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나도 손주 있다 (106/246)

◈ 나도 손주 있다

수태광은 여전히 설레는 마음으로 테이블 위의 찻잔을 들었다.

어젯밤에 손주 볼 생각으로 잠을 설치기까지 했지만, 전혀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S급 헌터의 뛰어난 체력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손주의 모습이 모든 것을 치유해주는 기분이랄까.

‘선화 녀석, 몸조리는 잘하고 있으려나.’

어제보단 흥분이 좀 가라앉았겠다.

딸의 안부를 물을 생각이었다.

- 어, 아빠. 미안한데, 내가 지금 많이 바빠서.

“설마, 가게 일하고 있는 거냐?”

- 당연히 일해야지. 방송 나가고 가게가 얼마나 잘 되는데?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하지 않겠어?

임신 초기는 유산 위험이 높다.

자식 다섯을 낳은 수태광이 그것도 모르겠는가.

‘그 때문에 전 서방도 괜히 설레발이 될까, 계속 모른 척을 하고 있는 거겠지.’

바쁘게 사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몸조리에 신경을 써야 할 시기였기에 선화의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한창 태교에 집중해야 할 때인데…….”

- 뭐야? 아빠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녀석, 이 애비가 얼마나 능력이 좋은데 그것도 모르고 있었겠느냐.”

선화의 대답으로 임신은 기정사실이 됐다.

자연스레 수태광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 태교는 내가 알아서 잘할 테니까, 아빠가 그렇게까지 신경 안 써도 돼.

임신했다며 호들갑을 떨 줄 알았건만.

예상보다 침착한 딸이었다. 생각해보니, 수태광의 전처도 수재혁을 임신했을 때 그랬던 것 같다.

당장 너무 바쁘니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는 선화의 말로 통화는 끝이 났다.

“가게도 가게지만, 지금은 태교에 집중해야 할 때이거늘. 욕심 많은 것도 꼭 나를 닮아 가지고, 끄응.”

한편으론 기특하기도 했다.

홀몸이 아님에도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참으로 대견스러웠다.

‘벌이는 전 서방 수입으로도 충분할 듯한데.’

뭐, 경제적인 거랑은 별개일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수태광에겐 그런 딸에 대한 걱정이 최우선이었다.

“최 비서. 잠시 들어오게.”

호출받은 최 비서가 퀭한 표정으로 회장실에 들어섰다. 새벽까지 수태광과 통화를 한 탓에 다소 피곤한 상태였다.

통화 내용이 죄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손주 자랑이랬지.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한국대 병원 송미연 교수라는 분과 자리를 좀 마련해 주게. 어렵진 않을 게야, 병원장이 나와 친분이 있기도 하니까.”

대한민국 최고의 산부인과 전문의라는 송미연.

안면이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밤잠을 설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었다.

가끔 TV에 나오기도 했으며, 학계에서도 꽤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라 했다.

강남의 돈 있는 집안 며느리들은 죄다 송미연 교수에게 진료를 받는다고 하던데.

‘선화와 우리 손주 역시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지.’

정작 딸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임신 초기는 중요한 시기이지 않은가.

“송미연 교수와 자리를 마련하는 건 어렵지 않으나, 혹시 아가씨 진료를 그분에게 맡기실 생각입니까?”

“그럴 생각이네만?”

“아가씨 댁과 한국대병원과의 거리가 상당합니다. 차를 타고 이동한다 해도 족히 두 시간은 걸릴 겁니다.”

“포탈 시스템을 설치하면 되지 않나?”

“얼마 전 연구 결과에 따르면, 포탈 내에 흐르는 마력이 태아에게 악영향을 끼친다고 하더군요. 각성을 했다면 모를까, 일반인 태아라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병원 장비 싹 장만해서 외래 진료를 가능하게 하면?”

“준비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출산이 임박해서 급한 상황이 생긴다면 어쩔 수 없이 가까운 병원을 이용해야 하겠지만, 그 이전의 진료들은 최대한 좋은 병원의 의사에게 받게 하고 싶었다.

“흐음, 그럼 다른 좋은 방법은 없겠나?”

“가장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 있긴 합니다.”

이어진 최 비서의 대답에 수태광이 만족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옳거니!’ 라며 소리까지 칠 정도였으니, 그 방법이 썩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바로 진행 시켜.”

“예, 회장님.”

흡족한 미소를 짓는 수태광.

그의 머릿속에 얼마 전 손주 자랑을 해대던 친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당시엔 미친 듯이 부러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나도 이제 손주 있다.’

이제 임신 초기이니 약 열 달은 기다려야 하겠지만.

수태광은 그보다 더 긴 시간조차 기다릴 수 있었다.

손주만 볼 수 있다면 말이다.

***

장인어른의 문자 내용은 그저 의아했다.

기특하다고는 하시는데, 대체 뭘 그리 기특해하시는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였다.

그런데.

조금 전에 촉이 왔다.

“그러니까, 장인어른께서 선화 너한테 태교에 집중할 때라고 그러셨다고?”

“응! 아빠도 내가 알 태교 하는 거 알고 있는 것 같던데. 어떻게 거기까지 소문이 퍼졌지?”

“……이거 아무래도 그 태교가 우리가 생각하는 태교가 아닌 것 같은데.”

선화와 좀 더 대화를 나누다 보니, 소문이 어떻게 퍼져서 와전된 건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어제 캔들샵에서 김 비서님을 만났었다는 선화의 말에 단서가 있었다.

캔들샵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들어보니, 오해의 소지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오해고 뭐고 간에 급한 불부터 꺼야 한다는 거다.

‘큰일 났군.’

장인어른의 손주 사랑은 남다르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뭐 다 그렇지 않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장인어른께서는 유독 더 심하셨다.

‘회귀 전엔 학교를 지으셨었지.’

첫 손주는 형님과 김 비서님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였다.

앞으로 쑥쑥 자랄 쌍둥이 손주들이 좋은 환경에서 교육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에 벌이신 일이었다.

한때 교육부 장관과 자주 미팅을 했었던 것 같다.

아무튼, 그 정도로 손주 사랑에 유난이신 장인어른께서 모든 것이 오해로 비롯된 걸 안다면 실망이 크실 것임에 분명했다.

‘빨리 오해를 풀어드려야 해.’

늦을수록 좋지 않다.

이미 기대치가 오를 대로 오르셨겠지만, 최대한 실망을 덜 하실 수 있도록 변명을 해야 했다.

내가 왜 변명을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심장 떨리네, 이거.’

선화의 임신 소동이 모두 착각인 게 밝혀졌을 때, 장인어른의 표정을 상상해봤다. 과장 하나도 안 섞고 공포 그 자체였다.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까.

아니,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까.

답답한 마음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무렵.

현관벨이 울렸다. 동시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 장인어른!”

“아빠가 왔다고?”

현관 모니터 속에 장인어른이 서 계셨다.

아직 변명거리도 생각지도 않았는데, 벌써 움직이신 거다.

“껄껄! 내 임산부에 좋다는 것들을 좀 사 왔다네!”

장인어른의 그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가슴에 박혔다.

***

장인어른께선 거실에 들어오시자마자 나와 선화를 번갈아 가며 부둥켜안으셨다.

문자 내용과 마찬가지로 기특하단 말을 연거푸 하시면서.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신 장인어른께서 흐뭇하게 웃으시며 우리를 바라보신다.

‘어디서부터 말씀을 드려야 하지?’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는 게 가장 좋을 테니까.

“향이 참 좋구나. 이게 요즘 임산부들이 쓰는 캔들이라지?”

장인어른께서 말씀하셨다.

설마, 그런 것도 알아보신 걸까.

“혹시 몰라서 캔들을 사 왔는데, 집에 똑같은 게 있을 줄이야.”

아니구나.

조사만 하신 게 아니라, 진짜로 사오신 거구나.

“저건 아기 침대 같은데, 전 서방이 직접 만들고 있었던 건가?”

“그, 그렇습니다.”

“침대가 두 개인 건……설마! 쌍둥이인 것이냐! 정말 그런 것이야?”

“그, 그게 아니라…….”

그냥 두 개째 만들고 있었던 거다.

앞으로 반려몬 아이들이 쓸 침대를 만들고 있었는데, 만들다가 잠깐 쉬고 있었을 뿐이다.

“이런! 내가 너무 호들갑을 떨었구만. 아직 아이 성별도 모를 텐데. 하지만, 꿈을 크게 갖는 그 자세는 아주 보기 좋은 것 같구나.”

장인어른께선 껄껄 웃으시며 민망함에 내 어깨를 치셨다.

지금 상황엔 어떤 농담을 해도 기분 좋다고 웃어주실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만큼 좋으신 거겠지.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려므나. 내 엑시스를 팔아서라도 뭐든 해줄 터이니.”

“…….”

조금 무서웠다.

엑시스를 팔겠다는 그 말이 진짜인 것 같아서.

빨리 사실을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장인어른의 페이스에 말려버렸다.

“사실, 캔들은 최 비서가 추천해준 거고. 진짜 내 선물은 따로 있다네. 오늘 갑자기 방문한 것도 그 선물을 주기 위함이고.”

“선물이요?”

“선화가 자주 병원을 드나들어야 할 텐데, 아무 의사에게나 진료를 맡기고 싶진 않아서 말이야.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가 있다는데, 병원이 여기서 좀 멀더군. 해서 내가 따로 준비를 했다네.”

“자, 장인어른 그게 사실…….”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보겠나?”

“예?”

먼저 일어나시기에 어쩔 수 없이 따라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장인어른을 따라 발코니 쪽으로 향했다.

“저걸 타고 병원까지 이동하면 어떨까, 하는데.”

자연스레 고개를 움직여 아래쪽을 응시했다.

이동 수단을 언급하셨으니, 당연히 아파트 주차장일 것이라 생각해서다.

“에헴! 남자가 그리 쉽게 고개를 숙여서 쓰겠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남자라면 높은 곳을 보고 쫓아야지.”

장인어른께서 손가락으로 저 멀리를 가리키셨다.

순간, 나는 ‘헙!’ 하고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공중을 날고 있는 그것, 헬기였다.

길드 엑시스의 로고가 박힌 전용 헬기 말이다.

‘도, 돌아버리겠네.’

가까운 곳에 비행장이 있다.

아파트에서 가끔 소음으로 인한 민원이 나오곤 했는데, 그 원인이 바로 그곳이었다.

아마, 비행장이 있다는 정보를 얻고 헬기를 띄우신 듯했다.

“껄껄! 어떤가? 저만하면 병원까지 이동하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장인어른께는 별거 아닌 일이었을 거다.

비행장과 헬기 띄우는 문제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능력자였으니까.

중요한 건, 이제 진짜 사실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 늦어지면 돌이킬 수 없을 수도 있다.

“장인어른. 잠시만 이쪽으로.”

차원문을 열었다.

태교의 원인과 그 소문이 어떻게 와전된 것인지 실체를 보여주며 말씀을 드릴 생각이었다.

“응? 이건 내가 예전에 건네준 알이 아닌가?”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짧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비장하게 말을 이어가려던 그때.

[ ‘신비한 알’ 이 ‘수태광’ 의 마력을 흡수합니다. ]

문제가 발생했다.

알이 장인어른의 마력을 흡수한 게 문제가 아니다.

시간이 소요되긴 하겠지만, 체내의 마력이야 얼마든지 다시 한계치까지 채울 수 있었으니까.

진짜 문제는 알의 껍데기가 벗겨지기 시작했다는 거다.

첫 번째 껍데기는 물론, 두 번째까지 빠른 속도로.

‘이런. 아직 가족 구성원으로 만들지 못했는데!’

순식간에 모두 벗겨진 껍데기가 눈부신 빛과 함께 소멸했다.

빛이 사라짐과 찾아온 드래곤 부화의 순간.

나는 부화에 성공한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예상보다 이른 부화였기에,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만약의 위험을 대비해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런데, 내가 아는 드래곤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사람이잖아?”

신비한 알이 있었던 그 자리에서.

갓 태어난 여자아기가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