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초보은
신비는 꽤 낯을 가리는 성격이었다.
선화가 아니면 금방 울음을 터뜨릴 정도로.
“울룰루루! 까꿍!”
그런데, 그런 신비가 장인어른의 익살맞은 표정에 꺄르르 웃고 있었다.
막 알에서 깨어났을 당시에는 똑같은 ‘울룰루루! 까꿍!’에 곧장 울음을 터뜨렸는데 말이다.
‘낯가림이 없어진 건가?’
어느 순간부터 그랬던 것 같다.
이전에는 내가 안을 때도 울지 않았던가.
“이제야 요 녀석이 할애비를 알아보는 모양이구나!”
“하부!”
장인어른께서 신비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으신다.
만약, 신비가 저번처럼 장인어른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면 나도 조금 무안할 뻔했다.
어쨌거나.
신비의 낯가림이 사라졌다는 건 다행인 일이었다.
말순이가 신비를 등에 업고 다니기도 하지만, 다른 아이들과도 나름 가까워진 신비였고, 그렇게 반려몬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과정에서 낯가림이 사라진 게 아닌가 싶다.
“어? 신비 잠들었네.”
선화의 말에 신비를 다시 바라보니, 금세 잠들어 있었다. 장인어른의 품이 썩 편안했던 모양.
“아빠, 팔 아프지 않아? 신비 내가 안을까?”
“그냥 둬도 괜찮다. 따뜻하고 좋구만. 그나저나…….”
말끝을 흐린 장인어른께서 힐끗 옆을 살피신다.
그곳에는 곱게 접힌 화선지가 놓아져 있었는데, 아마도 그게 오늘 우리 집에 오신 목적인 것 같았다.
“요 녀석 이름을 신비라고 지은 것이냐?”
장인어른께서 화선지를 손에 꽉 움켜쥐고 들어오시던 그 시점부터 목적이 무엇인지는 대충 예상을 했다.
방금 신비의 이름을 언급하시는 걸로 보아, 회귀 전에도 그랬듯 손주의 이름을 지어 주고 싶으셨던 거겠지.
“신비라는 이름이 너무 가벼운 느낌인 것 같은데.”
“그렇게 짓기는 했는데. 아직은 이름이라기보단 태명에 가까운 느낌으로 지은 거라…….”
“껄껄, 다행이구나. 내 그럴 줄 알고 이름 몇 자를 좀 지어 봤거든.”
“신비 이름을?”
“내 나름 요 녀석 할애비인데, 친히 이름 정도는 지어 줘야 하지 않겠느냐?”
장인어른이 내게 살짝 눈치를 주신다.
화선지를 펼쳐 보라는 뜻인 것 같다.
“전 서방. 자네가 첫 번째 이름을 한번 읊어 보게.”
은근히 기대하시는 눈치다.
여기서 말하는 기대란 나와 선화의 반응을 말하는 거다.
내가 심혈을 기울여 이름을 지었으니.
당연히 너희도 마음에 들 것이다, 뭐 그런.
스윽-
화선지를 펼쳐 본다.
멋들어진 붓글씨로 적힌 이름 세 개가 적혀 있다.
‘내가 알기론 이맘때 장인어른 붓글씨 실력이 이 정도로 완벽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몇 번이고 다시 고쳐 쓰셨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회귀 직전과 비슷한 느낌의 필체를 뽐낼 수는 없었을 테니까.
“뭐하나, 전 서방? 어서 읊어 보라니까.”
“아, 알겠습니다, 장인어른.”
일단 대답은 했는데.
나도 모르게 선화의 눈치를 살폈다.
어째 이름들이 하나 같이 선화의 마음에 안 들게끔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 이건 분명히 선화가 질색팔색할 이름들이라고 생각했다.
선화가 나를 바라본다.
궁금증과 기대가 뒤섞인 표정으로.
“수용…….”
“뭐, 뭐?”
“……첫 번째 이름이 수용이라고. 빼어날 수(秀) 자에, 용 용(龍) 자를 써서.”
장인어른께서 씩 미소를 지으신다.
우리야 어찌 됐든, 이름을 직접 지으신 장인어른께선 상당히 만족하시는 모습이다.
“자고로 이름은 지닌 뜻이 원대해야 하는 법. 요 녀석이 용이라며? 그래서 용들의 최고가 되라는 뜻에서 그리 지었느니라.”
나름 기대를 했던 선화의 표정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선화가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다음.”
다소 날이 선 선화의 목소리.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레 두 번째 이름을 읊어 본다.
“대광. 큰 대(大) 자에, 빛 광(光) 자를 써서…….”
“다음.”
아, 젠장.
마지막 세 번째 이름이 제일 최악인데.
장인어른께는 정말이지 죄송하지만, 선화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이 먼저 들 수밖에 없었다.
“다, 다음? 벌써?”
“그래, 오빠. 마지막은 뭐야?”
“왕…….”
“왕? 그게 다야?”
장인어른께서 고개를 끄덕이신다.
가장 마음에 드시는 이름인 듯, 입꼬리도 쓱 올라가는 게 보였다.
“세 번째 이름은 특별히 외자이니라. 임금 왕(王) 자를 썼지.”
“오빠 성을 따르면, 붙여 읽었을 때 전왕이네?”
“요 녀석 재능이라면 능히 이 나라를 아우르고도 남을 인재다. 이 나라의 왕 격으로 군림할 정도의 영향력을 떨치고, 전국적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라는 뜻에서…….”
선화가 혀를 내두른다.
회귀 전에도 장인어른께서 외손주가 태어나면 지어 주신다고 했던 이름과 별반 다른 게 없었다.
그때도 선화의 반응은 지금과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결국 선화의 마음에 쏙 드는 이름을 지어내긴 하셨지. 김 비서님과의 합작으로 말이야.’
당시엔 김 비서님도 우리 가족이었다.
형님과 결혼을 하신 직후였으니까.
“아빠, 너무 남자애들 이름 같지 않아?”
“이름에 남녀가 어딨겠느냐?”
장인어른 말씀이 옳긴 하다.
이름에 남자, 여자가 어디겠냐 만은.
그래도 선화는 어감이 영 별로인 모양이다.
“이름이 너무 무겁고, 과한 느낌인데.”
“과하기는. 오히려 요 녀석이 가진 재능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지.”
회귀 전에도 유독 왕, 광, 용 자에 집착을 하시는 장인어른이셨다. 한자가 가진 뜻이 커서 좋으시다면서.
“요 녀석은 가히 세상을 뒤집고도 남을 재능을 가진 인재야. 이런 인재에겐 여전사와도 같은 무게감 있는 이름이 어울리거늘.”
“솔직히 굳이 한자 이름 쓸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해. 순수 한글 이름도 예쁜 거 많아, 아빠.”
“대대로 우리 집안은 뜻이 큰 한자 이름을 줄곧 사용해 왔다. 그런데, 그걸 어찌 내가 멋대로 바꾸겠느냐?”
선화가 이름 짓는 취향이 장인어른과 비슷한가.
반려몬 아이들 이름 짓는 거 보면 그럴 법도 한데.
아무튼.
신비를 몬스터가 아닌, 사람에 가깝게 생각하는 선화인지라 이번엔 평소와는 다른 이름을 선호하는 것 같았다.
선화의 말마따나 촌스럽지 않고 우아하고 예쁜 이름으로.
그러나.
장인어른의 고집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당연히 선화도 마찬가지였고.
“용, 광, 왕, 뭐 그런 한자만 좀 빼자. 어때, 아빠?”
“광 자가 나랑 겹치니, 그럼 광 자는 빼도록 하지.”
“……왕 자도 빼. 예전에 엄마한테 들었는데, 원래 큰오빠 이름도 수재혁이 아니라, 수재왕으로 지으려고 했다며?”
“크흠, 그랬지.”
“근데, 왜 바꿨어?”
“네 엄마가 왕왕 거리는 게 개소리 같다고 하기에.”
만약, 큰형님 이름이 수재왕이 되었으면 막내 처남 이름도 동혁이가 아니라 동왕이가 됐을 거다.
형님들과 처남들 이름은 돌림자를 썼으니까.
“용 자도 별로야. 원래 내 이름에도 용 자를 넣으려고 그랬다며? 엄마가 뭐랬더라. 아, 맞아! 수대용이었어!”
“틀렸다. 수태용이었느니라. 귀하게 얻은 딸이니 특별히 아들놈들 쓰는 돌림자는 기꺼이 뺐었지.”
“딸 이름이 태용이 뭐야, 태용이! 엄마가 엄마 이름처럼 꽃 이름으로 지어 주지 않았어 봐. 아마, 내가 따로 개명했을걸?”
“너도 내 피를 물려받았으니, 두 오빠들처럼 훌륭한 헌터가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강인한 이름이 찰떡이라고 판단했지.”
“아무튼! 그때 엄마가 질색팔색했다며? 그런데도 손주 이름을 그렇게 짓겠다는 거야?”
“아까도 말했듯이 요 녀석은 여장부와도 같은 이름이 어울린다. 자그마치 비행 능력까지 타고난 녀석이라고. 너는 잘 모르겠지만, 가히 나보다 더 훌륭한 헌터가 될 자질을 타고난 인재다.”
“하아, 미치겠네.”
“나도 미치겠다! 어찌 딸이라는 녀석이 이 애비의 큰 뜻을 몰라주는 건지!”
손주가 생기면 꼭 이름을 지어 주겠다는 작은 바람.
그것이 장인어른의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장인어른께서 원하시는 것은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손주의 이름이었다.
비록 자신이 직접 짓지는 못했더라도, 찰떡같이 마음에 든다면 장땡이다.
‘그게 선화의 마음에도 쏙 들어야 할 테고.’
모녀가 하도 티격태격하기에 끼어들 틈이 없었는데.
뒤늦게 기회가 왔고, 이제 이 상황을 내가 끝내 줘야 할 듯싶었다.
“전 서방. 자네는 생각해 둔 이름 없나?”
“으음…….”
회귀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결국,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어도 김 비서님과의 합작으로 선화와 장인어른 두 사람 모두에게 마음에 드는 이름이 탄생했더랬지.
아마, 내가 그 이름을 언급하면 상황이 종료될 터.
‘……근데, 그 이름 한자 뜻이 어떻게 됐더라.’
두 자였는데, 앞 자가 가진 뜻이 워낙에 많아 잠시 생각할 틈이 필요했다.
섣불리 말을 꺼냈다간 자칫 장인어른께서 별로라고 하실 수도 있기에.
“어라? 신비 깼네?”
막 이름의 한자 뜻이 생각이 난 그 순간.
장인어른의 관심이 다시 다른 쪽으로 쏠려 버렸다.
어느새 잠에서 깬 신비가 장인어른을 향해 미소를 내비치고 있었던 거다.
“이런, 이런! 이 할애비 목소리가 너무 커서 잠을 깨운 모양이구나.”
장인어른께선 잠에서 깬 신비와 한참을 더 놀아 주다가, 저녁 식사까지 마치신 뒤 집으로 돌아가셨다.
오기가 생기셨는지, 어떻게든 선화의 마음에 쏙 드는 이름을 가져올 거라고 하시면서 말이다.
의지가 너무 활활 타오르셔서,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정 안 되면 그때 가서 내가 알고 있는 정답의 이름을 말씀드려도 되는 거니까.
우우웅-
그때였다.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렸다.
‘응? 김 비서님이 왜 나한테 갑자기 연락을?’
문자 내용이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회귀 전과는 반대의 상황이었기에.
- 혹시 이번 주에 시간 좀 내어 주실 수 있을까요? 아무리 고민을 해 봐도 답이 나올 곳은 준우 씨밖에 없다고 판단을 해서요.
김 비서님이 내게 고민 상담이라.
회귀 전에 내가 김 비서님께 했던 고민 상담과 비슷한 내용이 아닐까.
어쩌면.
형님께서 프로포즈를 하신 건지도 모르겠다.
* * *
김 비서님께서 좀 급하신 것 같았다.
그래서 주말까지 기다리게 하기엔 당사자가 마음 졸일 것 같아, 평일 점심에 시간을 냈다.
협회 건물 근처 카페에서 약속을 잡았고, 김 비서님의 배려에 샌드위치로 점심을 겸하며 고민을 듣기로 했다.
구구절절 털어놓는 고민이었지만 핵심은 하나였다.
나는 샌드위치를 다 먹은 뒤, 입 주변을 닦으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형님께서 요즘 결혼 얘기를 자주 꺼내신다?”
“……네.”
회귀 전에도 연애 기간에 비해 결혼이 빨랐던 두 분이었다.
항간에는 연애 기간이 너무 짧지 않느냐는 말이 있기도 했지만, 오히려 결혼 후에 지금보다 더 열정적으로 사랑을 이어 갔었다.
‘형님이 워낙 팔불출이었던지라 기억하고 있지.’
수 씨 집안 팔불출 기질은 모두 장인어른을 닮은 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형님께서 결혼을 심도 있게 언급하신다는 이유로 김 비서님이 날 찾아왔다는 거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리 가깝지도 않은 내게 도움까지 요청했을까.’
김 비서님은 형님과의 결혼을 하고 싶어 한다.
문제는 회장님이자, 시아버지가 될 장인어른이다.
“회장님께서 절 만족해하실까요.”
“……솔직히 말씀드려요?”
“아, 아니에요. 아니라는 건 저도 알고 있어서 이렇게 찾아온 거니까.”
나랑 비슷한 상황.
내가 장인어른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화와 결혼을 하려 했을 때, 나도 이런 고민을 했었다.
결국, 결혼을 감행.
장인어른의 눈치를 보며 살았었지.
“회장님께서 요즘 사위분 자랑을 엄청 하시거든요. 죄송한 말씀이라는 건 알지만, 예전엔 안 그러셨고…….”
“죄송하지 않으셔도 돼요. 사실이 그랬으니까요. 아마 절 엄청 혐오하셨을걸요?”
“그런데, 어떻게 그 짧은 기간 안에 회장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던 거죠?”
“계기가 있었죠. 아마, 김 비서님도 아실 텐데요?”
탐욕의 미궁 레이드.
그때, 눈도장을 아주 확실히 찍었었다.
“하아,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아요. 저희 집안이 엑시스만큼이나 좋지도 않고, 그렇다고 딱히 내세울 것도 없으니…….”
아무렴 형님은 엑시스의 장남이다.
차후 엑시스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
고로, 형님의 배우자가 될 사람은 그에 걸맞은 능력은 물론 집안까지 갖춰야 장인어른의 눈에 찰 수 있다는 거다.
그게 아니라면?
당연히 나처럼 격하게 반대를 하시겠지.
“형님께선 뭐라고 하시던가요?”
“조, 조금 부끄럽지만, 저만 있으면 엑시스 따위 물려받지 않아도 된다고…….”
“키야, 형님 성격 한번 화끈하시네.”
김 비서님이 얼굴을 붉히신다.
하긴, 형님과 김 비서님 능력이라면 굳이 엑시스가 아니어도 결혼 생활 유지하는 데는 딱히 문제가 되진 않을 거다.
나처럼 장인어른의 눈치를 좀 보긴 해야겠지만.
그래도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의 기업에 ‘따위’라는 표현을 쓰다니.
후계자가 되는 것보다 눈앞의 김 비서님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일 터, 참된 사랑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나보단 안 될걸? 최고의 사랑꾼 자리는 내 거거든.’
얘기를 들어 보아하니, 김 비서님은 형님께서 자신 때문에 많은 걸 포기하는 게 싫은 것 같았다.
사랑도 중요하지만, 엑시스의 미래는 형님께서 짊어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지 않은가.
만약 형님이 후계 자리를 포기하면, 그건 엑시스의 미래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결론은 이거네요. 결혼 전에 장인어른 마음에 들고 싶은데, 그 방법을 아무리 고민해 봐도 답이 나오질 않는다?”
“……맞아요.”
동병상련.
그래서 내 도움이 필요한 거다.
회귀 전엔 내가 김 비서님께 많은 도움을 받았다.
엑시스 내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기 이전에, 내가 장인어른 마음에 찰 수 있도록 던전이나 레이드 쪽에 기회를 마련해 주셨다.
‘그땐, 김 비서님께서 지금보다 직급이 높았으니까.’
날 좋게 봐주신 덕분에 사이가 제법 가까웠었고, 나 역시 장인어른의 마음에 들기 위해 자주 고민 상담을 했었다.
지금이야 상황이 반대가 되어 버렸지만.
‘내가 회귀하기 전에 형님과 김 비서님이 어떻게 결혼을 하셨다고 했더라?’
당시엔 지금보다 더 늦은 시기에 결혼을 했었다.
아마, 내가 형님께 김 비서님 가방을 추천드리고 이것저것 코치를 해 주면서 그 시기가 좀 앞당겨진 것 같았는데…….
‘……이런, 속도위반이었지.’
생각해보니 연애 기간에 비해 결혼이 빠를 수밖에.
두 분에게 아이부터 생겼고, 쌍둥이 조카들의 임신 사실이 알려지며 모든 게 해결됐었다.
장인어른께서 역정을 내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쿨하게 결혼을 허락하셨다.
신비를 안고 있는 장인어른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손주가 생기셨다며 방방 뛰시기까지 하셨다.
김 비서님께 도움을 주려고 했는데.
미쳤다고 아이부터 가지란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흐음, 아무래도 기회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기회요?”
“네, 장인어른께서 김 비서님을 다르게 볼 수 있을 만한 계기.”
김 비서님이 울상이 되셨다.
따지고 보면, 한낱 일개 직원이 회장님 마음에 며느리로서 들 만한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리라.
“언젠가 그 기회가 오기는 하겠죠……?”
오긴 올 거다.
회귀 전과 같은 식이든, 조금 다른 식이든.
하지만.
날 찾아왔는데, 그냥 돌려보내고 싶진 않았다.
‘회귀 전에 김 비서님께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까, 나도 이번에 뭔가 도움을 드리긴 해야겠지.’
결초보은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은혜를 입었으면 갚는 게 인지상정.
결국 가족이 될 사이인데, 좋은 일을 앞당겨서 나쁠 건 없었다.
“김 비서님 조부님께서 예전에 유명한 작명소 운영하셨다던데.”
“아아, 맞아요! 할아버지께선 지금 돌아가셨지만……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형님께 들었죠.”
형님께 들었다는 건 당연히 페이크다.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
핏줄은 못 속인다는 말이 있다.
이미 회귀 전에 김 비서님의 실력은 검증이 됐고.
김 비서님이 회귀 전처럼 손주가 될 신비의 이름만 기가 막히게 지어 준다면, 장인어른께 눈도장을 찍는 것도 그리 어렵진 않을 거다.
‘결국 내가 장인어른께 말씀드리려고 했던 신비의 이름도, 원래는 장인어른과 김 비서님의 합작이었으니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이번엔 그 공을 온전히 김 비서님께로 돌릴 수 있을 만한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거다.
“그 기회를 제가 한번 만들어 볼게요.”
“어, 어떻게요?”
김 비서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잔뜩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김 비서님께선 여자아이 이름 하나만 지어 주세요.”
“갑자기 여자아이 이름을요?”
고개를 끄덕인 나는 장인어른께 전화를 걸어 여쭸다.
가족회의를 통해 신비의 이름을 지어 보는 건 어떠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