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권-제1장 (31/35)

목차

제1장

제2장

제3장

제4장

제5장

제1장

완벽하게 클럽에 일원이 된 우리는 다시 고려 전단으로 돌아왔다.

“고생하셨어요, 백 원장님.”

“아닙니다, 총장님.”

“치우, 자네도 고생했고.”

입구에서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한 건 강철호 총장이었다.

“일단 회의실로 가시죠.”

“그래. 할 말이 많을 테니.”

우리가 보고 들은 모든 것.

고려 전단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네 명은 누구보다 궁금해하고 있었다.

버선발로 뛰어와 우리를 맞이한 강철호.

우리가 오는 시간에 맞추어 커피를 타고 회의실을 셋팅하고 있던 서윤호.

회의실에 먼저 들어가 못다한 회사 업무를 보고 있는 강서빈과 민태호.

그렇게 우리는 다시 회의실에 모였다.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네.”

“네, 말씀하시죠.”

회의 준비로 어수선할 때 백성원 원장이 내 옆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자네와 내 사이를 알고 있는데 왜 아무런 도청 장치도 붙여 놓지 않았을까?”

“이제 더 이상 의심을 할 필요가 없었겠죠.”

“분명 자네는 나와 다른 등록 절차를 거쳤어. 나에게 해 줄 말이 있겠지?”

“네, 있습니다.”

백성원은 보지 못한 것.

타이핑 몇 번으로 세상을 움직일 수 있던 제너럴 룸.

그리고 오직 클럽의 관리자들만 누릴 수 있는 갖가지 해택.

남영진을 따라 지하로 들어간 나만 볼 수 있었던 것들이다.

“그럼 치우 자네가 보고 들은 걸 나한테 말할게 빤한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가?”

같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과 정의롭던 내가 백성원 원장의 말 하나로 클럽에 들어왔다는 사실까지.

비록 모든 것이 연기였지만, 클럽에 입장에서 본다면 나와 백성원 원장이 특별한 사이인 건 분명하다.

그럼에도 도청 장치를 붙여놓지 않았다는 건 상관없다는 뜻이다.

내가 백성원 원장에게 모든 걸 말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상관없었겠죠. 어차피 같은 클럽 소속이고, 관리자가 무슨 일을 한다는 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알게 될 테니까요.”

“흠… 그럴 수도 있겠군. 그래서 거기서는 뭘 봤는가?”

“그건…….”

어수선한 분위기가 정리되고 모두가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었을 때.

나는 말끝을 흐리며 앉아 있는 모두에게 시선을 돌렸다.

백성원 원장 역시 내 의도를 잘 알고 있는 듯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저희가 직접 들어가 본 클럽은 생각보다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회의실에 모여 있는 내 사람들인 동시에 수사팀들에게 내가 겪은 모든 것을 천천히 풀어놓기 시작했다.

클럽에 들어간 과정과 지금 고려 전단에 돌아오기까지의 모든 것을 말이다.

물론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만, 다시 들어도 지루하지 않을 만큼 놀라운 얘기가 될 것이다.

“이미 대한민국 모든 곳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사실 영향력보다는 지배력이란 표현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입법, 행정, 사법.

클럽에게 있어 서로를 감시하며 견제하는 삼권분립이란 단어는 통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의 위에 있던 게 바로 클럽이었으니까.

“저는 클럽의 관리자가 되었습니다. 백성원 원장님이 보지 못한 건 바로 제너럴 룸이라는 곳이었습니다.”

모든 걸 하나도 빠짐없이.

제너럴 룸에서 내가 한 것과 본 것을 수사팀에게 말했다.

“흠…….”

강철호 총장은 사태가 심각한 걸 알았는지 턱을 만지며 깊은 한숨을 쉬었고, 민태호와 서윤호의 입은 벌어졌다.

“재계까지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말 그대로 클럽은 대한민국에서 신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강서빈 역시 나를 바라보며 한마디를 건넸다.

지잉—

[검사님, 김희준 의원 담당 재판부에서 징역 9년을 선고할 거란 얘기가 돌고 있습니다.]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진동.

정대필 수사관의 문자에 휴대폰뿐만 아니라 내 몸에도 알 수 없는 떨림이 느껴졌다.

재너럴 룸에서 내가 직접 내린 판결.

판사도 배심원도 아닌 내가 친 타이핑으로 내려진 그 판결이 현실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일 모레까지 기다릴 수 없던 나는 정대필 수사관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물론 재판부의 합의 내용을 밖으로 유출하는 것과 그걸 알아보려 하는 것 자체가 법에 위반되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대필 수사관은 수십 년 동안 쌓아온 인맥을 통해 재판부의 합의 내용을 엿들을 수 있었고, 나에게 문자를 보내게 된 것이다.

“이제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겠네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모두에게 들어 보였다.

“정말 어이가 없구먼.”

“이게 말이 되는 겨?”

문자 내용을 본 모두는 탄식 섞인 말을 내뱉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저희는 하루 빨리 클럽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단 하루, 아니, 한 시간만이라도 더 빨리 없애 버릴 수만 있다면 모든 걸 쏟아부어야 한다.

클럽이 존재하는 한 내가 정한 목표에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

“방법이 있나?”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강철호 총장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클럽은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대한민국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쳐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습니다.”

클럽은 서로에 대한 신원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며 필요하면 영입하고, 자신들에게 위협이 가해질 것 같으면 헌신짝처럼 버렸다.

그 정도를 넘어서 다시는 재개하지 못하도록 파멸시켜 버렸다.

철두철미한 보안과 클럽원들의 대한 철저한 관리.

이 두 가지가 클럽이란 말도 안 되는 존재가 유지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서로를 존중한다 말하며 클럽에 들어온 사실 자체가 이미 대한민국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그들은 국민이 위임해 준 권력을 국민들에게 쓰고 싶지 않았고, 자신들에게 직접 쓴다면 불법이라는 걸 알기에 클럽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하나둘 모아진 힘은 너무나 강력해졌다.

그만큼 클럽이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실로 어마어마해졌다.

모아진 그들의 힘은 전부 클럽을 위해 쓰였고, 국민들이 만들고 국민들에게 쓰여야 할 재물과 권력은 클럽에게 돌아갔다.

분배 역시 확실했다.

한치우라는 검사가 없었더라면 김수철과 조정식은 국방부 장관과 국정원장의 자리에서는 느낄 수 없을 훨씬 더 달콤한 권력과 재물 속에서 살았을 테니까 말이다.

아마 클럽이라는 곳에 회의감을 느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모든 걸 폭로하지 않는 한 그 자리는 영원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껏 그랬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왜?

그랬다면 클럽이 유지될 수 없었으니까.

아니, 모든 걸 폭로한… 폭로하려 한 사람이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클럽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폭로를 하려한 사람들의 끝은 감옥이거나 이 세상이 아닐 수도 있다.

심정지, 교통사고, 자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일어나는 사고들이 모두 사고라 말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다만, 어느 조직이 그렇듯 클럽 역시 명령 체계가 있습니다.”

얼핏 보면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오로지 자신들과 클럽의 이득을 위해 움직이는 것 같겠지만, 클럽 역시 명령 체계라는 것이 있었다.

즉, 어느 조직이 그렇듯 클럽 역시 수직적인 구조였다는 것이다.

“네 명의 관리자와 한 명의 마스터가 있으며, 회사로 따지면 이 다섯이 클럽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이사회와도 같습니다.”

“한 검사님이 그중 한 자리에 앉게 되신 거네요?”

“네, 맞습니다.”

회사라는 얘기가 나오자 강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스터란 사람이 대표이사라는 거고요.”

“네. 어떻게 보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이사회와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다른 것이요?”

“이사회는 대표이사의 뜻이 절대적일 수 없지만 클럽은 마스터의 의견이 절대적입니다. 관리자들은 단순히 의견과 건의만 할 수 있을 뿐 마스터의 결정에 찬반 투표를 할 수 없습니다. 또한 마스터의 자리는 절대적이며 사고를 통한 공석이 되지 않는 한 평생 동안 교체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야말로 신 같은 존재네요.”

“네. 비유하자면 그렇죠.”

하지만 관리자들 역시 무소불위에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건 사실이다.

제너럴 룸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일반 클럽원들은 관리자들과 마스터의 결정에 따라 움직이며 재물과 자리로 보상을 받는다.

물론 확실한 자리와 엄청난 보상을 해 주기에 불만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국방부 장관과 국정원장이 만족할 정도의 보상이라 하면 우리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큰 보상인 것 역시 확실하다.

하지만 관리자들과 마스터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일 확률이 높다.

“다행인 건 제가 관리자라는 사실입니다.”

남영진과의 기 싸움을 통해 들어갈 수 있던 자리.

비싸진 내 몸값과 절대적 존재인 마스터가 나를 원한다는 사실은 언더커버 수사의 시작점을 꽤 좋은 위치로 만들어 주었다.

“아무리 높은 공직자라 하여도 클럽에 소속되어 있다면 결국 관리자와 마스터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겁니다.”

“지검장급 검사가 한 검사님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할 수도 있다는 거죠?”

“네. 정확하게 이해하셨습니다.”

“일이 조금은 수월해졌네요.”

“역시. 이해가 빠르시네요, 회장님.”

한 기업의 오너답게 조직이란 문화를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는 강서빈 회장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리고 강철호 역시 마찬가지로 강서빈 회장의 말에 동조했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듯 갸우뚱거리고 있는 민태호와 서윤호를 위해 나는 작전을 브리핑하기로 했다.

“제가 관리자와 마스터만 장악한다면 클럽을 손쉽게 해체할 수 있을 겁니다.”

“하하, 대단하구만. 여기까지 생각한 건가?”

호탕한 웃음을 보이며 박수를 치는 강철호.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어떤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을 현실로 이루어냈다는 사실을 말이다.

“모든 게 계획대로 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클럽이 어떠한 구조로 이루어져있는지는 자세히 몰라도 높은 자리에 있어야 일이 수월할 거란 건 예상했죠. 그건 저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할 수 있는 생각이구요.”

“재수 없게 겸손은.”

“총장님…….”

“하하하하!”

강철호 총장의 농담 섞인 말에 회의실 안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래. 누구나 그런 생각은 할 수 있지만, 자네처럼 현실로 이뤄 내지는 못하지. 그게 바로 남들과 자네가 다른 거고.”

“좋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래. 그건 그렇고 자네 말대로라면 관리자들과 마스터를 장악해 클럽을 해체시킨다는 건데 자세한 계획은 뭔가?”

“아직 자세한 계획은 없습니다. 곧 있으면 관리자 회의가 있을 것이고 아마 저를 제외한 세 명의 관리자와 마스터를 만날 기회가 생길 겁니다. 일단은 그들을 조금 더 자세히 파악하고 계획을 세울 예정입니다.”

힘으로 굴복시킬지, 아니면 꾀를 내어 그들을 자멸하게 만들지.

지금 가진 정보로는 확실한 계획을 세우기 힘들다.

“궁금하군. 어떤 사람들이 거악의 머리에 올라가 있는지.”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정해졌으니까.

“저도 궁금하네요.”

* * *

인생을 살면서 긴장한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부띠끄 호텔 회의실에 앉아 있는 지금이 아마 지금껏 해온 모든 경험 중에서 가장 긴장된 순간일 것 같았다.

두 번째 인생에선 그리 긴장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중수부 검사가 아닌 조폭 한치우로 살아온 첫 번째 인생은 다르다.

학창 시절에는 나를 괴롭히던 녀석들이 언제 나를 찾을까 긴장했고, 언제 주먹이 날아올까 두려움에 떨었다.

또 처음 본 사법고시 1, 2차 시험과 의미 없는 3차 면접에서 떨던 순간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 모든 것은 두 번째 인생에서는 느끼지 못한 감정이었다.

“휴…….”

하지만 회의실에 앉아 있는 나는 그 어떤 때보다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클럽에 들어온 후 첫 번째 관리자 회의.

“긴장 안 하셔도 됩니다, 한 검사님.”

“티가 많이 났나요?”

회의실 입구에서서 문지기 역할을 하려는 듯 부동자세로 서 있는 남영진에게 답했다.

부띠크 호텔 옥상에 마련된 회의실은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몇 번의 보안 절차를 거치고 나서야 들어올 수 있다.

지문과 홍채 인식, 그리고 성문 인식과 보안 카드까지.

이제 회의실을 도착했을 뿐인데 지친 것이 느껴졌다.

“하하, 입술이 마르신 것 같아서요.”

“네. 긴장도 긴장인데 지치네요.”

“익숙해지실 겁니다.”

“입출입 보안이 엄청나네요. 회의실일 뿐인데.”

“단순한 회의실이 아니잖습니까. 여기서 나눈 회의 내용이 대한민국 전체에 영향을 끼칠 테니까요.”

거리에서 본 부띠끄 호텔의 옥상.

볼록 튀어나와 반짝거리던 돔 형태의 옥상이 단순한 인테리어가 아니었단 건 회의실에 들어오고 나서야 깨달았다.

“오늘은 처음이시니 제가 안내해 드렸고 다음부터는 혼자 오실 수 있도록 검사님의 지문과 성문, 그리고 홍채를 등록해 놨습니다. 이건 보안카드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CLUB]

검은색 바탕에 하얀 글씨.

별 볼품없는 출입 카드였지만, 이 카드 하나로 대한민국을 쥐고 흔드는 이곳을 드나들 수 있었다.

“철벽 보안 치고는 카드가 허술하네요.”

“겉모습은 그렇지만 그 얇은 카드 안에 GPS와 한 검사님의 모든 정보가 들어 있습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분실하신다면 자동으로 초기화되도록 만들었고요.”

“흠… 신기하네요.”

하지만 이 카드와 이 회의실은 곧 사라질 것이다.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테니까.

“회의실 풍경도 신기하고요.”

밝은 조명이 비치는 자리마다 태블릿 피시가 놓여 있고, 대형 스크린에서는 각종 자료들이 나올 것 같은 회의실의 모습.

그런 회의실의 모습을 상상했건만 지금 내가 있는 회의실은 전혀 다른 곳이었다.

회의실 안은 어두웠고, 남영진이 내 가슴팍에 달아준 배지는 어둠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또한 중앙 벽에는 스크린이 아닌 이상한 기계들이 보였다. 그리고 내 앞에는 태블릿 피시가 아니라 레이저 포인터 같은 게 보였다.

“이것들은 뭔가요?”

처음 보는 물건들을 이것저것 만져보며 남영진에게 물었다.

“회의실이 어두운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작년까지는 여기도 평범한 회의실과 다르지 않았지만, 회의실 전체에 홀로그램 기계를 배치해 놓아 이렇게 어두운 분위기를 연출할 수밖에 없었죠.”

“최첨단 회의실이네요.”

“하하, 마스터께서는 최신 기술을 좋아하시는 얼리 어답터시거든요.”

현존하는 기술로 완벽한 홀로그램 회의를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구색은 갖춘 것 같았다.

나 역시 전자 제품을 꽤 좋아하던 사람으로서 최신 제품이 나오면 바로바로 구매했지만, 이곳에는 내게도 생경한 기계들이 많이 보였다.

“아직 저한테는 낯선 회의실이네요.”

“그것도 금방 익숙해지실 겁니다. 나이가 있으신 한 관리자분도 익숙하게 다루시니까요.”

“그렇군요.”

내가 긴장하는 이유.

수많은 보안 절차를 뚫고 저 문을 열고 들어올 사람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편으로는 두렵기도 하다.

저 문을 열고 들어올 사람이 내가 알고 있는, 절대로 들어와서는 안 될 사람이 들어올까 봐 두려운 것이다.

“제가 일찍 온 건가요?”

“아니요. 그건 아닌데 한 분은 회의가 늦게 끝나셨고, 나머지 두 분은 출장길에서 돌아오는 중이라 좀 늦는 것 같습니다. 마스터 역시 아직 자리에 안 계시고요.”

“자리에 안 계신다는 건 무슨 뜻이죠?”

“마스터는 여기 오지 않습니다.”

“네?!”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남영진의 말에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왔다.

“마스터의 신분은 그 아무도 모릅니다.”

“그쪽도요?”

“네. 저도 모릅니다. 마스터는 저기 보이는 홀로그램을 통해 화상회의로 참여하시며, 한 검사님을 포함한 나머지 관리자 분들도 화상회의를 통해 의견을 주고받습니다.”

“흠… 그렇군요.”

“네. 마스터는 절대적인 존재이며 클럽 자체입니다. 신분을 노출시킬 수 없는 점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네, 뭐…….”

속은 그렇지 않았지만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리 큰일도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수많은 권력자들을 통솔하고 피라미드 꼭대기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고 싶지 않은 건 당연한 것이니까 말이다.

또한, 남영진의 말대로 마스터가 클럽 그 자체라면 신분이 노출되면 위험이 따르기도 할 것이다.

일단 누군지 알면 어떤 공격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게 클럽 내부의 아군이든 나처럼 정의를 원하는 사람이든 간에.

물론 클럽의 모든 사람이 그를 보호하여 손끝 하나 대는 것이 어려울 테지만, 어쨌든 껄끄러운 것은 사실일 테다.

“일단 오늘은 첫 회의고 따로 의견이 없으실 테니 참관하신다는 느낌으로 참석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회의의 주제는 어떻게 결정되고 의견은 어떤 식으로 낼 수 있는 거죠?”

“보통 마스터가 프로젝트를 결정하고 관리자들한테 의견을 묻습니다.”

“그럼 관리자들이 프로젝트가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거군요.”

“흠…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보다는 어떤지 의견을 내는 거죠. 그리고 마스터가 의견이 아닌 방법을 묻는 프로젝트도 있습니다. 무조건 성공시켜야 하는 프로젝트의 경우에는요.”

“결정은 마스터가 하고 저희는 보좌진 같은 건가요?”

“쉽게 생각하시면 그렇습니다.”

회의라 말하지만 이건 회의가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의 생각을 실현시킬 방법을 찾는 것일 뿐이지.

“큰 프로젝트가 얼마 전에 끝났고, 처음 열리는 회의입니다. 한 검사님 때문에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마스터가 저를 아주 미워하시겠군요.”

“하하! 그렇지 않습니다. 마스터는 예전부터 한 검사님을 눈여겨보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이번엔 한 검사님이 관리자가 됐다는 소식에 아주 기뻐하셨죠.”

“왜죠?”

“마스터가 세운 프로젝트는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거든요.”

유일한 실패.

그런 오점을 남긴 나를 영입했다는 사실이 마스터란 놈은 마음에 든 것이다.

나를 남겨 둔다면 또 다른 프로젝트가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으며, 나를 제거하기엔 내 능력이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리라.

즉, 내가 자신의 편이 되어 주는 게 최고의 시나리오였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제 그럴 일은 없겠죠. 한 검사님이 클럽에 관리자가 되셨으니 말입니다. 마스터는 오늘 말씀하실 새로운 프로젝트에 한 검사님 의견이 어떤지 아주 궁금해하고 계실 겁니다.”

마스터란 놈이 결정한 프로젝트는 분명 국민들에게 있어 악영향을 끼칠게 빤했다.

신임을 얻어야 하기는 하지만, 성공으로 돌아가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어떠한 방법으로 대응할 지는 앞으로 두고 봐야겠지만.

일단은 관리자들부터 하나씩 장악할 것이다.

처단, 혹은 약점을 잡아 마스터란 놈이 아닌 내 손발이 되게 만들거나, 그것도 아니면 지금 유지하고 있는 자리를 빼앗아 버리면 된다.

필요가 없으면 철저히 버려지는 게 클럽원과 관리자들의 운명이니까.

그리고 공석에 내가 부릴 수 있는 사람을 앉히면서 점점 클럽을 장악해 나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터였다.

그렇게 중간을 끊어먹음으로써 마스터란 녀석이 내리는 명령은 밑으로 전달되지 않을 것이며, 점점 힘을 잃어 가는 것이다.

철저한 보안과 서로의 존재를 모르는 시스템.

그것들을 역이용한다면 약이 아니라 오히려 독이 되겠지.

“이제 오실 때가 됐는데…….”

지잉—

왼손에 차여진 손목시계를 보며 말하는 남영진 뒤로 문이 열렸다.

“오셨습니까.”

남영진이 회의실로 들어온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마른침을 삼키고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굴까…….

긴장감에 몸이 경직되고 고개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얘기 들었습니다. 반가워요, 한 검사.”

씨발.

처음으로 맞이한 관리자를 본 나는 속으로 욕이 나왔다.

아니 나올 수밖에 없었다.

“네… 안녕하세요. 한치우 검사라고 합니다.”

“하하! 그렇게 저희 애를 태우더니 이렇게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궁금했다.

거악들이 모여 있는 거대한 조직의 관리자가 누구인지.

얼마나 쓰레기 같은 사람들인지 말이다.

“이야, 한 검사가 새로운 관리자라니. 벌써부터 든든하네요.”

물론 어느 정도 예상을 했고, 마음에 준비도 했었다.

김수철 국방부 장관과 조정식 국정원장.

행정부서의 장관과 국가정보원의 원장이 앉지 못한 관리자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대단한 사람들일 거라고는 생각했단 소리다.

자리의 높낮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관리자가 꼭 공무원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까.

또 두 사람 다 장관급이고, 그보다 높은 사람이라면 적어도 부총리 급이라는 말인데… 클럽의 깐깐한 심사를 통과하기엔 범위가 너무 좁았다.

“뭐가 됐건 앞으로 잘 부탁해요.”

“네…….”

“젊어서 그런지 악수부터 힘이 넘치시네.”

그와 잡은 손에 힘을 주지 않으려 했지만,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머릿속 차분함이 몸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분들은 아직인가?”

“네. 지금 거의 다 오셨다고 연락받았습니다.”

남영진에게 말을 건네며 자리에 앉는 남자.

대한민국 공무원이라면 모두가 아는 사람이었다.

김주상 감사원장.

내가 그를 보자마자 욕이 나온 이유는 대한민국의 모든 공무원을 감시하며 예산의 사용을 검사하는 기관의 우두머리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까한 예상과는 달리 부총리급 인사다.

그렇다는 건…….

지잉—

“아이고! 늦어서 죄송합니다.”

김주상을 보고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 들어왔다.

그리고 들어온 남자를 본 나는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라? 한 검사님도 와 있었네. 실물로 보니 더 잘생겼네. 반가워요.”

“안녕하십니까.”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공무원이 아니었다.

“일단 인사는 회의 끝나고 천천히 합시다.”

“네.”

정종진.

KC 그룹의 회장이자 전경련의 회장.

재계순위 15위 그룹의 수장 역시 클럽의 관리자였다.

‘개인 자산만 1조 원이 넘는 사람이 뭐가 아쉽다고.’

지잉—

곧이어 들어오는 마지막 관리자.

감사원장을 보고 욕을 했고, 정종진 회장을 보며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마지막 관리자를 보고는 입이 벌어졌다.

“반가워요, 한 검사…….”

* * *

“네, 안녕하세요…….”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남자.

검사인 나와 너무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었다.

한탁희 민정수석.

3개월 전 주한호 대통령은 얼마 남지 않은 임기 내에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어 했고, 대대적인 비서관 인사를 단행했다.

그중 가장 큰 이슈가 된 사람이 바로 한탁희 민정수석이었다.

청와대 비서관 중 가장 큰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가 정무수석과 민정수석이었고, 정무수석은 주한호가 후보 시절 선거 캠프 때부터 함께 해 온 사람이라 그런지 모두가 교체될 때 자리를 보존할 수 있었다.

하나 민정수석은 달랐다.

주한호 정부의 국무의원들이 대통령 임기 중반부터 거듭된 사고를 쳤고, 이에 인사 검증 실패 논란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로 인하여 야당은 청와대를 끝도 없이 공격했다.

여당의 대표는 주한호를 찾아가 내각 교체와 함께 총대를 메고 사퇴할 사람을 정하라 조언했다.

그렇게 비서실장이 사표를 내 청와대를 나갔고, 인사 검증의 모든 책임을 지고 있는 민정수석은 해임되었다.

사실 모든 것은 연극이었다.

비서실장이 사표를 내기 전 마지막으로 올린 결재는 민정수석 비서관에 대한 해임 건의안이었고, 대통령은 민정수석의 해임을 재가했다.

민정수석의 사표를 받을 수 있었을 테지만, 해임을 통해 국민에게 퍼포먼스를 보여준 것이었다.

그렇게 비서실장과 정무수석을 제외한 모든 비서진들이 교체되었고, 새로운 민정수석 자리에 한탁희가 앉게 된 것이다.

“한 검사를 여기서 볼 줄은 몰랐네요.”

한탁희가 내민 손을 잡자 그는 손을 살짝 흔들며 눈웃음을 보였다.

“전에 한 번 지나가다 뵌 적 있죠?”

“네.”

“중앙 지검에서 봤던가?”

“네, 맞습니다.”

한탁희와 나의 만남은 이곳이 처음이 아니었다.

대다수의 민정수석이 그렇듯 그 역시 법조인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기수 차이가 꽤 나기에 같은 검사 옷을 입고 만난 것은 아니다.

내가 임관하기 전 그는 법복을 벗고 인권 변호사가 되었다.

그러고는 대기업의 횡포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과 돈이 없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여기서 한탁희를 볼 줄 몰랐으니까.

그를 민정수석에 앉힌 주한호 역시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여론이 원하고, 부패와는 거리가 멀어 오로지 자신의 지지율을 높여 줄 가장 확실한 사람인 한탁희.

그런 그가 알고 보면 가장 추악한 사람이라는 건 어느 누구라도 생각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일단 앉죠. 인사는 회의 끝나고 천천히 나누고.”

“네.”

한탁희는 도대체 언제부터 클럽의 관리자였을지 생각해 봤다.

검사 시절부터일까, 아니면 인권 변호사 시절부터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민정수석에 임명되고 나서?

그럴 확률은 적을 것이다.

그가 민정수석에 임명된 건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는 건 수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며 오로지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변호한 모든 시간이 거짓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대통령의 귀에 ‘한탁희’라는 이름을 불어넣는 건 클럽에게 있어 너무도 쉬운 일이었을 테다.

하지만 문제는 클럽과 한탁희의 목표가 고작 민정수석이 아닐 거라는 것.

아마 민정수석은 거쳐 가는 자리일 테고, 더 높은 곳에 올라가려면 소외된 이웃을 위해 한 몸 바치는 인권 변호사의 이미지가 필요했겠지.

그렇다는 건 누군가의 임명이 아닌, 선거로서 선출되는 자리에 앉게 될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2분 후 회의 시작하겠습니다.”

민정수석보다 높은 자리 중 선거가 필요한 자리?

국회의원이거나 곧 있으면 비워질 청와대의 새로운 주인이 되려는 걸 수도 있다.

‘관리자들 중에서는 한탁희가 제일 중요한 인물이겠군.’

2분의 짧은 텀.

나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잡다한 생각을 정리했다.

나이로 보나 쌓아온 이미지로 보나 다음 대선의 유력한 후보는 한탁희가 될 확률이 높았다.

물론 정치적 커리어는 없지만 현 시점의 대한민국은 정파 이념에 찌든 정치에 신물을 느끼고 있었다.

즉, 젊고 찌든 정치에 물들지 않은 새로운 리더를 원하고 있던 와중에 한탁희란 인물이 민정수석으로 정치계에 데뷔를 한 것이다.

클럽 역시 절대적 권한을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에 한탁희가 앉게 되는 걸 원하고 있을 것이다.

가장 확률이 높기도 하고 말이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누군지도 모르는 감사원장과 당선될 확률이 없는 재벌 회장보다는 가장 확실한 패가 바로 한탁희이니까.

“회의 시작하겠습니다.”

남영진의 말에 조명이 더욱더 어두워졌고, 중앙 벽면에는 빛이 요동치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네 명의 관리자들은 벽을 향해 넓게 떨어져 앉아 홀로그램 속 마스터의 모습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그들과 나의 기다림의 이유는 달랐지만…….

— 잘들 지내셨나요. 오랜만인 것 같네요.

이윽고 들려오는 목소리.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스피커 너머 들려오는 음성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젊었기 때문이다.

“하하! 저희야 마스터 덕분에 항상 잘 지내죠. 마스터는 무탈하셨습니까?”

— 저도 여러분 덕분에 무탈합니다. 며칠 전 휴가도 아주 기똥차게 잘 보내고 왔고요.

“하하하!”

홀로그램 속으로 보이는 마스터의 얼굴.

아직 발전되지 못한 기술 때문에 마스터의 모습은 또렷하지 않았고, 흉상처럼 상반신만 구현되어 있었다.

아주 오래된 컬러 티비를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거기에 선글라스와 특이한 마스크를 쓰고 있던 탓에 조금이나마 신원을 확인하려 한 내 생각을 접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 자! 오늘도 즐겁게 회의 시작해 볼까요?

“네, 마스터.”

처음 참석한 회의였지만 분위기는 꽤 좋은 것 같았다.

마스터란 놈과 관리자들은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고,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 아참! 모두 인사를 나누셨겠지만, 저희 클럽에 새로운 식구가 들어왔습니다.

회의의 시작은 예상한대로 나의 대한 소개였다.

— 박수로 환영해 주시길 바랍니다. 한치우 검사님이십니다.

짝짝짝.

홀로그램 너머로 들려오는 마스터의 말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기립 박수를 보냈다.

— 정말 뵙고 싶었어요, 한 검사님. 제가 검사님을 모시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르시죠?

“하하하하!”

그와 함께 터지는 웃음.

관리자들은 마스터의 말 한마디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듯 보였다.

마치 홀로그램 속 너머 있는 그가 신이라도 되는 듯이.

— 모두가 알고 계시겠지만 형식상 자기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한 검사님.

“네… 뭐.”

자리에서 일어나 양옆을 번갈아 보았다.

“안녕하세요. 대검 중수부 연구관 한치우 검사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짝짝짝.

다시 들려오는 박수소리.

한편으로는 유치하기도 했다.

온갖 더러운 짓을 다하는 거대 조직이 아니라 대학교 OT에 온 것 같은 분위기라고나 할까.

뭐가 됐건.

엄숙하고 진지할 거라는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 한 검사님이 소개하셨으니 저희도 소개를 하죠. 저는 클럽의 마스터이며 앞으로 한 검사님이 모든 걸 누리고 사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박수를 받으며 자리에 앉자, 마스터와 나머지 관리자들이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가장 궁금하던 마스터란 녀석의 신원은 역시나 유추할 수 없었고, 다른 사람들의 정체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능력과 노력에 비해 너무나 형편없던 삶. 이제 앞으로 한 검사님은 그런 삶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할 세상 속에서 살게 되실 겁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죠. 그동안 한 검사님이 피땀 흘려 한 노력이, 능력도 노력도 하지 않은 사람들의 질투와 시기 때문에 묻혀 버린 것일 뿐이니까요.

“묻혀 버렸다고요?”

— 노력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누리고 사는 세상이 정말 좋은 세상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대한민국은 참으로 이상한 나라입니다. 모든 걸 갖춘 소수가 그러지 못한 대다수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나라죠.

“민주주의 말씀하시는 건가요?”

— 아니요. 민주주의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주권을 한 사람이 갖는 나라는 결국 파탄나게 되니까요. 다만, 국가에 속한 모든 국민이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너무도 불공평한 이치입니다. 더 많이 노력하고 능력이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나라의 부흥을 일으킬 수 있는 가장 올바른 구조이죠.

목소리를 변조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신뢰성이 가지 않는 톤은 확실했다.

무엇보다 깊은 인상을 심어 줄 만큼 노련하지도 않았고, 다소 가벼운 톤에 젊어 보이기까지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좋은 발음과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전달하는 능력은 그의 말에 빠져들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 한 검사님은 꽤 정의로운 사람인 줄 알고 있습니다. 비리와 부패를 보면 참지 못하고, 거악이라는 존재에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며, 검사로서의 사명감을 다했죠. 그런데 대한민국은 그런 검사님의 희생정신을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마스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관리자들.

녀석의 혀 놀림에 모두가 놀아나고 있었다.

배울 만큼 배운 교수들과 재벌, 그리고 고위 공직자들이 왜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지 지금 이 회의실 안에서 느낄 수 있었다.

— 한 검사님은 검사라는 직업에 사명감도 느끼지 못하고, 권력과 재물에 눈이 멀어 그들의 하수인이 되어 버린 검사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소리입니다.

나는 대가를 바라고 직무를 수행한 게 아니었다.

그저 잘못된 세상을 고치고 싶었을 뿐이다.

특권을 가진 소수의 사람이 대다수 위에 군림하며 사리사욕을 채우는 세상.

노력과 능력이 통하지 않는 세상을 말이다.

그렇기에 마스터란 녀석의 말은 틀렸다.

노력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 더 대우받는 세상?

그런 세상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대다수의 국민이 아니라 바로 클럽 때문이니까 말이다.

— 물론 검사님처럼 사명감 넘치는 분들은 대가를 바라고 검사라는 직업을 택하지 않았을 겁니다.

녀석은 내 머릿속을 읽고 있는 듯 말했지만, 목표 자체가 나와는 달랐다.

그래서 둘 중 하나는 반드시 대한민국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리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사라져야 할 쪽은 대다수의 한 명인 내가 아니라 클럽과 당신이라고.

— 대가가 아닌 세상을 바꾸고 싶었겠죠. 하지만 평범한 검사는 절대로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다만, 이제는 다릅니다. 클럽의 관리자가 된 지금 한 검사님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으니까요.

아니, 마스터란 녀석의 말은 잘못됐다.

나는 아직도 평범한 검사이니까.

그저 당신들을 없애기 위해 이곳에 들어온 것일 뿐이니까.

—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한 검사님. 클럽과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힘써 주시길 바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 그럼 오늘 회의는 이쯤에서 마치고, 네 분은 진한 술자리를 가지시길 바랍니다. 친해지셔야 앞으로 업무가 수월할 테니까요.

짝짝짝!

박수를 끝으로 마스터란 녀석의 홀로그램이 사라졌다.

“한 검사님도 새로 왔고, 모처럼 관리자들끼리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 하시죠.”

“좋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자리를 하나둘 뜨는 관리자들.

나 역시 주먹을 불끈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회의실을 나가는 관리자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어떤 놈부터 처리할까.’

* * *

고려 전단.

“휴… 머리 깨질 것 같네.”

첫 관리자 회의와 술자리를 마친 다음날 이른 아침, 나는 어두운 고려 전단에 불을 가장 먼저 밝혔다.

“웩, 술 냄새.”

“일찍 왔네, 형.”

“사람 몸이란 게 참 신기해. 모처럼 쉬는 날 늦잠 좀 잘려했더니 6시에 눈이 저절로 떠지더라.”

얼마 지나지 않아 손으로 얼굴을 휘저으며 회의실로 들어오는 서윤호.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숨만 쉬고 있을 뿐인데 회의실 안이 술 냄새로 가득 찼다.

“으… 안 되겠다. 빨리 나가서 술 깨는 약이라도 사 먹어.”

“아까 먹었어.”

“도대체 얼마나 마셨길래 그런 거야. 커피라도 한잔 줘?”

“어. 부탁할게, 형.”

첫 회의 후 가진 술자리.

남자 넷이 모인 자리가 으래 그렇듯 여타 다른 술자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감사원장과 재벌 총수, 그리고 민정수석과 검사가 꽤 고급스럽고 비밀스러운 술집에서 술자리를 가진다는 것은 가십 거리가 생기기 충분했지만, 아무도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나도 가십거리 따위를 신경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놈들과 술자리를 가진다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그렇다고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나는 권력과 재물에 눈이 멀어 클럽의 관리자가 된 검사였으니까.

연기는 아직 진행 중이었고 끝나지 않았다.

사실 술이 더 도움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아무리 연기라지만 기분이 매우 더러웠고, 술은 그 더러운 기분을 조금이나마 나아지게 했기 때문이다.

“이거라도 좀 마셔. 나는 커피 잔에 코 박고 있어야겠다.”

양손에 커피 잔을 들고 온 서윤호는 나에게 한 잔을 건넸고, 나머지 한 잔은 자신의 코로 가져다댔다.

“휴… 이제 살 것 같네.”

“형도 술 좋아하면서 유난은.”

“담배 펴도 남의 담배 냄새 맡는 건 싫잖아. 술 냄새도 똑같은 거야.”

은은한 커피향이 회의실 안에 퍼지자, 지독하던 술 냄새가 어느 정도 정화되는 것 같았다.

“어른들 오시기 전에 정돈이나 해.”

“알았어.”

흐트러진 머리와 반쯤 풀어진 넥타이를 정리하자, 회의실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하하! 요즘 아침마다 북악산 타는 재미로 살고 있죠.”

“아∼ 저도 등산 좋아합니다, 총장님.”

“그래요? 한 번 같이 타면 좋겠네요. 원장님 공관이 내곡동에 있었죠?”

“네, 그렇긴 한데 지하철 타고 가면 금방 갑니다.”

백성원 원장과 강철호 총장은 어느새 꽤 가까워진 듯 보였다.

강철호 총장이 더 나이가 많긴 하나 비슷했고, 오랜 공직 생활이라는 공통점은 서로를 더 빠르게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얼씨구! 어제 안 들어오더니 여기 와 있네.”

회의실에 들어온 강철호 총장이 나를 보며 첫마디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어제 술자리 때문에 새벽에 들어가기가 좀 그랬습니다.”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섰다고. 서 검사도 일찍 왔네? 고생이 많지.”

“아닙니다, 총장님!”

서윤호의 등을 토닥거리며 말하는 강철호.

유치하지만 왠지 모르게 서운했다.

“참… 저한테도 좀 살갑게 대해 주시면 안 돼요?”

“다 큰 아들내미한테 살갑게 대하는 애비 봤어?”

피식.

단 한마디의 말로 입꼬리가 올라갔고, 서운하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래도…….”

“됐고. 브리핑 준비나 해.”

이상한 건 강철호도 나도 얼굴이 붉어졌다는 것이다.

“아따, 회장님! 이거 진짜 몸에 좋은 거라고 했당께요.”

“아무리 그래도 봄나물을 100만 원어치나 사시면 어떡해요!”

“그라믄 추운 날씨에 할매들이 달달 떨고 있는디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교. 사나이 민태호가 그리 매정한 사람이 아니랑께요.”

“휴… 그럼 자꾸 시장에서 돈 쓰지 마시고 재단에 기부하셔서 좀 더 현실적으로 도울 방법을 생각해 보세요. 제가 재단에 말해 놓을 테니까요.”

“하하! 역시 우리 회장님밖에 없당께.”

보통 사람들에게는 낯설지만, 나한테는 익숙한 사투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민태호와 강서빈 역시 약속보다 이른 시간에 고려 전단 도착한 듯 했다.

“뭐여! 다들 벌써 와 있는디요, 회장님.”

한 손에 커다란 비닐봉지를 들고 들어오는 민태호.

문을 반쯤 연 채 뒤를 돌아 강서빈에게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다들 일찍 오셨네요.”

강서빈 역시 회의실로 들어옴으로서 내가 만든 수사팀은 전부 모일 수 있었다.

“그건 뭐예요?”

“아! 이게 봄나물인디. 다들 조금씩 나눠드릴 테니 집에 가셔서 무쳐드셔라.”

“저는 야채를 별로…….”

“그라지 말고 잡솨 봐. 몸은 좋은 거라니께.”

서윤호는 손을 휘적거리며 거부했지만, 민태호는 비닐봉지에서 나물을 꺼내 서윤호 앞에 놓았다.

“그럼 담아서 주시는 게…….”

“아! 내 정신 좀 보랑께 쪼매만 기다리쇼.”

비닐봉지가 없어 꽤 고급스러운 쇼핑백이 각자의 앞에 놓아졌다.

쇼핑백보다 더 고급스러운 원두로 만든 커피와 함께 말이다.

“가,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쇼핑백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이는 서윤호였다.

“아이고! 봄동이 실하네.”

“그러게요. 비빔밥 해 먹으면 맛있겠네. 고마워요, 태호 씨.”

또한 토속적인 입맛을 가진 백성원과 강철호에게는 꽤 선물인 것 같았다.

“자!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거대한 조직을 잡는 수사팀의 회의실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브리핑은 시작되었다.

“예상한 대로 마스터의 신원은 파악할 수 없었으며, 저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관리자들은…….”

회의실 안 사람들은 김주상 감사원장의 이름을 말하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쉬었고, 정종진 회장의 이름을 말하자 욕을 내뱉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탁희 민정수석의 이름을 말하자 어이가 없는 듯 콧방귀를 뀌기도 했다.

“관리자들을 장악함으로서 클럽의 중간 다리를 끊어 버릴 겁니다.”

관리자들의 정체를 말하고, 클럽을 박살낼 계획 역시 모두에게 말했다.

“일단 처음 접근할 사람은 김주상 감사원장입니다.”

“감사원장이라… 쉽지는 않겠군.”

브리핑을 듣고 있던 사람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백성원 원장이었다.

“그래서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원장님.”

“말하게나.”

“감사원장의 신원 조회 기록과 그밖에 모든 정보가 필요합니다. 집에 칫솔이 몇 개인지 어떤 치약을 쓰는지까지요.”

“알겠네. 그거야 내 전문이지.”

지금껏 준비 단계를 거쳤다면 이제는 본격적으로 수사팀을 가동해야 될 시간이 왔다.

내가 수사팀을 꾸릴 때 나와 가깝고 내 등 뒤를 맡겨도 될 사람만 추린 것만은 아니었다.

국정원장과 전 검찰총장, 그리고 법무부 검사와 한 그룹의 회장과 부회장.

각자 한 분야에서는 누구보다 프로페셔널했고, 그런 프로페셔널함이 모여 다양한 시너지를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감사원장을 사찰했다는 어떠한 기록도 남겨서는 안 됩니다.”

“걱정 말게. 국정원에 지시하지 않고 여기 고려 전단의 시스템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해. 그리고 여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으니까.”

“좋습니다.”

현직 감사원장이자 부총리급 인사.

대한민국의 모든 공무원을 감찰하며 현 시점을 기준으로 300조가 넘는 예산의 사용을 검사한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기관이지만, 실로 엄청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기관이란 말이다.

기관의 수장이 부총리급이라는 것만 봐도 감사원이 어떤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과거에 한 감사원장은 지금의 국정원보다 훨씬 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안기부를 감사했고, 수많은 고위관료들을 구속했다.

물론 대쪽 같이 자신을 도와줄 거라 생각하던 당시 VIP와 많은 충돌이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힘이 많이 줄어들었어도 고위 관료들을 감찰하고, 어떤 기관이든 귀찮게 할 수 있다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서 검사님은 김주상을 옭아맬 수 있는 자료들을 수집해 주시길 바랍니다.”

“비공식 수사를 하란 겁니까?”

“네. 보안 유지 철저히 해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법무부 검찰국 검사.

서윤호 역시 나와 같은 검사이며 수사 능력이 꽤 훌륭한 검사이기도 하다.

고위 공직자라는 타이틀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한 명의 공무원을 탈탈 터는 건 그에게 있어 일도 아니란 소리다.

“그리고 강서빈 회장님은 재계와 김주상의 연결 고리를 파악해 주시길 바랍니다. 누가 그에게 돈을 건넸고, 또 어떤 특혜를 주었는지 말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지난 시절 천재학 회장의 온갖 비리를 감싸주며 보전할 수 있었던 재무이사 자리.

정경 유착이라는 단어는 강서빈에게 있어 누구보다 익숙한 단어일 것이다.

과거에서 벗어났지만 기억까지 잃어버리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총장님은 앞으로 현장에 나가 있는 저희를 지휘해 주시길 바랍니다.”

“자네가 아니라 내가?”

“네. 저는 아직 경험이 부족합니다.”

“허허, 대한민국 최고의 검사가 왜 이러실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분은 좋습니다만, 제가 아무리 뛰어난 검사라도 총장님에 비하면 아직 애송이일 뿐입니다.”

“기분은 내가 더 좋은 것 같네. 허허. 그래 알겠네. 여기서 수사 지휘를 하도록 하지.”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굽히지 않던 강철호 총장.

어떠한 외압도 그의 실력을 이기지는 못했다.

평검사로 시작해 출셋길이 보장된 특수부와 공안부가 아닌 형사부를 거쳐 검찰총장에 오른 인물.

그가 겪은 일과 쌓아온 경험은 그 어떤 검사가 와도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것이다.

“자!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요.”

* * *

김주상 감사원장.

내가 처음으로 고른 놈이었다.

나를 제외한 세 명의 관리자들 중 한 명.

관리자들을 모두 장악해 버린다면 마스터와 클럽원들 간의 연결 고리가 끊어질 것이다.

절대적이면 무엇하리.

결국 실무는 관리자들이 갖고 있었고, 클럽원들을 움직이는 것 또한 관리자들이었다.

즉, 관리자들을 장악해 놓으면 언제든지 거짓 보고와 거짓 명령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따로따로 뵙고 인사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하하! 하긴 그게 좋긴 하죠. 저도 한 검사님에 대해 궁금한 게 있고요.”

“저도 궁금한 게 참 많네요.”

웃으며 얘기하는 김주상이었지만, 내 얼굴은 그의 웃음을 받아 주지 않았다.

“일단 한잔 받아요.”

김주상도 그 사실을 눈치챈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내 술잔을 채우려 했다.

속마음을 마음껏 털어 놓는 건 첫 만남의 술자리가 아닌, 마주보고 앉은 지금 이 자리에서 나올 확률이 높았다.

무엇보다 화기애애하던 첫 만남과는 다를 것이다.

나는 지금 김주상을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온 것이니까.

그 과정이 김주상에게 있어서는 결코 좋지 못하겠지만.

“저도 한잔 주시죠.”

내 잔을 채운 김주상이 자신의 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다리를 꼬고 옅은 미소를 보일 뿐 술병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쪽이 만진 술병이 더러워서 그러니 직접 따라 드시죠.”

* * *

“지, 지금 뭐라 그랬습니까?”

“직접 따라 드시라고 했습니다.”

“한 검사 미쳤어요?”

감사원장의 으리으리한 공관에 마주 앉은 우리 둘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웃으며 나를 반기던 김주상의 표정은 굳었고, 나는 다리를 꼰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요. 미치지 않았습니다. 미치지 않았기에 당신 같은 사람과 술잔을 기울이지 않는 겁니다.”

감사원장의 공관을 찾아오기 전.

나는 김주상을 내 수족으로 만들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내가 왜 클럽에 들어온 지 아십니까?”

이제 더 이상 눈앞에 있는 쓰레기 같은 녀석에게 인간 대접을 해줄 필요가 없다는 소리다.

“당신들과 뜻을 같이 하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당신들을 잡아넣기 위해서였지.”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언성 낮춰요.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을 검찰로 끌고 갈 이유는 충분하니까.”

이유를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검찰과 감사원, 그리고 정부가 파악하지 못한 감사원장의 비리.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정답은 바로 국정원장이였다.

어떤 기관도 감히 감사원장을 사찰할 생각을 하지 못했고, 판사 시절부터 쌓아온 청렴한 이미지는 김주상에게 비리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즉,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혹여나 김주상에게 불만을 품고 사건을 터트리려 하면 클럽은 국정원장을 통해 막았다.

돈을 쥐어 주거나, 아니면 먼 타국으로 보내 버리거나, 그것도 안 되면 아예 삭제시켜 버렸다.

사고사 혹은 실종 같은 방법으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국정원장은 백성원이며 그를 사찰한 사실은 오직 나만 알고 있었다.

클럽도 김주상 본인도 모르고 있었으며, 모든 보호가 사라진 그의 비리를 캐내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백성원 원장도 당신과 한패였습니까?”

“보통은 팀이라 말하죠. 당신 같은 사람들을 패거리라 말하고.”

감사원장이라는 직위.

국정원장과 클럽의 보호.

오랜 법조계 생활에 쌓아온 인맥과 청렴한 이미지.

이 모든 것들을 걷어 내자 수많은 서류를 수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서류는 지금 내가 들고 온 가방에 가득 담겨 있다.

“자! 그럼 슬슬 오픈해 볼까요.”

쾅!

가방이 얼마나 무거운지 책상에 올려놓자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수뢰, 뇌물 공여, 선거방해, 직무 유기에 직권남용까지. 아이고∼ 다 부르기도 힘드네.”

수십 개의 서류철을 하나씩 하나씩 꺼내 놓았다.

테이블 높이를 고려해도 내 눈높이까지 쌓인 엄청난 양의 서류들.

“이게 무슨…….”

서류에 가려 김주상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떨려 왔고 눈은 휘둥그레졌을 것이다.

사실 나 역시도 처음 백성원 원장에게 서류들을 건네받았을 때 지금 김주상의 표정과 같았다.

영장을 받아 자료를 수집하며 피의자를 탈탈 터는 일이 너무나도 익숙한 나지만, 국정원이 수집한 자료는… 아니, 백성원 원장이 수집한 자료는 내가 생각하는 상식과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김주상이 태어난 병원부터 지금 감사원장 공관에서 나와 앉아 있는 현제까지.

그야 말로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영장주의 대한민국에서 영장으로는 도저히 수집할 수 없는 자료들이 말이다.

또 예상치 못한 콜라보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건네받은 자료를 서윤호란 능력 있는 검사의 필터링을 거치자 법적 구속력이 있는 서류로 다듬어졌다.

본디 수사권을 가지고 있는 기관들은 한식구라 말하지만, 서로를 견제하곤 한다.

경찰과 검찰이 가끔 으르렁대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국정원과 검찰의 관계는 어떨까.

역시 좋다고 말하기도 좋지 않다고 말하기도 그렇다.

국정원 역시 수사권을 가지고 있는 기관이고, 특히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독점적인 수사권을 가진다.

검찰에도 공안부가 있으며 서로 협력하기도 하지만, 부딪치기도 한다는 소리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백성원과 서윤호는 국정원과 검찰 소속이 아니라 내가 만든 수사팀 소속이며 클럽을 잡기 위해 협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모든 것. 그리고 당신이 지금껏 한 모든 범죄가 담겨 있는 서류들입니다.”

“참, 어이가 없네.”

심지어 고등학교 시절 자신의 부모님이 담임선생에게 촌지를 건넨 혐의까지 적혀 있었다. 그러다 보니 허탈해 하는 김주상의 표정이 이해가 갔다.

나도 어이가 없을 정도니까, 뭐…….

국정원의 정보력이 엄청나긴 한 것 같았다.

도대체 촌지를 받은 사실을 어떻게 알아낸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갔으니까.

“하하, 그래서 뭐 어쩌자고? 이걸 나한테 보여 주는 이유가 뭔데.”

하지만 김주상은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보고 있던 서류를 접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여유로운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믿는 구석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물론 예상하지 못한 반응은 아니었다.

연기든 정말 믿는 뒷배가 있든 상관없었으니까 말이다.

“촌지 받은 걸로 기소가 될 것 같나? 아니면 확인되지 않은, 서류만으로 존재하는 혐의를 가지고 기소할 건가?”

백성원이 만들고 서윤호가 다듬은 자료들.

혐의점은 충분했지만, 모든 사건이 그렇듯 기소를 위해서는 입증을 해야 했다.

“내가 돈을 받았다는 기록도, 건네준 대가도, 그렇다고 증인도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김주상은 여유로운 미소를 보이는 것 같았다.

또한 기록도 대가도 증인도, 클럽의 도움을 받는다면 얼마든지 없애 버릴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또한 재판에도 얼마든지 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역시 클럽의 관리자이며 제너럴 룸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 중 하나이니까 말이다.

“제가 언제 당신을 기소한다고 했습니까?”

“뭐?!”

기소와 재판은 지금 시점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쉽지도 않을뿐더러 확실한 방법도 아니기 때문이다.

현직 감사원장을 기소한다는 건 법원과 검찰에게도 부담이 가는 게 당연하다.

거기에 확실한 입증도 불가능한 혐의로 기소가 되는 것 자체가 힘들 것이다.

대법관 출신에 부총리급 인사를 건든다는 건 양날의 검을 휘두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확실히 베지 못한다면 오히려 자신이 베일 확률이 높으니까 말이다.

“저는 당신을 기소하지 않을 겁니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거든요.”

기소가 된다 해도 수년의 시간이 걸릴 게 빤하다.

현직 감사원장의 재판에는 여러 명의 검사가 달라 붙을 것이고, 변호인단 역시 화려하게 꾸며질 것이다.

수십 년 법조계 경력과 쌓아온 김주상의 인맥.

아마 피의자와 검찰의 싸움이 아니라 검찰 내부에서도 파가 나뉘어질 것이었고, 법원 역시도 마찬가지일 테다.

결국 입증해야 될 서류도 늘어난다는 것인데… 그렇게 된다면 재판 역시 길어질 확률이 높다.

1심부터 항소심, 그리고 상고까지.

녀석을 재판장에 세우는 것보다 내 수족으로 만드는 것이 훨씬 더 빠르다는 소리다.

또한 나는 지금 김주상 한 명을 처벌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내가 무너뜨릴 조직의 소속된 한 사람일뿐이지.

“대신 당신을 매장시키는 건 제게 있어 너무도 쉽습니다.”

“하하! 일개 평검사가 감사원장을 매장시킨다고?”

“네.”

“클럽 관리자가 됐다고… 아니지, 클럽의 관리자로 잠입했다고 모든 걸 다할 수 있을 것 같나? 나 역시 클럽의 관리자야. 당신과 할 수 있는 일이 똑같다는 거지. 그리고 클럽이 아닌 여기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더 많고.”

“그거야 당신이 감사원장에 있을 때 가능한 얘기지.”

녀석에게 클럽이라는 뒷배와 감사원장이라는 직위가 있다면 내 슈트 주머니에는 낡은 휴대폰이 하나 있었다.

“이게 뭘 것 같아?”

주머니를 뒤적거려 휴대폰을 꺼내 김주상에게 보이자 그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게 뭔데?”

“핫라인.”

“뭐?”

“청와대 주인과 연결되는 핫라인이라고.”

“하하! VIP께서 암행어사를 두고 계셨구먼. 그런데 말이야. 감사원장을 건드는 건 많은 정치적 문제가 뒤따를 텐데 그건 생각하지 않았나?”

국회의 동의가 필요한 임명직은 수많은 정치적 문제가 따른다.

인사 청문회가 필요하지만 대통령이 강제적으로 임명할 수 있는 자리와는 다르다는 말이다.

여당과 야당을 가리지 않고 의회 인맥이 있으며, 표면상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감사원의 경우에는 철저하게 독립성을 보장하고 있다.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이 원장을 해임한다면 대통령에게도 상당한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곧 있으면 선거철인 거는 아시죠?”

“그런데?”

“이 자료가 야당한테 넘어간다면 어떨까요?”

“뭐?!”

드디어 김주상의 얼굴에서 여유로움이 사라졌다.

내 한마디에 담긴 뜻을 전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당에게 넘어가면 곧 있을 선거철에 너도나도 국민들의 눈에 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기는 것이죠. 야당의 전체적인 지지율에도 도움이 되고요. 그럼 대통령이 당신을 해임할 수 있는 명분은 충분해집니다. 야당 전체가 당신을 해임하라고 떠들어 될 테니까요.”

“이런 씨발… 지금 뭐하자는 거냐고!”

“거기에 민정수석한테도 큰 부담이 되죠.”

한탁희 민정수석 역시 클럽의 관리자이며 껄끄러운 일이 생기는 걸 원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물론 한탁희가 김주상 원장에 대한 인사 검증을 한 것은 아니었다.

김주상이 감사원장이 된 후 민정수석에 임명되었으니까 말이다.

다만,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은 또 아니다.

헌법 제98조 1항.

감사원은 원장을 포함한 5인 이상 11인 이하의 감사위원으로 구성한다.

대법원 역시 대법원장을 필두로 13명의 대법관들이 의사 결정을 하듯 감사원 역시 감사원장을 포함 감사위원들이 감사원의 모든 의사들을 결정한다.

그리고 얼마 전 바뀐 네 명의 감사위원.

김주상 원장이 대통령에게 제청했고, 한탁희가 인사 검증을 통해 임명되었다.

웃긴 건. 네 명 다 김주상과 한탁희와 인연이 있다는 것이다.

즉, 두 사람이 원하는 사람을 앉혀 놓았다는 것이고, 그 말은 두 사람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과 같았다.

“과연 한탁희 민정수석이 당신을 감싸 주려 할까요? 인사 검증의 실패를 책임지면서 당신과 함께 사표를 쓰겠냐는 말입니다. 정계의 떠오르는 샛별, 한탁희 민정수석이 말이죠.”

“…….”

“그리고 잘 모르시나 본데요. 당신이 속해 있는 클럽이 어떡해서든 당신을 보호해 줄 것 같습니까? 만약 그랬다면 김수철은 감옥에 가지 않았을 테고, 조정식은 다시는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이 되지 않았을 테니까요.”

머리를 쥐어짜고 한숨을 내쉬며 술을 들이켰다.

그러고 나서 김주상에게 나올 말을 빤했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뭔가?”

“이제부터 당신의 모든 행동은 클럽이 아닌 저를 위해서 움직이십시오.”

“그럼 내가 얻는 건?”

“지금 가진 자료들 묻어두겠습니다.”

“묻어두다니? 없애 버리겠다는 게 아니고?”

“하하, 제가 원장님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선거 끝나면 콧방귀 낄 게 빤한데.”

“그럼 나는 한 검사를 어떻게 믿지?”

“저를 믿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그런 것은 없었다.

물론 김주상과의 약속을 지키지는 않을 것이다.

잠시 묻어두는 것일 뿐 때가 되면 모든 걸 터트리고 녀석을 감옥에 보낼 테니까.

김주상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불안에 떨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다른 방법은 없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지금 김주상과 하는 건 거래가 아니라 협박이니까 말이다.

“알겠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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