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든 보스
검붉은 안개를 피워 대는 놈.
네임드급 몬스터인 데스 나이트였다.
‘마수답게 방어력보단 공격력이 높은 녀석.’
사령 기사라는 또 다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육체가 없이 오로지 입고 있는 갑옷만으로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몬스터였다.
고로, 갑옷 내부를 찔러도 치명상을 입힐 수 없다.
갑옷을 부순대도 시간이 지나면 그마저도 복구된다.
‘하지만, 약점이 없는 건 아니지.’
모든 몬스터에겐 급소라는 게 존재했다.
그리고 눈앞의 데스 나이트 역시 몬스터였다.
스윽-
놈이 거대한 낫을 치켜들었다.
낫 주변에 검붉은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마격과 비슷한 원리.’
마력 방출이 일정 수준에 이르면, 마력을 어떠한 형태로 쏘아 보낼 수가 있는데, 그걸 ‘마격’이라고 표현하고는 했다.
‘맞으면 팔이나 다리, 몸 어딘가가 잘려 나가겠지만…….’
안 맞으면 그만이었다.
D급 보스 따위에게 시간을 할애할 생각도 없었다.
‘진짜 보스는 따로 있으니까.’
촤아아악!
놈이 거대한 낫을 휘둘렀다.
검붉은 기운이 해당 형태로 매섭게 날아든다.
‘지금이 딱 좋은 타이밍이야.’
낫을 휘두를 때, 놈의 움직임이 커진다.
그 틈을 파고들어 급소인 눈을 노릴 생각이었다.
은신을 간파하는 능력을 보유한 두 눈.
유일하게 놈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약점이었다.
스스슥!
시뻘겋게 반짝이는 놈의 두 눈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아마도 코앞에 나타난 날 보고 놀란 것일 터.
‘체구에 걸맞지 않게 좋은 반응 속도를 가진 놈이야.’
내 공격쯤은 얼마든지 막아 낼 수 있을 정도로 민첩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말은 곧.
놈의 움직임이 느려지면 막지 못한다는 뜻과 같았다.
끼이!
미리 공중에 날려 보낸 은실이가 희망차게 울었고.
동시에 데스 나이트를 향해 치유 스킬을 사용했다.
[ 치유 스킬이 디버프 스킬로 전환됩니다. ]
[ 마수 ‘데스 나이트’에게 둔화 상태가 적용됩니다. ]
마수에게만 해당되는 제한적인 스킬 변형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녀석의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는 최고의 스킬이었다.
마치 검붉은 보석과도 같은 놈의 오른쪽 눈에 검을 찔러 넣었다. 제법 단단한 터라 일격에 부숴 버리진 못했다.
크아아아!
고통이라도 느끼는 걸까.
놈이 격하게 몸부림을 쳐 댔다.
‘훨씬 피하기 쉬워졌어.’
급하게 손과 낫을 휘둘러 보호하는 놈이었지만, 역시나 움직임이 둔했다.
다시 놈과의 거리를 벌렸다.
녀석이 쇄도했으나, 나를 잡지는 못했다.
‘둔화 상태는 1분간 지속되지만, 은실이의 치유 스킬은 마력이 소진될 때까지 사용이 가능하지.’
내가 이 던전 안에서 놈을 상대하는 시간 동안, 데스 나이트는 50% 감소된 속도밖에 낼 수 없었다.
달려드는 데스 나이트를 가볍게 흘려보냈다.
근접전은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녀석이 다시 낫을 든다.
파앗-!
이번엔 놈이 낫을 날리기 전에 내가 먼저 움직였다.
아까 노렸던 오른쪽 눈에 재차 검을 찔렀다.
‘……이놈이 동물형이었으면, 훨씬 더 쉬웠을 텐데.’
문득 아쉬운 생각이 들었지만, 썩 나쁘진 않았다.
1회차 당시, 처음 데스 나이트를 잡으러 왔을 땐 E급 헌터 열 명이서 쩔쩔매지 않았던가.
‘뭐, 이 정도도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될 수준이니까.’
같은 움직임을 반복하며 놈의 두 눈만을 공략했다.
그렇게 은신이 유지되는 10분이 지났다.
[ 해당 던전이 공략되었습니다. ]
[ 1시간 후 소멸됩니다. ]
은신이 풀림과 동시에 딱 맞춰 나타난 홀로그램.
이마저도 S급 무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한 번 남아 있던 미심이의 은신 스킬 횟수까지는 소모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이후에 나타날 진짜 보스를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된 셈이었다.
쉬이익-
타들어 가듯 사라지는 데스 나이트.
그 위로 균열 던전 기여도 정산이 시작됐다.
[ 일반 기여도 1위 보상 - 송곳 무늬 마노 ]
[ 보스 기여도 1위 보상 - 안개 무늬 루비 ]
[ 최종 1위 보상 - 중급 마석 상자 ]
최종 1위 보상 상자는 집에 가서 열어 볼 생각이었다.
그보다는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일단, 아케소의 하얀 천 합성부터 해 볼까.’
나머지 필요한 아이템은 이미 다 구해 놓은 상황.
합성의 서를 포함한 재료들은 가방에서 꺼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 합성의 서를 사용하시겠습니까? ]
나는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 아케소의 안개 무늬 하얀 천, 합성 중 46% ]
[ 송곳 무늬 그립, 합성 중 75% ]
합성 보조제 공식을 이용해 합성을 시작했다.
습관처럼 홀로그램을 확인했지만, 좀 더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하나는 금방 완성될 것 같은데.’
송곳 무늬 그립.
보이지 않는 검의 두 번째 특성을 사용하기 위한 조건이었다. S급 무기의 진짜 가치가 바로 그 두 번째 특성에 있기 때문이었다.
기대감 때문인지, 조급함이 극에 달하던 그때.
게이트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자연스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준우 씨! 괜찮으시죠?”
저만치서 나를 부르는 홍민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늦게 보스 게이트에 진입한 그가 잿가루가 된 데스 나이트를 바라보며 허무하게 웃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습니다만, 역시나군요.”
“쩝, 보상이 꽤 짭짤하실 거 같은데…….”
최지승이 대원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균열 던전의 모든 몬스터와 보스가 공략되었으니,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보상에 미련이 남아 있는 듯한 홍민철이 은근슬쩍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가 짐짓 비장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혹시, 따로 소속을 둔 용병단이 있으신지?”
“없습니다. 프리랜서예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
홍민철이 반색하며 말을 이었다.
“몇 달 뒤에 헌터 협회 경기 지부에 기동대원 특별 채용이 있을 예정입니다.”
“기동대원 특별 채용이요?”
협회의 영입 제안이나 일반 채용으로 입사를 할 수 있는 다른 직책과는 달리, 엘리트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동대는 오직 특별 전형만으로 입사가 가능했다.
“협회의 꽃이라고 불리는 기동대입니다. 게다가 특별 채용인 만큼, 일반 채용에 비해 수많은 혜택들이 있죠. 예를 들면…….”
신나게 특채에 관한 정보들을 설명하는 홍민철.
무슨 목적인가 했었는데, 결국 협회 소속 헌터로 일할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전준우 씨 정도의 실력자라면 제가 기꺼이 추천서도 써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럼, 서류 전형은 거의 프리 패스예요!”
“고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동대는 전부터 내가 탐내고 있던 곳이었다.
협회의 레이더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레이더를 사용한다면, 던전을 찾는 게 수월해져. 당연히 반려몬 입양하는 데도 훨씬 도움이 될 거고.’
기동대 특채는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다.
레이더를 목표로 한다면, 곧 다가올 이 기회를 잡아야만 했다.
하지만.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건형이 형님이 이 사실을 알면, 방방 뛰실 텐데.’
어쨌거나 협회에선 이건형이 먼저 날 점찍지 않았던가.
나를 영입해 자신의 수사과 팀에 넣을 생각이었을 거다.
‘언젠가 내게 큰 도움이 될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야. 이 일로 괜히 언짢게 만들어서 좋을 건 없겠지.’
만약 기동대에 지원을 하게 되더라도 그와 한 번쯤 얘기를 나눠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특채는 몇 달 뒤에 있을 테니, 충분히 여유는 있어.’
수사과로 강등 조치되었다던 그가 다시 기동대로 복귀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그런데, 전준우 씨께서는 철수 안 하십니까?”
“근처에서 놀고 있던 제 반려몬이 조금 전부터 안 보여서요. 찾아서 데리고 나가야 할 것 같아요.”
“던전을 공략할 때 반려몬과 함께 다니십니까……?”
“애들이 저랑 떨어지길 싫어해서.”
“아아, 그럼 저희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바깥 상황 정리하면서 균열 핵 수거도 해야 해서. 혹시라도…….”
홍민철이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는 미련이 가득 남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기동대 특채 시험을 보시게 되면 말입니다. 합격하셨을 때 꼭 저희 팀으로 지원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핫!”
“아……?”
“다른 건 몰라도, 저희 A팀에서 보급품 하나는 빵빵하게 넣어 드릴 수 있거든요!”
피식 웃음을 터뜨린 최지승이 말을 덧붙였다.
“보급 관리팀에서 A팀 보급품 너무 많이 가져간다고 조만간 제한 걸 거라던데요?”
“뭐, 뭔 소리야, 그게?”
“에에? 왜 모르는 척하십니까, 홍 대장님? 전준우 씨 보급품이라면 저희 B팀에서 더 확실하게 지원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 사람아, B팀은 팀원 충분하잖아?”
“저희 팀에 딜러 부족한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A팀은 홍 대장님이 일당백이시니, 저희 팀에 양보하시죠?”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구만.
자기네들끼리 먼 미래를 보며 떠들어 대는 두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며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곳에 히든 보스가 등장할 거야.’
반려몬을 찾아 나선다는 내 말은 거짓말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할 일이 남아 있었다.
1회차에 데스 나이트를 섬멸한 건 홍민철이다.
그는 이곳에서 갑작스레 히든 보스를 마주쳤다.
‘팀원들에게 퇴로를 열어 주려다가 사망했다고 했었지.’
도망쳐 나온 팀원들이 지원군과 함께 홍민철을 구하러 갔을 땐, 보스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놈이 외부로 빠져나간 흔적 또한 없었으니, 홍민철과 격전 중에 치명상을 입고 소멸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게 협회의 판단이었다.
당시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히든 보스는 동물형 몬스터.
등급 측정기로 본 놈의 등급은 C등급이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실력이 비등비등했는지, 동급의 홍민철은 목숨까지 내걸고 싸워야 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보다 수준이 위였다.
나라면 굳이 목숨까지 내걸지 않아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다.
게다가 동물형 몬스터라면, 포식자 칭호까지 적용되는 상황이지 않은가.
히든 보스마저 처리한다면.
역시나 더 좋은 보상을 얻을 수 있을 터.
‘만약 붙었다가, 정 안 되면 그냥 튀는 거고.’
헌터 마켓에서 구입한 귀환석도 있지 않은가.
자존심 상하지만, 그때는 어쩔 수 없이 나가서 지원군을 불러오는 수밖에.
나는 걸음을 재촉하여 계속 안쪽으로 진입했다.
동굴과도 같은 이곳에서 동물의 울음소리 같은 게 들려왔다는 게, 당시 목격자의 증언이었다.
‘이중 게이트겠지.’
간혹 그런 경우가 있다.
보스가 죽고 난 뒤, 또 다른 게이트가 나타나는 현상.
모든 이중 게이트가 이렇게 발생하진 않는다.
여러 가지 방법 혹은 조건과 과정을 통해 발생하기도 하며, 보스가 죽기 전에 이미 이중 게이트가 존재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이중 게이트가 발생하면 히든 보스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그때처럼 동물의 울음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지만…….’
어쩌면, 내가 당시보다 더 일찍 보스를 공략해 버린 것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때와 시간을 비교해봤을 때, 지금은 이중 게이트가 만들어지기 전일 수도 있었으니까.
‘……찾았다.’
동굴의 가장 안쪽에서 걸음을 멈췄다.
눈앞의 손바닥만 한 게이트가 점점 영역을 넓혀 가고 있는 게 보였다.
‘이 안에서 놈이 나온 뒤에, 울음소리가 들려왔을 거야.’
히든 보스가 등장하면 던전 소멸 홀로그램은 사라진다.
던전이 다시 소멸을 시작하는 건, 놈이 죽은 후부터였다.
나는 검을 움켜쥔 채, 놈을 기다렸다.
이윽고 온전해진 게이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녀석.
‘뭐지……?’
그런데, 히든 보스가 등장했음에도 불구.
던전 소멸 홀로그램이 사라지지 않았다.
크르륵-
게이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놈이 나를 노려본다.
나 역시도 그런 놈을 잠시 멍하니 응시했다.
저벅저벅-
나를 향해 다가오는 놈의 모습을 세세히 살폈다.
날카로운 발톱과 흉흉한 이빨.
거기에 온몸을 뒤덮은 거친 털들.
쿵쿵-
심장이 다소 격하게 뛴다.
평소와는 달리 묘하게 긴장이 되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 이 새끼 설마…….’
나도 모르게 검을 쥔 손이 부르르 떨려 왔다.
마치 내가 직감적으로 놈에게 반응하는 기분이다.
‘……그 새끼랑 연관이 있는 놈인가?’
그저 단순한 착각일까.
하지만 왠지, 검을 쥐고 있는 늑대인간의 그 모습이 꼭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특히나 달 문양이 박힌 보랏빛의 그 두 눈은.
회귀 전, 나를 죽였던 그놈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