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1화.수린교 (221/246)

◈ 수린교

온기가 가득한 따뜻한 거실.

소파 앞의 팔라딘은 경건한 자세로 기도에 집중했다.

‘필라 신이시여. 부디 제게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낼 힘과 지혜를 주소서.’

신은 단 한 번도 자신에게 견뎌 내지 못할 시련을 준 적이 없었다. 이 또한 신이 팔라딘인 자신을 믿고 있기에 내린 시련이라고 생각했다.

‘신성회의 성물을 희생해서까지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신 것을 보면, 필히 더 큰 뜻이 있을 것이라 믿사옵니다.’

시련을 이겨내면 더욱 견고해지기 마련.

이번 시련도 신께서 의도한 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수양이 부족하니, 굳건하게 이겨내어 더욱 단단한 마음으로 신도들을 자신에게 이끌 수 있는 힘을 갖게 하시려는…….

“형님. 근데, 계약서는 쓰신 겁니까? 거래 조건이 이것저것 많아서 잘 살펴보셔야 할 텐데.”

“아직 못 썼지.”

“예? 왜요?”

“저 자식, 아니, 팔라딘이 일단 성물 복원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던데.”

……기도하던 팔라딘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 왔다.

부엌 쪽에서 들려오는 두 남자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는 준우와 수재혁의 목소리가 연달아 들려왔지만, 팔라딘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기도를 이어갔다.

‘성물이 가진 의미는 신성회가 지닌 관념과 정체성을 총괄한다. 그런 성물을 파손시키면서까지 필라 신께서 내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히 세상을 관통하는 그 어떤 의미와 연관된…….’

팔라딘의 눈가가 다시금 떨려 왔다.

부엌에서의 목소리가 이전보다 더 크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매제. 근데 아까부터 계속 뭘 그렇게 보고 있나? 그러다 핸드폰에 빨려 들어가겠네.”

“홈쇼핑이요. 그냥 이것저것 보고 있어요. 가끔 홈쇼핑 같은 데서 괜찮은 것들이 싸게 나오곤 하거든요.”

“그래?”

“저번엔 갈비탕 패키지로 싸게 팔길래 샀는데, 선화가 엄청 맛있다고 좋아하더라구요. 그래서 이번에도 괜찮은 게 있나 보고 있는 거죠.”

“갈비탕? 우리 효정이도 갈비탕 엄청 좋아하는데.”

두 남자의 잡담에 도무지 기도에 집중이 되질 않았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이 흐트러지는 것을 보면, 역시나 아직 마음의 수양이 부족한 것이겠지.

“오! 마침 여기 저번에 그 갈비탕 방송하네요.”

“혹시 그거 주문 좀 해 줄 수 있겠나? 돈은 내가 줄 테니…….”

“형님.”

“……응?”

“설마, 여태 살면서 홈쇼핑 한 번도 안 해 보신 건 아니죠?”

“내, 내가 이런 걸 해 볼 시간이 어디 있나! 업무가 많아서 TV나 그런 거 볼 시간도 없는데.”

“하는 방법은 알고 계시구요?”

“…….”

“혹시나 했는데 진짜 모르시네. 와아! 어떻게 홈쇼핑하는 법을 모르실 수가 있지?”

“그, 그냥 말만 하면 죄다 비서들이 알아서 해 주다 보니까…….”

“형님. 이거 아주 심각한 겁니다. 곧 유부남이 되실 분이 홈쇼핑 하나도 제대로 못 하는 건 아주 큰 죄악이라구요.”

‘죄악?’

진짜 죄악이 뭔지 모르는 건가.

팔라딘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두 남자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죄악이라. 유부남에겐 그게 그리 큰 죄가 된단 말인가?”

“형님. 아내가 할 줄 아는 일은 남편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홈쇼핑도 따지고 보면 엄연히 집안일의 일종인데, 나 몰라라 하시려구요?”

“그, 그런 건 아니지만, 홈쇼핑을 집안일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 않나? 보통 여자들은 홈쇼핑에서 명품 가방이나 옷을 사는 용도로만 쓴다고 들었는…….”

“허? 위험한 발언 하시네. 형님. 결혼하시면 아주 만약에라도 그런 소리 절대 입에 담지 마세요. 스스로 제 무덤 파는 발언입니다, 그거.”

“뭘 무덤까지야.”

“제가 그 말 이따가 선화 오면 그대로 해 볼까요?”

“……아니.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방금 딱 이해했네. 아무튼, 이참에 홈쇼핑하는 법 좀 알려 주지 그래? 나도 엄연히 가장으로서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키야! 내가 진짜 이거 아무나 안 알려 주는 건데, 특별히 형님이시니까 알려 드리는 겁니다.”

“고맙네. 내가 꼭 나중에 이 은혜는 갚도록 하지.”

팔라딘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홈쇼핑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딱히 어렵지도 않은 걸…….’

생색내면서 알려 주는 준우나, 그걸 감명 깊게 받아들이는 수재혁이나 기가 차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마치 얼간이들의 대화 같던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팔라딘이 마냥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 단 하나 있었다.

‘그나저나, 둘이 언제 저렇게 가까워진 거지?’

폐관 수련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한 조합이다.

준우와 선화의 결혼을 찬성했던 수재혁이라고는 하나 딱 그뿐. 여동생의 남편, 수재혁에 준우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데, 오늘 본 두 사람은 친형제 같은 모습이었다.

과장 조금 섞자면 친구 사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가까워 보였다.

‘비록 가족일지라도 자신과 맞지 않은 사람에겐 쉬이 정을 주지 않는 사람인데…….’

자신의 형은 절대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갈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상대가 다가온다고 무조건 받아들일 사람도 아니었다.

‘폐관 수련하고 있던 시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놀라운 건 두 사람의 관계만이 아니다.

진짜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이 집에 신의 대리자가 존재한다라. 과연?’

이곳은 준우의 집.

전 세계 모든 신성회 신도들이 말하길, 가장 얼굴 보기 어렵다는 팔라딘이다.

대회주들이야 예배라도 진행하지만, 팔라딘은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팔라딘이 바로 이 집 소파 앞에 앉아 있는 중이다. 폐관 수련 중 갑자기 태어난 여동생의 딸, 그러니까 자신의 조카를 보기 위해서 말이다.

수재혁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이미 앞서 대화를 통해 거래에 관한 것들은 익히 들었으니까.

하나.

그 모든 것은 성물 복원이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이뤄지는 것.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신이시여. 이것이 과연 당신이 인도하려는 길과 맞는 것이나이까.’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성서와 신성회의 모든 역사적 기록을 살펴본 결과.

성물 복원은 신의 대리자라는 특별한 존재만이 가능하다고 나와 있다.

- 우리 조카님이 해결해 줄 거다. 그러니까, 넌 계약서에 싸인만 하면 된다니까?

수재혁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면, 여동생인 선화가 무슨 신의 대리자를 잉태하여 낳았다는 말이지 않은가?

하지만 팔라딘은 이 집에 올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간절했기에,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걸어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대로 신성회로 복귀할 수는 없다.

신성회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팔라딘이 부서진 성물을 갖고 돌아갈 수는 없지.

‘내가 직접 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는다.’

팔라딘은 잠자코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띠띠띠띠-

‘왔다!’

드디어 그때가 다가왔다.

팔라딘의 귓가에 현관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유치원에서 하교한 수린이가 엄마와 함께 귀가함을 알리는 소리였다.

* * *

수린이는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다.

유치원에서 배운 대로, 엄마 아빠에게 배운 대로, 집에 돌아오면 항상 손발부터 깨끗하게 씻는다.

오늘 유치원에서 배운 동요를 흥얼거리며 씻고 있는 수린이의 등 뒤로.

‘정말이지 귀엽게 생긴 아이구나.’

아주 평범해 보이는 조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팔라딘은 만감이 교차했다.

생전 처음 보는 조카다.

폐관 수련 기간에 태어났다고 하기엔 그보다는 좀 더 큰 아이였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그보다는 총기가 가득한 아이의 눈빛과 요정과도 같은 외모에 한 번 더 놀랐다.

‘선화를 쏙 빼닮았어.’

황장미의 미모를 물려받은 선화고, 그런 선화의 미모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듯한 조카였다. 당연히 미모야 빼어날 수밖에.

뭐, 폴리모프 능력의 힘을 빌리기는 했어도.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팔라딘은 수린이에게서 조카 이상의 느낌은 받지 못했다. 너무나도 어여쁜 조카임엔 분명하나, 신의 대리자는 아니라는 판단이랄까.

‘비범해 보이는 아이 같기는 해도, 신의 대리자라고 하기엔…….’

기준이 신의 대리자라면.

가히 평범한 아이의 모습이었다.

“우리 수린이가 낯을 좀 가려서.”

“괜찮습니다, 수선화 자매님.”

“나, 나는 무교인데…….”

선화가 어색하게 웃으며 씻고 나온 수린이의 손발에 묻은 물기를 닦아 냈다.

엄마의 옆에 찰싹 달라붙은 수린이는 살짝 경계하듯 눈앞의 팔라딘을 흘겨보았다.

경계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린 수린이의 눈에는 경건함이 넘쳐흐르는 예복을 입고 있는 팔라딘의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옷 좀 멀쩡하게 입고 오라고 했잖아.”

수재혁이 툭 던지듯이 말했다.

팔라딘이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연다.

“어쩌면 신의 대리자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자리입니다. 어찌 신의 뜻을 전하는 팔라딘으로서 평범한 옷차림으로 이곳에 올 수 있겠습니까.”

“애가 경계를 하잖아, 경계를! 그러다 우리 조카님이 놀라서 울면 네가 책임질 거냐?”

“형제님. 아까 전준우 형제님을 대할 때만큼 제게도 자상한 목소리로 말씀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그게 가능하겠냐? 하다못해 매제도 나한테 형님이라고 부르는데, 정작 친동생이라는 놈은…… 에휴, 됐다.”

“……신이시여.”

준우가 수재혁의 옷깃을 살짝 잡아끌었다.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일단 참으라는 뜻이다.

중요한 사업이 연관된 일이지 않은가.

“내가 매제 얼굴 봐서 참는다.”

팔라딘이 여전히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같았으면 점잖은 말투로나마 뭐라고 한 마디를 건넸을 테지만 오늘은 애써 참아 냈다. 처음으로 조카를 마주하는 자리가 아니던가.

눈앞의 조카를 응시한 팔라딘은 씩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까 첫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워낙에 낯을 가리는 수린이었던지라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수린이라고 했지? 만나서 반가워.”

“아, 아, 안녕하세요.”

평소의 수린이답지 않게 말을 더듬는다.

수재혁의 말마따나 평범하지 않은 팔라딘의 옷차림이 정말로 문제일까.

“삼촌이 수린이 주려고 선물 이것저것 사 왔는데…….”

팔라딘이 준비해 온 선물들을 꺼내려 하자.

움찔-

수린이가 뒷걸음질을 친다.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다. 게다가 정말로 옷이 문제인지, 지금껏 봐 왔던 자들과 다른 느낌이라 경계심이 좀처럼 줄질 않았다.

“선물을 주려고…….”

팔라딘이 조심스레 수린이에게로 다가간다.

움찔-

한 걸음 다가가면, 수린이가 한 걸음 물러난다.

그 말 많은 아이가 오늘따라 조용한 걸 보면 유난히 팔라딘이 껄끄럽긴 한 모양이었다.

“내가 무섭게 생겼나?”

“야, 네 등치를 봐라. 안 무섭게 생겼나. 등치도 큰 게 귀신처럼 예복 늘어뜨려서 입고 있으니까 당연히 애가 무서워하지.”

“…….”

수재혁이 잔소리를 퍼붓던 그때였다.

수린이가 선화의 뒤에 살짝 숨은 채 고개만 빼꼼 내민다.

그리고는 조심스런 목소리로 묻는다.

“……작은삼촌. 태동교에요?”

“응? 태동교?”

“그, 그거 이짜나요. ‘갓 더 비트!’ 하는 거.”

“갓 더 비트……?”

그게 뭘까.

힙합 음악이랑 관련된 뭐 그런 건가.

수린이의 표정을 보아하니 여태 심하게 낯을 가린 태도랑 관련이 있는 듯한데…….

‘갓 더 비트? 왠지 낯이 익어.’

선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지만, 좀처럼 생각이 나질 않는다.

“아니에요? 손가락 요렇게, 요렇게 하고…….”

답답한 듯 수린이가 두 손을 쭉 내밀어 모양을 만든다.

손가락을 죄다 접은 상태에서 새끼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을 살며시 펴고.

“갓 더 비트! 갓 더 비트! 갓 더어어어 비트으으으!”

모양을 만든 손을 하늘 높이 찌르며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무슨 클럽에 온 것처럼 신명나게 뛰어댔다.

“뭐, 뭐지?”

“갓 더어어어어어…….”

팔라딘이 이해를 못 하자, 수린이가 좀 더 설명을 극대화하려는 듯 춤사위(?)를 좀 더 격하게 이어 가던 찰나.

“……비트으으읏…… 으읍!”

선화가 다급하게 수린이의 입을 막았다.

흥분한 수린이를 달래며 애써 몸부림을 잠재운 선화는 팔라딘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 아무것도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수린이가 가끔 신이 나면 춤추는 버릇 같은 게 있어서 그런 거니까…….”

“잠깐만. 아까 태동교라고 했었지?”

순간, 팔라딘이 눈을 게슴츠레 뜬다.

생각을 거듭한 결과 어디서 들었는지 떠오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태동교라, 태동교…….”

“수, 수린이가 그냥 아무 말이나 막 한 거라니까!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생각났다, 태동교. 사이비 종교!”

팔라딘의 조금씩 구겨지던 그때.

수린이가 입을 막고 있던 선화의 손을 떼어 내며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맞죠? 태동교! 갓 더 비트? 나쁜 사람?”

“수, 수린아! 저 사람 작은삼촌이라니까? 절대 나쁜 사람 아니야.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아닌데? 옷 입은 게 TV에서 본 태동교 그 아저씨랑 비슷한데?”

“진짜라니까. 엄마가 언제 수린이한테 거짓말하는 거 봤어?”

모녀의 대화를 듣던 팔라딘이 헛웃음을 쳤다.

태동교라니. 몇 년 전에 체포당한 사이비 교주가 이끌던 종교였다.

잡혀 들어가는 그 와중에도 ‘갓 더 비트!’라는 말 같지도 않은 주문을 외면서.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사이비 종교 중에 태동교라. 사이비 중에서도 가장 저급하기로 소문난, 감히 사이비 축에도 끼기 아까울 정도의 태동교라니…….”

“헤헤. 너무 흥분하지 마, 오빠. 얼마 전에 수린이랑 같이 우연히 다큐멘터리를 같이 봤었거든. 거기 막 사이비 교주가 사람 홀리고 뭐 그런 거 나와서 그래.”

“그, 그래도 그렇지, 신성회의 팔라딘을 어떻게 사이비로!”

“수린이 옆에 재워 두고 TV 보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는 새에 깨서 보고 있더라구.”

“이건 명백한 신성 모독인데! 하아…….”

마음 같아서는 절대 아니라고 변명을 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애써 참아냈다. 상대가 아이이지 않은가.

게다가, 아이들은 상상력이 좋다.

괜히 사이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다, 되려 사이비 이미지가 더 굳어질 수도 있었다.

“진짜 아니죠, 작은삼촌?”

“아, 아니야! 나는 신성회의 팔라딘으로서 그런 저급한 사이비 종교하고는 차원이 다르다고!”

“아까 갓 더 비트 했을 때, 몸 흔드는 거 같았는데!”

“그, 그건, 흥분해서 나도 모르게 몸을 떤 거고!”

“흠. 아무리 생각해도 옷이 너무 비슷…… 으읍!”

선화가 수린이의 입을 재차 막았다.

여기서 더 하면 이것도 나름 신성 모독이다.

아무리 인자한 팔라딘이라도 인내심이 있기 마련.

‘대충 빨리 상황 마무리 짓는 편이 좋겠어.’

“작은오빠? 꼭 대화가 필요한 일이 아니면, 용건만 그냥 간단히 하는 게 낫지 않겠어? 뭐 고치기만 하면 되는 거라며?”

선화가 서둘러 묻자 팔라딘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썩 좋지는 않지만, 아이니까 오해는 할 수 있는 법.

“맞아요, 형님! 지금 중요한 건 성물 복원이잖아요. 수린이 말에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애들 보면 TV에서 나온 거 따라 하고 그러곤 하잖아요. 선화 말 대로 별거 아닙니다, 진짜!”

“그래, 정혁아. 너무 그렇게 꿍해 있지 마. 다 큰 어른이 애가 한 소리에 그렇게 표정을 굳히면 쓰겠냐?”

수재혁과 준우도 나서서 팔라딘을 달랬다.

침착하게 마음을 다스린 팔라딘이 애써 다시 미소를 띤다.

그래, 굳이 계속 사이비를 언급해서 좋을 게 없지.

사실이 그렇지 않으니까 그거면 된 거다.

‘성물의 복원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중요한 건 그거지.’

팔라딘이 준비해 온 은빛 상자를 가져왔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성물을 꺼내기 위해, 그가 잠시 신을 위한 의식을 행하는 사이.

“형님. 확실히 수린이가 할 수 있는 거 맞죠?”

“맞다니까. 분명 성서에 그렇게 나와 있었대.”

“하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만약?”

“수린이는 아직 어려요. 가진 재능이 특별하다고 한들, 아직 그 능력이 절정에 이르지 못했죠.”

“그래서?”

“수린이한테 성물을 복원할 힘이 있다고 쳐요. 그런데, 아직 성장기라 그 힘이 미처 성물을 복원할 정도까진 안 되는 거면요?”

“어…… 음…….”

“차후에 가능하다는 걸 당장 증명할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 할 텐데, 그것마저 없다면 형님이 저번에 말씀하셨던 대로 말짱 꽝인데요?”

“그, 그렇긴 하지.”

준우와 대화를 하던 수재혁의 얼굴에 불안이 드리웠다.

자신만만하게 팔라딘을 이 집으로 끌고 오긴 했으나, 정작 때가 되니 긴장이 되는 것이다.

엑시스 회장이 될 자신이 처음으로 그려 낸 사업이다.

그 사업의 시작은 성물의 복원이었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지금껏 그려 온 모든 그림은 무용지물이 된다.

“수정혁.”

“예. 말씀하시지요, 수재혁 형제님.”

“네가 보기엔 어때? 수린이가 성물을 복원할 수 있을 것 같아? 뭔가 느낀 게 있을 게 아냐.”

“흐음.”

낮게 신음한 팔라딘이 고개를 내저었다.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뜻이었다.

“신성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본디 신의 대리자라면 최소한 신성회 대회주급의 신성력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전혀 안 느껴진다고? 아예? 요만큼도?”

“그렇습니다.”

“그, 그럴 리가 없는데.”

“마력과는 전혀 다른 힘인 신성력입니다. 짙은 마력의 흐름이 전해져 오긴 하나, 신성력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기질입니다.”

낭패다.

수재혁의 얼굴의 드리운 불안감이 더욱 어둡게 자리했다.

“그래도 확인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수재혁 형제님께서 필히 뭔가를 느끼셨으니, ‘무조건’ 가능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겠습니까?”

“내가 언제 무조건 가능하다고 했다고…….”

“분명 제가 필라 신의 이름으로 수재혁 형제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릴 때, 그리 말씀하셨었습니다. 설마, 아니라고 하실 겁니까? 그 또한 따지고 보면 신성 모독이 될 수도 있을 텐데요?”

“별게 다 신성 모독이다.”

팔라딘이 매섭게 수재혁을 노려본다.

성물 복원이 안 되면 워 해머로 후려치기라도 할 기세다.

‘아까 수린이가 사이비 종교라고 한 거 때문인가. 예나 지금이나 뒤끝은 여전하네, 이 자식.’

수재혁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좀 억울했다.

수린이가 조카이긴 해도, 준우 딸이니 뭐라 할 거면 준우한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쓰읍. 그래도 팔라딘을 이 집으로 데려온 건 나니까, 내 잘못이라고 해야 되나?’

수재혁이 멋쩍음에 볼을 긁적이던 그때.

팔라딘이 은빛 상자에서 성물을 꺼냈다.

“수린아. 이것 좀 잠깐 들고 있어 주겠니?”

“갓 더 비…….”

“그건 이제 그만하고.”

“넵!”

수린이가 금이 간 성물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성물엔 그 어떠한 징후도 발현되지 않았다.

“……역시나.”

팔라딘이 등을 돌려 수재혁을 노려본다.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간절하여, 그의 말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자신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대회주까지 외면하면서 이곳에 왔거늘.

“분명히. 제게. 무조건. 복원이 가능하다고 하셨었지요?”

“아…… 음…… 그게…….”

“그리 말씀하시면서 필라 신의 이름으로 함께 기도까지 했었습니다. 기억하시지요?”

“진짜 기도한 건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신성 모독입니다. 신성 모독!”

수재혁으로서도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분명 성서에 드래곤이 성물 복원이 가능하다고 되어 있었고, 그렇기에 수재혁도 당연히 수린이를 찾아온 것이었다.

수린이의 능력을 믿기에 자신만만하게 필라 신의 이름을 걸고 기도까지 한 것이고 말이다.

“사람이 실수를 할 수도 있지. 너무 과하게 몰아붙이는 거 아냐? 그래도 내가 나름 네 형인데, 연장자한테 이렇게 언성을 높이는 건…….”

“성물은 신성회의 보물이자, 필라 신의 분신과도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저와 형제님이 피가 섞인 가족이라고 한들, 그런 성물을 내걸고 이런 장난을 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습니다!”

“장난 아니었어! 진심이었다고…… 매, 매제.”

애처로운 수재혁의 손이 준우의 옷깃을 잡아당긴다.

뭐라도 좋으니 눈앞에 있는 거구의 팔라딘을 어떻게 좀 해 보라는 뜻이었다.

단순히 힘으로 상대해도 수재혁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한데, 계속 저리 분노케 두면 정말이지 워 해머라도 꺼낼 것 같은 기세지 않은가.

“제 생각엔 될 것도 같은데요.”

준우가 형제 사이를 가로막으며 앞으로 나섰다.

“될 거 같다고?”

“뭐가? 성물 복원이?”

형제의 시선이 일제히 준우를 향했다.

고개를 끄덕인 준우가 성큼성큼 수린이에게로 다가가 장난스레 말을 건넸다.

“수린아. 우리 놀이 하나 해 볼까?”

“놀이?”

“사이비 교주 놀이. TV에서 봤던 것처럼.”

애들은 애들 다루는 방식이 따로 있다.

아무리 어려도 생각이라는 게 있는데 무작정 시킨다고 되겠는가, 그게.

따라서 아직 ‘애’인 수린이의 능력도 끌어내려면 그만한 방법이 필요하다는 거다.

딱히 특별한 상황도 아닌데, 아직 힘을 통제할 수 없는 수린이가 그걸 발현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수린이가 힘을 사용할 법한 상황을 만들어 주는 거지.’

“어때, 수린아? 교주 놀이 해 보는 거?”

“교주 놀이 어떻게 하는 건데?”

“TV에서 수린이가 본 대로 하면 돼. 그때 그 태동교 교주처럼 성물을 손에 쥐고 교주의 힘을 불어넣는 거지! 쏴아아아아! 이렇게 하면서! 하늘의 기운을 죄다 밀어 넣듯이!”

“그럼, 아빠가 옆에서 갓 더 비트 해 주는 거야?”

“당연하지! 아빠가 신도 역할 해 줄게!”

“엄마도? 삼촌도?”

“…….”

“…….”

“왜? 엄마랑 삼촌은 안 해 줄 거야? 놀이는 다 같이 해야지, 혼자 하면 재미없어.”

갓 더 비트?

그거라면 아까 수린이가 이상한 손 모양을 하고서 춤사위를 펼치던 바로 그것?

“나, 난 못해. 내가 이 나이에 그런 걸 어떻게 해!”

수재혁이 냅다 소리쳤다.

왜 쓸데없이 다 말라 가던 불씨에 다시 불을 지펴 가지고.

그의 원망 섞인 눈빛이 준우를 향했다.

“딱 한 번만 해 봅시다, 형님. 제가 진짜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아서 그래요.”

“말이 되는 소리를…….”

“성물 복원해야죠. 그래야 형님께도 좋은 거 아닙니까?”

“그, 그래도 갓 더 비트는 좀…….”

“형님. 진중하게 생각하세요. 세계의 평화와 엑시스의 미래가 걸려 있는 사업입니다. 순간의 민망함만 지나가면, 희망이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라구요.”

준우의 표정이 너무나도 근엄하고 비장하다.

마치 진짜로 사이비 종교의 신도라도 된 것처럼.

“그럼, 시작한다?”

“잠깐만. 시끄러울지도 모르니까, 차원문 내부로 들어가서 하자.”

고개를 끄덕인 수린이가 차원문 안에 자리를 잡는다.

준우를 비롯한 가족들이 수린이의 손에 성물이 살포시 쥐는 것을 바라본다. 수린이가 차분히 두 눈을 감고 기운을 불어넣는다.

기운을 끌어모으던 수린이가 감았던 눈을 살며시 치켜뜬다.

문득 뭔가 못마땅한 표정이다.

“왜 갓 더 비트 안 해!”

수린이의 일갈에 아차 싶은 준우가 기이한 손 모양을 만들며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이 사달을 만든 장본인답게 솔선수범하려는 것이다.

“갓 더 비트! 갓 더 비트으으!”

“엄마도! 삼촌도!”

“갓 더 비트으으! 차원문 내부라서 망정이지! 집안에서 이랬으면 층간소음으로 아랫집에서 쫓아왔겠네.”

“어차피 곧 새집으로 이사 갈 거잖아! 이사 가면 괜찮아, 엄마!”

“아, 진짜 애 키우기 힘드네! 갓 더 비트으으으!”

“헤헷! 삼촌이 저번에 그랬는데? 결혼하고 애기 낳으면 저 같은 딸 낳고 싶다고?”

“매제 닮은 아들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팔라딘은 어떤 표정도 짓지 못했다.

막상 처음 교주 놀이라는 걸 들었을 땐 우습기라도 했는데, 지금은 너무 기가 차서 말조차 나오지도 않았다.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보라.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갓 더어어어어!”

“비트으으으으읏!”

흡사 진짜 사이비 집단 같다.

그것도 코앞에 신성회 팔라딘을 두고 이런 미친 짓이라니.

이것은 신성 모독을 넘어 신성회 전체를 유린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행위였다.

“다들 정신이 나간 거야? 사이비 교주 놀이? 저런 걸로 성물을 반응하게 만든다는 것이 가당키나 하는 소리…… 응?”

말을 잇던 팔라딘이 멍하니 눈을 껌뻑인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 놀란 표정으로.

“이, 이게, 뭐야? 된다고?”

수린이가 쥔 성물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성물의 금이 간 부분에서 신성한 빛이 계속해서 새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말도 안 돼!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

당황한 팔라딘이 당황하여 허둥지둥했다.

놀라운 건 둘째치고, 처음 보는 기이한 광경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신성회 어떤 기록에서도 성물이 먼저 누군가에게 반응을 한다는 대목은 보지 못했었는데.

설마, 성물이 진짜 신의 대리자를 알아보기라도 했단 뜻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게 아니고서야 성물의 부서진 부분이 서서히 복원이 되어 갈 리가 없지 않은가?

성물이 복원되고 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사실 하나만은 확실하다.

털썩-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팔라딘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두 손을 모으고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전능하신 필라 신이시여. 신의 가호가 항상 제 곁에 있음을 의심하지 아니하였고, 신이 주신 은혜로 이번 시련을 극복하였으며…….’

성물이 복원되어 가는 것 역시 신의 뜻.

감격에 겨운 팔라딘이 필라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이어 가던 그때.

뻐엉-!

수재혁이 그의 엉덩이를 후려 찼다.

꼴사나운 자세로 바닥에 널브러진 팔라딘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살기를 내뿜고 있는 수재혁의 얼굴을 마주했다.

“야, 이 자식아! 너만 팔자 좋게 앉아 있냐?”

“……?”

“빨리 일어나서 갓 더 비트 안 해?”

“하, 하지만, 어찌 신성회의 팔라딘이…….”

“성물 복원 안 할 거야? 이거 다 같이 해야 빨리 끝날 거 아니냐고!”

그래.

수재혁의 말이 옳다.

지금 사이비고, 뭐고,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성물을 빨리 복원하는 것.

‘필라 신께서도 이번만은 이해해 주시겠지!’

직접 눈으로 보고 있지 않았던가.

성물의 부서진 부분에서 어마어마한 기운과 함께 빛이 솟구치며 복원되는 그 모습을.

“갓 더 비트으으으윽! 흐흑!”

힘겹게 몸을 일으켠 뒤 춤사위를 펼치는 팔라딘.

신성회의 성기사가 ‘수린교’에 교화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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