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땡땡이는 즐거워
어린 사자 심바를 시작으로.
기린과 원숭이, 그리고 토끼를 관람하고 왔다.
슬슬 배가 고파지려는 이때.
‘아’ 자로 시작하는 문구는 어느 정도 완성이 됐다.
‘아름다운 OO 동물원’.
추측하건대, 아마 아름다운 우리 동물원이 최종 문구가 되지 않을 듯싶다.
그와는 별개로 수린이가 옆에서 ‘아빠가 조아 죽게따!’를 주문처럼 외치고 다니는 건 너무나도 듣기 좋았다.
“수린이 배 안 고파? 밥 먹고 호랑이랑 곰 보고 나서 아쿠아리움으로 가면 될 것 같은데.”
“배고파! 나 저거 먹을래!”
동물원 내 작은 프렌차이즈 가게를 가리키는 수린이.
작은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햄버거 사진이 떡하니 붙어 있었다.
“끄응, 햄버거라…….”
언젠가 선화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수린이한테 절대 아무거나 먹이지 말라는 그 말이.
‘……우리 수린이는 드래곤이라 아무거나 먹어도 다 잘 소화하고, 건강에 아무런 이상이 없을 거라고 그렇게 말해도 소용없었는데.’
물론, 햄버거 같은 패스트푸드를 먹지 말라는 게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으로 제한이 되어 있었다.
아이에게 좋은 것, 건강한 것만 먹이고 싶은 엄마들의 마음이란 게 바로 그런 거겠지.
“불고기 버거 먹을래, 불고기 버거!”
“수린아. 이번 주에 햄버거 언제 먹었었지?”
“어제, 어제!”
아직 날짜에 대한 개념이 확 잡혀 있지 않아서, 그저께를 어제, 어제라고 표현하는 수린이다.
“그저께면 월요일이네. 오늘은 수요일이고.”
“딩동댕!”
“엄마가 일주일에 햄버거 한 번만 먹으랬는데.”
“삐이! 삐이! 삐이!”
만화에서 들었던 경고음 소리를 입으로 표현해 내는 소리였다.
나도 얼추 들은 적이 있었는데, 수린이가 내는 소리랑 상당히 비슷하게 느껴진다.
‘우리 수린이가 음악에 소질이 있나? 소리로 표현하는 걸 잘하는 것 같네.’
아무튼.
중요한 건, 이번 주에 햄버거를 한번 먹었으니 오늘은 안 된다는 거다.
“……아라써.”
선화와의 약속을 언급하며 안 된다고 말하자, 수린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째 말은 알았다고 하는데 표정이 영 시무룩하다.
쓱 주변을 둘러보자.
햄버거 가게가 바로 앞이라 그런지, 놀러 온 사람들이 죄다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다들 먹고 있으니 먹고 싶을 만도 하지.’
괜히 마음이 약해진다.
선화가 종종 내가 마음이 약해서 수린이 돌보긴 글렀다고 하곤 했었는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도 같다.
이대로 가다간 수린이가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줄 테니까.
그래도 뭐 어쩌겠나. 해 주고 싶은걸.
“엄마한텐…… 비밀로 하면…… 될 거 가튼데…….”
수린이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중얼거린다.
특유의 아빠 홀리기 애교가 또 튀어나온 거다.
“흠.”
고민을 하는 시늉을 하자.
수린이가 붉어진 눈시울과는 정반대로, 입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괜차나! 햄버거 안 먹어도 돼! 엄마랑 약속했으니까!”
언젠가 TV에서 본 적이 있다.
웃고 있는데, 눈은 슬퍼 보이는 연기를.
‘이게 만약 수린이가 연기를 하는 거라면, 수린이는 천상 연예인이다!’
아까 보니 음악에도 소질이 있는 것 같고.
연기까지 이렇게 잘하는 거면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연예인이지 않은가.
‘장인어른께서 이걸 보시면 엄청 흡족해하시겠어.’
나는 눈시울이 붉어진 수린이를 달랬다.
여전히 햄버거는 안 먹어도 된다고 말하는 수린이지만, 오늘만, 진짜 딱 오늘만 예외로 두기로 했다.
나란 남자.
수린이의 마음을 무시하기엔 너무나도 나약한 놈인 것 같다.
“잘 먹겠습니다아아!”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어. 그리고…….”
“엄마한텐 비밀?”
“……척하면 척이네.”
수린이가 햄버거를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주변을 살폈다.
사람들이 꽤 있기는 한데, 드넓은 동물원 내부에 비하면 현저히 적은 숫자다.
오늘이 평일이라 사람이 없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장인어른께서 동물원을 인수하시기 전에 내가 확인했을 때도 틀림없는 적자였다.
“장인어른께서 여길 왜 인수하셨을까…….”
“인수가 뭐야?”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수린이가 물었다.
알아듣기 쉽게 ‘사는 것’이라고 설명해줬다.
“할머니 때문인가 보다!”
“응? 할머니?”
“저번에 할머니가 그래꺼든. ‘호호! 나는 나중에 은퇴하면 세계 최초로 반려몬 동물원 만들어서, 반려몬 수백 마리랑 평생 행복하게 살아야지!’ 이렇게!”
장모님 말투를 그대로 따라 하는 수린이였다.
이젠 하다, 하다 성대모사에까지 재능을 보이다니.
“그러니까, 할머니가 동물원 갖고 싶다고 해서 할아버지가 산 거다?”
“그치, 그치! 할아버지가 할머니 엄청 조아하니까! 아빠가 엄마 조아하는 거처럼!”
애들 눈에는 감정이란 게 다 보이는가 보다.
아니, 말하지 않아도 그게 느껴지는 거겠지.
“수린이는 할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 뭐라고 했어?”
“나도 동물원 좋다고 해찌! 나중에 커서 동물원 할 거라고!”
장모님의 발언 한 번에 동물원을 사들이신 건 좀 과하다 싶었다.
장인어른이시라면 충분히 가능할 만도 한 일이었지만, 뭔가 동물원을 사기 위한 동기로는 살짝 부족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수린이까지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면 말이 달라진다.
‘장인어른께서 플렉스 하시기엔 충분하지.’
장모님과 수린이의 콤보.
이 정도면 장인어른께서 동물원을 사고도 남을 법하다.
회귀 전엔, 큰형님 댁 쌍둥이 조카들을 위해 학교까지 짓지 않으셨던가.
당시 장인어른께서 지으셨던 학교가 학업이나, 인재 양성 면에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렸던 걸 보면, 지금 사들인 동물원도 마냥 이대로 적자만 보고 계시진 않을 거다.
분명히 다 뜻이 있으실 터.
어쩌면, 장모님의 바람대로 세계 최초의 반려몬 동물원을 만들어 적자를 순식간에 흑자로 만드실 수도 있는 분이었다.
“다 먹어따아!”
콜라까지 다 마신 수린이가 부풀어 오른 배를 똥똥 쳐 댔다.
햄버거에 콜라까지,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먹이다니.
선화 입장에선 내가 정말 나쁜 아빠겠지…….
그래도 흡족하게 웃고 수린이를 보고 있자니, 나쁜 아빠도 썩 괜찮은 구석이 있지 않나 싶다.
“다 먹었으면, 이제 호랑이 보러 갈까?”
“오케잇!”
수린이의 입을 닦아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스로 먹은 건 스스로 잘 정리하기까지 하는 수린이었다.
“호랑이 보러 레츠 꼬우!”
배가 부른 탓인지, 걸음걸이가 뒤뚱뒤뚱 펭귄 같아진 수린이의 뒷모습을 보며 따라 걸었다.
얼마나 더 관람을 이어 갔을까.
어느덧 우리는 최종 목적지인 아쿠아리움에 도착했다.
* * *
아쿠아리움의 인기 스타인 벨룬이와의 사진만 찍으면, 이벤트 완료 조건인 마지막 글자를 완성하게 된다.
고로 우리 수린이도 갖고 싶어 하던 벨룬이 모자를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것.
한데.
현장엔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한 것 같았다.
“사람 엄청 많아, 아빠!”
수린이의 손에 이끌려 거대한 수조 앞으로 다가갔다.
처음에는 벨룬이가 워낙 인기 스타이기에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모여 있는 거구나, 했었는데,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엄마, 이러다가 오늘 사진 못 찍는 거 아니야?”
“나 벨룬이 모자 갖고 시픈데…….”
“30분 넘게 기다렸는데도 벨룬이가 여기로 안 오자나. 그럼 사진도 못 찍는 거구, 흐잉.”
벨룬이의 인기도 인기지만.
사람들이 모여든 것에는 정작 무대의 주인공인 벨룬이가 수조 구석 쪽에 박혀서 관중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빠, 벨룬이 보여?”
“흐음, 잘 안 보이네.”
꽤 능력 좋다는 소리를 듣는 나도 멀리 있는 벨룬이는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무슨 해저 동굴 같은 곳에서 거대한 몸을 꼼지락거리고는 있는데, 정확히 뭘 하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보여, 헤헤.”
“수린이는 보인다고? 저렇게 어두컴컴한데?”
“완전 잘 보여!”
아, 깜빡 잊고 있었다.
우리 수린이는 드래곤이라는 것을.
‘시력도 보통 사람하고는 차원이 다르겠지.’
수조 깊은 곳.
거대한 해저 동굴을 응시하는 수린이의 볼이 빵빵해졌다.
가끔 블록을 가지고 놀 때나, 유치원 숙제를 할 때, 집중할 상황이 필요할 때마다 나오는 습관 같은 거다.
“설마, 벨룬이가 아픈 건가?”
“아니야. 벨룬이 지금 놀고 있어.”
“동굴 안에서 놀고 있다고?”
“공 가지고 놀고 있어. 우리 만나는 것보다 공 가지고 노는 게 더 재밌나 봐.”
나는 수린이의 논리가 맞다고 판단했다.
벨룬이의 종특이랄까. 낯을 가리는 건 아니지만, 화이트 벨루는 워낙 혼자 노는 것을 즐겨 하는 녀석이었으니까.
“어떡하지, 아빠? 이러다 사진 못 찍으면…….”
서글픈 수린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차마 벨룬이 모자를 얻을 수 없다는 말은 못 하겠다.
기필코 어떻게든 모자를 얻어 내리라.
‘대충 주변 사람들 반응 보니까, 30분째 저러고 혼자 놀고 있는 것 같은데.’
수린이의 말에 의하면.
공놀이에 푹 빠져 있다고 한다.
‘이대로 가면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할지,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할지는 알 수 없는 상황.’
그렇다면.
벨룬이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수밖에.
“걱정 마, 수린아. 벨룬이랑 꼭 사진 찍을 수 있을 테니까.”
“어떠케?”
“잊었어? 아빠 히어로야.”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활짝 웃는 수린이.
절대 저 미소를 잃지 않게 만들어 주리라.
“어디 보자…….”
주변을 둘러본다.
아쿠아리움 편집샵이 눈에 들어왔다.
“그걸로 뭐 하게?”
편집샵에서 아이들이나 쓸 법한 작은 색안경 하나를 샀다.
수린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색안경을 빤히 바라보았고, 나는 안경을 들고 다시금 벨룬이의 수조로 다가갔다.
“잘 봐, 수린아.”
순식간에 수린이는 호기심이 동한 얼굴로 변했다.
드래곤이라고 해도, 애들은 애들이다.
궁금할 수밖에 없겠지.
자연스레 주변의 다른 아이들도 내게 시선을 집중했다.
몇몇 아이들과 부모들은 ‘준우 사마?’라는 말을 작게 숙덕거렸으나, 나는 개의치 않고 내 할 일에 몰두했다.
스윽-
색안경을 수조에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는 핸드폰 플래시를 켜서, 색안경 좌측 렌즈 색상인 빨간색을 관통하게끔 빛을 쏘아 보냈다.
색안경 우측에도 초록색 렌즈가 있긴 했지만, 정작 지금은 쓸모가 없었다.
중요한 건 벨룬이가 인식할 수 있는 색깔을 수조 안으로 쏘아 보내는 것이었으니까.
‘회귀 전, 내 기억이 맞다면 화이트 벨루가 인식할 수 있는 색깔은 빨강, 파랑, 검정, 총 세 가지.’
그중에서도 가장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는 색깔이 바로 빨강이었다.
‘핸드폰 플래시로는 빛이 약해서 벨룬이의 관심을 끌기 힘들 테니까…….’
살며시 마력을 끌어 올려 본다.
벨룬이가 자극을 느끼지 않게끔, 빛이 수조 안으로 퍼져 나갈 수 있을 정도로만.
“어, 어?”
수린이가 반응했다.
빵빵하게 부풀어 있던 볼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오, 온다! 아빠, 벨룬이가 이쪽으로 온다아아!”
수린이가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동시에 주변에 있던 다른 아이들과 부모들의 시선도 일제히 가까워지는 벨룬이를 향해 집중됐다.
아이들과 부모들은 벨룬이와 사진 찍기 바빴다.
이제 마지막 글자만 모으면 우리도 벨룬이 모자를 얻을 수 있었다.
완성될 문구는 아마 ‘아름다운 우리 동물원’일 거다. 현재 ‘리’ 자만 빠져 있는 상황이고.
“수린아, 우리도 사진 찍……?”
말을 이으려던 나는 순간 멈칫했다.
여태 먼저 사진을 찍자고 외쳐 대던 수린이었는데, 이번에는 얌전히 어디 한 곳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응? 벨룬이 머리에 상처가?’
수린이의 시선이 향해 있는 곳도 벨룬이의 상처였다.
큰 상처는 아니었고, 동굴에서 공을 가지고 놀다가 부딪쳐서 살짝 까진 정도랄까.
“……아프지 마.”
낮게 읊조리는 듯한 수린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수조 안의 벨룬이가 수린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수린이가 벨룬이의 머리 방향으로 수조 위에 살며시 손을 얹었고, 찰나의 빛이 찰랑였다.
“아빠, 이제 사진 찍자!”
나는 보았다.
수린이의 손길 한 번에 벨룬이의 상처가 싹 아문 것을.
“아…… 응, 그, 그래.”
원래 드래곤이 치유 능력도 갖고 있었나.
거기까진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겠다.
“우리 수린이 착하네.”
“뭐야아. 봤어, 아빠?”
“당연히 봤지.”
“피이, 창피하게…….”
부끄러워하기는.
오히려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인데.
“고마워, 아빠. 오늘 나 최고로 행복해써!”
동물원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
내 등에 업힌 수린이가 양 볼 옆으로 쌍따봉을 내밀었다.
“아빠도 오늘 너무 재밌었어.”
“…….”
“수린아?”
“…….”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자, 그 짧은 새에 잠이 든 수린이의 모습이 보였다.
조금 전에 받아온 벨룬이 모자를 손에 꽉 쥔 채로.
“아침부터 신나게 돌아다녔으니, 피곤할 만도 하지.”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수린이가 깨지 않게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살며시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어느새 저녁노을이 노곤하게 퍼져 있었다.
부디 수린이가 오늘의 추억을 평생 잊지 않길.
그나저나, 실컷 노느라 선화한테 뭐라고 변명할지 생각 못 했는데…….
* * *
“후아…….”
바빴던 가게가 조금 느슨해지자, 그제야 선화는 카운터 앞 의자에 등을 기댔다.
“갑자기 이렇게 바빠질 줄은 몰랐는데.”
원래 오늘은 가게가 임시 휴무일이었다.
그동안 해외 출장과 많은 업무로 바빴던 준우가 제법 긴 휴가를 받았기에, 데이트를 즐기려고 했었는데 갑작스런 아티팩트 A/S 요청이 온 것이다.
지정 휴무일이 아닌 임시 휴무일이기도 했고, 고객님 사정이 급한 듯하여 어쩔 수 없이 가게 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사이에 손님들이 끊임없이 몰릴 줄이야.’
계속해서 몰아치는 바람에 문 닫을 틈도 없었다.
임시 휴무였기에 아르바이트생도 쉬는 날이었고, 그렇다고 간만에 쉬는 준우를 불러낼 수도 없는 노릇.
하지만, 용케 혼자서 해낸 선화였다.
힘들긴 했어도 오늘 하루 장사가 잘된 탓인지 기분만이 썩 좋기도 했다.
‘이제 슬슬 마무리하고 집에 가 볼까…… 응?’
조금 전까지 인스타그램을 살펴보던 선화가 멈칫했다.
수린이의 단짝 친구라 할 수 있는 하윤이 엄마가 올린 게시물이 있었는데, 내용이 어딘가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글과 함께 업로드된 사진 한 장.
오늘 유치원 숙제로 보이는 듯한 하윤이가 직접 그리고, 쓴 그림일기였다.
“오늘은 수린이가 유치원에 안 나와따? 수린이가 안 나와서 너무 심심해따. 내일은 꼭 수린이가 유치원에 나와쓰면 조케따?”
게시글을 읽던 선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린이라면, 분명히 준우에게 등원을 부탁했었는데…….
“에이, 설마?”
그렇게 생각하니 살짝 웃음이 새어 나오기도 했다.
다 큰 어른과 조그만 애기가 작당 모의를 하고 있을 모습을 떠올리니, 뭔가 우스운 느낌이랄까.
일단, 사실 확인을 해 봤다.
유치원 선생님이야 준우가 포섭했을 수도 있으니, 하윤이네 엄마한테 메시지를 보내 본다.
그 결과.
“나만 쏙 빼놓고, 둘이 땡땡이치고 놀러 갔다 이거지?”
수린이는 아마 재밌었을 거다.
유치원 땡땡이친 것만으로도 잔뜩 재미있었을 텐데, 모처럼 준우가 놀아 주기까지 했을 테니, 얼마나 신났겠는가.
“하여튼, 전준우. 맘 약해서 탈이라니까.”
대충 상황이야 예상이 갔다.
수린이의 애교에 준우가 껌뻑 넘어갔겠지.
“전수린, 고것도 아빠가 애교에 약하다는 걸 너무 잘 알아서 탈이고.”
유치원 땡땡이쯤이야 이해할 수 있다.
한창 아빠와 놀고 싶을 나이니까. 유치원 수업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가족 간의 교감이지 않은가.
‘너무 잦지만 않는다면야…….’
그렇지만 얄밉기도 했다.
어쨌거나, 선화 본인만 쏙 빼놓고 놀러 간 것이지 않은가.
서둘러 가게를 마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문을 열자, 대충 집어던지듯 벗어 놓은 준우와 수린이의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얼씨구?”
선화는 자신을 반기는 반려몬들에게 정성스레 인사를 건네며, 집 안쪽을 응시했다.
“땡땡이까지 친 사람들이 반겨 주지도 않네?”
입술이 삐쭉 나온 선화가 안방으로 향했다.
벌컥 문을 열자, 침대 위에서 코를 골며 대자로 뻗어 있는 준우와 그런 준우의 배 위에 엎드려 자고 있는 수린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푸흡!”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엽고, 우스꽝스러워서 선화도 살짝 삐친 마음을 뒤로한 채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준우야 그렇다 치고, 수린이까지 코를 골고 있을 줄이야.
제법 크게 소리를 냈음에도 기척도 없는 걸 보아하니, 오늘 하루 진짜 신나게 놀고 곯아떨어진 모양이다.
“진짜 얄밉긴 한데, 귀여워서 뭐라고 못하겠잖아.”
불도 켠 채로 잠든 두 사람이었다.
선화가 아는 준우라면, 아마 자신을 기다리다가 결국 잠을 이기지 못했을 터.
조심조심 뒷걸음질을 친 선화는 안방의 불을 꺼 주었다.
그리고는 부엌으로 가 탄산수 한 병을 꺼냈다.
“……뭐야? 저녁 식사까지 차려 놓고 잔 거야?”
노느라 힘들었을 텐데.
식탁 위에 준우가 차려놓은 찌개와 계란찜, 각종 반찬들이 놓여 있었다.
아직 온기가 많이 남아 있는 걸 보니, 이제 막 잠든 것이 분명했다.
밥도 두 그릇, 숟가락과 젓가락도 두 세트인 걸로 보아 함께 먹으려고 기다렸던 것 같았다.
“귀엽기는.”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수린이와 놀면서도 준우가 얼마나 마음 졸였을지.
“귀여워서 봐준다, 내가.”
막 식탁 앞에 앉으려는 순간.
이번엔 거실 측면에 보이는 테이블 위에 놓인 그림일기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림 배경은 동물원.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선화와 준우, 수린이와 반려몬 아이들이 다 함께 서 있었다.
“우리 수린이는 그림도 잘 그리고, 글씨도 예쁘게 잘 쓴단 말이야.”
선화는 연신 미소를 띤 얼굴로 수린이가 쓴 일기를 천천히 읽어 갔다.
“이건 비밀인데, 오늘은 아빠랑 땡땡이를 해따. 재미이썼다…… 풉! 땡땡이가 이렇게 재미이따니! 나중엔 엄마랑, 반려몬 친구들이랑 다 같이 땡땡이를 해야게따?”
글씨는 예쁘게 써도, 아직 맞춤법은 엉망진창이다.
일기 내용도 어린아이답게 단순하고.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일기가 선화의 마음속엔 너무나도 완벽하게 느껴졌다는 것이었다. 완벽하게 귀여웠으니 됐다, 뭐 그런 거려나.
“그래, 나중엔 꼭 엄마도 같이 땡땡이 하자.”
싱긋 웃은 선화가 기분 좋게 식탁 앞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