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9화.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219/246)

◈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 사무실 앞에 디저트 카페 새로 생겼던데?

- 케이크 사다 줄까? 선화 너 레드벨벳 케이크 좋아하잖아.

회복실에 누워있던 준우가 선화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지만,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밤이 지나고 아침이 찾아왔다.

몸 곳곳에 난 상처를 고스란히 집으로 가져갈 수는 없었기에, 회복을 하다 보니 어느새 늦은 오후가 된 상황.

‘어쩔 수 없는 외박이긴 하지만…….’

괜히 미안했다.

작전을 수행하느라 집에 못 들어갈 수도 있다고 말은 해뒀지만, 선화 역시 그동안 준우의 걱정을 하고 있었을 것 아닌가.

- 일하다 보면 외박할 수도 있지. 괜찮아, 오빠!

답장이 왔다.

정작 선화는 외박 건에 대해선 별말 없는 듯했다.

그래, 뭐 일 때문이었으니까…….

- 근데, 어디 다친 건 아니지?

- 아주 다쳤어만 봐! 내가 오빠 가만 안 둔다!

……준우가 자신의 몸을 빠르게 살폈다.

다행히도 아이작과 전투 중에 다친 상처들이 말끔하게 회복이 되어 있었다. 혹시라도 흉이 생기기라도 했으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을 거다.

‘휴우. 오늘 일은 비밀로 하는 게 낫겠지.’

굳이 선화의 걱정을 더해서 좋을 게 없다.

마냥 거짓말을 할 수는 없으니 물어보면 아주 조금, 진짜 아주 조금만 다쳤다고 해둬야겠다.

‘아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겠다.’

다시는 다치지 않겠다고 싹싹 빌어야지.

어차피 이제 은퇴하고 나면 전장에 나가 싸울 일도 없잖아?

블루 스톤이 좋긴 좋다.

몸에 난 작은 상처들까지 죄다 사라졌다. 칸나가 가져온 블루 스톤의 효과를 제대로 본 준우는 기분 좋게 회복실을 나섰다.

“아직 퇴근들 안 하셨네요?”

사무실엔 팀원들이 퀭한 눈을 하고서 모여 있었다.

밤을 꼴딱 새운 그들의 얼굴이 딱할 정도로 칙칙해 보인다.

“퇴근하긴. 보고서 작성할 게 산더미다.”

하긴.

작전 중에 벌어진 일이 한, 둘이었어야지.

“준우 넌 회복 다 됐으면 어서 퇴근해.”

“저만 혼자서요?”

“협회장님 지시야. 작전 중 가장 큰 공을 세운 협회의 영웅은 곧장 퇴근시키란다.”

“그래도 어떻게 저 혼자…….”

“퇴근 안 한다고 버팅기면 우리가 나서서 너 집까지 모셔다드려야 한다. 그러니까 귀찮은 일 만들지 말고 빨리 가라.”

언제는 자신보고 영웅이라고 동상을 세우네, 마네, 하던 사람이 이렇게 날카롭게 반응을 하다니.

확실히 피곤하긴 피곤한 모양이다.

팀원들을 두고 먼저 퇴근하는 게 미안하긴 하지만, 준우는 최대한 빨리 퇴근하는 게 그들을 위해 낫다고 판단했다.

“아이작은요?”

“건형이가 조사 중이다.”

“그럼 저 이 팀장님만 좀 만나 뵙고 갈게요. 그 정도는 괜찮죠?”

“가는 김에 같이 가자. 건형이 녀석 가져다줄 게 있거든. 아까 뭐 이것저것 필요하다고 해서…….”

팀원들이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커다란 박스를 각자 몇 개씩 들기 시작했다.

준우가 쓱 내용물을 들여다보니 죄다 마력 증폭에 필요한 재료들이었다.

아마 아이작의 기억을 읽어내는데 필요한 것들이겠지.

마력 증폭에 필요한 재료가 많은 만큼, 아이작의 정신력이 상당하다는 뜻일 거다. 이건형이 한동안 애를 먹겠군.

‘저놈. 확실히 재생력 하나는 좋네. 내 검에 가슴이 뻥 뚫렸는데, 그새 회복이 되다니.’

조사실에 들어온 준우는 유리막 너머의 아이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전투의 흔적은 이미 회복된 상태. 온몸이 마력 제어 장치에 둘둘 쌓여있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냅다 자신을 향해 돌진했으리라.

‘저게 평범한 마력 제어 장치라면 그게 가능했을지도 모르지.’

홀리 나이트에서 공수해 온 최고급 마석으로 만든 장비다.

유리막 또한 마찬가지. 아무리 아이작이 대단한 놈이라고 한들, 저걸 뚫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준우 씨. 이 자가 준우 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데…….”

조사를 진행 중이던 이건형이 문득 말했다.

아까부터 준우와 눈이 마주친 아이작이 혼잣말로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게 준우에게 할 말이었던 모양이다.

“무슨 할 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보죠.”

“네. 그럼 잠깐만 외부 마이크 켜도록 하겠습니다.”

온몸이 묶여 있는 아이작이 준우를 바라보며 히죽 웃는다.

준우가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놈을 마주 본다.

왜 웃고 지랄이지? 기분 더럽게.

“날 잡은 걸로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가?”

유리막 내부와 연결되어 있는 통신 장비를 통해 아이작의 목소리가 조사실의 준우에게까지 전해져왔다.

“다 끝났지 그럼. 뭐가 더 남았나? 남았다고 한들, 네 머릿속에 있는 걸 죄다 끄집어내면 장땡이잖아.”

“두렵지 않은가. 내게 목숨을 맡긴 수 많은 나의 식솔들의 증오와 분노가 곧 그대를 향할 텐데…….”

“말은 똑바로 해. 네가 네 가족들을 지키지 못한 거면서 왜 나한테 지랄이야.”

“나, 나는! 내 식솔들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왔고, 넌 이런 나를 방해했…….”

“지랄도 풍년이네. 네 가족은 네가 지키는 거지. 내 가족은 내가 지키는 거고. 왜 그걸 내 탓으로 돌려? 부족한 네 능력을 탓해야지. 내 가족 지키기도 바쁜데, 이 와중에 내가 네 가족까지 지켜줘야 되냐?”

냉정한 말이지만 맞는 말이었다.

모든 걸 다 지켜낼 수 없다면, 자신의 것이라도 무사히 지켜내야 하지 않겠는가.

“후회하게 될 것이야.”

“후회? 내가? 널 잡은 걸 후회?”

아이작이 낮게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노기 어린 눈빛으로 준우를 응시했다.

“판테온 단원들이 널 살려두지 않을 거다. 더 강하고, 더 훌륭한 단원들이 이곳에 올 것이고, 가문의 분노를 산 네 놈은 결국 그들의 손에 죽을 테지.”

“쯧쯧. 갇혀 있는 놈이 말도 많네. 네놈들이 넘어오는 통로만 막으면 되는 거 아냐?”

“크하하핫! 그걸 막는다고? 네가?”

차원의 다리는 아무나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반대로 다리가 연결되어 있는 통로 또한 아무나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제국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 연구를 해왔던가.

웨어 울프 종족의 가주인 아이작조차도 그 복잡한 설계도와 술식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난해한 것이기에, 항상 설계도와 해석본은 몸에 지니고 다녔…….

‘……응?’

순간, 아이작이 움찔했다.

설계도와 해석본이 내장되어 있던 수정구가 느껴지지 않았다.

‘수, 수정구가 없어졌어?’

중요한 물건이기에 항상 체내에 지니고 다녔던 물건이다.

그것도 자신이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심장 옆에.

한데, 그게 사라졌다.

당황한 아이작이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본다.

불과 어제까지 뻥 뚫려있던 가슴을 회복하느라 그 공허함을 미처 느끼지 못한 것 같은데.

‘우, 웃어?’

유리막 너머의 준우가 실실 웃고 있다.

“서, 설마, 네 놈이!”

“너희는 꼭 몸 안에 뭘 숨겨놓고 다니더라. 저번에 그놈도 그러던데.”

헨더도 그랬다. 처음 준우와 전투를 했을 당시, 그의 체내에서도 수정구를 빼냈었더랬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이작의 가슴을 뚫은 그 순간, 놈의 체내를 빠르게 살폈던 준우였다.

그때의 헨더처럼 이놈 역시 몸 안에 뭔가 숨겨놓진 않을까 해서.

“주, 죽인다! 네놈은 반드시 죽인다! 내가 죽이지 못한다면, 내 후손들과 판테온 단원들이 꼭 네놈을 죽이러 올 것이다!”

“다신 여기 못 온다니까 그러네.”

“판테온은 강하다! 그들은 꼭 이곳에 다시 올 것이다! 네놈으로 끝날 거란 생각일랑 하지 마라! 네놈은 물론 네 아내와 자식들, 네 지인들까지 싸그리 다 죽여 내게 대적한 일을 평생 후회하도록 만들어주마!”

“뭐……?”

그때였다.

일순간 준우의 눈빛에 살기가 어렸다.

“이 새끼 봐라?”

“…….”

“누굴 죽인다고?”

분명히 아내와 자식들까지…….

옆에서 듣고 있던 김강수와 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준우에게로 향했다.

어느새 무표정한 얼굴에서 느껴지는 살기가 이들에게까지 전해졌다.

“야, 야! 칼은 왜 꺼내! 칼 집어넣어 새꺄!”

김강수가 준우에게 버럭 소리쳤다.

그러나 열이 오를 대로 오른 준우의 귀에 그의 말이 들릴 리가 없었다.

“뭣들 해! 준우 말리지 않고? 이 새끼 이러다가 일 친다!”

“모, 못 막을 거 같은데요, 본부장님. 준우 씨 눈깔이 돌았다구요!”

“다 달려들어! 어떻게든 막아!”

준우에게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아는 팀원들이다.

특히나 선화를 언급하며 협박을 한 건 가히 최악의 선택이었다는 것 또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준우 씨 정신 차려요! 저 새끼도 분하니까 그냥 아무 말이나 막 던진 걸 겁니다! 설마 진심이겠어요?”

“진짜 죽이기라도 할 셈이에요? 얼른 칼 집어넣어요! 여기서 저놈 죽이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끝나는 거라구요!”

“무, 무슨 힘이 이렇게 세……!”

“다 비켜어어어! 저 새끼 내가 오늘 죽인다!”

힘의 격차는 컸다.

팀원들이 준우를 붙잡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우는 조사실 문을 쾅쾅 발로 차댔다.

유리막 내부에선 이건형이 문을 막아서며 아이작을 지켜려는 기묘한 상황이 연출됐다.

누가 악이고, 누가 선인지.

눈앞에 보이는 상황만 봤을 땐 딱 봐도 아이작이 괴물에게 쫓기는 모습이다.

“시팔. 저 새낀 왜 하필 제수씨를 건드려선, 에휴.”

김강수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

다행히도 칼부림은 나지 않았다.

준우가 아이작의 얼굴에 주먹 한번 꽂는 걸로 상황은 좋게 마무리가 됐기 때문이다.

정작 당사자의 화가 풀리지 않아 달래는 데 시간이 꽤 걸리긴 했으나, 적어도 팀원들은 이 정도면 충분히 좋게 끝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화 욕한 놈치고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용하지 않은가.

김강수와 팀원들은 준우를 등 떠밀 듯 밖으로 떠밀었고, 준우는 아이작에게 살기가 잔뜩 실린 욕을 한 바가지 내뱉어준 뒤에야 협회 건물을 벗어났다.

“개 같은 놈. 진즉 죽였어야 했나?”

아니다.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그래선 안 된다.

미래를 위해 알아내야 할 게 너무나도 많았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말하는 꼬라지를 보아하니 아이작과 같은 놈들이 분명히 또 전 세계 곳곳을 누비게 된다는 것 같은데…….

‘차원의 문이랬나. 놈에게서 뺏은 설계도를 대충 보면, 반대편에서 아예 열지 못하게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분명히 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봐야 알겠지만 여는 방법이 있으니 죄다 막아 버리는 방법도 있을 것 아닌가.

협회 언어 관련 능력자들에게 설계도를 보여준 결과, 당장 알아낸 사실은 문을 막는데 필요한 것이 막대한 양의 신성력이었다.

‘신성력이라, 신성력…….’

신성회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다시는 이놈들이 이 땅에 발을 딛지 못하게 완전한 예방을 할 수 있을 터.

‘근데, 과연 신성회가 도와줄까?’

이번 작전엔 준우의 뜻대로 쉽게 움직여줬다.

목적이 같았으니까. 협회는 적대 세력을 막아내고, 신성회는 자신들의 보물과도 같은 성물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였기에 큰 문제 없이 신성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목적을 이루고 나면, 장기 프로젝트가 될 수 있는 다음 계획에 또 도움을 줄지는 의문이었다.

보수적인 집단이다.

오직 신의 뜻만을 행하는 종교이고.

세간의 일에 깊이 관여를 하지 않는 신성회였고, 신의 뜻이 아니라며 나서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접촉은 해봐야겠지.’

아이작은 잡았으나 완벽한 마무리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중요한 건 다시는 그놈과 같은 놈들이 준우와 가족들 앞에 나타나지 않게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아빠아아아아!”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수린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준우를 향해 달려온다.

“아빠, 아빠, 아빠!”

“그래, 그래. 뭐가 그렇게 급해서 아빠를 그렇게나 많이 부를까?”

“내가 엄청난 걸 잡았어!”

“응? 엄청난 거?”

“늑대 잡았어, 늑대! 털 없는 늑대!”

“그게 갑자기 무슨……?”

준우가 뒤늦게 수린이에 뒤에 있던 수태광을 발견했다.

어라? 장인어른께선 성물을 갖고 튄 녀석의 추격을 마친 뒤 귀가하셨다고 하지 않으셨나? 그런데 왜…….

“말하자면 좀 복잡하네, 전 서방. 사실 나도 뭐가 어디서부터 꼬인 건지 잘 모르겠고.”

“예?”

“그렇게 멍한 표정 짓고 있지 말고 직접 가서 보게나.”

수태광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수린이의 얼굴이 너무나도 좋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뭐랄까. 저번 혹한기 훈련 때 형님을 미친 듯이 굴리고 난 후에 짓던 표정하고 좀 비슷한 것 같은데.’

정확히는 그때보다 표정이 훨씬 더 좋다.

잔뜩 흥분으로 물든 얼굴엔 연신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히히히히힛!”

웃음소리도 기묘하다.

보통 수린이가 장난을 심하게 쳤을 때 내는 웃음소리이지 않은가.

“어? 저 녀석이 왜 여기에……?”

수태광을 따라 차원문 내부로 들어선 준우는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한창 혹한기 훈련 중이라 빙하지대가 된 차원문 안에 아이작의 수하 녀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물을 갖고 튀었던 놈이다.

준우가 작전 모니터를 통해 분명히 그 얼굴을 봤었다.

‘근데, 저 녀석 몰골이 왜 저래?’

마치 혹한기 훈련에서 한참 굴렀던 수재혁의 모습을 닮아있었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태였다.

도대체 여기서 얼마나 굴렀는지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털이 죄다 타버려 맨살인 게 가여워 보일 정도인데, 지금은 맨살 위에 성에마저 잔뜩 껴 있었다.

수린이가 진행한 혹한기 훈련에서 땀을 잔뜩 흘렸고, 그 땀이 얼어붙으면서 생긴 성에다.

그나마 남아 있던 수염과 털 몇 가닥에는 살얼음이 바르르 떨리고 있다.

얼마나 지쳤으면 몸을 달달 떨기만 할 뿐, 고개를 들어올리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있겠는가.

“사, 살려…….”

“뭐라고?”

“사, 살려주십쇼!”

뒤늦게 준우를 발견한 제로가 애원하듯 말했다.

저 녀석을 얼마나 굴렸으면 놈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는 걸까.

“부, 부탁입니다! 이곳에서 벗어나게만 해주신다면 뭐든 할 테니, 제발 살려주십쇼! 성물을 원하신다면 기꺼이 내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 마귀 같은 꼬맹, 아니, 교관님하고 멀리 떨어질 수 있게만 부탁드립니다! 제발요, 형님!”

“…….”

준우가 시선을 옆으로 돌린다.

‘나 잘했지?’ 라는 표정으로 준우를 바라보고 있는 수린이가 보였다.

뭐, 사람 죽이고 다니는 나쁜 놈이니까 잘했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어째 너무 심하게 굴린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훈련은 훈련일 뿐!”

“크흠! 나는 말리려고 했는데, 수린이가 워낙 즐거워해서 말이야.”

‘장인어른은 가만히 구경만 하고 계셨습니까?’ 라는 준우의 눈빛을 읽은 수태광이 괜히 딴청을 피웠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은가? 직접적으로 폭력을 가한 것도 아니고, 그냥 수준에 맞춰서 혹한기 훈련 한번 한 건데.”

“…….”

“전 서방. 나 때는 말일세. 이보다 더 혹독한 훈련도 했었다네! 지금 저 자가 엄살을 부리는 게야! 거, 훈련을 했으면 얼마나 했다고 우리 수린이한테 마귀니, 뭐니, 염병을…….”

“할아버지. 염병이 뭐예요?”

“아, 아무것도 아니다. 할아버지가 실수했다. 아무튼, 전 서방. 어차피 저놈 저거 아주 악질적인 놈 아닌가? 우리를 대신해서 수린이가 벌을 줬다고 생각하게나.”

자세한 얘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장인어른과 제로가 차원문 내부에 어떻게, 왜 들어오게 되었는지.

하지만 그 얘기는 잠시 후에 나누도록 하고, 당장은 성물부터 수거하여 협회로 보내야만 했다.

협회에서 팔라딘이 애타게 성물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신성회의 도움을 또 받아야 할 일이 있다. 괜히 더 기다리게 해서 좋을 건 없겠지.’

준우는 수린이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잘했다. 그러나 폭력(?)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마냥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도 알려주긴 해야겠지.

그래도 알려줄 건 알려주더라도, 잘한 일에 대해선 칭찬은 해줘야겠지.

“우리 수린이가 나쁜 사람을 잡았네.”

“나 잘해찌?”

“완전 잘했지. 수린이가 나중에 경찰되려고 그러나? 나쁜 사람을 이렇게 확확 잡는 걸 보면.”

“히히히히힛!”

어지간해선 사람을 휘두르지 않는 수린이다.

가진 능력이 어마어마하지만 단 한번도 무력 행사를 한 적이 없다. 물론, 수재혁 같은 경우는 자신이 자처했으니 제외다.

“형니이이임! 얼른 절 좀 살려주십쇼! 더 이상 여긴 못 있겠습니다! 제발, 제발!”

“내가 왜 네 형님이야?”

“성물 드린다니까요! 제발요!”

그런데 그런 수린이가 처음으로 저놈에게 무력을 행사했다.

힘을 쓰지 않고는 절대 제압했을 놈이고, 당한 놈 역시 그 힘을 느꼈기에 이토록 벌벌 떨고 있는 것일 터.

‘드래곤은 악의 같은 것도 읽어낼 수 있는 능력도 있는 걸까? 하긴, 있어도 이상할 게 없지. 아무렴 드래곤인데.’

사실 비슷한 능력을 갖고 있기도 한 수린이었다.

아직 제 능력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기에 단순한 ‘감’ 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

“내놔, 성물.”

“내, 내놓으면 여기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거죠?”

“알았으니까 내놔 빨리.”

제로가 아공간을 열어 성물을 건넸다.

잠시 후, 준우의 호출을 받은 협회 수사팀이 차원문 내부에 모습을 드러냈다.

“탈출이다! 탈출이야!”

감옥 가는 게 저리도 좋을까.

끌려가는 제로의 뒷모습이 어째 너무나도 홀가분해 보였다.

***

“정말 큰 도움이 됐습니다, 팔라딘. 신성회와 그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번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팔라딘과 신성회에 필라 신의 은혜가 깃들기를 바라겠습니다.”

“신의 뜻이었을 뿐입니다. 협회에도 필라 신의 은혜가 깃들기를.”

강재호에게서 성물을 건네받은 팔라딘은 곧장 한국에 있는 대회당으로 향했다.

작전 투입 당시에는 급박함에 이탈리아 대회당의 신성 게이트를 이용했지만, 돌아갈 때는 대회당마다 연결되어 있는 게이트를 사용해야만 했다.

막대한 양의 신성력이 소모되는 신성 게이트인 만큼, 돌아가는 길마저도 신성력을 낭비할 수는 없었기에.

‘필라 신이시여. 당신의 보살핌 덕분에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대회당에 도착한 팔라딘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기도였다.

대회주가 그에게 주어진 임무였던 성물 회수를 완벽하게 해냈고, 그 모든 것엔 필라 신의 가호가 함께했다.

은혜를 입었으니 그 감사함에 대한 표현을 해야 하는 법.

은빛 갑주와 무기를 잠시 내려둔 팔라딘은 진득하게 두 눈을 감은 채 기도를 이어갔다.

“가시려구요, 팔라딘이시여.”

한국 대회당의 회주가 기도를 마친 팔라딘을 향해 물었다.

“신의 뜻을 수행했으니 이제 돌아가야지요.”

“아쉽습니다. 차라도 한잔하며 성서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폐관 수련도 끝이 났으니 아마 한국에 자주 들리게 될 겁니다. 여전히 제가 소속되어 있는 곳은 한국 대회당이니까요.”

“그럼 그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팔라딘이 성스러운 게이트 앞에 섰다.

그리고는 품 안에서 조심스레 성물을 꺼냈다.

“후우…….”

긴장이 풀려서일까.

참았던 숨이 뿜어져 나온다.

만약 성물을 되찾지 못했더라면 팔라딘의 긍지와 명예, 나아가, 필라 신의 이름에도 먹칠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또 만약, 되찾은 성물에 조금의 흠집이라도 있었더라면 그 역시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 흠집은 성물이 아닌 필라 신의 얼굴에도 새겨지는 것과 같았으니까.

‘성물을 복구하는 것은 오직 신의 대리자만이 가능하다고 그랬었지.’

성서에 나와 있다.

아주 먼 옛날 드래곤이라는 영적인 종족들이 신의 대리자 역할을 수행했다지.

참으로 다행이다.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이 땅에 존재하지도 않는 마당에 신의 대리자에게 성물 복구를 의뢰할 수는 없는 노릇.

아이작과 놈들이 성물을 곱게 써줬다는 사실을 그저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팔라딘이었다.

‘이 또한 신의 뜻이었으리라.’

하긴, 신의 힘이 담겨 있는 성물이니 그들조차도 함부로 다룰 수는 없었을 거다.

‘이제 돌아가야겠구나.’

대회주님께서 엄청 기뻐하실 거다.

성물을 도난당하던 날 필라 신을 마주할 면목이 없다며, 속죄하기 위해 여태 밤을 새워가며 기도만을 하고 계시지 않은가.

파지지지지직!

게이트에서 신성력이 방출되기 시작한다.

이 너머에 성물을 기다리는 대회주님이 계신다.

‘돌아가자. 필라 신의 품으로.’

양손에 성물을 곱게 쥔 팔라딘이 막 걸음을 떼려던 찰나.

쩌억 -

팔라딘의 손바닥 위에서 괴기한 소리가 들려왔다.

“……?”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팔라딘에게는 그것이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와도 맞먹을 정도로 크게 들려왔다.

“서, 성물이! 성물이!”

성물 한가운데에 금이 간 것이다.

“커헉, 커허허허헉! 성물이! 성물이이이익!”

팔라딘이 게거품을 물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신이시여! 왜 제게 이런 시련을…….

- 팔라딘. 그대에게 신성회의 모든 의지와 역사가 걸려있네. 부디 성물을 온전히 되찾아 필라 신의 가호가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을 증명해주시게나. 우리 신성회는 자네만 믿고 있겠네!

대회주가 당부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금이 간 성물을 가져간다면, 설마 필라 신의 가호가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실이라도 되는 걸까?

아아, 모르겠다.

갑자기 머리가 너무나도 아프다.

“……아아. X 됐네, 이거.”

팔라딘, 아니, 수정혁이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이대로 복귀하는 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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