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장 (33/35)

제3장

자신의 과거와 똑같았다.

그 한마디에 담겨 있는 뜻은 많았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한 검사님도 혹시 나처럼 클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들어온 게 아닐까 하고요.”

한탁희의 생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그가 눈치가 뛰어나서가 아니다.

아니, 눈치로 알아챌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다만, 자신과 너무나도 똑같은 사람이 클럽이라는 곳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히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 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술기운으로 자신의 의심을 확인했고, 의심은 사실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무모하셨습니다.”

“아니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습니다. 저 혼자 힘으로는 클럽을 무너뜨릴 수 없었으니까요.”

“흠…….”

어떤 일이든 너무 쉽게 해결된다면 반드시 의심을 해 봐야 한다.

경찰도 검사도 범인을 대할 때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속임수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어쩌면 상대하기 가장 어려울 줄 알았던 한탁희가 알고 보니 나처럼 클럽을 무너트리기 위하여 관리자가 되었다?

더군다나 그 모든 사실을 나에게 쉽게 털어놓는다?

옳다 잘됐구나, 하면서 넘어가면 위험하다는 뜻이다.

띡—

“오케이, 녹음 완료됐습니다.”

주머니 속 스마트폰을 꺼내 놓으며 한탁희에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한탁희는 철저하다 못해 완벽했다.

만약 정말 만약에 지금 나에게 한 말이 내 정체성을 시험해 보기 위해 한 연극이라면 빠져나갈 방법은 이거하나 뿐이었다.

“휴… 뭐하시는 거죠, 한 검사님?”

“제가 당신의 과거와 똑같았다고 했죠.”

“네, 그랬죠.”

“그런데 과거가 똑같다고 과연 현재도 같을까요?”

그와 같은 연기를 하는 것.

물론 내 정체성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였다면 이 녹음 파일은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속임수에서 빠져 나갈 구멍 정도로는 충분했다.

“그만하시죠, 한 검사님. 모든 걸 속일 수 있어도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처음 한 검사님을 뵀을 때 본 눈빛. 저만 알아볼 수 있던 그 눈빛은 저와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한탁희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지만 말이다.

“걱정 마세요. 제가 한 말은 전부 거짓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지금 한 검사님이 하시는 행동이 연기라는 것도 알고 있고요.”

절대로 속일 수 없는 게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두를 속일 수 있어도 한탁희를 속일 수 없는 게 있었다는 소리다.

눈빛.

악을 연기하고 있지만, 눈빛 속에서 보이는 선함.

그 선함을 알아볼 수 있는 건 오로지 한탁희뿐이었다.

그리고 한탁희의 말을 듣고 보니 굳이 연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듣고 보니 저도 알겠네요.”

한탁희의 눈빛 속에도 보이는 게 있었으니까.

김주상과 정종진을 마주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무언가가.

“좋습니다. 그럼 이제 톡 터놓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지금껏 있던 일을 전부 한탁희에게 털어놓았다.

모든 일을 한탁희에게 털어놓는 것은 나 역시 도박과 같았다.

하지만 한탁희와 같이 불안한 마음은 없었다.

클럽 관리자인 한탁희에게 구린 점이 없다는 것과 그의 눈빛 속에서 보이는 선함. 마지막으로 도저히 장악할 수 없을 것 같던 한탁희가 나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까지.

불안하기보다는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역시 대단하시군요. 며칠 만에 김주상과 정종진에게 목줄을 채우다니…….”

“제가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지금껏 잘못 살아 왔기 때문이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자신에게 채워질 목줄을 자신이 만들었다는 소리입니다.”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결국 이기는 자가 승자가 될 것이다.

나는 그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아니, 지금껏 똑똑히 보지 않았는가.

언젠가는 처벌받는다는 사실을.

“그럼 저도 언젠가는 한 검사님에게 목줄이 채워질 운명이었군요. 하하하.”

웃으며 농담을 건네는 한탁희.

“아니요. 수석님의 과정은 결코 틀리지 않았습니다. 만약 수석님의 과정이 틀렸다면 제가 여기를 찾아올 때 목줄을 가져왔겠죠.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국정원과 검찰 라인 전부를 가동해도 수석님의 목줄을 찾을 수 없었으니까요.”

“다행이라 해야 할지…….”

“그 말은 제가 해야겠네요.”

“네?”

“수석님이 저와 같은 뜻이라서 다행입니다. 클럽을 무너뜨리기 위해 가장 강력한 적이라 생각한 사람이 아군이 되었으니까요.”

짠—

나는 술잔을 들어 보이며 말했고, 한탁희는 내 술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죠?”

그렇게 한탁희마저 목줄을… 아니, 내 손을 잡았다. 이제 클럽 관리자들은 전부 내 뜻에 의해 움직이게 될 것이다.

“조금 더 자세히 말씀드리죠.”

“편히 말씀하시죠.”

“아니요. 여기서 말고요.”

* * *

모두가 모여 있는 회의실.

나와 한탁희의 모습이 보이자 모두의 입이 벌어졌다.

술도 먹었고, 조금 더 자세히 얘기를 해 주고 싶어 다음날 한탁희를 고려 전단으로 데리고 왔다.

“저, 저 사람은…….”

“네, 맞습니다. 클럽의 관리자이자, 청와대 민정수석이신 한탁희 수석님이십니다.”

시간이 없어 미리 말을 하지 못한 탓에 한탁희가 이곳에 올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게 입이 벌어지고 당황하는 이유였고 말이다.

“모두 당황하신 것 같은데 일단 앉아들 보세요.”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모두를 자리에 앉히고, 한탁희의 집에서 나눈 대화 전부를 수사팀에게 말했다.

“흠… 어쩐지 아무리 뒤져도 나오질 않더라.”

백성원은 침착하게 받아들였고.

“이야… 허벌나게 정의로운 분이셨네 그려…….”

민태호는 강서빈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일이 조금 더 수월해지겠네요.”

나머지 반응은 비슷했다.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산에 터널이 뚫린 기분이었으니까.

“자! 모두 이견이 없는 걸로 알고 한탁희 수석님을 저희 수사팀에 영입하겠습니다.”

짝짝짝—

박수 소리와 단상 앞에 서는 한탁희.

조금 쑥스러운 듯 보였지만 이내 차림새를 가다듬고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한탁희 민정수석이라고 합니다.”

간단한 환영식을 마친 우리는 쉴 틈도 없이 다시 회의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저희의 목적은 수석님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에 정의를 어지럽히고 기득권들이 모여 온갖 비리를 저지르는 클럽을 무너트리는 것. 저희의 목적은 오로지 그 하나입니다. 지금 진행 상황은…….”

그리고 한탁희 수석 집에서 미처 다 하지 못한 얘기를 조금 더 자세히 말했다.

어떻게 김주상에게 목줄을 채웠고, 정종진의 집에서 어떻게 그를 무릎 꿇리 게 했는지까지.

또한 수사팀이 어떻게 꾸려졌고, 우리들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한탁희에게 알려 주었다.

“이제 수석님이 알고 계신 걸 말씀해 보시죠.”

“네. 제가 알고 있는 클럽은…….”

그가 클럽에 들어온 지는 3년.

관리자가 된 지는 2년이었다.

“일단 관리자는 한 검사님도 보셔서 아시다시피 철저히 능력주의로 뽑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능력주의보다는 마스터가 점찍은 사람이 뽑히는 거죠.”

“특별한 가이드라인은 없는 겁니까?”

“네. 마스터란 놈이 지 뜻대로 뽑으니까 가이드라인을 특정할 수는 없죠. 다만, 한 검사님과 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클럽에 필요한, 혹은 클럽에 가장 위협이 되는 사람을 자신의 가까이 두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흠… 필요하거나 위험하거나 둘 중에 하나란 소리군.”

“또 클럽은 음지에서 모여 활동하고, 보안을 대단히 여기는 조직이지만, 양지에 있는 모든 것에 얼마든지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그건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클럽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소리입니다.”

“네?!”

내가 클럽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는 것에도, 그리고 들어가는 것에도 많은 과정이 필요했다.

클럽의 관리자가 되고 나서부터 느낀 것은 클럽이라는 곳이 엄청난 보안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클럽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는 클럽에 속해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 같습니까?”

“일단 관리자 네 명에 마스터 한 명, 그리고 남영진이 전부입니다. 백성원 원장님 역시 클럽에 위장 잠입하셨고요.”

“그럼 총 일곱 명이군요. 거기에… 공 세 개 정도 붙이시면 대충 맞을 겁니다.”

“네? 7,000명이라고요?!”

“네. 그 정도 될 겁니다, 아마.”

대한민국 인구 5,000만 명 중 0.01프로가 넘는 사람들이 클럽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많네요.”

“그러니 아무리 보안을 유지해도 존재를 완벽히 숨길 수는 없겠죠.”

“그렇다면 제가 모르는 게 이해가 안 되네요. 저야 일개 평검사라지만 국정원장인 백성원 원장님과 검찰총장이신 강철호 총장님까지 몰랐다는 건…….”

“그만큼 두 분이 깨끗한 공직 생활을 하셨다는 뜻이기도 하죠.”

두 사람이 지금껏 클럽을 모르고 있던 이유는 클럽에 관해 알고 있는 사람들과 술자리를 가진 적도, 혹은 그들과 대화를 하는 것도 싫어한 탓이다.

그들의 대화를 귀담아 듣지 않기도 했고 말이다.

“다만, 아무나 알 수는 없죠. 대한민국에서 어느 정도 위치가 되어야 클럽에 관해 들어볼 수 있고, 클럽 역시 그런 사람들에게는 알아서 초대장을 뿌립니다.”

“초대장이요?”

“물론 직접적으로 뿌린다는 게 아니고 우회적으로 뿌리죠.”

“제가 알기론 관리자를 제외하고 클럽원들은 철저히 서로를 모르고 있는 걸로 아는데 수석님은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어떻게 보면 클럽도 하나의 조직입니다. 마스터란 CEO가 있으면 재무를 관리하는 CFO가 있고 인사를 담당하는 CHRO가 있죠. 아시죠, 남영진?”

“네. 알고 있습니다.”

“한 검사님이 언더커버로 들어와 가장 먼저 한 일이 관리자들을 장악한 것처럼 저 역시 클럽에 들어와 가장 먼저 한 일은 남영진을 파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클럽의 인원 규모와 조직 운영 방법은 그 과정 속에서 알게 된 것이고요.”

관리자가 아닌 평범한 클럽원으로 들어온 한탁희.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 그가 할 수 있는 일 중 최선이라 생각한 건 클럽이라는 조직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역시 남영진을 마주했고, 남영진이 클럽의 모든 인사를 담당한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제가 남영진에게 알아낸 것이 있습니다. 그는 향수를 뿌려 클럽으로 유혹하지만, 냄새를 맡고 따라온 모두를 받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꽤 철저하게 검증을 하더군요.”

“철저한 정도가 아닙니다. 아마 국정원보다 더 복잡한 신원 조회를 하고, 조금이라도 의문점이 있으면 제외시키죠. 그래서…….”

“그래서?”

“아마 알고 있을 겁니다.”

“뭘요?”

한탁희 수석에게 나온 다음 말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한 검사님이 지금 언더커버 수사 중이라는 걸요.”

* * *

“알고 있다니요?”

한탁희의 말에 회의실은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한탁희를 소개한 아까와 달리 나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죠.”

“저는 남영진과 꽤 가까운 사이를 유지해 왔습니다.”

내가 본 남영진은 철저했다.

또한 불법적인 일이긴 하지만 자신의 일을 좋아하는 워커홀릭이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웠고, 자신의 조직을 꽤 자랑스러워하던 인물.

내가 본 남영진은 그랬다.

“스마트하고 자기 관리가 철저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그 역시 인간이며 가끔 허물없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습니다.”

“신세 한탄이라도 했단 건가요?”

“신세 한탄이라기보다는 흐트러진 상태에서 입이 열리기도 한다는 소리죠.”

2년간 남영진에게 공을 들였고, 관리자가 되던 그 날.

남영진과 한탁희는 꽤 즐거운 술자리를 가졌다.

다만, 한 사람은 축하를 위해서였고, 다른 한 사람은 여태껏 그랬듯 남영진과 가까워지기 위해서였다.

* * *

“축하드립니다. 한 변호사님. 아니지 이제 차기 민정 수석님으로 불러드려야 되나.”

“하하, 아닙니다. 어쨌든 감사드립니다. 남… 그나저나 아직도 어색하네요. 남영진 씨라고 부르는 게.”

“그냥 편하신 대로 불러 주십시오. 남 이사라 부르셔도 되고요.”

“남 이사요?”

“클럽에서 따로 정해진 직책은 없으나 제가 인사 담당 관리자이다 보니 대외적으로는 이사라는 직책을 쓰고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남영진과 한탁희가 마주 앉은 곳.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바였다.

사람들이 찾질 않는 곳인지, 아니면 사람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막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나저나 앞으로 하셔야 될 일이 많을 겁니다. 민정 수석은 보다 더 높은 곳을 올라가기 위한 발판일 뿐이니까요.”

“휴… 부담이 되네요. 민정 수석이란 자리도 관리자란 자리도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다른 분들보다 더 많이 서포터해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남 이사님이 그렇게 말씀을 해 주시니 안심이 되는군요.”

이런저런 얘기 속에 빈 술병이 늘어갔다. 그제야 때가 됐다 생각한 한탁희가 은근슬쩍 입을 열었다.

“관리자라고 하긴 하나 아직 제가 클럽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네요.”

“흠… 어떤 점이 궁금하신데요?”

“그냥 클럽이란 조직이 어떻게 돌아가고, 또 어떤 식으로 운영되는지 같은 가장 기본적인 게 궁금하죠 뭐.”

“그런 것들은 굳이 관리자님이 아실 필요가 없습니다. 알아도 아무런 쓸모가 없고요.”

“하하하, 그런가요?”

하지만 남영진은 생각보다 호락호락 하지 않았고, 한탁희는 조금 다른 방법을 써 보기로 했다.

“제가 앞으로 앉게 될 자리는 민정 수석 자리입니다. 대한민국 모든 고위 공무원들의 자격을 검증하는 곳이죠. 그렇다는 건 당연히 클럽 내에서도 저의 도움을 바라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리입니다.”

“흠… 듣고 보니 한 변호사님 말도 일리가 있네요.”

“하하!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서로의 존재를 몰라야 한다는 게 클럽의 규칙인 걸 잘 알고 있고, 조직 운영도 오로지 마스터의 뜻대로 흘러간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하는 말입니다.”

남영진은 술잔을 자신의 입에 가져다 대며 고민했다.

그리고 옅은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고, 술잔은 남영진이 내뿜은 입김에 김이 서렸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클럽에 관해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는 건 저밖에 없죠…….”

그날 한탁희가 남영진에게 들은 내용은 꽤 충격적이었다.

클럽에 영입하기로 하거나 클럽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국정원을 통해 철저한 신원 조회를 거치며, 국정원의 신원 조회를 통과한다 하더라도 담당 직원이 파견되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1년간 지켜본다고 했다.

그렇기에 반드시 클럽에는 국정원 소속 클럽원이 있으며 보통은 고위급이라고 한다.

하긴, 조정식 국정원장도 클럽 소속이었으니.

또한 아무리 유능하고 위험하다고 해도 완벽한 검증이 끝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클럽원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절대로라는 말씀은?”

“네. 완벽히 그 사람을 파악하기 전까지는 영입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남영진의 말에 한탁희는 콧방귀를 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완벽히 검증했다면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이 거짓이란 걸 알았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가끔 예외도 있었습니다.”

“예외요?”

꼴깍.

여유롭게 술을 들이키는 남영진과 불안함에 마른 침을 삼키는 한탁희.

두 사람의 목젖이 만들어 낸 소리가 들려왔다.

“한 변호사님이 그 예외입니다.”

“그 말씀은…….”

“네. 한 변호사님은 저와 클럽에서 신규 클럽원을 검증하는 팀이 완벽히 검증하지 못한 인물입니다.”

“저는 왜 예외가 된 거죠?”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모든 것은 마스터의 뜻이니까요.”

“이해가 안 가는군요…….”

“아! 그렇다고 제가 한 변호사님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한 변호사님이 어떤 뜻을 품고 클럽에 들어온 건지 모르겠다는 거죠.”

“하하! 그게 의심 아닙니까?”

“의심이라… 저는 마스터를 대리해 클럽원들을 영입하는 일을 하고 있을 뿐. 그분이 어떤 뜻을 가지고 한 변호사님을 영입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한 변호사님을 영입했다는 건 클럽에 필요한 인물이고 마스터가 원하는 인물이라는 겁니다.”

클럽을 무너뜨리기 위해, 혹은 악과 손잡아 더 큰 힘을 얻고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어떤 뜻을 품고 클럽에 들어왔는지 남영진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그저 마스터란 절대적인 존재를 믿고, 그 사람의 뜻을 따르는 것뿐이었다.

“제가 원하는 인물이었다고요?”

“네.”

“어째서죠.”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저희가 클럽원들을 검증할 때 쓰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방법이 뭐죠?”

“우선 영입 대상의 인생을 대분류합니다. 예를 들면 한 변호사님으로 따지면 경남에서 제일 많은 땅을 보유한 만석꾼의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자라 사법 고시에 합격. 그 후 유학길에서 만난 의대생과 결혼. 검찰에서 쫓겨나 변호사 사무실 개업. 이개 한 변호사님의 대 분류입니다.”

남영진의 말은 한탁희의 귀를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스카우터답게 뛰어난 전달력과 사람을 집중하게 만드는 제스처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너무나도 흥미로운 주재 때문이었다.

“그리고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항상 약자를 괴롭히고 세입자들에게 갑질을 하는 아버지를 원망하셨고,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질려 먼저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를 그리워하셨죠.”

“자, 잠깐만…….”

“아! 죄송합니다. 그저 한 변호사님을 프로파일링한 자료를 읽는다는 게… 기분 나쁘셨다면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휴…….”

자신도 모르게 가슴 속에서 분노가 치밀었고, 한탁희는 깊은 한숨을 쉬며 분노를 삭였다.

“계속 말씀해 주시죠.”

“괜찮으시겠어요?”

“네.”

흥분을 가라앉힌 한탁희가 재촉하자, 다시 남영진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연수원을 수석으로 졸업해 중앙 지검 특수부에 발령받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기득권 세력을 본능적으로 싫어하셨죠. 그렇기에 우수한 실적에도 불구하고, 조직 문화가 상당히 강한 검찰에서는 항상 배척당했죠.”

쉽게 말해 왕따를 당한 것이다.

조직에 융화되지 않으면 나오는 두 가지 결과가 있다.

왕따가 되거나, 혹은 혼자 잘나가거나.

강철호 역시 앞뒤 안 가리고 위아래 가리지 않는 뛰어난 능력으로 왕따를 당하면서도 꾸준히 승진을 해 검찰총장의 자리에 올랐지만, 한탁희 경우는 조금 달랐다.

왜?

소속 지검장의 가족을 건드렸으니까.

또 이기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만약 한탁희가 그 재판에서 소속 지검장의 형을 감옥에 보냈다면, 강철호처럼 검찰의 더 높은 곳으로 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패배했고, 결국 검사 옷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검장 연수원 동기가 재판의 판사가 되는 불리함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그걸 뛰어 넘을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탓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한탁희가 특수부인 것도 한몫했다.

소속 지검장을 건드는 놈이니 놔두었다가 어떤 결과가 나올지 뻔히 알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검사 옷을 벗고 인권 변호사 시절에도 역시 대기업과 맞서 싸웠죠. 결국 검사 때와 마찬가지로 이기지는 못했지만.”

“프로파일링 자료만 보면 저는 완전 무능하고 쓸모없는 인간이네요.”

“아니요. 대신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보이기도 하죠.”

“장점이라기보다는 무식한 거죠. 능력도 없으면서 깡다구만 있는.”

“그래서 클럽이라는 곳을 선택하신 거 아닙니까?”

흠칫.

놀라지 않은 척해 보려 했지만, 한탁희의 눈빛은 흔들렸다.

남영진이 마치 자신의 속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건…….”

“하하! 제가 너무 갔나요? 뭐… 어떻게 클럽을 선택하셨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앞으로 한 변호사님이 차기 민정 수석이 되실 거라는 것과 마스터가 한 변호사님을 가까이 두고 싶다는 거죠.”

남영진의 말에 한탁희는 깨달았다.

클럽을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긴 술자리 동안 클럽원의 규모와 영입 방법, 그리고 예산편성 등 꽤 중요한 정보를 얻은 것 같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그리고 그분의 뜻은 아무도 모르죠.”

결국 중요한 건 마스터란 절대적인 존재의 뜻이고, 클럽을 완벽히 파악하려면 마스터의 생각을 읽어야 하니까.

하지만 마스터의 뜻을 파악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대화만 할 수 있을 뿐 얼굴도, 어디에 사는지도, 심지어 나이와 직업도 알 수 없었다.

“만약 제가 다른 뜻을 품고 있다면 클럽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예외가 있다고. 그리고 그 예외는 바로 한 변호사님이라고 말입니다.”

“제가 혹여나 대선이라도 나가 당선된다면 클럽을 폭로할 수도 있는데요.”

“흠…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마스터는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가들이 모여 있는 조직의 수장입니다.”

“그래도 대통령의 권력을 뛰어넘을 수는 없겠죠.”

“합법적인 권력에서는 그렇죠.”

한탁희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남영진의 말뜻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민정 수석이 되고 대통령이 되는 건 마스터에게 상관없었다.

어떤 자리에 있던 언제든지 끌어내릴 수 있고, 또 더 높은 자리로 올릴 수 있는 힘이 마스터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절대적인 권력이라고는 하지만, 대한민국은 결국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여론을 이길 수 없다는 소리죠. 그리고 그 여론을 형성하는 방법은 아주 많습니다. 합법적으로든 불법적으로든.”

“그럼 혹시 마스터가?”

“제가 술이 취했나 보군요.”

한탁희의 머릿속에 한줄기 빛이 지나갔다.

어쩌면… 마스터의 존재가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빛줄기가.

* * *

“누구입니까?!”

흥분한 탓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마스터란 놈의 정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탁희의 말.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궁금해 하고 있을 것이다.

“제 추측입니다만… 대한민국의 여론을 휘어잡을 수 있는 사람.”

“그 말씀은 혹시…….”

“네. LBC 사장이자 앵커인 남민지가 의심됩니다.”

“자, 잠깐만요. 마스터가 여자라는 말씀이십니까?”

“만약 남민지 앵커가 맞다면 그렇겠죠.”

나와 한탁희의 대화 속에 수사팀은 바쁘게 움직였다.

백성원 원장은 국정원 클라우드에 접속해 남민지 앵커에 관한 프로필을 알아보고 있었고, 서윤호는 그녀의 범죄 기록을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강서빈은 자신의 휴민트를 동원해 남민지를 파악했으며, 강철호는 자신의 턱을 만지며 깊은 생각에 빠진 듯했다.

물론 지금 그녀가 마스터라 확신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탁희의 추측일뿐.

그녀가 지상파 방송국의 사장이자 여론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앵커라고는 해도, 그것만으로 클럽의 마스터가 남민지 앵커라고 특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앵커다.

여론을 휘어잡는 위치가 아니라 그저 있었던 일을 여론에게 전달하는 것뿐이라는 소리다.

한 사건에 자신의 견해를 조금 섞을 수도 있고, 조금 더 강력하게 말할 수는 있지만 정작 그녀가 사건을 만들 수는 없었다.

결국 여론이 형성되는 것은 정계와 재계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한탁희의 추측을 확인해 볼 필요는 있다.

3년간 클럽에서 보고 들은 관리자가 예상한 추측이니까 충분히 파악해 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남 앵커라고 하면… 나도 인연이 조금 있는데.”

“총장님이요?”

“인터뷰 몇 번했지. 그녀도 나도 신입 때.”

“신입 때 인터뷰라고요?”

“이봐, 한 검사. 나 꽤 잘나가던 검사였어. 그녀도 꽤 잘나가는 기자였고.”

백성원 원장이 남민지 앵커의 프로필을 파악하는 동안 우리는 잠시 사담을 나누었다.

“조금 더 자세히 좀 말씀해 주세요.”

“그녀가 공채로 방송국에 입사한 시기와 내가 임관한 시기가 아마 비슷할 걸세.”

“개인적인 인연은 없고요?”

“개인적은 연은 따로 없고. 정부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고, 나는 형사부 검사로서 조폭들을 때려잡고 있었지. 아무래도 정부와 국민의 시선이 온통 형사부에 쏠려 있는 덕분에 나도 유명세를 좀 탈 시기였지.”

그녀의 경력은 강철호 총장과 비슷했다.

어떻게 보면 서로에게 꽤 큰 도움이 됐다고도 볼 수 있다.

조폭을 때려잡은 강철호를 독점으로 인터뷰해 국민들에게 수사 상황을 낱낱이 발표했으니까 말이다.

덕분에 강철호도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당시 조폭들은 정계에 수많은 자금을 뿌렸고, 그중 가장 많은 돈이 흘러간 곳은 당연 경찰과 검찰이었다.

그렇기에 몇몇 검사들은 강철호를 마음에 들지 않아했고, 전국에서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던 두목을 잡아넣었을 때는 꽤 많은 압박이 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강철호는 유명해진 상태였다.

그가 시골로 좌천되기라도 한다면 강철호의 인사를 결정하는 라인에 있던 사람들은 여론의 욕을 바가지로 먹을 게 빤했기에 아무도 강철호를 건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를 승진시키라는 청와대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범죄와의 전쟁을 위한 수사본부의 부본장으로 강철호를 발탁했다.

강철호는 남민지에게 빚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사건의 진행 상황과 수사 현황들을 남민지에게 독점으로 제보하는 걸로 빚을 갚았다.

남민지 역시 그로 인하여 30대 초반 젊은 나이에 9시 뉴스 앵커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범죄와의 전쟁이 끝나고 나는 부장검사가 되었고, 남민지 기자는 9시 앵커가 되어 승승장구했지.”

“흠… 서로가 서로를 도왔단 소리네요.”

“그렇지. 그런데 당시 내가 겪은 남민지 기자는 지금 자네보다 더 정의로웠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말 그대로일세. 검사가 물불 안 가리고 나쁜 놈 잡듯이 남민지 기자도 물불 안 가리고 국민들의 알권리를 위해 취재를 했단 걸세. 당시에는 보이지 않는… 아니, 대놓고 언론 탄압이 심했지. 앵커 시절에 대본에도 없는 말을 생방송으로 몇 번하다가 징계도 먹고 그랬네.”

“흠… 일단은…….”

탁—

강철호 총장과 대화를 하던 중 화면에 나타나는 그녀의 프로필.

백성원 원장이 자연스레 단상 앞으로 나갔다.

“일단… 여기서 남민지 앵커 모르는 분은 없으실 테니 기본적인 건 넘어가고 저희 DB에 있는 그녀의 프로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연히 클럽에 관해서는 연관성이 없었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평범한 학교를 나왔고, 열심히 공부한 끝에 공채 입사를 통해 방송국 기자가 되었다.

또한 범죄와의 전쟁 이후로 앵커가 되었고, 그 후로는 국민들이 가장 신뢰하는 앵커가 되어 사장 자리까지 올라간 인물.

특별한 점을 굳이 꼽자면 이혼 경력이 있다는 점?

현 시점에서 특별하다고 말할 건덕지도 안 되지만.

“남편은 누구였죠?”

“남편 역시 여러분들이 잘 아는 사람입니다.”

나는 질문을 던졌지만, 그 시대를 살아 본 강서빈과 강철호 총장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듯했다.

“손진철.”

“손진철이라고 하면은…….”

“그래. 청와대 주인이던 사람.”

손진철 전 대통령.

운동권 출신으로 두 번의 국회의원을 거쳐 대통령이 된 인물.

손진철이라는 이름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가 남민지 앵커의 전 남편인지는 꿈에도 몰랐다.

“아마, 한 검사와 서 검사는 모를 수밖에 없어. 자네들이 아주 어렸을 때 두 사람이 갈라섰으니까.”

“그러게요… 저는 모르고 있던 사실입니다.”

“손진철이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습니다. 운동권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거쳐 대통령이 된 사람이잖습니까.”

“맞네. 그리고 손진철 대통령이 국회의원이 되기 전 노무사 시절에 남민지 앵커를 만나 결혼을 했지. 국정원이 파악한 바로는 지인 소개로 만났다고 하는데 정확하지는 않아. 여튼 당시에는 꽤 이슈가 됐지. LBC 간판 앵커의 결혼 소식이었으니까.”

당시에 이슈가 된 이유는 대한민국 국민이 모두가 알고 있는 남민지 앵커의 유명세 때문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만남이 과연 사랑이었을까? 라는 의혹이 끝도 없이 나왔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일 년에 몇 억씩 벌던 남민지 앵커와 천만 원도 벌지 못하던 손진철.

물론 조건 없는 결혼이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당시 여론은 두 사람의 행복한 결혼 소식보다는 왜 결혼을 했을까, 라는 기사를 더 많이 내보냈다.

손진철 머리 위에 국회의원과 대통령이 될 거라는 간판은 붙어 있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아니, 어떻게 보면 남민지 앵커와의 결혼 덕분에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됐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른다.

결혼 전 운동권 출신이긴 하지만 선봉에 서지 않았고, 민선 대통령이 탄생하고 난 후에는 평범한 노무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혼 사유는요?”

“빤하지 뭐, 성격 차이.”

“내막은 모른다는 소리군요.”

“그래. 양쪽 다 귀책사유가 있거나, 아니면 한쪽만 귀책사유가 있는데 밝히지 않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귀책사유를 밝히지 않는 조건으로 합의를 봤을 수도 있고.”

불과 2년.

세기의 결혼식을 올린 것 치고는 너무도 짧은 결혼 생활이었다.

두 사람의 이혼 역시 큰 이슈가 되었지만 별다른 법정 다툼도 없었고, 완만한 합의이혼을 했기에 소란은 길지 않았다.

남민지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LBC 앵커로 다시 복귀했고, 손진철은 결혼 전부터 해 온 노무사 일을 이어 나갔다.

“두 사람 사이에 자식은 없습니까?”

“없네. 남민지 앵커의 병원 기록을 보면 유산을 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흠…….”

“아마 세상에서 제일 깔끔한 이혼이 아니지 싶네. 자식도 없고 재산도 분할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말이야.”

“그렇다는 건 결혼과 이혼 이력에서 무언가를 캐낼 게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다만, 남민지는 LBC 앵커로 돌아가 결혼 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이어나갔지만, 손진철은 조금 달랐다.

SNS가 발달되어 있지 않은 당시에는 오로지 뉴스로만 손진철의 소식을 알 수 있었고, LBC와 경쟁 상대이던 SBC 방송사는 손진철의 인생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방영했다.

아마, LBC와 간판 앵커이던 남민지를 흠집 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 다큐멘터리가 나가고 손진철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었지.”

노무사란 직업과 나이, 그리고 운동권 출신.

결혼 당시엔 살아온 인생에 비해 비교적 간단한 정보만 알려졌을 뿐 손진철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아마, 그래서 더 이슈가 됐을지도 모른다.

국민들이 보기에는 평범한 노무사와 LBC 간판 앵커의 결혼이었을 테니까.

아마 남민지 앵커는 자신의 유명세 때문에 남편이 피해를 보는 걸 싫어했을 것이다.

아니면 숨겨야 하는 이유가 있었거나.

“그 다큐가 나가고 손진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전국민이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야.”

노무사 시절 핍박받던 노동조합을 위해 밤낮없이 기업들과 싸웠고, 단식투쟁을 하다가 병원에 실려 간 사실까지.

국민들이 박수를 쳐 주기에 충분한 일들이었다.

“자네도 잘 알 거야. 여론이 박수를 쳐 주는 인물을 가장 먼저 찾는 집단이 어디인지.”

정계.

타칭 스타 검사가 된 이후로 하루에 수십 번도 넘게 보좌관들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

정중히 거절하면 국회의원이 직접, 그것도 거절한다면 당권을 쥐고 있던 당 대표에게도 전화가 왔었다.

아무래도 국민의 박수를 받는 인물을 자신의 당으로 영입한다면 그 박수와 표가 모두 자신의 당으로 올 테니 그렇게 필사적으로 영입 전쟁을 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자네와 달리 손진철은 정치에 꿈이 있던 것 같네. 당시 야당에 들어가 국회의원에 출마했지.”

사실 개표도 전에 그의 당선은 확실시됐다.

결과 역시 압도적인 표 차이로 손진철이 승리했다.

“두 번의 출마, 두 번의 당선. 국민적 지지가 워낙 높으니 어디에 출마를 해도 당선이 확실시 된 상황이었고, 손진철은 역시 자신이 태어난 고향에 출마를 했지.”

어떤 사람들은 자신과 일말의 연관성도 없는 지역에 출마하는 정치인들을 향해서 정치를 비겁하다고 말한다.

자신이 태어난 지역을 위해 출마하는 게 아니라 당선 확률이 높은 지역에 출마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손진철은 정치적 유리함을 안은 채 초선 의원이 됐다고 볼 수도 있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의 국회의원이 되었으니까.

“정치적 쇼였는지는 몰라도 손진철은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서도 변하지 않고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했어. 이혼 경력을 빼고는 너무나도 완벽한 사람이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그 사실을 국민들 역시 잘 알고 있었고.”

두 번의 국회의원으로 정치적 커리어를 쌓은 손진철은 다음 해 대선에 출마해 역시 압도적인 표로 청와대에 입성하게 되었다.

“일단… 손진철 전 대통령부터 만나 봐야겠군요.”

* * *

손진철과의 만남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꽤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클럽의 눈을 피해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현역 국회의원들이 만든 등산 모임과 지역 유지들이 만든 몇 개의 모임 등 손진철과 만날 수 있는 수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말이다.

클럽을 파악하기 위함이 아니란 명분 역시 만들었다.

중수부가 맡고 있는 한 국회의원의 비자금 사건을 대외적으로 내가 맡기로 했고, 그 국회의원은 손진철과 꽤 가까운 사이었다.

김만섭 의원.

손진철이 국회의원 뱃지를 처음 단 날.

김만섭 의원 역시 같은 당에서 배지를 처음 달았다.

초선 의원 대부분은 자신들의 모임을 만들었고, 두 사람 역시 사이가 꽤 가까워졌다.

그러므로 손진철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건 별다른 의심을 사지 않을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내가 김만섭 의원의 비자금 수사를 위해 손진철이란 참고인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말이다.

탕—

서울의 한 테니스 코트.

허름한 추리닝 차림의 손진철이 한 남성과 테니스를 치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손진철 전 대통령님.”

“누구요?”

“중수부 한치우 검사라고 합니다.”

“아∼ 요새 잘나가는 그 검사 분이시구먼.”

인사를 건네자 라켓을 멈춘 손진철이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자리에 앉았다.

나 역시 자연스레 손진철과 마주 앉았고, 같이 테니스를 치고 있던 남성은 손진철에게 고개를 숙이며 테니스 코트를 나갔다.

“테니스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청와대 나오고 나니 할일이 없어서 말입니다.”

“테니스가 보기보다 꽤 힘든 운동인데 아직 정정하시네요.”

“하하! 칭찬인 겁니까, 아니면 비꼬는 겁니까?”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보기 좋습니다.”

“한 검사도 지금부터 운동 꾸준히 해 두세요. 안 그러면 나이 들어서 고생하니까.”

“예, 명심하겠습니다.”

굳이 손진철에게 나쁜 인상을 줄 필요는 없었다.

아직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니까 말이다.

다만, 국회의원과 대통령 시절로 판단하자면 꽤 좋은 정치인이었다.

국회의원 시절은 두말할 것 없이 훌륭했고, 대통령 시절에도 꽤 많은 박수를 받으며 청와대를 떠났다.

하지만 남민지 앵커가 클럽의 마스터라면 얘기가 조금 달라질 것이다.

남편인 손진철 역시 연관되어 있을 확률이 매우 높으니까 말이다.

아니면 남민지 앵커가 클럽의 마스터란 사실을 알고 이혼한 것일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손진철 앞에서 고개를 숙여 마땅할 것이다.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왜 찾아왔는지는 아는데. 은퇴해서 테니스나 치는 노인네 괴롭히지는 맙시다.”

“은퇴하신 것 치고는 꽤 활발한 모임 활동을 하시던데요.”

전 대통령 신분으로 나가는 몇 개의 모임.

국회의원들과 지역 유지들과의 만남은 단순한 모임이라 생각하기는 힘들다.

‘전’이라는 말이 붙었지만, 대통령이던 사람이 움직이는 한 걸음 한 걸음에는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며 정치적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내가 속한 모임에 김만섭 의원은 없는 걸로 아는데? 물론 같이 국회에 들어오고 같이 손잡고 정계 생활을 하긴 했지만, 다 옛날 얘기란 소리요.”

손진철이 대선에서 승리하고 청와대에 입성한 날.

김만섭 역시 국회의원 배지 위에 법무부 장관 배지를 하나 더 달 수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친분이 있어서 장관 배지를 달 수 있던 건 아니었다.

손진철이 대선 후보 지지율에서 앞서고는 있지만 근소한 차이었고, 그 차이를 확실히 벌릴 수 있게 해 준 게 바로 당시 선거 캠프의 본부장이던 김만섭이었으니까 말이다.

아마 지금 선거 전쟁에서 현존하는 네거티브 방법은 거진 김만섭 의원이 만들었다고 봐도 될 것이다.

“내가 청와대를 나오는 순간, 김만섭 의원의 어떤 의혹도 나랑은 관련이 없소. 그러니 같이 테니스나 칠 거 아니면 돌아가는 게 좋겠소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기 뭐하면 커피라도 한잔 들고 가든가.”

테이블 위 커피포트를 작동시키는 손진철.

역시나 내가 찾아온 목적을 김만섭 의원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정계에서 가장 핫한 인물은 김만섭이었고, 그 사건을 맡은 부서는 중수부, 담당 검사는 나이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일단 커피 한잔 주시죠. 얘기가 길어질 것 같습니다.”

“젊은 양반이 끈질기네 그려.”

눈을 흘기며 빈 잔에 커피를 채우는 손진철이었다.

“향이 좋네요.”

“선물 받은 건데 비싼 거라 하더이다.”

“은퇴하셨어도 ‘비싼’ 선물은 조심하시는 게 좋을 텐데요.”

“하하! 고양이가 싼 똥을 선물로 받았다고 기소라도 할라 그러는 거요?”

피식.

나는 커피를 받아 들고 향을 음미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물론 그런 걸로 전 대통령님을 기소할 수는 없죠. 다만…….”

“다만?”

“제가 찾아온 목적은 김만섭 의원도 아니고, 대통령님이 비싼 선물을 받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흠… 그 두 개가 아니라면 중수부 검사가 나를 찾아올 이유가 없을 텐데.”

“남민지 앵커님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뭐?”

여유롭던 표정.

털털한 웃음.

남민지라는 이름이 나오자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자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고 있나?”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일개 검사 놈이 지금 전 대통령한테 찾아와서 이혼한 전 부인을 묻는 게 맞다는 소리인가?”

“네.”

손진철의 반응을 보며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지금 내 행동이 건방지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입에도 담기 싫을 정도로 남민지가 싫거나.

물론 전 부인을 보호하려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건 확률이 매우 낮다.

만약 그럴 생각이었다면 전 부인에게 빤히 피해가 갈 줄 알면서도 다큐멘터리를 찍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럼 일개 검사 놈이 아니라 다른 분이 여쭈어보면 괜찮으시겠습니까?”

“뭐?”

뚜벅뚜벅—

이 테니스 코트를 혼자 찾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 같은 상황이 있을 거라 충분히 생각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찾아온 검사가 사건도 아니고 개인사인 전 부인에 대해 묻는다?

손진철이 아니라 누구라도 역정을 낼 게 빤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대통령님.”

“당신은……?”

“네, 강철호입니다. 대통령님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은퇴한 노인네일 뿐이고요.”

“휴… 어쩐지.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들이댈 수가 없지. 믿는 구석이 있었구먼.”

연배가 비슷하긴 하지만 강철호보다 손진철이 열 살 정도 많다.

하지만 두 사람은 꽤 깊은 안면이 있었다.

강철호를 서부 지검장에 앉힌 게 바로 손진철이었으니까 말이다.

앞뒤 가리지 않고 위아래 상관없이 강직한 검사.

그런 강철호는 손진철이 원하던 검사였다.

“그래서 진짜 용건이 뭐요? 검사 한 놈 시켜서 나한테 전 부인에 대해 묻는 이유가 뭐냔 말이요.”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은 모두 사실입니다.”

이곳을 찾아오기 전 수사팀은 꽤 긴 회의를 했다.

가장 큰 논점은 손진철에게 우리의 정체와 클럽을 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느냐 말하지 않느냐였고, 오랜 회의 끝에 내린 결론은 밝히자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손진철에게 남민지에 관한 얘기를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손진철 역시 클럽을 소속이거나, 아내를 보호하려 할 것이라는 리스크도 있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한 리스크는 또 다른 기회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모든 상황을 듣고 나서 손진철의 움직임을 파악하면 되니까.

지금 서윤호 검사가 손진철의 차에 GPS 수신기를 달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니면 두 사람의 이혼은 위장이었고, 클럽은 두 사람이 만들었을 거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렇게 된다면 마스터란 존재는 남민지가 아니라 손진철일 확률이 높겠지.

강철호는 모든 것에 대해 말을 하고서 입을 닫았고, 곧장 손진철의 어이없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강 총장.”

“제가 드린 말씀은 모두 사실입니다.”

손진철의 눈빛을 보아하니 처음 듣는 얘기 같았다.

하지만 저 눈빛을 백 프로 신뢰할 수는 없다.

그는 눈빛쯤이야 얼마든지 속일 수 있는 내공이 되기 때문이다.

십수 년 정계 생활을 했다면 누구든지 쌓이는 그런 내공 말이다.

“그, 그러니까 지금 내 전 부인이… 아니, 남민지 앵커가 클럽인가 뭔가 하는 곳의 수장이란 말이요?”

“그렇게 추측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나는 그 사람 남편이었소.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것을 듣고 보는 대통령이기도 했고. 내가 모르는 그런 조직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믿기 힘드실 거 압니다. 하지만 증거도 증인도 있으며 그 두 가지를 대통령님께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휴… 그래서 묻고 싶은 게 뭐요?”

“그건 이 사람이 여쭈어 볼 겁니다.”

강철호는 손으로 나를 가리켰고, 두 사람의 대화는 끝이 났다.

그리고 강철호에게 가 있던 손진철의 시선은 나에게로 향했다.

“서류상으로 나와 있지 않는 두 분의 이혼 사유. 그리고 국정원이 파악하지 못한 오직 대통령님만 알고 계신 남민지 앵커의 비밀을 알고 싶습니다.”

“국정원에서 나를 사찰했다는 소리요?!”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내가 비록 은퇴했으나 주 대통령한테 입김 넣을 정도의 힘은 있소. 민정 수석 불러서 한 검사 자네 좌천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고. 아니면 국정원장을 이 테니스 코트로 불러 직접 물어볼까?”

“죄송하지만, 대통령님…….”

손진철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언급한 모든 사람이 나와 뜻을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이번 수사의 총 책임자가 바로 주한호 대통령님이십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한탁희 수석님은 클럽의 관리자이며, 백성원 국정원장님은 저와 함께 클럽을 수사하고 있는 수사팀시고요.”

손진철은 자신을 사찰했다는 사실이 기분이 나빴고, 그냥 넘어가면 자신을 우습게 볼까 봐 화를 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대통령님을 사찰한 건 정말 죄송합니다. 수사가 끝나면 어떠한 징계라도 달게 받을 테니 한 번만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내가 기분이 나쁜 건 만약 사찰로 당신들이 원하는 정보를 알아냈다면 나를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고, 그럼 내가 사찰 당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을 거란 거요.”

꾸벅.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접어 손진철에게 고개를 숙였다.

지금 손진철의 입을 열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휴… 일단 앉아요, 한 검사.”

“네, 그럼.”

슬며시 자리에 앉았고, 나는 아까와 같은 질문을 다시 손진철에게 던졌다.

“우선 우리가 결혼을 하게 된 건 지인의 소개가 맞소. 그리고 나는 남 앵커를 꽤 마음에 들었소. 싫어할 이유가 없었거든. 예쁘지, IBC 간판 앵커지, 거기에 똑똑하기까지 하니… 하지만 결혼까지 할 줄은 나도 몰랐소.”

“왜죠?”

“보잘 것 없는 노무사가 무슨 염치로 그런 여자와 결혼할 생각을 한단 말이요? 그런데 남 앵커도 내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 연락을 해 오더라고. 나는 그녀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연락도 못 했는데 말이오. 그렇게…….”

손진철의 얘기가 시작되었다.

* * *

“몇 번 만났고 자연스럽게 결혼까지 하게 되었지. 그런데 정말 이상한 건 집안의 반대가 하나도 없었다는 거야. 우리 집은 당연했고, 남 앵커 집안까지 말이야. 마치 만난 뒤 결혼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위한 만남인 것처럼.”

손진철은 그런 상황이 싫지는 않았다고 한다.

“의아하긴 했지만 같이 있다 보니 정도 생기고 남 앵커 역시 항상 웃으며 나를 대해줬소.”

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에 골인했다.

속전속결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가족들이 전부 참석한 식장에서 박수를 받으며 식을 올렸다.

신혼여행 역시 근사한 곳으로 다녀왔다고 한다.

“바깥에선 우리의 결혼으로 시끄러웠지만, 우리 둘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단 소리요.”

“그럼 이혼을 하신 이유가…….”

“그것 역시 일방적이었소. 전날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다가 갑자기 이혼하자고 해 왔으니.”

결혼 생활 역시 별문제가 없었다.

퇴근 후 같이 오순도순 저녁 식사를 먹었고, 일 년에 한 번쯤은 해외여행도 다녔으니 말이다.

싸운 적도 없었다고 한다.

물론 사소한 다툼이 있겠지만, 서로를 이해해 준 탓에 언성이 높아질 일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앵커와 노무사의 결혼.

자기주장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거로는 어디 가서 안 빠지는 두 사람이니 얼마나 합리적이었겠는가.

두 사람의 직업이 결혼 생활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영향을 행사한 건 확실했다.

그런데 갑자기라니.

나는 이해가 잘 가지 않은 탓에 다시 한번 물었다.

“정말 아무런 증조도 없었나요?”

“하나도 없었어요. 전날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대통령님이 모르고 계신 건 아닙니까?”

“하하하! 뭐, 그럴 수도 있겠구만. 그런데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그 이유를 모르고 있소. 그렇다면 없다고 볼 수 있는 게 아니겠소?”

“휴… 저에게 해 주실 말씀이 없다는 거군요.”

실상은 평범한 결혼과 의아하긴 하지만 이상할 건 없는 이혼.

손진철이 알고 있는 것은 그 정도뿐이었다.

즉, 손진철이 나에게 해 줄 말 중 특별한 건 없었단 얘기다.

김만섭 의원 사건의 담당 검사가 되는 피곤함과 이곳까지 조심스럽게 접근한 모든 노력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다만…….”

허탈함에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던 내 모습을 본 손진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가 건넨 한마디는 무용지물이라 생각한 내 노력을 무엇보다 값어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언론에 알려지지 않은 게 있소.”

“그게 뭐죠?”

“우리 사이에 숨겨진 아이가 한 명 있소. 정확히 말하자면 있었소.”

“조금만 더 정확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길어질 것 같은 얘기에 나는 커피포트를 들고 다 비워진 커피 잔을 다시 채웠다.

손진철 역시 테니스 채를 내려놓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게…….”

* * *

가정법원 앞.

“설마… 내 아이가 아닌 거야?”

“당신 아이 맞아.”

“그런데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뭔데?!”

작은 공원 벤치에 앉은 두 사람은 결혼 후 처음으로 부부 싸움을 하고 있었다.

이혼 서류를 들고 가정법원 앞에서 말이다.

며칠 전 손진철은 참으로 이상한 경험을 했다.

아내의 임신 소식과 이혼 소식을 동시에 듣는 경험을.

“그냥. 당신과 함께 평생을 살아갈 자신이 없어.”

“내가 부족해서 그래? 아니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당신에게 감정은 없어. 그러니까 문제 만들지 말아 줬으면 해.”

“당신이 나라면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겠어?”

아마 손진철이 아닌 다른 어느 누구든지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스윽—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런 거 아니니까.”

다만 손진철이 짐작했던 단 하나의 이유는 예상과 달랐다.

그리고 손진철은 말문이 막혀 버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유는 없어. 내 아이를 평생 대모만 하는 노무사 아들로 키울 수 없어서 그런 거니까.”

“당신 아이이기도 하지만, 내 아이이기도 해.”

“아직은 아니지. 아직 내 뱃속에 있으니까.”

남민지의 말은 손진철에게 협박과도 같았다.

이혼을 해 주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산부인과로 달려가 아기를 지운다는 협박.

“어떻게 그런 말을…….”

“더한 짓도 할 수 있어. 그러니까 문제 만들지 말고 도장 찍어 줘. 위자료는 넉넉히 줄 테니까.”

“내가 지금 위자료받자고 이러는 것 같아?”

답답함에 언성을 높이고 애원도 해 봤지만, 남민지의 결정은 확고했다.

손진철이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눈빛은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고, 두 손에 쥐고 있던 이혼 서류는 놓을 생각이 없었다.

“휴… 도대체 왜…….”

“아까 말했잖아. 앞으로 당신과 평생 살 자신이 없다고.”

“그럼 결혼은 왜 한 거야?”

“집안의 성화도 있었고, 결혼할 나이도 됐으니까.”

“내가 좋아서 한 게 아니라…….”

“맞아. 당신이어서가 아니라 누구라도 곁에 있었으면 했을 거야.”

짝—

결혼 생활 중 단 한 번도 손을 올린 적 없거니와 여자에게 폭력을 쓴 적도 없었다.

지금껏 수많은 폭행을 당했음에도 폭력으로 맞선 적 역시 없었다.

그리고 태어나 처음 손진철은 여자의 뺨을 때렸다.

자신의 아내이던 남민지의 뺨을 말이다.

“흑… 흑…….”

“왜 당신이 눈물을 흘려? 맞은 건 난데.”

아내의 붉어진 뺨을 보고서는 눈물을 흘리는 손진철.

분노에 나온 행동이었지만, 손진철은 아직 남민지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상처 주기 싫으니까 아빠가 누군지는 말 안 할게. 빤히 아빠가 살아 있는데 자기를 안 본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왜 당신이 양육권을 가져갈 거라 생각해? 재판 결과에 따라…….”

“나보다 더 행복하게 키울 수 있어?”

“그건…….”

손진철의 말문은 막혀 버렸다.

아내의 말에 대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입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자신보다 아내의 밑에서 자라는 게 더 나았으니까.

그 사실을 자신 역시 알고 있었다.

“당신도 정치에 꿈이 있잖아. 그리고 그 꿈을 이루려면 돈이 필요하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내가 정치랑 당신 중 선택하라면 뭘 선택할 것 같아?”

“나겠지.”

“그런데 나한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그런데 난 아니야. 난 당신과 꿈 중에 선택하라면 꿈이야. 그리고 이제 그 꿈의 걸림돌이 될지도 모르는 아이가 생겼고.”

두 사람의 임신은 축복이 아니었다.

물론 계획된 임신도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부부에게 찾아온 새 생명이었단 소리다.

그리고 두 사람은 웃으며 병원을 찾은 게 아니라 침울한 표정으로 법원을 찾았다.

한쪽은 축복이라 느끼고, 한쪽은 불행이라 느끼고 있었으니까.

“지금까지 나한테 말한 이유 말고 다른 이유는 없어?”

“어. 다른 이유는 없어.”

“그래. 마음 떠난 아내와 사는 결혼 생활 나도 하고 싶지 않아.”

그날 손진철은 남민지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혼은 일사천리로 끝이 났다.

아무래도 공인의 이혼 소송이라 법원 앞에 매일 기자들이 판을 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법원의 배려로 비공개 재판을 받았다.

그리고 남민지는 가정법원 판사와 동기인 변호사를 선임한 탓에 자신의 뜻대로 곧 태어날 아이의 양육권을 가져왔다.

손진철은 남민지가 원망스러웠지만, 그녀의 뱃속에 자신의 아이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걸 인정해야만 했다.

아니, 순순히 인정했다.

그녀는 원망스러웠지만 뱃속에 아이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었으니까.

그 아이는 자신의 아이가 확실했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그 이후에 아이를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태어났다는 기록도 출생신고를 했다는 기록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아이는?”

“스트레스로 유산했어.”

손진철은 자신의 아이가 너무도 궁금해 다시는 그녀를 찾지 않겠다는 다짐을 깨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집 앞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린 끝에 들은 대답은 허무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은 꼭 되묻더라. 나를 못 믿어서 그런 거야? 말 그대로야 스트레스로 유산했다고.”

“그럼 우리 아이는…….”

“어. 세상에 없어. 잘 됐지, 뭐.”

“뭐?! 지금 잘됐다고 그랬어?”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다시 한번 손을 올리는 손진철.

하지만 이번엔 순수히 뺨을 내주지 않는 남민지였다.

“그게 내 잘못이야? 아이를 잘 지키고 잘 키우려 온갖 노력을 했어. 이혼 후 스트레스가 심해진 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임산부가 하루도 안 빠지고 일을 한 게 아이를 지키려고 노력한 거야? 그리고 이혼은 내가 하자고 했어?”

“휴… 말을 말자.”

핑곗거리가 떨어진 남민지는 자리를 회피하려 했다.

“그리고 내 앞에서 손 그만 들지? 그때는 내가 죄인이라 참았지만, 이제는 안 참을 거니까. 대학교 때 운동하면서 구치소 자주 들락거려서 잘 알지? 얼마나 엿 같은지.”

아직 분이 풀리지도 대화가 끝나지도 않았지만, 남민지는 그대로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손진철은 주먹을 불끈 쥐고 고개를 숙이며 생각했다.

이제 그녀를 보호해 줄 이유는 없다고.

‘손진철 씨 인생을 저희 방송사 특집 다큐멘터리로 내보내려 합니다.’

‘됐습니다. 굳이 이혼한 와이프를 곤경에 빠트리게 하고 싶지 않네요.’

그리고 얼마 전 자신의 인생을 기사로 내보내겠다던 LBC 경쟁 방송국 PD의 말이 떠오른 손진철이었다.

“휴…….”

몇 개비의 담배를 연달아 핀 손진철은 이윽고 전화기를 들었다.

“다큐멘터리, 찍겠습니다.”

* * *

“숨겨진 아들이라…….”

10억.

아들에 대한 비밀과 양육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받은 돈.

손진철이 깨끗한 선거를 할 수 있던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법원에서는 성격 차이로 인한 합의이혼으로 둔갑했지만, 손진철은 10억 원의 현찰 다발을 위자료로 받았다는 소리다.

“정확히 말하면 살아 있을지 아니면 남민지 말대로 유산이 됐을지는 모르는 거지. 다만, 유산했다는 병원 기록이 없으니까 의아하기는 하네. 손진철 얘기만 들어보면 모든 게 이상한 여자이기도 하고.”

“추적이 불가능한 겁니까?”

“지금 상태로는 불가능할 것 같아. 출생신고도 되어 있지 않으니.”

“신분이 없이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겁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대한민국에 없을 수도 있고. 아마 후자일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 싶네.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신분 없이 살기란 불가능하니까.”

“일단 들어가시죠.”

나와 강철호는 그 말을 끝으로 고려 전단으로 들어갔다.

너무나도 큰 단서를 얻어 온 우리였지만, 여전히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끝까지 숨기긴 했지만 아마 남민지가 손진철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내 생각도 그래.”

고려 전단 계단을 내려가며 강철호와 나는 끝마치지 못한 얘기를 계속 나누었다.

“다만, 손진철이 다큐멘터리를 찍을 거라고는 예상 못했을 겁니다.”

방송이 나간 후 얻은 유명세와 위자료로 받은 10억.

두 가지가 합쳐져 국회의원이 될 수 있던 손진철이었다.

“아직 섣부른 판단은 말게. 범상치 않은 여자라면 그것까지 예상했을 수도 있으니.”

“설마요…….”

나와 강철호가 머릿속에 정보를 채워 왔을 거라 기대하는 수사팀들은 따뜻한 커피로 우리를 맞이했다.

하지만 우리가 가져온 정보는 수사팀들의 머릿속을 더욱 복잡하게 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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