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성의 늪
< OHCD, 중국 ‘각성의 늪’ 레이드에 ‘피스’ 낙점 >
< ‘피스’ 길드, 제 2의 ‘제인 레드너’ 탄생하나? >
서둘러 기사를 확인한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본부장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기 때문이다.
“각성의 늪은 어쩔 수 없죠.”
- 나도 조금 전에 전략기획과장님께 들었어. 아무래도 네 걱정을 좀 하시더라고.
“제 걱정하실 게 뭐 있나요. 규정상 그런 건데.”
- 그래도 네가 엑시스의 사위니까 신경이 좀 쓰이셨던 모양이야. 기왕이면 엑시스에 각성의 늪 티켓을 주고 싶으셨던 것 같은데…….
“장인어른 때문이라면 너무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협회 잘못도 아니잖습니까? 충분히 이해하실 겁니다.”
통화를 마쳤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또 한 번 한숨이 흘러나왔다.
‘말은 장인어른께서 충분히 이해하실 거라고 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그마치 ‘각성의 늪’ 레이드인데, 그걸 피스에 뺏겼으니 오죽하시겠는가.
‘……회귀 전에도 피스에게 이 기회를 뺏겼었지.’
각성의 늪은 아주 희귀한 레이드다.
회귀 전에도 각성의 늪이 등장한 건 딱 두 번 봤었다.
쉽게 말하자면.
미 각성자를 각성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던전이었다.
물론, 자연적으로 각성을 할 수도 있지만, 그 시기를 앞당길 수 있었고, 보다 높은 등급 판정을 받을 수 있다는 속설이 있기도 했다.
속설이야 속설일 뿐이지만, 자연 각성을 기다리는 것보다 각성을 앞당길 수 있다는 것은 빠른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는 뜻이기에, 그것만으로도 당사자에겐 엄청난 기회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기회를 피스에 뺏긴 거다.
‘장인어른께서도 이 소식을 들었을 테니, 지금쯤 아주 난리가 났겠군.’
미각성자들 중에서 각성의 잠재력을 가진 자들을 ‘잠재자’ 라고 하는데, 그들에게도 잠재자 능력치라는 게 존재한다.
그 능력치로 순위를 매겨, 가장 높은 순위를 가진 자를 각성의 늪에 보내는 게 협회의 규정이었다.
고로 피스 소속의 잠재자가 1순위.
엑시스가 그에 미치지 못했다는 뜻이겠지만.
‘내가 알기론 동혁이와 피스 길드의 잠재자가 동급 순위일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OHCD, 그러니까, 국제 각성자 협력 개발 기구와 대한민국 협회의 논의 끝에 피스가 선정된 것은 OHCD 사무총장의 입김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사무총장이 피스 길드장의 첫째 딸이니까.’
장인어른께서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때문에, 어떻게든 각성의 늪 티켓을 따내려고 노력을 하시겠지만, 피스에서도 목숨 걸고 사수를 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미국의 제인 레드너가 각성의 늪에서 각성을 한 뒤, 현재 S급 헌터가 되었다.
피스 길드 최초로 S급 헌터가 탄생할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들이 쉽게 포기할 리가 없지 않은가.
‘회귀 전 대로라면, 피스 길드의 잠재자는 민 회장의 차남일 거고.’
만약 그렇다면.
회귀 전과 마찬가지로 S급 헌터가 되지 못한 채, 단명하겠지.
민 회장의 차남이 각성의 늪까지 다녀온 뒤 단명한 이유야 간단하다.
이미 불법 각성을 경험했던 자였고, 그로 인한 부작용으로 마력이 역류했었으니까.
뭐, 훗날에야 알려진 사실이었다.
각성의 늪을 다녀오고 나서 7, 8년쯤 후의 일이니, 지금은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를 테고.
우우웅 -
핸드폰이 울린다.
장인어른께 걸려 온 전화였다.
“예, 장인어른.”
- 전 서방, 자네. 강재호 연락처 알지? 내가 강재호 만나서 담판을 좀 지어야겠어.
대뜸 협회장님 번호를 물으신다.
최 비서님을 통하면 알아낼 수 있는 걸 나한테 여쭤본다는 것은 그만큼 급하다는 뜻이리라.
“일단 고정하시구요, 장인어른.”
- 고정하게 생겼나! 동혁이 놈과 민동식이 차남이 잠재자 순위 동급인데, 왜 피스가 각성의 늪에 가게 된다는 거야? 동급일 경우엔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겨룬 후에 선정해야지!
“어차피 민 회장의 차남은 이번에 각성의 늪에 가지 못할 겁니다.”
- 뭐?
“저만 믿으십쇼.”
- 전 서방, 자네 협회에서 그 정도 위치였나?
“그, 그런 건 아닙니다만, 제가 그렇게 만들어드릴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엑시스가 내 가족이라고 편을 들어줄 생각은 없다.
다만, 협회 소속 헌터로서 불법 각성을 경험했던 범죄자를 각성의 늪에 보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
며칠 뒤.
동혁이가 엑시스 회장실을 찾았다.
“이건 불공평해!”
대뜸 소리치는 동혁이는 울상을 짖고 있었다.
억울할 만도 했다. 국내 잠재자 순위는 피스의 차남과 동급인데, 경쟁 한번 없이 각성의 늪 티켓을 뺏기지 않았던가.
“각성해서 매형처럼 협회에 입사할 수 있었는데!”
“뭐? 협회에 입사를 해?”
수태광이 눈을 부릅 치켜뜨며 되물었다.
순간, 동혁이는 뭔가 잘못됐음을 빠르게 인지했다.
“그, 그게 아니라, 매형이랑 같이 엑시스에 들어오겠다는 뜻이었는데, 매형이 협회 소속이라 말이 헛나왔나 봐.”
“그렇지? 이 애비도 깜짝 놀랬구나.”
동혁이도 며칠 전에 아버지인 수태광에게 대충 들어서 알고 있었다.
OHCD 사무총장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국제적으로 힘이 세서 밀리게 됐다고.
아무리 엑시스라지만, 세계 무대에선 국내에서만큼의 힘을 내는 건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런 일을 방지하고자, 하루빨리 세계적으로 엑시스의 위엄을 알리고자 했거늘…….’
수태광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엑시스의 세계 랭킹은 높게 잡아 7위 정도다.
만약, 황장미와 이혼을 하지 않고 그녀의 아티팩트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더라면 더 높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황장미가 아티팩트 디자이너로 대성한 것도 이혼한 뒤의 일이었다. 후회한들 이미 늦었다.
‘……자체적으로 힘을 길러야 해. 그 시작은 S급 헌터 다섯 명을 보유하는 것인데.’
세계 랭킹 1위 길드가 S급 헌터 네 명을 보유하고 있다.
일단, 그보다 더 많은 인재를 양성하는 게 우선이었다.
‘재혁이 놈이 S급 헌터가 될 거라는 건 의심치 않아도 될듯하고. 전 서방이 엑시스에 들어온다면 나까지 합쳐서 S급 헌터는 총 셋.’
거기에 수린이까지 더한다면 넷.
동혁이의 잠재력을 감안했을 때, 막둥이까지 각성해서 다섯이 된다면 세계 랭킹 1위는 엑시스의 자리다.
물론, 랭킹 1위의 길드에 변동사항이 없다는 가정하에.
‘한데, 피스 놈들이 가족을 이용해 이딴 해괴한 일을 벌일 줄이야.’
수태광의 두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동혁이의 작은 두 주먹도 부들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각성만 하면 협회에 무조건 들어갈 수 있는데! 그럼, 매형하고 같이 전장의 영웅이 될 수 있는 건데! 짜증나 죽겠네, 진짜!’
수태광이 동혁이의 속내를 알게 된다면, 과연 이토록 간절하게 각성의 늪에 동혁이를 보내려고 할까.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거다. 너무 걱정 말거라.”
“좋은 소식?”
“네 매형이 힘을 써본다고 하더구나. 일단, 믿고 기다려보자꾸나. 그때도 안 되면 내가 협회장을 직접 만나서 얘기를 해볼 터이니.”
“역시 우리 매형! 매형이라면 분명히 해낼 거야!”
협회장 강재호도 OHCD의 등쌀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간부급들의 회의를 거쳤으나, 그들도 이번엔 피스의 손을 들어주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엑시스야 사무총장이 바뀌었을 때, 그때 다시 손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 거다.
무엇보다, 협회 내엔 준우가 있었다.
준우의 존재가 이번 선택에 힘이 되었던 것도 있었다.
사위가 떡하니 협회에 있는데, 설마 엑시스가 협회와 척을 지려 하겠는가.
일단 준우를 방패로 엑시스를 막고.
OHCD의 압박도 견뎌대는 최선의 선택이랄까.
그때였다.
수태광의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 나를 존경하는 사위 : 다 해결됐습니다.
- 나를 존경하는 사위 : 기사 확인하십쇼, 장인어른.
수태광이 서둘러 포털 사이트 상단의 기사를 확인했다.
기사 제목들부터 수태광을 미소 짓게 했다.
< 피스 차남, ‘불법 각성’ 증거 입수! >
< 범죄자에겐 각성의 늪 티켓 발급 안 돼 >
아무리 준우라도 OHCD를 이길 방법은 없다.
세계 기관을 무슨 수로 개인이 막는단 말인가.
하지만.
간단한 테스트 정도는 해볼 수 있었다.
각성의 늪 티켓을 얻은 자는 필수적으로 협회의 신체검사를 비롯한 여러 테스트를 거쳐야 하는데, 준우의 의견으로 딱 하나만 더 추가한 것이었다.
일명 마나 역류 반응 검사.
명목상은 그러했지만, 그 과정에서 불법 각성을 시도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검사였다.
비록 피스의 차남이 불법 각성을 시도하긴 했지만, 각성엔 실패했더라도 흔적만은 남게 되어 있었다.
어쨌거나.
피스의 차남이 범죄자로 분류되어 잠재자 명단에서 제외된다면, 당연히 각성의 늪은 1순위 동급이었던 동혁이의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네 매형이 결국 한 건 했구나. 이래서 집안에 고위직 공무원 하나 있으면 좋다고 하는 거겠지, 껄껄!”
준우가 아직 고위직은 아니다.
다만, 고위직에 있는 이들과 친분이 두터운 건 사실이었다.
“그, 그럼 나 각성할 수 있는 거야?”
“물론이지! 드디어 우리 엑시스에 S급 헌터가 또 탄생하게 됐구나!”
“거기 가면 무조건 S급 돼?”
“이 애비가 어떻게든 S급으로 만들어줄 터이니, 그건 걱정 말거라!”
각성 직전.
충격이 클수록 높은 등급으로 각성할 확률이 높다지.
‘만반의 준비를 해서, 재혁이 놈 때보다 강하게 압박해줄 필요가 있겠어.’
수태광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동혁이를 어떻게든 S급 헌터로 만들 것이리라.
‘이제 남은 건, 단 하나.’
각성의 늪에 함께할 공격대를 편성해야 했다.
동혁이를 레이드 마지막에 있는 ‘각성의 신전’ 까지 안내 할 수 있는 공격대 말이다.
‘문제는 다른 국가의 팀들보다 빨리 신전에 도착해야, 가장 좋은 성수를 선택할 수 있다는 건데.’
엑시스 자체로서 편성할 수 있는 최고의 팀을 편성해야 했다.
말 그대로 최고 전력을 꾸려야, 다른 국가보다 좋은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동혁이가 높은 등급의 헌터로 각성할 확률 또한 높기 때문이다.
‘공격대장은 내가, 부대장은 재혁이 놈이 맡으면 돼.’
S급 헌터인 본인과 A+ 급이라 할 수 있는 수재혁.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판단이었다.
당연히 엑시스 경호실과 공격대 백호에서 최고 인력만을 선별해서 공격대에 편성하겠지만, 수태광 본인이 융통할 수 있는 인력을 최대한 동원해 최고의 공격대를 만들어야만 했다.
그렇다면.
가장 이상적인 공격대에는 그가 필요하다.
수태광의 사위인 준우.
하지만 공무원인 그가 규정상 겸업은 물론, 대외 활동을 할 수는 없을 터.
“최 비서. 각성의 늪 공격대에 전 서방을 참가시킬 수 있는 방법 좀 알아봐.”
“예, 알겠습니다.”
수태광의 명령에 최 비서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
돌아온 주말의 첫 시작은 선화와 함께였다.
그간 바빴던 가게가 비교적 한가해진 덕분에 가게는 아르바이트에 맡겨두고, 오늘만은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휴식의 테마는 방콕.
선화의 지친 심신을 위로할 겸, 하루종일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배달 음식 시켜 먹고, 낮잠 자고, 영화 보고.
딱히 엄청난 일을 한 건 아니지만, 이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어느덧 시간은 자정을 향해 가기 시작했고.
우연히 TV에서 다큐멘터리 방송을 보게 됐다.
하필이면, 방송 내용이 부부가 사별하는 내용이다.
아내가 불치병으로 인해 먼저 세상을 떠나는…….
“선화 너 울어?”
“그러는 오빠는? 오빠도 울고 있잖아.”
흐음. 감정이입을 너무 한 것 같다.
마치 TV 속의 부부가 나와 선화라는 생각에.
“있잖아, 오빠.”
“응?”
“만약에 내가 먼저 죽으면…….”
“그런 소리 말아! 죽긴 왜 죽어! 영원히 평생 함께 행복하게 살아야지!”
“사람은 다 죽어.”
“그, 그렇긴 하지만…….”
상상도 하기 싫다.
선화가 또 죽는 상황 따위는.
“아무튼, 만약에 내가 먼저 죽으면 화장해서 세상에서 가장 예쁜 나무 밑에 묻어줘.”
“왜?”
“그래야 가끔 날 보러 오는 오빠가 예쁜 나무를 보고, 나도 여전히 예쁘다고 생각할 거 아냐.”
“일단 그런 상상은 조금도 하기 싫지만…….”
괜히 울컥한다.
다큐멘터리 같은 거 보지 말걸.
“……요즘엔 유골 보석 같은 게 있대. 유골을 보석으로 만들어서 목걸이나 반지로 간직하는 거지.”
“그런 게 있어?”
“응. 선화 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으로 만들어서 간직할게. 내가 죽는 그 날까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 뭔데?”
“모르지. 하지만 어떻게든 찾아서 만들 거야, 내가.”
선화가 피식 웃는다.
붉어진 눈시울에 미소를 띄우니, 이런 느낌 또한 묘하게 예쁘다는 생각이 든다.
울어도 예쁘고, 웃어도 예쁘고, 울다가 웃어도 예쁘네.
“선화 네 말 대로 사람이니까 우린 언젠가 죽겠지. 그래서 남아 있는 시간은 최대한 우리가 행복하게, 많은 시간을 공유하면서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
회귀 전엔 그러지 못했거든.
망할 늑대 놈들부터 하루빨리 뿌리를 뽑아야 할 텐데.
아무튼.
죽는다는 얘기는 여기까지.
회귀 전에 이미 그 아픔을 경험한 마당에, 굳이 이런 얘기를 길게 더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어떻게 하면 선화와 더 오랜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게 낫다는 판단이다.
한동안 나는 여유로웠다.
특수본부의 일은 특수본부 인원들이 각자 맡은 역할 대로 잘 풀어가고 있었고, 더 이상 기동대원이 아닌지라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비상시에 출동할 일도 없었다.
‘집, 회사, 집, 회사 반복이라.’
누군가는 지겨운 일의 연속이라 할 수 있겠지만.
내게는 이 보통의 나날이 선화와 보다 많은 시간을 즐길 수 있어서 행복 그 자체였다.
“어? 막내야.”
그런데 어느 날.
본부장님이 요상한 서류 하나를 들고 오더니.
“너 엑시스 레이드 공격대 편성됐더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셨다.
협회 소속 헌터는 대외 활동 안 되는 걸로 아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