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렇게 할아버지가 된다
신비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이제는 뒤집기뿐만 아니라, 스스로 앉는 것도 가능하다.
‘보통 아이들과 비교했을 때 엄청나게 빠른 거겠지.’
하긴, 느린 게 말이 안 된다.
걷기 전에 날기까지 하는 신비가 아니던가.
“맘마!”
이건 밥 달라는 뜻이 아니다.
선화를 부르는 소리였다. 엄마라는 뜻이겠지.
‘그래도 따다 소리보단 목소리가 작아.’
아빠인 나를 부를 때 목소리가 더 큰 만큼, 선화보다 나를 더 좋아한다는 뜻이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신비 얼굴을 봐? 오빠보다 나를 더 닮았잖아? 내가 더 좋다는 뜻 아니겠어?”
물론, 선화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점점 이목구비가 뚜렷해지는 신비였는데, 내 얼굴보단 선화의 얼굴을 따라가고 있다.
아마 폴리모프 스킬의 기본 베이스를 선화 얼굴로 잡은 것 같다.
‘그래도 뭐, 조금이라도 나를 닮긴 했으니까.’
왜 애를 키우는 사람들이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 이런 걸 묻는지 알 듯싶었다.
내가 더 좋다고 하면, 절로 어깨가 으쓱여지는 게 기분이 묘했다.
아무튼 신비는 잘 크고 있다.
물론, 아주 잘 놀고 있기도 했고.
“신비랑 말순이는 점점 더 친해진 것 같네.”
“오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무래도 말순이가 신비를 동생이라고 생각하나 봐.”
옆으로 살짝 고개를 돌리자.
말순이의 등 위에 철푸덕 엎드려 있는 신비가 보인다.
언젠가부터 말순이 등 위가 마음에 들었는지, 요즘엔 자주 저러고 있었다. 마치 둘이 하나가 된 느낌이랄까.
“맘마! 따다!”
신비가 주문을 외우듯 옹알거리자.
말순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신비를 업은 채로 우리 주변을 빙빙 돈다.
마치 아빠가 갓난아이 등에 앉히고 기차 태워주듯이.
신비가 귀찮을 법한데도 말순이는 이런 식으로 신비와 자주 놀아주고 있었다. 나름 집안의 어른이라고 배려해주는 걸까.
어쩌면.
선화 말대로 제 동생이라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오빠, 나중에 신비가 많이 크면 말순이 데리고 산책도 다니고 그러겠지?”
“그렇겠지. 그땐 말순이가 지금처럼 신비를 등에 업고 다닐 수는 없을 테니까.”
지금의 말순이와 신비의 상황과는 정반대가 될 테지만, 그 모습도 상당히 보기 좋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아빠가 그날 이후로 연락이 없네?”
“저번에 신비 동영상까지 보내드렸는데도?”
“응, 아무래도 실망이 엄청 컸나 봐.”
선화가 애꿎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장인어른의 연락을 기다리는 것 같은데.
괜히 임신 대소동으로 실망을 안겨드린 것 같아서 차마 전화는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나마 문자라면 괜찮은지, 신비의 영상을 계속해서 보내봤지만 여태 답장이 없단다.
“신비 엄청 예쁘고 귀엽게 나온 영상들만 엄선해서 보내준 건데. 어떻게 그걸 보고 아무런 반응도 없을 수가 있지? 이해가 안 되네.”
그러니까.
나라면, 당장 신비 보러 달려갔을 텐데.
“장인어른 답장 한번 유도해볼까?”
“어떻게?”
“비장의 무기를 써야지.”
“비장의 무기?”
“신비가 할아버지 소리 내뱉는 순간 바로 전화하실걸?”
“에이, 설마? 여태 무반응인데 갑자기 그럴 리가 있겠어?”
내가 우쭈쭈하자, 신비가 꺄르르 웃는다.
어떻게 이 귀여운 생명체를 보시고도 답장을 안 할 수가 있으신 건지.
웃고 있는 신비를 보고 있자니 더욱 확신이 든다.
신비의 할아버지 소리에 장인어른께서 환한 미소를 지으실 거라고.
“한번 해보지, 뭐.”
“신비는 아직 할아버지 소리는 못 하는데?”
따다, 맘마만 주로 사용하는 신비다.
그걸로 대부분의 의사 표현을 하고 있달까.
“처음엔 따다, 맘마도 못 했잖아. 할아버지 소리도 가르치면 금방 할걸?”
“할아버지는 말이 좀 긴데, 가능할까?”
“당연히 가능하지.”
우리 신비는 천재니까.
할아버지 소리쯤이야.
***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한다.
엑시스 내 최고의 공격대는 단연 ‘백호’ 라고.
나아가, 대한민국 내에서 최고의 공격대를 뽑으라고 한다면 열이면 열 백호를 언급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표면상 엑시스 최고의 공격대는 수재혁이 이끄는 백호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회장인 수태광의 경호실이 그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경호실이라고 하여, 단순히 회장을 보호하는 업무만 보는 곳이 아니었다.
말이 경호실이지 엑시스 정예부대나 다름없달까.
회장 직속 공격대를 겸하며.
오직 회장의 명령에만 움직이는 친위대가 바로 경호실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엑시스 경호실에 공석이 생겼다.
수태광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경호실이기에 하루빨리 인력을 채워야 하는 상황.
최 비서는 인사기록표를 살피며 고민에 잠겼다.
일전에 수태광에게 경호실 인력으로 추천한 인물들이었다.
‘추천해준 자들이 눈에 차지 않으셨나?’
아직까지 별다른 말이 없는 수태광이었다.
워낙 뛰어난 인재들이 가득한 경호실인 만큼, 어지간한 사람들로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다.
‘……경호실에 공석이 지속되면 곤란한데.’
비서실을 나선 최 비서는 회장실로 향했다.
경호실 인력 채용에 관해서는 워낙 신중한 수태광이었지만, 이번엔 유독 고민하는 시간이 긴 것 같았다.
‘꼭 원하시는 인재라도 있으신 걸까?’
고집이 센 수태광이다.
뭔가에 꽂히면 무조건 해내고야 마는 스타일.
그런 수태광의 성격을 잘 아는 최 비서였다.
때문인지, 회장님이 최근에 했던 말들을 곱씹어 보다가 문득 얼마 전에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 저 친구는 누구지?
- 피스 길드장의 막내딸입니다. 이번에 피스 길드 1군 공격대장으로 임명되었다고 하더군요.
- 신기한 능력을 가졌군. 저런 건 처음 보는데?
- 비행 능력이 뛰어나 공중전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 흐음, 공중전이라. 피스 길드장 막내딸이면 엑시스로 스카우트하는 건 아마 불가능하겠지?
피스 길드의 던전 공략 정보를 입수한 영상에서 우연히 보게 된 비행 능력에 특화된 자였다.
여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신비한 능력에 수태광이 꽤 관심을 가졌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중전이라면 엑시스 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길드가 꺼려할 만큼 힘든 전투였다.
비행 능력에 특화된 인재가 있다면 엑시스에게도 취약점인 공중전에 크나큰 전력이 될 터.
수태광으로서도 탐이 날 수밖에 없었을 거다.
‘현재로서 비행 능력자는 피스 길드의 막내딸이 유일해. 당장 그만한 인재는 구할 수 없으니, 일단 회장님의 의견을 직접 여쭙는 게 좋겠어.’
최 비서가 회장실 문에 노크를 했다.
그러나, 몇 번을 더해도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안에 안 계시나?’
최 비서가 관리하고 있는 스케줄 상, 오늘 수태광에겐 외부 업무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번 더 노크를 해봤다.
뒤늦게 들어와도 좋다는 수태광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회장실 안에 들어선 최 비서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당황을 했다.
‘이, 이게 무슨……?’
회장실은 난잡했다.
구깃구깃한 화선지, 그 외 다른 종류의 종이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쓰레기통은 가득 찬 종이들로 이미 용량이 초과된 상태였다.
‘얼마 전에 붓과 먹을 준비해달라고 하시더니…….’
수태광은 붓을 움직이는 것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고뇌로 가득 찬 표정으로 힘겹게 무언가를 적어가고 있다.
“끄응! 이게 아니야. 이 이름은 한자가 가진 뜻이 너무 얕아. 무게감이 너무 없단 말이지.”
고개를 내저은 수태광이 다시금 다른 이름을 적어본다.
“이건 눈으로 봤을 때, 모양새가 영 좋지 않은 것 같고.”
역시나 이번에도 아닌 것 같은지, 종이를 구겨 아무 데나 대충 내던졌다. 또 다시 움직이는 붓을 쥔 그의 손.
“흐음, 발음이 영 어려운 듯한데.”
바닥에는 구겨진 종이가 점점 더 늘어갔다.
그만큼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사실, 처음부터 이렇게 열정적이진 않았다.
알맹이의 이름을 지어주려고는 했으나, 이만큼이나 심혈을 기울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적어도 그 소리를 듣기 전까지만 해도.
- 하부!
- 아빠, 들었어? 방금 할아버지라고 하는 거?
며칠 전, 선화가 보내온 동영상 속 알맹이가 외쳤던 그 단 한마디가 수태광의 태도를 바꿨다.
정말로 ‘하부!’ 라는 그 소리가 할아버지라고 하는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무슨 뜻인지는 아마 당사자인 알맹이만이 알고 있겠지.
하지만.
수태광에게는 분명히 ‘할아버지’ 로 들렸다.
듣고 싶은 대로 들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를 그리도 간절하게 할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아무 이름이나 대충 지어줄 수는 없지.’
암, 그렇고말고.
수태광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이름 짓기에 집중했다.
‘아직도 손주분 이름을 못 지으셨을 줄이야.’
최 비서가 바닥에 널브러진 종이들을 펼쳐보자, 그곳에는 수많은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바닥에 버려진 걸로 봐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이겠고.
‘회장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걸 보면, 분명히 엄청 대단한 이름이 나올 것 같기도…….’
경호실 인력 채용에 대한 답이 늦은 이유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손주 이름을 짓는데 꽂혀 있었기에 차마 경호실 건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거다.
‘자녀분들 이름을 지으실 때도 이렇게까지 하진 않으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 아닌가? 다시 생각해보니 선화 아가씨 이름 지을 때랑 비슷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들들 이름 지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선화 이름 지을 당시엔 밤을 새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집중력을 보였었다.
어쨌거나, 집중하고 있는 수태광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당장 최 비서가 옆에 서 있다는 사실도 잊고 있지 않은가.
경호실 관련 건은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도록 하고, 오늘은 이만 물러가는 수밖에.
‘그나저나, 손주분이 남자아이인가?’
구겨진 종이에 적혀 있던 이름들.
최 비서가 봤을 땐 하나같이 강인하고 묵직하게만 느껴지는 것들이었다.
***
크흠!
딸의 집 현관 앞에 선 수태광이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그리고는 괜히 멋쩍은 듯 몸 주변을 긁어댔다.
알맹이를 손주로 인정하느냐, 마느냐를 고민하며 선화가 그간 보내왔던 메시지에 답장을 안 했던 게 조금 마음에 걸려서다.
‘그래도 이름을 지어 오긴 했으니…….’
그간 딸이 너무 서운해하진 않았길 바랐다.
수태광 본인도 알맹이를 두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느라 나름 심력을 쏟았으니, 부디 이해해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몇 번 더 헛기침을 하던 수태광이 현관벨을 눌렀다.
알맹이를 위해 지은 세 개의 이름이 적힌 화선지를 손에 꽉 움켜쥔 채로.
“아빠!”
“장인어른!”
선화의 반색하는 표정을 보아하니, 다행히 섭섭해 하는 기색은 없어 보였다. 준우 역시 마찬가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고집 세고 자존심 강한 수태광이 그날 이후 먼저 찾아왔다는 것은 꽤 많은 걸 양보한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간 별일 없었느냐?”
수태광은 선화와 준우에게 물었다.
그러나 묘하게도 시선은 다른 곳들을 살피고 있었다.
목표는 자신을 할아버지라고 간절히 부르던 바로 그 녀석.
“우리야 별일 없었지. 근데, 아빤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아?”
“설마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장인어른?”
“아닐세. 어제 밤을 좀 새우는 바람에.”
“뭐하느라 밤을 새워?”
“일단 앉아서 얘기하자꾸나.”
밤을 샌 이유는 손에 쥐고 있는 이름 때문이다.
어차피 자신이 지은 이름을 보여주면 이유야 알게 될 터.
수태광은 소파에 앉으면서도 연신 시선으로는 집안을 살폈다.
이쯤 되면 기척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알맹이 녀석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간 알맹이로 인해 연락도 없다가.
대뜸 알맹이를 찾는 것도 웃는 모습이다.
그렇기에 수태광은 알맹이에 대해 먼저 언급하지 않았다.
“하부!”
그런데, 그 순간.
작은 방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화가 보내온 영상에서 들었던 바로 그 할아버지 소리다.
‘마, 말도 안 되는?’
수태광이 화들짝 놀랐다.
알맹이 녀석이 연신 옹알거리는 하부 소리도 하부 소리지만, 등 뒤에서 파닥거리는 작은 날개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비행 능력이라니? 얼마 전 보았던 피스 길드의 막내딸도 날개를 소환하는 능력은 없었지 않은가!’
경호실 인력 충원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다만. 기왕이면 기존에 엑시스가 보유하고 있지 않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재를 물색하고 있었을 뿐이다.
예를 들면 피스의 막내딸처럼 비행 능력이 있다거나.
한데, 자신이 영상 속에서 보았던 그자보다 더욱 자유롭게 비행을 할 수 있으면서, A급 재능까지 갖춘 어마어마한 능력자가 나타났다.
‘공중전은 문제도 아니겠어. 엑시스의 미래가 아주 밝구만,밝아, 껄껄!’
내색하진 않았지만, 속으로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수태광이었다.
그리고 알맹이는 그런 수태광을 향해 힘겹게 날개짓을 더하며 거리를 좁혔다.
“하부!”
공중의 알맹이가 수태광의 얼굴 앞에서 꺄르르 웃자.
수태광은 자신도 모르게 히죽거리며 알맹이를 품에 안아 버렸다.
‘비행 능력까지 갖추고 있는 걸 미리 알았으면, 더 화려한 이름을 지어서 오는 거였는데!’
수태광이 흐뭇하게 미소를 짓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우 역시 기쁜 마음에 선화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작게 말했다.
“거봐. 내가 뭐랬어? 할아버지 소리면 다 된다고 했지?”
“푸흡! 갑자기 옛날에 엄마가 해준 얘기 생각난다. 나 애기 때 처음 아빠 소리하니까, 막 감동해서 울고 그랬다는데?”
“장인어른께서 눈물을?”
“믿기지 않겠지만 진짜야. 지금 보니까, 우리 아빠 팔불출 기질 여전한 것 같네.”
어느새 수태광은 품에 안고 있던 알맹이를 향해 ‘우리 손주’ 라고 부르고 있었다.
엑시스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라는 말까지 덧붙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