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오는 조용히 살고 싶다 (2)
원래는 은퇴식이 끝난 후 업무를 봐야 하는 준우였지만, 김강수의 배려로 오늘은 오후 반차를 쓸 수 있었다.
‘은퇴까지 한 마당에 레오를 계속 본청에 두기가 애매해하기도 하고.’
선화는 레오가 이렇게나 빨리 집에 올지 몰랐는지, 새로운 가족을 위한 특식을 준비하겠다며 장을 보러 나갔다.
수린이는 낮잠을 자고 있던 탓인지, 다소 고요한 집안 분위기 속.
“인사해, 얘들아. 오늘부터 우리 가족이 된 레오야.”
첫만남이라 그런지 어색해서였을까.
활발하던 미심이와 오복이가 낯을 가리는 느낌이었다.
평소 같으면 먼저 다가갈 법도 한데, 쭈뼛거리는 게 전부다.
은실이도 아직 경계를 하고 있는지 책상 위에 앉아 레오를 유심히 관찰 중이었다.
그리고 말순이는.
커엉…….
레오의 기에 살짝 눌렸다.
오랜 시간 동안 균열이라는 현장에서 마수들과 얽혀 지내왔던 레오라 그런지, 분위기가 다소 섬짓하기는 했다.
뭐랄까.
수린이의 중대장 놀이에 비유를 하자면.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견뎌내고, 풍파마저도 이겨낸 주임원사 느낌이 풍긴다고나 할까.
아우라 자체가 집에서 여태 집에서 곱게 자라온 반려몬 아이들과는 사뭇 달랐다.
어쩌면, 다른 아이들이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일 수도 있었다.
“처음엔 많이 어색하겠지만, 며칠 지내다 보면 금방 친해질 거야. 너희들도 처음엔 다 그랬잖아?”
긴장한 반려몬 아이들과는 달리.
레오는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오랫동안 마수들을 겪어온 레오이기도 했지만, 여태 다른 탐지견들과 함께 생활을 해왔던 레오였다. 딱히 이런 상황이 낯설지는 않았다.
스윽 -
레오가 거실 쪽으로 움직였다.
노령견이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으나, 어쩐지 느긋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내가 직접 나서는 것보단 아이들이 스스로 탐색하고, 적응하는 시간을 주는 게 좋겠지.’
어떤 것이든 강제적인 것은 좋지 않다.
말순이가 멀리서나마 레오의 냄새를 맡기 시작했으니, 이제 곧 자연스레 잘 어울릴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때 나서도 늦지 않다.
이 집이 낯설 레오의 적응을 돕기 위해 준비해둔 것들이 많았으며, 상황을 지켜보고 때에 맞는 조치를 할 생각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레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낯선 환경 속에서도 여유를 즐길 줄 아는 모습이었지만.
커엉 -
말순이가 레오에게 뭐라고 말을 건다.
대충 잘 지내보자는 의사 표현 같은 거였다.
이어, 이번엔 오복이들이 레오에게 서서히 접근했다.
레오가 쓱 쳐다보자 움찔하는 녀석들이었지만, 특유의 개구쟁이 기질이 발휘됐다.
투욱 -
어디선가 레오의 밥그릇을 챙겨오는 오복이들.
선화가 새로 구비한, 수린이가 직접 그림을 새겨 넣은 레오 전용 밥그릇이었다. 새로운 가족을 위한 선물 중 하나였다.
앞으로 여기에 배식받아 밥 먹으면 된다.
오복이들이 그리 말하듯, 뭐라고 떠들어대며 손짓발짓을 해댔다.
‘뭐, 내가 없어도 잘들 알아서 하는 것 같네. 나름 이 집에서 생활 좀 해봤다고, 오복이들이 집 소개 같은 걸 해주는 건가?’
마치 신병 오면 내무반 안내를 해주듯이.
물론, 레오는 신병 느낌이라기보단 전입해 온 선임의 느낌이 강하긴 했지만 말이다.
응가는 여기에!
오복이들이 배변 패드 위치를 안내했다.
레오가 썩 나쁜 몬스터는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녀석들도 긴장이 조금 풀린 것 같다.
여기는 놀이터!
때마침 차원문이 열려 있어서 놀이터도 안내해줬다.
크릉!
레오가 처음으로 가장 격하게 반응했다.
몬스터의 삶으로만 따지자면, 현장 경험을 통해 다양한 걸 보고 느껴왔던 레오였지만, 차원문이라는 놀이터는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기네들이 만든 것도 아닌데, 괜히 뿌듯해하는 오복이들.
탄력을 받았는지 오복이들은 집안구석구석 하나도 빠짐없이 안내를 진행했고, 덕분에 레오 역시 여태 생활해왔던 본청의 견사보다 더욱 편안한 생활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어느 방 앞에 도달하기 전까지만 해도.
크릉……?
여긴 대체 무슨 방일까.
오복이들의 안내를 받던 레오가 방 앞에 멈칫하곤 떠올린 생각이었다.
방 안쪽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안쪽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범상치가 않았다.
레오가 다가가서 냄새를 맡으려 하자.
오복이들이 일제히 그 앞을 가로막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낮잠을 깨워선 안 돼! 피곤할 때 부쩍 예민하셔!
오복이들의 말을 그렇게 알아들은 레오였기에 다소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집안의 그 어떤 곳도 소개해주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유일하게 구경조차 할 수가 없는 방이었다.
게다가.
현장 경험이 다수인 레오가 판단했을 때, 방안에는 그간 겪어왔던 마수들을 통틀어서 가장 강력한 기운을 가진 자가 있을 것임에 분명했다.
크릉…….
단지 그 기운만으로 낯선 집에서도 노령견의 품위를 잃지 않았던 레오가 처음으로 주눅이 든 모습이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게 된 것이다.
벌컥!
방 문이 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뭔가 대단한 존재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레오는 갑작스런 기운의 압박감에, 자신도 모르게 모든 털을 곧추세웠다.
그런데.
덜 뜬 눈을 비비적거리며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오옷! 드디어 신병이 와따! 환영해, 레오 이등병!”
레오를 발견한 수린이가 소리쳤다.
준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레오가 이등병이라니.
‘차라리 주임 원사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말이지…….’
전투복을 입고 낮잠을 잤던 수린이는 잠에서 깨기 무섭게 다시금 군대 놀이에 이입했다.
군대 놀이가 어지간히 재미있는 모양.
“나는 수린이 중대장이라고 해! 우리 부대에 와줘서 정말로 정말로 고마워!”
수린이는 자기소개를 한 다음 레오와 인사를 주고받았다.
레오는 눈앞의 작은 체구를 가진 여자아이에게서 어찌 이리도 강렬한 기운이 흘러나올 수 있는 건지, 아직까지 의아해하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부대원들이 전부 다 모였으니까…….”
낮잠을 자기 전에 나름의 계획을 세워둔 수린이었다.
아빠한테 군대에는 주특기와 보직이라는 게 있다고 들었었고, 부대원들이 전부 다 모이면 보직을 정해줄 생각이었다.
“……대대장님! 질문 있습니다! 군대에는 어떤 보직들이 있습니까?”
“대대장님? 아빠가 대대장이야?”
“응! 수린이가 중대장, 아빠는 대대장.”
준우는 피식 웃고는 길게 늘어진 수린이의 전투복 소매를 접어주었다.
그리고 소매를 접으면서 수린이의 질문에 답을 해주었다.
“뭐, 운전병도 있고, 통신병도 있고, 행정병도 있고, 취사병도 있고…….”
“그런 것들은 어떻게 정해집니까!”
수린이가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줘야 한다.
준우는 눈높이에 맞춰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기는 한데, 보통은 그 사람이 제일 잘하는 게 뭔지에 따라 정해지지. 원하는 보직에 지원을 할 수도 있고.”
“잘하는 거?”
“예를 들면, 은실이는 치유 능력이 있으니까 의무병이 어울리겠지.”
“의무병이 사람 치료하는 거야?”
“으음. 비슷해. 아무튼 그런 거야.”
수린이가 눈앞의 반려몬 아이들을 천천히 살폈다.
눈동자가 커지는 게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 같은 표정이다.
“좋아 그럼 은실이는 오늘부터 의무명이다!”
끼이 -?
“말순이 너는 택배병이다!”
“푸흡.”
준우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계속 무슨 병, 무슨 병이라고 말해주니까, 수린이가 뒤에 ‘병’ 자만 붙여야만 보직이 정해진 거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맨날 택배오면 말순이가 거실까지 가져다주니까, 말순이는 택배병이야. 알았지?”
커헝 - ?
“어허! 씩씩하게 대답해야지!”
컹컹!
“그리고 미심이는 주크박스병!”
캬앙 - ?
선화가 청소를 하거나 설거지를 할 때 노래를 흥얼거리고는 하는데, 가끔 미심이가 옆에서 마치 따라부르듯 울음소리를 내는 경우가 있었다.
정말로 미심이가 노래를 부르는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선화는 미심이의 그 소리를 노래라고 인지했다.
- 오빠, 우리 미심이 노래하는 것 좀 봐. 너무 귀엽지? 요즘엔 내가 노래를 안 불러도, 무슨 주크박스처럼 혼자서 이런저런 노래를 다 부르고 다닌다니까?
어쨌거나.
수린이는 선화의 유난 섞인 그 말에서 주크박스라는 단어를 기억해낸 것 같았다.
“일복이는 신발정리병! 그리고 이복이는 먼지털이병! 그리고 삼복이는…….”
일복이부터 오복이까지는 집안일로 보직이 정해졌다.
같은 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가족이니, 조금이라도 엄마 아빠의 집안일을 도와야 하는 게 당연하다면서 말이다.
“흠! 마지막은 레오인데.”
레오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떤다.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수린이의 말은 대부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 또한 수린이가 뿜어대는 강렬한 기운 탓일까.
“레오는 탐지견이었다고 해써찌?”
크릉…….
은퇴한 이 마당에 갑자기 보직이라니.
여생은 마음 편히 조용히 지내보려 했더만.
“그럼 뭐 찾는 거 잘하겠네? 그치?”
하지만, 다들 뭔가 하나씩은 하는데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는 노릇.
이젠 이 가족의 일원으로서, 이 집의 새로운 환경에도 적응을 해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레오가 장난감정리병 해! 어질러진 장난감 찾아서 장난감 상자에 넣으면 끝이야!”
반려몬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들.
그걸 맡아서 정리하는 역할이었다.
크릉…….
레오가 고개를 쓱 돌려본다.
잘 정리가 되어 있는 장난감 상자가 보였고, 생각보다 크기가 작았다. 장난감 개수는 많아야 고작 스무 개 정도밖에 되질 않았다.
“앞으로 장난감 정리를 잘 부탁한다, 레오 이등병!”
크릉 -
레오가 다시 한번 장난감 상자를 흘낏 바라본다.
기나긴 세월, 현장에서 산전수전 다 겪어온 자신에게 겨우 장난감 정리하는 일쯤이야.
아!
다행히 꿀보직인 것 같다.
***
다음 날, 아침.
선화는 레오가 새로운 가족이 된 기념으로 반려몬 아이들의 특식을 준비했다.
아이들이 먹어도 탈이 나지 않게, 생닭을 삶아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볼 요량이었다.
반려몬 아이들은 아침부터 신나게 거실에서 놀고 있었고, 수린이는 당분간 각별히 레오를 잘 살펴달라는 준우의 당부에 레오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레오, 너 미용해야게따. 털이 너무 엉망진창이야.”
머리 쪽의 털이 엉켜 있는 게 보였다.
수린이가 엉킨 털을 풀어주려 손을 가져갔다.
‘크르륵!’
몸에 손대는 건 질색인 레오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좀처럼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무엇보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묘한 기운 때문일까.
왜인지 모르게 눈앞의 어린 여자아이가 뻗어오는 손길을 뿌리치기가 힘들었다.
“레오 엄청 착하구나? 미심이는 가끔 내가 만지려고 하면 도망가는데, 넌 피하지도 않네?”
안 피한 게 아니라, 못 피한 거다.
레오는 결국 그렇게 정수리를 내어주고야 말았다.
선화의 특식으로 아침 식사를 마친 레오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특식이었던 닭요리가 아주 담백하고 맛이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배도 부르겠다.
낮잠이라도 잠깐 자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사이.
“아아, 행정반에 전파합니다!”
수린이의 어색한 군대 말투가 들려온다.
“반려몬 병사들 모두 생활관으로 집합하십쑈!”
군대 놀이에 재미를 들렸는지 이제는 반려몬 아이들도 곧잘 따른다.
수린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무섭게, 반려몬 아이들이 소파 앞에 모였다. 참고로 이 소파 앞이 수린이가 지정한 생활관이었다.
“오전 일과를 시작하게씁니다!”
일과는 딱히 별게 없다.
어제 수린이가 정해준 보직대로 해야 할 일을 하면 되는 거다.
“일과 끝나면 맛있는 간식을 주게씁니다!”
수린이의 외침과 동시에 일과가 시작됐다.
말순이는 아침에 배송 온 택배를 가지러 갔고, 은실이는 울음소리를 내며 설거지를 하고 있는 선화 옆에서 노래를 했다.
신발 정리를 하는 일복이를 필두로, 나머지 형제들 역시 집안일을 도왔다.
‘그래도 수린이의 군대놀이가 나름 도움이 되네? 선화랑 내가 해야 할 집안일이 줄어들었잖아?’
과연 이 놀이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몰라도, 준우와 선화가 손을 덜어낸 건 사실이었다.
수린이의 명령이긴 했지만, 가정을 위해서 사소한 집안일이라도 도우려는 반려몬 아이들도 기특했고 말이다.
크릉 -
레오 역시 명령엔 따랐다.
아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 집의 주인은 왜인지 모르게 준우가 아닌 수린이처럼 느껴졌고, 가장 강력한 사람 역시 수린이임에 분명하다고 판단했으니까.
아침에 반려몬 아이들이 가지고 논 장난감을 정리하는 레오. 어질러진 장난감을 물어다가 상자 안에 가져다 놓기를 반복했다.
그리 힘든 일은 아니었다.
반려몬 아이들이 많은 것에 비해, 장난감 수는 무척이나 적었으니까.
“레오 이등병! 일과 다 끝났습니까!”
크릉!
장난감정리병은 꿀보직이다.
택배병도 꿀이긴 했지만, 이것도 나름 꿀임엔 틀림없었다.
10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일과를 다 끝냈으니 말이다.
“차원문 안에 있는 장난감도 다 정리했습니까!”
크릉 - ?
이게 뭔소리지.
장난감이 더 있었다는 건가.
준우가 차원문을 열었다.
수린이를 따라 내부로 들어간 레오는 눈앞의 광경에 너무나도 놀라 자신도 모르게 혓바닥을 길게 늘어뜨렸다.
족히 2, 3백 개는 되어 보이는 각종 장난감들이 그 안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 옆에는 그 많은 장난감들을 다 보관하고도 남을 만큼의 커다란 상자가 열 개가 넘도록 놓아져 있었다.
크릉…….
꿀보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함정이 있었을 줄이야.
어쩐지, 반려몬 수에 비해 장난감이 너무 적다 싶었다.
‘수린이 중대장님 명령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레오 혼자서는 좀 힘들 것 같은데?’
준우가 놀라서 미동도 없는 레오를 가만히 응시했다.
평소엔 반려몬 아이들이 다 함께 정리를 하는 장난감이었으니, 레오 혼자서는 당연히 벅찰 수밖에 없다.
‘장난감 정리 쉽게 하는 방법이라도 알려줘 볼까?’
일과를 잘 마친다면.
수린이 중대장에게 칭찬도 받을 수 있을 터.
반려몬 아이들의 대장급인 수린이인데, 예쁨을 받게 된다면 여러모로 좋지 않겠는가.
크릉 -
때마침, 준우와 레오의 눈이 마주쳤다.
레오가 구원 요청을 담은 간절한 시선을 보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