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장 (34/35)

제4장

“휴… 우선 정확한 답은 남민지만 알고 있다는 건데 섣불리 접근할 수가 없으니…….”

손진철의 말을 머릿속에 담아온 우리는 수사팀 모두에게 알고 있는 것들을 전했다.

그리고 얘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백성원 원장이었다.

“네, 맞습니다. 무작정 들이댔다가 역풍을 맞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녀가 마스터란 정확한 증거는 없었다.

사실 심증만 있을 뿐이다.

아니, 심증이란 것도 한탁희의 추측일 뿐이었다.

“자, 잠깐만요.”

문득 스쳐 지나간 생각.

그 생각으로 인하여 도저히 회의에 집중이 되지 않았고, 결국 손을 들었다.

“만약 지금 살아 있으면 몇 살이죠?”

“음… 1991년생이니까 한국 나이로 한 23살쯤 됐겠네.”

“한탁희 수석님.”

나와 함께 마스터의 음성을 들은 사람.

“마스터란 놈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들으신 적 있으세요?”

내 의문을 해결해 줄 사람은 한탁희밖에 없었다.

“직접적으로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한 검사님과 같이 관리자 회의에서 들은 게 전부였으니까.”

“어떠셨어요?”

“뭐가 어떠냐는 말씀입니까?”

“1991년생 23살이란 단어를 떠올리며 마스터의 목소리를 듣는다면요.”

“설마… 지금 마스터가 남민지와 손진철의 숨겨진 아들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네.”

피식—

내 말에 몇 명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고, 또 몇 명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가 젊긴 했으나 얼마든지 변조가 가능합니다, 한 검사님. 잘 아시잖아요. 클럽이 얼마나 보안에 신경 쓰는지. 그리고 마스터는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즉, 절대로 정체가 드러나면 안 된다는 뜻이죠.”

“그렇게 따지면 남민지 앵커가 마스터란 추측부터 접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아무런 물증도 없이 추측만으로 모든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그건…….”

모든 건 한탁희의 한마디 말로 인해서 시작되었다.

그렇기에 내 말을 들은 한탁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나 역시 자신과 같이 추측으로 던져 본 말이었고, 자신이 던진 추측을 우리는 무시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워워, 두 사람 모두 분위기 무겁게 만들지 말고 내가 알아볼게요.”

백성원 원장이 회의실을 나갔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한탁희와 묘한 신경전을 벌인 탓에 회의실 안은 무거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사실… 나도 한탁희 수석님 손을 들어주고 싶네. 이제 겨우 23살짜리가 클럽의 마스터라는 걸 그 누가 납득할 수 있겠나.”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강철호.

물론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수사팀에 있는 사람들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들었고,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강철호의 말에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20대의 몸을 가진 내 머릿속은 40대 중반의 조폭 한치우가 공존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만약…….

‘놈도 나처럼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면…….’

물론 마스터란 놈이 나와 같은 상황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놈이 태어난 사실조차 아직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만약 나처럼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 어떤 사실보다 절망적이었다.

나와 같이 미래를 알고 있으며, 놈이 첫 번째 인생에서 어떤 삶을 살았을지 전혀 모르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인생은 분명 나보다 훨씬 가치 있는 삶을 살았을 확률이 높았다.

나의 첫 번째 인생은 조폭이었으니까.

“일단 원장님 말 듣고 생각해 보죠.”

무거워진 분위기와 수많은 추측들을 해결할 사람은 오직 백성원 원장뿐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고 확실한 정보를 가진 기관의 수장이 회의실 밖에서 컴퓨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은데.”

“휴…….”

이윽고 백성원 원장이 문을 빼꼼 열고 수사팀을 향해 한마디를 던졌고, 백성원의 말을 들은 우리는 깊은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우선 원정 출산 가능성이 높으니 그쪽으로 조사하고 있고, 안 되면 CIA 공조도 부탁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봐.”

“감사합니다, 원장님.”

* * *

백성원 원장이 말한 시간은 꽤 많이 필요했다.

많은 시간 동안 수사팀은 미뤄둔 자신들의 업무를 하기 바빴고, 나와 한탁희는 관리자 회의에서 되도록 서로를 멀리했다.

가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하는 것을 빼고는 말이다.

다만, 한탁희를 제외한 두 사람은 어색함을 너머 불편해 보였다.

하긴. 자신들의 목에 목줄이 채워져 있으니 무슨 행동이든 불편하겠지.

물론 목줄을 쥐고만 있던 건 아니었다.

서윤호와 중수부를 가동해 두 사람의 모든 범죄 혐의를 확보했고, 두 사람은 내 전화 한 통에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범죄 혐의가 고스란히 들어난 서류를 보내 왔다.

자료를 보내느니 같이 죽자는 생각은 나에게 통하지 않았다.

왜?

모든 걸 까발린다 해도 같이 죽을 일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사실을 본인들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반항해 봤자 자신들의 목줄만 더 조여질 뿐이었다.

목이 졸려 죽을지도 모를 만큼.

덕분에 언제든지 터트릴 수 있는 자료들을 확보했다.

검사실로 돌아가 기소장만 적으면 언제든지 두 사람을 감옥에 보낼 수 있었다.

클럽이 무너지는 날.

두 사람 역시 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평생 빛을 볼 수 없을 만큼의 형량이 떨어질 결과가 빤히 보이는 재판을.

또한 나는 그 목줄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정종진 회장을 통해 그 동안 클럽이 행해 온 프로젝트가 어떤 식으로 진행됐고, KC 그룹의 자금이 어떤 식으로 흘러갔는지를 파악했다.

그는 내 말을 따르면서 항상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한 기업의 회장이 사람취급도 받지 못하며 내 심부름꾼이 되어 나에게 한 소리를 듣기 급급했으니 꽤나 고통스러워 그런 것일 테다.

정말 웃기지 않은가.

자신의 한마디로 수천 수만 명의 직원들이 움직이고, 몇 조 원의 자금을 융통하며 누구보다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는 인간이 내 한마디에 두려워한다는 사실이.

내가 그를 두렵게 할 수 있던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더러움.

지금껏 풍요로움을 누리기 위해 자신의 몸에 묻힌 그 더러움이 정종진의 약점이었고, 지금처럼 누리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나에게 복종하게 만든 것이었다.

김주상 감사원장 역시 별반 다를 것 없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공무원을 감사하는 감사원의 수장이란 위치는 오로지 나를 위해 쓰였다.

뭐, 어차피 내가 없었어도 자신의 위치에서 올바른 일을 하는 인간은 아니었지만…….

어떤 공무원들이 클럽을 위해 움직였고, 또 어떤 공무원들이 대가를 받았는지가 적힌 목록은 내 사무실 자물쇠가 굳게 잠긴 서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누구에게 들킬까 조마조마하며 잘 만지지도 못하는 컴퓨터에 앉아 독수리 타법으로 워드를 작성했을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비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완전 기계네요, 기계.”

“그러게 말입니다.”

용산의 한 저택 앞.

차량에는 나와 정대필 수사관이 앉아 있었다.

“그나저나 왜 따라오셨어요. 저 혼자 와도 된다니까.”

“하하하, 우리 검사님이 위험에 빠지실까봐 따라왔죠.”

“제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사람은 아닌데…….”

“검사님 이래 봬도 저 유도 4단에 태권도 5단, 거기에 대한민국 특수부대 출신 특채로 수사관에 뽑힌 인물입니다.”

“하하… 든든하네요.”

백성원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남민지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것뿐이었다.

물론 나를 따라온 정대필은 어찌된 영문이지 모르고 있었다.

“하긴… 대한민국 간판 앵커가 검사님한테 무슨 짓을 하긴 힘들겠죠.”

“그리고 남민지 앵커는 여자입니다. 여자라고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그녀 혼자라면 제가 무슨 일이 당할 리는 없다는 말이죠.”

“요즘 검사님이 무슨 수사를 하고 계시는지는 모르지만, 제가 너무 할 게 없어서요.”

“당분간 지원팀 가 계시는 거 아니었어요?”

“그렇긴 한데. 검사님이랑 일을 하다 보니 다른 검사님들은 너무 시시하네요.”

“하하… 시시하면 좋은 거죠.”

고려 전단이 아닌 중수부에 있던 나를 보좌해 준 다섯 명의 수사팀.

중수부장과 VIP로 인하여 나는 개인 수사를 허락받았지만, 다섯 사람의 거처는 애매모호해 졌다.

놀고 있을 수는 없어 중수부장은 임시로 다섯 명의 거처를 정했고, 나는 그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특히 나를 따라 중앙 지검에서 대검으로 넘어온 정대필 수사관에게는 더 큰 마음이 쓰였다.

“저 때문에 죄송해요, 수사관님.”

“됐어요. 검사님 말대로 시시하면 좋죠. 다칠 일도 없고, 마누라도 집에 일찍 들어온다고 좋아하니까.”

“다음에 진짜 비싼 술 한 번 대접할게요.”

“맨날 말로만 그러고. 도대체 검사님한테 비싼 술은 언제 얻어먹는 겁니까.”

“하하하, 제가 죄인이네요.”

오늘 퇴근길에 몇 개의 서류를 챙겨 퇴근하는 나를 보고 눈치를 챘는지 정대필은 내 차에 올라탔다.

남민지의 집 앞에서 잠복하는 사실을 정대필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는 조건하에 동승했다.

썩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시간과의 싸움인 잠복에서 말벗이 있다는 건 꽤 괜찮은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퇴근.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 집에 들어간 후로는 단 한 번도 집밖을 나오지 않는 점. 제가 봤을 때는 기계가 분명합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특별한 게 없네요.”

“대한민국 간판 앵커 집 앞에 왜 잠복을 하시는지 저에게 알려 주시면 제가 도움이 될지도 모를 텐데요, 검사님.”

“죄송합니다. 정 수사관님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아∼ 됐습니다. 하여튼 철저하다니까 진짜.”

특별한 게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혹시나’하던 생각은 ‘역시나’였다.

그녀의 일주일은 정해진 스케줄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고, 넓디넓은 남민지의 집을 드나드는 사람은 오로지 남민지밖에 없었다.

사실 그녀의 집 앞에서 특별한 무언가를 본다고 해도 딱히 방법은 없었다.

그녀에게 다가가 대화를 걸 수도, 걸 명분도 없으니까 말이다.

“오늘은 그만 갈까요.”

“네. 시간도 이른데 저녁이나 사 주시죠, 검사님.”

“하하! 저녁이라도 비싼 데서 사죠.”

“비싼 술 사신다는 거 이걸로 때우시려는 건 아니죠?”

“우리 정 수사관님이 범인들만 상대하시다보니 속고만 사셨나. 저 약속은 확실히 지킵니다.”

“네에네에.”

그래도 남는 것은 하나 있었다.

정대필 수사관과 사적인 대화를 많이 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조금 더 가까워졌으니까 말이다.

“가죠.”

* * *

[찾았다.]

새벽에 울린 한 통의 문자는 내 몸을 벌떡 일어나게 해 주었다.

백성원이 보낸 단체 문자.

아마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침대에서 일어나 서둘러 옷을 입고 있을 것이다.

“새벽이라 길은 안 막히네요.”

“쓸데없는 말하지 말고 빨리 가지.”

나 역시 재빨리 옷을 입고 차에 올라타 액셀을 밟았다.

내가 지른 고함에 놀라 잠에서 깬 강철호 총장은 아직 짜증이 가시지 않은 듯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죄송하다니까요…….”

“하여튼 집에 괜히 들였어. 한 검사 너도 내 나이 돼보게나. 깜짝깜짝 놀라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 테니.”

뻥 뚫린 길 덕분에 종로에서 강남까지 불과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고, 도착하자 고려 전단 근처에는 낯익은 차들이 몇 개 보였다.

주차될 때마다 매일매일 갈아 끼우는 번호판이지만, 문짝에 보이는 작은 스크래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가시죠, 총장님.”

“그래. 자네가 앞장서게.”

이제는 너무도 익숙한 고려 전단의 입구.

하지만 오늘은 왠지 기분이 달랐다.

“휴…….”

“왜 한숨을 쉬고 그러나?”

길고 긴 클럽과의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그런 기분.

승리가 될지 패배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승패를 가를 수 있는 그런 전투가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닙니다. 들어가시죠.”

* * *

“역시나 원정 출산이 맞았어.”

“그럼 유산이 아니라 태어났다는 말씀이시죠?”

손진철과 이혼 후 3개월간 문제없이 앵커 생활을 하던 남민지는 그 이후 1년간 장기 휴가를 떠났다.

사유는 스트레스로 인한 건강 악화.

핑계를 대기에 너무도 완벽한 상황이었다.

LBC 방송국 역시 캐묻지 않고 그녀에게 장기 휴가를 주었고, 당시 국민들도 이혼한 지 얼마 안 된 여자가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맞아. 임신 기간을 10개월로 잡고, 임신 3개월 후 미국으로 떠났으니까 7개월 후에 출산을 했을 거야. 그리고 5개월간 건강을 회복하고 한국으로 귀국한 거지. 자기 혼자 말이야.”

“애는 어떡하고요?”

“아직 자세히는 모르지만 보모를 둔 것 같아. 앵커로 복귀한 남민지 역시 일 년에 몇 번이나 미국으로 출국한 기록이 있고. 아참, 성별은 아들이야.”

“그럼 지금 남민지의 아들이 미국인이라는 거예요?”

“어. 출생신고 자체를 미국인이 했어. 즉, 남민지의 아들이 아니라 평범한 미국인 부부의 아들로 되어 있다는 소리이지.”

“생김새가 다를 텐데요.”

“방법이야 많아. 미국도 버려진 아이를 키우겠다 말하면 입양할 수 있으니까. 물론 과정이 복잡하긴 하지만 돈 많은 남민지에게는 일도 아니겠지.”

남민지는 왜 그랬을까.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이었을까.

뱃속에 손진철의 아들이 생겼다면, 아니, 애초에 손진철의 아이가 맞기나 할까?

모든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모든 게 거짓인 여자가 한 말을 손진철은 믿었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 뒤에는요?”

“특별한 건 없어. 인종이 다르다는 것 빼고는 미국에서 쭉 학교를 다녔고, 대학을 졸업했으니까.”

[LIAM Castillo]

스크린에 띄워진 이름과 사진.

이름은 영어로 쓰여 있었지만 영락없는 한국인의 얼굴이었다.

“이름은 ‘리암 카스티요’. 하버드 정치학과를 졸업했고 지금은…….”

“지금은?”

그리고 내가 한 추측은 조금 더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국에 들어와 있어.”

“역시… 목적은요?”

“미국 아이비리그에 한인들 모임 같은 게 있나 봐. 그 모임에서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한국으로 들어와 ‘모두’라는 IT 스타트업 기업을 창업했어. 물론 표면상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우리가 어디로 달려가야 할지 목적지가 정해졌다.

그 목적지 끝에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충분히 달려볼 만한 길이 열렸다는 건 고무적이었다.

“좋습니다. 우선 남민지와 리암… 저걸 뭐라고 읽어야 할지.”

“그냥 편하게 카스티요라고 하지.”

“네, 여튼. 남민지와 카스티요에 초점을 두고 수사를 진행하려 하는데 모두 동의하십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수사팀을 살폈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좋습니다. 그럼 우선…….”

* * *

오랜만에 찾은 청와대 안가.

“흠… 그렇단 말이지.”

오랜만에 찾은 만큼 주한호에게 할 보고가 쌓여 있었다. 덕분에 꽤 긴 시간 동안 떠들어 댔어야 했다.

“죄송합니다. 물 한잔만 마시겠습니다.”

“천천히 하게나.”

너무 많이 떠들어 댄 탓에 입이 바싹 마를 정도였다.

하지만 주한호 대통령은 내 얘기를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지 눈도 깜빡거리지 않고 나에게 집중했다.

“남민지 앵커라…….”

“인연이 있으십니까?”

“각별한 건 아니고 대선 후보 시절에 몇 번 봤지. 토론회 때도 봤고. 그런데 그녀가 마스터일지도 모른다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아들일지도 모르는 겁니다.”

“음성변조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오히려 그 점을 이용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 거대한 조직의 수장이 불과 20대 초반의 남자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요.”

내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오로지 보고를 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카스티요.

수사팀은 놈을 남용찬이라 불렀고, 녀석이 마스터인지 아닌지 확인해 볼 몇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리고 지금 그 방법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주한호의 힘이 필요했다.

“행사 하나만 열어 주십시오.”

“어떤 행사?”

“산업부… 아니, 지경부가 주최하는 행사로 현존하는 스타트업 기업의 대표가 전부 참석할 수밖에 없는 행사로요.”

“하하… 열어달라는 게 아니라 ‘내가 잘 생각해서 열어라’처럼 들리네.”

“죄송합니다. 지식경재부가 어떤 행사를 주최하는지 잘 몰라서요.”

수사팀이 생각해 낸 몇 가지 방법 중 가장 원초적이면서 가장 확실한 방법이 하나 있었다.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관리자 회의.

놈이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지만, 몸을 두 개로 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놈은 대한민국에서 스타업을 시작한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물론 스타트업은 한국에 체류할 수 있는 비자와 의심을 피하기 위한 껍데기에 불과했지만…….

그러나 아무리 껍데기라고 해도 꽤 규모가 있는 스타트업 회사였다.

보통 스타트업 회사는 투자 규모로 가능성을 판단하는데, 남용찬이 만든 회사는 벤처캐피탈에서 최고 등급을 받았고, 투자 규모는 무려 300억 원이 넘었다.

즉, 그저 목적을 위한 껍데기일 뿐이지만, 내용물까지 완벽하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몇 명이 같이 창업을 하긴 했다. 하나 대표는 남용찬 한 명이었고, 파악한 바로는 회사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 대부분이 남용찬의 머리에서 나왔다.

학벌에 맞게 능력도 뛰어나다는 소리이다.

주변의 도움 역시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남민지 앵커의 아들이라는 걸 아무도 모르고 있을 테니.

“일단 알겠네. 지경부 장관 불러서 얘기해 보지.”

“그리고… 아시다시피.”

“하하! 그래그래. 보안 유지하라고. 이제 보니 내가 보고를 받는 게 아니라 자네가 보고를 받아야겠구먼.”

“죄송합니다…….”

“비꼬는 건 아니고 그저 확실히 하라는 걸세. 나도 자네만 믿고 움직이는 거니까.”

“네, 알겠습니다, 대통령님.”

관리자 회의는 1년에 네 번, 정기 회의가 정해져 있었고, 마스터의 호출에 의해 갑작스레 열리기도 한다.

즉, 정기 회의 날짜에 지경부가 행사를 연다면, 남용찬이 마스터인지 아닌지 확인해 볼 수 있다는 뜻이다.

회의장에 나타나지 않거나, 아니면 정기 회의 날짜가 바뀐다면 우리가 생각한 방법은 통했다는 뜻이었다.

그만큼 남용찬이 마스터일 확률이 매우 높아지는 걸 테니.

물론 100프로 확신할 수는 없다.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는 방법을 쓸 수도 있으니까.

얼마든지 그럴 능력이 있는 놈이기도 했다.

“그래 지경부 장관이랑 독대 후 다시 연락하지.”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대통령님.”

아침 일찍 찾은 안가였지만, 꽤 긴 시간을 보낸 탓에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오늘 따라 달이 밝네.”

지금 부릴 수 있는 여유라고는 눈이 부시도록 밝은 달을 바라보는 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을 준비하려 또다시 차에 올라탔다.

“바쁘다 바빠.”

* * *

지식경재부 주최.

중소기업 상생 협력을 위한 행사.

주목받는 신생 기업들과 수출 우수 기업. 그리고 국민들의 신뢰를 받고 있는 몇 개의 대기업까지.

대통령이 직접 선정하고 장관이 직접 연락해 몇 명을 행사장으로 초대했다.

“일 한 번 확실히 하시네, 우리 대통령님.”

주한호 대통령은 마음에 드느냐고 비꼬듯 나에게 초대장 사본을 보냈고, 초대장을 받아든 나는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과의 오찬.]

대한민국 5,000만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자필로 작성한 초대장을 누가 찢어 버릴 수 있겠는가.

재벌은 영원하지만, 권력은 영원하지 않다?

아니, 5년의 유효기간을 가진 권력이라고는 하지만, 그 5년 동안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5년간 영원할 것 같은 재벌을 무너뜨릴 수 있으니까 말이다.

아마 초대장을 받은 모든 회장단과 대표들은 다리가 부러진다 해도 휠체어를 타고 행사장으로 향하겠지.

한 사람을 위한 거짓 행사이긴 하지만, 중요한 건 그 한 사람 역시 참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껍데기이고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발생할 기대 수익이 높지 않다고는 해도 참석하지 않는 순간 주목을 받게 될 게 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남용찬이 마스터라면 주목을 받는 건 결코 원치 않을 것이다.

“오셨습니까, 한 치우 검사님.”

“네, 오랜만입니다.”

정기 회의가 열리는 오늘.

나는 시간에 맞추어 관리자 회의가 열리는 부띠크 호텔에 도착했다.

아직 별다른 공지는 없었지만, 아직은 알 수 없었다.

행사가 열린다는 소식은 진즉에 발표했지만, 초대장을 보낸 건 불과 이틀 전이었으니까 말이다.

초대장을 보내는 텀을 가능한 최대한 줄였다.

어떤 꾀를 낼지 모르지만, 최대한 시간을 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우선 스캔 먼저 하겠습니다.”

“네.”

회의에 참석하는 관리자들에게는 몇 가지 규칙이 적용된다.

무기를 소지하는 건 물론이고, 어떠한 전자 기기도 들고 들어갈 수 없다는 규칙.

정기 회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참석해야 한다는 규칙.

그리고 회의에 참석하는 날은 클럽이 제공한 차를 타고, 부띠크 호텔로 와야 한다는 규칙까지.

마지막 규칙은 어째서 정해 놓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보안상의 이유일 확률이 높다.

“스캔 완료됐습니다. 올라가시죠.”

지하 주차장에서 지키고 있던 남영진의 몸수색을 받고 나서야 엘리베이터에 오를 수 있었다.

굳이 버튼을 누를 필요는 없다.

내가 올라타는 순간, 통제실에서 알아서 엘리베이터를 옥상으로 움직여 주니까.

관리자의 음성과 내부를 담고 싶어 몇 번이나 시도해 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내 몸을 수색하는 건 남영진이 들고 있는 금속 탐지기뿐만 아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통과해야 하는 대형 스캐너와 태어나 처음 보는 몇 개의 기계를 거쳐야 했으니까 말이다.

복잡한 관문을 거치고 회의실로 들어가자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던 세 사람이 보였다.

한탁희와는 가벼운 눈인사를 했고, 김주상과 정종진은 헛기침을 하며 불편한 감정을 전해 왔다.

“휴…….”

뭐가 됐든.

인사를 마친 나는 긴장된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고, 마스터란 놈의 얼굴이 떠오를 홀로그램 기계에 시선을 고정했다.

행사는 관리자 회의와 같은 시간에 잡았고, 통신 수단이 없어 행사장에 남용찬이 나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즉, 내가 남용찬의 행방을 확인할 수 있는 건 저 작은 홀로그램 기계 하나뿐이라는 소리다.

덜덜—

테이블에 가려 보이지는 않겠지만, 손과 발은 떨려오고 머릿속은 복잡했다.

내 떨림이 테이블을 타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을까 손으로 떨리는 다리를 붙잡았다.

하얀 벽으로 마스터가 나타날 경우의 시나리오와 나타나지 않았을 경우의 시나리오를 동시에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마스터가 오늘은 조금 늦으시나 보네요.”

“크흠… 그러게요.”

벽면에 걸린 작은 디지털시계는 6시 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늦지 않던 놈이기에 내 머릿속 두 개의 시나리오 중 하나의 시나리오를 선택하려는 그때, 홀로그램은 메시지를 표시했다.

[오늘 회의는…….]

* * *

경기도 판교.

2012년 이곳 판교에는 많은 IT 기업들의 입주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주목받는 기업은 남용찬이 설립한 ‘모두’라는 기업이었다.

[오늘 회의는 마스터의 건강 문제로 취소되었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문구에 세 명의 관리자들은 당황했지만, 나는 입꼬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홀로그램 속에 나타난 문구의 진실을 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비에서 반납한 내 휴대폰에는 대통령과의 오찬 속,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남용찬의 사진이 전송되어 있을 것이다.

* * *

“여기인가.”

[MODU]

복잡한 테크노밸리 단지 속, 모두라는 간판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자신들이 가장 주목받는 기업이란 걸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수많은 건물 가운데에서도 가장 독특하게 지어놨기 때문이다.

네모반듯한 건물이 아닌, 마치 커다란 축구공처럼 생긴 건물을 말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PC 시장에서 모바일 시장으로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상태였고, 대한민국 모든 기업들이 모바일 플랫폼으로 변환을 준비하고 있는 상태였다.

남들보다 먼저 하거나, 아니면 남들이 하지 않는 걸 하거나.

회사를 창업할 때 남용찬이 내건 슬로건답게 남들보다 한발 앞서 모바일 오픈 마켓인 ‘모두’를 창업했다.

잠정 기업 가치는 이미 10조 원이 넘었고,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모두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뭐가 아쉬웠을까… 아니면 이렇게 잘될 줄 몰랐나?’

‘모두’ 본사 앞에 주차를 마친 나는 건물을 바라보며 푸념했다.

‘잠깐만… 그런데 왜 내 기억 속에는 ‘모두’라는 단어가 없는 거지?‘

미래를 알고 있는 지금, 씨를 뿌려 몇 년 후 꽃을 피우는 기업들을 알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화려하고 거대한 꽃을 피우는 기업을 말이다.

하나 내 기억 속에 모두라는 기업은 없었다.

물론 모바일 쇼핑몰, 오픈 마켓, 소셜 커머스를 기반으로 한 유명 기업들은 있지만, ‘모두’가 내 기억에 없다는 소리다.

지금의 상태가 쭉 유지된다면 업계 1위는 단연 모두가 될 터인데 말이다.

‘설마…….’

내가 과거로 돌아와 한 어떤 행동 때문에 과거가 바뀐 걸까?

훌륭한 경영진들과 튼튼한 재무구조, 끝도 없이 쏟아지는 투자 의뢰, 거기에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시장까지.

지금 시장 규모를 ‘모두’라는 한 기업이 전부 커버할 수는 없었고, 수많은 기업들이 생겨날 터.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모두’를 따라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알고 있는 미래에는 모두가 없어.’

이전에 의심한 대로 정말 남용찬이 회귀자일지도 모른다.

제발 그것만큼은 아니길 바라며 걸음을 옮겼다.

결국 모든 정답은 이 건물 속, 남용찬에게 있을 것이니.

‘휴… 일단 가 보자.’

길게 호흡을 하고 입구에 있는 보안 요원 앞에 섰다.

“카스티요 대표님 좀 만나 뵈러 왔습니다.”

“약속은 잡으셨나요?”

“네. 대검찰청 중수부 한치우 검사라고 하시면 아실 겁니다.”

“잠시만요.”

입구에서 나를 가로막던 보안 요원이 이내 데스크로 향해 전화기를 들었다.

남용찬을 만나기 위해 아주 그럴싸한 약속을 하나 만들었다.

대통령과 오찬 자리에서 주한호는 남용찬에게 중수부가 맡고 있는 몇 개의 사건들을 도와달라 말했고, 남용찬은 흔쾌히 수락했다.

뭐… 정말 ‘흔쾌히’인지는 잘 모르겠다. 대통령이 면전에 대놓고 부탁하는 데 거부할 수 없었을 테니까.

한 IT 기업의 세금 포탈 사건.

금액만 1,000억 원이 넘었으며 수많은 정계 인사들이 얽혀 있는 사건이었다.

아직 언론에는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인지 수사를 통해 중수부가 사건을 맡게 되었고, 연구관인 내가 움직이는 건 그리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를테면 협조를 약속받은 남용찬을 찾아가는 일 같은 게 말이다.

물론 남용찬은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을 것이다.

내가 자신을 표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걸.

다만, 이제 숨길 필요는 없었다.

“아! 네.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검사님.”

“네, 고마워요.”

이제부터는 정면 승부가 될 테니까.

띵—

멈추어선 엘리베이터.

내가 지금 만나러 가는 건 참고인이 아니다.

범인이지.

하지만 손에서는 땀이 흐르는 탓에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 폈다.

수도 없이 많은 범인을 만나러 다녔지만, 단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말이다.

“얼마나 대단한지 낯짝이나 한 번 보자고.”

지금껏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과 수도 없이 많은 노력을 하며 달려왔다.

그리고 끝도 없이 달려온 끝에 우리는 드디어 전쟁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주 거칠고 잔인한 싸움이 벌어질 전쟁터에.

“한치우 검사라고 합니다. 카스티요 대표님 뵈러 왔습니다.”

“로비에서 연락받았습니다. 안에서 기다리시겠어요? 대표님은 회의에 들어가 계셔서요.”

“네, 알겠습니다.”

IT 단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넓은 대표이사실.

선반에는 액자들이 있었고, 책상에는 카스티요라 적혀 있는 명패가 자리 잡고 있었다.

친구들과 찍은 사진, 그리고 자신과 피부색이 다른 가족들과 찍은 사진.

사진 속 남용찬은 행복해 보였다.

표정이 진실일지는 모르겠다. 아니, 사진 자체가 거짓일 수도 있었다.

“깔끔하네.”

방안을 전부 파악하고 싶었지만, 언제 남용찬이 저 문을 열고 들어올지 몰라 휴대폰을 들고 방안을 촬영했다.

한 사람의 방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이 보인다고 했던가?

나는 그 성격을 파악할 수 없었지만, 사진이 전송되는 고려 전단에서는 충분히 파악 가능할 것이다.

남용찬의 모든 것을 파악해 놓아야 했다.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도 말이다.

잠깐이지만 사무실을 둘러본 내가 판단하기엔 남용찬은 매우 깔끔했다.

검은 소파에는 먼지 한 톨 없었고, IT 단지가 보이는 창문에는 자국하나 없이 깨끗했으니까.

— 안에 계시다고?

— 네, 대표님.

— 알았어요. 차 좀 준비해 주세요.

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

평소 같았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겠지만, 자신이 들어간다는 걸 나에게 알리려고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죄송합니다. 회의가 있어서요. 한치우 검사님 맞으시죠?”

“네, 안녕하세요. 중수부 한치우 연구관이라고 합니다. 사건 때문에 몇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네. 일단 앉으시죠.”

남용찬은 소파를 향해 두 손을 공손히 모아 가리켰고, 나는 녀석이 가리킨 자리에 조심히 앉았다.

“행사에서 대통령님께 대충 얘기 들었습니다. 저에게 협조를 해 달라고요?”

“네, 맞습니다.”

사진이 아닌 실물로 마주친 남용찬.

그가 입은 검은 슈트 역시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고, 머리는 왁스를 발라 깔끔하게 넘겨져 있었다.

은은하게 풍기는 향수 냄새 역시 그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어 주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모두 정답일 것 같은 스마트한 이미지.

딱 그런 이미지를 대입한다면 남용찬이 떠오를 것이다.

“카스티요 대표님은 짐톡이란 기업의 제이슨 킴 대표님을 알고 계신가요?”

“네. 잘 알고 있죠.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젊은 창업자 모임이 있었는데 거기 멤버였습니다.”

“친하셨나요?”

“친한 건 아니었고, 몇 번 얘기를 나눈 적은 있습니다. 그분 역시 한국에 창업하는 걸 목표로 하고 계셨으니까요.”

“그렇군요…….”

남용찬과 대화를 나눠봤지만 정작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지금껏 들어온 홀로그램 속 마스터란 놈의 목소리.

지금 내 앞에 있는 남용찬과 비교해 봤지만,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제이슨 킴 대표님의…….”

지인이던 IT 기업 대표의 이름을 대고 협조를 해 달라 찾아온 핑계.

그건 효과가 있어 남용찬과 제법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노트북까지 뒤져가며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남용찬은 알고 있을까?

나에게 중요한 건 세금을 횡령한 IT 기업도, 대표의 행방도 아니다.

남용찬을 마스터라 확정 지을 수 있는 증거.

완벽한 녀석이 실수를 할 리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감.

이 두 가지를 원했지만 소용없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제가 알려 드릴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네요.”

“아… 예. 일단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다음에 또 찾아 뵈도 될까요?”

“네. 미리 약속만 해 주신다면 언제든지 협조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수첩에 받아 적은 남용찬의 말.

중수부로 건넨다면 값진 증거가 되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시덥잖은 내용이었다.

물론 첫 만남부터 남용찬과 불꽃 튀는 대화를 나누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명분도 없었고, 남용찬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 맞다. 대표님 혹시 그거 아십니까?”

“네?”

다만, 나는 이미 칼을 뽑아 들었고, 뽑아든 칼을 다시 칼집에 넣을 생각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냥 돌아가기도 어색하다고 생각했고, 선전포고쯤은 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앞으로 대표님과 자주 뵐 거 같네요.”

“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언제든지 협조…….”

“아니요. 꼭 제이슨 킴 사건이 아니라 해도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피식—

밖으로 항햐는 길.

나는 문고리를 잡고 옅은 미소를 보였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남용찬은 내가 미소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미 뵙고 있을 수도 있고요.”

* * *

고려 전단으로 서둘러 돌아온 나는 남용찬과의 만남을 수사팀에게 전부 고했다.

“일단 녹음 파일부터 들어 보시죠.”

남용찬과의 대화가 들어 있는 스마트폰 역시 스피커를 통해 모두가 들을 수 있었고, 백성원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남용찬의 목소리를 국정원 서버에 업로드했다.

“목소리가 국정원 서버에 업로드되는 순간, 국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통화 내용에 남용찬 목소리를 특정할 수 있다고 전에 말하셨죠?”

“맞아. 대한민국에 세워져 있는 송신탑으로 전파되는 모든 통화 내용에서 남용찬의 목소리를 특정할 수 있지. 그리고 우리가 그걸 들을 수 있고.”

“제발 증거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잘되겠지. 그걸 위해 자네가 직접 찾아간 거 아닌가.”

“물론 맞습니다만… 남용찬은 그리 호락호락한 녀석이 아닙니다. 이미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 갔다는 걸 충분히 알고, 마땅한 대응책을 세워 놨을지도 모릅니다.”

녀석은 결코 만만한 놈이 아니다.

내 몸을 뒤질 명분이 없었기에 그러지 못한 것일 뿐, 녹취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눈치챘을 테다.

“혹시 모르니 일단 업로드 후에 계속 도청해 보겠네.”

“네, 알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계획은 뭔가?”

“일단 거대한 그물을 치고 점점 좁혀 나가야죠.”

거대한 사냥감을 잡으려면 그만큼 큰 그물이 필요하다.

수사 역시 사냥과 다르지 않다.

지금 내가 잡으려는 것은 너무나도 큰 사냥감이었고, 어마어마한 크기의 그물이 필요할 것이다.

그를 지키고 있는 걸림돌 역시 모조리 잡아야 하는 문제도 있었다.

남민지와 김주상, 그리고 정종진과 수많은 클럽원들까지.

모두가 내 그물 안에 들어가야 할 것들이다.

“우선… 그물부터 확실히 점검해야겠습니다.”

“어떻게?”

찢어진 곳은 없는지, 혹은 모두를 담을 수 있을 만큼 튼튼한 그물인지 알아봐야 했다.

“일단 어디서부터 그물을 칠지 알아보죠.”

* * *

끝과 끝.

그물을 칠 두 곳을 정한 뒤 서서히 좁혀 가 클럽을 그물에 담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는 두 곳 중 한쪽의 끝이 바로 남민지 앵커라 생각했다.

“안녕하십니까, 남민지 앵커님.”

“누, 누구시죠?”

매일 같이 집과 회사를 움직이는 길을 운전해 주던 수행 비서.

그리고 덩치가 산만한 매니저 겸 경호원.

남민지에게 이 두 사람이 없는 시간을 아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난 몇 주간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으니까 말이다.

“대검 중수부 한치우라고 합니다.”

“잠깐만 한치우라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시청률이 높은 뉴스의 앵커.

그런 그녀에게 있어 나는 꽤 익숙한 인물이었다.

“아∼ 그 방산 비리 사건 해결하신 검사님이시구나.”

남민지 앵커의 저택 앞.

가로등 불빛 아래에 잘 보이지 않던, 내 모습을 요리조리 살핀 남민지가 말했다.

나 역시 중앙 지검 시절부터 언론과의 인터뷰를 꽤 자주해 왔고, 남민지와 직접적으로 인터뷰를 한 적은 없지만 방송국에서 오다가다 만난 적이 있었다.

물론 그때는 클럽이란 곳도, 남민지가 클럽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저를 만나러 오신 거 맞죠?”

주변을 살피며 말하는 남민지.

내 정체를 알고 나자 그녀는 가방을 꽉 쥐고 있던 손의 힘을 풀었고, 경계심 역시 풀린 듯 꽤 편한 자세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 맞습니다.”

물론 나는 그녀에게 해코지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지금 내 앞에서 보이는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전부 의심하고 믿지 않을 것이다.

“잠시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급한 일인가요? 지금 시간이…….”

“네. 급한 일입니다.”

“흠… 그래요. 일단 들어와요.”

넓은 저택 문을 열고 앞장서는 남민지.

예순에 가까운 나이었지만, 포털 사이트에 그녀의 나이가 검색되지 않는다면 40대 중반으로 말해도 될 정도로 젊어 보였다.

물론, 완전히 타고난 것은 아니었다.

부자연스러운 눈, 코, 입과 주사를 통해 핀 주름은, 지나간 세월이 얼굴에 자연스레 묻어나야 하는 인상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들어오시죠. 요 며칠 바빠서 그리 깨끗하지는 않네요.”

“괜찮습니다.”

그녀는 더럽다 말했지만, 내가 본 남민지의 집은 더럽지 않았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넓은 집을 더럽히려면 아무리 그녀가 청소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불가능할 것이다.

집안의 물건을 전부 뒤집어엎어도 티가 나지 않을 만큼 넓은 집이었으니까 말이다.

“차라도 한잔 드릴까요?”

“네. 아무거나 부탁드립니다.”

주방에서는 커피포트가 끓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티가 나지 않게 집안을 살폈다.

혹시나 남용찬의 사진이 나올까 기대했지만, 집안에 있는 사진이라고는 넓게 걸린 그녀의 사진들뿐이었다.

트로피를 안고 있는 사진과 유명 화가가 그려준 초상화.

남민지의 집은 성공한 커리어 우먼 집의 표본 같았다.

‘아∼ 그 방산 비리 사건 해결하신 검사님이시구나.’

그녀의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해 맴돌았다.

어둠속에서 들리는 남성의 음성에 당황하는 건 여성이라면 당연한 반응이었고, 내 정체를 알고 나서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첫마디는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녀가 앵커라는 사실과 내가 검사라는 사실에서 나올 수 있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첫마디였단 말이다.

그렇기에 나를 자신의 집안으로 들인 것이고.

또한 그녀는 방문 목적을 묻기보다 차를 먼저 끓이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클럽의 마스터와 연관이 있다면 조금 다른 말이 나왔을 것이다.

예를 들면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에요?’ 같은 그런 말이.

‘후… 헷갈리네.’

혼자 소설을 쓰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지만, 남용찬, 즉 카스티요가 그녀의 아들이란 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지금 클럽의 마스터는 두 사람 중 한 명일 확률이 너무나도 높았다.

그리고 그 모든 사실은 오직 나와 수사팀만이 알고 있었다.

“늦었고 하니. 홍차로 준비했는데 괜찮죠?”

“네, 괜찮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들고 자리에 앉는 남민지.

“쓰읍…….”

그녀는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내 입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몇 가지 질문을 드리려 찾아왔습니다.”

“호호, 궁금하네요. 대한민국 최고의 검사님이 저에게 묻고 싶은 게 뭔지. 혹시 적어야 하나요?”

“아니요. 적는 건 앵커님이 아니라 저일 것 같네요.”

내가 남민지를 찾은 목적은 오직 하나. 그물을 칠 끝과 끝 두 군데 중에 한 곳이 남민지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말뚝을 확실히 박아 놓고, 남민지 역시 단단히 묶어 놔야 했다.

자신이 잡혀 있다는 사실을 떠들어 대 중간에 있는 사냥감들이 달아나면 안 되니까.

“흠… 뭘 물어보려고 이렇게 분위기를 잡으실까.”

“앵커님을 만나러 오기 전 손진철 전 대통령님을 만나 뵙고 왔습니다.”

“네?!”

나에게서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이름.

그 이름이 듣기 싫은지 아니면 그리운지는 모르겠지만, 남민지는 많이 놀란 듯 보였다.

“두 분이 이혼하셨다는 사실은 전국민이 다 알고 있으니 됐고, 제가 궁금한 건…….”

“자, 잠깐만요! 한 검사,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앵커님께 몇 가지를 여쭙고 싶어서 왔다고.”

“그게 아니라 지금 내 앞에서 전 남편 이름을 꺼내는 이유가 뭐냐고요!”

“저희가 지금 진행 중인 수사에 필요하니까요.”

“무슨 수사를 하길래 저와 제 전남편이 연관되어 있는 거죠? 그리고 그런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제가 모르는 게 말이 되나요?”

남민지의 집을 찾아오기 전.

수사팀들과 꽤 긴 회의를 했고, 우리가 내린 결론은 남민지를 떠보는 게 아니라 확실하게 잡는 것이었다.

두 명의 용의자.

남민지와 남용찬 중 어떤 사람이 마스터인 줄도 모르고, 혹은 두 사람이 모두 마스터일 가능성도 있다.

남민지는 남용찬을 버린 게 아니라 숨긴 것이니까.

결국 우리는 두 사람과 싸워야 한다는 소리다.

두 사람 모두를 잡을 수는 없겠지만, 한 사람은 확실히 잡아놔야 했다.

물론 쉽지는 않을 테다.

“수사 내용을 외부에 유출할 수는 없습니다.”

“진짜 어이가 없네. 지금 나한테 물으러 왔다면서 무슨 사건인지는 얘기를 못 하겠다는 거예요?”

“네, 맞습니다.”

“내가 검사님 질문에 성실히 답을 해야 할 의무가 있어요?”

“그건 아닙니다. 대한민국에 모든 피의자들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니까요.”

“지, 지금 나보고 피의자라고 한 거예요?”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수사를 진행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죠.”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재정신이 아니었네.”

쓰윽—

남민지는 나와 더 이상 마주 앉아 있기 싫은 듯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당장 나가요. 문제 일으키기 전에.”

현관문을 활짝 열고 말하는 남민지.

하지만 나는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았고, 그녀가 열어준 현관문으로 나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직 제 질문과 앵커님이 하셔야 할 답변이 끝나지 않은 것 같은데요.”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어요. 그리고 제가 답을 해야 할 의무도 없는 걸로 아는데요.”

검사가 범인을 소환하는 게 아니라 직접 찾아올 때는 몇 가지 준비 과정이 있다.

특히나 남민지처럼 사회적 위치가 높은 사람을 찾을 때는 더더욱.

준비 없이 찾아갔다가 문전 박대를 당하는 건 물론이고, 그녀의 전화 한 통으로 겪게 될 보복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기 때문이다.

독립관청?

‘깡’이라는 단어를 가지지 못한 검사들이 과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한을 제대로 쓸 수 있을까?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국가행정 조직 중 하나인 법무부, 그리고 법무부의 외청인 검찰청.

독립성을 철저히 지킨다고는 하나, 결국 검찰도 정부 조직 중 하나이다.

그리고 검사는 검찰에 소속된 공무원이고.

즉, 더 위에서 내려오는 외압에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는 소리이다.

“일단 앉으시죠. 전 남편 분 얘기가 듣기 거북하시면 아드님 얘기 먼저 물을 테니.”

“뭐……?”

하지만 내 손에 무기가 들려 있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밝혀져서는 안 될 의혹.

혹은 이미 밝혀진 의혹을 뒷받침해 줄 만한 증거.

이 모든 것들을 재판대에 올릴 수 있는 검사만이 가진 기소권.

굳이 내 손에 체포 영장이 없다고 하더라도 범인을 묶어 둘 수 있었다.

특히나 사회적 위치가 높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강하게 묶을 수 있다는 말이다.

“…지금 뭐라 그랬어요?”

“전 남편에게 유산이라 말하고, 미국의 한 가정에 거짓 입양을 한 앵커님의 아드님에 대해 여쭙겠다고 했습니다.”

“너 뭐야… 그걸 어떻게 알았어?”

“흠… 제가 예상한 반응이랑은 조금 다르네요.”

물론 보통의 경우라면 지금 남민지 앵커의 반응이 맞을 것이다.

하나 그녀가 마스터이거나 혹은 자신의 아들이 클럽의 마스터라는 걸 알고 있었다면 지금 남민지의 반응은 조금 이상했다.

“아까부터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아무리 연기가 뛰어난 사람이라도 속일 수 없는 몇 가지가 있다.

예를 들면 흔들리는 눈빛.

뭐… 연기에 익숙하고 연기력이 뛰어나다면 흔들리는 눈빛 정도야 고정시킬 수 있다.

하지만 감정과 표정을 동시에 연기하다 보면 반드시 어색한 부분이 생긴다.

특히 검사의 눈으로 본다면 반드시 그 어색한 부분을 찾아낼 수 있다.

“클럽.”

“뭐?”

“당신이 마스터입니까? 아니면 당신의 아들이 마스터입니까?”

하지만 그녀가 지금 내비치는 감정과 표정에서는 도저히 어색한 부분이 없었다.

그렇기에 나 역시 더 이상 그녀를 떠보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검은 이미 뽑아든 상태였고, 지금은 휘둘러야 할 타이밍이었다.

“…….”

내 말에 고개를 숙이는 남민지.

이제야 내가 예상한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대답을 못 하시는 걸 보니 알고 계신가 보군요. 아니면 본인이 마스터이거나.”

활짝 열려 있던 현관문은 닫혔고, 그녀는 다시 나와 마주 앉았다.

그리고 아까완 달리 손톱을 뜯기 시작했다.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기도 했다.

긴장.

굳이 검사가 아니라 해도 그녀가 긴장하고 있다는 걸 모두가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나가요. 제가 다시 연락드릴 테니.”

“그럴 수 있나요. 이미 칼을 뽑아 들었는데.”

“제발요…….”

문제는 긴장뿐만 아니라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불안해하고 있는 걸까.

내가 아들의 존재를 알고 있어서?

아니면 클럽이라는 조직이 나 하나 때문에 무너질 것 같아서?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고작 내 한마디에 불안에 떨 인물이 아니란 말이다.

“말씀하세요.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걸.”

“…….”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불안해했고, 입으로 가져간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게…….”

그리고 그녀에 입에서 나온 말은 충격적이다 못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놀라웠다.

“저와 아들은 클럽의 마스터가 아니라 클럽으로부터 철저히 이용당한 겁니다… 아니, 이용당하고 있는 겁니다…….”

* * *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자세히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그럴 의무도 없고요.”

몇 번이고 그녀를 설득해 봤지만 소용없었고, 결국 그녀의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가방 속에 가득 담아 온 많은 서류들 역시 쓸모가 없어졌다.

그녀가 나에게 한 말은 수사팀과 몇날 며칠을 고심하여 작성한 시나리오에 없던 말이니까.

만약 나를 내쫓기 위한 작전이라면 그녀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쉽사리 포기한 것은 아니다.

소파에 붙힌 엉덩이를 붙인 채 그녀의 입을 열어 보려 했지만, 그녀가 나에게 건넨 말은 나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기 충분했다.

‘일주일 뒤에 제가 검사님을 찾아뵙겠습니다. 그때까지 저와 제 아들을 보호할 방법을 찾아 주세요.’

‘보호라니요?’

‘클럽에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란 말입니다. 아니면 클럽을 완벽히 무너트릴 수 있는 힘을 갖추던가요. 그럼 검사님께 모든 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복잡한 건 올림픽대로 뿐만이 아니었다.

“이용당하고 있다고?”

그녀의 말을 완벽히 신뢰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확인해 볼 필요는 있었다.

확인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을 테다.

만약 지금 그녀가 나에게 연막을 치고 있는 거라면 오히려 더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이미 그녀는 클럽이란 곳의 존재를 알고 있다 말했으며, 마스터란 존재 역시 알고 있다 말했다.

즉, 어려운 확인 과정을 거쳐 그녀의 말이 거짓이라 판명되는 순간, 남민지와 남민지의 아들이 마스터라 확정지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의 말이 사실일 경우다.

무슨 이용을 당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두 사람이 마스터란 놈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거라면 어렵게 특정한 남민지와 남용찬은 마스터가 아니란 말이 되는 것이고, 뒤에 숨어 조정하는 마스터를 새롭게 특정해야 되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클럽을 무너트릴 힘을 가진다는 조건하에 남민지는 나에게 모든 것을 말한다고 했다.

하나 그녀가 마스터란 놈의 존재를 알고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거의 다 푼 매듭인 줄 알았는데 더 꼬여 버린 것 같네…….”

자신의 존재를 감춘 채 두 사람을 조종하고 있을 확률이 높으니까 말이다.

두 사람이 조종당하고 있는 이유는 빤했다.

마스터란 놈이 가지고 있는 무언가.

그 무언가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남민지를 조종하는 리모컨일 것이다.

지금 내가 김주상과 정종진을 조종하고 있듯이 말이다.

“그럼 남민지 앵커가 마스터한테 무언가 약점을 잡혔다는 소리인데…….”

나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었고, 차량은 어느새 종로에 도착했다.

끼익—

이제는 우리 집보다 더 익숙한 강철호가 살고 있는 집 주차장에 차량을 세웠다.

“일단 말씀드려 보자.”

혼자보다는 두 사람의 머리를 맞대는 게 더 나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하물며 나와 머리를 맞댈 한 사람이 산전수전 다 겪은 검찰총장 출신이라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올 건 자명했다.

삑삑—

“저예요.”

— 비밀번호 알면서 왜 초인종을 누르고 그래.

“손이 없어서요.”

한 손에는 서류 가방이 다른 한 손에는 노트북을 들고 있는 탓에 머리로 누른 초인종.

“이게 다 뭐야.”

얼마 지나지 않아 강철호 총장이 문을 열고 나왔다.

“남민지 앵커 집 압수 수색이라도 해 온 거야?”

“그게 아니라 준비한 서류들을 전부 바꿔야 될 것 같아서요.”

직장인이라면 누구든 공감할 만한 것이 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낸 만큼 차량에 서류들이 쌓인다는 걸.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내 차량에는 클럽에 관한 모든 서류들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남민지의 한마디의 말로 인해 모든 서류들의 재검토가 필요했기에 낑낑대며 무거운 서류 더미를 집으로 들고온 것이다.

“전부 바꿔야 되다니?”

“그게…….”

나는 강철호 총장에게 남민지 앵커의 말을 그대로 전했고, 그 역시 꽤 충격적인 듯 입이 벌어졌다.

“흐음…….”

“그녀의 말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지만, 거짓 같지는 않습니다.”

“무슨 근거로?”

“근거를 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을 취조해 본 검사로서의 견해라고 봐 주십시오.”

“그럼 거짓이 아니란 얘기인데…….”

근거를 댈 수 없었지만, 강철호 총장은 언제나 그렇듯 나를 믿어 주었다.

“거참 복잡하네…….”

“지금 저희에게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남민지의 말대로 움직이든가, 아니면 남민지를 철저히 무시하고 저희 계획대로 가든가.”

“자네 생각은?”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남민지 앵커의 말을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지.”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휴… 잠깐만. 커피 좀 한잔 타 오겠네.”

널브러진 서류들 속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우리 두 사람.

“아닙니다. 제가 타 오겠습니다.”

복잡한 머릿속과 어지럽게 널려 있는 서류들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잠을 이루지 못할 걸 잘 알고 있었다.

“우선 이용당하고 있다는 말을 했지만, 자신을 이용하는 사람이 누군지를 말하지 않았다는 거지? 무슨 약점이 잡혔는지도 말하지 않았고?”

“네. 일주일 뒤에 자신을 완벽히 보호해 줄 조건하에 말해 주겠다고 합니다. 아니면 클럽을 완벽히 무너트릴 계획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하… 뭘 알아야 보호를 해 주든가 말든가 하지.”

“그러게 말입니다.”

예상한 대로 이렇다 할 해결책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먼저 말해 주면 보호해 주는 조건으로 설득하는 건?”

“아마 소용없을 겁니다.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먼저 입을 열지는 않을 것 같아요. 강제로 입을 열게 할 방법도 없고요.”

“흠… 아니면 사건이 해결되기 전까지 안전한 곳에 유치시켜 놓는 건? 예를 들면 고려 전단 같은 곳에 말일세.”

“남민지는 대한민국 간판 앵커이고, 그녀의 아들은 대한민국 모든 기업의 주목을 받고 있는 기업의 대표입니다. 갑자기 행적을 감추면 분명 시끄러워질 게 빤합니다.”

“어렵다 어려워. 그럼…….”

해결책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집중력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동이 트고 새벽닭이 우는 소리가 귀에 들려 왔다.

하지만 정답을 찾기 전까지는 잠들 수 없는 우리는 계속해서 머리를 맞대고 대화를 이어 갔다.

“아니면…….”

“아니면?”

“그냥 터트리는 게 어떨까요?”

“언론을 이용하자는 소리인가?”

“네. 클럽의 힘이 아무리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결국 언론의 보호막을 뚫을 수는 없을 겁니다.”

힘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클럽에 속해 있고 남민지와 남용찬이 사회적 지휘가 높다고는 하지만 매장시키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만, 언론의 보호를 받는 순간 얘기는 달라진다.

두 사람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언론은 관련자들에게 책임을 묻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스터 역시 쉽게 움직이지 못할 것이고,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쉽사리 나서지도 않을 것이다.

다들 콧대가 높은 양반들 아닌가.

아무리 마스터의 명령이 절대적이라고는 하나 자신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아직 시기상조가 아닌가 걱정되네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저는 공식적으로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마스터란 놈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제 움직임을 눈치채고 있을 겁니다.”

즉, 이미 나는 선전포고를 한 상태였다.

하지만 여론에 터트리지 않은 이유는 아직 확실한 물증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상대하는 곳은 대한민국 고위 정재계 인사들이 모여 마스터란 한 놈을 위해서 움직이는 조직이었다.

아무리 내가 스타 검사라고는 해도 물증 없이 여론에 터트리는 것은 위험하다는 뜻이다.

스타 검사라는 타이틀과 최연소 대검 중수부 연구관이라는 직위를 단 한 번에 잃어버릴 수 있으니까.

여론 조작과 나에 대한 외압 정도는 손가락 하나 까닥거리면 가능한 놈이 바로 마스터였다.

어떤 조작과 외압에도 버틸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우선 저희가 확보한 증거들을 여론에 발표할 겁니다. 그리고 주한호 대통령님께 말씀드려 재판부를 구성해야 합니다.”

“재판부는 왜?”

“가장 확실한 증거는 부띠크 호텔과 백숙집이며, 여론에 발표하기 이전에 두 곳을 압수 수색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될 테니까요.”

“흠… 영장을 청구하는 순간 마스터란 놈 귀에 들어갈 텐데 괜찮겠나?”

“상관없습니다. 이제 언더커버 수사는 끝났으니까요.”

예상보다 빨리, 예상보다 확실한 성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이미 선빵을 날려 버렸고 내 존재는 밝혀졌다.

이제 더 이상 내부자들은 나에게 정보를 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세 명의 관리자 김주상, 정종진, 한탁희는 이미 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목줄을 채웠든, 아니면 나와 같은 길을 가던 파트너로 만났든.

어떤 식으로 내 사람이 된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클럽원과 마스터의 중간 고리는 끊겨 버렸으니까 말이다.

마스터란 녀석은 지금 혼자다.

관리자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모든 클럽원들에게 명령을 내려야 하지만, 클럽이 만들어 놓은 철저한 시스템 때문에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예상보다 빨리 터트리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실패한 수사는 아니었습니다. 이미 꽤 많은 걸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꾸어 놓았으니까요.”

“그래. 자네가 자신 있다면 상관없지.”

“감사합니다.”

널브러진 서류들을 하나둘 챙기며 자리를 정리했다.

우리가 내린 결론은 이 모든 서류들을 언론에 터트리는 걸로 정해졌다.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낫고, 두 사람보다 수천만 명의 사람이 머리를 맞대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했던가.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나 우리는 수많은 사공들이 정한 목적지에서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만을 골라 가면 된다.

그리고 수많은 사공들은 남민지와 남용찬을 보호할 것이다.

“오랜만에 뵙겠네요.”

“누굴?”

“제가 아는 언론인 중 가장 정의로운 사람이요.”

* * *

상암동의 한 카페.

언론인들이 자주 이용하는 이 카페는 보통 카페와는 달리 개별적인 룸이 존재하며 룸 안에서 새어 나가는 건 은은한 커피 향밖에 없었다.

“이, 이게 전부 사실입니까?”

“네. 전부 사실입니다.”

“설마 일전에 주신 정용진 회장 자료도 이것 때문에……?”

“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정용진 회장 역시 클럽의 관리자입니다.”

“워… 이걸 제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걱정 마십시오. 모든 수사의 책임은 저 위에서 질 겁니다. 허락도 이미 받았고요.”

검지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고, 내 손가락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던 차치홍 기자는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BH(Blue House)가 이 수사의 책임자라는 말씀이세요?”

“정확히 말하면 주한호 대통령이 총책임자입니다. 그러니 걱정 마시고 터트려 주십시오. 인터뷰 필요하시면 얼마든지 하겠습니다.”

스윽—

마지막으로 건넨 USB 하나.

수많은 서류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거쳐 잘 정리되었고, 작은 USB에 담길 수 있었다.

USB를 받아든 차치홍 기자는 자신의 속주머니에 USB를 고이 챙겨 넣었고, 나를 유심히 바라보며 한마디를 건넸다.

“좋습니다. 한번 해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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