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이런 게 행복이지 (110/246)

◈ 이런 게 행복이지

미로 유형의 필드.

이곳이 레이드였다면, 이전에 송일우처럼 센싱 스킬이 없는 이상 길을 찾는 건 불가능했을 거다.

하지만 이곳은 레이드가 아니었기에, 탐지 계열인 김강수와 이선호의 능력만으로도 보스의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물론, 초소형 탐지 레이더를 사용해야 하긴 하겠지만 말이다.

“거의 다 왔어요.”

이선호가 레이더 화면을 응시하며 말했다.

네비게이션처럼 보스에게 향하는 길을 안내해줄 수는 없겠지만, 보스가 위치한 장소만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화면상 보스의 위치를 토대로 미로는 직접 풀면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랄까.

‘빙빙 돌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빠르게 보스를 찾은 것 같긴 한데.’

조금 전 전투를 마친 준우가 전투복에 묻은 몬스터의 핏기를 털어내며 걸었다.

검에 묻은 핏물 역시 털어내자, 붙어 있던 트롤의 살점이 바닥에 떨어졌다.

움찔 -

그 모습에 놀란 몇몇 팀원들은 준우와 살짝 떨어져 걷기도 했다.

전투를 거듭할수록 광기가 점점 심해졌던지라, 괜히 옆에서 깔짝거리다가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여기에요. 이 벽 너머에 보스가 있어요.”

걸음을 멈춘 이선호가 눈앞의 벽을 가리켰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머리 위 마력 파장으로 인해 뛰어넘을 수도 없는 장벽이었다.

미로처럼 장벽들이 늘어져 있다는 것이 이들이 보스를 찾아 빙빙 돌아온 이유고.

“벽 너머에 보스가 있으면 뭐해? 여기가 막다른 길인데.”

“흐음, 결국 또 다른 길로 돌아가야겠네요.”

팀원들이 아쉬워하며 어깨를 주물러댔다.

준우가 처리한 몬스터들에게서 수거한 마석 파편이 너무나도 많아, 그걸 담은 가방이 심히 무거웠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문에 넣어둘 걸 그랬나.’

준우는 뒤늦게 마석 파편이 든 가방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는 팀원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여태 몬스터들과의 전투에 정신이 쏠려 미처 살필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팀원들은 딱히 괘념치 않은 것 같았다.

이렇게라도 준우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무튼, 방향 틀자고. 아까 그 갈림길에서 왼쪽 길로 왔었으니까, 아마 오른쪽이 보스 방향이겠지.”

오른쪽 길에서 또 갈림길이 나타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필드의 미로는 꼬일 대로 꼬여 있었고, 지금까지 비슷한 경우가 많지 않았던가.

[ 00 : 58 : 56 ]

준우가 정시 퇴근 타이머를 확인했다.

보스가 있는 장소와 고작 벽 하나를 두고 있는데, 먼 길을 돌아갈 수는 없었다.

‘집 가는 길에 장도 봐야 한단 말이지.’

재수 없게 갈림길이 연달아 나오면 자칫 칼퇴근이 힘들어질 수도 있었다.

준우에겐 최악의 상황이었으며, 또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기도 했다.

“뭣들 해? 아까 그 갈림길로 다시 돌아가자니까……?”

김강수가 입을 열며 뒤돌아본 그때.

이번엔 두 눈까지 마력으로 인해 시퍼렇게 변한 준우가 보였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고, 준우에게서 느껴지는 마력 또한 보다 강렬했다.

콰아앙!

준우가 검을 내지른 순간, 굉음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가 피어오른다.

콰르르륵!

보스를 가로막고 있는 막다른 벽이 무너지고 있다.

준우가 그걸 그냥 힘으로 부숴버린 거다.

“미, 미친놈.”

김강수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먼지를 털어낸 준우는 벽의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준우의 시선이 닿은 보스의 머리.

놈의 이마에 ‘퇴근’ 이라고 적혀 있는 것만 같았다.

***

가게가 쉬는 날임에도 선화는 바빴다.

그간 일에 집중하느라 반려몬 아이들과 자주 놀아주지 못한 탓에 쉬는 날엔 녀석들과 놀아줘야 했고, 이제는 신비까지 돌봐야 했다.

주말에는 준우와 번갈아 가며 아이들을 케어하긴 하지만, 오늘처럼 평일에 가게 문을 닫는 날엔 오로지 선화의 몫이었다.

‘그래도 오빠가 칼퇴하고 도와준다고 했으니까!’

맛있는 저녁도 차려준단다.

뭐 먹고 싶냐고 해서 로제 파스타 먹고 싶다고 하긴 했는데, 과연 오빠가 요리를 잘 할 수 있으려나.

‘로제 파스타는 한번도 안 해보지 않았었나? 잘 만들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저녁 식사 생각은 뒤로 하고.

선화는 일단 아이들부터 챙기기로 했다.

신비가 잠든 틈을 타 반려몬 아이들과 실컷 놀아줬다.

오후 내내 놀아준 뒤, 아이들 밥까지 먹이고 나서야 쉴 틈이 생긴 찰나.

우우웅 -

집안에 차원문이 생성됐다.

선화에게도 익숙한 장면이었고, 반려몬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오빠한테 일이 생겼나 보네.’

준우가 던전에 갈 일이 생기면 가끔 차원문이 열리고는 했다. 특히 미심이나 은실이의 도움이 주로 필요한 경우였다.

캬앙!

차원문 안쪽에서 준우의 신호를 감지한 미심이가 막 달려가기 시작했다.

준우가 있는 곳과 연결된 또 하나의 차원문이 있는 방향이었고, 은실이 역시 날개를 펄럭이며 미심이의 뒤를 쫓았다.

‘나도 따라가고 싶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선화에게는 준우의 전투에 도움이 될 만한 스킬은 없었다.

괜히 방해가 될 수도 있으며, 오히려 준우가 자신을 보호하려다 크게 다칠 가능성도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선화는 서둘러 거실로 향했다.

그리고는 리모컨을 집어 TV 채널을 돌려 재난 방송을 틀었다.

- 약 두 시간 전, 서울 지부 S-09 지역 내 필드가 발생했습니다. 민간인의 2차 피해를 신속하게 막기 위해, 경기 지부 기동대가 조금 전 현장에 투입됐는데요. 현장에 나가 있는 김 기자 연결해보겠습니다.

협회 본청에서 운영하는 방송국에서 국민들의 안전과 재난 상황을 빠르게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채널이었다.

- 저는 지금 총 세 종류의 던전이 조합된 C급 필드 현장에 나와 있습니다. 본청 공략본부에서 예상한 공략까지의 소요 시간은 약 10시간으로…….

역시나.

준우네 팀이 해당 필드에 투입된 것이었다.

‘설마, 막 다쳐서 오지는 않겠지?’

B급 수준까지 오른 준우라면 C급 필드는 큰 사고 없이 공략할 수 있을 것이다.

샤넬 백의 차원문이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도망치는 건 문제도 아닐 테고 말이다.

물론, 아내로서 준우의 걱정이 되기는 했다.

그러나 걱정이 되는 만큼 응원해주기로도 약속했다.

‘늑대인간이라 했나? 딱 그 사건 끝낼 때까지만 헌터 일 하기로 했으니까.’

그 전에 크게 다칠 경우.

당장 헌터 일 때려친다는 약속도 하지 않았던가.

선화는 준우를 믿었다.

아버지인 수태광도 고작 협회 생활하다가 다칠 만큼 나약한 놈이 아니라고 하기까지 했고.

‘그나저나, 오빠 10시간 뒤에 집에 오는 거면 그때까지 저녁도 못 먹을 텐데.’

칼퇴하겠다는 준우의 약속은 이미 물 건너갔다.

당연히 준우가 차려주겠다던 로제 파스타도…….

아쉬움이 크긴 했지만, 그보다 남편이 고생하는 모습이 눈에 훤해서 그게 더 마음이 쓰였다.

‘어쩔 수 없지. 내가 오빠를 대신해서 맛있는 걸 해주는 수밖에.’

늦은 시간에 귀가할 준우를 위해 어떤 음식을 해볼까.

선화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 말순이가 폴짝 뛰어 선화의 허벅지 위에 안착했다.

“우리 말순이 엄마랑 더 놀고 싶어?”

말순이가 꼬리를 살랑거린다.

더 놀아달라는 뜻을 더 격하게 표현하려 했으나, 말순이는 이내 꼬리의 움직임을 멈췄다.

뒹굴 -

말순이의 시선 저 앞에.

어느새 잠에서 깬 신비가 침대 위에서 몸을 한 바퀴 구르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커엉 - ?

신비와 눈이 마주친 말순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초롱초롱하게 눈빛을 빛내는 신비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게 영 신기해서다. 뭔가 바라는 게 있기라도 한 걸까.

잘 모르겠다.

말순이는 선화의 허벅지 위에 얼굴을 기댄 채, 등을 만져주는 손길을 느끼는 데 집중했다.

파닥파닥 -

그때였다.

방 안의 침대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말순이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컹컹!

말순이가 짖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선화의 시선이 말순이를 따라 움직였고, 그곳에는 어느새 작은 날개를 펼친 신비가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신비, 깼구나?”

작은 날개를 있는 힘껏 파닥거리는 신비.

마치 팅커벨의 조금 큰 버전 같기도 했다.

“다다!”

신비가 웅얼거렸다.

아빠를 찾는 걸까.

“아빠? 아빠는 오늘 일이 있어서 늦는다는데, 어떡하지?”

“따다!”

원하는 게 아빠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다.

가족 구성원인 반려몬이라면 의사소통이 되겠지만, 아직 신비는 그러질 못했기에 모든 말을 알아듣기는 어려웠다.

“으음, 우리 신비가 원하는 게 뭘까?”

“따다! 따다! 따다!”

아직 말이라고 하기에는 뭐하고 옹알이 수준의 발음일 뿐이었다.

그마저도 ‘다다’ 혹은 ‘따다’ 가 전부. 대체 이 작은 아이가 원하는 게 뭔지 도통 감을 잡기가 힘들었다.

옹알이가 지쳤는지 신비가 날개짓 하는 속도를 서서히 줄이며, 하강을 하기 시작했다.

찰싹 -

대뜸 말순이의 등 위에 안착하는 신비.

비록 날 수는 있으나, 지상 위에선 뒹구는 게 고작인지라 커다란 말순이 등 위에 엎드린 꼴이 되어버렸다.

“꺄아! 귀여워!”

선화가 냉큼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어댔다.

말순이의 등에 포개어져 있는 작은 신비가 어찌나 귀여운지, 이 모습을 준우에게 보여주지 못하는 게 한이 될 정도였다.

“아, 맞다. 오빠 지금 핸드폰 볼 여유 없겠지……?”

사진을 찍어 준우한테 보내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고는 아쉬움에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문득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5시 반을 넘어섰다.

곧 준우의 퇴근 시간이었던지라 더욱 아쉬웠다.

당장이라도 신비의 이 귀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따다! 따다!”

말순이의 등 위에 엎드려 있던 신비는 계속해서 웅얼거리고 있었다. 제법 목소리를 크게 내는 것으로 보아, 강하게 뭔가를 어필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안아줘?”

선화가 신비를 품에 안았다.

하지만, ‘따다’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컹 - ?

의아함에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던 말순이가 선화의 품을 벗어났다.

허벅지 위에 계속 누워 있었는데, 신비가 자신의 등 뒤에서 연신 뒤집기를 시전해 대는 탓이다.

이 작은 꼬맹이가 원하는 게 설마 이 자리일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꺼이 자리를 양보해줬다.

살아온 세월로만 따지자면 그나마 말순이가 어른이기도 했으니, 이 정도야 뭐.

그 순간, 신비가 꺄르르 웃기 시작했다.

말순이의 예상대로 원하던 게 선화의 허벅지 위였던 모양이다.

파닥파닥 -

다시금 날개를 움직인 신비는 선화의 손을 벗어나 허벅지 위에 안착했다. 역시나 아까처럼 철푸덕 엎드린 채로.

“우리 신비, 설마 말순이 질투한 거야?”

대답이 없다.

정말로 원하는 게 여기 눕는 거였는지, 옹알이는 멈추고 연신 꺄르르 웃어대기만 할 뿐이었다.

선화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준우 말로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가 바로 신비라는데, 선화의 눈에는 마냥 애기처럼 보이기만 했다.

“엄청 편안해 보이네.”

말 그대로 편-안.

신비의 표정이 딱 그랬다.

“오빠한테 이 모습 보여주고 싶은데…….”

어느덧 오후 여섯 시 정각이 된 그때.

미심이와 은실이가 통과한 뒤로 사라졌던 차원문이 대뜸 거실에 생성됐다.

“어?”

그리고 그 안에서 준우가 모습을 드러낸다.

양손 가득 장을 봐온 것들을 들고서.

“뭐야, 오빠?”

“뭐긴 뭐야.”

“아까 분명 재난 방송에서 필드 공략하는데 열 시간은 걸릴 거라고 했는데, 어떻게 벌써 온 거야?”

“내가 약속했잖아? 칼퇴하겠다고. 에헴!”

선화의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

약속을 지켜준 것도 너무나 고맙지만, 열 시간이 걸릴 거라던 던전을 이토록 빨리 공략하기 위해 얼마나 남편이 노력을 했을까.

그 모습을 떠올리니 괜히 미안해졌다.

그래서 빠르게 웃음을 숨겼다.

“갑자기 왜 울상이야? 내가 선화 너 그런 모습 보려고 칼퇴한 줄 알아?”

준우가 슬그머니 다가가 선화의 볼에 입을 맞췄다.

이어,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웃어. 그거 보려고 일찍 왔단 말야.”

언젠가부터 능글맞아진 남편이지만 싫지는 않았다.

뭐랄까. 나름 즐긴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사랑받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드는 기분이었다.

“내가 장도 싹 봐왔다? 이건 선화 너의 허기진 배를 달래줄 로제 파스타 재료고…….”

준우가 차원문 안쪽에 손을 쓱 넣더니, 웬 장미꽃 한 다발을 꺼내 선화에게 건넸다.

“……그리고 이건 그냥 너를 위한 로즈.”

“오빠. 내가 이건 도저히 못 즐겨주겠다. 너무 징그러웠어, 방금.”

“퇴근하면서 줄곧 멘트 생각한 건데. 그렇게 별로야?”

선화가 키득키득 웃었다.

웃음소리에 허벅지 위에 잠들어 있던 신비가 깼고, 엎드린 채로 가까스로 눈동자만 굴려 준우를 바라보았다.

“따다!”

신비의 옹알이에 준우가 문득 물었다.

물론, 원하는 대답은 마음 속에 미리 정해둔 채로.

“지금 신비가 나한테 아빠라고 하는 거 맞지?”

“어……음……아마 그럴걸?”

신비가 또 한번 ‘따다!’ 를 외치며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는 작은 날개를 힘겹게 움직여 준우의 품에 안긴다.

“역시 칼퇴하길 잘했어.”

이런 게 행복이지.

준우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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