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터 서바이벌
얼마 전, 수태광은 선화에게서 부탁 하나를 받았다.
소개해줄 사람이 있는데 한번 만나보면 안 되겠느냐고.
일본에서의 활약과 신켄 지분 매입 후 꽉 찬 스케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수태광이었지만, 딸의 부탁에 오늘 점심엔 잠깐 시간을 내기로 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회장님! KBC 예능국 PD 박무영입니다!”
“반갑군요, 수태광입니다.”
선화가 소개해준 이는 다름 아닌 박무영.
멍크의 형이자, 일전에 ‘우리 집에 몬스터가 산다’ 에 출연 이후 연을 맺게 된 사람이었다.
‘KBC 예능국 PD가 왜 나를?’
명함을 받아든 수태광은 잠시 의아해했다.
간혹 각 방송국의 보도국장들이 자신을 만나고자 하는 경우는 있어도, 오늘처럼 예능국 소속 PD가 만남을 요청한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수태광이 묘한 시선으로 박무영을 훑었고.
박무영 역시 다소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단 식사부터 할까요?”
어색한 분위기 속 선화가 길어지려던 침묵을 깼다.
엑시스 본사 인근의 조용한 한식당에서 만난 세 사람은 일단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오늘 미팅의 목적은 ‘섭외’ 였다.
박무영은 틈을 보다가 조심스레 본론을 꺼냈다.
“박 PD님의 프로그램에 나를 섭외하고 싶다? 이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회장님!”
박무영이 최근 새로운 프로그램을 기획했는데, 해당 프로그램 섭외 1순위로 수태광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프로그램 제목은 ‘헌터 서바이벌’.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쉽게 말하자면 헌터들이 출연해 서로의 힘을 겨루는 거다.
제일 재미있는 게 싸움 구경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한데, 자그마치 헌터들의 싸움이 소재였다.
‘예능이라. 뭔가 나하고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수태광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사실 준우가 회귀하기 전에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탑 예능을 일컬을 때마다 손꼽는 프로그램이 바로 헌터 서바이벌이었던 만큼, 박무영은 해당 프로그램이 가지게 될 파급력을 언급하며 수태광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박무영이 원하는 것은 수태광이 ‘기술 자문’ 자격으로 출연해주는 것이었다.
아무렴 대한민국 최고 길드의 수장이자, 세계 최강의 헌터 중 한 명이지 않은가.
프로그램 내 기술 자문 위원인 수태광.
그런 그가 참가자들의 기술과 능력 활용법을 조언해주고, 교정해주는 수태광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박무영은 두근거리는 설렘에 벌써부터 심장이 쿵쾅거렸다.
“일단 모든 간접, 직접 광고는 엑시스 계열사의 제품들로 꾸릴 겁니다. 천하의 엑시스 회장님께 과연 출연료와 관련된 부분이 중요하겠느냐만, 이 역시 역대 최고 출연료를 드리도록 할 거구요.”
“흐음.”
“만약 차후에 엑시스 측에서 자체 광고를 찍는다거나, 방송 쪽으로 도움이 필요하다면 저희 사장님께서 나서서 전적으로 지원하신다고도 하셨습니다. 게다가, 단순히 이런 것들뿐만이 아니라…….”
“미안하게 됐습니다.”
“……예?”
손목의 시계를 확인한 수태광이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일전에 미리 잡아둔 미팅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더 이상 이곳에서 쓸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프로그램 기획 단계부터 저를 염두에 두셨던 것은 참으로 감사합니다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론 엑시스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이 드는군요.”
방송 출연 의사는 정중하게 거절을 했다.
딱히 예능이라는 게 자신과 맞지 않을 거란 생각 때문만은 아니었다.
엑시스의 이미지,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방송에 뺏겨야 할 시간 등 그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손해라고 판단한 것이다.
사업가로서 가장 중요한 건 기업에게 득이 되는 일이다.
아무리 박무영이 좋은 조건들을 제안했다지만, 안타깝지만 수태광의 마음을 혹하게 할 정도로는 부족했다.
자그마치 엑시스였다.
그런 길드의 수장을 섭외하는 일이 쉽지 않을 거라는 건 박무영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최선은 물 건너갔고. 썩 내키진 않지만, 결국 차선책을 쓸 수밖에 없겠군.’
선화와의 인연으로 힘들게 마련된 자리였으나, 결국 예상대로 흘러갔다는 게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또 뵙도록 하죠.”
“예! 조심히 들어가십쇼, 회장님!”
수태광과 박무영의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서로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직감했다.
하지만, 일주일 뒤.
포털사이트 메인에 걸린 기사 하나가 상황을 뒤바꿨다.
< 피스 길드 회장 민동식, KBC 새 예능 ‘헌터 서바이벌’ 기술 자문 위원으로 참여! >
수태광은 우연히 해당 기사를 보게 되었다.
얼떨결에 민동식의 인터뷰 내용까지도.
- 민 회장님의 출연으로 국민들의 반응이 뜨겁습니다. 혹시 출연을 결심하신 계기가 있으시다면?
- 딱히 특별한 이유라고 하기엔 뭐 하지만, 박무영 PD가 워낙에 간절하게 부탁을 해와서요(웃음). 무엇보다 젊고, 유능한 헌터들에게 선배로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일이기에 좋은 마음으로 참여해 보자, 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기사를 읽던 수태광이 헛웃음을 쳤다.
처음 박무영이 섭외를 하려고 했던 건, 민동식이 아니라 본인이었지 않은가.
‘간절하게 부탁하긴 무슨. 섭외 1순위가 나였다는 걸 알면, 민망함에 고개도 못 들 텐데? 쯧쯧.’
일전에 패션쇼에서 황장미에게 꽃다발을 들이밀던 민동식이기 때문이었을까.
기사를 읽어가는 수태광의 표정은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 대형 길드인 피스의 수장까지 프로그램에 참여함에 따라, 혹시나 또 다른 대형 길드 중 하나인 엑시스의 수태광 회장님께서도 출연하지 않을까 하는 국민들의 기대가 있습니다만?
대형 길드에도 급이라는 게 있는데, 기자가 감히 피스 따위와 비교를 한 것이 언짢게 느껴져서였다.
하지만.
진짜로 언짢았던 대목은 민동식의 대답이었다.
- 수태광 회장님께서 이 프로그램에 참여를요? (놀람). 안타깝지만, 아마 그럴 일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즘 더 바빠지신 분이시라. 게다가, 최근 경영 쪽에만 몰두하고 계셔서 현장감이 조금 떨어지기도 하셨고, 방송 현장에서도 젊은 후배들과 함께 촬영을 이어 가기엔 조금 버겁지 않나 싶은데……(웃음). 이거, 농담인 거 아시죠?
- 당연히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두 분께서 워낙에 오래전부터 절친하셨으니까요.
“민동식이, 이 새끼 봐라?”
수태광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왜인지는 몰라도, 패션쇼 이후로 유독 엑시스에 비아냥거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듯한 피스의 민동식이었다.
‘설마, 할망구 때문에?’
일단, 그건 둘째치고.
연배도 비슷하면서 나이를 가지고 이런 식의 저격을 하는 게 참으로 화가 나기도 했다.
농담이라고는 하지만, 어째 농담같지 않은 기분이랄까.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뭐? 내가 현장감이 많이 떨어져?”
잠시 고민에 잠긴 수태광.
그가 최 비서를 호출했다.
“최 비서, KBC에 박무영 PD라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하고 당장 미팅 잡아.”
“예?”
“한평생 아수라장에서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온 나 수태광과 도련님 마냥 포근한 요람에서 우쭈쭈 지내 온 민동식이의 차이가 뭔지를 내가 직접 보여줘야겠어.”
***
준우와 선화는 퇴근 후에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가볍게 맥주 몇 캔 사서 영화 한편을 감상하기 직전, 낯익은 광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헌터 서바이벌 참가자 모집?”
낯익은 광고였다.
준우에겐 회귀 전에도 본 광고였고, 실제로 방송을 보기도 했었으니까.
“박무영 PD님이 새로 연출하신다고 하더라. 저번에 우리 아빠 기술 자문으로 섭외하고 싶다고 하셔서 소개해드렸는데…….”
“까였지?”
“응?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어째 느낌이 그랬을 거 같아서.”
준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회귀 전에도 까였을뿐더러, 대충 눈치껏 생각해도 장인어른께서 출연에 응할 거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엑시스와 예능, 장인어른이 그리 좋아하실 만한 그림도 아닌 것 같고.’
아마, 피스의 민동식 회장과 다른 몇몇 길드의 수장들이 기술 자문을 맡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회귀 전에도 그랬으니 말이다.
“2인 1조로 참여할 수 있다던데? 혹시 협회에서 오빠한테 나가라는 소리는 없었어?”
“협회에선 이젠 나 굴리기 눈치 보일걸. 한동안 워낙 부려먹었어야 말이지.”
“하긴, 그것도 그래. 우리 오빠 일본에서도 개고생했는데, 또 부려먹음 사람도 아니지!”
시즌1은 출연자가 국내의 길드와 협회, 용병단으로 국한되지만, 시즌2부터는 전 세계로 참여자 범위를 확장시키기까지 했던 엄청난 인기의 프로그램이기도 했었다.
“응? 뭐야, 이거?”
“왜 그래?”
그때였다.
갑자기 선화가 어떤 기사를 발견하더니, 대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사람 진짜 미친 거 아냐?”
“……?”
“아니, 무슨 인터뷰를 이딴 식으로 해? 이거 대놓고 우리 아빠 까는 거잖아?”
“무슨 소리야, 그게?”
선화가 준우에게 핸드폰 화면을 보여줬다.
화면에는 이번에 헌터 서바이벌 기술 자문으로 참여하게 된 민 회장이 수태광에게 비아냥거리는 듯한 내용의 인터뷰가 담겨 있었다.
‘이, 이 인간 갑자기 왜 이래? 회귀 전 인터뷰엔 이런 내용이 없었지 않았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없던 일이었다.
당시엔 농담 같은 걸 하지도 않았을뿐더러, 농담조로 엑시스나 수태광을 까내리는 발언 역시 일절 없었다.
‘설마……?’
얼마 전.
황장미의 더 로즈가 엑시스와 거래 계약을 체결했다는 기사가 떴다.
만약, 황장미에게 사심이 있던 민동식이 괜한 질투심에 그런 것이라면…….
‘……장인, 장모님이 회귀 전보다 빨리 가까워지시니, 이런 식으로도 앞일이 바뀌네.’
문제는 그저 그뿐만이 아니었다.
선화가 열을 잔뜩 열을 올린 상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아버지를 누군가가 험담하는데 어찌 기분이 좋을 수가 있겠는가.
뭐, 농담이라고 하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패션쇼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선화가 판단했을 때, 민동식의 발언을 마냥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 아저씨 진짜 이상하네. 패션쇼에서 엄마를 졸졸 따라다니질 않나, 꽃다발까지 주면서 치근덕대질 않아.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데, 더 싫어지려고 그러네!”
“으음, 나도 싫어.”
“그치? 역시 오빠도 나랑 생각이 같을 줄 알았어! 아무튼, 진짜 마음에 안 들어! 미친 사람 같애!”
생각할수록 열이 받는지.
선화가 대뜸 핸드폰을 꺼내 수태광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기사 봤지?”
- 너도 봤느냐.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 민동식이 그 배은망덕한 자식. 피스 창설하고 허우적거릴 때, 내가 얼마나 많은 조언과 도움을 줬는데. 쯧쯧!
역시 부녀는 부녀인가.
뜬금없이 툭 건넨 말임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안 그래도 그 아저씨 엄마한테 치근덕대는 거 보기 싫은데.”
- 당연하지! 선화, 네 애비가 누구냐? 엑시스의 수태광 아니냐!
“아빠, 그거 방송하겠다고 그래. 방송 나가서 아빠가 아직도 얼마나 팔팔한지 보여주라고! 우리 아빠 아직 안 죽었지? 그치?”
- 죽긴 누가 죽어! 현장에서 며칠 밤을 새워도 체력이 남아도는구만!
“그렇지! 그렇게 빠이팅있게 해야지! 우리 아빠는 내가 아는 노년들 중에 가장 체력이 우월한 노년이라고!”
수태광의 흥분한 목소리는 핸드폰 너머의 준우에게도 크게 들려왔다.
서로 언성을 높여가며 의기투합하는 부녀의 모습이 참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그래, 선화 입장에서는 정말 화가 많이 날 거야. 아버지를 생각하는 딸의 마음이란 게 그런 거니까. 분명 수린이도 나중에 크면 저렇게 내 편을 들어주겠지?’
순간, 지난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장인어른과 엑시스, 그리고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면 항상 나서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던 준우였다.
그게 자의였든.
혹은 장인어른의 뜻이었든.
“아빠, 이건 내 생각인데. 아빠까지 나설 필요는 없지 싶어. 차라리 우리 오빠를 방송에 내보내는 거야! 엑시스의 저력을 보여주는 거지.”
“좋아! 내가 나가도록 하지!”
준우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생각해보니, 얼마 전에 수재혁이 미래의 장인어른을 만나 뵙고 정식으로 결혼 허락을 받을 거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일본 대균열 이후 형님께서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계시고.’
만약, 선화의 말대로 수태광이 엑시스의 저력을 보여주고자 한다면, 정신없이 바쁜 수재혁을 대신해 자칫 준우가 나가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장인어른의 명으로 결국 내가 나가게 될 거! 이번엔 내가 먼저 나서서 해주는 게 그림도 좋잖아? 그래야 선화도 더 기분 좋게 웃을 테니까!’
준우가 내심 뿌듯한지 히죽거리고 있었고.
선화는 그런 남편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응? 뭐야, 오빠? 갑자기 칼은 왜 갈아?”
뜬금없이 보이지 않는 검을 꺼내 갈고 있는 준우.
얼굴은 이미 결의에 찬 표정이다.
“헌터 서바이벌, 미리 준비해야 하지 않겠어? 민 회장이 엑시스 얕보는 꼴 다신 볼 수 없게 해줄게, 내가.”
“역시 내 남편! 들었지, 아빠? 오빠는 이미 준비됐대!”
- 껄껄! 내가 부탁을 하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역시 내 사위구만! 준비성이 아주 철저해!
“우리 오빠도 아빠처럼 빠이팅이 넘치는 사람이거든!”
2인 1조라던데.
엑시스의 누구하고 같이 나가게 되려나.
준우가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때.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형님께선 왜 나한테 전화를……?”
수태광과 선화과 통화를 하고 있는 사이.
준우는 수재혁의 전화를 받았다.
“형님! 마침 상의드릴 일이 있었는데, 혹시 헌터 서……?”
- 헌터 서바이벌.
준우보다 수재혁이 먼저 선수를 쳤다.
다짜고짜 그 한마디를 던진 수재혁의 목소리는 그 여느 때보다 묵직하고 진지했다.
- 그거 2인 1조라던데, 자네 나랑 나가도록 하지.
“형님께서 출연 의사가 있으신 줄은 몰랐는데요? 안 그래도 그 얘기 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엑시스에서 형님이 나가시는 거면 굳이 저까지 나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 엑시스 소속으로 나갈 생각이 없어서, 이렇게 자네한테 부탁하는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