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자로 시작하는 말
수린이의 애교는 내게 있어서 강력한 무기나 다름없다.
마치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나도 모르게 곧장 핸드폰을 들어 유치원에 전화를 걸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아침에 대뜸 전화해서 곤란하게 해 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가족 행사 때문에 오늘은 등원 못 한다고 미리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 아니에요, 수린이 아버님! 아직 등원 차량 출발하기 전이라 정말 괜찮답니다. 모쪼록 수린이와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세요!
애교가 섞인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수린이가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어서였을까.
오늘 수린이가 등원하지 못하는 이유가 술술 흘러나왔다.
따지고 보면, 아빠랑 단둘이 놀러 가는 것도 가족 행사이자 현장 학습이니 딱히 거짓말은 아니겠지.
‘그래도 조금 양심이 찔리긴 하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되돌리기엔 늦었다.
“아, 참! 선생님 혹시…….”
- 네?
“등원하고 하원할 때 아내한테 문자 알림 메시지 가는 거 있잖아요?”
- 네, 네.
“그거 오늘만 좀 어떻게 알림이 안 가게 할 수 있을까요? 아내가 오늘 중요한 일이 있어서 중간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 그, 그 뭐냐…… 중간에 혹시 전달 사항 있으시면 오늘은 저한테 연락 주시면, 그것도 감사할 것 같고…….”
- 알겠습니다, 수린이 아버님. 그럼 오늘은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에 선생님의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저 착각이었을까.
마치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듯한…….
아무튼, 통화가 끝이 났다.
고작 5분도 통화를 안 했는데, 왜 이리 심장이 쿵쾅쿵쾅대는 건지.
‘이래서 사람은 거짓말하고 살면 안 돼…….’
선화에게 끝까지 말하지 않으려는 건 아니다.
다만, 당장 마땅한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아서다.
‘……최대한 덜 혼나게끔, 가장 훌륭한 변명거리를 만들어야만 한다.’
수린이의 애교에 홀려 무작정 지르고 본 일인지라, 수습에 관한 건 아직 생각 중이다.
“아싸뵤! 유치원 안 가고 아빠랑 논다!”
나와는 달리 정작 수린이는 세상 신난 것처럼 보였다.
하긴, 신날 만도 했다. 유치원 땡땡이쳤는데 신나지 않을 리가.
“그나저나, 이따 엄마 퇴근하고 오면 아빠 혼날 텐데 어떡하지? 엄마 화나면 무서운데…….”
“다 방법이 이찌!”
“뭔데, 그게?”
“엄마가 그랬는데, 엄마는 아빠가 뽀뽀해 주면 기분이 엄청 조아진대써.”
내 뽀뽀가 위력적이긴 하지.
알고는 있었지만, 수린이에게까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진짜 좋긴 좋은 모양이다. 사람 뿌듯해지게.
“그리고 수린이가 뽀뽀를 해 줘도 기분이 엄청 조아진다고 해꼬!”
“그래서?”
“아빠도 뽀뽀해 주고, 수린이도 뽀뽀해 주면, 엄마 기분이 엄처어어엉 조아져서 절대 화 안 내!”
“우리 수린이 엄청 똘똘하네.”
양동 뽀뽀 작전으로 입을 막으면 된다는 얘기.
생각지도 못한 해결책에 피식 웃음이 나오고야 말았다.
“선생님도 나보고 아빠랑 똑같이 말해써. 똘똘하다고.”
“그럼, 수린이는 뭐라고 대답해?”
“아빠 닮아서 똘똘하다고. 우리 아빤 히어로니깐!”
미소가 가시질 않는다.
저번에 일본 대균열에서의 활약상으로 양국에서 히어로라는 별명이 붙기는 했는데, 이걸 수린이 입에서 들으니 기쁨이 배가 되는 기분이다.
‘아빠들이 딸바보가 되는 이유가 이런 거구나.’
아까 선생님하고 통화를 막 시작했을 때, 선생님께서 수린이가 아빠 자랑을 그렇게 많이 한다고 하기도 했었는데.
‘내가 좀 더 유명해지면, 수린이도 더 좋아하려나?’
기회가 된다면 방송 출연 같은 건 적극적으로 해야겠다.
수린이가 유치원에 가서 내 자랑을 더 많이 할 수 있도록.
“자! 우리 유치원 땡땡이까지 쳤는데, 오늘 뭐 하고 놀까?”
“나 동물원 가고 시퍼!”
“동물원이라. 동물원 좋지!”
엑시스가 꽤 많은 신켄의 지분을 사들였을 때.
비슷한 시기에 하나 더 사들인 게 있었는데, 그게 바로 우리나라에 하나 남은 유일한 동물원이었다.
‘갑자기 장인어른께서 왜 동물원을 사들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동물원을 가고 싶다면, 엑시스의 그 동물원밖에 없다.
외출 준비를 마친 나는 현관문을 나서기 전에 수린이를 향해 낮게 속삭였다.
“우리 오늘 유치원 땡땡이치고 놀러 가는 거, 엄마한텐 비밀.”
“근데 왜 그렇게 작게 말해, 아빠?”
“원래 비밀 얘기할 땐 작게 말해야 되는 거야.”
“비밀 얘기를 할 때는 작게……? 아라써! 비밀!”
수린이와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한 우리는 곧장 동물원으로 출발했다.
조금 두렵기도 하지만, 묘하게 재미있는 느낌이 드는 기분은 뭔지.
선화에게 할 변명이 급하기는 해도…….
일단, 가면서 생각해 봐야겠다.
* * *
장인어른께서 인수하신 엑시스의 동물원.
이하, ‘동물의 정원’ 매표소에 도착했다.
인터넷으로 티켓을 사려 하다가, 이벤트 참여와 함께 현장 발권을 하면 할인을 해 준다기에 유인 매표소 앞으로 다가갔다.
“어머? 준우 사마?”
낯익은 호칭으로 나를 부르는 목소리.
나는 설마, 칸나가 여기서 알바를 하나 했는데.
“준우 사마 맞죠? 호호! 안녕하세요! 실물이 훨씬 더 미남이시네요!”
매표소 직원이 나를 알아본 것이다.
일본에서의 활약으로 일본 사람들이 내게 준우 사마라는 별명을 붙여 줬고, 이젠 칸나만의 호칭이라고 하기엔 너무 널리 퍼져 버린 그 명칭은 어느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알려진 것 같았다.
“준우 사마 맞아요! 우리 아빠 준우 사마에요!”
옆에서 수린이가 맞장구를 쳤다.
어깨를 으쓱이는 게 내가 준우 사마라고 불리는 걸 썩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다.
수린이가 좋아하니, 나도 부끄러움은 잠시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제가 바로 준우 사마입니다.”
만족스러운 듯 수린이가 엄지 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사실, 내 자랑 하는 게 썩 취향은 아니지만 오늘만은 수린이의 뜻대로 움직여 주는 게 좋을 듯싶었다.
매표소 직원의 부탁에 사인을 해 줬다.
수린이와 함께 사진도 한 장 찍어 주고.
“그냥 들어가셔도 됩니다. 준우 사마껜 무료거든요.”
“에에? 아무리 제가 일본에서의 히어로라도 그렇지, 무료 관람은 너무 과한데요? 한국에서 활약을 한 것도 아니고…….”
“푸흡! 그게 아니라 회장님 특별 지시입니다.”
“회장님 특별 지시요?”
“저희 과장님이 그러시더라구요. 만약에라도 회장님 가족분께서 방문하실 땐 관람료 받지 말고 통과시키시라고. 특히나 손녀분 방문하시면, 이 ‘벨룬이’ 풍선도 아낌없이 나눠 주라고 하셨어요.”
“아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나는 또 내 인지도 때문에 무료로 관람하게 해 주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장인어른의 특별 지시 때문이었던 거다.
“……흠, 흠!”
“아빠 얼굴 빨개져따!”
“빠, 빨개지긴!”
서둘러 매표소 직원이 건네는 벨룬이 풍선을 받았다.
동물원 내에 아쿠아리움이 있는데, 아쿠아리움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유일한 반려몬류인 ‘화이트 벨루’를 캐릭터화한 풍선이었다.
성격이 온순하긴 하지만,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돌고래 벨루가와 비슷한 생김새의 대형 몬스터였다.
반려몬 허가를 받긴 했으나, 아무나 쉽게 가정에서 키울 수는 없는 종이랄까.
“예쁘다아! 엄마처럼 예쁘다아!”
“풍선 하나 더 줄까? 할아버지가 수린이 오면 많이 주라고 했다는데.”
“아니! 하나면 충분해!”
벨룬이 풍선을 받은 수린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좋아했다.
그나저나 엄마처럼 예쁘다니. 말을 어찌 저렇게 예쁘게 하는지.
“참! 지금 저희 동물원에서 홍보 차원에서 이벤트를 하나 하고 있거든요.”
관람을 막 시작하려는데, 매표소 직원이 나를 붙잡았다.
현장 발권 할인을 알아볼 때 있었던 바로 그 이벤트를 안내하기 위해서였다.
‘홍보 차원이라. 매출이 저조한 탓이겠지.’
아직도 장인어른께서 동물원을 왜 인수하셨는지는 의문이다.
던전과 몬스터의 등장 이래 세상이 달라졌고, 아이들의 눈높이도 달라졌다.
집에서도 반려몬이라는 몬스터를 키울 수 있는 세상인지라, 아이들도 예전처럼 평범한 동물에 그리 관심을 갖지 않았다.
우리나라에 있던 동물원들이 다수 사라지고, 딱 여기 하나만 남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일단 저희 동물원 어플을 다운로드 받으시면, 진행 중인 동물원 이벤트가 있어요. QR 코드 스캔하시고 동물원 방문 인증 사진 남겨 주시면 됩니다.”
우리는 무료 관람을 하게 된 지라 할인 이벤트는 굳이 안 해도 됐지만, 장인어른의 사업체이니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로 했다.
“그리고 이벤트가 하나 더 있는데요. 관람 순서 안내문을 보시면, 별 모양으로 표시된 장소들 보이시죠?”
“으음, 여섯 군데가 보이는군요.”
“맞습니다. 그 여섯 장소의 동물들과 각각 사진을 찍으셔서 아까처럼 QR 코드 스캔해서 모두 업로드해 주시면, 이벤트 완료를 알리는 ‘문구’가 완성되거든요? 문구를 완성하신 다음 매표소에 보여 주시면, 벨룬이 모자를 드린답니다.”
“벨룬이 모자요?”
“아! 저기 보이는 아이가 머리에 쓰고 있는 거예요.”
직원이 동물원에서 나오는 한 남자아이를 가리켰다.
파란색 모자에 흰색 벨룬이 캐릭터가 새겨진 모자.
“아빠! 나도 저거 갖고 시퍼!”
수린이의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풍선처럼 그냥 주면 안 되나요, 라고 물어볼까 하다가 아무리 회장님 가족이라도 너무 염치가 없는 것 같아서 참았다.
무엇보다.
동물원 관람을 하면서, 수린이와 추억을 남기기엔 더없이 좋은 이벤트였다.
어려운 것도 아니고 동물하고 같이 사진만 찍으면 되는 건데, 까짓거 하면 되는 거다.
“그럼, 즐거운 관람 되세요!”
어디 보자.
안내문을 보니 첫 번째 별 모양이 있는 장소는 1번, 어린 사자 ‘심바’가 머무는 곳이었다.
“수린이 사자 알지? 어흐응! 하는 거?”
“알지! 엄마랑 같이 만화도 봐써! 라이언킹!”
“맞아, 바로 걔가 사자야. 이름도 라이언킹에 나오는 주인공이랑 똑같네. 실제로 보면 말순이보다 훨씬 클 거야.”
우리 수린이는 말순이가 세상에서 가장 큰 동물인 줄 안다.
반려몬이긴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수많은 반려몬 아이들과 함께 생활을 해서 그런지 딱히 반려몬과 동물의 구분이 없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반려몬, 동물 할 것 없이 죄다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말순이보다 크다고?”
“살짝? 보통은 다 그래. 근데 심바는 애기 사자라 말순이보다 작긴 하겠다.”
“그럼 나보다도 작아?”
“얼마나 애기인지는 직접 봐야 알겠지만, 비슷할걸?”
바로 사자 우리로 달려갔다.
실제로 보니 수린이보다는 조금 더 컸다.
하지만, 아직 애기 티를 못 벗은 느낌이랄까.
“……귀엽따아. 아빠, 우리 사자 키우자.”
“응?”
“심바 너무 귀엽지?”
“귀, 귀엽지.”
“그니까 키우자!”
수린이를 위해선 모든 걸 다 해 주고 싶지만.
사자 키우는 걸 과연 선화가 허락할진 모르겠다.
‘반려몬처럼 길들일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아직 이사 갈 집을 짓고 있으니, 이사를 가게 되면 그때 엄마랑 상의해 보자고 했다.
선화 몰래 유치원 땡땡이친 마당에, 이것까지 독단적으로 결정하면 진짜 호되게 혼날 것 같아서다.
이벤트 참여를 위해 수린이와 사진을 찍었다.
목마를 태워서 수린이도, 심바도, 나도 셋 다 잘 나오는 각도에서.
“응?”
“왜 그래, 아빠?”
사진을 찍어서 스캔해서 올리자.
이벤트 참여 알림과 함께 글자 하나가 화면에 떠올랐다.
“아까 매표소 언니가 이벤트 참여해서 무슨 문구를 완성해야 벨룬이 모자를 준다고 했거든. 첫 번째 글자가 방금 화면에 나타났어.”
“첫 번째 글자가 먼데?”
“아. ‘아’ 자로 시작하는 말이 뭐가 있으려나?”
“흐으으으음…….”
수린이가 손으로 턱을 짚으며 고민에 잠겼다.
조그만 아이가 이렇게 턱을 짚고 있으니, 묘하게 귀여운 느낌이다.
“총 아홉 글자야. 맨 뒤에 단어는 동물원.”
‘아OOO OO 동물원’이 완성될 문구라는 뜻.
정답을 얼추 알 것 같기는 했다. 어린아이들 수준의 문구일 테니,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는 않을 테니까.
“흐으으으음…….”
하지만, 정답을 말하진 않았다.
수린이가 너무나도 고심하고 있었기에.
“아! 생각나따!”
“생각났어? 뭔데?”
히죽 웃은 수린이가 내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아빠가 너무 조아 죽게따?”
“…….”
심쿵사할 뻔했다.
난 네가 너무 귀여워 죽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