들한텐 연락 안 해 봤어.”

“흐음.”

“근데 퇴근하면서 매제한텐 연락해 보려고. 매제야 아버지 댁 근처에 사니까, 시간 되면 올 수도 있겠지.”

“그으래요?”

팔라딘의 눈빛이 번뜩였다.

마치 정말이지 광신교라도 된 듯, 수린이와 함께 갓 더 비트를 외칠 때의 그때처럼 말이다.

‘저 자식, 눈빛이 왜 저래? 진짜 사이비 같네.’

“어쨌거나 매제가 불편하지 않다면야 식사는 같이해도 상관없겠지. 그런데 매제는 왜?”

매제가 불편하다라.

그래, 그럴 만도 하지.

그렇다고 수재혁이 초대를 하는데 거절하긴 어려울 거고.

수재혁은 그저 준우가 시간이 될지, 안 될지 몰라서 ‘불편’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나, 안타깝게도 팔라딘은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을 해 버렸다.

‘그렇게 사위를 반대하시던 아버지셨으니, 매제가 아버지와의 식사 자리를 편하게 생각할 리가 없잖아?’

아이작을 체포하는 작전에서 수태광과 마주치지 않은 팔라딘이었다.

수태광은 인이어와 모니터를 통해 팔라딘의 모습을 보게 되었을지 몰라도, 팔라딘은 화물선 위의 임무가 끝나기 무섭게 전장을 떠났기 때문이다.

팔라딘의 임무가 화물선까지이기도 했었지만, 그보다는 당시 전투로 신성력을 모두 소진한 탓이기도 했다.

‘형과는 사이가 가까워졌을지는 몰라도, 아직 아버지하고는 그리 가깝지 않은 모양이군.’

수재혁과 수태광은 다르다.

수재혁의 성격이 그저 날카롭기만 하다면, 수태광은 모든 것을 태워 버릴 성난 화마와도 같다.

선화가 결혼할 때를 떠올려 보자.

자신의 딸은 물론, 사위까지 싸잡아 기억 속에서 태워 버리겠다는 발언까지 했던 수태광이 아니던가.

그건 단순한 노기가 아니었다.

딸에 대한 배신감과 능력 없는 사위에 대한 실망이 뒤섞인 미친 듯한 분노 그 이상의 감정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정말이지 집안이 풍비박산이 날 정도로 시끄러웠던 지난날의 재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가히 내가 엑시스 후계자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때보다 더 노하셨었지.’

뭐, 시간이 꽤 흘렀으니 당시보단 매제와 아버지의 사이가 나아지긴 했겠지.

하지만, 과연 그걸 ‘좋아졌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 정도는 아닐 거다. 수태광이 누군가.

세상 그 누구보다 성격이 불같은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던가.

폐관 수련을 거듭해 온 팔라딘이기에.

세상의 정보를 미처 아직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그이기에.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있지.’

그는 감히 판단했다.

진흙탕에서 함께 구른 전우애는 더욱 진득해질 수밖에 없는 법.

팔라딘 역시 준우와 같은 처지였다.

아버지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고 있는 한 사람이다.

‘매제 혼자서 아버지의 노기를 받아 내는 것보단, 내가 옆에서 함께 받아 주며 그 노기를 분산시킬 수 있다면? 나한테 조금이라도 고마워하지 않을까?’

혼날 때도 같이 혼나는 애들끼리 더 친해진다.

준우와 팔라딘 본인이 같은 처지이니, 그 과정을 통해서 관계는 발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수재혁 형제님!”

“아, 또 왜!”

어느새 복도 끝까지 멀어진 수재혁의 뒤를 팔라딘이 뒤쫓았다.

“혹시 저도 수태광 형제님 댁에 가도 되겠습니까?”

“……네가?”

“네.”

“……왜? 굳이?”

“예?”

“설마, 아버지 화가 다 풀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착각을 하고 있는 거라면 너 지금 엄청 큰 실수하는 거야. 너 그 집에 들어가자마자 곧장 불똥이 튈, 아니, 불구덩이에 처박힐 수도 있어.”

“불구덩이에 처박힌 대도 괜찮습니다. 그 구덩이 속을 함께 헤쳐 나갈 전우만 있다면 말이죠.”

“전우 같은 소리 하네. 미필 주제에.”

팔라딘은 용기를 냈다.

신의 가호가 함께 하는데 뭔들 못하겠는가.

‘그래, 전우란 그런 것이지. 함께 비슷한 난관들을 헤쳐 나가며, 동고동락하면서 점점 관계를 좋은 쪽으로 쌓아 가는…….’

따지고 보면, 공공의 적이 수태광인 셈.

목적이 같은 두 사람은 응당 가까워지기 마련이다.

‘너무 쉽잖아? 생각했던 것보다 매제와 금방 친해질 수 있겠어.’

팔라딘은 자신과 준우의 공공의 적이 존재하는 한 매제와의 거리를 빠르게 좁힐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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