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2화.버킹엄 궁전으로 (182/246)

◈ 버킹엄 궁전으로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다.

영국 사람이 누군가를 파티에 초대하는 것은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다’ 라는 의사 표시라고.

그렇다면.

영국 왕실에서 내게 파티 초대장을 보낸 이유 역시 마찬가지일까.

“오늘도 일하느라 고생했어, 전 서방.”

“장모님? 언제 오셨어요?”

“방금 전에.”

집에 도착하자 장모님께서 나를 보며 흐뭇하게 웃으신다.

우리 집에 와 계시는 것도 그렇고, 묘한 미소를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장모님께서는 뭔가 알고 계시는 듯한 눈치였다.

영국의 여왕님과 친분이 있으신 장모님이시지 않은가.

어쩌면, 내가 영국에 가게 될 거라는 것도 협회장님보다 미리 알고 계셨는지도 모르겠다.

“오빠!”

“아빠!”

나를 발견한 선화와 수린이가 동시에 소리쳤다.

둘 다 얼굴에 흥분이 가득하다.

‘역시나. 장모님께선 전부 알고 계셨던 거야. 이미 선화하고 수린이한테도 말한 것 같고…….’

선화가 내 왼쪽에서 팔짱을 꼈고, 수린이가 오른쪽에서 팔짱을 꼈다.

두 사람은 나를 자랑스럽게 바라보며 히죽히죽 웃어댔다.

“우리 오빠가 영국에서 어마어마한 일을 했다지?”

“맞아! 우리 아빠가 영국에서 착한 일 해가지고 몬스터랜드에서 초대장 보냈다면서!”

“몬스터랜드가 아니라 영국 왕실에서 보낸 거야, 수린아.”

“그럼 몬스터랜드 못 가?”

“못 가기는. 이 아빠가 말이다. 자그마치 시간 제한 없는 휴가를 받아왔다!”

“오오오오!”

“진짜야, 오빠? 그럼 우리 영국에서 한달 동안 있어도 돼?”

한 달은 좀 과하려나.

만약에 내가 영국에 가서 해리 사건을 통해 늑대인간 놈들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보인다면, 한 달 그 이상도 가능할 것 같기도 한데 말이지.

‘합동 수사 승인부터 받아야 해. 왕실 파티라면, 분명 영국 협회의 주요 인사들도 있을 테고.’

협회장님 말마따나 이 기회에 인맥을 좀 만들어봐야 할듯싶었다.

기왕 가는 김에 가족들끼리 행복한 시간도 보내고 말이다.

“아, 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응?”

선화가 호들갑을 떨며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척하면 척. 모녀지간에는 눈빛만 봐도 통하는 게 있는지, 수린이도 선화를 따라 옷을 갈아입는다.

“우리 오늘 어디 가?”

내가 물었다.

너무 갑자기 외출 준비를 하는 모습이 나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그마치 왕실 파티에 가는 거잖아, 우리! 일단 쇼핑부터 해야지. 거기 가면 엄청난 사람들 많이 올 텐데, 가서 꿀릴 수는 없잖아?”

“아빠! 난 꿀리기 싫어!”

“우리 오빠 기 살려주려면 나부터 예쁘게 하고 가야 돼. 그래야 사람들이 얕보지 않는다고.”

“나도 우리 아빠 기 죽는 거 싫어! 예쁜 옷 사고 그거 입고 몬스터랜드 갈래!”

죽이 잘 맞는 모녀다.

어째, 나 기 살려 주려는 게 아니라 다들 목적이 다른 데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전 서방, 자네는 안 가?”

어느새 장모님께서도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나는 잠시 멍하니 세 여자를 바라보고 있다가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여자들끼리 오붓하게 쇼핑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생애 첫 왕실 파티잖아? 옷 한 벌 기가 막힌 걸로 쫙 뽑아줄 테니까, 자네도 따라 와.”

“옙!”

역시 사위 사랑은 장모님이라고 했던가.

말씀은 한 벌이라고 하셨지만, 장모님께선 그날 내게 열 벌도 넘는 옷을 선물해주셨다.

***

장모님께선 영국행에 동행하셨다.

나도 나지만, 장모님 역시 영국 왕실 측의 초대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왕실 파티에 초대되는 건 전생과 이생을 통틀어 처음이라 그런지, 장모님과 함께라는 사실은 든든할 수밖에 없었다.

‘장모님 덕분에 엑시스 전용기 타고 편하게 갈 수도 있고 말이지.’

장모님께 들은 바에 의하면, 영국 왕실에서 후원하는 헌터 중 한 명으로 내가 추천을 받았다고 한다.

나를 추천한 사람이 누구인지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것 때문에 여왕이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 내가 초대받은 이유였다.

‘루이스이려나? 하지만, 루이스가 그만한 권한까진 없을 텐데…….’

어쩌면, 그의 아버지일 가능성도 있다.

내게 목숨을 빚진 루이스를 대신해 보답을 하려는 것인지도.

어쨌거나, 내 인생에 이런 호사를 누려볼 기회가 생겼다는 것은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가장으로서 선화와 수린이에게 자랑할만한 일이기도 했고 말이다.

“마이 네임 이즈 수린 전!”

“옳지, 옳지! 잘한다, 우리 수린이!”

“마이 맘스 네임 이즈 선화 수!”

“우리 수린이 영어 너무 잘하는 거 아냐?”

“헤헤.”

옆쪽을 슬쩍 쳐다보니 수린이가 한창 영어 공부 중이다.

영국 간다고 영어 공부해야 한다기에 문장 몇 개 알려줬었는데, 선화 앞에서 계속해서 반복 학습을 하고 있었다.

“나 영어 엄청 잘해?”

“잘하고 말고. 아빠가 방금 전에 알려준 건데, 발음까지 너무 완벽하잖아?”

“어떡하지.”

“뭘 어떡해?”

“영국 갔는데, 사람들이 나 영어 너무 잘해가지고 놀라면 어떡해.”

“뭐어?”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여튼 귀엽다니까.

쉬운 문장인지라 누구나 금세 따라 할 수는 있다.

그런데, 확실히 수린이가 학습이 빠르다는 걸 발음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마치 원어민 같은 발음이랄까.

‘뭐, 내 딸이니까 마냥 좋게 들리는 걸 수도 있겠지만…….’

반복해서 문장 연습을 하던 수린이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뭔가 고민거리가 생긴 모양.

“아빠. 근데, 사람들이 영어 누구한테 배웠냐고 물어보면 어떡해?”

“왜? 수린이가 영어 너무 잘해가지고?”

“응!”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물어봤으니 알려는 줘야겠지.

“만약 누가 그렇게 물어보면, I learned it from my……아, 아니다. 이건 문장이 좀 어렵나?”

“안 어려운데! 나 할 수 이써!”

“우리 수린이 영어 잘하는 거야 잘 알지. 그래도 오늘 너무 많은 걸 배워서 헷갈릴 수도 있으니까, 그냥 쉽게 ‘My dad told me’ 라고 하는 게 좋겠네.”

“마이 대드 톨드 미?”

“그래, 마이 대드 톨드 미!”

“오케이! 마이 대드 톨드 미!”

영어 공부를 하던 수린이는 어느새 잠이 들었고.

주변이 고요해지자 나는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출발 전, 협회에서 연락이 왔었다.

영국에서 합동 수사 요청을 거절했다고.

네크로맨시아와 관련된 일이라 영국 왕실에 민감한 부분인만큼, 일단 자체적으로 사건을 해결해보도록 하고 차후에 정 안 되면 도움을 요청하겠다고 뜻을 밝혀왔다.

‘영국 헌터 협회장님도 이번 파티에 오시려나?’

늑대인간 사건을 쫓기 위해선 해리 사건에 대한 정보가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합동 수사가 불발된 상황에 그들이 관련 정보를 우리에게 내어줄 리는 없었다.

‘한국 측에서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갖고 있다고 말했는데도 단번에 거절할 줄이야.’

왕실 관련 일이라 그런가.

조금 과하게 보수적이지 않나 싶다.

“장모님, 혹시 영국 헌터 협회장님에 대해 좀 아세요?”

“영국 헌터 협회장?”

“아아, 영국에선 보통 헌터 협회가 아니라 헌터 연대라고 부른다고 하던가요?”

“헌터 연대장 말하는 거구나? 흐음. 나도 잘은 모르는데, 사교계에서 제법 유명한 사람이야. 제 사람이다 싶으면 밑도 끝도 없이 친절한데, 처음엔 낯을 아주 많이 가린다고 하더라고. 친해지는데 시간이 좀 오래 걸리는 타입이랄까.”

“당연히 장모님께서도 친분이 있으실 줄 알았어요. 장모님께선 영국에 두루두루 인맥이 넓으시니까…….”

“나랑 성격이 안 맞더라. 워낙에 보수적인 타입이라.”

“그렇군요.”

살짝 아쉽다.

영국 협회장님이 장모님과 친분이 있으셨으면, 다이렉트로 합동 수사 부탁을 하는 것도 가능했을 텐데 말이다.

‘일단, 루이스 쪽을 최대한 공략해봐야 하나.’

기왕 사교 모임에 가는 건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올 수는 없었다.

최소한 홀리 나이트와의 관계라도 돈독하게 만들어 놓는다면, 차후 여러모로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홀리 나이트 길드 마스터라면, 영국 협회장님과도 친분이 있을 테니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고민을 거듭하다 문득 창밖을 내려다보니, 어느새 런던의 모습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

영국 사람이라면, 자신들의 여왕이 반려몬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걸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여왕님이 키우는 반려몬이 다섯 마리나 되며, 그녀의 취미또한 반려몬 공부였고, 왕실 내에서도 반려몬 관련 행사가 자주 주최되곤 했으니 말이다.

이번 버킹엄 궁전의 파티 역시 반려몬 동반이 가능했다.

프레디 역시 항상 그래왔듯, 자신의 반려몬인 레드 독 알렉산더와 함께 연회장 앞에 섰다.

“왜 그래, 알렉산더?”

“어디 아픈가? 갑자기 얘가 왜 이러지?”

그런데 문제가 생겨버렸다.

여태 잘 따라오던 알렉산더가 연회장 입구 쪽에서 걸음을 멈춘 채 움직이질 않는 것이었다.

오히려 힘을 주며 버티기까지 했다.

마치 안에 들어가기 싫다는 듯이.

“오면서 어딜 다쳤나? 지금껏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프레디가 알렉산더의 몸을 샅샅이 살폈다.

그러나 다치거나 불편해 보이는 곳은 전혀 없었다.

“우리 말순이랑 비슷하게 생겼네!”

그때였다.

동양의 외모를 가진 어린 여자아이가 알렉산더 근처로 다가왔다.

여자아이는 알렉산더를 빤히 바라보더니.

온몸에 힘을 잔뜩 주고 있는 녀석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가 불편해 보이는데…….”

알렉산더를 향해 뭐라고 속삭이는 여자아이.

그러자, 알렉산더도 마치 뭐라고 말을 하는 것처럼 컹컹 짖어댔다.

‘뭐지? 설마, 이 여자아이가 알렉산더랑 대화가 가능할 리는 없고…….’

프레디는 잠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알렉산더가 짖는 소리를 가만히 듣던 여자아이가 이내 씩 미소를 지어 보인다.

“혹시 얘가 지금 차고 있는 하네스가 새거에요?”

“…….”

여자아이가 물었지만, 프레디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안타깝게도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눈치 빠른 프레디의 아내가 통역 기능이 있는 아티팩트를 빠르게 꺼냈다.

사교 모임에선 간혹 사용할 일이 있었기에 챙겨왔는데, 마침 쓸 일이 생긴 것이다.

동시통역이 가능하게끔 만들어진 아티팩트라, 여자아이 역시 프레디와의 의사소통이 쉽게 가능했다.

“하네스가 새 거라서 불편한 것 같아요. 레드 독 중에는 낯을 많이 가리는 아이들이 있는데, 불편함이 심하면 불안함을 느끼기도 한 대요!”

“하, 하네스가 새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얘가 말해줬어요. 그리고 딱 봐도 새 건데요?”

“알렉산더가 말을 해줬다고……?”

프레디는 그냥 아이가 하는 장난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반려몬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듣도 보질 못했으니까.

하지만, 하네스가 새 것이라는 말은 진짜였기에 다소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저기 안에 사람들이 엄청 많잖아요? 그러면 얘가 더 많이, 많이 불안해서 갑자기 무서운 걸 수도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안 들어가려고 하는 거 아닐까요? 헤헤.”

“…….”

프레디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조금 전 약속 장소인 연회장 앞에서 아내를 만났고, 아내가 하네스 하나를 새로 사 왔었다.

알렉산더의 하네스가 많이 낡아, 연회장에서 만날 사람들이 수군댈지도 모른다면서.

“일단, 하네스를 교체해볼까요?”

아내가 물었다.

프레디가 직접 알렉산더의 하네스를 교체했고, 정말이지 신기하게도 알렉산더는 경직된 몸을 풀었다.

“……대단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처럼 움직이는 알렉산더.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문제였고, 하네스 하나 새 걸로 채운 작은 일로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렇기에 프레디 본인도 난감한 상황이었는데, 그걸 갑자기 등장한 여자아이가 해결해버렸으니 실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지식은 대체 어디서 배운 거지?”

프레디가 묻자, 여자아이가 두 눈을 깜빡거렸다.

잠시 생각에 잠긴 여자아이는 때마침 알맞은 대답이 떠올랐는지, 씩씩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이 대드 톨드 미!”

“아버지가 알려줬다고?”

“예스! 예스!”

프레디가 기특하다는 듯 웃으며 저 멀리를 응시했다.

여자아이와 같은 동양의 외모를 가진 남녀가 이곳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눈앞에 있는 아이의 부모인 모양.

“수린아! 한참 찾았잖아! 갑자기 막 뛰어가 버리면 어떡해!”

“미안해, 아빠. 말순이랑 비슷하게 생긴 애가 보이길래…….”

선화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준우가 수린이와 함께 있었는데, 갑자기 수린이가 준우의 손을 놓더니 어디론가 뛰어간 것이었다.

워낙에 사람이 많은 장소였던지라, 인파 속에서 수린이를 찾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아빠가 너 잃어버리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어디 다친 데는 없지? 응? 괜찮은 거지?”

“나는 괜찮아, 아빠…….”

수린이가 마음먹으면 못 하는 게 없다.

손 뿌리치는 거야 문제도 아니고, 전력으로 뛰기 시작하면 준우도 모든 마력을 끌어올려야 잡을 수가 있었다.

뭐, 설마 수린이가 여기서 길을 잃기야 하겠냐 만은.

그래도 아직 수린이었기에 준우와 선화가 걱정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빠, 화나써?”

“화 안 났어. 좀 놀라서 아빠도 모르게 큰 소리 낸 것 같네. 그냥 아빠가 너무 걱정이 돼서 그런 거야. 혹시라도 우리 수린이 다칠까 봐. 앞으론 막 아빠 손 뿌리치고 혼자서 다니면 안 돼. 알았지?”

“응! 미안해, 아빠!”

준우는 수린이를 품에 꽉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된 후에야, 뒤늦게 누군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이 아이의 아버지 되십니까?”

귓가에 들려오는 영국식 영어 발음.

준우가 아차 싶어,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혹시, 저희 딸이 실례를 범한 건 아닌지…….”

“실례라니요. 오히려 제게 아주 큰 도움을 줬습니다. 훌륭한 따님을 두셨군요.”

“예?”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서로 통성명이나 하도록 하죠. 전 영국 헌터 연대장 프레디 스톤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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