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장 (29/35)

제4장

“참, 세월이 빠른 것 같네.”

서울로 향하는 차량 안.

뒷자리에 앉아 있던 강철호 총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복을 입고 있던 자네가 어느새 중수부 연구관이 되었으니 말일세.”

나는 강철호 총장의 저택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을 말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운전하는 차량의 뒷자리에 강철호가 올랐다는 것은 내 제안을 수락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자네, 면허는 언제 땄나?”

“연수원을 수료하고 땄습니다.”

“하하, 그런데도 나보다 운전을 더 잘하네. 보통 자네 나이대의 사람이 운전하면 보통 더 밟기 마련인데 말이야.”

“검사가 난폭 운전을 할 수는 없죠.”

“그런가? 자네가 애늙은이인 것은 알았지만, 운전까지 노련할 줄은 몰랐네.”

“하하, 총장님. 애늙은이라뇨.”

어젯밤.

얘기를 끝마친 우리는 마치 한 가족처럼 하루를 보냈다.

강철호 총장과는 벽장에 나열되어 있던 위스키를 기울였고, 사모님은 훌륭한 요리를 해 주셨다.

기분 좋게 마셔서인지 숙취는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 조심스레 서울로 향하려 했지만, 강철호 총장이 나를 붙잡았다.

‘같이 올라가지’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뭐가 말인가?”

“당분간 사모님도 혼자 지내셔야 되고… 30년 만에 돌아오신 고향을 다시 떠나게 되었으니까요. 준비되면 그때 모시러 와도 되는데 말입니다.”

“됐네. 마누라야 혼자 지내는 데 도가 튼 사람이고, 나 역시 1년 정도 쉬니까 몸이 근질근질하기도 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자네 부탁인데 거절할 수가 있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총장님.”

이렇게 모든 준비는 끝났다.

강철호 총장, 백성원 차장, 서윤호 검사, 강서빈 SY 그룹 회장, 민태호 SY 그룹 부회장.

이보다 완벽한 멤버는 없을 것이었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말이다.

내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있고, 대한민국 정보의 핵심인 국가정보원의 수장까지 있었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클럽이라 해도, 우리를 막기는 힘들 것이었다.

“백성원 차장 승진은 언제로 정해졌나?”

“아마 내일쯤 발표가 날 것 같습니다. VIP가 민정수석실 검토는 끝난 것 같다고 했으니까요.”

내가 세운 계획 또한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백성원 차장을 국정원장으로 승진시키고, 그를 통해 클럽에 들어가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중 스파이를 해줘야 할 백성원 차장이 클럽에 꼬임에 넘어가지 않을까하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그럴 확률은 적었고, 그에 대한 대비 역시 준비했다.

만약 그가 나를 돕는 게 아니라 클럽을 돕기로 마음을 돌린다면, 내 속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꺼내면 됐다.

그 사실을 백성원도 알고 있기에 그럴 확률은 적겠지만.

“하하, 내가 없으니 이제 대통령과 연결된 동아줄을 만든 ,건가 자네?”

“저는 총장님을 동아줄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검사로서 힘을 얻기 위해 접근한 건 맞지만, 언제부터인가 총장님을 존경하고 있으니까요.”

“참… 말이나 못하면 밉지라도 않지.”

“하하하하! 조금 버릇없게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예전에 카리스마 넘치던 총장님이 이제는 조금 편해진 것 같습니다.”

사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조금 귀여워진 것 같았다.

염색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그의 머리는 백발이 되었고, 수염 또한 덥수룩했다.

1년간의 공백이 강철호를 카리스마 넘치던 검찰총장에서 너스레를 떠는 평범한 시골 할아버지로 바꾸어 버린 것이었다.

“수염이 참 잘 어울리시는 것 같습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흐음, 이제 날 아주 가지고 노는구먼그래.”

“일단 사람들 소개하기 전에 미용실로 모시겠습니다.”

“왜? 내가 창피한가?”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냥 갈까요, 그럼?”

“크흠, 미용실로 가지.”

“하하!”

* * *

강남대로.

차량을 주차한 우리는 약속 장소를 향해 걸었다.

“변한 게 하나도 없구만. 여전히 복잡하고, 여전히 시끄럽네.”

머리를 검게 염색하고 얼굴을 덮고 있던 덥수룩한 수염 역시 말끔히 정리한 강철호가 강남대로를 보며 말했다.

“이곳과 어울리고 싶지 않아 기른 수염인데 말이야.”

까끌까끌해진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리며 강철호 총장이 말했다.

그제야 내가 기억하던 예전 강철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나저나 숙식은 제공되는 건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타지에서 일을 시키려면 넉넉한 봉급은 못 줘도 숙식 정도는 제공해 줘야 하는 게 도리이지 않은가.”

“아, 그게… 당분간 제 원룸에서 지내시는 게 어떠실지.”

강철호는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물론 그가 한 말이 농담인 걸 알지만, 생각해 보니 걱정이 되었다.

스위트룸까지는 아니어도 편하게 지내실 숙소 하나 정도는 마련해 주어야 되지 않겠는가.

존경하는 스승을 길바닥에 재울 수는 없었다.

“그 좁아터진 곳에서? 사양하겠네.”

“일단 천천히 알아보겠습니다.”

“빨리 알아봐야 될 걸세. 당장 오늘 밤부터 지낼 곳이 없으니.”

“하하…….”

나는 멋쩍은 웃음과 함께 걷기 시작했다.

백성원 차장이 통보해 준 약속 장소는 신논현의 한 원룸.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백성원 차장이 통보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설마… 건물이 움직이지는 않겠지?”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나 자네?”

“아, 아닙니다.”

빨간불에 멈추어선 우리.

수많은 사람들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예전에는 출근하면서 신문 보고 그랬는데, 요즘은 휴대폰으로 모든 걸 할 수 있는 세상이니…….”

귀에는 이어폰, 손에는 스마트폰을 든 사람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모습에 강철호 총장이 넋두리를 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 자네가 뭘 안다고 그러나?”

“저도 지하철에서 스마트폰보다 종이 신문을 보는 게 더 좋더라구요. 갓 인쇄되어 종이에서 나는 휘발유 냄새가 그립기도 하구요.”

“그렇지. 그 냄새를 맡으며 하루를 시작하던 시절도 있었지.”

물론, 나 역시 스마트폰에 익숙한 이들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었다.

과거로 돌아오긴 했다면 돌아온 과거에서도 스마트폰은 그리 먼 얘기가 아니었다.

내가 신문을 좋아한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신문에서 내신 퀴즈를 맞추면 용돈을 받는 놀이를 즐겨 했기 때문이다.

“자네가 공감한다는 게 웃기지만.”

“어렸을 적 아버지가 신문에서 퀴즈를 내시곤 했습니다. 덕분에 신문을 자주 봤구요.”

“하하, 아버지가 참 훌륭한 교육을 하셨네.”

“네. 다만, 제가 존경이라는 단어를 알기도 전에 돌아가셨죠.”

톡톡.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강철호가 내 어깨를 치며 지긋이 바라봤다.

“걱정 마. 위에서 지켜보고 계실 테니.”

“그래서 항상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끄럽긴. 이미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어버렸는데.”

“하하, 감사합니다.”

골목길에 들어서자, 주변은 한산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가 회사 사옥이 모여 있는 방향으로 걸을 때, 우리는 반대 방향으로 걸었기 때문이다.

“저 사람들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혹시 몰라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아무도 없었고, 더 신기한 것은 아무리 골목길이라지만 방범용 CCTV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차장님.”

힐끔.

“아닐세.”

백성원 차장에게 서둘러 다가가 인사를 건넸고 그는 뒤따라오던 강철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꾸벅.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강철호 총장님. 국가정보원 제1차장 백성원이라고 합니다.”

“아, 반가워요, 차장님. 강철호라고 합니다.”

한걸음에 달려가 고개를 숙이는 백성원.

내가 알기로 두 사람은 초면이었다.

하지만 꼭 검찰이 아니어도 강철호 총장의 명성은 꽤 높았고, 그렇기에 저런 굽힘이 나오는 것이었다.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제 후배 중에 정일현이라고 있는데…….”

“아, 저도 알아요. 지금 중앙지검 공안부장이죠?”

“네, 맞습니다. 자기가 가장 존경하는 검사가 바로 강철호 총장님이라고 하더라고요.”

“에이, 설마요.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꼭 자기가 아니어도 모든 검사들이 존경한다고…….”

“충분하니 비행기는 그만 태우세요, 차장님. 숨이 막히려고 합니다.”

새삼 깨달았다.

내가 존경했고 이제는 편해진 강철호가 검찰에서 어떤 인물이었는지.

또 그가 남긴 커리어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말이다.

30년간의 검사 생활.

그는 라인도 없이 오로지 실력으로 검찰총장 자리에 올랐다.

비주류라며 그를 무시하고 괄시하던 모든 검사들은 어느새 강철호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시기와 질투로는 강철호의 능력을 이기지 못한 것이었다.

2,000 검사의 존경과 박수를 받으며 30년의 검사 생활을 마무리 지었으니, 결국 승자는 강철호라는 소리였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총장님.”

“이제 총장 아닙니다. 그냥 편하게 철호 씨라고 불러 주세요. 연배도 비슷한 것 같은데.”

겨우 두 살 많은 강철호의 나이.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백 차장님은 내일이면 국정원장이 되실 분이고, 저는 퇴임한 시골 노인일 뿐입니다. 감히라니요.”

다만, 두 사람이 편해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하하하하! 너무 겸손하신 게 아닙니까? 아직도 정치계에서는 총장님을 모시지 못해 안달이 났습니다.”

“정치에는 관심 없으니, 제 위치가 달라질 일도 없죠.”

다행인 것은 두 사람이 꽤 좋은 사이로 발전할 것 같았다.

그만큼 둘은 서로를 존중하고 있었다.

“자네도 잘 따라오고.”

“네.”

두 사람을 한 팀으로 만든 나는 찬밥이 된 것 같았지만…….

“총장님과 한 검사님이 어떤 경로로 이 원룸까지 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골목길에 들어선 순간 어떠한 CCTV에도 찍히지 않을 겁니다.”

“대한민국에 그것도 강남 한복판에 그런 곳이 있다니 놀랍군요.”

“보안에서 가장 중요한 건 흔적을 남기지 않는 거니까요.”

수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학이었다.

발생된 사건을 거슬러 올라가며 증거를 찾는 것이 수사의 기본이자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골목길에 들어선 순간, 두 사람의 발자국은 사라지고 저희가 어디로 향하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소리입니다.”

백성원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건물에 내부는 평범한 원룸과 다르지 않았다.

“타시죠.”

내부에는 CCTV가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엘리베이터 내부 역시 평범했다.

백성원은 버튼을 누르지 않은 채 자신의 속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걸 누르면 이제 저희는 대한민국 지도에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향합니다.”

백성원 차장은 속주머니에서 꺼낸 키로 작은 키박스를 열고 빨간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 신분 스캔 완료.

네 개의 기둥으로 지탱되고 있는 원룸 건물.

기둥 사이에는 작은 주차장이 있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지하로 향하는 길은 찾을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까지는.

― 보안 코드. B1 사전 승인 게스트. G1, G2 출입을 허가합니다.

한참이나 지하로 내려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고, 두꺼운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긴 통로가 눈앞에 나타났다.

끝은 어두워 보이지 않고, 작은 조명들이 길을 비추는 그런 통로가 말이다.

하지만 백성원 차장은 이 통로가 익숙한 듯 구석에 있던 골프 카트에 시동을 건 채 우리를 돌아보았다.

“가시죠. 운전은 제가 하겠습니다.”

* * *

“생각보다 오래가네.”

“그러게요. 강남 한복판에 이런 지하 통로가 있을 줄은…….”

골프 카트에 오른 우리.

백성원은 능숙하게 운전을 하고 있었고, 나와 강철호는 뒷자리에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강남이 개발되기 전부터 세워진 통로입니다.”

“네? 그게 말이…….”

“처음 강남을 개발하고자 도시 계획을 세울 때, 이 통로 역시 많은 변화를 겪었죠. 원래는 정부 주요기관들을 전부 지날 수 있게 설계되었지만,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려면 땅도 깊게 파야 하기에 통로를 메운 곳도 있습니다.”

강철호 총장과 백성원 차장이 대화를 이어 나갔고, 나는 주변을 유심히 둘러보았다.

벽면에 보이는 콘크리트로 급하게 막은 듯한 입구.

시대는 발전했고 땅은 부족했기에 정부와 정보기관 역시 타협을 한 자국이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땜빵한 흔적이 몇 군데 보일 겁니다. 원래대로라면 여러 갈림길을 통해 서울에 있는 중요한 국가기관을 지하 통로를 통해 갈 수 있었죠.”

“그럼 지금 이 지하통로는 어디어디로 이어진 거죠?”

“자네도 가 봤던 곳.”

“제가 가 본 곳이라면… 혹시 고려전단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맞아. 원래는 지하 통로를 아예 없애려고 했지만, 고려전단으로 가는 길만큼은 남겨 두었지. 당시 강남이 개발될 때 처음으로 세워진 건물이기도 했고, 블랙요원들이 비밀스레 모이기 위해서는 이 지하통로가 필요했으니까 말이야.”

백성원 차장이 주변을 가리키며 설명을 했고, 나는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 저희의 흔적을 알 수도 있다는 거네요?”

“아니. 블랙요원들은 국정원장이 아닌 1차장 관리하에 있고, 내 명령에 절대적으로 따르는 요원들이지. 즉, 블랙요원들이 이 통로에 누군가 들어왔다 보고하는 건 조정식 원장이 아니라 나라는 소리야.”

“그래도 국정원에 최고 책임자는…….”

“알아. 국정원장이지. 하지만 국정원장은 나를 통솔하고, 나는 블랙요원들을 통솔해. 한마디로 국정원장이 블랙요원들에게 직접 지시를 내릴 일은 없다는 거야. 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 사이에서 자네 같은 검사가 블랙요원이라고 할 수 있지.”

백성원 차장에 적절한 비유 덕분에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2,000 검사들을 검찰총장이 지휘하며 그 검찰총장을 법무부 장관이 지휘하듯.

블랙요원 역시 1차장인 백성원 차장이 지휘하는 것이었다.

“그럼… 만약 차장님이 승진하셔서 국정원장이 된다면, 새로운 1차장에게 블랙요원 통솔권이 넘어가는 거 아닙니까?”

“응, 맞아. 하지만 외부에서 임명된 국정원장과 내부 승진을 통해 국정원장이 된 사람은 조직 장악력에서 큰 차이가 나지.”

“현재 조정식 원장 역시 내부 승진으로 국정원장에 오른 사람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하지만 자네 말대로라면 해외로 도피한다고 하지 않았나?”

“아…….”

그렇다.

백성원 차장이 직접 입을 열지 않는 이상, 우리의 흔적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끼익―

“내리시죠, 총장님. 자네도 내리고.”

“네.”

골프 카트에 느린 속도로 한 20분쯤 달렸고 통로는 끝이 났다.

카트를 멈추어 세운 백성원은 운전석에서 내려 우리를 안내했고, 우리는 그를 뒤따랐다.

“저희가 처음인가요?”

“아니.”

“전부 왔다는 말씀이세요?”

“하하, 자네는 부산에서 왔고, 다른 사람들은 서울 시내에서 왔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

피식.

백성원은 웃으며 콘크리트 벽을 만지작거렸고, 강철호 총장은 나를 보며 비웃음을 보였다.

“가끔 보면 너무 멍청할 때가 있단 말이지.”

“총장님 모시고 오느라 늦은 겁니다…….”

고개를 숙이며 투덜대고 있자, 두꺼운 콘크리트 벽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와아, 어떻게 이런 식으로 만들 수가 있는 거죠?”

첩보 영화를 보다 보면 두꺼운 콘크리트 벽이 열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을 현실에서 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더 놀라운 것은 열고 닫을 수 있는 문이라면 반드시 작은 틈이나 이음새가 보일 텐데, 여기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두꺼운 벽이 갑자기 열린 것이었다.

“국정원 시계는 10년을 앞서가지. 이건 놀랄 일도 아니란 말일세.”

문이 열리고 난 후의 풍경은 익숙했다.

몇 번이고 와 본 고려전단의 내부였으니까.

다만 강남의 낡은 건물 지하 계단과 사무실을 통할 필요가 없었다.

꾸벅.

“총장님, 안녕하십니까! 서윤호 검사입니다.”

“워매, 우리 총장님 아닌겨.”

“안녕하십니까, SY 그룹 회장 강서빈이라고 합니다.”

낯익은 풍경에 낯익은 사람들.

우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가 고개를 강철호 총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모두 반가워요. 강철호라고 합니다.”

소개를 하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도착한 세 사람은 백성원 차장과 통성명을 했을 것이고, 강철호 총장과 나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자! 모두 모였으니, 주최자의 말을 좀 들어 볼까요?”

“좋습니다. 한 검사, 자네가 회의실로 안내들 해 드리게.”

강서빈이 박수를 치며 말했고, 백성원 차장은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커피라도 내갈 테니.”

“아닙니다. 제가…….”

“이곳의 주인은 나일세. 그리고 주최자한테 커피 심부름을 시킬 수도 없지 않은가.”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제가 하겠습니다.”

백성원 차장은 탕비실로 향했고, 나는 사람들을 앞장서 회의실로 향했다.

사실 내가 이 사람들을 모은 주최자이긴 하지만, 굳이 서열을 따지자면 막내일 것이었다.

대기업의 회장과 부회장, 전 검찰총장, 그리고 내일이면 국정원장 승진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는 중수부 연구관에 명함은 초라해질 뿐이었다.

아, 동기인 서윤호가 있지만, 나보다 형이니 뭐…….

“각자 편히 앉으시면 됩니다.”

모두가 자리에 앉고 백성원이 커피를 내오자,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진정되었다.

회의실의 분위기는 무거워졌고, 모두의 시선은 나를 향했다.

“크흠…….”

부담감에 헛기침이 나왔다.

은은한 커피향이 채워진 방 안에는 작은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하지만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이 장면은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상상한 장면이었다.

나는 그 상상을 현실로 이루어 냈고, 우리 여섯은 반드시 클럽을 잡을 것이다.

“우선…….”

나는 작전의 큰 틀을 설명했다.

백성원 차장이 국정원장에 임명되고 조정식을 구슬려 클럽에 관심을 사겠다는 것과 백성원을 이용해 내가 클럽에 들어가겠다는 것.

그리고 언더커버 수사를 통해 클럽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파악하겠다는 것까지 말이다.

“잠깐 발언을 해도 될까요?”

손을 살짝 올린 서윤호가 모두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 말씀하시죠, 서 검사님.”

나 역시 그를 향해 손바닥을 펴 보이며 말했다.

나와 서윤호가 동기이며 꽤 친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중요한 일을 하려 모인 것이고, 회의실 분위기 역시 무거웠다.

즉, 공적인 자리이기에 존칭을 써야 된다는 말이었다.

“지금 한 검사님의 계획은 100퍼센트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떤 변수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다는 말이죠. 그에 대한 계획은 있는 겁니까?”

서윤호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거나 섭섭하지는 않았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궁금해하고 있을 것이며, 수사팀을 꾸린 내가 대답해 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지금 당장은 없습니다.”

“그럼 백성원 차장님이 클럽에 관심을 받지 못하면 저희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다는 거네요?”

“네, 맞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무책임한 말로 들릴 수 있겠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피해자와 피의자에 생사를 결정지을 수도 있는 검사는 모든 일에 신중해야 했다.

확실하지 않은 일에 한 사람의 인생을 걸 수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다.

두 사람이 있는 공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피의자에 자백.

너무나도 확실한 사건에서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지문을 감정하고 CCTV를 확인하며 사체에 자상을 파악하는 게 바로 검사가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섣불리 내린 결정도 계획도 아니었다.

실패에 대한 계획 역시 밤새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고, 그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없다’였다.

“실패하지 않도록 만들 겁니다.”

“어떻게요?”

“성공 확률을 높이고, 실패 확률을 낮출 겁니다.”

“그건 당연한 얘기 아닌가요?”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서윤호.

그의 눈빛을 보니 지금 행동이 이유가 보였다.

모두를 안심시켜라, 그리고 너의 의지와 확신을 보여 줘라. 내가 도와줄 테니.

서윤호에 행동은 나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렇기에 나 역시 물러서지 않을 것이었다.

물론, 여기 모인 사람들은 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 사람들이었다.

나를 위해서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줄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사실에 안심해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단 한 번의 실패는 기회조차 앗아갈 터였다.

클럽을 확실히 잡지 못하고 심기만 건드린다면, 두 번 다시 기회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아마 나를 몰락시키기 위해 모든 전력을 다 쏟아부을 것이고, 두 번째 공격에 대한 대비 역시 완벽히 하겠지.

“실패의 원인들을 찾아 완벽히 없앨 겁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실패의 원인 따위는 없습니다. 계획에 대한 준비가 이미 완벽히 끝나 있으니까요. 그렇기에 제가 세운 계획에 실패라는 결과는 없을 겁니다. 오로지 성공만 있을 뿐.”

“흠…….”

외마디 고민과 함께 서윤호에 발언이 끝이 났다.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더 이상 나설 이유가 없다는 것을.

“좋아. 우리 모두 자네를 믿네. 그럼 자네가 클럽에 들어간 후의 계획은 뭐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또 뭐고?”

이번에는 강철호 총장이 손을 들며 물었다.

“지금까지 세운 계획은 오로지 클럽에 들어가겠다는 겁니다. 들어간 후에 계획을 세울 수도 없었죠. 클럽은 클럽원에게도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고 있으며 어떤 지시를 내릴지도 모르니까요.”

“흐음, 그럼 상황에 따라 계획을 세워야 된다는 말이군.”

“네, 맞습니다. 그렇기에 여러분들이 필요했습니다.”

나를 잘 알고 또한 나 역시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을 잘 알고 있었다.

마음이 맞았고, 능력 또한 충분하기에 별로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여러분들은 지금에 생활패턴을 바꾸지 마시고, 평소처럼 출근을 하시고 퇴근을 하시면 됩니다. 제가 클럽에 들어간 후 새로운 이슈가 생길 때마다 여기에 모여 회의를 하게 될 겁니다.”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클럽에 들어간다 해도 꽤 많은 검증 과정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들에 완벽한 신뢰를 얻은 후에 본격적인 수사를 해야 했다.

“알겠네.”

“그리고 총장님께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말하게나.”

국정원장과 감찰국 검사, SY 그룹의 회장과 부회장.

이미 충분하지만, 조금 욕심을 내보려 한다.

“정계에 입문해 주십시오.”

* * *

내가 만든 계획은 시간에 맞추어 차질 없이 진행되어 갔다.

백성원 차장은 무사히 청문회를 통과해 국정원장 자리에 앉았고, 조정식은 쫓기듯 출국길에 올랐다.

여섯 사람이 고려전단에서 해어진 지 일주일 동안 이루어진 일이었다.

서윤호는 평소와 다름없이 감찰국 검사로서 업무를 해 나갔고, 강서빈과 민태호 역시 SY의 그룹에 최고 임원으로서 바쁜 나날들을 보낸 것 같았다.

그리고…….

“일어나게. 아침 운동이나 하러 가자고.”

“총장님… 저, 두 시간 있다가 출근해야 됩니다.”

“그래. 그러니까 운동을 가자고 하는 걸세. 검사는 머리만큼 체력도 따라 줘야 하는 거 모르나?”

나는 강철호와 일주일째 같은 방을 쓰고 있었다.

정계에 입문해 달라는 내 제안을 수락한 강철호는 종로구에 작은 집을 구했고, 부인 역시 짐을 싸들고 서울로 올라왔다.

언론 역시 강철호의 행보에 맞추어 온갖 추측 기사들을 쏟아 냈고, 정계는 강철호를 자신의 당으로 영입하기 위하여 스카우트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게 자네 집에서 지내지, 왜 여기서 고생을 하고 있나.”

즉, 강철호의 거처에 대해서는 아무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소리였다.

이미 서울에 아늑한 집을 구했고, 서울에 집을 구했다는 사실 자체가 정계에 입문하겠다는 뜻과 같았으니 말이다.

“사모님과 약속했잖아요, 자주 찾아뵙겠다고.”

“자주 찾아오라는 거였지, 같이 살자는 말은 아니었네만.”

사모님과의 약속보다는 두 사람의 안전을 위한 조치였다.

강철호 총장 집 앞에는 끝도 없이 기자들이 몰려들 것이고, 때로는 흉기를 들고 설치는 놈이 생길 수도 있었다.

또 이미 클럽은 내가 강철호 총장과 각별한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테고, 내가 이 집에서 지낸다고 해도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의 정치 입문을 돕고 라인을 타 보겠다는 생각 정도로 비춰질 테니까.

물론, 강철호의 정치 입문 자체가 내 뜻이라는 것도 모를 터였다.

“운동 같이 갈 거 아니면 오늘 퇴근하고 집에 가게나.”

“후우, 아닙니다. 같이 가시죠.”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차라리 예전처럼 살 떨리는 게 나았는데.”

“뭐라고 중얼거리나?”

“아닙니다!”

그래도 나쁜 점보다는 좋은 점이 더 많았다.

매일 아침, 잘 차려진 밥을 먹고 두 분의 온기가 가득한 따뜻한 집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타지 생활에 잘 챙겨 주지 못하는 어머니 역시 강철호 총장과 사모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래도 제가 있어서 좋으시죠?”

“좋기는, 개뿔.”

“하하하하.”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의 감사 인사에 치우가 있으니 좋았다. 마누라 역시 치우를 좋아한다. 듬직한 아들이 생긴 것 같아 든든하다고 한 강철호 총장의 말을.

“휴, 운동화 끈도 못 매시면서 무슨 운동을 가시겠다고…….”

“그니까 이런 걸 왜 사오고 그러나. 나는 찍찍이가 편한데 말이야.”

현관에 걸터앉아 끙끙대고 있던 강철호의 신발 끈을 매 주었다.

퇴임 후 1년간 시골 생활을 한 강철호는 쌓아 놓은 에너지를 분출하고 싶은 건지, 매일같이 새벽 등산을 했고 덕분에 가뜩이나 부족한 내 수면시간 역시 줄어 버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신발을 괜히 사 드린 것 같습니다.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안 사 드리는 건데.”

“됐네. 내 거를 신고 가면 되네.”

“하하, 또 삐지셨네.”

사실 부족한 수면 시간에도 꼬박꼬박 헬스장을 다녔고 체력을 길렀다.

처음 검사로 임관한 후, 강철호 총장이 해 준 충고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체력이 부족하면 아무리 머리가 뛰어나도 소용없다고 한 말을.

꽈악.

“다 됐어요. 가시죠.”

강철호 총장의 신발 끈을 조여 맨 채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열었다.

“하아, 좋다”

늦겨울의 시원한 아침 공기가 몸 속으로 스며들었다.

하늘은 아직 어둑했지만 상쾌했고, 피곤하던 몸 역시 활기를 되찾는 것 같았다.

“오늘은 바쁘니 정상까지는 못 올라갑니다, 총장님.”

“알겠네.”

“아직 날씨가 차니까 장갑 끼세요.”

“됐네. 퇴임했어도 아직 쌩쌩하네.”

“그래도 끼세요.”

잠에서 깨기 전 단 5분의 짜증을 견딘다면 느낄 수 있는 상쾌함.

내게는 스승이자 아버지와도 같은 강철호와의 등산.

자연스레 입에서는 미소가 지어졌고, 서로의 손을 잡은 채 우리는 북안산으로 향했다.

“계획에는 차질이 없나?”

“네,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총장님은 어디로 입당하실지 결정하셨습니까?”

“자네 의견은 어때?”

“아무래도 주한호 대통령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차기 대선의 흐름을 보고 결정하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권력을 잡으라는 말처럼 들리는군.”

“일단은 당선이 되시는 게 중요하니까요.”

강철호 총장과 지낸 지 일주일.

하루의 시작과 끝을 같이하니, 대화의 농도와 시간 역시 길어질 수 밖에 없었다.

대부분 업무 얘기였으며 서로에게 조언을 하며 꽤 많은 도움을 받았다.

“아, 그리고 자네 오늘 백 원장님 만나지 않나?”

“네, 맞습니다. 안가에서 VIP와 자리할 예정입니다.”

“저기 보이는 전집에서 모듬전 하나 싸 가도록 하지.”

북악산를 향해 가기 위해 청와대 근처를 지나고 있던 우리.

강철호 총장이 낡아 보이는 전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주 대통령이 좋아하는 전집이야. 청와대 들어가기 전부터. 일류 셰프가 해 주는 요리를 먹다 보면 가끔 추억이 깃든 음식을 먹고 싶을 때가 있지.”

“총장님이 그걸 어떻게 아세요?”

“내가 검사 생활만 30년을 했네. 그것도 모를 것 같나?”

검찰의 최종 지휘권자는 결국 대통령이었다.

그렇기에 독립성을 철저히 유지해야 하는 검찰이라 해도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그 모든 것을 30년 동안 겪었으니, 대통령이 선호하는 맛집 정도는 얼마든지 알 수 있겠지.

“참 좋네요. 총장님이랑 이렇게 걸을 수 있어서.”

“아까는 그렇게 짜증을 내더니, 조언 하나 해 줬다고 아양을 떠는 건가?”

“하하, 호랑이굴에서 나오셨어도 날카로운 발톱은 여전하신 것 같습니다.”

강철호와의 새벽 산책은 상쾌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원동력뿐만 아니라 경험에서 나오는 조언까지 얻어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조언은 하루 일과에 꽤 많은 도움을 주었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언젠가 총장님이 은퇴하시면 같이 등산을 하고 싶었거든요.”

“그런 놈이 1년 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일 생기니까 찾아와?”

“모든 일을 끝마치고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편안한 산책을 하고 싶었거든요. 물론 지금도 여유롭지는 않지만…….”

“자네가 내 여유로움을 망쳐 놨지. 산 좋고 물 좋은 데에서 살고 있는 나를 서울로 끌고 올라온 것도 모자라 정치까지 시키고 있으니.”

굳은 표정으로 말하는 강철호.

“죄송합니다.”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하하, 농담일세. 사실 나도 1년 동안 좀이 쑤셔서 죽을 뻔했네. 아직 은퇴하기에 내 몸은 너무 쌩쌩해서 말이야.”

여유롭지 못한 지금의 상황.

산책을 핑계로 하루의 업무 계획을 짜며 서로의 조언을 듣고 있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이 행복했다.

이렇게 강철호 총장과 얘기를 하며 걷는 것 자체가 즐거웠기 때문이다.

분위기 역시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지금 강철호는 검찰총장도, 내 상사도 아니었다.

그저 인생의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였고, 강철호 역시 나를 아들처럼 편하게 대했다.

나에게 실없는 농담을 하고 신발 끈조차 못 묶으며 보이며 투정하는 모습은 예전에는 상상도 못할 만한 것이었다.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 가지.”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북악산을 오르며 내 하루는 시작되었다.

“네.”

* * *

국정원 안가.

이제는 비밀스러운 이곳이 익숙해졌다.

여전히 잘 차려진 식탁에는 술이 가득 담긴 주전자가 있었고, 내 옆에는 백성원 국정원장이 앉아 있었다.

“중수부장과는 얘기 잘 끝냈나?”

“네.”

오늘 아침 대검에 출근한 나는 곧바로 중수부장실로 향했다.

이미 주한호에게 쪽지를 받은 이규태 중수부장은 더 이상 나에게 사건을 배정하지 않았고, 연구관이라는 신분에 맞게 대형 인지 사견의 수사 계획표를 작성하라 명했다.

보통 중수부는 대형 사건을 맡았고, 사건의 지휘는 차장급인 수사과장이 했다.

언론에 주목을 받고 국회의원들에 옹호를 받았기에 일개 연구관인 내가 사건을 지휘할 수 있었던 거지 보통은 그렇지 않다는 소리였다.

그렇기에 내가 수사과장에 수사 계획을 짜는 일을 한다 해도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네. 당분간 수사 연구 업무를 맡기로 했습니다. 정확히는 맡는 척만 할 겁니다.”

“VIP 쪽지가 벌써 전해졌나 보군.”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규태 부장은 야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자리를 얻기 위해 인사권자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소리죠. 아마 보안 문제는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일전에 겪어 봤듯 그가 도덕적이지 못한 사람은 아니었다.

검사로서의 사명감 역시 충분했고 야심이 많지만, 자리를 얻기 위해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았다.

“그래, 잘됐네. 어차피 중수부장이 알고 있는 건 자네가 개인적인 수사를 하고 있다는 것일 뿐, 자세한 건 모르고 있지 않은가.”

“네, 맞습니다.”

“일단…….”

드르륵.

백성원 원장의 말을 끊는 미닫이 문소리.

누가 들어오는지 훤히 알고 있던 우리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일 준비를 했다.

“미안하오. 수석비서관 회의가 늦게 끝나서.”

“아닙니다. 저희도 방금 왔습니다.”

“그래요. 앉죠.”

힐끔.

자리에 앉는 주한호 대통령의 시선이 식탁 가운데의 소쿠리로 향했다.

“어디서 많이 본 음식인데 이거.”

“대통령님이 즐겨 드신다기에 밖에서 사 왔습니다.”

“하하! 고향전집에서 사 온 건가?”

“네, 맞습니다.”

“어디서 들었나? 내가 이 전집을 자주 갔다고.”

“강철호 총장님께 들었습니다.”

환한 웃음을 보이며 말하는 주한호.

그의 웃음 덕분에 분위기 역시 밝아졌다.

“아, 강 총장님. 서울 올라오셨지.”

“네. 그래서 같이 지내고 있습니다.”

“하하, 자네는 좋겠구만. 든든한 멘토가 옆에 있으니.”

오랜 회의에 지쳐 있던 주한호 대통령이 서둘러 잔을 채우고 내가 사온 모듬전을 먹기 시작했다.

“예전에 먹었던 맛 그대로군.”

그리고 그의 표정 역시 밝아졌다.

2만 원짜리 전 하나가 대한민국 행정부의 수장을 웃게 만들었고, 그 나비 효과는 앞으로 할 대화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이었다.

“자, 보고해 보시오.”

“조정식 원장은 출국했고, 현재 저희 요원들이 감시중입니다.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면 언제든지 체포할 수 있게요. 그리고 클럽 역시 한 검사 말대로 저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흐음, 다행이군요.”

“네. 간을 보기에 적당히 거절했으니, 애가 타고 있을 겁니다.”

“그렇죠. 몸값을 올려놔야 간절해질 테니.”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연락이 올 겁니다. 그리고 저는 고개를 끄덕일 예정이고요.”

단번에 수락한다면 클럽 역시 의아해 할 것이었다.

자신들이 파악한 백성원 원장은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 사실을 백성원 역시 알기에 그들이 생각한 이미지에 맞게 행동한 것이었다.

“흐음, 그럼…….”

조르륵.

주한호가 내 눈을 바라보며 내 잔을 채웠다.

“이제 모든 건 한 검사에게 달렸네.”

* * *

은은한 조명과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바.

그런 곳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한 남자가 홀로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딤플 한 병 더 주게나.”

“네, 알겠습니다.”

위스키 한 병을 혼자 비웠지만, 남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올 때가 됬는데.”

그도 그럴 것이, 남자의 목적은 스트레스 해소나 알딸딸한 기분을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크으, 독하네. 이걸 비싼 돈 주고 왜 먹는지 모르겠어. 소주처럼 달콤한 맛이 없단 말이야.”

고민이 많은 듯한 표정으로 독한 술을 털어 넣는 남자는 백성원 국정원장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곧 자신을 찾아올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한 연기다.

자신이 흔들리고 있으며 현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연기.

클럽을 원하고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은 것이다.

스윽.

“반갑습니다, 백성원 원장님.”

“참…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시래?”

자신을 찾아올 걸 빤히 알고 있던 백성원 국정원장이었지만, 능청스럽게 자신에게 다가온 남자를 맞이했다.

“잠시 앉아도 되겠습니까?”

“그러시던가.”

백성원 원장의 건너편에 마주 앉은 남자.

30대 중반쯤 되어 보였고, 잡티 없는 새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체격도 다부지고 키도 컸으며, 생김새 역시 연예인 부럽지 않을 만큼 뛰어났다.

“우선 제 소개부터…….”

“또 클럽인가 뭔가에서 나왔겠지.”

“네, 맞습니다. 저는 클럽에서 스카우팅을 맞고 있는 남진영이라고 합니다.”

“본명이오?”

“흠… 저에 대한 신분을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원장님.”

“내가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의 수장이오. 그런 내 앞에서 지금 거짓 신분을 대고 있는 건가?”

“죄송합니다.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클럽원을 초대하기 위해 제가 직접 나오지는 않습니다. 배달원이라 불리는 심부름꾼들이 접선하는 게 보통이죠. 하나 원장님의 체면을 차려드리려 제가 직접 나왔으니 노여움을 푸는 게 어떻습니까?”

“참나, 애들 소꿉놀이도 아니고.”

콧방귀를 끼며 말하는 백성원 국장.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지만 연기가 꽤 봐줄만 했다.

“하하, 저희는 소꿉장난이나 하는 그런 조직이 아닙니다.”

남영진이라고 소개한 남자 역시 능숙하게 맞받아쳤다.

또한 남영진은 백성원에 대한 일말의 의심조차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백성원은 조성식이 퇴임하기 전 그를 찾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많은 도움을 주는 척을 했다.

그리고 조정식은 그 사실을 클럽에 전했다.

추악함을 알아차렸지만 그래도 자신이 모시던 상사에 대한 온정.

그리고 그 뒷자리를 자신이 잇는다는 미안함.

그런 감정을 보여 주는 척하며 조정식에게 다가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장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럼 잘 알 텐데. 아무리 찾아와 봤자 소용없을 거란 걸.”

또한 몇 번의 접촉을 시도했지만, 백성원 원장은 한사코 거부를 했고, 자신에 대한 의심을 떨쳐 버림과 동시에 몸값까지 올렸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껏 원장님을 찾아온 사람들과 저는 다릅니다.”

“결국 스폰해 주겠다는 소리를 똑같이 할 거면서 뭐가 다르다는 건지 모르겠네.”

“하하,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저희는 스폰을 해 주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그럼?”

“저희 클럽은 대한민국의 역사와 함께해 왔으며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진짜 대한민국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하하하! 개소리를 참 거창하게 하시네.”

어차피 끄덕일 고개였지만, 백성원 원장은 쉽게 남자의 말에 응하지 않았다.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고개를 늦게 끄덕일수록 자신이 알아갈 정보가 많아진다는 걸 말이다.

“주인이라고?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오.”

“헌법상은 그렇죠. 그런데 실제로도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자본주의 국가에서 주인은 돈이며 민주주의 국가에서 주인은 기득권 세력입니다. 그렇기에 대한민국은 정계와 재계에 잘나가는 소수 인원들이 주인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당신이 말하는 클럽에 그런 인물들이 속해 있다는 겁니까?”

“네. 누군지 자세히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 그런 인원들이 모여 대한민국을 움직이고 있죠. 즉, 저희 클럽이 행정부이자 입법부이며 사법부란 소리입니다.”

쪼르륵.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자신의 잔을 채우는 백성원 국장이었다.

“크으… 재정신이 아니구먼.”

이내 잔을 입안에 털어 넣은 백성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남영진을 노려본다.

“당신 눈에는 내가 우스워 보입니까? 모두가 썩었어도 분명 깨끗한 곳이 있기에 당신들이 대놓고 설치지 못하는 거 아닙니까?”

“아니요. 대한민국에 깨끗한 곳은 없습니다. 그건 제가 증명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대놓고 설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겁니다.”

“진짜 증명할 수 있습니까?”

백성원 국장이 눈꼬리를 치켜세우며 물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남영진이 틀렸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명백한 사실이 하나 들어 있었다.

한치우라는 검사를 보았고, 또 겪어 봤으니까.

그리고 자신 역시 이들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을 자신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네. 저희의 제안을 거절한 사람은 단 한 분도 없었으니까요.”

“나는 사람이 아닌가 보죠?”

“하하, 원장님 역시 결국 저희와 손을 잡으시게 될 겁니다.”

“왜 그렇게 확신하는 겁니까?”

그저 넘어가 주는 척할 뿐 결국 백성원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대한민국은 한치우가 만들려는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또한 백성원 국장은 한치우가 그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반드시 해내리라 믿고 있었다.

“그럼 하나 되묻죠. 지금의 대한민국이 올바르게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입 밖으로 끄집어내지는 못했지만, 백성원의 대답은 ‘아니’였다.

“원장님의 표정을 보니 저와 생각이 같으신 것 같군요.”

“계속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보지.”

“클럽원들은 자신들의 이득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존재하는 거죠. 각종 횡령과 탈세, 그리고 정치인들의 비리가 난무하는 대한민국에서 저희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지금처럼 발전할 수 없었으니까요.”

“하하하하! 진짜 미치겠구먼. 그럼 일전에…….”

“일전에요?”

어이가 없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던 말을 참았다.

방산비리 사건을 클럽이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나온 행동이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말을 아꼈다.

“아니오. 그래서 당신들이 대한민국을 위해 맞추는 균형이란 게 뭡니까?”

“선거에 개입해 올바른 정치인들을 당선시키고, 행정부에 개입해 깨끗한 사람들을 자리에 앉힙니다. 또한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사법부에 개입해 올바른 판결이 나오도록 하죠.”

“그걸 왜 당신들이 합니까. 엄연히 삼권분립 속 입법부·사법부·행정부가 존재하는데 말입니다.”

“삼권분립이 올바른 기능을 하지 못하니까요.”

“올바른 기능을 못하는 게 당신들 때문은 아니고요?”

“휴…….”

백성원 역시 만만치 않았다.

여유롭던 남영진의 표정은 굳어버렸고, 백성원의 말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껏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뭐 믿지도 않지만 만약 그렇다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만든 건 당신들 같은데요?”

“아니요. 저희가 있기에 그나마 이 정도로 유지가 되는 겁니다.”

“개소리하고 있네.”

“하하, 아무리 그래도 체통은 지키시죠, 원장님.”

“당신 말이 그렇잖아. 왜 당신들이 나서서 민주주의를 어지럽히냐고. 그리고 당신들이 그렇게 깨끗하다면 왜 뒤에 숨어서 남들을 조종하는 거지? 말할 수 없는 더러움이 있으니 뒤에 숨어 있는 거겠지.”

“네. 물론 원장님 말이 모두 틀린 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균형을 유지시키는 대가로 저희는 엄청난 보수를 받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누군가 가져갈 세금. 그냥 가져가는 것보다 일이라도 하면서 가져가는 게 낫죠.”

피식.

백성원은 역시나란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

거창한 말로 포장하지면 결국 그들 역시 다른 범죄 조직과 같았다.

“지금이야 저희를 부정적으로 보시겠지만, 원장님도 곧 깨닫게 되실 겁니다. 그리고 깨달을 수 있는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원장님처럼 노력해 클럽원으로서의 자질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기회이죠.”

“결국 내가 국정원장이라 당신들에게 필요한 것이고, 클럽원이 되는 순간 대한민국이 아니라 당신들을 위해서 일을 해야 된다는 소리네.”

“네. 굳이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이 있죠.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지금 대한민국을 움직일 힘을 가진 건 대통령이 아니라 바로 저희입니다. 즉, 저희가 하는 일이 정답이고 정의란 말입니다.”

쪼르륵.

잔을 채운 백성원은 생각보다 빨리 고개를 끄덕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더 듣고 있다간 연기고 뭐고 남영진의 얼굴에 주먹을 날릴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휴…….”

우선 깊은 한숨을 쉬며 눈동자를 흔들어 본다.

“최근 고민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고민?”

“국정원장이 되셨지만 조정식 원장님에 갑작스런 사고로 인하여 임시직이 되신 거고 얼마 남지 않은 대통령의 임기에 백 원장님 역시 앞으로의 거처가 걱정스러우실 겁니다. 아직 은퇴하기에는 너무 젊기도 하시고…….”

“하하, 다른 건 모르겠고 속 들여다보는 재주는 있는 것 같네.”

“저희와 함께 가신다면 앞으로 백 원장님의 거처는 물론이고, 평생 돈 걱정 없이 사실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아직 어린 자녀분들은 세계 일류 대학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사모님은 공기 좋고 물 좋은 별장에서 지내실 수도 있습니다.”

톡톡.

백성원 국장은 테이블에 손가락을 튕기며 고민을 내비쳤다.

그 모습을 본 남영진은 피식 웃으며 백성원을 더 세게 흔들기 시작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어차피 백 원장님 한 명의 노력으로는 대한민국을 바꿀 수 없습니다. 백 원장님 입장에서는 저희가 악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저희 편에 서게 된다면 팀이 되는 겁니다.”

“팀이라…….”

“네, 팀이요. 저희 클럽은 대한민국 어떤 조직도 잡을 수 없으며 유치한 말로 이길 수도 없습니다. 성공한 쿠데타란 말입니다.”

“군사적 행동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지금?”

“물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대한민국을 저 위쪽 같은 곳으로 만들 수도 있죠. 1퍼센트가 99퍼센트 위에 군림하며 호의호식을 누리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저희 클럽은 민주주의 법칙을 따르며, 그에 맞게 잘 융화되어 있습니다. 1퍼센트의 인원이 99퍼센트에게 군림하며 호의호식하는 상황을 민주주의에 맞게 바꾸었다는 말입니다.”

끄덕끄덕.

백성원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독한 술을 한잔 들이키며 남영진을 다시 노려보았다.

하지만 조금 전의 노려봄과는 조금 달랐다.

“비싼 술 앞에서 기분 그만 잡치시고. 명함 한 장 놓고 가쇼.”

* * *

“여기 있습니다.”

남영진은 백성원 국정원장의 술잔 옆에 명함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갑작스러운 부름에 남영진은 가만히 백성원 국정원장을 바라봤다.

“이 명함을 제 지갑에 넣는 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원장님.”

“내가 당신들 손을 잡는 건 저에게 있어 도박이자 아주 큰 결단입니다.”

“그런데요?”

“그리고 아직 저는 당신들을 완벽히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속 말씀하시죠.”

“제가 믿고 신뢰하는 사람과 같이 들어가고 싶네요.”

남영진은 얘기가 길어질 것 같은지 다시 자리에 앉았다.

“흠… 전혀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쪼르륵.

자신의 명함 옆 백성원 차장의 술잔을 채워 주는 남영진.

하지만 그의 눈은 술잔이 아니라 백성원 원장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당신들 손을 잡는 것 자체가 저에게도 예상치 못한 일입니다.”

“좋습니다. 고려해 보죠. 다만, 확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클럽은 그 사람의 자리와 능력을 중요시 생각합니다. 또한 그 두 가지가 충족된다고 하여도 저희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 일물이라고 판단될 경우, 저희가 아무리 원장님을 원한다고 해도 조건을 들어드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쾅.

“크으… 까다롭네. 국정원도 그렇게 깐깐하게 사람 안 뽑습니다.”

술잔을 단숨에 비운 백성원이 테이블에 잔을 세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리고 술잔을 바라보던 시선을 은근슬쩍 남영진에게 돌렸다.

“스타성 있는 검사 정도면 되겠습니까?”

“스타성이 있다고 저희에게 필요한 건 아닙니다. 백 원장님 말씀대로라면 연예인을 영입하는 게 낫죠.”

“주어를 빼먹었군요. 대검 중수부 연구관에 스타성 있는 검사 말입니다.”

“자, 잠시만요. 그럼 혹시?”

시종일관 여유를 잃지 않던 남영진이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나쁜 의미는 아닌 듯 표정은 설레 보였고, 오히려 백성원의 답을 기대하는 것 같았다.

“네. 한치우 검사입니다.”

“저에게 5분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전화 한 통 하고 오겠습니다.”

“그러시죠.”

백성원의 말에 화장실로 향하는 남영진.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백성원은 옅은 미소를 보였다.

“하긴, 그렇게 뛰어나니 어떤 조직이든 원하겠지.”

이윽고 다시 자리로 돌아오는 남영진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그가 결정할 수 없는 일이기에 전화를 한 것이고, 결정권자의 대답은 예상한 대로였다.

그동안 한치우에 대한 얘기는 클럽에서 돌고 있었고, 특히 마스터가 원한다는 소리 역시 잘 알고 있었던 남영진이였다.

그리고 마스터의 바람을 자신이 이루어 줄 수 있다는 사실은 남영진에게 있어 행운과 같았다.

“좋습니다. 한치우 검사 정도면 저희 클럽과 충분히 어울리시는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그 모든 것이 계획되었다는 사실은 까맣게도 모르는 남영진이였지만…….

“그래요. 그럼 명함 한 장 더 놓고 가시죠.”

“네. 자세한 얘기는…….”

“내가 연락드리죠. 나도 한치우 검사를 설득할 시간이 필요하니.”

남영진의 말을 끊고 말하는 백성원이였다.

“붙잡고 다시 가라는 건 미안한데, 이제 진짜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

백성원은 남영진에게 세팅된 잔조차 건네지 않았고, 당연히 술을 따라줄 마음도 없었다.

아무리 연기가 중요하다지만 그와 술잔을 기울이는 건 도저히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션 역시 성공한 듯 보였고, 남영진과 더 이상 마주할 이유도 없다.

“저도 마지막으로 하나 묻겠습니다. 그 정도는 괜찮겠죠?”

하나 남영진은 아직 할 말이 남은 듯 자리를 뜨지 않았다.

“한치우 검사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입니까? 아니 원장님과 뜻을 함께할 수 있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인 겁니까?”

“그걸 내가 말해 줘야 될 의무가 있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그럼 말하지 않겠습니다.”

“네. 뭐… 앞으로 셋이 만나게 될 터이니 그때 다시 여쭙겠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고 협조적이지 않은 백성원이었다.

그 사실을 남영진 역시 너무나 잘 알기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원장님.”

그렇게 남영진은 바를 나갔고, 긴장이 풀린 탓에 취기가 올라온 백성원의 얼굴이 붉어졌다.

“휴… 취하네.”

* * *

여의도로 향하는 차 안.

운전대는 내가, 조수석에는 백성원 국정원장이 앉아 있다.

클럽에 들어가기 위한 작전은 성공했고, 백성원은 클럽에 연락을 취해 여의도의 한 호텔 주소를 받았다.

“아마 부띠크 호텔이겠지?”

“네, 아마도요.”

그들이 전해 준 주소에 호텔 이름이 적혀 있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알 수 있었다.

백숙집과 부띠크 호텔이 클럽원들의 접선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주객이 전도된 것 같구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클럽이 스카우트한 건 나인데 어째 너를 더 원하는 것 같단 말이야.”

“하하… 그럴 리가요. 저는 평검사이고 원장님은 대한민국 국정원의 원장이신데요.”

“남영진이 그러더라고. 자신들은 자리와 능력을 보지만 가장 중요한 건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엔 아마 그 사람이 한 검사 자네인 것 같네.”

고러전단에서 백성원 원장은 모두가 듣는 자리에서 스카우트 담당을 하고 있는 남영진이란 인물에게 전화를 했다.

남영진은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그는 클럽 역시 나와 백성원 원장을 환영하고 있다고 했으며 클럽에 가입하기 위한 미팅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지금 여의도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내 프로필은 어느 정도 파악한 것 같으니 아마 자네에게 더 많은 질문을 할 걸세. 사실 클럽이 원하는 건 나보다 자네이니 관심이 더 가겠지.”

“제 프로필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겁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프로필이 아니라 자네의 진짜 프로필을 알고 싶어 할 거야. 남영진 그 사람 젠틀해 보였지만 말빨이 장난이 아니야.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걱정 마시죠. 말빨이라면 저도 어디 가서 뒤지지 않으니까요.”

“하하! 하긴, 사람 꾀는 재주는 자네를 따라갈 사람이 없지.”

거리상으로 얼마 되지는 않지만 퇴근 시간 올림픽대로는 우리의 대화 시간을 길게 만들어 주었다.

“여기서 빠져. 답답해서 도저히 못 견디겠다. 돌아서 가자.”

“네, 알겠습니다.”

백성원의 손짓에 운전대를 돌리자 거짓말같이 뻥뻥 뚫린 지름길이 나왔다.

그의 오랜 서울 생활에서 나온 경험 덕분에 시간을 줄일 수 있었고, 금세 부띠크 호텔이 보이기 시작했다.

“건물도 요상하게 지어났네.”

황금빛 통유리로 지어진 건물.

속은 일체 보이지 않았고, 호텔 안을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입구는 지하주차장 뿐이었다.

즉, 차량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었고, 바리게이트에서 차량 번호와 신원을 확인한다는 뜻이었다.

내가 차를 멈춰 세우자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네.

“남영진 씨 만나러 왔습니다.”

— 잠시만요…….

타닥타닥.

인터폰 너머로 들려오는 타자 소리.

— 네. B1 구역에 주차하시고 PH 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문은 열려 있을 겁니다.

“네.”

넓은 주차장이었지만 차량은 손에 꼽을 정도로 없었다.

또한 모든 차량이 검은 천막으로 덮어져 있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차량을 주차하고 엘리베이터로 향한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별 유난은…….”

우리가 세워진 차량에 다가온 남자들이 검은 천막으로 차량을 감싸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아무래도 보안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겠죠. 저 위에 보세요.”

“위?”

두 개의 엘리베이터가 있는 지하 로비.

3평 남짓한 작은 로비였지만 천장에는 CCTV가 네 개나 있었다.

CCTV는 로비에만 있던 게 아니었다.

주차장 역시 사각지대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촘촘하게 CCTV가 설치되어 있었으니까.

“엘리베이터도 철저히 저쪽에서 컨트롤하는 것 같네요.”

“응?”

“아마 CCTV를 보고 자동으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보세요. 엘리베이터를 부르는 버튼도 없잖아요.”

“살다 살다 이런 곳은 또 처음 와 보네.”

“에이∼ 대한민국 국정원장님이 이런 거 보시고 신기해하시면 안 되죠. 저는 여기보다 고려전단이 더 신기한데.”

“거기는 아예 숨겨져 있는 곳이고. 이곳은 여의도 한복판에 있는데 이런 보안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게 신기하다는 거지.”

띵—

“일단 올라가시죠.”

“그래.”

얼마 지나지 않아 짧은 전자음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수동으로 운행하면서 굳이 두 개의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이유는 서로를 마주치지 않게 하기 위함이였다.

[스위트룸.]

“하하, 건물은 세련됐는데 호수 판은 진짜 촌스럽네.”

한글로 적혀 있는 ‘스위트룸’이라는 글자를 보며 말하는 백성원.

그도 그럴 것이, 호텔 분위기와 맞지 않게 너무도 반듯한 궁서체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딸각—

“또 문은 자동으로 열리네.”

“남영진과 미팅 시간은 한 시. 앞으로 10분 정도 남았는데 작전이나 세워 볼까요?”

“됐네. 나는 그저 자네 계획에 따를 예정이야. 어차피 나한테는 뭘 묻지도 않을 테고.”

원래 30분 일찍 도착해 미팅을 위한 작전을 세우려 했다.

하지만 막히는 올림픽대로 때문에 시간이 늦어졌고, 그런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백성원이였다.

“그냥 자네 뜻대로 하게. 나는 커피나 한잔할 터이니.”

커피를 내리며 여유로워 보이는 백성원 원장과 달리 나는 긴장감이 몰려왔다.

나는 남영진과의 만남이 처음인 반면에 백성원 원장은 두 번째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처음 해 보는 연기에 긴장한 것일지도.

“남영진을 만나고 일주일 뒤에 전화를 했어. 그러니 아마 자네를 설득한 시간이 일주일 정도 걸렸다 믿고 있을 거야. 정의롭고 강직한 검사를 설득하는 데 걸린 시간 치고는 조금 짧은 게 의심을 살 수도 있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시간이 없지 않은가.”

“걱정 마십시오. 원장님을 존경해 이 자리에 따라 나온 것일 뿐 아직 마음을 굳히지 않은 정도로 보여 줄 겁니다.”

“흠… 설전을 벌이는 건 별로 좋지 않은 생각 같은데?”

“설전을 벌이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더 많은 계약금을 받고 싶을 뿐이죠.”

백성원의 말과 상황을 종합해 볼 때 클럽은 나를 원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간절히 말이다.

고로 내 몸값을 올린다면 평범한 클럽원이 아니라 클럽의 더 깊은 곳, 그리고 더 높은 곳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언더커버 수사의 문제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겁니다. 밑바닥부터 보스의 신임을 얻어 어느 정도 자리에 올라가야 수사가 가능하다는 거죠.”

“흠… 그건 그렇지.”

“그렇기에 제 몸값을 올려 처음부터 높은 자리를 달라고 할 겁니다. 그러면 시간이 많이 단축되겠죠.”

“하하, 기대되는 군. 두 사람의 기 싸움이.”

또각또각.

그렇게 우리의 작전은 끝이 났고, 휑한 복도에서는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반갑습니다, 남영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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