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4화.귀신을 보았다 (214/246)

◈ 귀신을 보았다

눈꽃에 둘러싸인 뇌옥이 회전하며 날아온다.

팔라딘은 워 해머를 꽉 움켜쥔 채 가까워지는 뇌옥을 주시했다.

워 해머에서 번쩍하며 섬광이 뿌려진 그 순간.

파아아아아앙!

팔라딘이 타격했다.

뇌옥은 굉음을 퍼뜨리며 날아왔던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다시금 뻗어갔으며, 날아가는 속도 역시 이전보다 더 빨라졌다.

힘이 가해질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뇌옥이다.

비록 지속 시간은 짧더라도 내부에선 아이작이 저항을 하고 있었고, 수재혁의 눈꽃과 바람 그리고 팔라딘의 타격까지 더해져 그 견고함이 극에 달한 상태.

“가, 가주님!”

“가주님을 살펴야 한다!”

백호와 전투를 이어가던 아이작의 수하들이 눈앞의 공격대를 내팽개친 채 부리나케 달려갔다.

목표는 하나.

흡입 포탈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뇌옥이었다.

“감히 어딜!”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려고!”

그러나 그 모습을 보고 얌전히 있을 백호가 아니었다.

상대가 뒤를 보인 이상 전투의 우위는 백호가 점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가주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하지 않은가.

쉽게 말해 한눈을 팔고 있는 상황.

백호가 수하 한 놈을 붙잡았다.

“나머지 두 놈이 아이작에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뭐해! 빨리 저놈들도 붙잡지 않고!”

공격대장이 소리쳤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응?”

용케 뇌옥에 접근한 수하들이 가속이 붙어 회전하는 뇌옥에 휩쓸린 것이 아닌가.

콰콰콰콰칵!

뇌옥과 함께 회전하기 시작한 수하들은 그대로 화물선의 컨테이너들을 하나, 둘 부수며 날아갔다.

쏙!

컨테이너를 관통한 뇌옥은 그대로 흡입 포탈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팔라딘의 화려한 타구는 사라졌고, 남아 있는 것은 부서진 컨테이너 파편들 뿐이었다.

“하늘의 아버지 필라 신이시여. 그대의 명을 수행했나이다.”

팔라딘이 기도를 하자 수재혁이 맞장구를 쳤다.

“신이시여. 곁으로 한 놈 보내드리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요, 형제님?”

“정확한 이유는 나도 모르지만, 아이작이라는 놈한테 원한이 있는 사람이 한 명 있거든. 이번 작전 지휘관인데 어째 멀쩡히 두진 않을 것 같단 말이지.”

“작전 지휘관? 설마, 헌터 협회장의 실력이 아이작 형제를 상대할 정도로 강하단 말씀이십니까?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팔라딘이 대답을 재촉하듯 수재혁을 빤히 바라본다.

그러나 수재혁은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제가 폐관수련 중일 때 헌터 협회장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기라도 했습니까?”

“몰라.”

“아니, 갑자기 왜 대답을 안 해주십니까?”

“아이작도 형제고, 나도 형제고. 기분이 영 더러워. 그놈의 형제님 소리 언제까지 하나 보자고.”

“그러시지 마시고 대답 좀 해주시지요, 형제님.”

“몰라! 형이라고 부르기 전엔 아무 말도 안 해줄 거다, 이 자식아!”

“화가 많으시군요, 형제님.”

“너랑 나랑 형제인 거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아휴! 지겨워 죽겠네, 그놈의 형제 소리!”

“화를 삭일 겸 저와 함께 기도를…….”

“기도는 개뿔이! 너나 실컷 해라!”

수재혁이 시선을 홱 돌렸다.

아이작의 수하와 백호의 전투도 어느새 막바지였다.

‘갑자기 저 녀석이 약해진 느낌이란 말이지.’

네 명의 수하들 중 한 놈은 빙룡이 처리를 했으며, 두 놈은 뇌옥과 함께 흡입 포탈로 빨려 들어갔다.

남아 있는 마지막 한 놈 역시 실력이 상당한 녀석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느껴지는 기운이 이전에 비해 옅어진 기분이었다.

덕분에 백호는 보다 수월하게 놈을 제압하고 있었다.

수재혁이 여유롭게 팔라딘과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보름달이 지려면 아직 멀었는데. 너무 티 나게 능력이 줄었어.’

어쩌면, 흡입 포탈 속으로 빨려 들어간 아이작과 수하들 중 아군의 전투력을 상승시키는 능력을 가진 자가 있지 않을까.

적들의 수도 한 놈으로 줄어들었겠다.

이제는 백호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그놈을 잡아들이는 게 가능한 상태였다.

“내 역할은 이제 다 끝났으니, 이만 퇴근해도 되겠지?”

- 예, 형님. 고생하셨습니다. 나머진 저희에게 맡기시고, 얼른 들어가서 푹 쉬세요. 내일은 중요한 날이지 않습니까.

화물선 내 상황이 얼추 마무리되어갈 무렵.

인이어를 통해 준우와 대화를 나눈 수재혁이 전투복의 흔적들을 털어내며 시간을 확인했다.

내일은 웨딩 촬영이 있는 날.

다행히 그리 늦지 않은 시간에 귀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찍 자는 게 좋겠군. 피부가 상해선 안 되니 말이야.”

“뭘 그렇게 히죽거리며 좋아하십니까, 형제님?”

수재혁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 소리 듣는 건 포기해야 할 듯싶다.

“아, 참! 너한테도 이거 줘야 하는데.”

“……?”

퇴근을 하려던 수재혁이 아티팩트를 사용해 아공간을 연다.

그리고는 그 안에 손을 넣고 뒤적거리더니 아기자기한 봉투 하나를 꺼내 팔라딘에게 건넸다.

“청첩장……?”

“형 장가간다.”

“자, 장가라니? 평생 일에 치여 사느라 연애 한번 제대로 못 해본 사람이 갑자기 결혼을 한다고?”

화들짝 놀란 팔라딘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폐관 수련을 하고 있던 동안 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던 걸까.

너무나도 놀란 탓에 자신의 말투가 또 다시 바뀌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팔라딘이었다.

“축의금 두둑이 넣어라. 나중에 너 장가갈 때 배로 돌려줄 테니까.”

“놀리는 거지, 지금?”

“맞다! 팔라딘은 결혼 못 하지?”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야! 팔라딘은 필라 신을 모시는 사제로서…….”

“못할까 봐 성직자가 된 건 아니고?”

“그, 그건 신성 모독이야!”

“아무튼. 됐고. 너 내 결혼식 사회 좀 봐라.”

“내가?”

“네 형수님이 되실 분이 그걸 원한다.”

“내가 형이 하라면 해야 되는 사람으로 보여? 참나. 나 신성회의 팔라딘이야. 일반 사제들도 아니고 팔라딘이 결혼식 사회 보는 거 봤어?”

“최초로 하면 되잖아. 네가 역사를 쓰는 거지.”

“내가 결혼식 사회 보려고 팔라딘 된 줄 아시나.”

“가족이니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안 한다. 아니, 못 한다.

신성회의 하나뿐인 팔라딘이며, 팔라딘은 신성회의 상징과도 같다. 수정혁은 수재혁의 동생이기 전에 팔라딘 그 자체다.

전 세계 형제자매님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신성한 자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가 결혼식 사회를 봐?

신성회에서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다. 보수적인 집단이고, 팔라딘은 오직 신의 뜻에 움직이는 신의 대리인이 아니던가.

“거절.”

“사회 한번 봐주는 걸로 엄청 깐깐하게 구네.”

“나도 내 이미지라는 게 있어. 아무리 가족이라도 팔라딘이 결혼식 사회 보는 영상이 세계에 퍼져나가면 어떻게 되겠어? 신의 뜻을 전달해야 할 팔라딘이 거기서 형식적인 이야기만 구구절절 읊고 있으면, 신성회인들도 필라 신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거라고.”

“그게 어떻게 그렇게 돼? 딱딱한 분위기의 집단에 오래 있어서 그런가. 너도 머리가 많이 굳었네.”

“아무튼. 거절.”

“수락할 수밖에 없을걸?”

단호한 팔라딘의 태도에도 수재혁은 자신감이 넘쳤다.

마치 그의 약점을 쥐고 있는 듯이.

“사회 안 보면, 나도 성물은 못 줘. 참고로 그 성물 가로챌 사람이 나랑 엄청 막역한 사이거든.”

“……!”

팔라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고 보니. 아이작과의 전투에 정신이 팔려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던 거다.

수재혁의 목적이야 아이작을 포탈 안에 집어넣는 것이었지만, 팔라딘의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

성물을 되찾아 신성회로 복귀하는 것.

한데, 그 성물과 함께 아이작을 포탈 속으로 처넣어버린 거다.

“이, 이이익!”

“뭘 그렇게 흥분해? 그냥 사회 한번 보면 되는걸.”

“그런 거 안 한다니까! 내가 당장에 아이작을 쫓아가서 성물을 되찾아오면 그만……?”

“너 신성력 전부 다 소모했잖아. 무슨 수로?”

“……이이이이익!”

마력이 동난 건 수재혁도 마찬가지다.

그가 미련 없이 퇴근을 하려는 것도 더 이상 작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신성회 기사단들을 집합시켜야 하나?’

팔라딘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들이 온대도 소용이 없을 거다.

기사단 전체 전력보다 강한 자신도 아이작에게 상처 하나 내질 못했다.

아무리 공격을 퍼부어도 멀쩡하던 놈이었다. 기사단이 온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터.

‘신성회 사제답지 못하게 너무 전투에 흥분했어. 가장 중요한 성물을 깜빡 잊다니. 아아, 무슨 면목으로 필라 신을 뵌단 말인가.’

그러다 문득, 팔라딘은 의문이 생겼다.

세계 최강이라는 칭호를 가진 본인과 자신보단 약하지만 엑시스의 부 마스터인 수재혁의 협공으로도 상처 하나 내지 못했던 아이작이었다.

‘우리 둘이 함께여도 뇌옥에 가둬 흡입 포탈 쪽으로 밀어내는 게 고작이었는데?’

그런 그에게서 누가 어떻게 성물을 가로챈다는 걸까.

‘아까 형이 말했던 것처럼 놈에게 원한을 갖고 있는 협회장이?’

성물도 놈을 완벽하게 제압해야 뺏을 수 있을 거 아닌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몰라도 아이작을 대적할 만한 강자가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수재혁의 자신만만한 표정은 팔라딘에게 그런 의미로만 보였다.

‘익히 작전에 대한 얘기는 들었다. 안개 감옥에서 보름달이 지기를 기다렸다가 놈을 제압할 거라고.’

하지만 오늘 아이작을 마주한 팔라딘은 그 말도 조금은 의심스러웠다.

그만큼 자신이 상대했던 아이작은 강했으며, 작전의 지휘관이 협회 소속인 걸 감안했을 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

세계 랭킹 상위권의 길드 마스터 급이라면 모를까.

“이번 작전 지휘관이 한국 헌터 협회장이라고 들었어. 그의 능력은 인정하지만, 전투 계열이 아닌 그가 아이작을 상대하긴 어려울 텐데…….”

“안에 아버지도 계신다.”

“필라 신께서 강림하셨을 리는 없고.”

“그 아버지 말고, 너 낳아주신 네 아버지 인마!”

“크흠! 아버지도 이젠 연세가 제법 있으시잖아. 만약, 젊었을 적 아버지가 계시다고 한들 아이작에겐 상대가 안 될 텐데.”

모르는 소리.

준우의 가장 특성으로 성장한 것은 수재혁뿐만이 아니다.

허구한 날 손주인 수린이를 보겠다며 준우의 집에 드나든 건 수태광이 더 잦았고, 성장의 정도 역시 수태광이 더 높았다.

나이는 더 들었으나 능력은 반대로 향상됐다는 뜻.

“칸나도 있고.”

“칸나? 누구야? 일본인 이름 같은데.”

“모르면 됐다. 그리고 작전 지휘관 얼마 전에 바뀌었어.”

“갑자기 지휘관이 바뀌어? 누구로?”

“매제.”

“매제? 별호 같은 건가?”

“그게 아니라, 인마! 네 매제! 우리 매제!”

“……?”

팔라딘은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정말 자신이 생각하는 그 ‘매제’ 라면 F급 헌터이자, 여동생의 남편이 아니던가.

“그 매제가 아이작 형제와 대적한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야. 나의 매제를 얕보지 마라. 내가 다 기분이 나쁘다, 지금.”

“예? 언제부터 형이 매제를 그리 아꼈다고…….”

“네가 진짜 폐관 수련을 오래 하긴 했나 보다.”

이 자식, 세상 물정 전혀 모르네.

수재혁이 팔라딘을 옛날 사람 보듯 쳐다보며 쯧쯧 혀를 찼다.

***

콰아아아앙!

뇌옥이 부서졌다.

지속시간이 지나자 터무니없이 쉽게 깨져버리는 뇌옥.

“이런 벌레 같은 놈들이!”

아이작은 뇌옥에서 나오기 무섭게 이를 바드득 갈았다.

치명상은 없었으나 미꾸라지 같은 두 놈의 잔재주에 놀아난 게 너무나도 열이 올랐다.

얄밉게도 죽이 척척 잘 맞던 두 놈.

다시 만나게 된다면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놓으리라.

그나저나.

여긴 또 어디일까?

아이작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개가 짙게 깔려있는 것이 느낌이 익숙하다.

‘안개 감옥인가. 감각이 둔해졌군.’

이 안개들은 감각을 둔화시키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하필이면 개중에서도 웨어 울프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후각이 마비되는 바람에 아이작의 미간에도 주름이 잡힐 수밖에 없었다.

‘내 능력으로도 날려 보낼 수가 없는 기이한 안개다. 마치 우리 종족의 특성을 알고 있는 놈이 꾸린 계략 같단 말이지.’

까드드득 -

아이작의 이가 갈리며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때, 안개 속에서 누군가의 기운이 가까워진다.

그나마 다행인 건 후각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들은 용케 살아있다는 점이었다.

“가, 가주님?”

안개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수하 중 한 명인 세인이었다.

네 명의 수하들 중 유일하게 여성인 그녀가 은발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다가오다가 멈칫한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가주의 명이 있음에도 그녀는 쉽사리 발을 떼지 못했다.

안개 속을 헤집으며 가주를 찾아 나서긴 했는데, 막상 마주친 채로 그의 핏발이 선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두려움이 앞섰다.

꿀꺽 -

불현듯 자신의 동료이자, 가주의 손발과 마찬가지였던 수하 한 명이 그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이 떠올라서였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수하의 목숨과 피를 거두지 않았던가.

“뭘 하고 있는 것이냐, 세인? 이리 가까이 오라고 하지 않았느냐.”

“예…….”

그러나 가주의 명을 어길 수는 없는 노릇.

세인이 조심스레 그의 곁으로 다가간다.

다행히도 자신의 목숨마저 거둬가는 일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나마 네가 함께여서 다행이구나. 덕분에 ‘아우라’ 는 유지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아우라.

웨어 울프 종족의 힘을 극대화 시켜주는 세인의 능력 중 하나였다.

화물선에서 이들이 흡입 포탈 안으로 사라졌을 때, 남은 수하의 힘이 눈에 띄게 약해진 것도 세인의 부재 때문이었다.

“후각은 무감각해졌더라도 아직 다른 감각들은 살아있다. 비록 블루 스톤 수거 작전은 실패했지만, 성물을 보존해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에 의의를 두도록 한다.”

“알겠습니다, 가주님!”

‘가주님께서 아까보다 신중해지신 것 같은데. 설마, 화물선 위에서의 전투로 위축되신 건가?’

세인은 가주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안개 감옥이라는 던전 이름에 걸맞듯, 주변을 가득 에운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에 무작정 감각에 의존해 나아가야만 했다.

안개 감옥의 ‘열쇠’ 를 찾는 게 급선무다.

그걸 찾는다면 던전을 빠져나갈 수 있을 테니까.

‘던전 내 몬스터가 없는 걸 보니, 이미 이곳을 싹 정리해둔 모양이지?’

아마도 열쇠는 이곳을 정리한 누군가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누군가가 아이작이 직접 찾아오게끔 만든 계획이겠지.

‘제 발로 직접 찾아와라? 감히!’

안개는 점점 짙어졌다.

감각을 내세워 안개 속을 헤집고는 있으나 어째 같은 길이 반복되는 느낌이다.

마치 환영처럼 계속해서 변하는 길목.

안개에 가려져 그 기이함이 배가 되는 곳이 바로 이 던전이었다.

게다가 이 던전이 무서운 건, 일정 지점마다 환각 증세를 유발하는 가스가 살포된다는 것이다.

후각이 발달한 웨어 울프라면 문제도 되지 않겠지만, 현재 아이작과 세인은 후각이 마비된 상태였다.

“우측으로 방향을 튼다. 그곳에서 열쇠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으니…….”

말을 뱉던 아이작이 멈칫했다.

뭔가 이상함이 느껴져서다.

“……세인?”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아이작의 목소리만 메아리처럼 울려 퍼질 뿐.

“세인!”

역시나 이번에도 마찬가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던 놈이 대체 어딜 갔단 말인가.

‘안개 감옥. 제국에서도 감당하기 버거운 마수들을 가둬 놓던 곳답게 여러모로 성가시게 하는구나.’

세인은 가주인 아이작이 좀 전의 전투로 위축됐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신중해진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시간이 촉박해지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안개 감옥의 파훼법은 바로 시간이다.

약 6시간이 지나면 둔해졌던 감각이 돌아오게 되어 있다.

면역이 생기는 것이었고, 마비됐던 후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때문에, 그 파훼법을 보완하기 위해 제국에서도 마수들의 감옥으로 사용했던 이곳에 여러 장치들을 해두지 않았던가.

중요한 건.

아이작에겐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보름달이 지고 있다.’

보이진 않아도 느낄 수는 있다.

달빛은 그들에게 가장 선명한 기운이기에.

6시간? 그때까지 기다리기엔 늦는다.

후각이야 살아 돌아오겠지만, 바다 위가 아닌지라 성물의 힘도 미약한 마당에 보름달의 기운마저 흡수해 사용하는 게 불가해진다.

‘설마, 보름달이 지는 것까지 고려한 것인가?’

아이작이 낮게 신음을 흘렸다.

누가 이런 함정을 파놓은 것일까?

대체 누구이기에 자신들과 동족인 것마냥 가장 치명적인 약점만을 쏙쏙 골라놨단 말인가.

빠드드득 -

날카로운 송곳니가 절로 갈린다.

하지만 상념에 빠져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보름달이 지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한다.’

아이작이 온 힘을 다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곳.

그 끝이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죄다 들쑤시면 결국 끝이 드러나기 마련이겠지.

***

“허어억!”

걸음을 멈춘 세인이 두 눈을 부릅떴다.

분명 조금 전까지 귀신 같은 놈에게 홀려 여기까지 뛰어오고 있었거늘.

‘내가 환각에 걸렸던 건가! 설마, 가스를?’

평소였다면 던전의 환각 가스 정도야 후각으로 눈치 채고 미리 피했을 거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 그녀는 평소의 상태가 아니었다.

‘대체 난 뭘 쫓아서 여기까지 온 거지?’

얼마나 오랜 시간 내달렸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보름달이 꽤 많이 져버렸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도, 돌아버리겠네.’

어느 순간 귀신이 싹 사라지더니.

다시 눈을 떴을 땐 바로 이곳이었다.

역시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허한 길목의 어딘가.

“가, 가주님? 가주님!”

아이작의 대답은 없었다.

얼마나 멀리까지 달려온 건지, 그의 기운마저 멀어져서 느껴지지 않는 상태.

다소 당황한 세인이 또 한번 놀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왔다! 왔어!”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흥에 겨운 목소리가.

“준우사마! 적이 제 발로 저한테 찾아왔어요! 거봐요! 내가 뭐랬어요? 분명 이쪽으로 한 명은 올 거라고 그랬죠?”

- 거기서 딱 기다려, 칸나. 지금 내가 바로 갈 테니까.

“에이! 준우사마까지 올 필요는 없어요! 그쪽 길목에 아이작이 가까워지고 있다면서요?”

- 하, 하지만…….

“준우사마는 아이작만 맡아주면 돼요. 이 녀석은 제가 맡을 테니까!”

- 괜찮겠어?

“으음.”

안개 속의 칸나가 정면을 응시했다.

순간, 세인은 자신을 향한 적의에 몸을 흠칫 떨었다.

‘내가 보이는 건가? 안개 속에서? 어떻게?’

세인은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상대는 자신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준우가 가진 티타늄 안경 효과.

그것이 안개 속에서 상대를 식별할 수 있게 칸나를 비롯한 아군들의 눈이 되어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단 저쪽은 제가 안 보이는 것 같고. 얼추 실력을 가늠해봐도 저보단 밑이라 괜찮아요.”

- 정 버겁다 싶으면 바로 말해. 근처에 장인어른 계시니까.

“흥! 제자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아니에요?”

목소리만 들었을 땐 분명히 소녀이다.

그런데, 내가 저 작은 소녀보다 밑이라고?

세인이 미간을 좁혔다.

아무리 보름달이 많이 졌다고 한들, 자신은 자랑스런 웨어 울프 종족의 전사였다.

그리고 눈앞의 맹랑한 소녀가 전사로서의 긍지와 자존심을 건드렸다.

“감히!”

세인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칸나가 그녀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허리춤에 걸린 두 자루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됐다. 나도 이제 스승님을 도울 수 있다!”

“맹랑한 년이구나.”

“호오? 한국어 잘하시네요. 저보단 못하지만.”

이쪽 차원의 어지간한 언어야 판테온 단원이라면 기본적으로 습득해야 할 것들이다.

눈앞의 칸나가 한국어로 준우와 대화를 하기에 일단 한국말을 뱉긴 했는데…….

어쨌거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보아하니, 네 스승이라는 작자가 이 모든 계획을 꾸민 모양이지?”

“우리 스승님은 검술 실력도 뛰어나지만, 머리도 엄청 좋으시거든요. 어차피 우리가 이길 거예요. 그러니까 항복하세요. 보름달이 지고 있잖아요? 그쪽도 지금은 절 이기지 못해요.”

“패기 한번 좋구나. 하지만 그 조금 전 그 망발을 후회하게 될 거다. 웨어 울프 전사들에겐 보름달만이 전부가 아니거든.”

“스승님이 그랬는데. 보름달이 전부라고.”

빠직 -

세인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묘하게 사람 약 올리는 재주가 있는 여자애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녀는 칸나에게 조금도 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네 스승이 과연 대단할지는 잘 모르겠으나, 제자를 그리 아끼진 않는 모양이구나?”

“아닌데요. 우리 스승님이 저를 얼마나 아끼시는데? 맨날 도시락도 보내주시고, 고기도 보내주시고, 소화 잘되는 차도 보내주시고……아! 나중에 성인 되면 엄청 좋은 술도 보내준다고 했거든요!”

“좋은 스승이 제자를 사지로 몰아넣나?”

“뭐라구요?”

“세상에 어떤 스승이 어린 제자를 전장에 들이미느냐는 뜻이다.”

“들이밀어서 온 거 아니거든요! 내가 그냥 돕고 싶어서 직접 가겠다고 한 거거든요!”

“쓰레기 같은 스승을 두었구나.”

빠직 -

칸나의 미간에도 주름이 잡혔다.

동시에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쓰레기 같은 스승. 꼭 시답지도 않은 것들이 제자를 앞세워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고 들지. 네 스승도 그와 별반 다를 게 없지 않나?”

칸나의 주름이 깊어진다.

이것은 명백한 모욕이다.

그래, 모욕쯤이야 얼마든지 참을 수는 있다.

오랜 시간 신켄에서 양아버지인 다이스케와 배다른 오빠들에게 숱한 모욕을 당했을 때도 꾹 참고 잘 버텨왔으니까.

하지만.

같은 모욕이라도 참을 수 없을 때가 있었다.

“쓰레기이이이?”

“……?”

“우리 스승님에게 쓰레기이이이이?”

순간, 세인은 몸을 움찔했다.

눈앞의 소녀에게서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서, 설마, 이건……살기?’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세인.

칸나가 시뻘겋게 핏대가 선 눈을 그녀를 향해 부라린다.

“이, 이……!”

분노를 머금은 칸나의 눈이 완전히 뒤집혔다.

그 모습이 마치 아까 전 세인이 홀렸던 귀신과도 비슷해 보이는 착각마저 일었다.

“이 망할 년이 감히 누구한테 쓰레기래!”

한국말 많이 늘었네.

이젠 욕도 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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