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0화.애교 앞에 장사 없다 (160/246)

◈ 애교 앞에 장사 없다

[ 구름의 특성 ‘먹구름’을 사용합니다. ]

[ 지정 범위 내 먹구름이 잦아듭니다. ]

구름의 첫 번째 아이템 특성 중 하나인 먹구름의 효과로 해당 범위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의 시야가 봉쇄됐다.

시야를 회복하는 고등급 헌터의 스킬 혹은 아이템 특성이 없는 한, 장막 안의 상대들은 지금부터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터.

물론, 나는 사용자인 나는 제외다.

오히려 구름을 손에 쥐고 있는 한, 먹구름 속에서 내 시야는 훨씬 더 넓어지고 뚜렷해지는 효과가 있었다.

‘길게 끌 필요 없겠지.’

다들 균열을 공략하고자 열심히들 싸우고 있는데.

고작 고등학생 패거리 하나 상대하자고 시간을 끄는 건 민폐나 다름없었다.

먹구름 속.

시야가 봉쇄된 타케루와 놈들이 당황해하고 있는 사이.

[ 칭호를 ‘수련자’로 변경합니다. ]

[ ‘수련자’ 효과를 사용하시겠습니까? ]

나는 홀로그램의 물음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너무나도 아프지만, 무리하지 않겠다는 선화와의 약속을 어쩔 수 없이 깨 버린 상황이다. 그것도 눈앞의 놈들 때문에.

‘너희들이 자조한 일이야.’

놈들 때문에 약속을 깨 버렸으니.

그 분노 역시 놈들에게 돌려줄 생각이었다.

[ ‘수련자’ 칭호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

[ 10분 동안 모든 현재의 능력치가 10배 상승합니다. ]

회귀 전.

가끔 형님을 볼 때면 의아할 때가 있었다.

뭐랄까.

고등급의 형님이시긴 하지만, 종종 등급 이상으로 보다 강력한 힘을 사용했던 것 같달까.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항상 어떻게 저게 가능한지 의문을 갖고는 했었는데, 그 의문을 이번 생에서야 풀 수 있었다.

‘무한의 수련장을 통과한 자에게 주어지는 칭호.’

바로 이 칭호가 그 이유였다.

칭호의 효과를 받자마자, 마력을 최대치로 끌어 올렸다.

먹구름 속에 자욱하게 피어오른 마력을 진득한 살기로 변형하여 놈들의 전신을 옥죄었다.

“크윽!”

개중엔 압도적인 마력의 힘을 견뎌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지는 놈들도 있었다. 하지만, 난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시야가 봉쇄되어 방어하는 게 고작인 놈들.

그러나 혹시라도 반격을 할 수 있으니, 미동조차 할 수 없도록 움직임을 완전히 묶어 두기로 했다.

푸슉!

구름이 한 녀석의 허벅지를 찌르자.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와 함께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 구름의 특성 ‘층구름’이 발동됩니다. ]

[ 공격에 성공할 때마다, 데미지가 증가합니다. ]

[ 공격에 실패할 경우 초기화됩니다. ]

구름의 두 번째 특성을 사용함과 동시에 하나둘씩 쓰러져가는 녀석들.

놈들이 무기력하게 쓰러질 때마다 데미지는 점차 증가 폭을 높혀 갔고, 녀석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먹구름 속에서 동료들의 비명을 듣는 것뿐이었다.

스윽-

이어, 구름의 검 끝이 마지막 한 녀석의 코앞에 멈췄다.

이 모든 일의 사단인 타케루가 바로 마지막 타깃이었다.

눈앞의 어린 녀석 하나 때문에 선화와의 약속을 깼다는 생각 때문일까. 피워 올린 마력이 보다 진득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꿀꺽-

마력이 진해짐에 따라 살기마저 진해지자.

긴장한 타케루가 마른침을 삼켰다.

“죄, 죄송합니다!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다급한 외침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목소리의 주인이 장막을 만들어 낸 장본인인 듯, 동시에 장막이 깨져 버렸다.

상황이 종료된 것 같으니, 나도 먹구름을 거뒀다.

주변을 둘러보자 쓰러져 있는 다수의 사내들과 간절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한 중년 남자가 보였다.

“도, 도련님만은 살려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당신들 때문에 아내하고 약속도 깼는데, 이제 와서 살려 달라?”

“저, 저희의 목숨을 모두 거둬 가도 좋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원하시는 걸 뭐든지 들어드릴 테니, 부디 도련님만은…….”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눈앞의 타케루를 응시했다.

이 녀석 꽤 독기가 있는지, 여전히 눈빛이 사납다.

“정작 너희 도련님은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는 모양인데?”

눈빛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분노와 복수심.

아마, 자신의 형과 아버지를 망가뜨린 원인이 나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조금 안타까운 면도 있었다.

성격이 모나고 불같은 건 유전이라 치고, 앞으로 더 크면서 감정 컨트롤 정도만 잘할 줄 알면 썩 괜찮은 헌터가 되었을 텐데.

‘얼마 전에 각성의 늪에서 최하위로 각성한 것치고는 등급도 그리 낮진 않은 것 같고.’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한참 어린놈이 벌써부터 사람 죽일 마음을 가졌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아무래도 아닌 듯싶어서였다.

‘뭐, 어쩌겠어. 가문에서 보고 자란 게 그런 것뿐이니. 이 녀석 형이 처남을 인질로 잡았던 것만 봐도…….’

타케루에게 겸을 거눈 내가 미동이 없자.

아까 전에 다급하게 소리쳤던 남자가 또 한 번 목소리를 냈다.

“저, 저는 신켄의 이사입니다! 길드 내에선 꽤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도, 도련님만 살려 주신다면…….”

사실, 죽일 마음은 없었다.

살짝 겁만 줄 생각이었지.

애당초 죽일 생각이었다면 이미 장막 안에서 먹구름이 자욱했을 때 죄다 죽였을 거다.

무엇보다.

자칫 사람 잘못 죽여서 문제가 더 크게 번졌다간, 나도 나지만, 선화를 비롯한 우리 가족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런 일만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

“정말 뭐든지 해 줄 수 있어?”

“그렇습니다!”

장막 안에 있는 동안 꼭두각시와 전투를 하고 있던 공격대와 백호는 이미 이쪽 지역을 돌파하고, 균열 핵을 향해 나아간 것 같았다.

혹시나 목격자가 있을까 해서 살펴본 건데, 여기엔 우리들 말고 아무도 없었다.

‘저번에 처남 때 일을 생각해 보면, 신켄 이 녀석들이 또 말을 바꿀지도 몰라.’

마음만 먹으면 딱히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내겐 제대로 된 증거를 남길 필요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은 타케루가 자초한 일이라는 사실을.

“그럼, 이 녀석이 직접 자백하게 해.”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는 동영상 촬영 버튼을 눌렀다.

“자, 자백 말씀이십니까?”

“이 요망한 녀석의 명령으로 나를 죽이려고 했고, 그랬다가 이 꼴이 났다고.”

타케루가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여전히 분노를 삭이지 못한 모양.

“야, 촬영 중인데 좀 웃어라.”

“바카야로!”

“딱 10초 준다, 자백해라.”

아내의 힘을 사용한 뒤에 더욱 진득하게 살기를 피워 본다.

아직 애는 애인 모양, 못 이기는 척 술술 자백을 하는 녀석이었다.

“그리고, 너…….”

자백 씬 촬영이 끝낸 나는 녀석이 쥐고 있던 검을 흘낏 살폈다.

생명력을 흡수해 강해지는 적혈검, 저 음침한 검만 아니었어도 내가 오늘 무리하는 일은 없었을 거다.

“……이 검 압수.”

* * *

< 요코하마 대균열, 이틀 만에 완파 >

< 엑시스, 대인배의 면모를 보여 주다! >

< 신켄의 주요 사업지인 요코하마, 과연 손실은? >

인명 피해가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요코하마의 균열은 피를 최소화하여 공략에 성공했다.

하지만, 주 사업지가 요코하마 지역에 쏠려 있던 신켄이었기에 타격이 아예 없을 수만은 없었다.

요코하마 대균열이 공략된 지 두 달 후.

신켄의 길드 마스터가 된 칸나는 이사회를 개최했다.

다이스케는 사임했고.

적자 중 장남인 카에데는 재판 후 형을 살고 있으며.

차남인 타케루는 준우의 자백 증거로 헌터 특별법에 의거 여태 긴 재판을 이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따라서, 칸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신켄을 차지할 수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요코하마의 균열로 인해 길드가 경제적 타격을 심하게 받았다는 것이다.

“저번 균열의 타격으로 요코하마 내 검 생산 공장이 가동을 멈춘 지 두 달이 지났습니다. 빠르게 타 지역에 공장을 다시 짓고는 있지만, 마력을 품어야 하는 검을 생산하는 공장이니만큼 장비 구축에 시간이 더 소요될 것으로 보입니다.”

“하필이면, 블루 스톤 2번 광산 초입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사임 전, 다이스케가 막대한 자금을 투자받아 검 생산 공장의 생산량을 대폭 늘려 놨다.

세계 수출 1위의 검이었던 신켄의 마검이었고, 계획대로만 진행됐으면 수익이 상당했을 터.

그러나, 모든 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다이스케는 사임했고, 길드의 주인은 바뀌었으며, 균열로 인해 공장과 구비해 둔 재료들의 손실이 컸기 때문이다.

게다가.

10개국이 넘는 나라에 블루 스톤 납품을 해야 하는 상황 속에, 요코하마에 있던 2번 광산 초입이 무너졌다.

해결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긴 하지만, 광산 입구 역시 블루 스톤 함량이 높은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라, 그 역시 다시 뚫으려면 수많은 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영국과 캐나다에 납품할 블루 스톤 수량을 채우려면, 나머지 광산들에서 나오는 수량만으로는 현저히 부족합니다. 당장, 그쪽에선 얼마 전에 발견된 중국 광산 쪽과 접촉을 하고 있는 듯 보이구요.”

“이대로 가면, 저희가 받은 계약금을 비롯해서 선지급금까지 돌려 달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여러모로 악재가 겹쳐 길드 내 자금도 부족한 상황이기에 손 쓸 방도가…….”

신켄은 역사상 최악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균열로 인한 타격도 타격이지만, 다이스케의 무모한 짓으로 인한 피해도 막대했다.

“결국, 문제는 돈이라는 거죠?”

얘기를 듣던 칸나가 이사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최악의 상황이긴 하나, 칸나는 이 시기를 잘 넘길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리고 훗날을 도모해 새로운 신켄의 모습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도.

“카에데와 타케루 몫으로 있던 지분 일부를 정리하면 눈앞의 불은 끌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도 이견은 없지만, 그 많은 지분은 누가 매수한단 말입니까? 주가도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고, 신켄 이미지와 명예가 바닥을 쳤는데…….”

직설적이긴 해도, 영락없는 팩트였다.

그만큼 현실을 직시하고자 하는 생각이었겠지.

자신도 인정한다는 듯 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던지,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때마침, 약속한 시간이 다가왔다.

그가 이사회에 참석하기로 한 시각이.

“일단, 급한 불부터 끄죠. 해당 지분 매도하는 걸로.”

“앞서 말씀드렸듯이, 매수할 기업은 없을 텐데…….”

그때였다.

회의장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섰다.

“제가 매수하죠.”

이사진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칸나가 그를 바라보고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회의장에 입성한 수재혁이 당당하게 미리 준비되어 있던 빈자리에 착석했다.

* * *

한동안 일이 바빠 쉬질 못했다.

각성의 늪에 이어 요코하마 대균열까지.

이후 재정비도 재정비지만, 나도 모르게 내 유명세가 커져 이래저래 부르는 곳이 많았다.

방송가는 포함해, 모든 언론에서도.

협회장님은 지금이 협회의 인지도를 길드급까지 끌어 올릴 수 있는 최적기라고 생각하셨는지, 열심히 나를 굴리셨다.

언젠가 기나긴 특별 휴가를 주시겠다면서.

장인어른도 마찬가지셨다.

내가 엑시스의 사위라는 게 이미 밝혀진 마당인지라, 재계의 유명인사들에게 나를 소개시키느라 하루가 멀다 하고 나를 호출하셨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드디어 오늘부터는 그 바쁜 나날들이 지나, 달달한 휴가의 시작이었다.

‘자그마치 2주다, 2주!’

공무원으로서는 파격적인 휴가 일수였다.

협회장님께서 긴 휴가를 주시겠다고 하시더니, 그 약속을 기어이 지켜 주셨다.

‘선화랑 영화도 보고, 쇼핑도 하고, 여행도 가고, 잠도 실컷 자고. 간만에 푹 쉬는 거다, 아주 푹!’

휴가 첫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바쁘게 출근 준비를 하고 있는 선화의 모습이었다.

“응? 오늘 임시 휴무 아냐? 나랑 놀러 가기로 했…….”

“미안해, 오빠. 갑자기 고객님께서 아티팩트 A/S 요청이 있으셔서, 내가 급히 나가 봐야 할 것 같아.”

내가 여유가 생기니, 선화가 바빠진 셈.

나의 침울한 얼굴을 보았는지, 선화가 나를 달래듯 입맞춤을 해주었다.

“앞으로 2주 동안 쉰다며. 우리 애기, 오늘만 좀 참아. 알았지?”

나보고 애기라니.

옆에서 수린이가 보고 있는데, 그런 애칭은 좀…….

“오늘 수린이 등원만 좀 부탁할게!”

선화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집을 나섰다.

참고로, 우리 수린이는 폭풍 성장을 해 어느덧 유치원에 다닐 만큼 커 버렸다.

흔히 말하는 미운 네 살쯤?

이제는 입도 많이 터서, 자연스럽게 말도 잘한다.

‘사실, 너무 빨리 커 버려서 걱정을 좀 하기도 했는데…….’

과장 좀 섞자면, 금방 늙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아무튼. 다행히도 수린이의 성장은 잠시 멈췄다.

드래곤에게는 성장기가 나누어져 있는지, 성년의 모습까지는 지금까지의 성장 속도에 비해 많이 더딘 모양이었다.

“수린아, 유치원 가야지!”

나는 소파 앞에서 반려몬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는 수린이를 향해 말했다.

말순이의 털을 빗던 수린이가 문득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나 오늘 유치원 안 가면 안 대?”

안 되는데. 엄마가 꼭 보내랬는데.

그렇게 말하려다가, 수린이의 동글동글하고 애처로운 눈빛에 말을 삼키고야 말았다.

“웅? 아빠? 나 오늘 유치원 안 가고, 아빠랑 놀면 안 대?”

그렇게 귀여운 표정으로 쳐다봐도 소용없어.

그런다고 아빠가 마음이 약해질 리가…….

쪼옥-!

……있을 수도 있어.

내 볼에 뽀뽀를 한 수린이가 몸까지 배배 꼬아 가며, 갖은 애교를 부려 댔다.

손동작까지 섞어서 훌쩍 울먹이는 표정까지 짓는데, 어찌 귀엽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딱 하루만! 오늘만 아빠랑 놀면 안 대까?”

아, 진짜 안 되는데.

선화한테 혼날 텐데.

“응, 아빠? 안 대까?”

“……돼.”

수린이의 애교에 홀려.

나도 모르게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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