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보 아빠와 육아 고수
선화가 일본으로 출국하기 하루 전.
수태광은 장남에게서 기분 좋은 소식 하나를 전해 들었다.
- 선화 일본으로 휴가 간다던데요. 간만에 가게 들렸더니, 아르바이트 생이 그렇게 말하더라구요. 사장님이 휴가 준비로 바쁘시다고. 일주일 정도 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 일주일씩이나? 그럼 우리 손녀는 누가 돌봐?
누가 돌보겠는가.
엄마가 없으니 당연히 아빠뿐이다.
‘전 서방 혼자선 힘들 게야. 손주 녀석 기가 워낙 세야 말이지.’
엄마 껌딱지로 소문난 수린이다.
아무리 아빠가 곁에 있다고 한들, 엄마의 부재는 클 것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이 육아 고수가 나서주는 수밖에.’
수태광이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록 대부분의 육아는 전처인 황장미가 도맡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오 남매를 잘 키워내지 않았던가.
자그마치 오 남매다.
이 정도면 육아 고수에 속하지 않을까.
‘전 서방도 참. 이런 일이 생겼으면 즉각 나한테 도움을 요청했어야지, 뭐가 미안하다고 이렇게 눈치를 보는 건지.’
벌써부터 머릿속에 수린이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꺄르르 웃고 있는 손녀의 모습을 상상하자, 수태광의 입꼬리가 절로 승천했다.
“회장님. 내일 오전에 있을 임원 회의에 대한 안건입니다.”
최 비서가 서류 파일을 건넸다.
이어, 오늘 스케줄부터 내일 스케줄까지 줄줄 읊기 시작했다.
국제 사업을 위한 해외 출장이 아닌 이상, 회장인 수태광이 현장이나 실무를 맡는 경우는 없었다.
아랫것들이 하는 일에 고개를 내젓거나, 끄덕이거나 할 뿐.
내일 예정된 스케줄도 딱히 중요한 것들은 아니었다.
대부분 엑시스의 회장인 그를 대접하기 위해, 타 길드나 협회 간부급들이 마련한 술자리나 식사 자리였으니까.
어떻게든 엑시스에 연줄을 대보려고 기회를 엿보는 자들.
정작 당사자인 수태광에겐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리 중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몇몇을 제외하면 엑시스에 딱히 도움이 되는 자들도 아니고.
“최 비서. 내일 스케줄 싹 다 미뤄주게.”
“갑자기 말입니까?”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이 생겼네.”
“회장님께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이라면…….”
어차피 전부 식사 자리였던지라 미루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예의만 갖춰서 회장님의 뜻을 전한대도, 오히려 수십 번도 더 기다릴 사람들이었다.
아쉬운 건 그쪽이지, 이쪽이 아니니까.
‘무슨 일이 생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회장님 표정으로 보아 엄청 기분 좋은 일임엔 분명한데…….’
최 비서가 수태광의 얼굴을 세심히 살폈다.
이미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고, 딴생각으로 가득해 보이는 표정이다.
‘선화 녀석 잔소리 없이 수린이랑 실컷 놀아줄 수 있겠군!’
일전에 한번 선화를 대신해 손녀를 돌봤던 적이 있다.
칸나의 첫 검술 훈련이 시작되던 날, 선화가 밥차를 대령하느라 집을 잠시 비웠을 때다.
수린이한테 이거 하지 말라, 저거 하지 말라.
어찌나 잔소리가 심하던지.
엄마로서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한다만, 누가 자신의 딸 아니랄까봐 유독 유난을 떠는 선화였다.
‘그나저나, 저번처럼 갑자기 수린이가 울음을 터뜨려 버리면 곤란해질 텐데.’
겨우 달랬던 기억이 있다.
만약, 선화가 오기 전까지 달래지 못했더라면 분명 귀가 터져라 잔소리를 들었겠지.
‘괜히 육아 돕겠다고 나섰다가, 장인 체면에 전 서방 앞에서 모양 빠지는 꼴을 보일 수도 없고.’
당시 격하게 울던 수린이의 모습을 떠올리니, 아까와는 달리 육아에 대한 자신감이 조금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손주 녀석 울음소리가 보통 울음소리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오 남매의 아버지로서.
사위 앞에서 무능력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최 비서, 자네 육아 좀 하나?”
“육아라고 하심은?”
“우는 아기 잘 달래는 법이나, 목욕시키는 법, 그런 거 말이야. 얼마 전에 손주 봤잖나. 혹여 노하우 같은 거라도 있나 해서 묻는 걸세.”
“노하우라.”
“웃는 걸 보니 뭐가 있긴 있구만 그래.”
“요즘 육아는 템빨입니다, 회장님.”
“템빨?”
수태광이 가까이 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좀 더 자세히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
장인어른께서 어떻게 아신 건지는 모르겠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 가족들에겐 선화의 휴가 소식을 철저히 비밀로 한 건데, 용케 새어나간 것 같다.
‘하나보단 둘이 낫겠지.’
수린이와 단둘만의 추억을 만들고 싶긴 했어도, 육아를 지원하겠다는 장인어른이 못마땅한 건 아니었다.
장인어른께서 수린이와 나를 걱정하는 마음에 나서신 걸 잘 알기에.
그리고, 뭐…….
나도 육아를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선화를 흔쾌히 보내긴 했지만, 혼자만의 육아가 조금은, 아주 조금은 두렵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어쨌거나, 내가 초보 아빠인 건 사실이니까?’
할아버지와 함께 추억을 만드는 것도 나름 즐거운 시간이 될 것 같았기에, 나름대로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선화가 알게 되면, 내가 혼날 수도 있다는 건데.’
일본 출국 전, 신신당부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장인어른께 수린이 맡기지 말라고.
이유는 두 달 전의 일 때문이었다.
칸나의 첫 훈련 당시, 선화가 밥차를 준비하면서 집을 비웠을 때 장인어른께 수린이를 잠시 맡겼는데…….
- 아니, 무슨 애를 거지꼴로 만들어놨다니까?
선화가 수린이의 옷과 양말, 액세서리까지 완벽하게 공주 취향으로 맞춰뒀다고 한다.
그런데.
장인어른께서 직접 준비해오신 각종 아이템들로 수린이를 ‘여전사’ 로 컨셉으로 바꿔버렸단다.
두 사람이 추구하는 수린이의 스타일이 다른지라, 거기서 다소 마찰이 있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칸나의 훈련을 진행 중이었던지라, 직접 보진 못했지만.
‘뭐, 이따 오시면 이번엔 직접 볼 수 있겠지.’
장인어른 스타일을 알기에 선화도 장인어른께 수린이를 맡길 생각이 없었다고 했다.
그 이전부터 장인어른이 수린이 돌봐주겠다며 노래를 불러대시는 탓에 어쩔 수 없이 수락을 했을 뿐.
“수린아, 이따 할아버지 오신대.”
“하아부지!”
수린이는 어느새 입이 더 텄다.
당연히 몸도 더 컸고, 머리카락도 많이 자랐다.
보통 아이들과는 비교조차 안 될 성장 속도.
장인어른께서 수린이를 돌봤을 때가 두 달 전이니, 아마 몇 달이 더 지나면 겉모습은 세, 네 살 정도의 보통 아이들처럼 보이지 않을까.
딩동 - !
잠시 후 현관 벨이 울렸다.
현관문을 열자, 장인어른을 발견한 수린이가 꺄르르 웃으며 소리쳤다.
“하아부지! 하아부지!”
“아이고! 우리 손주! 이 할애비 기다리고 있었구나!”
나는 거들떠도 안 보시고 수린이부터 품에 안으신다.
아주 살짝 섭섭하긴 했지만, 이해는 간다. 전처럼 ‘하부’ 가 아닌, 자그마치 ‘하아부지’ 소리를 하는 수린이었으니까.
“껄껄! 요 녀석은 말도 금방금방 트는구만 그래! 확실히 할애비를 닮아서 총명한 구석이 있어!”
……알에서 태어났는데요?
그래도 할아버지를 닮을 수 있는 건가.
아무튼.
괜한 소리는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자칫 나한테 불똥이라도 튈라.
“식사는 하셨…….”
“자넨 이것 좀 잠깐 받아주겠나.”
“……이건?”
장인어른께서 내게 짐을 맡기시듯 가방 하나를 건네셨다.
가방 건네는 게 뭐 문제겠냐 만은, 이게 보통 가방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낡고 허름한 군용 더블백.
최대 1톤의 무게를 수용 가능한 아공간 아티팩트다.
‘이거 장인어른께서 전장에 나가실 때 주로 가져가시는 장비 가방인데?’
장인어른께서 착용하고 계시는 팔찌는 각종 재료나 마법 스크롤 같은 가벼운 것을 적재하는 아공간 아티팩트였고, 건네받은 가방은 철저히 전투에 참여하실 때만 사용하시는 가방이었다.
“거기 멀뚱히 서서 뭐 하나?”
“장인어른, 혹시 이따가 레이드라도 가십니까?”
“레이드는 무슨. 손주 볼 시간도 모자라 죽겠구만.”
“그럼 이 가방은 뭡니까?”
장인어른께서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차신 뒤.
비장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이 사람아, 육아는 실전일세. 그것도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는 전투와도 같은 실전이지. 당연히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나?”
“오오! 역시 든든합니다, 장인어른!”
진심으로 감동하고 감탄했다.
수린이의 육아에 이토록 진심이시고, 많은 준비를 하셨을 줄이야.
‘그동안 육아 고수라는 장인어른의 말에 반신반의 했었는데…….’
선화도 장인어른 육아 실력 진짜 별로라고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건 장인어른의 진면모를 보지 못한 우리의 잘못된 판단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오늘 초보 아빠 티를 벗게 해주겠네. 자넨 나만 믿고 따라오시게.”
과연, 오 남매의 아버지는 다르구나!
수린이에게 울룰룰루 까꿍을 하시는 장인어른의 옆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위대한 영웅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
겉모습은 세, 네 살 아이들의 모습을 향해 가고 있지만, 수린이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다.
때문에, 아직 일반적인 식사에 익숙치 않은 수린이의 음식에 유독 신경을 써달라는 선화의 당부가 있었다.
“이런. 장인어른! 저 잠시 밖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무슨 일인가?”
“온도계가 고장 났습니다!”
이유식을 포함한 모든 음식의 온도를 재서, 적정 온도를 맞춰서 먹여야만 했다.
수린이의 식사에 특히나 예민한 선화였고, 여행을 떠나기 전에도 내게 수없이 말했던 것 중 하나였다.
“허허, 난 또 뭐라고. 이유식 먹일 건가?”
장인어른께서 손을 내미신다.
이유식이 담긴 그릇을 그 위에 올려놓으라는 것 같았다.
“내가 있는데, 굳이 온도계가 필요한가?”
선화가 말했었다.
이유식은 손등에 가져다 댔을 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사람의 체온과도 비슷한 온도가 가장 적당하다고.
하지만, 우리 수린이 같은 경우는 미지근할 경우 그냥 뱉어버리고는 했었는데, 드래곤이라 그런가. 뜨거운 걸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수린이에겐 50도가 가장 적절하다고 했었지.’
그 말을 장인어른께 전달해드리며, 장인어른의 손 위에 이유식을 올려두었다.
“46도 정도군.”
장인어른께서 씩 웃으신다.
그러더니 마력을 살며시 끌어올려, 손바닥 위의 이유식을 데우기 시작했다.
“이제 됐네. 딱 50도일세.”
“대, 대단하십니다. 존경스럽습니다, 장인어른.”
“껄껄! 궁금하거나 도움 요청할 게 있다면, 얼마든지 말하게나. 내 기꺼이 자네에게 한 수 가르쳐줄 터이니!”
불 속성 특성을 온도계와 이유식 데우는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을 줄이야.
아무리 회귀까지 한 나라지만, 저 희귀한 특성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건 처음 본다.
역시 특성과 스킬은 응용을 잘할수록 유용한 법이다.
“아마 온도계보다 내 손이 더 정확할 걸세.”
어깨를 으쓱거리시는 장인어른의 얼굴엔 흐뭇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수린이의 육아도 마냥 쉬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또한, 장인어른과 함께라면 어떤 고난과 역경이라도 헤쳐 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수린이 목욕시키려고?”
적어도 목욕 전까지는 그러했다.
수린이의 목욕은 선화와 내가 함께 있어도 수월하게 끝낼 수가 없는 고난도의 문제였다.
그나마 선화가 있으면 간신히 우는 건 막을 수 있었는데…….
이게 나 혼자서 가능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나 혼자 수린이를 돌봐야 할 때 가장 두려운 것도 바로 목욕이기도 했다.
‘마치 뭐랄까…….’
회귀 전의 내가 처음으로 던전 솔로 공략에 나선 그 전투가 절로 떠오를 것만 같은.
‘그렇다고 목욕을 안 시킬 수는 없으니까.’
장인어른께서 살며시 내 어깨에 손을 얹으신다.
그리고는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다.
“겁먹지 말게.”
“잘할 수 있겠죠, 장인어른?”
“내가 옆에 있지 않나. 우린 잘할 수 있네.”
“아이 목욕시켜보신 경험 있으십니까?”
“어허! 이 사람아! 내가 오 남매의 애비 되는 사람이야.”
“이런, 제가 긴장하는 바람에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순간, 장인어른께서 회상에 잠기신 듯 가만히 눈을 감으셨다.
다시금 눈을 뜨시며 꺼내신 말은 큰형님이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이야기였다.
“재혁이 녀석 처음 목욕시켰을 때가 기억나는군. 전처가 옆에 있었음에도 불구, 애는 계속 울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지둥 대기만 하고…….”
“장인어른께서도 초보 아빠였던 적이 있었군요.”
“모든 애비들이 다 똑같은 법이지. 그렇게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 거고. 그러니, 자네도 할 수 있을 거야. 요즘은 세상이 참 좋아지지 않았나?”
“예?”
“애들 목욕시키는 것도 요즘 세상의 방식대로 해야 한다는 걸세. 그게 초보 아빠 티를 훨씬 더 빨리 벗을 수 있게 해주거든.”
“그 방식이라는 게 대체 뭡니까, 장인어른?”
솔깃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장인어른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아하니, 분명 수린이를 울리지 않고도 목욕시킬 수 있는 방법일 것 같았으니 말이다.
어쩌면, 방긋방긋 웃으면서 목욕을 할 수 있을지도.
“가서 가방 좀 가져오게.”
“가방이라면……?”
“전투에 임하려면 장비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장인어른께서 아까 내게 맡겼던 더블백.
아공간 아티팩트인 그 안에는 수백 가지가 넘는 육아템이 잔뜩 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