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화.사라진 마을 (199/246)

◈ 사라진 마을

열 살까진 안 되어 보이는 어린 남자아이.

잡지에서 봤던 얼굴과는 다소 이질감이 있긴 하나, 오른쪽 눈 아래의 큰 흉터가 왕친의 아들의 모습과 일치했다.

‘가능성이 있어. 왕친이 이 근처 산다고 했었으니까.’

만나서 대화를 한번 해 보고 싶었다.

왕친이 영입 제안을 거절한 이유가 아들 때문이라고 했으니, 아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형님께서 이틀 뒤에 왕친과 미팅을 한다고 하긴 하셨지만, 과연 아이가 그 자리에 있을지는 의문이야. 있다고 하더라도 속마음을 온전히 털어놓을 리도 없고.’

아이들은 은근히 비밀이 많다.

우리 수린이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내가 인파를 뚫고 공연장 앞에 당도했을 땐, 이미 아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공연은 이미 끝났으니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었겠지.

‘이런, 사람이 너무 많아. 찾는 게 쉽진 않겠는데.’

게다가, 다들 비슷비슷한 가면까지 쓰고 있어서 더욱 복잡한 상황.

아이가 각성자였다면 마력을 끌어 올려 어느 정도 추적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쉽게도 마력이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조금 전까지 여기 있던 남자아이 못 보셨나요? 극단원 같았는데. 키는 한 이만하고, 눈 아래 흉터가 있는 아이예요.”

“왕웨이 말씀하시는 건가요? 왕웨이라면 아까 저쪽에 있는 노점 사이로…….”

“고맙습니다.”

‘왕웨이라면, 왕친의 아들하고 이름까지 같아.’

일순간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는 조금 전 공연 관계자처럼 보이는 자가 알려 준 곳을 향해 빠르게 내달렸다.

‘점점 인파가 줄어드는데.’

노점 사이의 길은 행사장 바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어, 양 갈래 길이 나타났다.

왼쪽은 수풀이 우거진 불편한 길이고, 오른쪽은 그나마 사람이 오고 간 흔적이 남아 있는 길이었다.

‘오른쪽으로 가 볼까.’

조금이라도 길다운 길을 택하기로 했다.

행사장에서 점점 멀어져 갈수록, 축제 분위기와는 달리 흉흉해지는 것이 상당히 이질적이다.

얼마나 달려왔을까.

걸음을 멈춘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화려한 빛들로 가득한 축제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내가 서 있는 이곳은 그곳과는 전혀 상반된 장소였다.

어두운 밤하늘이 드리워진.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으쓱한 느낌.

‘……화반 추모 공원.’

관리가 전혀 안 됐는지, 공원 입구에 먼지와 흙으로 도배된 작은 팻말이 보였다.

안쪽 역시 귀신이라도 나올 것처럼 으스스하다.

늦은 밤이라서 그런지 정말이지 뭐라도 튀어나올 것 같기도 하고.

‘음?’

아무도 없을 것만 같던 공원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혹시나 내가 쫓던 그 아이일까.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 본다.

공원 입구의 팻말만큼이나 관리가 안 된 내부가 드러났다.

생기발랄하던 축제 현장의 것들과는 반대로, 죽은 나무와 풀들만이 그득했고, 안식처의 묘와 비석들 또한 사람의 손을 꽤 오랫동안 타지 않은 것 같았다.

‘담배 냄새…….’

인기척이 느껴지던 곳과 가까워질수록 담배 냄새가 짙어진다.

죽은 나무 아래.

가면을 쓰고 있는 열 명의 남자들이 보였다.

“확실히 축제가 다르긴 달라. 여기 오는 사람들 죄다 주머니가 두둑하더라고!”

“뭐, 잘 된 거지. 덕분에 우리도 이번에 한탕 제대로 쳤으니까.”

“고작 이 정도 돈으로 만족할 생각은 마. 아직 축제가 끝나려면 열흘이나 더 남았잖아? 분명히 더 많은 사람들이 여기 올 거고, 우리는 더 많은 돈을 훔칠 수 있을 거야.”

가만히 대화 내용을 엿들었다.

수십 개의 지갑을 꺼내 현금만 챙기고는 빈 지갑은 냅다 묘 옆에 버리는 자들.

‘소매치기구나.’

음침한 이곳의 분위기가 묘하게 놈들과 어울렸다.

하필이면, 이 장소가 추모 공원이기에 이곳에 잠들어 있는 자들에겐 아주 큰 민폐가 되겠지만.

발로 비비적거리며 담배를 끄는 녀석들.

몇몇 놈은 행사장에서 사온 음식을 먹고 쓰레기를 그냥 버리기도 했으며, 또 몇몇 놈은 아무렇지 않게 비석 위에 앉아 또 다시 담배를 꼬나물기도 했다.

안식처가 이렇게까지 망가진 데엔 저런 녀석들도 한몫 하고 있는 것 같다.

“허, 허억!”

“깜짝이야!”

그때였다.

내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그들 중 몇 녀석이 다를 발견하곤 놀란 듯 숨을 들이켠다.

“뭐야? 이 저주받은 땅에 발을 디디는 놈이 있네.”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한 녀석이 내게 비아냥거렸다.

나와 똑같은 나비가 그려진 가면을 쓰고 있는 녀석이다.

미약하게나마 마력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각성자인 것 같은데, 아마 자신의 힘을 과신하는 모양이다.

그래봤자 한낱 양아치들일 뿐.

“주워.”

나는 짧고 간결하게 말했다.

“뭐?”

“너희가 버린 담배꽁초하고 쓰레기들 주우라고. 추모하라고 만들어 놓은 장소에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하면 쓰나.”

“우리가 여기서 뭘하든 네가 무슨 상관이……어?”

녀석이 채 말을 잇기 전.

빠르게 검을 뽑아 몸을 움직였다.

스스스슥!

정확히 검을 열 번 휘둘렀다.

놈들이 쓰고 있던 가면이 반으로 쪼개지며, 일제히 바닥에 떨어진다. 앳된 얼굴들이 드러났다.

“너, 너, 너 내가 죽인다!”

우두머리 녀석이 말을 더듬는 걸 보니 나와의 실력 차에 심히 놀란 듯한데, 그 와중에도 주둥이는 살아있었다.

놈이 허리춤에 손을 가져간다.

무언가 꺼내려는 듯 살짝 몸을 비틀자, 달빛에 반사된 단검 한 자루가 반짝이는 게 보인다.

“그거 꺼내면 나한테 죽는다.”

“우, 우, 우린 열 명이야! 너 하나쯤 죽이는 건 아무런 문제도 아니라고!”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 너희들 가면만 부쉈을까?”

“…….”

“다시 말한다. 주워라.”

“…….”

“너희도 여기 묻어줘? 잘됐네. 마침 공원에 빈자리도 많은데, 너희들까지 묻어버리면 딱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이왕 쓰레기 줍는 김에 쓰러져 있는 비석들도 좀 세워 놓을까요?”

“좋은 생각이야.”

아직 애들은 애들이다.

조금 전의 패기는 어디 가고, 금세 꼬리를 내린 녀석들이 담배꽁초를 비롯한 쓰레기들을 줍기 시작했다.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았음에도, 자신들이 버리지 않은 쓰레기들까지 정리를 하는 녀석들이었다.

‘그나저나, 여기 분위기가 영 익숙하단 말이야.’

문득 회귀 전의 일이 떠올랐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아내의 장례식.

어둡고 무거운.

그리움과 후회.

그것들이 한데 어우러진 감정이 이곳에 와서 되새겨진 탓에, 나도 모르게 좀 거칠게 말이 나갔던 것 같다.

‘비록 그곳에서나마 행복하시길.’

아내의 발인 날.

염치없지만, 후회를 머금으며 그렇게 바랐었다.

또한 눈앞에 세워진 비석을 향해서도 그렇게 바라주었다.

툭툭 -

비석 주변에 묻은 담뱃재를 털어내던 그때.

어둠이 내려앉은 묘 주변에 작은 조각상 하나가 보였다.

‘누군가가 추모하려고 만든 건가?’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손바닥만 한 조각상이었다.

특이한 게 있다면 나무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단단한 철로 만들어진 조각상이었는데, 조각상 하단부가 마치 녹아내린 것처럼 부식되어 있다는 점이다.

‘안타깝네. 솜씨 좋은 조각가가 만든 것처럼 보이는데.’

그나저나.

양아치 녀석들 때문에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왕웨이를 쫓고 있었는데……응?’

주변을 살펴보던 그때였다.

등 뒤에 자리하고 있는 죽은 나무 옆에 뭔가가 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가면. 왕웨이가 쓰고 있었던 거랑 똑같아.’

아직 온기가 남아있다.

설마, 여기 숨어서 날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아무래도 이곳으로 향하는 지름길이 있었던 것 같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비각성자치고는 매우 빠른 속도겠지만.

‘다시 쫓으면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다. 용케 붙잡는다 한들 아직 어린아이인지라 집에 늦게 보낼 수는 없었다. 왕친이 걱정할 테니까.

무엇보다.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너희들.”

쓰레기를 줍다가 문득 나를 돌아보는 양아치들.

“훔친 것들 다 내놔.”

억울한 표정으로 훔친 돈과 물건들을 꺼내놓는 녀석들.

그때, 저 멀리 행사장에서 폭죽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축제의 밤을 마무리하는 불꽃놀이가 시작된 모양.

‘예쁘네.’

불꽃의 여파로 어둡던 이곳에도 조금이나마 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 * *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현관문을 여는 왕웨이.

아빠랑 약속한 귀가 시간보다 좀 더 늦은 시각이기에,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지금쯤이면 아빠는 먼저 자고 있겠지.

왕웨이는 그런 생각을 하며 거실을 살금살금 걸어갔다.

“어? 아, 아직 안 주무셨어요?”

그때, 소파에 앉아있던 아빠와 눈이 마주쳤다.

한, 두 번 늦은 게 아닌 듯 왕웨이가 능청스럽게 미소를 짓는다.

“많이 늦었구나.”

“헤헤. 일이 좀 있어서요.”

“가면은?”

“앗! 오는 길에 떨어뜨렸나 봐요.”

“그 정도로 정신없는 상태로 집에 온 걸 보면 공연 끝나고 또 추모 공원에 다녀온 것 같은데. 위험하니까 늦은 시간엔 되도록 거기 가지 말래도.”

“별일 없었어요!”

“항상 조심해야 한다. 축제가 시작되고 이 근방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그런지, 요즘 공원에도 질 나쁜 녀석들이 종종 드나든다고 하니까…….”

“너무 걱정 안 해도 돼요! 공원에 들어갈 땐 항상 아빠가 만들어준 방어구 입고 있잖아요! 그거만 입고 있으면 어느 누구도 저를 건드릴 수 없다구요!”

씩씩하게 대답하는 아들의 모습에 왕친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맞는 말이긴 했다.

아들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해 튼튼한 방어구들을 제작해주었으니까.

혹시나 균열처럼 갑자기 몬스터가 나타날 것을 대비해, 빨리 달릴 수 있는 신발도 만들어주지 않았던가.

“오늘 공연은 무사히 잘 마쳤고?”

“네! 완벽한 공연이었어요! 사람들도 엄청 많았구요! 축제가 계속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여길 찾아오겠죠? 그럼 아빠 말대로 나라에서도 공원에 관심을 가져줄 거구요?”

“아마도 그렇겠지.”

“빨리 이 축제가 더 유명해졌으면 좋겠어요. 저도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지금보다 훨씬 더 노력해야겠지만요.”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구나.”

“노력해야죠! 공원을 살려야 많은 사람들이 공원에 찾아올 거고, 그래야 엄마와 다른 사람들도 외롭지 않을 테니까요.”

추모 공원에 잠든 왕웨이의 어머니와 사람들.

사람들이 저주받은 땅이라고 말하는 삭막한 공원이었지만, 축제가 세계에 알려지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공원 역시 정부에서도 ‘치료’ 를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년 전.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그때의 공원처럼 말이다.

“왕웨이. 그래도 아빠와의 약속은 지켜줬으면 좋겠구나. 너무 늦은 시간엔 귀가하지 않도록 말이야.”

“알았어요, 아빠!”

“그래. 어서 씻고 쉬거라.”

왕친이 씁쓸한 표정으로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주받은 땅. 그 땅은 아들이 그 어떤 노력을 해도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매번 거짓말을 해서 미안하구나, 왕웨이. 부디 이 부족한 아빠를 이해해주길 바란다.’

아들의 간절히 바라는 소망을 짓밟을 수는 없었다.

사실을 말했다간 희망이 절망으로 변해버릴 테니까.

말을 하더라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왕웨이가 가혹한 현실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자랄 때까지,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수밖에.

‘근데, 아까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였을까?’

샤워를 하던 왕웨이가 문득 한 남자를 떠올렸다.

조금 전, 공원에서 목격한 나비가 그려진 가면을 쓰고 있던 남자였다.

‘다들 저주받은 땅이라며 공원 근처에도 안 가려고 하는데…….’

함께 있었던 열 명의 양아치들은 그렇다 치자.

나쁜 놈들이야 사람들 눈에 띄지 말아야 하니, 간혹 음침한 곳을 찾고는 하니까.

‘……나쁜 놈들을 순식간에 제압하고, 공원 청소까지 시켰었지. 우리 엄마 비석도 깨끗하게 털어줬고.’

낯선 일이었다.

공원을 찾는 이들 대부분이 아까 그 양아치들과 같은 나쁜 놈들이었다.

대개 그곳에 모여서 못된 짓을 하거나, 작당 모의를 하며 공원을 더럽히고는 했는데.

‘그 사람은 달랐어.’

특히.

자신이 만든 엄마의 조각상을 바라보는 그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진심으로 명복을 빌어주는 사람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달까.

‘착한 사람이겠지. 꼭 그랬으면 좋겠다.’

축제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서 나쁜 일도 생기긴 했지만, 나비 가면 남자처럼 좋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리라.

기분 좋게 샤워를 마친 왕웨이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공방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자신이 변검 공연을 할 때 사용할 수 많은 가면들과 각종 조각상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맨날 맨날 축제만 했으면 좋겠다. 그럼 더 빨리 우리 마을이 유명해질 텐데.’

화반 마을.

왕웨이가 태어난 곳이자, 이제는 사라진 작은 마을이며, 지금은 추모 공원이 위치하고 있는 장소였다.

마을이 유명해지면.

공원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돼. 엄마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왕웨이는 그렇게 믿으며 습관처럼 엄마의 모습을 조각해 나갔다.

조각상이 수없이 부식되어 사라져도 그 자리를 대신할 또 다른 조각상을 세울 수 있도록.

여태 그래왔듯.

그들이 외롭지 않게.

* * *

다음 날.

수재혁은 루이스와 함께 호반 길드의 마스터를 만날 일이 있다며 행사장을 벗어났다.

다행히도 어젯밤의 술자리에서 두 사람이 좋은 관계를 만들어낸 것 같았다.

벌써부터 둘이 함께 사업적인 일을 하려는 걸 보면 말이다.

‘무작정 왕웨이의 집을 찾아갈 수는 없으니, 일단 변검술 공연이 시작될 때까지 기다려봐야 하나.’

준우는 행사장에서 협회 업무를 보고 난 뒤, 어제 양아치 놈들에게서 뺏은 돈과 물건들을 행사장 분실센터에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나서도 시간이 남아, 지금은 작은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모처럼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행사장을 살피는 준우의 눈동자에서 따분함이 보인다.

변검술 공연은 어제와 같은 저녁 시간대에 이뤄진다.

수재혁까지 자리를 비운 마당에 딱히 할 일이 없는 상황.

‘그 공원, 느낌이 묘했단 말이지.’

준우는 어젯밤에 들렀던 추모 공원으로 향했다.

시간이 여유로운 탓인지 공원에 대한 호기심이 일어서였다.

‘흐음. 나무와 풀들은 전부 죽어 있고, 비석과 조각상들은 죄다 부식된 상태야.’

어젯밤에 보았던 여인 조각상의 부식 정도는 더 심해진 느낌이었다. 밤중이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면, 묘 안의 유골들은 이미…….’

마치 누군가 일부러 공원 안의 모든 것들을 죽여 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인위적인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 뭐야? 이 저주받은 땅에 발을 디디는 놈이 있네.

불현듯.

어제 양아치 녀석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저주받은 땅이라.

준우가 그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 * *

“괜찮을까? 아무리 어제 그 남자가 우릴 그냥 보내줬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장사를 하는 게 영 불안한데.”

“가면 새 걸로 바꿔 썼잖아. 옷도 어제랑 다른 걸로 입었고.”

“그, 그래도…….”

“어제 죽어라 공원 청소까지 했고, 훔친 것도 다 돌려줬어. 그놈이 또 우릴 찾아올 이유가 뭐가 있어? 사실상, 찾기도 엄청 어려울 텐데.”

“혹시 모르니까. 뭔가 범상치 않았단 말이야.”

“걱정 마. 중국어 억양을 보아하니 축제 구경하러 온 다른 나라 사람 같던데, 이미 다른 데로 떴을 거라고.”

어젯밤, 준우에게 된통 당한 양아치들의 대화였다.

그들 중 우두머리와 한 친구는 당당하게도 행사장에서 작은 분식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어제의 일이 계속해서 떠올라 좀처럼 마음이 편치 않은 상황이었다.

“우린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거야, 일만.”

“그, 그렇겠지?”

“아직 축제 기간이 제법 남았으니까, 상황 지켜보면서 괜찮다 싶으면 다른 일도 다시 시작하면 돼.”

다른 일이란.

나름 그들의 투잡인 소매치기를 일컫는 말이었다.

터벅터벅 -

그때였다.

저만치 앞에서 손님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어서 오세……히이익!”

손님을 발견하곤 숨을 크게 들이켜는 양아치.

손님이 쓰고 있는 가면에 어제 자신들을 한참이나 굴렸던 그의 가면처럼 나비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가, 가면 새 걸로 바꿔 썼으니까, 어지간해선 알아보기 힘들겠지?”

“일단 눈 최대한 깔아. 목소리도 최대한 깔고.”

어젯밤의 그 남자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비가 그려진 가면이야, 행사장 안에서 흔하디 흔했으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야.”

“……?”

“어제 그 공원이 저주받은 땅이라고 했었지? 거기에 대해서 아는 게 있으면, 자세히 좀 말해봐.”

“……사,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은데.”

나비 가면의 남자, 준우가 피식 웃었다.

어제 자신을 향해 노골적으로 피워올렸던 마력을 뻔히 기억하고 있는데 이토록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니.

“장난칠 기분 아니야. 내가 오늘은 어제만큼 컨디션이 좋진 않거든. 어제처럼 검 휘둘렀다가 빗나가면, 이번엔 가면이 아니라 다른 데를 벨 수도 있어.”

“……어디서부터 말씀드리면 될까요?”

“네가 아는 것 싹 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당히 흥미로운걸.

준우는 사라진 마을의 전설에 대해 서서히 빠져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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