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장 (32/35)

제2장

김주상을 만난 다음 날.

나는 다시 평창동을 찾았다.

“사는 곳도 비슷하네.”

감사원장의 공관과 정종진 회장의 자택은 불과 1㎞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아이고! 연락도 없이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에요.”

초인종을 눌렀을 뿐인데 정종진 회장은 큼지막한 대문을 열며 나를 반겼다.

강서빈 회장의 펜트하우스를 보고 더 이상은 놀랄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건 내 오산이었다.

재계 순위 15위 회장의 저택.

집이라기보다는 커다란 테마파크에 온 기분이었다.

“차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 보인 것은 넓은 마당이었고, 그 넓은 마당 한편에는 억 소리 나는 차량들이 몇 대나 주차되어 있었다.

사실 대문과 저택 사이에 있어 마당이라 표현한 거지 대문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넓은 공터 같았다.

중앙에는 커다란 분수대가 있었으며, 오른쪽에는 수십 대의 차량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주차장 자리가 보였다.

또 그 왼쪽으로는 축제를 해도 될 만큼 많은 꽃밭이 펼쳐져 있기까지 했다.

“네. 취미 생활이죠, 뭐. 차도 좋아하고 경비행기 운전도 좋아합니다. 젊었을 때는 스카이다이빙도 자주 했습니다.”

“회장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르네요.”

“하하하, 돈 많은 사람들의 취미 생활이야 다 비슷하죠.”

대문에서 정종진의 집까지 한참이나 걸은 것 같은데 아직 현관문은 나오지 않았다.

“집안까지 들어가는 데만 해도 지치겠네요.”

“보통은 차량을 타고 들어오거나 마당에서는 골프 카트를 타고 움직이죠.”

초인종을 누른 후 대문이 열리기까지 왜 시간이 오래 걸렸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들어가시죠. 오신다고 미리 연락 주셨으면 괜찮은 술자리라도 세팅해 놨을 텐데 아쉽네요.”

“술은 가리지 않고 잘 마시니 괜찮습니다.”

“하하하, 우리 한 검사님 순수하시네. 아직 젊으셔서 그런가? 아쉬운 대로 메이드라도 앉혀 놓을까요?”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온 우리.

괜찮은 술자리가 무엇인지는 단번에 이해됐다.

입구에 서 있던 젊은 메이드의 엉덩이를 자연스레 만지는 정종진 회장의 모습을 보고서 말이다.

“아니지. 우리 한 검사님한테는 나이가 좀 많나? 위층에 있는 애들 좀 불러와 봐.”

“네…….”

두 손을 공손히 모으며 대답하는 그녀.

정종진 회장의 말에 조심스레 위층으로 올라갔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검사님. 이건 비밀이지만…….”

정종진이 비열한 미소를 보이며 내 귀에 자신의 입을 가져다 댔다.

그의 말을 들은 나는 썩은 내에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애들도 있으니까요. 하하하!”

씨발.

“휴…….”

지금 당장 놈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지만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끓어오르는 속을 깊은 한숨으로 식혔다. 그러는 한편 분노에 떨리는 손으로 커피 잔을 집으며 말했다.

“됐습니다.”

“에이∼ 여자 친구가 있으신가? 저도 아내가 있지만 쟤네는 또 다른 맛이 있어요. 존중을 안 해 줘도 되니까.”

“시간 없으니 일 얘기나 하시죠.”

“흠… 혹시 그쪽 취향이신가?”

찌릿.

“아,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했네요.”

자신을 째려보는 걸 느꼈는지 정종진이 곧장 사과를 건넸다.

하지만 내가 그를 째려본 이유는 내 취향을 의심한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녀석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지 못하는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지.

하지만 곧 자신의 턱이 돌아가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주 끔찍한 고통을 말이다.

“저한테 말고 아까 그 메이드한테 사과하시죠.”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 말에 당황한 듯 말끝을 흐리는 정종진.

녀석의 뒤로 위층으로 올라간 메이드가 다른 메이드를 데리고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저분한테 사과하시라고요.”

“하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재들은 제가 고용한 애들입니다.”

“저분들은 여기서 일을 하는 거지 당신의 장난감이 아닙니다.”

“흠…….”

자리에서 일어나 메이드에게로 향하는 정종진.

내가 좋은 일로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과 화가 났다는 걸 눈치챘는지 더 이상 얼굴에 미소가 보이지 않았다.

“제가 말씀을 잘못 드렸군요. 이것들은 고용한 게 아니라 제가 산 겁니다.”

정종진이 보란 듯이 양손으로 메이드들의 엉덩이를 만지며 말했다.

“너희들 기분 나빠? 그만둘까?”

“아닙니다, 회장님…”

“그래. 그럼 저기 보이는 한 검사님 기분이 좀 나쁘신 것 같은데 가서 좋게 해드려.”

“네…….”

쾅!

자신들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며 다가오는 메이드 두 명.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나는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쳤다.

“아이고! 우리 한 검사님 화가 많이 나셨나 보네. 애들이 마음에 안 드시나?”

깜짝 놀라는 메이드들과 장난을 치듯 말하는 정종진.

“마음에 안 들면 어쩔 수 없지. 너희들은 올라가 있어.”

“네.”

녀석의 말에 메이드들은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고, 정종진은 아까와 다른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질문은 건넨 건 내가 아니라 정종진이었다.

녀석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자신을 찾아온 목적이 있다는 걸.

그리고 그 목적이 좋은 쪽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보아하니 나랑 웃고 떠들자고 온 것 같지는 않은데 혹시 내가 한 검사한테 서운한 행동이라도 했소?”

“아니요. 서운한 건 없습니다. 다만, 저는 처음부터 당신과 친구를 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네.”

“앞으로 내가 죽도록 싫어질 거라는 소리입니다.”

정종진 재계 15위 KC 그룹의 회장.

김주상을 내 수족으로 만든 방법과는 다르게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녀석은 정계가 아니라 재계에 속해 있는 인물이니까 말이다.

개인 재산만 1조가 넘으며 40개가 넘는 계열사를 보유하고 있으며 전국경제인연합회의 회장이다.

물론 우리 같은 사람들이 생각하기엔 너무도 많은 재산과 큰 기업이었지만, 전경련 입장에서 보면 회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KC 그룹 앞으로 14개의 대기업이 있으며, 1조 원이 넘는 자산을 가진 사람은 서른 명이 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정종진은 재계에서 안테나로 통했다.

서글서글한 인상과 친화력을 통해 국내 굴지의 대기업 총수들과 인맥을 쌓았으며 정계에도 많은 인맥이 있었다.

정경유착의 다리라고나 할까.

재벌 총수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국회의원, 혹은 장관들을 연결시켜 주었으며, 그로 인하여 정계와 재계에는 많은 유착 관계가 생겨났다.

그렇게 전경련의 회장 자리에 앉게 되었고, 재계 15위 그룹의 총수가 재계에서 행사하는 영향력은 그 어떤 기업의 총수보다 더 커졌다.

그러나 그 모든 건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어 낸 것이 아닐 테다.

클럽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할 일이니까.

서글서글한 인상과 친화력 역시 하나의 수단일 뿐.

아까 보았듯 정종진의 속에는 더럽고 추악한 악마가 들어 있었다.

“뭐라고요?”

“내가 당신한테 아주 고통스러운 존재가 될 거란 얘기입니다.”

“그럴 리가요. 우리는 이제 한배를 탄 사람들 아닙니까? 생각해 보면… 제 행동이 무례했던 것 같습니다. 용서해 주시죠, 한 검사님.”

처음 나를 반겼을 때의 표정으로 돌아온 정종진.

이미 칼을 뽑아든 나한테 이런 표정을 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완전 싸이코패스네.”

정종진 같은 녀석을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법무연수원에서 배운 사이코패스의 몇 가지 유형.

바른 이미지와 건실한 사업가에서 나올 수 있는 사이코패스의 유형이 딱 지금의 정종진과 같았다.

“하하! 싸이코라니요. 잘해 보자는 사람한테 너무하시는군요.”

“누가 당신과 잘해 보자고 했습니까? 그리고 누가 당신과 한배를 탔다고 한 거죠?”

“제가 또 잘못 말씀드렸군요. 당신의 목적이 어떻든 이미 한배에 탔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같이 죽거나 같이 사는 거죠.”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죽는 건 당신 혼자입니다.”

“보아하니 검사의 사명감을 버리지 않고 클럽이라는 배에 올라탄 것 같은데 다시 내릴 수는 없을 거요. 강 한가운데에 있는 배 안에서 어찌 혼자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군요.”

“그거야. 쉽죠.”

소름 끼치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는 정종진.

녀석이 정상이 아니라는 확신이 점점 강해졌지만, 녀석이 굴리고 있는 머리는 꽤 좋은 것 같았다.

내가 언더커버 수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챘고, 목적 역시 알고 있는 듯 보였다.

“한 명을 밀어 버리면 되니까.”

“하하하! 내가 한 검사한테 밀릴 만큼 약해 보입니까?”

“그럼 저는 당신한테 질 것 같습니까?”

누구의 힘이 더 센지 사회적 위치로 따진다면 당연 정종진의 우세할 것이다.

재산으로 따져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만, 녀석은 나를 결코 이길 수 없다.

힘을 얻기 위한 과정이 올바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도록 공부해 사법고시에 붙었고, 기소권이라는 무기가 쥐어진 검사와 온갖 추악함과 비리가 가득한 재벌 총수가 들고 있는 돈이라는 무기.

보통의 경우에는 후자가 이기겠지만 나는 조금 다르다.

내 뒤에는 훌륭한 수사팀들이 있고, 나는 녀석의 돈이 무섭지 않으니까.

추악함과 비리가 가득한 돈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반드시 전자가 이기는 세상을 만들 것이다.

“당신 같은 사람이 가장 무서워하는 게 뭔 지 알고 있습니까?”

“글쎄요… 저는 무서운 게 없는데요.”

“돈.”

“하하! 그럴 리가요. 돈이 왜 무섭죠? 얼마나 달콤한데. 집 안에 마음껏 주무를 수 있는 메이드들도 데려다 놓을 수 있고, 남들이 누려 보지 못하는 걸 누릴 수도 있죠.”

“그렇게 달콤하기에 항상 잃어버릴까 두려워하고 있죠.”

“뭐?”

“올바른 대가로 번 돈이 아니니 하루아침에 빼앗겨도 되찾을 수도 없을 거고요.”

정종진의 저택을 찾아오기 전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백성원과 서윤호가 파악한 그는 여자를 좋아하고, 장난감처럼 생각했으며 사치 역시 심했다.

젊은 여성들과 찍힌 민망한 사진들과 회사 돈을 빼돌려 자신의 사치를 위해 쓴 증거들.

거기에 그를 원망하는 수많은 제보자들까지.

“심심한데 TV나 볼까요?”

— 정종진 KC 그룹 회장이 성폭행 혐의로 피소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을 기소장이 아닌 차치홍 기자의 메일에 적었다.

“하하! 고작 준비한 게 이거요? 당신이 누굴 꼬셔서 이런 짓을 벌이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갖고 논 수많은 여자들 중 하나일 뿐이요. 이런 일이 처음일 것 같아요? 대한민국에서 성폭행은 아주 가벼운 범죄인 걸 알 텐데요. 시간이 지나면 금세 잊히죠. 또 거액의 합의금을 건네면 그때부터 여론의 화살은 내가 아니라 피해자들한테 돌아가고.”

“좆까는 소리하고 있네.”

“어찌 그런 욕을… 이제 보니 아주 저급한 사람이었군요, 한 검사.”

“저급한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지. 그리고 아직 뉴스 안 끝났으니 계속계속 보기나 해.”

내 목적은 정종진을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게 아니었다.

그럴 수도 없을 뿐더러 정종진은 지금 흘러나오는 뉴스에 콧방귀만 뀔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정종진 회장의 성폭행 혐의로 KC 그룹의 지주회사인 KC 홀딩스의 주가는 하안가를 기록했으며…….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의 표정은 굳어졌다.

— 또한 SY 그룹 강서빈 회장은 이번 사태에 깊은 유감을 표했습니다. 강서빈 회장은 정종진 회장을 능력 없고 추악한 경영자라 강력히 비판했습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내가 말했지. 앞으로 내가 당신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겠다고.”

재계 15위 KC 그룹의 재무 상태는 너무나 열악했다.

겉으로만 튼실할 뿐 정종진의 사치 때문에 톡하고 건들면 쓰러질 정도로 말이다.

“추악하게 번 돈은 떳떳하게 번 돈을 이기지 못하는 법이지.”

“설마…….”

설마 하며 고개를 돌리는 정종진.

그리고 아나운서의 말은 녀석을 절망으로 빠지게 만들었다.

— 이에 강서빈 회장은 KC 홀딩스를 적대적 M&A를 통해 인수하겠다고 발표했고, 깨끗한 회사로 키우겠다고 말했습니다. 기업이 적대적 M&A를 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며 국민들 역시 SY 그룹을 향해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 * *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자산 총액 25조짜리 회사의 모든 의사 결정을 단 1조 원의 주식으로 할 수 있던 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KC 그룹의 환상형 순환출자 때문이었다.

물론 국내 대기업 중 상당수가 순환출자 형식을 통해 적은 지분으로 기업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순환출자는 연결되어 있는 한곳이 무너지면 기업 전채가 도미노처럼 와르르 무너지는 단점이 있다.

특히 IMF 이후로 순환출자의 위험성을 깨달은 대기업들은 대부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였으나, KC 그룹은 그럴 수 없었다.

지주회사로 전환하려면 순환출자로 만들어 놓은 눈에 보이지 않는 환상형 지분을 돈을 들여 실제로 만들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난 자본이 필요했다.

하나 KC 그룹은 정종진의 무능함 때문에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할 수 있을 만큼 재무구조가 튼튼하지 않았고, 정종진 회장의 1조 원이 넘는 자산 역시 허수가 많았다.

“지금 우리 KC 그룹을 통째로 먹겠다는 겁니까?”

“그럴 수도 있고.”

“강서빈 회장이랑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KC 그룹이 고작 SY 그룹한테 먹힐 것 같습니까?”

“흠… 그건 아직 모르죠.”

“아니. 지금 당신 실수하는 거요. 몇 천 억쯤은 쉽게 융통할 인맥은 되니까.”

여타 순환출자로 기업을 지배하는 재벌가들이 그렇듯 KC 그룹 역시 순환출자 꼭대기에 있는 기업은 KC 그룹과 전혀 상관없는 그룹이었다.

당연히 상장도 되어 있지 않았고, 지분의 90퍼센트 이상을 정종진과 그의 일가족들이 보유하고 있었다.

“돈으로 쌓은 인맥은 돈 때문에 무너지는 법이죠.”

“그래서 더 확고한 거죠. 우정으로 쌓은 인맥은 깨지기도 하지만 돈으로 쌓은 인맥은 돈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안 깨지니까.”

“잘 알고 계시네요.”

“뭐?!”

이곳에 오기 전 강서빈 회장이 나에게 한 말이 있다.

경영진들만 제외한다면 꽤 괜찮은 계열사를 보유한 KC 그룹을 인수하겠다고.

하지만 쉽지 않을 것 같다고도 말했다.

썩은 경영진들과 무너질 것 같은 재무구조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재계 15위 대기업인 것은 분명하니까.

또 정종진 회장을 도와줄 사람도 많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곳에 오기 전 강서빈 회장은 나에게 또 다른 방법을 하나 말해 주었다.

먹는 건 쉽지 않지만 무너뜨리는 건 너무나 쉽다고.

“회장님 말대로 돈으로 쌓은 인맥은 돈이 사라지면 깨지는 법이니까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SY 그룹은 KC 그룹을 인수하지 못한다면 무너뜨리기 위해 온갖 힘을 다 쓸 겁니다.”

“하하! 미친 소리를 하는군그래. 강서빈 회장이랑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 역시 재벌 총수요. 당신 말 하나만 믿고 기업과 임직원들이 위협에 빠질지도 모르는 그런 도박을 할 것 같소?”

“당신이 말한 SY 그룹을 누가 만들었을 것 같습니까?”

“뭐?!”

사실 최후의 수단이긴 하지만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KC 그룹을 무너뜨리기 위해 SY가 온갖 자본을 쏟아붓는다고 하여도 무너질 정도의 재무구조는 아니었다. 비록 흔들리긴 하겠지만… 임직원들 역시 대부분이 민태호와 연관된 식구들이였다.

즉, 월급만 밀리지 않는다면 우리를 믿고 기다려 준다는 뜻이다.

“혹시…….”

정종진 머릿속에 든 생각.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SY 그룹을 만들었다는 것 외에는 지금 일어나는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완전 미친놈이네 이거.”

“힘 있는 자와 싸우기 위해서는 검사라는 직업 하나로는 부족하죠.”

당연한 얘기 아닌가.

재벌 총수와 국회의원, 거기에 국정원장에 국방부 장관까지.

과거로 돌아왔다는 점과 SY 그룹이 내가 만든 내 스폰이라는 점.

그리고 강철호 검찰총장이 동아줄이 없었다면 싸워볼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인수하지 못하면 자폭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이 돈으로 쌓은 인맥도 전부 사라질 것이고, 그동안 당신의 더러운 돈 때문에 참고 있던 피해자들이 너도나도 당신을 고발하려 하겠죠.”

돈이 사라지고 재벌 총수라는 직위가 없어지면 그가 두려울 이유는 하나도 없다.

지금껏 그가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던 여성들.

어려운 가정환경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이 집에 있는 메이드들은 전부 들고 일어날 거다.

정종진의 돈을 받으며 뒤를 봐주던 정종진보다 훨씬 더 더러운 판검사와 여러 공무원들까지 전부 사라지게 될 테니까.

모든 피해자들은 정종진을 향해 고소장을 날려댈 것이고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올까 두려워 판검사들은 평소보다 더 엄한 처벌을 내리려 할 것이다.

그로 인하여 KC 그룹의 주식은 끝도 없이 떨어질 것이며, 정종진이 보유한 주식들 역시 휴지 조각이 될지도 모른다.

“사회적으로 매장되어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는 당신을 클럽이 그냥 품고 있을 거 같습니까? 클럽 역시 당신의 돈에서 나오는 추악함을 마음에 들어 했을 것인데?”

“…….”

“KC 그룹 순환출자의 꼭대기에는 계열사와 전혀 상관없는 중앙푸드라는 곳이 있죠. 주로 교정본부에 급식을 납품하는…….”

KC 그룹 계열사 중 유일하게 재무구조가 튼실한 곳.

중앙푸드가 무너지게 되면 KC 그룹 전체가 줄줄이 무너지기에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재무구조를 운운할 만큼 큰 회사도 아니고 말이다.

“용케도 알고 있네. 그럼 방법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텐데?”

“하하, 실무는 임원들이 하고, 법무이사가 가져다 준 서류에 사인만 하고 있으니 이렇게 무식하죠. 한 기업의 총수라는 사람이. 쯧쯧.”

여유로운 척 말하려 했지만, 정종진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순환출자라는 개념도, 자기가 어떤 식으로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잘 못 배운 재벌 2세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정종진이었다.

기부 입학으로 받은 해외 유명 대학교의 학위와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으로 얼떨결에 물려받은 KC 그룹.

자기가 지금껏 한 거라고는 흥청망청 사치를 하며 쌓은 인맥밖에 없었단 소리다.

“순환출자는 엄청난 자본을 투자해서 지배 계열사 하나를 끊어 버리면 산산조각이 나는 겁니다.”

물론 KC 그룹을 인수하려는 기업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이득이 될 게 없다.

남 물 먹이고 싶다는 감정 때문에 엄청난 자본을 투자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주주들이 허락할 일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SY 그룹은 다르다.

이미 뉴스를 통해 적대적 M&A를 하겠다는 대대적인 발표를 했고, 국민들 역시 찬성표를 보내고 있었다.

“내가 알기론… 인수합병 소식이 나면 주가가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오를 텐데?”

“네, 맞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당신의 회사에 자사주를 매수하기 힘들어지죠. 그 말뜻은 곧 경영권을 방어하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고요.”

“그게 무슨…….”

“휴… 차라리 공부 잘하는 대학생을 앉혀 놓고 경영 수업을 하는 게 빠르겠네.”

뉴스가 나간 건 오후였고, 주가가 폭등하는 건 내일이다.

“오늘 오전 SY 그룹은 이미 시장에 풀린 KC 그룹의 모든 주식을 우회적으로 매수해 놨습니다.”

“그건 불법…….”

“하하! 불법을 밥 먹듯이 저지르는 사람이 불법을 운운하는 게 웃기네요.”

억울하다 말도 못할 것이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려 하겠지만, 아무도 정종진의 손을 잡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여론은 그에게 욕을 퍼붓고, 지금껏 정종진에게 당한 피해자들은 쌓아 놓았던 분을 풀려고 할 것이다.

“원하는 게 뭡니까…….”

김주상 감사원장과 같은 말.

추악한 녀석들이 하는 말은 어쩜 이리 한결같이 똑같을까.

“앞으로 내 지시대로 움직이세요.”

자신에게 방법이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추악함으로는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만났을 때.

그리고 그 상대가 두렵다고 느낄 때.

정종진 같은 놈은 끝도 없이 추해진다.

“그럼… 살려 주시는 겁니까?”

아니.

내 대답은 분명 아니었다.

녀석은 결국 감옥에 가게 될 것이며 KC 그룹은 올바른 경영진들을 통해 깨끗한 회사가 될 것이다.

하지만 녀석을 속이고 이용하며 버리는 것은 아무런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네, 살려드리겠습니다. 대신 무릎을 꿇으세요.”

“네?!”

그리고 괴롭히고 끝도 없이 고통을 줄 것이다.

김주상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정종진에게 만큼은 더 큰 고통을 말이다.

내 눈앞에서 보지 않았는가.

녀석은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다.

“안 꿇어요? 거지 되어 가지고 평생 감옥에서 살게 해 드릴까요?”

“아, 아닙니다…….”

쿵!

녀석의 무릎이 고급스러운 대리석과 부딪혔다.

자신의 집에서 나에게 무릎을 꿇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겠지.

“아니. 나한테 말고 위층에 있는 메이드들한테 꿇어요.”

“뭐라고요?!”

“아∼ 자꾸 두 번 말하게 하네 짜증나게.”

“아, 아닙니다 지금 당장 불러오겠습니다.”

“뭘 불러와. 당신이 직접 가서 꿇어요. 그리고…….”

자신이 동물처럼 행동하는데 목줄을 잡은 지금 정종진을 사람 취급해 줄 필요는 없었다.

무릎을 꿇은 녀석 앞에 앉아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까닥거리며 명령하는 것쯤은 이제 시작이란 소리다.

“제 사람이 회장님 저택에 와서 일을 하게 될 겁니다.”

“네?!”

“메이드들은 제가 납득할 만한, 지금껏 피해 보상이 담긴 넉넉한 퇴직금 주고 해고하세요. 보복할 생각은 하지도 말고.”

“누가 저희 집에…….”

“걱정 마십시오. 힘도 좋고 일도 잘할 겁니다. 특히 운전과 회장님에 대한 경호는 완벽히 해낼 겁니다. 다만…….”

“다만?”

“몸에 문신이 좀 있고 회장님 말보다 제 말을 더 잘 들을 테죠.”

정확히 말하자면 민태호의 말을 더 잘 듣겠지만, 서울연합파 식구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내 말이 곧 민태호의 말과 같다는 걸.

“싫어요?”

“…….”

고개를 푹 숙인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정종진의 표정.

자신보다 강한 사람의 협박에 미세하게 떨리는 어깨.

아까 보았던 메이드들의 모습과 같았다.

“싫냐고.”

“아, 아닙니다…….”

그리고 앞으로 정종진이 보인 지금의 이 모습은 계속될 것이다.

내가 목줄을 풀어 주기 전까지, 그리고 녀석이 감옥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마 살아생전 나올 수 없는 선고가 떨어질 테니 평생 이 표정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알겠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 * *

남대문 근처의 작은 빌라.

이제 남은 인물은 단 하나. 한탁희 민정수석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한탁희의 목줄을 채울 방법을 찾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 깨끗했다.

검사 시절에도 인권 변호사 시절에도 말이다.

여론 역시 한탁희 민정수석을 마음에 들어 했고, 또 인정했다.

민정수석.

그만큼 권력이 강한 자리인데다가 여론의 비호까지 받고 있으니 그야 말로 언터처블한 존재가 되어 버렸단 소리다.

차기 대권 주자라는 소리가 나올 만큼 스타성이 있었고,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주한호 대통령 덕분에 여당과 야당은 곧 청와대를 떠날 한탁희를 영입하려 온갖 노력을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 한 검사,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에요.”

하지만 한탁희 민정수석을 만난 지금.

나는 어떡해서든 그를 무너뜨려야 했다.

* * *

한탁희의 집을 찾아가기 전.

수사팀과 나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꽤 많은 시간을 들였음에도 완벽한 해결을 보지 못했다.

“세금, 여자, 청탁… 심지어 도박 문제도 캐 봤는데 깨끗합니다.”

그야말로 언터쳐블한 존재였다.

VIP의 핫라인을 가동해 그를 해임시킬 수는 있었지만, 그 방법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오기에 접었다. 대신 한탁희의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 모든 걸 뒤졌으나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주한호 대통령 역시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자신을 보좌하는 비서관이었지만 대통령의 권좌는 이제 1년도 채 남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레임덕을 막아 준 한탁희를 쳐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명분 역시 없었다.

클럽의 존재를 알고서 클럽을 없애기 위해 자신의 힘을 빌려준다 말한 주한호 대통령이었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한탁희를 쳐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통령이란 임기가 끝나는 것은 곧 정치계를 은퇴한다는 소리와 같았다.

아무런 부담 없이 민정수석의 해임 서류에 사인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다.

떠오르는 정치계의 샛별을 여당과 야당 가리지 않고 보호하려 하기 때문이다.

“휴… 이게 말이 됩니까? 클럽 소속의 관리자가 이렇게 깨끗하다는 게.”

심지어 너무도 깨끗하니 여론 역시 한탁희를 두둔했고, 그로 인하여 주한호 정부의 지지율이 올랐다.

그런 상황에서 민정수석을 해임한다?

정계에 몸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실패한다면… 그래서 한탁희를 잡지 못한다면 퇴임 후 엄청난 보복 수사가 주한호 대통령에게 향할지도 모른다.

주한호 역시 그 사실을 알기에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실패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지금 상황에서 백프로 믿지도 못하니까.

간단하게 말해 힘으로 한탁희를 찍어 누를 수는 없다는 소리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서 검사님.”

나는 회의실 스크린 옆에 서서 브리핑을 하는 서윤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백성원 원장이 한숨을 푹푹 쉬며 비켜 준 자리에 서 있는 서윤호 역시 한숨을 쉬고 있었다.

아무리 풀어도 나오지 않는 답에 두 사람 모두 답답할 것이다.

“지금 저희의 목표는 한탁희를 구속시키는 게 아니라 쥐고 흔드는 겁니다.”

“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속이라도 시킬 사유가 있어야 쥐고 흔들 발판을 마련해 볼 텐데 그것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문제는 한 두 개가 아니었다.

민정수석의 권력과 여론의 보호. 그리고 국회의원은 당연하고 시간이 지나면 대선까지도 노려볼 만한 인물이니 여당, 야당 가리지 않고 그를 영입하려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미안한데 내가 한마디 해도 되겠나?”

“네, 원장님.”

서윤호와 내가 서로를 마주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자 백성원 원장이 조용히 대화에 끼어들었다.

“자네들도 잘 알다시피 한탁희는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민정수석일세. 즉 서 검사가 그를 조사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말이야.”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민정수석의 권력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을 못할 텐데, 내부에서는 이런 말이 돈다.

민정수석이 나는 새를 가리키면 떨어질 것이고 날지 못하는 새를 가리키면 훨훨 날아갈 것이다.

선출직을 제외한 대한민국의 모든 공무원들은 거진 대통령이 임명한다.

그리고 그런 대통령의 귀에 입김을 불어넣는 게 바로 민정 수석이다.

즉, 대통령의 책상 위에 올라갈 인사에 관한 모든 서류는 민정수석실의 검증을 거쳐야 한다는 소리다.

“방귀 좀 뀌는 고위 공무원이라면 민정수석의 눈치를 보고, 특히 검찰은 그 정도가 심하지.”

“네, 맞습니다.”

민정수석의 대부분은 검찰 출신 인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민정(民政)

국민의 안녕 유지와 행복 증진을 꾀하는 일.

민정수석에서 민정이란 쉽게 말해 국민들의 민심을 살피고 여론의 동향을 파악하는 일이다.

또한 민정수석이 청와대에 실세라 불리는 이유는 대통령의 업무 중 하나인 공직과 사회 기강에 대한 부분을 담당하며 법률을 보좌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정수석의 가장 큰 힘은 바로 사정 기관을 지휘할 수 있는 사정권에서 나온다.

사정(司正)

그릇된 일을 다스려 바로잡음.

행정부 산하에 있는 모든 기관들은 대통령의 지휘 아래 움직인다.

그중 권력 기관의 대부분인 검찰과 경찰, 그리고 감사원과 국정원, 그밖에 대한민국의 수많은 사정 기관들은 전부 사정을 담당하는 민정수석이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사정 기관 공직자의 부정부패를 단속하는 것 역시 민정수석의 업무이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검찰 출신 인사가 민정수석에 임명되는 것이 당연한 관례처럼 여겨져 왔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업무 특성상 해박한 법률 지식이 필요했고, 사정 기관 중 국민들과 가장 큰 연관성이 있는 검찰 출신이 맡는 게 당연시 여겨졌다.

비검찰 출신 민정수석 역시 검찰은 아니라 해도 법 지식이 없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나 역시 뾰족한 수가 없지만 서 검사는 일단 몸을 사리는 게 어떨까 싶네. 조금이라도 티가 난다면 바로 한탁희 귀에 들어갈 게 빤하니.”

“흠…….”

백성원 원장의 말을 듣고 보니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

한탁희 역시 검찰 출신이었고, 검찰에 대한 장악력이 그 어떤 민정수석 보다 뛰어났다.

일개 평검사 하나쯤은 언제든지 밟아 죽일 수 있는 개미처럼 보일 것이다.

“아무래도 그게 좋겠습니다. 백성원 원장님 말대로 서 검사님은 당분간 움직이지 마세요.”

“그래도…….”

“저는 여러분을 위협에 빠트리려고 도와달라고 한 게 아닙니다. 만약 서 검사님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 제 죄책감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휴… 일단 알겠습니다.”

실랑이는 그리 길지 않았다.

회의라는 주재 아래 존댓말로 대화를 나누었지만, 서윤호는 내 눈빛 속에서 자신의 대한 걱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니 나와 말싸움을 벌여 봤자 소용없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서 검사, 서운하겠지만 한 검사가 자네 걱정해서 하는 말이니 이해하게.”

“서운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게…….”

“하하! 그렇게 따지면 나는 가만히 앉아서 어드바이스만 하는데 내가 더 도움이 안 되지 않겠나?”

고개를 푹 숙이며 자리로 돌아가는 서윤호의 등을 토닥이는 강철호였다.

검사에게 있어 자신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서윤호의 기를 살려 주려 하는 것이다.

“서 검사뿐만 아니라 백성원 원장님 역시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급수로만 따지면 민정수석은 차관급이고, 국정원장은 장관급이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 애매모호했다.

수사권을 가진 국정원과 검찰 사이가 애매하듯 말이다.

국정원장이 작정하고 밀어붙인다면 한탁희 역시 애를 먹겠지만, 그렇다고 서로를 견제할 만큼 팽팽한 사이라고 하기에도 좀 그렇다.

국가정보원은 대통령 직속 기관이고, 민정수석은 대통령의 수석비서관들 중 하나다.

누구의 말이 더 대통령에 귀에 와닿을까?

정답은 그때그때 다르다.

대통령이 누구를 더 신뢰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니까 말이다.

하지만 국가정보원 역시 사정 기관 중 하나고, 부정부패가 없다 하여도 한탁희 민정수석이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괴롭힐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꼬투리라도 잡히는 날엔…….

괴롭힘이 문제가 아니라 카운터펀치가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그렇지 않아도. 클라우드 로그인부터 로그 기록 삭제까지 내가 직접 일일이 타자를 두드려서 하고 있으니 걱정 말게.”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그러니까 일 끝나면 진짜 비싼 술 사야될 거야, 한 검사. 국정원장이 일개 검사 하나 때문에 이 나이에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으니.”

“하하…….”

그리고 무엇보다 확실한 목줄을 채우기 전에 자신을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내가 지금 아무리 은퇴한 노인네라지만, 그래도 검찰총장 출신인데 한 검사 말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있으니…….”

“아따! 그럼 지도…….”

“조용히 하세요, 부회장님.”

“야… 알것어라, 회장님…….”

그나마 다행인 건 모두가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커다란 벽 앞에서도 수사팀은 모두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었다.

찡그린 표정에 분위기가 다운되고 서로를 탓하며 와해되는 결과를 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완벽한 놈을…….”

일단 우리의 한계 내에서는 한탁희를 묶어 둘 목줄을 찾을 수가 없었다.

스토리 역시 완벽했다.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사법고시에 합격했고, 검사 시절 보여 준 뛰어난 실적, 거기에 부정부패에 맞서 싸우다 검찰 조직의 부정부패를 비판하며 인권 변호사가 되었다.

이보다 완벽한 스토리가 어디 있겠는가.

심지어 인권 변호사 시절에는 소외된 이웃들을 무료로 변호하며 대형 사건을 맡은 적도 있었다.

덕분에 한탁희는 스타가 되었고,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화려한 정계 입문을 하게 되었다.

“와이프 쪽은 어때요?”

“그쪽은 더 한다 더 해. 이것 봐봐.”

[김미진]

존스홉킨스 출신.

보건소 의사.

“와…….”

스크린에 띄어진 그녀의 프로필 중 단 두 줄만을 읽었을 뿐인데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한국판 여자 슈바이처라 불리는 그녀는 의사의 의료 행위는 돈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말하며 자신을 봉사자라 칭했다.

1년에 6개월쯤은 의료 혜택이 닿지 않는 오지로 봉사를 떠났으며, 내전을 겪고 있는 나라에서는 어깨에 총탄을 맞고 사람들을 치료하는 사진이 찍히기도 했다.

이에 국민들은 그녀가 노벨 평화상을 받아야 된다고 말했다.

물론 뜬구름을 잡는 얘기였지만, 노벨 위원회에서 그녀의 이름이 언급된 것은 사실이었다.

“사실 한탁희도 한탁희지만, 김미진 씨는 잘못 건드렸다가 우리가 아예 매장될 수도 있어. 그녀가 남편이 하는 일을 알고 있을지도 확실치 않고.”

“한 이불 덮고 자는 사이인데 모를 리 없을 겁니다.”

“남편이 클럽 소속이라는 사실을?”

“그건 확실치 않습니다만 언론에 포장된 이미지가 거짓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겠죠.”

정말 완벽한 부부였다.

한탁희에게 있어 클럽이라는 단어를 제외한다면 존경받아 마땅했다.

나 역시 클럽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고개를 숙이고 그와의 만남을 영광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일단은…….”

그렇기에 사무실에서 아무리 긴 회의를 이어 나가 봤자 시간 낭비일 뿐이다.

“직접 부딪혀 봐야겠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준비할 수 있는 게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표면상으로 완벽하니 그의 속을 들여다봐야 할 것이고, 그럴 수 있는 방법은 그와 직접 대면하는 것밖에 없었다.

“사실 서류보다 대면 조사가 더 자신 있기도 하고…….”

“하하! 이래서 검사들이 제 명에 못산다니까.”

분명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가 클럽의 관리자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 * *

“일단 들어오시죠.”

아무런 대책 없이 적을 만나러 온 것은 처음이다.

검사 시절에는 대화에 유리한 서류를 주머니에 품고 있었고, 조폭 시절에는 날카로운 무기와 든든한 부하들을 대동했다.

“그나저나 한 검사님이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네. 한 번 따로 뵙고 싶어서요.”

“하하하! 저를요? 이거 영광인데요.”

의도한 건지 아니면 욕심이 없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집안 풍경은 꽤 수수했다.

보여 주기를 위한 집이 아닌 진짜 거주하는 곳이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

평범한 사람들은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검사로서 수사를 하다 보면 자주 접하는 광경이 있었다.

본인 명의의 허름한 빌라는 선거철에만 거주하고, 실제로는 보좌관 친척 명의의 호화스러운 저택에서 머무는 국회의원들을 말이다.

위장 전입, 자녀 문제, 과거에 범죄 이력.

청문회에서 단골 소재로 쓰이는 것들 중 유독 위장 전입 문제가 붉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뭐로 대접해야 되나… 시간이 이르긴 한데 술 한잔 드릴까요?”

“그럼요, 좋죠.”

꽤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한탁희의 물음에 답했다.

눈앞에 보이는 한탁희는 분명 악이다.

그것도 아주 강하고 거대한 악.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싶지 않았지만, 술이라는 매개체가 한탁희를 약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너스레를 떤 것이다.

“하하하, 외모와 다르게 술을 좋아하는 것 같네요.”

“검사 중에 술 안 좋아하는 사람 있나요.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약인데.”

“이야∼ 한 검사 진짜 20대 맞아요? 그럼 어디 보자… 선물 받은 위스키가 있을 텐데.”

한탁희가 찻장을 뒤적거리는 동안 나는 놈의 집안을 자세히 살폈다.

10년은 되어 보이는 TV와 가죽이 벗겨진 소파.

아들과 딸, 그리고 아내와 찍은 가족사진.

그리 넓지 않은 베란다에는 화초들도 보였다.

“여기 있네. 싱글 몰트 위스키라고 하던데 술을 잘 몰라서 설명을 못 드리겠네요.”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안주는 시키겠습니다. 아내가 봉사 활동을 떠나서.”

“아참! 사모님이 좋은 일을 많이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붙어 있는 적이 별로 없습니다. 아들딸들 역시 유학 가 있고 반 기러기 아빠죠, 뭐…….”

왼손에 있는 쟁반에는 위스키 병과 컵을 올리고, 오른손에는 냉장고를 뒤적거려 꺼낸 치즈를 들고서 내게 오고 있었다.

“그럴싸한 잔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니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내가 지금껏 봐 온 악들과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다.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당장 김주상과 한탁희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까.

하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한탁희는 너무나도 달랐다.

클럽에서 보이던 위압감은 전혀 없었고, 차림새 역시 민정수석이라는 직업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한잔 받으세요, 한 검사님.”

“감사합니다.”

쪼르륵−

“저는 한 검사님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팬이었습니다.”

“하하하, 팬이라뇨?”

“약자를 위해 거악과 싸우는 검사였잖아요.”

“그건 수석님도 마찬가지였잖아요. 소외된 사람을 위해 거악과 싸우는 변호사였으니까.”

클럽 관리자들의 대화.

정의롭던 모든 행동은 과거형으로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탁희 눈빛은 전혀 과거형이 아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뭘까.

저 후회스러운 말투는.

한탁희의 말투에 혼란스러움은 더해져 갔다.

술이 취해 갈수록 한탁희의 모습은 내가 예상한 것과 정반대로 변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누가 보면 후회하시는 줄 알겠습니다.”

딱히 떠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

겉으로 보면 완벽한 민정수석.

클럽 관리자라는 타이틀을 제외한다면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인 한탁희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무슨 후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지금 하시는 일이요.”

“민정수석이요?”

“아니요. 클럽 말입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원해서 들어간 건데.”

쪼르륵−

“뭐 하나만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수석님?”

비워진 한탁희의 잔에 술을 채웠다.

“말씀하세요.”

“클럽에 들어오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더 자연스레 물었다.

내가 찾아온 목적을 위해서 말이다.

흠칫.

내 질문의 의도를 눈치챈 걸까.

시종일관 표정에 변화가 없던 한탁희가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이유는 딱 하나였다.

지금 내가 클럽의 관리자라 하지만, 지금껏 한탁희가 어떤 일을 했는지는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한탁희는 슈바이처 같은 아내를 두었고, 훌륭한 검사였다가 더 훌륭한 인권 변호사가 되었다.

딱 그 정도 사실밖에 모르고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혼란스러워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그가 바로 클럽의 관리자이며 분명 올바르지 못한 일들을 했을 거라는 것이다.

또한 지금의 나는 한탁희에게 들이댈 무기가 없다.

그게 술잔을 기울이며 능청을 떨고 있는 이유기도 했고 그의 과거를 묻는 이유기도 했다.

국정원이 한탁희의 모든 걸 파악했고,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정작 그가 클럽에 들어간 이유에는 무언가 문제가 있기 때문일 테다.

“검사님은요?”

“네?”

“마스터가 검사님을 눈여겨보고 있다는 사실은 진즉에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검사님을 관리자 회의에서 보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거든요.”

“제가 존경하던 백성원 원장님의 제안이 있었고, 자칭 스카우터라 말하던 남영진에게 설득됐습니다.”

“정말요?”

한탁희의 물음은 순수하지 않았다.

표정과 말투 속에서 의심이 가득했으니까 말이다.

“정말이라는 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도 검찰 출신이고 변호사를 하다 보니 사람 보는 눈이 꽤 됩니다. 한 검사님처럼 신념이 확고한 사람이 누군가의 설득에 쉽게 넘어올 분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는 소리입니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는 한탁희.

그런 행동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내 눈알이 굴러가는지 파악하려는 행동이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검사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 한탁희는 더 이상 나를 손님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좋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그렇기에 어설픈 거짓말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한탁희를 파악하러 온 지금, 오히려 내가 당할 수도 있다는 소리다.

“제 이미지를 어떻게 보신지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잘못 알고 계셨습니다.”

“선에서 악으로 변한 게 아니라 원래 악이었는데 선이란 연기를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네, 맞습니다. 그래야 누군가의 눈에 띄고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을 테니까요.”

“흠…….”

나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고 한탁희를 파악할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너스레와 술기운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내가 보고 있는 수수한 차림과 온화한 미소가 전부가 아닐 테니까.

“제가 생각한 거랑은 다르군요.”

“하하하, 어떻게 생각하셨는데요?”

“저는 한 검사님이 원래 선이었고, 지금도 선인줄 알았죠.”

흠칫.

한탁희의 말에 나도 모르게 눈을 흘겼다.

털이 바짝 서는 것처럼 소름이 돋았고, 참아보려 했지만 다리가 떨려왔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에요. 한잔 더 받으시겠어요?”

“네, 주세요.”

무슨 뜻이었을까.

내 몸과 머리가 따로 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떠보는 걸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처음 나를 마주할 때와 지금의 한탁희는 바라보는 시선에서부터 온도 차이가 나는 것 같았다.

“클럽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정말 혹시나 지금 한 검사님이 아직도 선이라면 위험해질지도 모릅니다.”

“저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네요.”

“아닙니다. 그냥 술기운에 해 본 말입니다. 혹시 저와 뜻이 같을까 해서요.”

한탁희는 고개를 숙이며 말한 탓에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내 입이 벌어졌다는 걸.

머릿속에 한 줄기 빛이 지나간 기분이었다.

“혹시…….”

클럽 관리자인 한탁희를 아무리 뒤져도 꼬투리를 잡을 만한 게 나오지 않은 이유.

그 역시 나와 같은 상황이라 하면 모든 게 맞아 떨어진다.

변한 게 아니었다.

악마가 선한 탈을 쓰고 있던 것 역시 아니다.

연기가 아니란 소리다.

“아직도 변호사이신 겁니까?”

“…….”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한탁희를 보며 확신했다.

그 역시 나와 뜻이 같다고.

우리가 찾지 못한 게 아니라 원래부터 없던 것이다.

클럽의 관리자가 된 이유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를 위해서였다니…….

“왜 말씀이 없으십니까… 아니, 왜 저한테 이렇게 쉽게 밝히시는 겁니까?”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술기운이라고.”

“아니요. 그게 아닌 것 같은데요.”

“그게 아니라뇨.”

술은 그저 도움을 줬을 뿐이다.

한치우라는 카드에 베팅을 할지 말지.

“제가 보기엔 지금 저에게 모든 걸 베팅하신 것 같은데요.”

“하하…….”

힘없는 웃음을 보이는 한탁희.

처음부터 악이라는 내 말이 거짓이고, 내가 언더커버 수사를 하고 있다는 믿음에 전부를 베팅한 것이다.

“그래요. 한 검사님 말이 맞아요. 그러니 얼른 대답해 주시죠. 자리를 박차고 클럽으로 향하실 건지 아니면 제 술잔을 채워 주실 건지.”

“휴…….”

조용히 술병을 들고 한탁희의 빈 잔을 채웠다.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을 텐데요. 그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할 분도, 그럴 위치도 아니고요.”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보시죠.”

“그게…….”

위스키 두 병이 비워질 때까지 이어진 긴 얘기.

한탁희가 클럽에 들어온 이유 역시 나와 비슷했다.

인권 변호사 시절 정종진 회장에 KC 그룹에 계열사인 KC 화학에서 수많은 노동자가 병으로 죽어났고, 그 사실을 파다 보니 클럽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한탁희 역시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다.

검사 시절 힘이 없어 악을 처벌하지 못한 분노.

인권 변호사 시절 KC 그룹에 건 소송이 패소하고 의뢰인들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느낀 좌절감.

그 두 가지가 섞이며 가슴 속에 있던 무언가가 폭발한 것이다.

하지만 여론은 끝까지 싸운 한탁희를 스타 변호사로 만들었고, 덕분에 클럽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한탁희는 자신의 유명세를 기회 삼아 클럽에 들어갔고, 민정수석이란 보상과 강력한 대선 주자라는 타이틀을 대가로 관리자 자리를 받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증거만 잡아 언론에 흘리고, 검찰에 고소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게 해피엔딩으로 끝날 줄 알았죠. 그런데…….”

“아무 소용이 없었군요.”

“네, 맞습니다. 기회는 한 번 뿐. 아무리 증거를 잡아보려 해만 소용없었고, 그렇기에 고소할 방법도 없었습니다. 이제는 한 검사님도 아시겠지만 클럽은 무슨 일이든 꼬투리를 남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절대적 존재인 마스터의 철저한 관리하에 조직이 운용되고 있고요.”

그렇게 기회를 엿보고 있던 한탁희의 눈앞에 내가 나타난 것이다.

혹시 자신처럼 클럽을 무너뜨리려 들어온 게 아닐까 하는 기대감과 함께.

* * *

서울 중앙 지방법원 앞.

법원을 나오는 두 사람이 있었다.

웃고 있는 변호사와 울고 있는 변호사.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듯 한쪽은 재판에서 승리했고, 한쪽은 패배했다.

“그러니까… 왜 가망 없는 일에 힘을 쏟고 그러나.”

“뭐?”

“동기 중에 너 같은 놈 한 명 있는 거? 그래 좋다 이거야. 그런데 적당히 해야지. KC 그룹이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자네가 억울한 사람들 몇 명 데리고 농성한다고 재판에서 이길 줄 알았어?”

“동기 중에 너 같은 놈이 있는 게 수치스럽다.”

울고 있는 건 한탁희였다.

그 옆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사람은 한탁희의 동기이자 KC 그룹의 법무 이사였던 고재준이고.

“탁희야. 연수원 수석으로 수료한 너랑, 겨우 수료해서 변호사가 된 나랑 누가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아?”

“나는 너처럼 더러운 놈들 돈 받아 가면서 살지는 않았어.”

“그래. 그게 문제라는 거야.”

“뭐?”

두 사람이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지도 언 20년.

한 사람은 수석이란 타이틀답게 중앙 지검으로 발령받아 뛰어난 실적을 쌓아 부장검사 자리에 올랐다.

물론 앞뒤 안 가리고 위아래 역시 신경 쓰지 않았던 탓에 금세 서울에서 쫓겨났지만 말이다.

그 일은 최연소 차장 진급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한탁희는 소속 지검장의 친형을 기소했다.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지만 결국 판사는 자신의 동기이자 차기 검찰국장이 될 지검장의 손을 들어 주었다.

소속 지검장의 친형을 기소했고, 결국 패배한 부장검사.

당연히 더 이상 법복을 입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망부석처럼 버틴다고 해도 검찰이란 조직의 눈 밖에 난 검사의 생활 역시 빤히 보였기에 한탁희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렇게 검찰에서 쫓겨나듯 인권 변호사의 길을 선택한 한탁희는 검사 시절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신념대로 법조계 생활을 이어 나갔다.

“적당히 때도 묻히고 그래야지. 나에게 내민 손이 더러운 거 알지만 눈 딱 감고 한 번 잡고 해야 네가 원하는 뜻도 이룰 수 있는 거라고.”

“내가 원하는 뜻이 뭔데?”

“정의로운 사회.

“너는 뜻만 이룰 수 있으면 과정은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하나?”

“물론 과정도 아름다우면 좋겠지.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과정까지 깨끗한 정의를 이룰 수는 없어. 힘이 있어야 정의를 이룰 수 있는 거라고. 그리고 그 힘을 얻기 위해서는 때를 묻혀야 하는 거고.”

“그건…….”

고개준의 말에 한탁희는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딱히 반박할 말이 없던 것이다.

“나야… 정의를 원하는 것도, 그렇다고 너처럼 사명심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너 같은 동기가 하나쯤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 그래서 올바른 과정을 알려 주는 거고.”

고재준은 대부분이 선택한 길을 걸었다.

연수원 성적이 좋지 않아 대형로펌을 선택할 수 없었고, 사법고시 합격증이란 증명서로 KC 그룹 정종진 회장과 인연을 만들었다.

KC 그룹 계열사 사장의 딸과 결혼을 통해서 말이다.

그렇게 KC 그룹의 법무팀으로 들어간 고재준은 뛰어난 능력은 없었지만, 한탁희와 마찬가지로 앞뒤 가리지 않고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물론 정의가 아니라 권력자를 위해서인 건 달랐다.

고재준의 실적은 당연히 정종진 회장 귀에 들어갔고, 그렇게 입사 5년 만에 법무 이사 자리에 앉게 됐다.

“그리고 항소 준비할 거 빤히 아는데, 그거 하지 마라. 내가 회장님한테 잘 말씀드려서 피해자들 합의금 최대한 많이 지급하라고 해 볼 테니까. 더 나가면 합의금마저 못 받을 수 있어. 그러니까 과연 피해자들을 위한 길이 뭔지 잘 생각해 봐.”

KC 화학 공장에서 근무하는 수천 명의 하청 노동자 중 200여 명이 호흡곤란 증세로 병원을 찾았고, 일곱 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너무나도 명백한 사건이라 쉽고 빠르게 판결이 날거라 생각했지만, 지금 울고 있는 건 고재준이 아니라 한탁희였다.

근무자들을 파견한 아웃소싱 업체는 KC 그룹과 거래가 끊길까 두려웠고, 불산을 취급하는 화학 공장의 환기 시설의 관리 미흡은 증거 자료에 채택되지도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KC 그룹이라는 대기업과 지역 공무원들의 유착.

그리고 힘이 없는 200여 명의 노동자.

두 가지의 이유가 재판의 결과를 만든 것이었다.

“아니면 피해자들한테 줄 합의금을 너한테 몰아서 줄 테니 손 떼던가.”

“자네… 정말 추악하다 못해 징그럽다.”

“휴… 도대체 이렇게 해서 자네한테 남는 게 뭔데?”

원청이 정한 안전 수칙을 어기고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

수천 명의 하청 노동자 중 재해를 입은 건 200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

판사의 말을 듣고 있던 한탁희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고, 피해자 가족들이 있는 방청객을 돌아보지 못했다.

물론 한탁희가 패소한 이유는 한탁희 때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탁희는 모든 게 자신의 탓이라 질책했다.

KC 그룹과 공무원들의 유착.

담당 판사와 정종진 회장이 골프를 쳤다는 사실.

거기에 사건을 맡은 자신의 동기까지.

그 모든 걸 자신의 탓이라 생각했다.

“200여 명의 피해들과 500명의 피해자 가족들은 나를, 아니, 인권 변호사들만이 자신들의 편이라 생각하고 우리를 믿고 있어. 고작 1인당 500만 원의 합의금을 위해서 우리를 믿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그럼 얼마를 원하는 데?”

“휴… 돈이 문제가 아니란 걸 알고 있을 텐데.”

“아니. 그들에게 있어 남는 건 돈뿐이야. 재판에서 승리한다고 죽은 피해자들이 살아나기라도 하나?”

“고재준!”

정의의 여신 디케의 동상 앞.

한탁희가 지른 고함이 법원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고재준은 대수롭지 않은 듯 귀를 후벼 파고 있었을 뿐이다.

톡톡.

흥분한 한탁희에게 다가가 어깨를 치는 고재준.

“탁희야…….”

깊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난 너의 신념을 비판하거나 정의로운 사회를 원하는 네가 싫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아니… 오히려 너 같은 동기가 있어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앞으로도 네가 이 엿 같은 대한민국을 바꿔 주길 바래. 지금 이런 상황이 아니라 내가 울고 네가 웃을 수 있는 그런 대한민국을 말이야.”

“그런 세상을 원한다는 녀석이 왜 그러고 있는 거지?”

“휴… 나도 모르겠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그런데 그건 확실해. 세상이 정의로워지지 않아야 나 같은 사람이 돈과 명예를 누릴 수 있다는 거… 잘 생각해 봐. 내 말이 틀린지.”

톡톡—

다시 한번 한탁희 어깨를 토닥거린 고재준은 자신의 차량이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조금 씁쓸한 뒷모습을 보이면서 말이다.

“아참! 만약 힘을 얻기 위해 더러운 사람들과 손을 잡을 생각이 있다면 언제든 연락해도 좋아. 힘을 얻고 나서도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은 네 신념이 변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말이야.”

고재준이 떠나가고 한탁희는 한참이나 법원 앞에 서 있었다.

머릿속이 너무 무거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하는 결과를 이루기 위해서 갖어야 할 힘.

하지만 그 힘을 갖기 위해서는 깨끗한 자신의 옷을 더럽혀야 했다.

“변하지 않을 자신이라…….”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맛보게 될 달콤함과 권력에 취하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해 본다.

연수원 시절 정의로운 인권 변호사가 되겠다던 자신의 동기가 KC 그룹의 법무 이사가 되어 피해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걸 봤기 때문이다.

“…….”

한탁희는 휴대폰을 몇 번이나 열었다 닫아다 하며 고민했다.

“방법이 없잖아…….”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고민은 한쪽으로 치우치고 있었다.

“그래 내가 이기면 돼.”

결심을 마친 한탁희는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전화 한 통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어, 재준아…….”

* * *

운이 좋았다.

재판에서는 패소했지만 피해자들과 같이 울고 있던 모습이 인터넷에 화제가 된 것이다.

그렇게 한순간에 스타 변호사가 된 한탁희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내일 오후 2시에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클럽에 들어갈 준비를 하면서 말이다.

과정까지 완벽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고 인정했다.

그렇기에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조금 다른 길을 가기로 선택한 것이다.

“휴…….”

자신에게 온 휴대폰 문자를 보며 깊은 한숨을 쉬는 한탁희.

문자를 받기 전까지 꽤 많은 일이 있었다.

자신은 스타 변호사가 되었고, 고재준을 거쳐 클럽에서 나왔다는 사람들과 몇 번의 만남을 가졌다.

돌이켜 보면 이상한 점도 몇 개 있었다.

꽤 떠들썩한 사건이데다가 우연히 찍힌 사진이 SNS에 올라간다 하더라도 자신의 위치가 한순간에 바뀌어 버렸다는 점.

또한 자신과는 거리가 멀던 정치계에서 끝도 없이 연락이 오기도 했다.

마치 자신에게 매니지먼트라도 생긴 것 같았다.

— 소명 그룹 천재학 회장이 기소되었습니다… 사법연수생 신분으로 시보 생활을 하는 한치우 검사 직무 대리는…….

그리고 그날 한탁희는 달리는 차안에서 처음으로 치우의 이름을 들었다…….

* * *

“그렇게 클럽에 들어갔고, 불과 3년 만에 민정 수석 자리에 앉게 된 겁니다.”

“흠… 그렇군요.”

해가 지기 전 찾아온 한탁희의 집.

길고 긴 얘기 덕분인지 시계는 어느새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제가 언더커버라는 사실은 언제 아셨습니까?”

“지금 한 검사님이 말씀해 주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금방 힘을 가질 줄 알았던 한탁희는 꽤 많은 시간을 움츠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클럽은 한탁희에게 이렇다 할 프로젝트를 맡기지 않았고, 그를 대통령 자리에 앉혀 이용할 생각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스터란 놈의 뜻이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도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될 사람을 일개 클럽원으로 둘 수는 없었고, 그렇기에 관리자의 자리에 앉힌 것이었다.

하나 그 사실이 한탁희에게 있어서는 별로 좋지 않았다.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던 정종진 회장과 술잔을 기울여야 했고, 매일 웃음과 인사를 나누며 가끔 더러운 손을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사실을 제외한다면 좋은 점이 훨씬 많았다.

나처럼 제너럴 룸을 봤을 것이고, 금세 힘을 얻어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또한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던 정종진 회장의 돈으로 선거 운동을 하고, 클럽의 힘으로 여론에 자신의 이름을 떨친다고 해도 대통령 자리에만 오르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마스터란 놈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왜?

손에 더러움을 묻히기 전까지 한탁희를 대통령으로 만들 생각이 없었으니까.

더러움 게 묻어야 목줄을 채우고, 목줄이 채워져 있어야 자신의 손으로 한탁희를 조종할 수 있었다.

그렇게 대통령이 클럽을 배신한다면 위험에 빠지게끔 만드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민정수석 자리에서 올라 자신이 원하는 인물이 아닌 클럽이 원하는 인물을 천거했다.

추악하고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빤히 알았지만…….

“하지만 꽤 확률이 높은 도박이라 생각했습니다.”

“왜요?”

참고 또 참았다.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걸 알지만 더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지만 클럽은 계속해서 잘못된 걸 원했고, 흔들리고 있는 와중에 관리자 회의에서 나를 마주친 것이었다.

“한 검사님의 행동이 제 과거와 똑같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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