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늙은이 더 기다리게 하지 말고, 이젠 그만 포기하게나.”
수태광이 노기를 띤 얼굴로 눈앞의 늑대를 응시한다.
털이 죄다 불에 타버려 이제는 맨살밖에 남지 않은 제로의 모습은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크, 크르륵!”
지레 겁에 질린 듯한 제로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근성 하나는 타고 난 놈이로구만.”
그 점은 칭찬해주고 싶다.
하지만, 수태광은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왜? 보스도 아닌 고작 피라미 같은 녀석이랑 상대해주는 건 너무나도 재미가 없었으니까.
‘간만에 현장 나간다고 잔뜩 흥분했었는데, 쯧.’
작전 지휘관인 준우가 수태광에게 부탁한 역할은 퇴로 차단이었다.
작전 중간에 성물을 갖고 튀는 놈이 발생하여, 그 놈을 추격하는 것 또한 그가 맞게 됐다.
국내 최정상 헌터인 수태광이다.
아이작도 아니고, 고작 그의 수하 하나 추격하는 것쯤은 그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보름달이라도 밝게 떠 있으면 모를까.
이제는 달빛마저도 희미해진 시각.
화르르륵!
그나마 남아 있던 제로의 머리털 몇 가닥이 사라졌다.
뜨겁게 익어버린 제로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곱게 말로 할 때 성물을 내놓으시게나.”
뭐? 곱게 말로 해?
털이란 털을 죄다 태워버려 놓고!
제로가 눈을 부릅뜨며 수태광을 노려본다.
“자네가 계속 버틴다고 될 일이 아니야. 곧 상황이 정리되면 협회 소속 헌터들이 올 거고, 자네 또한 잡혀가겠지. 아무리 숨긴다고 한들 언젠가는 결국 성물을 내놓게 될 거라는 얘길세.”
“크륵……!”
길게 끌어 봐야 좋을 게 없다는 뜻이다.
애당초 처음부터 성물을 내놓았으면 지금처럼 맨살로 창피하게 바닥에 주저앉아 있을 일도 없지 않았는가.
추격해오는 놈이 노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얕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제로의 눈앞에 물기가 맺힌다.
후회해서 뭘 하겠는가. 이미 주변엔 고기 익어 가는 듯한 냄새만 가득한데.
“더 해볼 텐가? 태울 거라곤 맨살밖에 없어 보이는데?”
악마 같은 영감탱이.
제로는 수태광을 바라보며 바드득 이를 갈았다.
하지만, 제로는 버티고 또 버텨낼 생각이었다.
그는 드래곤과 웨어 울프의 혼혈로서, 공간 이동 능력에 특출난 재능을 갖고 있다.
‘아무리 저 악마 같은 영감탱이가 강하다고 한들, 내가 만들어낸 아공간 안에서 성물을 강제로 빼내는 건 불가능하지!’
수태광도 그것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제로가 죽으면 아공간은 소멸한다. 그것은 곧 아공간 내에 있을 성물도 소멸한다는 뜻이다.
곱게 타일러서 성물을 내놓은 놈은 아니다.
그러나 힘으로 압박했어도 놈은 성물을 내놓지 않았다.
“고얀 놈 같으니라고.”
수태광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그 말은 제로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굳이 제로의 추격을 자신에게 맡긴 사위에게 하는 말이지.
본인이 누군가.
자그마치 엑시스의 회장인 수태광이 아닌가.
산전수전 다 겪어가며 수많은 전장에서 가히 빛이라고 할 수 있는 공적을 세운 이 나라 최고의 헌터였다.
‘이런 내게 고작 추격 따위를 맡겨?’
처음 작전에 투입될 때는 비중 있는 역할을 주겠다고 했었다.
그래, 아이작인가 뭔가 하는 보스 놈을 잡을 수 있는 포지션을 주겠지.
한데, 그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작전의 시작을 알리는 화물선 포지션도 아니었다.
화물선 쪽은 자신의 두 아들에게 뺏겼다.
‘이해는 한다, 이해는 해…….’
눈엣가시 같은 둘째 아들, 팔라딘과의 다툼으로 작전을 망칠까 봐 어쩔 수 없이 화물선에선 자신을 배제했을 거다.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작전의 마지막을 장식할 보스 놈은 엄연히 국내 최고의 헌터인 본인에게 넘겨줘야 하지 않겠는가.
- 아이작이라는 놈은 꼭 제 손으로 처리를 하고 싶습니다, 장인어른. 이번만 양보를 해주시지요.
- 끄응!
- 내일 장모님과 데이트 약속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아주 혹시라도 장인어른의 얼굴에 작은 생채기라도 생길까 우려됩니다.
- 이 수태광이가 아이작인가 뭔가 하는 놈에게 상처라도 입는다는 얘긴가?
- 그게 아닙니다. 장모님께서 장인어른을 아주 많이 걱정하고 계신다는 뜻이지요. 얼굴에 생길 작은 흠집 하나도 가슴이 아릴 정도로. 그러니 조심하셔서 나쁠 건 없습니다. 장모님과의 완벽한 데이트를 위해서 말이죠.
그게 그거지.
하여튼, 궤변은…….
설마, 황장미가 그런 말을 했겠는가.
그냥 어떻게든 구슬리려고 지어낸 얘기겠지.
“이런 큰 작전엔 오랜만에 투입돼서 간만에 실력 자랑 좀 해보려했더만! 고얀 놈……고얀 놈…….”
나이가 드니 별거 아닌 일에도 가끔 서운해지고는 한다.
수태광이 괜한 서운함에 준우의 이름을 중얼거리고 있던 그때.
콰아아아앙 -
저 멀리서 굉음이 들려왔다.
의아함에 수태광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응? 저, 저건……!”
하늘에 벌어진 균열에서 떨어지는 화염의 구.
수태광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메테오’ 였다.
메테오가 쏟아지고 있는 지점은 분명 아이작과 준우가 결전을 벌이고 있는 장소였다.
늑대인간 놈이 자신의 기술인 메테오를 구현해냈을 리는 없고…….
“……설마, 전 서방이?”
이곳까지 전해지는 마력의 기운은 분명히 준우의 것이었다.
그의 장인인 수태광이 그걸 착각했을 리는 없다.
“허허허!”
시간이 흐를수록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준우다.
그 속도가 너무나도 빨라, 과연 준우가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 항상 기대를 해왔었는데.
“기어이 나와 같은 수준이 되었다는 건가? 그것도 내 기술까지 완벽하게 카피해낼 수 있는?”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왜 그럴 때 있지 않은가. 놀라는 것도 정도가 있지, 너무 놀라면 말문이 막힐 때가.
저 무궁무진한 재능을 가진 사위를 엑시스에 잡아두지 못했다면 죽어서도 한이 될뻔했다.
고작 동물원장 직책으로 묶어두는 것으로 끝이 나긴 했지만, 그마저도 수태광에겐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엑시스에 몸담게 된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시작은 동물원에서부터 하는 걸로 하고, 천천히 엑시스의 중심으로 나아가면 될 일이다.
“껄껄껄껄!”
수태광이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까지 사위에게 서운하다며 토로할 때는 언제고…….
“역시 내 아들이구만!”
어…….
잠깐만, 사위를 아들이라고 잘못 말한 것 같은데.
아무렴 어떠랴!
아들 같은 사위인데!
‘노, 노망이 났나? 조금 전까지 맹수마냥 으르렁거리던 인간이 왜 갑자기 쳐 웃고 지랄이지?’
수태광을 바라보고 있던 제로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앞의 노인이 오락가락하는 것이 어째 지금보다 더 미친 짓을 벌이지 않을까, 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지금 내 기분이 몹시 좋아졌다네! 부디 자네가 내 기분을 망치지 않았으면 좋겠군.”
수태광의 눈빛이 다시금 제로에게 향했다.
적당히 하고 이쯤에서 성물을 내놓으라는 뜻.
“크르르릉!”
하지만, 제로는 여전히 그럴 생각이 없었다.
내가 왜 이때까지 불길을 막아서며, 온 털을 죄다 태워 가면서까지 버텼는데?
제로에게도 생각이라는 게 있었다.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아까부터 구상하고 있던 거다.
“음?”
수태광의 고개가 삐딱하게 휘어졌다.
느닷없이 제로가 앉아 있던 바닥에 눈부신 빛이 일렁였기 때문이었다.
“아공간인가?”
몸을 피하기 위한 아공간을 만들기 위해 여태까지 버텼던 건가? 저기로 숨어들려고?
꽤 오랜 시간을 버티고 있던 걸 보면, 평범한 아공간은 아닐 것이다.
수태광 역시 아공간 하나 만드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리는 경우를 보지 못했고 말이다.
“크륵!”
제로가 비웃듯이 수태광을 향해 뭐라고 울부짖더니.
슈우우웅 -
이내 아공간 안으로 쏙 하고 사라져버렸다.
마치 따라올 테면 따라와 보라는 듯이 재수 없는 웃음을 흘리면서 말이다.
아공간의 문이 서서히 닫히고 있다.
“아공간 내부의 모습이…….”
수태광이 그 안을 쓱 들여다본다.
당연히 따라서 들어갈 생각이었다. 당장 성물은 되찾지 못하더라도, 놈은 협회로 데려가야 했으니까.
“……어째 낯이 익은데?”
놈의 재수 없는 웃음을 떠올리니 아마 쉽사리 들어갈 수는 없는 공간이지 않을까, 했는데. 참으로 기묘하게도 그건 전혀 아닌 것 같았다.
“허허허! 어떻게 이런 일이!”
수태광이 신기하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
아공간 내부로 들어온 제로는 쾌재를 불렀다.
악마 같은 노인네에게서 벗어난 것으로도 모자라, 무사히 성물을 갖고 안개 감옥을 빠져나오지 않았는가.
‘가주님! 제가 가주님의 명을 지켜냈습니다! 훗날 판테원 단원들의 지원이 올 때까지 제가 꼭 이 성물을 보존하겠습니다!’
노인네는 자신을 따라 이곳으로 올 수 없다.
여긴 평범한 아공간이 아닌 드래곤의 레어였으니까.
‘내가 순순히 당하고만 있을 거라고 생각했느냐, 이 노망난 노인네야!’
당해주는 척하면서…….
아니, 솔직히 말하면 당하기는 했지.
어쨌든.
당하면서도 제로는 자신의 일을 해냈다.
불길에 뒤덮이는 와중에도 정신은 온통 드래곤의 레어를 찾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드래곤의 레어는 제국이 있는 곳도, 또 다른 이 세계가 있는 곳도 아닌, 전혀 다른 차원.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선 드래곤이라는 종족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이라는 ‘감각’ 이 필요했다.
‘하늘이 도왔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잠들어 있는 드래곤이 있어서, 그나마 쉽게 레어를 찾을 수 있었어.’
종족의 감각으로 근접해 있는 드래곤을 찾는다.
드래곤이란 쉬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신의 대리자로서, 그들은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레어 안에 잠들어 있기 마련이다.
쉽게 말해.
감각으로 드래곤을 찾아낸다면, 그곳이 곧 레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이제 이 레어 안에서 한동안 회복에 전념하면 되는 거야. 성물이야 내 손에 있으니, 차후 판테온 단원들과의 연락망이 갖춰질 때까지만 버틴다면……응?’
주어진 임무를 성공시켰다는 성취감 때문이었을까.
그게 아니면, 수태광의 불길로 인한 피해로 심신이 지쳐서였을까.
‘근데……여기, 왜 이렇게 춥지?’
뒤늦게 주변을 둘러본 제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은 멀쩡한데, 저만치 앞에 보이는 곳들은 죄다 얼어붙어 있다. 저기는 무슨 빙하라도 되는 걸까.
이상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본디 드래곤의 레어란 온기로 가득하면 가득했지, 절대 한파가 몰아치는 곳이 아니었다.
‘설마, 내가 실수를?’
그럴 수도 있다.
레어의 틈을 여는 것에 집중하긴 했어도 상황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으니까. 머리는 레어를 향했지만, 육신은 불길에 시달렸으니…….
아니겠지. 아닐 거다.
자신이 혼혈이라고는 하지만 감각만은 확실하다.
여태 실수한 적도 없지 않았던가.
‘분명히 드래곤의 기운이 감지됐는데, 그럴 리가 없…….’
제로가 애써 웃고 있던 그때였다.
컹컹컹!
“웬 개소리가?”
진짜 개 한 마리가 빙하지대에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다.
끼이이!
어느새 머리 위에선 새가 울고 있었고.
이상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니, 나무 뒤에는 비버같이 생긴 놈 다섯 마리가 제로를 훔쳐보고 있었다.
촤라라락!
그리고.
눈앞에서 여러 개의 꼬리를 화려하게 뽐내는 여우 한 마리.
‘뭐, 뭐지? 드래곤의 레어에 왜 이딴 것들이…….’
잠시 후.
외눈의 개 한 마리가 또 나타났다.
느낌상 이 녀석이 이곳의 우두머리쯤 되어 보였다.
크르르릉!
녀석은 크게 울부짖었다.
마치 이곳에 침입자가 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알리듯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이다.
“잉?”
이윽고.
이곳의 진짜 주인이 나타났다.
‘꼬, 꼬맹이?’
네다섯 살 정도.
많이 쳐주면 여섯, 일곱까지 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어디선가 귀신처럼 나타난 여자아이 하나가 제로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대머리다!”
“크르르르릉!”
제로가 저도 모르게 으르렁거렸다.
대머리라니! 아무리 머리털이 죄다 타버렸어도 그렇지 대머리라니!
“옷도 벗고 있다! 얘 완전 변태다, 변태!”
온몸의 털이 싹 다 타버려 그렇게 보일 수도 있었다.
특히나 어린 수린이의 눈에는 더욱더 그럴 만도 했다.
단순히 변태뿐만 아니라, 얼굴이 짐승의 것이라 그런지 그 이상으로 괴기하기까지 했으니까.
“나쁜 사람 가튼데?”
여자아이, 수린이가 직감적으로 말했다.
눈앞의 침입자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영 불길했던 거다.
뭐랄까. 어째 살기가 짙은…….
물론, 그게 살기인지 뭔지 수린이는 모른다.
아직 어린 수린이는 그냥 ‘아주 불쾌하고 나쁜 기분’ 정도라고 생각했을 뿐.
“적폐?”
수린이의 고민이 이내 결론에 도달했다.
히죽 웃은 수린이가 뒷말을 이었다.
“얘들아아아아!”
그 작은 미소가 제로는 왠지 섬뜩하게 느껴졌다.
“신병 받아라아아아앗!”
제로는 차마 상상도 못 했다.
드래곤의 레어라고 여겼던 이곳이.
혹한기 훈련이 아직도 한창인 한 소녀의 영역이었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