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화.부러운 걸 어떡하겠나 (104/246)

◈ 부러운 걸 어떡하겠나

수태광에겐 주기적으로 보는 친구들이 있다.

선화의 결혼식 청첩장을 받기도 한 극소수의 사람들.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안타깝게도 세상을 뜬 친구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건강하게 삶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과는 여유가 있을 때마다 술자리를 갖고는 했다.

“껄껄, 간만에 자네들과 술자리를 갖게 되니 참 기분이 좋구만 그래!”

최근 들어 해외에 나가는 일이 많고, 잡다한 업무가 많은 탓인지 오랜만에 수태광의 저택에 모인 친구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술잔을 들고 있는 수태광의 얼굴은 유난히 더 좋아 보였다. 사실, 기분이 좋은 이유가 따로 있기는 했지만.

“자네 딸, 배우 한번 해 보라고 권해 보는 게 어떤가?”

“노래도 잘한다며? 가수도 나쁘지 않겠어. 미스 트롯인가, 뭔가, 그거 보니까 좀 늦은 나이에 가수 하는 사람들도 많더만?”

“자네 딸 정도면 아직 나이가 그렇게 많지도 않은 듯하고. 아무렴 인물이 그렇게 빼어난데, 뭘 해도 잘하지 않겠나?”

수태광이 오늘따라 더욱 기분이 좋았던 이유.

다름 아닌, 친구들의 입이 닳도록 언급된 선화의 칭찬 때문이었다.

‘선화 녀석이 날 닮아서 인물 하난 잘나긴 했지.’

다들 선화가 나온 방송을 본 거다.

친구 딸이라고 그러니까, 주변에서 난리들이란다.

어쩜 저리 예쁘고 능력도 좋냐면서.

“방송에서 자네 딸 보고 이런 생각이 들더라니까? 이야, 이름값 제대로 하는구나?”

수선화. 이름도 꽃이다.

꽃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

“껄껄껄! 이 사람들아 그만 좀 하게! 그러다 내 딸 이름이 닳겠어, 아주!”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얼굴엔 미소가 가시질 않는 수태광이었다.

어깨 또한 절로 치솟았으며 기분 역시 마찬가지.

자연스레 주고받는 술잔이 많아지며, 어느새 술자리가 무르익은 그때였다.

우우웅-

한 친구의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전화를 받자, 아주 앳된 손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할아부지이이! 언제 와요? 보고 시퍼요!

“아구, 아구, 내 새끼! 이 할애비가 보고 싶었어?”

한 친구의 손녀 전화를 시작으로.

다들, 손주들이 보고 싶었는지 괜히 전화를 걸어본다.

몇몇 친구들은 수태광에게 사진을 보여 주기도 했다.

자기 손주가 얼마 전에 걷기 시작했다면서 걷는 영상을 보여 주거나, 생신 챙겨 준답시고 삐뚤빼뚤한 글씨로 편지를 써 온 걸 자랑하기도 했다.

“우리 손주 녀석은 내가 없으면 잠을 못 잔다네. 엄마보다 할애비가 더 좋은 게지.”

“이 사람 허풍도 참. 어찌 엄마보다 할애비가 더 좋을까?”

“자네 손녀는 안 그러누? 그냥 부러우면 부럽다고 하지 그러나?”

“부럽기는! 우리 손녀는 유치원에서 노래 배워 오면 가장 먼저 나한테 불러 준다네!”

“그건 자네가 손녀랑 같이 살고 있으니까 그런 거고! 우리 손주 녀석도 나랑 같이 살았으면…….”

대화 주제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선화의 칭찬에서, 할아버지들의 손주 자랑으로.

자연스럽게 선화 이야기는 묻혀 버린 거다.

‘나만 손주 없군.’

수태광은 대화에서 살짝 물러났다.

낄 틈이 없어서였다. 손주 관련해서는 딱히 할 말도 없고.

“태광이 자네는 좋은 소식 없나?”

그때, 한 친구가 물었다.

아까 자신에게 손주 녀석 동요 부르는 동영상을 보여 줬던 친구다.

“뭐, 기다리면 곧 좋은 소식 들려오겠지.”

담담하게 대답을 하는 수태광이었지만, 속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도 친구들에게 손주 자랑을 하고 싶었다. 자랑까진 아니더라도, 그냥 손주를 보고 싶기도 했다.

자그마치 아들이 넷이다.

하지만, 여태 결혼한 놈이 하나도 없었다.

당연히 손주를 볼 수 있을 리는 없다.

‘그래도 선화 녀석이 있으니까.’

손주를 재촉하고 싶진 않았다.

아들이 넷이니, 선화가 아니어도 손주는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한데.

친구 녀석의 말에 살짝 불안해졌다.

“자네 나이를 생각하게. 아무리 S급 헌터라도 세월엔 장사 없는 법이지 않은가? 아무리 아들이 넷이나 있다지만, 만약 결혼이 늦어지면 어쩔 텐가?”

“늦어져 봐야, 얼마나 늦어진다고.”

“쯧쯧, 자네가 아무래도 아들들 혼사에 너무 안일한 것 같아. 먼저 세상 떠난 영식이도 결국 아들내미 결혼하는 거 못 보고 가지 않았나?”

“흐음.”

“요즘 결혼하는 젊은 부부들이 아이를 안 가지려고들 한다던데, 아들들이 결혼도 늦어진 마당에 아이도 안 가지겠다면 어쩔 건가?”

수태광이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정말 죽기 전에 손주는커녕, 아들들 결혼하는 것도 못 보게 된다면? 정말이지 그건 상상도 하기 싫다.

“자네 딸도 결혼한 지 꽤 되지 않았나? 슬슬 손주 소식이 있을 법도 한데?”

“아까도 말했듯이,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소식이 기다리기만 하면 제 알아서 전해진다던가? 자네가 노력을 해야지, 노력을!”

“노력? 내가 무슨 노력을?”

“에휴, 답답한 사람. 그러다 손주 구경도 못 해 보고 세상 뜨겠구먼.”

대화 주제는 다시 손주 자랑에 전환됐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술자리가 끝이 나 버렸다.

‘정말 이러다가 할아버지 소리 한 번도 못 들어 보고 세상 뜨는 건 아니겠지?’

홀로 남은 수태광이 술잔을 들어 올리며 생각했다.

손주들 얘기로 정신없이 흘러가던 술자리였지만, 친구 놈이 했던 말이 문득 다시 떠오른 것이다.

‘노력을 하라고?’

괜히 초조해졌다.

어느덧 나이를 지긋하게 먹은 자신이 아니던가.

친구들은 다들 손주 보는 낙으로 산다던데.

부러운 것도 부러운 거지만, 그 낙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참으로 후회스런 삶이 될 것도 같았다.

‘노력이라, 노력…….’

유일하게 손주를 볼 수 있는 곳은 선화네뿐.

친손주건, 외손주건 그건 상관없다. 손주만 볼 수 있다면 말이다. 요즘 그런 걸 누가 따진다고.

하지만, 선화에게 애를 낳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결혼까지 반대했던 마당에 이젠 그런 것까지 간섭하냐고 노발대발할 거다.

- 전 서방, 내일 저녁에 술 한잔 하도록 하지.

딸에게 직접적으로 압박을 하기가 어려운 상황.

그래서 사위에게 간접적 압박을 해 보기로 했다.

* * *

출근해서 서류 업무를 보고 있음에도 좀처럼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어제, 이상 징후를 보였던 신비한 알의 모습 때문이었다.

‘예전에도 아주 가끔씩 움직이긴 했지만, 어제처럼 격하게 움직인 적은 없었단 말이지.’

선화가 알의 움직임을 발견한 뒤.

그 이후로 총 세 번을 더 움직였다.

좌우로 기우뚱거리면서.

마치 알에서 뭔가가 나오려는 듯한 움직임.

‘설마, 진짜로 갑자기 부화라도 하려는 건?’

그건 아닌 것 같다.

어제 이어졌던 세 번의 움직임 이후로는 또다시 미동이 없지 않았던가. 오늘 아침까지 잠을 설치며 관찰했음에도 별다른 징후가 없었다.

‘그냥 성장을 하고 있다는 뜻인 건가.’

퇴근 후 집에 가서 좀 더 관찰을 해 보려고 했으나, 아무래도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갑작스런 장인어른의 호출이 있었기 때문이다.

- 긴히 할 말이 있네.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른다. 사실 그게 그리 중요하지도 않다.

장인어른께서 호출을 하셨다면, 이유 불문하고 당연히 냅다 뛰어가야 하는 거다.

“왔는가, 전 서방.”

퇴근 후, 장인어른께서 마당까지 나와 나를 반기셨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얼굴이 좋아 보이시는 것 같다.

“일단 안으로 들어감세. 저녁 식사 같이하면서 천천히 대화 나누도록 하자고.”

“선화도 부를까요?”

차원문 사용하면 금방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장인어른은 정색하시며 대답했다.

“아니. 자네와 단둘이 할 얘기가 있네.”

“아, 예…….”

너무 단호하셔서 차마 더 이상 말을 꺼내진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엄청 대단한 얘기를 하실 것만 같은 분위기다.

나도 모르게 살짝 긴장이 됐다.

그래서 최대한 정신을 바짝 차리려 노력하며, 장인어른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어째, 상황이 내가 예상한 것과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이, 이게 다 뭐야?’

식탁 위가 진수성찬이다.

육류, 어류를 포함해 나물까지, 맛있는 음식은 죄다 놓여 있었다. 오늘 장인어른께서 무슨 몸보신이라도 하시는 날인가.

“식사부터 들게.”

“옙!”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상황 파악이 잘 안 됐으니까.

눈치를 보며 식사를 하고 있는데, 장인어른께서 문득 물으셨다.

“요즘 일이 많이 바쁠 터인데, 힘들진 않고?”

“괜찮습니다, 장인어른. 버틸 만합니다.”

나한테 이런 질문 잘 안 하셨는데.

역시나 오늘 뭔가가 있긴 있는 것 같다.

“식사는 거르지 않고 잘 챙겨야 할 텐데.”

“잘 챙겨 먹고 있습니다. 그 부분은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날 배려해 주시는 느낌이다.

유독 과한 느낌이 난다고나 할까.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자넬 피곤하게 하진 않고? 사람이 피곤하면 집안일 하기가 영 까다로워지거든.”

집안일……?

갑자기 왜 집안일을 언급하시지.

“좋은 팀원들을 만나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어제 같은 날은 친한 선배가 따로 밥을 사 주기도 했고…….”

“어제? 뭘 먹었는가?”

“장어구이 먹었습니다.”

“옳거니! 마침 잘됐구만!”

“예?”

장인어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셨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가시더니, 후다닥 술 한 병을 내오셨다.

“자네와 중요한 얘기를 하려는데, 이런 날에 술이 빠질 수 없지 않겠나?”

“복분자주네요?”

“고성원 회장이 직접 담근 술이라네.”

많이 들어 본 이름이다.

뒤늦게 대한민국 최고 주류 회사의 회장님이라는 걸 알게 됐다. 주류 회사 회장님이기도 하지만…….

“……그분 담금주 명인 아닙니까?”

TV에서 봤던 것 같다.

소주와 맥주를 제조하고 판매 유통하는 주류 회사를 운영하시지만, 오직 담금주만은 자신의 친한 지인들에게만 아주 가끔 선물로 주기만 한다고.

‘굳이 저 술에 가치를 부여하자면, 1억도 넘는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장인어른이 따라 주시는 술을 받았다.

열 병도 더 있으니, 맘껏 마시란다.

“그런데, 장인어른께선 술 안 하십니까?”

“맘껏 드시게나. 나는 어제 술을 하도 많이 마셨더니…….”

그렇게 둘러대시던 장인어른께선 한참 동안 내가 식사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시기만 하셨다.

‘대충 감 잡았다. 장인어른께서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어제 먹은 장어구이.

그리고 눈앞에 있는 고가의 복분자주의 콜라보.

이걸 잘됐다고 표현하시는 걸 보면 답을 유추할 수 있었다.

‘손주 보고 싶으신 것 같은데.’

일단 장인어른 말씀을 더 들어 보기로 했다.

어느 정도 내 예상이 맞는 것 같기는 했지만.

“얼마 전에 기사를 보니까 요즘엔 결혼을 하고 이혼하는 부부들이 꽤 많다고 하더군.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이지만은…….”

내가 복분자주 한 병을 다 비웠을 때쯤.

장인어른께서 또 한 병을 꺼내 오시며 이야기를 이어 가셨다.

“……나 때보다 좀 더 이혼이 쉬워진 느낌이랄까? 사회적으로 이혼을 그리 나쁘게만 보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기도 하지만, 그게 출산율과도 관련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네.”

“그렇군요.”

복분자주 한잔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혼 얘기에서 자연스러운 출산율로의 전환.

‘회귀 전에도 비슷한 얘기로 손주 보고 싶단 말씀을 돌려서 하셨었지.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구만.’

장인어른이 말씀하시는 기사와 이야기의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아마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는 장인어른께서도 모르실 거다.

아무튼, 중요한 건.

원하시는 게 손주라는 것이다.

선화 눈치가 있으니까 돌려서 내게 간접적으로 말씀하시는 거겠지.

고가의 복분자주까지 꺼냈으니, 당연히 내가 알아들을 거라고 판단하셨을 터.

“출산율이 낮은 걸 보면, 당연히 요즘 결혼을 하려는 사람들이 아이를 잘 갖지 않는다는 거겠지? 뭐, 딩크족이라던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더구만?”

“맞습니다, 장인어른.”

“근데 말이야. 사람 사는 게 다들 자신들만의 가치관이 있는 거겠지만, 내가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아무래도…….”

“아무래도?”

슬쩍 내 눈치를 보신다.

그리고는 헛기침을 몇 번 하셨다.

“크흠! 그러니까 내 말은 아이라도 있으면 이혼율이 좀 낮아지진 않을까 한다는 걸세.”

앞뒤가 안 맞는 말 같지만.

묘하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쪽으로 연결하긴 하셨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나, 자네?”

“혹시 저희가 이혼할까 봐 걱정하시는 건가요?”

“그,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럼?”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척해 봤는데.

장인어른께서 세상이 멸망한 것 같은 표정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르신께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가끔 귀여운 면이 있으시다.

“날 보게나. 나는 자식을 다섯이나 낳았는데도 이혼을 하지 않았나? 물론, 자식을 이혼을 막는 용도로 이용해선 안 되겠지만! 애가 없는 집들은 더 이혼하기가 쉽지 않겠는가?”

“흐음. 잘 모르겠습니다. 아이가 있고 없고가 그렇게까지 큰 차이가 있는 건지는…….”

장인어른께서도 이혼의 이유가 단순히 그 차이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실 거다.

그냥 지금은 손주 보고 싶으셔서 아무 말이나 하시는 것 같았으니까.

“하아, 미치겠군.”

평소엔 논리정연하게 말씀도 잘하시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부끄러우신 건지, 아니면 미안해서 그러시는 건지. 이럴 땐 약간 허점을 보이시는 것 같다.

“내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함세. 내 말의 뜻은…….”

“노력해 보겠습니다.”

“응? 그 말은, 아까 내가 했던 얘기를 이해했다는 뜻인가?”

“그럼요. 장인어른 말씀이라면, 찰떡같이 알아듣는 사위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다시 얘기 안 해도 되는 거겠지?”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른 척 연기는 여기까지. 더 했다간 진짜 화를 내실지도 모를 것 같아서였다.

“끄응, 자네가 이해했다고 하니 더 이상 말은 않겠네만…….”

빈 잔에 복분자주를 채워주시는 장인어른의 표정은 약간 미심쩍다는 느낌이었다.

“술이 아주 달고 맛있습니다, 장인어른.”

“껄껄, 역시 그렇지? 아무렴 명인이 빚은 술인데!”

하지만, 내가 순식간에 복분자주 한 병을 더 비우자.

이내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시며 또 한 병을 꺼내 오셨다.

* * *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장인어른.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 짓고 집에 돌아왔다.

처음에 빙빙 돌려서 얘기를 꺼내신 걸 보면, 강압적으로 아이 가지라는 말은 하기 싫으셨던 걸까.

눈치가 보이긴 하셨던 것 같다.

내 눈치보다는 결혼 생활 간섭에 언성을 높일 선화의 눈치를 보셨던 거겠지만.

‘그런데, 진짜로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

항상 노력하고 있다.

우리도 아이는 갖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이게 좀처럼 잘되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신체적 문제는 없지만, 어쩌면 유산으로 인한 선화의 정신적 트라우마가 원인일 수도 있다고 했다.

혹여나 장인어른께서 걱정하실까, 유산에 관한 사실은 말씀드리지 않았었다. 선화 역시 그러길 바랐고.

‘사실 그땐 장인어른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말씀드릴 틈조차 없기도 했지.’

아마, 장인어른께서도 선화의 유산 사실을 알고 계셨다면 손주 얘기는 언급하지 않으셨을 거다. 그보다 선화의 걱정이 앞섰을 테니까.

‘아이는 때가 되면 가질 수 있을 거야.’

아이는 하늘이 점지해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선화 역시 과거의 트라우마가 어느 정도 회복된 상황이고, 지금처럼 함께 노력을 해 간다면 분명히 축복의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

‘장인어른께서 좀 급해 보이시기는 하지만…….’

이해는 한다.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시고, 친구분들께서 다 손주를 보셨을 테니 말이다.

“아빠가 뭐래? 왜 만나자고 한 거래?”

“그냥 장기 한판 두고 싶어서 부르셨나 봐.”

“에이, 뭐야. 싱겁게.”

선화한테는 손주 관련 얘기를 숨겼다.

요즘 서로 잘 노력하고 있는데, 굳이 과거의 트라우마를 다시 끄집어내기 싫어서였다. 손주 얘기를 하면 자연스레 언급될 내용이니까.

“근데, 오빠. 미심이가 좀 이상해 오늘.”

“응?”

“아까부터 계속 저러고 있는데. 저기서 꼼짝도 안 해.”

선화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거실에 있는 책장 앞이다.

키잉-

그곳에서 미심이가 책장 위를 올려다보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책장 꼭대기 층 서랍장 안이었다.

‘블러드 스톤 때문인가? 하여튼, 미심이 저 녀석 귀신 같다니까.’

일부러 블러드 스톤을 숨겨 놨다.

마켓에서 구입한 보안 마법 스크롤을 여러 겹 중첩해서 걸어 놓은 상자 안에 담아 두었고, 그걸 다시 책장 꼭대기 서랍장 안에 넣어 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찾은 거다.

오직 미심이 본인의 직감으로.

‘보이지도 않을 텐데, 저걸 대체 어떻게 찾는 거지? 반짝거리는 거 찾는 데 아주 도가 텄다니까.’

물론, 블러드 스톤을 미심이가 채간대도 문제는 없을 거다.

블러드 스톤에 부작용이 있긴 하나, 서리 사막의 얼음꽃과는 달리 흡수를 위해서는 마력 방출을 사용해서 깃들어 있는 마력을 끌어내야만 한다.

하지지만, 반려몬인 미심이는 스킬이나 특성을 사용할 때를 제외하곤 헌터들처럼 마력 방출 사용이 불가능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다른 데 숨겨 놔야겠다. 선화 네가 미심이 좀 잠깐 붙잡고 있어 줘. 나 못 따라오게.”

집안에는 딱히 숨길 곳이 없었다.

서랍장 속 상자 안쪽까지 눈치채는 와중에 마땅한 곳이 보일 리가.

차원문을 열어 본다.

이렇게 넓은 장소라면, 미심이도 못 찾지 않을까.

“얼씨구?”

적당한 곳을 찾다가 걸음을 멈췄다.

신비한 알이 놓여 있는 곳 뒤에 예상치 못한 것들이 보여서였다.

“선화가 얼마 전부터 계속 찾던 것들인데.”

알 뒤쪽에 선화의 머리핀, 팔찌, 목걸이 같은 액세서리가 잔뜩 놓여 있었다. 알이 들어 있는 기계 장치 뒤쪽에 미심이가 숨겨 놓은 것 같았다.

“여기다 숨겨 놓으면 우리가 못 찾을 줄 알고?”

아마, 우리 선화 몰래 가지고 놀려고 했던 거겠지.

귀여운 녀석. 미안하지만, 이건 다시 선화에게 가져다줘야겠다.

차원문 내부에도 블러드 스톤을 숨길 곳이 마땅히 없었다.

땅속에 묻어 놔도 미심이가 찾을 것 같았기에, 아무래도 다른 장소를 물색해 봐야 할 듯했다.

일단, 선화의 액세서리를 챙겨 나가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알 뒤쪽의 머리핀을 막 집으려던 순간이었다.

기우뚱-

알이 움직였다.

어제처럼 똑같이 좌우로 흔들리면서.

하지만.

이번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 ‘신비한 알’이 블러드 스톤의 마력을 흡수합니다. ]

[ ‘신비한 알’의 ‘드래곤의 가호’ 패시브가 적용됩니다. ]

[ ‘드래곤의 가호’ 효과로 디버프가 무효화됩니다. ]

알에 조금씩 금이 생기는 동시에 떠오른 홀로그램.

드래곤이 부화를 시작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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