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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화.걱정도 팔자다 (217/246)

◈ 걱정도 팔자다

하루 단 세 번. 지속시간은 각 10분.

가족 관계도 스킬을 사용해 특성 범위 내 가족 구성원의 능력을 사용이 가능했다.

비록 제한이 있긴 했으나, 준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견고하던 핏빛의 소용돌이가 위력이 감소하기 시작한다.

외부에서 몰아치는 거대한 화염의 구들이 연달아 충격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붉디 붉은 공간 내부가 열기로 가득 찬다.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두 사람이 쥐고 있는 검 역시 붉은 빛. 또한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들 또한 강렬한 투지로 붉게 번뜩이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외부에서 들려오는 굉음을 들으며.

준우는 아이작을 향해 걸어갔다. 소용돌이 내 아이작의 방대한 마력들이 그를 옥죄고 있었기에, 중심을 잃지 않으려 발 끝에 무게를 실었다.

‘나아간다.’

그리고 베어낸다.

회귀 전엔 못했지만, 이번엔 기필코 해내리라.

뜨거운 감정들이 실린 준우의 시선은 아이작의 작은 움직임조차 놓치지 않았다.

상대가 쥐고 있는 핏빛의 검. 저 검에 소중한 동료들이 죽어 나갔었지.

‘이번엔 지켜낸다.’

아직도 선명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팔이 잘린 동료의 울부짖음이.

배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다른 누군가의 신음이.

마지막 순간에도 애써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던 이건형의 얼굴까지도 너무나도 선명했다.

소중한 동료들은 그렇게 죽어갔다.

그들의 지휘관이었던 자신이 무력했기에.

여기서 놈을 놓치면 같은 일이 되풀이될 터.

준우가 손에 쥔 적혈검을 꽉 움켜쥐었다.

‘괴, 괴물 같은 놈이구나.’

아이작은 다소 경악했다.

소용돌이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얼추 가늠할 수 있다. 막대한 양의 마력이 견고한 자신의 벽을 부수고 있었으니까.

검술뿐만이 아닌.

마법계 능력까지 특출난 괴물.

제국에도 이런 괴물이 있었던가?

아이작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쩌면, 그 극악무도한 황제마저도 뛰어넘을 수 있을지도.’

준우는 그의 적이었다.

그러나 아이작은 웨어 울프의 전사로서 그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강하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가 겪어온 어느 누구보다 강함에 틀림없다.

‘하지만!’

아이작이 중심을 잡으며 다가오는 준우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강하다고는 하나, 생명력을 소모해서까지 발현해낸 가주의 비기가 당해내지 못할 리는 없다.

촤르르륵!

아이작의 검에서 붉은 피가 뿌려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검이 피가 되어 허공에 진득한 점으로 변화한 것이었다.

붉은 점이 준우를 향해 흩날린다.

궤도라는 것이 없이 불규칙하게 날아든 점들이 핏물로 이뤄진 물줄기가 되어 곳곳에서 쇄도했다.

스윽 -

준우가 정면을 향해 검을 내리그었다.

아이작의 이 검이 왜 무서운지, 그는 알고 있다.

공격 방향을 예측할 수 없다. 아무리 실전 경험이 많은 준우라도 전부 막아낼 수 없을 정도로.

점이 되고, 선이 되고, 면이 되고.

수없이 형태를 바꾸며 곳곳에서 몰아치는 이 검을 어찌 막아낸단 말인가.

베어내려 하면 다시금 붉은 피가 되어 흩어지는 검이다.

소용돌이 내부의 작은 소용돌이처럼.

해서, 준우는 오직 중심만을 지켰다.

치명적인 급소는 중심에 몰려 있다.

나머지는 막지 못하더라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면 나아가는 것만은 가능했다.

소용돌이 내부의 마력이 그를 옭아매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스윽 -

또 정면을 베어낸다.

흩어진 핏물이 다시 모여 날아든다.

그러면 준우 역시 또 베어낸다.

‘이, 이런, 미친놈이!’

아이작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미완성의 비기라고는 하나, 비기는 비기다.

그런데.

눈앞의 괴물 같은 놈이 오직 정면만 파고들며, 나머지 공격들은 죄다 맞아가며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애당초.

처음부터 어느 정도 몸을 내어줄 각오를 하고 있었던 거다.

‘왜? 비기의 파훼법이 이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른 아이작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대체 눈앞의 놈은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인지.

피의 검은 피할 수 없다.

지금의 준우처럼 중심만을 방어하며 상대에게 닿는 것이 최고의 파훼법이다.

그리고 준우는 그 파훼법을 몸소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아이작의 피의 검은 적혈검과 비슷한 효과를 갖고 있다.

생명체의 피를 많이 머금을수록 강해지는.

‘설마, 그래서 일부러 병력을 이끌고 오지 않고 날 혼자 상대하려 했던 건가! 피의 검의 위력이 강해지는 걸 미리 알고?’

그래.

눈앞의 괴물이라면 그마저도 알고 있는지도 모르지.

어떻게? 그걸 어찌 알겠는가.

여태 보아 온 것들도 죄다 의문인 것을.

“……후우.”

준우의 숨소리가 보다 가까워졌다.

어느새 아이작과 몇 걸음 남지 않은 거리에서 그는 여전히 걷고 있었다.

몸 곳곳에 난 자상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온전히 아이작만을 향해 시선을 두고서.

미친놈.

말 그대로 그냥 괴물이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무엇이…….’

대체 무엇이 저 자를 이리 분노케 했는가.

도대체 무엇이 저 자를 이리 괴물로 만들어냈는가.

‘……위험한 자다! 훗날의 판테원 단원들을 위해서라도 이 자는 꼭 여기서 죽여야만 한다!’

아이작의 입에서 울컥 피가 쏟아져 나왔다.

생명력을 소모했기에 그에게도 한계란 존재했다.

“됐다.”

그리고 그 순간.

준우가 입을 떼기 무섭게 견고하던 피의 벽에 틈이 생겼다.

화르르르륵!

화염의 구 하나가 벽을 뚫고 아이작에게로 떨어진다.

힘의 균형이 흐트러지자, 벽의 또 다른 곳에 틈이 생긴다.

순식간에 불어난 틈에서 연달아 떨어져 내리는 화염의 구.

아이작이 이를 바드득 갈며 그것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사이.

“……?”

준우가 있던 자리엔 화마가 서 있었다.

그리고 검붉은 불길에 뒤덮인 준우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지금이라면.’

무조건 벨 수 있다.

아이작의 힘이 불균형을 이루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이 순간을 기다려왔던 듯.

준우가 하나의 불기둥이 되어 아이작을 덮쳤다.

“아, 안…….”

화르르르륵!

“……돼.”

아이작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 준우의 목소리가 그 위에 덮어졌다.

화염이 뿌려진 핏물을 집어삼키고.

아이작의 가슴엔 준우의 검이 박혀 있었다.

시선을 살짝 내려 자신의 가슴팍을 살펴보는 아이작.

지독하게도 타오르는 불길에 뒤덮인 검 한 자루가 그곳에서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털썩 -

아이작이 쓰러진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준우의 시야 역시 흐릿해졌다.

아아, 너무 전력으로 달려왔나.

딱히 세상을 구해내겠다는 대단한 의미 같은 건 없었다.

다만.

그냥 가족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다.

- 오빠가 무슨 정의의 사도야? 오빠가 없으면 세상일이 안 돌아가? 그런 것도 아니면서 뭐 그리 일에 빠져 사는 건데! 사람이 쉴 줄도 알아야지! 먹지도, 자지도 못하면서 뭘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한다고!

몽롱해지는 머릿속에 불현듯 언젠가 선화와 크게 싸웠던 날이 떠오른다.

회귀 전 그날은 묵묵히 참기만 하던 선화가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던 때였다.

독감을 앓고 있다고 했었나.

준우가 출장 간 사이에 지독한 감기에 죽을 것처럼 시달리고 있었다고…….

- 감기 걸렸다고 오빠한테 말하면? 오빠가 날 봐주기나 해? 감기 따위가 오빠 일보다 중요할 리가 없잖…….

하.

제 가족 하나 지키지 못하는 놈이 뭔 일을 그리 해댄다고.

‘선화 보고 싶다…….’

준우의 두 눈이 서서히 감긴다.

너무 무리했나. 아무래도 오늘은 선화에게 한 소리 들을 것 같다.

***

소용돌이가 힘을 잃기 시작하더니 이내 소멸했다.

핏빛과 화염으로 아수라장이 된 그곳으로 특수 본부 팀원들이 일제히 내달렸다.

“주, 준우야!”

김강수가 쓰러져 있는 준우를 부둥켜안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다.

더욱 심각한 상태로 의식을 잃은 아이작이 저만치 앞에 보이긴 했으나, 김강수의 안중에 그따위 것이 보일 리가 없었다.

“크흐흡! 전준우! 이 나쁜 자식아! 은퇴식도 못하고 이렇게 죽으면 어떡하냐!”

“일단 힐러들부터 불러줘요. 본부에 연락해서 회복실 미리 비워놓으라고 말해두고…….”

“제수씨가 널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이렇게 죽어 버리면!”

“아오! 본부장님!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마요!”

“준우 씨 안 죽었어요. 왜 이렇게 유난을 떨어요? 멀쩡히 두 눈 뜨고 있는데?”

“응? 뭔 소리야? 조금 전까지는 분명히 눈 감고 있었……?”

“제가 죽긴 왜 죽습니까. 그냥 너무 졸려서 잠깐 눈 감고 있었던 건데.”

“이, 이 새끼야! 놀랐잖아!”

“본부장님 혼자 놀란 것 같은데요. 다들 저 상태 양호한 거 알고 있었던 눈치들인데.”

준우가 쓱 주변을 둘러본다.

나름 침착한 와중에 유독 김강수만 난리다.

“흐흐흑, 흐흐흑……준우사마…….”

아니구나.

칸나가 오열하고 있었구나.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운 준우가 칸나를 달랬다.

상처가 제법 깊기는 해도, 칸나가 가져온 블루 스톤을 이용한다면 금방 치료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준우의 상태를 확인한 칸나가 울음을 그쳤다.

이제야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할 것 같았다.

“나 정말로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너무 무리해서 그랬는지 잠깐 빈혈 같은 게 왔었나 봐.”

“안 괜찮을걸요?”

“응?”

“선화 언니가 준우사마 다친 거 알면 분명히 가만히 안 둘 거예요.”

“아?”

“그러니까 얼른 가서 상처부터 싹 회복해야 된다구요. 오늘만 특별히 선화 언니한테 비밀로 해줄 테니까, 빨리 협회 본부로 가세요!”

“지, 진짜 비밀로 해줄 거지?”

“상처 다 낫는 거 보구요. 만약 준우사마 말대로 정말 괜찮은 게 아니면, 선화 언니한테 다 일러바칠 거예요.”

“……내가 네 스승이냐, 선화가 네 스승이냐?”

“몰라요! 빨리 본부로 가라니깐요!”

협회 소속 헌터들이 현장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준우 역시 이것저것 할 말이 많았지만, 협회장까지 나서서 준우를 등 떠밀었다.

당장 본부에 가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선화에게 전화를 할 거라면서.

뒷정리는 협회 사람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어쨌거나 그들의 말마따나 치료가 우선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이 꼴로 선화 보러 갈 수도 없고.’

저 멀리, 들것을 든 협회 응급 대원들이 보인다.

설마 저걸 타고 가라고?

“저 혼자 걸어갈 수 있다니까요! 팔다리 멀쩡한데 왜 저걸…….”

“어허! 무슨 소리! 얌전히 누워서 가게나, 전준우 대원. 걷다가 또 쓰러지면?”

“아, 아니, 이젠 안 쓰러…….”

“뭣들 해! 전준우 대원을 당장 모셔가지 않고!”

협회장 강재호는 굳이 들것에 준우를 태웠다.

당사자가 걸을 수 있다고 했음에도 그의 뜻은 완고했다.

“협회장님. 제가 감히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보시게, 김강수 본부장.”

“이번 작전에 전준우 대원의 공이 상당하지 않았습니까? 사실상 전준우 대원이 없었으면 이번 작전이 실패했을 가능성도 높고, 이번 건을 해결함으로써 후에 있을 위험도 거의 다 막아낸 거나 다름없으니…….”

“해서?”

“비록 전준우 대원은 협회를 떠나지만, 나름 우리 협회의 영웅이지 않습니까? 이전에도 협회에 세운 공이 어마어마하기도 하고…….”

“빙빙 돌리지 말고 본론을 꺼내 보게.”

“저 녀석, 아니, 전준우 대원이 여태 쌓아온 공을 생각해서 협회 내에 기념비라도 하나 세워 주심이 어떠신지요?”

준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 창피해서다.

이런 미친 인간! 뭔 기념비를 세워?

그런 말도 안 되는 걸 협회장이 수락할 리가 없지 않은가.

“기념비라.”

“안 되겠습니까?”

되겠습니까, 그게?

당연히 안…….

“위치는 어디가 좋겠는가? 로비? 아님, 옥상? 그것도 아니면, 출퇴근하는 이들이 볼 수 있게 메인 도로 쪽으로다가…….”

저걸 수락한다고?

미친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준우는 협회장과 김강수의 유난에 혀를 내둘렀다.

‘기념비는 무슨 기념비! 이걸 다 나 혼자 한 것도 아니고!’

수재혁과 팔라딘. 그리고 수태광.

나아가, 칸나와 루이스, 협회 인원들이 협력해서 이뤄낸 결과다.

각자 제 위치에서 제 할 일을 잘해줬고, 강재호와 이선호가 포탈 위치를 잘 잡아줘서 무사히 첫 난관을 헤쳐올 수 있지 않았던가.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들의 공까지 모두 준우가 가로채는 것 같아서.

‘그래도 뭐, 내 공이 가장 크긴 한데…….’

만약 수재혁과 팔라딘이 마력과 신성력을 모두 소진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준우보다 더 큰 공을 세웠을 수도 있다.

아이작을 잡은 것도 그들이 됐을지도 모른다.

“전준우 대원.”

“예?”

준우가 오늘의 작전 과정들을 하나, 하나 복기하고 있던 그때.

강재호가 흐뭇한 시선으로 준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기념비 위치는 어디가 좋겠나?”

“진짜 하시려구요, 그거?”

“못할 게 뭐 있나? 김강수 본부장 말마따나 협회의 영웅인데.”

놀리는 건가.

자꾸 저러니까 은근히 놀리는 것 같다.

옆에서 김강수가 히죽거리고 있으니까 더욱더.

“기념비는 너무 과하지 않나 싶은데요. 그냥 표창장 정도만 주셔도 저는 충분히 영광스럽게…….”

“기념비가 과하면, 동상은 어때? 자네의 훌륭한 모습을 동상으로 남겨놓는 것도 좋을 듯싶은데. 어찌 생각해?”

“뭐, 뭐요? 동상이요?”

“생각해 보니 동상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협회장님! 아무래도 전준우 대원의 모습을 남기는 게 더 인상적인지라!”

“제, 제발, 본부장님 제발 가만히 좀…….”

“협회장님, 동상은 너무 싸 보이니까 금상 어떻습니까? 확실히 금이 좀 있어 보이기도 하구요. 너무 비싸다 싶으시면 던전에서 제법 단단한 물질을 구해다가 도금을 하는 것도 괜찮구요.”

“흐음. 나쁘지 않은 생각일세.”

들것에 실린 준우는 옆에 있던 응급 대원의 어깨를 살며시 부여잡았다.

강재호가 쓸데없는 소리를 더 하기 전에 빨리 회복실로 출발해달라는 뜻이다.

“전준우 대원! 자네 의견은 어떤지 대답은 해주고 가야지!”

준우는 마치 의식을 잃은 척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차라리 회복실이 낫지, 여기 더 있다간 진짜로 제 모습의 동상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장인어른께선 마무리 잘하셨으려나.

성물을 갖고 튄 놈을 추격에 나섰던 수태광이다.

들것에 실린 준우는 잠시 장인어른의 걱정을 하려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걱정은 무슨 걱정. 우리 장인어른이 자그마치 수태광인데.’

뭐, 당연히 잘하셨겠지.

걱정도 팔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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