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똑똑히 다 봤어
전투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건 각성자의 힘이다.
또한, 그에 견줄 만큼 중요한 것은 상황 판단력이었다.
특히나 의도치 않게 버거운 상대를 만났을 경우.
상황을 빠르게 직시하고, 얼마나 옳은 판단을 하느냐에 따라 생사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E급 헌터 둘이 C급 보스를 마주한 지금과 같은 상황에는 무조건 도망을 치는 것이 최선의 판단이었다.
‘무모하게 전투를 진행했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런데…….’
정한나가 멍한 표정으로 눈앞을 응시했다.
조금 전, 돌진하는 킹 라이노를 일격에 날려 버린 준우가 그곳에 서 있었다.
그는 놈을 날려 버린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뿌, 뿔을 뽑았어? 킹 라이노의 뿔을?’
놈의 급소라는 뿔을 뽑아, 그 뿔로 나자빠져 있는 놈을 찔러 대고 있지 않은가.
“이게 주방 칼보다 좋네요? 더 튼튼한 것 같기도 하고, 그립감도 나름 훌륭하고.”
“주방 칼이요……?”
“요게 던전 공략할 때 제가 쓰는 무기거든요.”
“그, 그 주방 칼로 던전을 공략한다구요?”
“마력 주입하면 꽤 쓸 만해요, 이것도.”
“……미, 미친.”
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뭐 하는 사람이기에 자신과 같은 E등급이면서도 C급 보스를 한 손으로 때려눕히고, 뿔을 뽑아 그걸로 놈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인지.
‘헌터 등급 같은 거, 사실 다 의미 없는 거 아냐?’
마력 방출을 사용하면 최소 2배 이상의 힘을 낼 수 있다고 들었다. 얼마나 잘 다루느냐에 따라 그 힘 또한 강력해질 수 있다는 것도.
‘근데, 이건 해도 너무 하잖아!’
E급 헌터가 마력 방출을 사용하는 것도 모자라, D급 헌터가 열 명은 있어야 잡을 수 있다는 킹 라이노를 공략해 냈다.
‘팀장님이 왜 협회로 영입하려는지는 알겠어. 하지만, 이 정도 능력자는 협회가 절대 영입할 수 없는 거물이야…….’
고로, 아무리 영입하려고 용을 써봤자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엑시스 정도의 초대형 길드라면 모를까, 준우를 영입할 만한 재력은 협회에 없었으니까.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닌 이상, 낮은 연봉 받아 가며 제 발로 협회에 들어올 리도 없고.’
준우가 킹 라이노의 뿔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그리고는 고스란히 가방에 넣는다.
“……진짜 그 뿔을 무기로 쓰시려구요?”
“아니요, 다 괜찮은데 모양새가 영 별로라.”
“그럼요?”
“집에 가져가서 고아 먹을까 해서요.”
“케, 케켁!”
“농담이에요, 농담.”
“무, 무슨 농담을 그렇게…….”
장난스레 말을 하긴 했지만, 쓸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준우에겐 이건형이 알려 준 세 번째 던전에서 쓰임새가 있을 물건이었다.
“갈까요, 아까 놓친 그놈 잡으러.”
“아, 맞다! 아까 무슨 추격자를 붙여 놓으셨다고 하셨죠?”
“운이 좋았어요. 조금만 늦었어도 그냥 놓쳤을 거예요.”
“저희 협회 말고 전준우 씨 돕는 분이 또 이 안에 있는 줄은 몰랐네요.”
모를 수밖에.
가방 속에 꼭꼭 숨겨져 있었으니까.
‘은실이가 용케 잘 따라붙은 모양이네.’
정한나는 추격자가 당연히 사람이라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놈의 포탈이 닫히기 직전 작은 틈으로 간신히 날려 보낸 은실이었다.
킹 라이노와 직원들 때문에 정신이 없던 탓인지, 그녀는 미처 은실이가 포탈을 통과하는 걸 보지 못한 듯했다.
삐빅-!
준우의 눈앞에 홀로그램 지도가 떠올랐다.
은실이에게 반 정도 남은 안내자의 선명한 액체를 발라 둔 덕분이었다.
“단거리 포탈이었는지 멀리 못 갔네요. 포탈 생성기 쿨타임 때문에 앞으론 사용도 못 할 거고.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아요.”
“…….”
“정한나 씨? 뭐 해요?”
죽은 킹 라이노를 살짝 들어 보려다가 움찔하는 그녀.
준우가 주먹 한 방에 쉽게 날려 버리길래, 혹시나 가볍나 해서 들어 본 거였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 먼저 갑니다? 아무래도 놈이 조금이나마 가까울 때 잡는 편이 수월해서.”
지도상 성재원이 있는 곳은 불과 30분 안팎의 거리.
숲의 신발을 사용한다면, 5분 안에도 도착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가, 같이… 는 못 가겠구나?”
정한나가 채 말을 잇기도 전.
준우의 신형은 이미 눈앞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 * *
성재원은 있는 힘껏 달렸다.
던전과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서.
‘이, 이쯤이면 괜찮을 것 같은데……?’
인근에 있던 산을 오른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시라도 지켜보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였다.
‘협회 놈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숨겨야 한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성재원은 서둘러 땅을 파기 시작했다.
자신만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나무에 표식을 새겨 놓고, 그 밑의 흙을 거둬 냈다.
훅훅!
손톱이 부러지는 것도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흙을 파내자, 이윽고 제법 큰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됐다!’
성재원이 품에서 작은 노트를 꺼냈다.
VIP 고객의 명부와 그들의 차명 계좌가 적힌 장부였다.
핸드폰 같은 전자기기는 당연히 수색 대상이 될 것이기에, 이렇게 따로 장부를 마련해 둔 것이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했어.’
포탈 생성기를 사용할 수 있는 건, 하루 2회뿐.
그 이상 사용할 수 있었다면 더 멀리 도망을 칠 수 있었겠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어차피 도망칠 생각이 없었으니까.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의 차이일 뿐, 얼굴이 팔린 이상 결국 언젠가는 잡히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성재원은 도망이 아닌 다른 방법을 택했다.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을 확실하게 만들어 두는 것.
‘사람 우습게 보지 말라, 이거야.’
포탈을 통해 짧은 거리나마 이동한 것은 시간을 벌기 위한 용도였다. 급한 대로, 일단 장부부터 숨겨 놓기 위해서 말이다.
목숨 줄이나 다름없는 소중한 장부.
그렇기에 항상 품 안에 지니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누가, 언제, 어디서, 장부를 노릴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걸 노리는 놈들이 한둘이어야지.’
VIP 고객들에겐 장부가 눈엣가시였다.
몇몇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나, 장부를 빼앗지 못한 지금으로선 성재원에게 약점을 잡혀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훅훅!
성재원은 장부를 구덩이에 넣고 흙을 덮었다.
살짝 불안하긴 했지만, 금방 찾으러 올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기에 마음이 놓였다.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때였다.
나무 위의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끼이!
은빛 깃털을 가진 새 한 마리.
녀석의 날카로운 시선이 성재원을 향해 있었다.
“……뭐, 상관없겠지.”
그저 몬스터일 뿐이다.
말도 못 하는 한낱 몬스터.
“제까짓 게 봐서 뭐 어쩔 거야?”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코마 상태인 녀석 같았다. 아마, 이 주변을 떠돌다가 우연히 이곳에 나타난 모양.
“예전 같았으면 당장 잡아서 투기장 미끼로 써 주련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어느새 코앞에 준우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이야, 용케 도망친 것 같네? 킹 라이노가 그렇게 하찮은 놈이 아닐 텐데.”
“도망친 게 아니라 내가 잡은 거지.”
“네가? 딱 봐도 하급 헌터인데?”
준우는 성재원을 무시하고, 그의 품을 뒤졌다.
만약을 대비해 포탈 생성기를 뺏기 위함이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설마, 나한테 위치 추적기라도 달아 놨어?”
“입 닥쳐. 할 말 있으면, 협회 조사실 가서 해.”
“내가 아까 말했을 텐데. 넌 절대 나 못 잡는다고.”
“그 내기는 이미 네가 졌어.”
잠시 후, 준우의 연락을 받은 협회 헌터들이 도착했다.
이건형의 모습 뒤로 정한나와 팀원들의 모습이 보인다.
“아이고! 나 하나 잡아 보겠다고 우리 협회 나리들 고생들 하시네. 여기 산이 좀 험하던데, 관절 괜찮으신가?”
“이 자식, 뭐야?”
이건형이 자신들을 비꼬는 성재원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연신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들 뛰어다니면 뭐 하나. 결국, 헛고생일 텐데. 쉬엄쉬엄해요, 쉬엄쉬엄.”
“별 미친놈 다 보겠네. 곧 잡혀 갈 새끼가 입만 살아서는.”
“푸핫! 잡혀 가? 내가?”
“현장은 이미 다른 팀원들이 정리 중이고, 김동수라는 놈의 차량에서 장부도 발견됐어. 이전에 있었던 투기장 승패 조작 흔적과 아이템 밀수입에 관한 자료들 싹 다.”
“그래서 뭐? 그걸로 날 잡아넣겠다고? 사서 고생한다는 말이 있어, 헌터 양반. 내 눈엔 지금 당신 꼴이 딱 그 모냥이거든?”
“하아…….”
이건형이 애써 성재원을 무시했다.
계속 맞장구를 쳐 줘 봐야 심력 낭비였다.
“팀장님께서 참으세요. 좀 모자란 놈이다, 생각하시고.”
준우는 자신이 갖고 있던 김동수의 나머지 장부 하나를 이건형에게 건넸다. 그 틈을 참지 않고 성재원은 계속 입을 놀리는 중이었다.
“너도 쓸데없는 데 힘 빼지 마. 그딴 증거, 아무리 모아 봤자 소용없다니까?”
“결과는 보면 알겠지.”
“다 헛고생이라니까? 그렇게 하면 협회에서 뭐 돈이라도 준대? 차라리 그 시간을 나한테 투자하지, 그래? 돈이라면 내가 실컷 벌게 해 줄 테니까…….”
“입 좀 다물어라, 새끼야.”
이건형이 성재원에게 마력 수갑을 채웠다.
놈의 입이 조용해지는 듯싶더니, 이번엔 실소가 새어 나왔다.
“크큭! 이거 푸는 데, 몇 분이나 걸리려나?”
현장 정리가 얼추 다 끝나 가던 그때.
정한나가 다급하게 이건형에게로 다가왔다.
“티, 팀장님…….”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서, 성재원 풀어 주랍니다.”
“뭔 소리야! 현행범을 왜 풀어 줘?”
“윗선에서 내려온 지시 사항이에요.”
“윗선? 이런 터무니없는 지시를 내린 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지부장님 지시입니다. 불구속 수사로 진행하랍니다.”
“지, 지부장님이 직접?”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성재원이 씩 웃는다.
마치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너희 지부장이 내 VIP 고객 중 한 명이거든.’
당황한 이건형의 입에서 연신 한숨이 흘러나왔다.
풀어주라는 지부장의 지시가 있긴 했으나, 사명감을 가진 협회 헌터로서 범죄자를 풀어 주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설마, 이 사건 질질 끌다가 덮으려고 하는 건…….”
“이걸 왜 덮어요? 덮을 이유가 뭐가 있다고?”
“이유……? 있는 것 같네. 아마, 저 새끼.”
성재원이 보란 듯이 손목을 내민다.
그리고는 턱짓으로 수갑을 가리켰다.
“뭐 해요? 빨리 안 풀고.”
“너 대체 정체가 뭐냐? 뭔데, 지부장이 현장 팀원한테 전화까지 해 가면서! 지부장이랑 무슨 비즈니스라도 있어?”
“거 참. 내가 소용없을 거라고 했잖아. 아까부터 계속 그렇게 말을 했는데도, 왜 일을 번거롭게 만들어?”
성재원이 낄낄거리며 이건형을 바라본다.
멸시에 가득 찬 눈이 호기롭게 휘어졌다.
“하여튼, 공무원 새끼들이란.”
“이, 이런 개 같은!”
이건형이 성재원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치게 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 때문인지, 금방 주먹이라도 날릴 기세였다.
“팀장님, 진정하세요.”
어딘가를 다녀온 듯, 갑자기 나타난 준우가 그를 말렸다.
잔뜩 상기된 협회원들과는 달리 유독 담담한 표정으로.
“하아, 미안합니다. 자세한 건 조사를 해 봐야 알겠지만, 준우 씨를 영입하려는 입장에서 협회의 치부를 보여 드린 것 같아…….”
“괜찮습니다. 이 새끼랑, 지부장이랑 죄다 같이 처넣으면 될 것 같으니까.”
“예……?”
준우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성재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금 전, 자신이 묻어 뒀던 장부가 준우의 손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 너 이 새끼! 그거 어디서 났어……?”
“어디서 나긴. 좀 전에 나무 아래서 파냈지.”
그 순간.
저 높이 하늘을 날던 은실이가 준우의 어깨에 앉았다.
성재원이 장부를 묻을 때 마주쳤던 바로 그 새였다.
끼이!
“얘가 그러더라?”
끼이이!
“‘내가 똑똑히 다 봤어’라고.”
성재원의 몸이 떨려왔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으나, 이미 표정은 지옥에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사색이 되어 있었다.
“너 다시는 내기나 도박 같은 거 하지 마라. 아무래도 재능 더럽게 없는 것 같다.”
장부로 ‘확!’ 놈의 머리통을 치는 시늉을 하는 준우.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은 단 하나였다.
협회의 경매장이 오픈하는 날.
투기장에서 수거해 간 아케소의 하얀 천을 낙찰받는 것.
일주일 뒤, 기다렸던 그날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