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장 (25/35)

제5장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 내 목숨 줄을 걸어 달라는 얘기구만.”

꾸벅.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배님.”

“휴…….”

정일현 부장의 말에 남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정일현 부장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정일현 부장 앞에 한숨을 내쉬고 있는 남자.

국가정보원 제1차장 백성원이었다.

차관급 정무직공무원이며 국정원의 세 명의 차장 중 하나이다.

국가정보원법 제6조.

국가정보원의 조직 소재지 및 정원은 국가 안전 보장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그 내용을 공개하지 아니할 수 있다.

국정원 내부 조직은 원장과 정부에 따라 수도 없이 개편되며 자세한 내용은 관계자가 아니고서야 알 수가 없다.

또 관계자라 하여도 정보의 열람이 직급과 위치에 따라 철저히 나뉘어져 있다. 그러니 고위 관계자들만 정확한 국정원에 조직을 알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청문회를 통해 임명되는 원장, 재산 공개 의무와 관보 게재가 가능한 정무직공무원인 세 명의 차장, 그리고 한 명의 기조실장의 경우에는 언론에 공개될 수밖에 없다.

즉, 백성원이 국가정보원 소속 정무직공무원이라는 사실은 전 국민이 알고 있다는 뜻이다.

또 원장 밑으로 국내, 해외, 대공 등 세 개의 큰 파트를 담당하고 있는 차장이 있다는 것과 기회조정실장이 존재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또한 원장이 세 명의 차장 중 어떤 사람에게 힘을 실어 주느냐에 따라 차장들의 힘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 국정원장과 가장 가까운 사람은 백성원 차장이며 그 말은 즉, 백성원이 세 명의 차장 중 국정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가장 많다는 것이다.

“일단 자세히 얘기를 해 보게나.”

“대검 중수부에 한치우 연구관이라고 있습니다.”

“잘 알고 있지.”

“언론에서 워낙 떠들어대니.”

“아니, 그게 아니라 국정원 내부에서 시스템 돌려서 프로필을 파악했었거든.”

“한 검사 프로필을 왜…….”

“궁금했겠지. 청와대도 어디서 그런 괴물 같은 녀석이 튀어나왔는지.”

“하긴…….”

한치우.

연수원 시절 검찰 시보 때 부정부패에 찌들어 있는 대기업 하나를 청소하고, 회장을 감옥에 보냈다. 그 후 2년의 특수부 생활 동안 손대는 사건마다 언론을 떠들썩하게 했고, 사건을 완벽히 해결해 국민들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알아볼수록 이해가 안 가더라고.”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특이점이 없어. 한 검사처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인물이면 분명 남들과 다른 무언가가 있기 마련인데. 그게 없단 말이지.”

“집안이 어려웠던 건 알고 있습니다.”

“그래. 집안이 어려웠고, 어렸을 적부터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은 수재. 현실에선 흔치 않은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인물도 아니지. 그런데 이상한 건…….”

백성원이 말끝을 흐리며 책상을 톡톡 치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한치우 검사의 프로필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검사가 되고 난 후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단 말이지.”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집안이 어려웠던 점만 빼면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는 건 사실 검사에게 있어 특이한 일도 아니지. 자네도 잘 알 거 아니야.”

“하하… 그래도 저는 사법고시 수석과 연수원 수석은 못 해 봤습니다.”

“그래. 한 검사는 전교가 아니라 전국 1등을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았어. 학창 시절에서도 사법고시와 연수원에서도 말이야.”

“그런데요?”

“보통 한 검사처럼 인풋이 많은 사람은 문제가 생기면 자신이 알고 있는 방법으로 해결하기 마련인데, 자네를 나한테 보낸 것처럼 상상도 하지 못한 기지를 발휘한다는 말이지.”

피식.

백성원의 말에 정일현 부장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일현 역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한치우가 어떤 인물인지 가장 가까이서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어려. 아무리 배운 게 많은 검사라지만 인생의 경험은 살아보지 않고서 배울 수 없는 것인데… 마치 정재계 섭리를 전부 알고 있는 것 같단 말이지.”

“선배님 말씀 들어보니 그러네요. 워낙 당연하다는 듯 행동해서 눈치를 못 챘네요.”

“그래서 우리가 파악한 프로필의 결론은 하나였네.”

“뭡니까 결론이?”

“파악할 수 없음.”

세상 모든 정보를 알고 있고, 또 알 수 있는 기관이 치우의 프로필을 파악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에게는 첫 번째 삶이 있었고 과거로 돌아왔다는 점.

그리고 그 첫 번째 삶에서 치우는 지금과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는 것 역시 모르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어떤 부탁을 하러 왔는지 모르겠지만, 한 검사를 무조건 신뢰하지는 말란 뜻이야.”

수많은 정보에서 우위에 있는 국정원 1차장.

백성원에게 있어 한 검사는 미스터리한 인물이었다.

즉,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인물, 그것도 대중적으로 유명한 검사가 있다는 사실이 꺼림직 하다는 것이다.

“이미 자네는 한 검사에게 빠진 듯하다만.”

“하하…….”

어색한 웃음을 보이는 정일현 부장.

자신이 존경하는 선배에게 거짓말을 할 수도, 그렇다고 선배의 조언에 대놓고 부정을 할 수도 없기에 나오는 반응이었다.

“처음 중수부장님 연락을 받고 대검에 갔을 때는 기분이 좋지도 않았죠. 그래서 한 검사란 인물이 마음에 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자네 같은 유능한 검사가 한참 후배의 손아귀에서 놀고 있는 건가.”

“손아귀에서 놀고 있다니요.”

“미안하네. 표현이 적절치 못했네.”

“아닙니다.”

무심코 입 밖으로 무례하게 느껴질 만한 말을 내뱉은 백성원과 순간적으로 감정이 격해져 선배를 노려보며 얘기한 정일현 부장이 서로에게 사과를 건넸다.

“계속 얘기해 보게.”

“네. 처음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 친구… 사람을 묘하게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더군요.”

“좋은 향수라도 뿌리고 다니다 보지?”

“네, 맞습니다. 욕심이 전혀 섞이지 않은 향수였습니다. 뭔가… 썩어 버린 세상을 자기 혼자서 정화하려 한다고나 할까.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친구였습니다.”

“한치우 검사의 수사 과정을 심도 깊게 본 나도 그런 생각이 들긴 하네. 실적보다 피해자들의 피해 복구와 다시는 썩지 않도록 뿌리를 뽑는 것까지.”

“맞습니다. 저도 그 친구의 수사 과정과 정의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렇군. 그 친구 사생활은 어때?”

“하하… 저도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선배님.”

“하하하하!”

정일현 부장의 말에 박장대소하는 백성원이었다.

“선배한테 이렇게 복수를 하나.”

“복수는 아니고. 선배님이 직접 물어보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직접 물어보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한치우 검사의 뜻에 따라 선배님을 찾아뵌 걸 눈치채신 듯하니 직접 자리를 만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 잘됐네. 나도 한 번 만나보고 싶었거든.”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은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사무실을 나와 낡은 사무실을 거쳐 다시 건물 밖으로 나왔다.

“선배님 덕분에 오늘 좋은 구경하고 갑니다.”

“자네만 알고 있으라고. 후배한테 잘 보이려다가 잘리고 싶지는 않으니까.”

“하하, 그럼 내일 모시러 가겠습니다.”

척.

백성원 차장의 차량 운전석 문을 열며 말하는 정일현 부장.

이윽고 백성원이 차량에 올라타자 문을 닫아 주었다.

“그래. 내일 보자고.”

부우우웅―

멀어져 가는 백성원의 차량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던 정일현 부장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 백미러를 통해 그런 정일현의 모습을 확인하고 있는 백성원 부장 역시 창문을 열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또한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사람은 같은 말을 내뱉었다.

“재미있겠네.”

* * *

“그게…….”

말끝을 흐리던 정일현 부장이 입구를 바라본다.

“어, 박 검사 오네요.”

박채이 검사의 모습이 보였다. 이미 나와 정일현 부장이 앉아 있는 자리로 충분히 다가왔음에도 정일현 부장의 고개는 돌아가지 않았다.

“부장님?”

“기다려 보게. 박 검사, 일단 앉게. 인사는 나중에 한 번에 할 테니.”

자리에 앉는 박채이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하는 정일현 부장이었다.

꾸벅.

“선배님, 여기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입구로 한 명의 건장한 남자가 들어왔고, 정일현 부장의 고개는 숙여졌다.

“인사해. 학교 선배님이자 국정원 1차장님이신 백성원 차장님이야.”

“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어리둥절했지만 정일현 부장의 말에 나와 박채이는 고개를 숙여 백성원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한 검사. 그리고 박 검사도.”

“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차장님.”

예상치 못한 한 명의 인물이 추가되어 테이블엔 네 명이 마주보며 앉게되었다.

“한 검사 부탁은 아직 전하지 못했네.”

“그렇습니까.”

“하하. 표정 하나 안 변하구먼.”

나에게 있어 꽤 실망스러운 대답일 수 있지만, 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정일현 부장의 말에 답했다.

내 앞에 백성원 차장이 앉아 있는 것으로 이미 상황이 유추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한 부탁이란 걸 눈치챘을 테고 그렇기에 자존심을 지키러 백성원 차장을 직접 데리고 온 거겠지.

또한 나와 백성원이 만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어떤 대화가 오갈지 기대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백성원에게도 적용된 것 같았다.

그도 나를 보며 무언가 재미있는 일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대충 예상이 되어서요. 그리고 제가 생각한 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요.”

“하하하하! 역시 소문대로 매력 있네.”

자신의 술잔을 채우던 백성원이 크게 웃으며 말한다.

“내가 따라 주는 술 한잔 받겠나, 한 검사?”

“네, 차장님.”

“박 검사도 술 괜찮지?”

“네.”

쪼르르륵.

그렇게 모두의 잔이 채워지고 백성원이 손을 높게 올리며 술잔이 비워졌다.

“크으… 좋네.”

독한 술이 목을 타고 몸속으로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 싸한 기분을 잠시 즐기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차장님.”

“그래 자네는 아직 시원하지 않겠지. 가슴속에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까.”

“네.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하지 모르겠네요. 우선…….”

“아, 설명은 안 해도 되네. 정 부장에게 들어 대충은 알고 있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 부탁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흠…….”

자신이 들이킨 술잔의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는 백성원 차장.

그런 그의 눈빛을 유심히 살폈다.

다만, 표정을 읽을 정도로 티가 나지는 않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대다가 과거로도 돌아온 나였지만, 그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내 과거인 사십대 중반의 한치우보다도 인생 경험이 많은 사람이란 말이다.

“쉽게 말해 내가 자네의 끄나풀이 되어 달라는 소리인가?”

“네, 맞습니다.”

돌려 말하지 않았다.

말을 덧붙여 봤자 뜻은 변하지 않을 테고, 차라리 시원하게 말하는 편이 백성원에게 더 좋은 인상을 심어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 검사!”

하나, 자신의 선배 앞이기에 정일현 부장은 어쩔 수 없이 나를 다그친다.

“괜찮네, 정 부장. 좋아! 자네 마음에 드는군그래.”

스윽.

백성원이 비워진 잔을 내 앞으로 슬며시 밀었다.

“이 잔 안에 술과 자네 얘기를 채워 보게. 마실지 안 마실지는 들어 보고 결정할 테니.”

* * *

쪼르르륵.

일단 술로 잔을 먼저 채웠다.

“차장님, 혹시 클럽이라는 존재를 알고 계십니까?”

“무슨 클럽을 얘기하는 건가? 나이트클럽 같은 곳은 아닐 테고.”

“일단 저희 수사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말해 보게.”

“얼마 전 박 검사에게…….”

그리고 백성원 차장에게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말했다.

꽤 긴 얘기에 목이 탔지만 멈추지 않았고, 백성원 차장 역시 채워진 술잔을 비우지 않고 끝까지 내 얘기를 들었다.

“혹시… 알고 계십니까?”

“아니.”

백성원 차장의 대답은 간결했다.

눈빛을 보아하니 거짓 같지도 않았다.

국정원 차장이 모르는 모임이라…….

더군다나 백성원은 국정원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 차장 자리까지 올라간 인물이다.

즉, 그는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클럽이라는 곳은 처음 들어보는 듯 눈동자가 커졌고, 일말의 고민도 없이 아니라는 대답이 나왔다.

“그렇군요.”

“거짓말 같나?”

“아니요. 만약 알고 계셨다면 지루함에 술잔을 들이키셨겠죠. 하지만 긴 얘기 동안 차장님은 단 한 번도 지루함을 느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흥미로운 듯 술잔보다 제 눈을 보며 경청하셨죠.”

“하하하하! 자네 진짜 정체가 뭔가?”

“잘못된 일을 바로잡고 싶은 검사 중 한 명일 뿐입니다, 차장님.”

“끝까지 자신을 보여 주지는 않겠다?”

“보여 드릴게 없는 것일 뿐입니다.”

“흠… 사람을 홀리는 매력은 충분하지만 속을 숨기는 사람에게 내 목숨을 걸라고 하는 건 조금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대로 자리에서 일어나기엔 채워져 있는 술잔이 너무 탐나고 말이야…….”

다시 한번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는 백성원 차장.

나는 백성원 차장이 어떤 행동을 보일지 알고 있었다.

고민하는 그의 표정이 밝아 보였다. 한쪽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고.

“크으… 술을 끊던가 해야지.”

꾸벅.

“감사합니다, 차장님.”

술잔을 단숨에 들이킨 백성원 차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자! 그럼 이제 나머지 계획을 말해 보게나.”

“네.”

쪼르륵.

“저희가 클럽을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국회 운영위에 돌게 할 겁니다. 그러면…….”

다시 한번 백성원 차장의 잔을 채우며 얘기를 이어갔다.

“정무수석을 통해 대통령 귀에 들어가게 하겠다?”

“네, 맞습니다. 그렇게 되어 대통령이 클럽이란 정보를 알아보라 지시하면 대한민국 여러 라인들이 움직일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취득하는 정보는 차장님 귀에 들어갈 확률이 높을 거고요.”

백성원 차장이 있는 곳이 사실상 국정원에 모든 정보를 총괄하는 자리이니까 말이다.

정치적 상황에 따라서, 혹은 완장을 차고 있는 탓에 언제 자리를 뺏길지 모르는 국정원장은 극비 정보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참, 대단하네. 대통령을 이용할 생각을 하다니 말이야. 나는 생각만 해도 이렇게 손이 덜덜 떨리는데.”

“또 만약 대통령이 클럽과 연관이 있다면 굳이 라인을 돌릴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럼 사태가 정말 심각해지겠지. 수사 대상을 대통령으로 해야 될 테니 말이야.”

“혐의가 있으면 누구든 수사를 해야겠죠.”

“검사면 잘 알 텐데? 대통령은 임기 중 소추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대한민국 헌법 제84조.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화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

“그래. 그러니까 말이야.”

“아니요. 일전에 기자 브리핑에서 공개했듯, 저희는 이 사건의 관련자들을 시설파괴이적죄로 기소한다 했습니다.”

어이가 없는 듯 입이 벌어지는 백성원.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내가 한 말이 조금 오버스럽다는 걸. 아니 아주 말도 안 되는 판타지 영화 같겠지.

다만, 그 정도로 사태가 심각해지지 않겠지만, 최후에 보루까지 생각을 해 두는 것이다.

“적당히 하는 게 좋을 걸세. 아무리 자네가 매력적이라지만 과하면 없느니만 못하거든.”

“거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겠다는 다짐이 더 큰 얘기였습니다, 차장님.”

소추할 수는 없지만 명백한 혐의를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국민의 권력을 이양 받은 국회의원들에 의해 대통령 역시 언제든지 잘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럴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좋아. 일단 자네가 준 잔을 마셨으니 무를 순 없는 노릇이고… 정보가 들어온다면 바로 알려 주겠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차장님.”

“자, 이제 내가 주는 잔을 한잔 받겠나?”

“네.”

쪼르륵.

“나도 자네 부탁을 들어주었으니 내 부탁을 하나 말해도 되겠나?”

아까의 상황은 역전되었다.

내 잔이 채워졌고, 백성원 차장이 나에게 부탁을 하려 하니까 말이다.

“인간적인 관계를 원했으나 자네가 아직 나에게 속을 보여 줄 마음이 없는 것 같으니 나도 비즈니스 적으로 부탁을 하려 하는 걸세.”

“편히 말씀하십시오, 차장님.”

“참, 끝까지 무안하게 하는군.”

“이번 사건이 끝나면 차장님이 원하시는 관계, 제가 노력해서 만들겠습니다. 비싼 술 한 병 사 들고 차장님 댁에 찾아뵙기도 할 거고요.”

“내가 삐져서 문 안 열어 주면 어쩌려고 그러나?”

“열어 주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하하하하! 아이고, 정 부장 심정이 이해가 가네. 어떻게 단 한마디도 지지를 않을 수가 있나. 심지어 저런 표정으로 말을 하는데 밉지도 않네. 자네 검사 말고 변호사를 해 보는 게 어떻겠나?”

인간적인 관계를 원한다는 백성원 차장.

하지만 아직 그에게 내 모든 걸 알려 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왜?

존경받아 마땅한 강철호 총장.

과거의 은인인 성훈이와 민태호.

그리고 현생의 친구인 서윤호와 강서빈 이사까지.

그들과 달리 백성원 차장은 속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속이 궁금하다면서 자신의 속은 철저히 숨기는 그런 사람이란 말이다.

그와의 만남이 처음이라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내 속을 보여 준 모든 사람들과 백성원 차장의 첫 만남은 피부로 느낄 정도로 달랐으니까.

다만, 그의 직업 특정상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게 몸에 배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일단은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가 괜찮은 사람이라면 내 휴대폰 전화번호부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될 터이니.

백성원은 국가정보원 차장이다.

내가 바꿀 세상에 있어 얼마나 든든한 파트너가 되겠는가.

“부탁 말씀하십시오, 차장님.”

“아∼ 그리 어려운 건 아니고. 이번 수사 끝나고 클럽이라는 존재의 정보를 취득하게 된다면 클럽이라는 곳에 수사권은 국정원에게 넘겨주게나. 물론 김수철 장관은 자네가 데려가고.”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정확히 말하자면 나에게 넘겨 달라는 소리일세.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클럽은 우리가 관리하는 게 맞으니까.”

“흠…….”

클럽이라는 곳의 목적이 무엇인지, 또 누가 속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수철 장관이 있을 정도면 그보다 높은 누군가가 속해 있을 수도 있었고, 내란죄 정도야 우습게 저지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내란이 성공한다면 그때는 죄가 아니게 될 수도 있지.

한마디로 검찰이 아닌 국정원이 관리해야 한다는 백성원 차장의 말이 틀린 게 아니란 소리다.

“좋습니다. 다만 이번 사건이 끝나고 저와 차장님이 속을 보이며 진심으로 술잔을 기울일 때 모든 걸 넘겨드리겠습니다. 우선은 차장님 정보 먼저 받은 다음 제가 완벽히 포장해서 돌려드리겠습니다.”

“하하, 끝까지 완벽하군. 좋아. 그렇게 하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 또한 술잔을 비웠다.

그렇게 우리의 모든 작전은 끝이 났다.

박채이의 말은 굳이 들어 보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의 표정은 좋아 보였으니 말이다.

“자! 그럼 얘기 끝났으니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 보자고.”

* * *

대한민국 청와대.

한 남자가 레드 카펫이 깔려 있는 대통령 집무실을 향해 뛰어가고 있다.

“안에 계십니까?”

“네.”

최재필 정무수석이 집무실 앞에 서 있던 경호처 직원에게 물었고, 경호처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잠시 독대가 필요합니다.”

“여쭙겠습니다.”

국민의 대표이자 대한민국 대통령과의 독대는 여러 과정이 필요하다.

경호처 직원은 뛰어가 행정관에게 물었고, 행정관은 의전 비서관에게 물어 대통령의 허락을 구한다.

“들어오시랍니다.”

이윽고 집무실의 거대한 문이 열렸고 황금빛 봉황 휘장 앞에 있는 대통령의 모습이 보였다.

“최 비서관이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급히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 대통령님.”

“일단 앉아 있어요. 사인 하나만 하면 되니까.”

“네.”

탁.

새파란 결재 서류에 사인을 한 대통령이 마지막 점을 찍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한호 대통령.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대통령을 꼽으라면 자신 있게 주한호 대통령을 뽑을 것이다.

시의원을 시작으로 모든 선출직을 전부 경험해 결국 대통령의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기 때문이다.

여당과 야당을 가리지 않고 그와 같이 정치 생활을 한 의원들이 많았고, 대부분 그와 사석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후배들이었다.

“이 짓도 이제 못해 먹겠네. 시간이 왜 이렇게 더디게 가는지.”

최고 권력이라면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레임덕.

주한호 역시 정권 막바지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의 입김이 식지는 않았다.

계파 정치 대한민국 역사에서 따르는 사람이 가장 많은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지지율이 떨어지긴 했지만, 특별한 사고를 친 적은 없었다. 대선보다 총선이 더 가까운 지금 시점에서 주한호와 같이 찍은 사진 한 장이 수천 표를 좌우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은 갖고 있었다.

“그래, 들어봅시다. 우리 최 수석님이 급하게 보고할 게 뭔지.”

“방금 국회운영위원장에게 받은 자료인데 한 번 보십시오.”

스윽.

최재필 정무수석이 주한호 대통령 앞으로 조심스럽게 서류를 들이밀었다.

“이번 마일즈 장비 사업을 수사하고 있는 한치우 검사실에서 딸려 온 자료 같은데 대통령님께서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어디 봅시다.”

[김수철 장관 관련 수사 자료.]

“초임 검사 치고는 배짱이 두둑하네. 현직 국방부 장관을 수사하겠다고 난리를 피우고 있으니 말이오.”

“그것도 그런데 밑에 보시면…….”

최재필 정무수석이 손가락으로 서류를 짚어 내려가더니 이내 한곳을 가리켰다.

“클럽?”

“김수철 장관이 속해 있는 모임 같습니다. 대한민국 사회 고위층들이 속해 있다는 내용이고요. 그리고 한치우 검사는 이번 사건이 그 모임에 의해서 계획된 거라 보고 있습니다.”

“흠… 사실관계는요?”

“제 선에서 파악해 보려 했는데 역부족입니다.”

“우리 유능한 최 수석님이 파악하지 못했다면 없다고 봐도 되는 거 아닙니까?”

“그래도 정확히 알아 두셔야 할 것 같습니다. 곧 총선이기도 하고 혹시나 한 검사가 이 일을 터트리기라도 한다면 여당인 저희가 선거에서 불리하게 작용될 수도 있습니다.”

최재필 정무수석과 서류들을 번갈아 바라보는 주한호 대통령.

“한 검사, 이 친구 골치 아프네. 스타성도 있고 능력도 있는 것 같아 조금 더 여물면 키워 보려 했더니.”

그의 입에서 치우의 이름이 나왔다.

“어떻게 할까요, 대통령님.”

“일단…….”

그리고 치우의 머릿속 계획은 점점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국정원장 들어오라고 하세요.”

* * *

대한민국 경호실.

“지금 이 시간부터 VIP 집무실 반경 100M 이내에 모든 전파 차단해 주세요.”

경호실을 찾아온 최재필 정무수석이 팔짱을 낀 채 경호실 직원들에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톡톡.

“근처에 잡히는 주파수에 소음 넣고 재밍해.”

“네!”

최재필의 말에 경호실 직원 하나가 컴퓨터에 앉아 있는 다른 직원에 어깨를 치며 명령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네, 수석님.”

“휴대전화도 막아 주시고 앞으로 3시간 동안 절대 등급 보안 유지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간단하게 자판을 두드리던 아까와 달리 이번엔 경호실 안 모든 직원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실장님은 어디에 계세요?”

“잠시 손님 만나러 가신 것 같은데 오실 때 됐습니다.”

“미팅실에서 기다린다고 전해 주십시오.”

“네, 수석님.”

정부조직법 제16조.

대통령 등의 경호를 담당하기 위하여 대통령경호실을 둔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절대 안전을 책임지는 기관인 대통령 경호실은 약 500명의 인원들이 오로지 대통령의 경호를 위해 존재한다.

창설 이후 대통령을 지킨다는 목표는 변하지 않았지만, 사소한 변화들은 제법 자주 있었다.

“장관(실장)님은 10분이면 오신다고 합니다, 수석님.”

“네, 고마워요. 그리고 죄송하지만 커피 한 잔 주실 수 있을까요?”

“네. 금방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남자가 나가자 최재필 수석이 혼자 푸념한다.

“김 장관, 바쁘네.”

훗날 대통령 경호실은 경호처로 격하되며 경호 실장 역시 장관급에서 차관급으로 지위가 내려간다. 하지만 현재 대통령 경호실이 휘두를 수 있는 힘은 생각보다 크다.

일단 한 조직의 장괍급 실장과 차관급 차장까지 정무직 공무원이 두 명이나 있으며, 대통령 경호를 한다는 목적하에 경찰과 군에 직간접적인 지휘권을 행사하기도 한다.

또한 경호실장과 최재필 수석관의 상하 관계를 따지긴 모호하지만, 수석 비서관은 차관급이며 경호실장은 장관급 대우를 받기에 엄밀히 말하자면 경호실장의 직위가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수석비서관 중에서도 맡는 업무에 따라 권한과 힘이 달라지기도 한다.

나는 새를 떨어트린다고 할 만큼 민정수석은 대통령이 직간접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수만 개의 인사권에 관여할 수 있었다. 정무수석이 삼권분립 중 행정부와 입법부에 다리 역할을 하듯 말이다.

“최 수석님이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요?”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실장님.”

“오늘 스케줄은 다 끝났으니 괜찮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한 남자.

대한민국 경호실장 어원석이었다.

국민의 대표를 경호하는 사람. 그 말은 즉 대한민국을 경호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남자의 키는 170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고, 덩치 또한 왜소했다.

하지만 그의 경력은 화려했다.

20년 전 특채 경호 서기관으로 경호실에 들어와 내부 승진을 통해 경호실장에 올라간 인물이니 말이다.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출신에 부상으로 운동을 그만두고 단 2년 만에 행정고등고시를 붙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합격 소식은 신문에 실릴 만큼 유명했다. 몸과 머리가 전부 뛰어나니 대통령 경호실에서 고등고시 합격자인 그에게 5급 사무관이 아닌, 4급 서기관 자리를 주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그나저나 보안 등급을 ‘절대’로 올리셨다면서요? 제 인가도 없이.”

“죄송합니다. VIP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보안등급 명령을 제가 아닌 왜 수석님께 하신 겁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결재 필요하시면 핫라인으로 연락해 보심이.”

“됐소. VIP가 최 수석만큼은 신뢰하시니 뭐. 이번엔 넘어가지만 다음부턴 제가 있다는 걸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작은 스파크가 튀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공무원 생활은 최재필이 더 길었기 때문이다.

고등고시 역시 최재필이 선배였고 말이다.

하지만 나이는 또 어원석이 더 많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애매한 사이가 스파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왜 보안 등급을 올리셨는지는 알고 있어야겠네요.”

“국정원장님과 사담을 나누시려나 봅니다.”

“아∼ 그럼 원장님 오시는 길에 경호 붙여야겠네요?”

“이미 보냈습니다. 그리고 NSC 본부 거쳐서 오시니 외부 경호는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참… 제가 경호실장인지 최 수석이 경호실장인지 모르겠군요.”

“불쾌하셨다면 용서하십시오.”

표정은 변하지 않았고 고개 역시 숙이지 않았지만, 최재필은 용서를 구했다.

하나 그 행동의 의미를 어원석 실장도 잘 알고 있었는지 표정이 굳어졌다.

“같이 있어 좋을 것 없어 보이니 본론만 말씀하시고 일어나시죠.”

“그럼 본론만 묻겠습니다.”

“그러시던지.”

“클럽이라고 아십니까?”

“무슨 클럽을 말하는 거요?”

최재필 수석과 어원석 실장의 스파크는 눈으로 옮겨졌다.

한마디 한마디가 신경질적이었다.

“휴… 아닙니다.”

“싱거운 사람일세. 바쁜 사람 앉혀 놓고 지금 장난하는 거요?”

“하하, 설마요.”

최재필 수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미팅실 문 쪽으로 향했고, 어원석 실장은 그를 바라보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아까 스케줄 다 끝나서 괜찮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시간이 괜찮다고 한 거지 쓸데없는 시간을 쓰고 싶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네, 뭐.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쾅.

말을 마친 최재필 수석은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저 개새끼…….”

어원석 실장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벙찐 표정을 지었고, 미팅실은 나온 최재필 수석은 비릿한 미소를 보였다.

“괜한 짓을 했네. 알고 있어도 말해 줄 리가 없지.”

* * *

대통령 앞에 앉은 한 남자.

긴장된 듯 손톱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며 관자놀이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조 원장, 갑자기 호출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자네 본 지도 오래된 것 같기도 하고 물어볼 것도 있어서 말이야.”

“네. 편히 하문하십시오, 각하.”

“하문은 무슨. 그리고 각하란 단어 좀 쓰지 말게나. 누가 들으면 어떡하려고 그러나.”

“죄송합니다. 각… 대통령님.”

정치적 멘토이자 스승.

조정식 국정원장에게 있어 주한호 대통령의 존재는 그랬다.

주한호가 국회의원이던 시절, 총기 오발 사고의 책임을 지고 예편한 예비역 중령을 눈여겨보았던 적이 있다.

능력은 없지만 명령에 복종하고, 꽤 고지식한 그런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그렇게 주한호 대통령은 조정식을 자신과 오랜 친구이던 당시 국정원장에게 보냈다.

주한호는 처음 금배지를 달았을 때부터 대선을 꿈꿔 왔다.

그 당시 청와대에 입성할 때쯤에 자신의 말을 법처럼 여길 국정원장이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것이 현실이 되어 있었다.

“다름이 아니고 자네 클럽이라는 곳을 알고 있나?”

“어떤 클럽을 말씀하시는지.”

“김수철 장관을 포함 사회 고위층들이 모여 있는 모임이라던데.”

“정재계 사교 모임이 하도 많아서 말입니다. 정리해서 보내드려도 되겠습니까?”

“흠… 내가 묻고 싶은 건 단순한 사교 모임이 아닐세.”

“그럼……?”

“1,000억대 방산 비리를 계획하고, 내 허락 없이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을 움직일 수 있는 그런 모임이 궁금하다는 걸세.”

대통령의 물음에 한참 동안 침묵하는 조정식 원장이었다.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주한호의 표정이 꽤 진지했으니까.

그리고 자신의 눈을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일단 제 머릿속에 들어 있지는 않지만,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알아보겠습니다, 대통령님.”

“그러게. 그리고 내일 안가에 술상 하나만 봐 주게.”

“누구 모실 분이라도 있습니까?”

“아무래도 직접 만나 보고 싶어서 말이야.”

“어떤 분을 말입니까?”

피식.

주한호 대통령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위에 있는 명함을 만지작거린다.

“재미있는 놈.”

주한호의 말에 조정식 원장이 힐끔거리며 명함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명함에는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대검찰청 연구관 한치우.]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오후 8시까지 술상 봐 놓겠습니다, 대통령님.”

“클럽에 대해 뭐라도 나오면 바로 전화 주고.”

“네, 그럼 이만.”

두 손을 가지런히 배꼽에 모은 채 뒷걸음질 치며 문으로 향하는 조정식 원장.

그가 집무실을 나갈 때까지 주한호 대통령은 조정식 원장의 뒷모습을 볼 수 없었다.

쾅.

그렇게 대통령과의 만남을 끝낸 조정식 원장은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두꺼운 콘크리트 벽으로 쌓여 있는 한 통로를 걸었다.

[NSC 국가안전보장회의]

밝게 빛나는 LED 간판을 지난 그는 속주머니에서 조심스레 스마트폰을 꺼내 급히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접니다, 조정식.”

땀을 흘리며 긴장한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굳은 표정을 하고서는 수화기 너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하 통로가 끝날 때쯤.

지하철 역사의 비상 구역이 보였다.

[내부자 외 출입 금지]

왁자지껄.

문을 열고 나오자 퇴근길 수많은 직장인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고, 주변은 사람들과 지하철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소란스러움을 기다렸다는 듯 조정식 원장은 조심스레 입을 열며 수화기 너머 누군가에게 말을 이었다.

“대통령이 눈치챈 것 같습니다.”

* * *

대한민국 서초구 반포동.

“미치겠다, 진짜. 나 청심한 한 알만 더 사 올게.”

“근처에 약국 없습니다, 부장님. 그리고 곧 차량 올 텐데 조금만 참으세요.”

“못 참겠으니까 그렇지.”

슈트를 곱게 차려입은 우리.

정일현 부장은 긴장되는 듯 다리를 떨고 있었고, 나 역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이윽고 한 차량이 우리 앞에 멈추어 섰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네.”

한 남자가 내리더니 뒷문을 열며 우리에게 말했다.

그 남자 역시 검은 슈트를 입고 있었으며, 검은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인하여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죄송하지만 이거 하나만 작성해 주시겠습니까?”

스윽.

우리가 올라타자 차량은 어딘가로 출발했고, 문을 열어준 남자는 조수석에 앉아 뒷자리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의 서류를 건넸다.

[비밀 유지 서약서]

“다른 건 아니고. 안가 위치와 방문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겠다는 서약서입니다. 두 분 다 민간인이 아니라 검사님들이시기도 하고 대통령님이 직접 자리를 만드신 거라 크게 상관은 없지만, 형식상 작성하는 거니 사인만 해 주시면 됩니다.”

떨리는 손으로 사인을 한 나는 이곳에 타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다.

어젯밤.

내 검사실로 걸려온 한통의 전화.

대통령이 뵙고 싶어 한다는 내용으로 걸려온 전화가 시초였다.

전화를 건 사람은 백성원 차장이었고, 그 역시 예상 못한 듯 얼떨떨한 목소리였다.

‘일단 VIP가 직접 호출하신 거니 거절할 수도 없고 만나 뵙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은가?’

백성원 차장 역시 대통령이 나를 호출했다는 보고를 받았을 테고, 나와 안면이 있으니 자신이 직접 전화를 했을 터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대통령이 있는 안가로 향하는 차량에 올라타게 된 것이다.

“내리시죠.”

안가로 향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특이한 선팅으로 인하여 밖을 볼 수 없었고, 뒷좌석 앞에는 검은 칸막이가 있어 앞 유리 역시 볼 수 없었다.

도착한 곳은 크기가 제법 되는 단독주택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안내를 따라 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잘 차려진 술상이 있는 방으로 말이다.

“휴… 대통령과의 술자리라. 자네와 일하니 별일을 다 겪네. 이걸 영광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사건 때문에 불렀다고 했으니 대통령과의 술자리 역시 수사 과정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자네 인간 맞아? 심장은 있는 건가? 어떻게 공무원이 그것도 검사가 대통령과의 만남을 앞에 두고도 떨지를 않나.”

나와 정일현 부장이 짧은 사담을 나누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로 된 미닫이문이 열렸다.

“반갑소. 나 주한호요.”

* * *

주한호가 내민 손을 잡은 정일현 부장.

굳이 옆을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정일현의 떨림이 얼마나 심한지 마룻바닥이 흔들릴 정도였으니까.

“반갑습니다, 대통령님! 서울 중앙 지검 공안1부 부장 정일현입니다. 현재는 대검으로 파견되어 방산 비리 수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반갑소, 나 대한민국 대통령 주한호요.”

“영광입니다!”

“하하, 영광은 무슨.”

짧게 인사를 나누던 두 사람.

얼마 지나지 않아 주한호의 손이 나에게로 향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통령님. 대검찰청 중앙 수사부 연구관 한치우라고 합니다.”

“한 검사 얘기 많이 들었소. 요즘 저보다 더 유명하시다고.”

“아닙니다, 대통령님.”

“국민들이 한 검사를 정의의 사도라고 부르던데 뭐.”

“검사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대통령님.”

“하하! 나는 한 검사가 부럽소. 나는 이래도 욕먹고 저래도 욕먹는 대통령이라서 말이야. 누군가에게 옳은 일을 하면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그른 일이 되어 버리는 게 정치거든.”

“민주주의 정치에서는 더 많이 손을 든 쪽 의견을 따라야죠.”

100명의 유권자 중 51명.

단 한 명의 표가 더 많더라도 당선이 되는 게 선거이다.

그렇게 당선된 정치인은 51명에게 약속한 공약대로 정치를 해내 간다.

그럼 나머지 49명의 의견을 무시해야 되는가?

정답은 아니다.

51명에 대한 약속을 지키되 49명의 유권자를 설득해야 할 것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지만 말이다.

“이야∼ 정치도 잘 아네. 일단 앉아요.”

“네.”

주한호가 상석에 앉았고, 나와 정일현 부장은 양옆에 앉았다.

그리고 주한호 대통령이 힐끔거리며 눈치를 주자, 열린 문을 잡고 있던 경호원들이 뒷걸음질 치며 나갔다.

“우리 조리팀장이 만든 음식이니 한 번 들어봐요.”

“네!”

식탁에는 위스키 병과 소주병이 깔려 있었고, 화려한 한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야채의 색감 하나까지 신경 써 담아낸 듯한 음식이 말이다.

“주종을 잘 몰라서 여러 개 준비했는데 뭘 따라 드릴까? 나는 소주 파이고.”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대통령님.”

정일현 부장이 자신 앞에 놓여 있는 여러 잔 중 소주잔을 들어 보이며 주한호에게 말했다.

“한 검사는?”

“저도 소주 좋아합니다.”

나 역시 정일현 부장과 같은 행동을 했다.

비싼 술이 입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덜덜덜.

“왜 이렇게 떨어요, 정 부장은.”

“죄송합니다. 대통령님 앞이라 긴장이 돼서…….”

술잔이 흔들리고 따라지는 소주가 춤을 추자 주한호가 피식 웃으며 정일현 부장에게 말했다.

“혼내려고 부른 거 아니고, 가볍게 술자리나 하면서 이것저것 물어보려고 뵙자고 한 거니 편히 들어요.”

“네! 알겠습니다, 대통령님.”

내가 보기엔 절대로 편해질 리가 없을 것 같다.

젓가락을 들고 이것저것 안주를 찔러보는 나와 달리 가부좌 자세를 하며 정면을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정일현 부장이니까 말이다.

“자! 한잔할까요?”

짠!

무릎을 꿇은 채 팔을 뻗고 주한호 대통령의 잔에 내 잔을 부딪쳤다.

“크으… 역시 안가에서 먹는 술 맛이 최고네.”

술잔을 들이킨 주한호가 비워진 자신의 잔을 바라보며 말한다.

“청와대나 이곳이나 5년짜리 전셋집이라는 게 참으로 아쉽구려. 욕먹을 때는 그렇게 방을 빼고 싶더니. 술맛은 왜 이렇게 달콤한 건지, 참.”

그의 남은 임기는 1년 반.

즉, 주한호의 정치 인생 역시 1년 반밖에 남지 않았단 뜻이다.

대한민국 헌법상 대통령은 연임이 불가능하고, 퇴임 후 다시 정치판에 뛰어든 대통령은 역사상 단 한 명도 없으니까 말이다.

생각해 보아라.

대통령 퇴임 후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게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슈퍼카를 몰다가 중형차가 성에 차겠는가.

“바쁜 사람 앉혀다 놓고 푸념이나 하고 있었네. 자! 본격적으로 얘기 좀 해 볼까요?”

“네, 대통령님.”

한숨을 푹푹 쉬던 주한호가 우리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의 푸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권력이란 건 그런 거니까.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욕을 먹지만, 아무리 쓴 욕이라 하여도 권력의 달콤함을 이기지 못하니까 말이다.

“부담을 주려는 건 아니지만 행정부의 수장으로 두 명의 검사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 대통령이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대다수의 국민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자신이 공무원이라 함은 대통령의 권한을 더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대법원장을 포함 헌법기관 구성원들은 전부 대통령이 임명한다.

물론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지만, 임명할 수 있는 사실 자체가 막강한 권력이다.

왜?

누구를 지명하느냐로 국회와 거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주어야 한다는 공식이 너무나도 잘 통하는 게 바로 정치이니까.

또한 대한민국 국군의 통수권자이며 공무원을 포함한 행정 각부의 장인 국무위원 또한 대통령이 임명한다.

그것뿐인가.

범법자의 사면과 복권, 그리고 감형까지 할 수 있으며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안을 거부할 권한까지 있다.

즉, 삼권분립에서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은 사법부와 입법부에 언제든지 영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제가 총장님과 법무부 장관님을 모시지 않고 두 분을 모신 이유는 조금 더 자세한 내용을 듣고 싶어서입니다.”

특히 검사에게 있어 대통령은 절대적 제왕처럼 느껴진다.

대통령이 행사할 수 있는 수많은 권한 중 가장 강력한 권한인 것이 수사권과 징세권이기 때문이다.

수사권과 징세권을 가진 기관.

검찰과 경찰, 그리고 국정원과 국세청까지.

전부 행정부 소속이며 심지어 국정원은 대통령 직속 기관이다.

대통령의 한마디로 움직인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는 대통령 한마디에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다.

5,000만 국민의 권력을 위임받은 대통령이 임명한 법무부 장관.

법무부 장관이 임명한 수천 명의 검사 중 하나인 나.

검사인 내 시선에서 대통령이 왕처럼 보이는 건 당연한 얘기이다.

또 징세권은 수조 원을 가진 재벌이 5년짜리 계약직인 대통령 앞에서 꼼짝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 두 분이 수사하고 있는 사건에서 클럽이라는 곳을 알아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정일현 부장을 보며 묻는 주한호 대통령.

“네, 맞습니다. 그런데 대통령님이 어떻게 아셨습니까?”

긴장한 탓에 실수를 할까봐 내가 대신 답했다.

“두 분이 클럽이란 곳을 수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국회에서 돌고 있더군요. 두 분이 수사 자료를 국회에 유출한 것은 아닐 테고…….”

주한호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고, 그의 눈빛은 너무도 예리했다.

우리의 작전이 통했다.

대통령에 귀에 클럽에 대한 얘기가 들어갔으며, 백성원 차장이 말하길 이미 국정원에 모든 라인은 클럽이란 곳을 알아보려 돌아가고 있다고 했다.

“정무수석 말이 총선 앞두고 운영위에서 건수 찾아보려고 자료 제출을 요구했고, 그 과정에서 우연히 딸려 왔다고 말하긴 했는데… 아무리 봐도 우연히 딸려 올 수 없는 자료란 말이죠. 그것도 중수부에서 만지는 사건 자료가 딸려 올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봐도 되죠. 대검 내부에서도 볼 수 있는 사람이 몇 안 되니.”

날카로웠다.

마치 우리의 작전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 말이다.

“사실…….”

여기서 더 시치미를 떼 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기에 나는 말끝을 흐리며 정일현 부장의 눈치를 보았고, 그 역시 나와 생각이 같은지 고개를 끄덕이며 신호를 주었다.

“저희가 흘린 게 맞습니다.”

“하하, 눈치도 빠르네. 덕분에 불필요한 말싸움 할 필요도 없고.”

역시 우리의 판단이 맞았다.

아무리 잡아떼 봤자 대통령에게 우리의 이미지만 나빠질 뿐이었다.

믿지도 않았을 테고 말이다.

“직접 찾아와 부탁을 하지 그랬어요. 나도 꽤 적극적으로 도왔을 텐데.”

“김수철 장관이 클럽이라는 곳 소속이 밝혀지고 나서부터 아무도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대통령인 나까지 용의 선상에 놓고 수사를 했다?”

절레절레.

다시 한번 정일현 부장의 눈치를 살폈고, 이번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는 정일현이었다.

“네.”

하지만 이번엔 그에 뜻을 따르지 않았다.

둘러댈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잠깐이나마 파악한 그의 성격에서는 내 말이 정답 같았으니까 말이다.

“휴… 대통령 앞에서도 망설임이 없네.”

“죄송합니다. 다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대통령님이 만약 김수철 장관과 같은 소속이었다면 국정원 라인을 돌리지 않으셨겠죠. 또한 저희 수사관들이 김수철 장관의 동향을 24시간 추적했지만 대통령님과 만난 적은 없었습니다.”

“하하! 지금 일개 평검사가 국방부 장관을 사찰했다는 사실을 제 면전에서 말하는 겁니까?”

“수사에 있어 용의자의 동태 파악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똑.

나와 주한호의 신경전에 정일현 부장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입술은 파랗게 질렸고, 흘러내리는 땀이 얼마나 많은지 테이블 위로 똑똑 떨어지는 게 보였다.

“그래서 결론은 나는 클럽이란 곳과 연관되어 있지 않다?”

“네. 지금까지 파악된 사실만 놓고 보자면 그렇습니다.”

“지금까지라… 그럼 언제든지 나도 수사할 수 있다는 뜻이네?”

“혐의가 있다면 끝까지 밝혀내고, 잘못이 있다면 반드시 재판대에 세우는 게 검사의 임무라고 생각됩니다, 대통령님.”

스윽.

술병을 들고 조심스레 주한호 앞으로 가져갔다.

“법무부 장관 말이 맞네. 한 검사 자네 또라이라고 하던데.”

정일현 부장은 거의 실신 직전이었고, 주한호 대통령의 말은 짧아졌다.

분위기가 어색해져 갔지만 술병을 내려놓지는 않았다.

“정의로운 건 좋은데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건 있네. 김 장관이야 그렇다 치고, 다른 사람들한테 그렇게 버릇없이 굴다가는 크게 혼날 수 있어.”

“용서해 주십시오, 대통령님. 하지만 수사에 있어 사람의 높고 낮음을 생각한다면 거악을 척결하는 특수부 검사, 혹은 중수부 연구관이 제대로 사건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참, 한마디를 안 져.”

스윽.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내 술병에 잔을 가져다 대는 주한호였다.

“그런데 말이야 개인적으로는 아주 버릇없지만 국민의 대표인 대통령으로 생각한다면 당신 같은 검사가 참 마음에 드네.”

쪼르륵.

그의 잔을 채우고 조심스레 술병을 내려놓았다.

“잠깐, 그런데 내가 국정원 라인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나?”

“백성원 차장님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하! 백 차장까지 구워삶은 건가?”

“정 부장님이 소개시켜 주셔서 술자리 한번 가진 적이 있습니다.”

“크으… 그래. 그럼 나와의 술자리에서는 무엇을 얻어가고 싶나?”

술잔을 비운 주한호가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얻어 가고 싶은 거라.

단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클럽에 대한 정보. 아니, 클럽에 대한 정보를 알아볼 수 있는 그의 힘.

그게 내가 지금 필요한 것이다.

“저희 수사팀이 국정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 *

지금 방산비리를 수사하고 있는 수사팀의 인원은 검사들을 포함하여 총 18명이다.

그중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아직 김수철 장관과 내통하는 사람을 밝혀내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김수철 장관에게 수사팀의 수사 자료가 흘러들어 갔다는 사실을 주한호 대통령에게 고했고, 어떻게 된 일인지 낱낱이 말했다.

그렇기에 나와 정일현 부장, 그리고 박채이 검사까지, 이 세 명의 검사들을 주축으로 국정원 백성원 차장과 새로운 수사팀을 꾸리길 원했지만 주한호 대통령은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그냥 말하게나. 누군지 밝혀내려면 자네를 옆에 두고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수사하는 데 있어 이미 합을 맞춘 수사관들도 있어야 할 테고 말이야. 그리고 새로운 수사관들은 김 장관의 프락치가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하나? 국정원 직원들 역시 김 장관과, 아니, 클럽이라는 곳의 프락치가 있을 수도 있고 말이야”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비밀스레 수사팀을 꾸린다고 해도 장관급 인사와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이 속해 있을지 모르는 클럽이라는 곳의 눈을 피할 순 없으니까 말이다.

“일단 조 원장에게 말해서 업무 협조를 하라고 할 테니…….”

“죄송하지만 대통령님. 백 차장님께 직접 말씀해 주실 순 없겠습니까?”

“원장도 아니고 차장에게 업무 지시를 하라는 건가?”

“부탁드리겠습니다. 조 원장님 역시 아직 파악된 게 없어서요.”

“조정식 원장은 내가 천거한 인물일세…….”

부릅뜬 내 눈을 보며 말하던 주한호가 말을 끝내지 못했다.

“미치겠구먼. 내가 졌네, 졌어. 백 차장 불러서 직접 지시하지.”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나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고, 주한호 대통령 역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얘기 끝났으니 술이나 제대로 마셔 보자고. 각오해, 한 검사. 술 마시다 흐트러지면 자네 부탁 안 들어줄 수도 있으니.”

“하하하하!”

주한호의 마지막 농담을 끝으로 우리의 본격적인 술자리는 시작되었고, 아침이 밝을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힘들었지만, 술자리에서는 많은 것을 얻었다.

수사에 엄청난 도움이 될 국정원이란 곳을 얻었고,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볼 수 없는 대통령이 취해 잠든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큰 소득은 대통령이 용의선상에서 멀어졌다는 사실이다.

“다행이네.”

“뭐가?”

넥타이는 풀어헤쳐진지 오래였다. 머리는 산발이 된 상태로 안가를 나온 우리는 편의점에서 숙취 해소 음료를 끝도 없이 들이켰다.

“가장 높은 곳이 썩지 않아서요.”

“뭐라는 거야…….”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있는 정일현 부장.

그에게는 내 푸념을 이해할 만한 여유가 없어 보였다.

하나 같이 술을 마셨는데도 나는 꽤 멀쩡했다.

기분이 좋아서였을까.

아니면 너무도 힘들던 지난 몇 달을 보상해 주기엔 부족한 술 때문이었을까.

“아닙니다. 저기 택시 오네요, 부장님.”

“그래… 미안한데 먼저 타고 갈게, 한 검사.”

“네. 걱정 마시고 들어가세요. 제 택시도 금방 올 겁니다.”

뭐가 됐건.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수도 없이 틀어진 수사의 끝이 결정되었고, 가는 길 역시 조금은 넓어진 것 같으니까.

“휴… 피곤하다 피곤해.

* * *

나와 박채이, 정일현 부장을 포함한 총 여섯 명의 공안 검사들.

또 아홉 명의 수사관과 세 명의 실무관들까지.

[고려전단]

강남 어귀 낡은 건물 앞에 18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와… 그 연세에 어찌나 술을 잘 드시던지.”

“부럽습니다, 부장님. 대통령님과의 술자리라니! 이번 사건 해결하시면 바로 차장검사님 되는 거 아닙니까? 하하!”

피식.

정일현 부장과 공안부 이석 검사의 대화를 듣자하니 웃음이 나왔다.

은근슬쩍 자랑하는 말투로 말하는 정일현 부장의 모습 때문에 말이다.

“정 부장님 술 안 취하셨잖아요?”

“내가 술이 조금 세긴 하지.”

“그게 아니라 얼마나 긴장하셨는지 땀으로 다 흘리셔서 안취하신 것 같은데.”

“하하하하!”

내 말에 모여 있던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한 검사가 특이한 거야. 어떻게 대통령 앞에서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어?”

“역시 우리 한 검사님!”

정일현 부장의 말에 내 옆에 서 있던 정대필이 장난스래 내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그런데 건물이 되게 낡았네요, 부장님.”

“속은 달라.”

“여기 와 보셨어요?”

“전에 한 번 와 봤지. 백 차장님이 내 선배거든.”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정일현 부장.

“이야∼ 한 검사를 이렇게 빨리 볼 줄 몰랐네.”

낡은 건물에서 나온 백성원 차장이 나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자 올라갔던 정일현 부장의 어깨가 다시 내려왔다.

“선배님, 저도 있습니다.”

“하하, 미안하네!”

“섭섭합니다. 이제 저보다 한 검사가 더 좋으신 겁니까?”

“그럴 리가 있나. 내가 가장 아끼는 후배인데.”

톡톡.

“다른 사람들 표정 안 보입니까, 부장님. 체통을 지키셔야죠.”

정일현 부장의 유치함에 모든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았고 나는 옆구리를 찌르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러게. 아직 술이 덜 깼나?”

“그런데 저는 백 차장님보다 부장님이 더 좋습니다.”

“하하하하! 이제 부장을 갖고 노네, 한 검사.”

너스레를 떨고 있는 나와 정일현 앞으로 백성원 차장이 굳게 닫힌 철문을 열고 있었다.

“자, 모두 들어가시죠. 강남전단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갈 줄은 몰랐네.”

낡은 건물 속 낡은 사무실.

우리 모두는 거미줄을 헤쳐 가며 백성원 차장 뒤를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그 와중에 정일현 부장은 이곳이 익숙한지 여유로워 보였다.

“차라리 대검에서…….”

이석 검사의 뾰로통한 표정은 낡은 사무실 구석에 빈틈이 생기는 것으로 끝이 났다.

우리가 들어온 입구가 두꺼운 철문으로 막히고, 구성의 빈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불빛은 신비로웠다.

SF 영화나 나사에서나 볼법한 사무실.

얼마나 깔끔하고 화려한지 모두의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대한민국 정보의 심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빈틈 사이로 몇 십 년을 건너온 듯했다.

“모두 알고 계시겠지만, 제 소개를 간단히 하자면 대한민국 국가정보원 제1차장 백성원이라고 합니다.”

짝짝짝.

고개를 숙이며 백성원이 자신을 소개하자 모두가 박수를 치며 답했다.

“국정원 조직에 관해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저는 국내 파트를 총괄하는 사람입니다. 여기 앉아 계신 분들은 제 부하 직원들이자 여러분을 도와주실 분들이고요.”

백성원 차장 뒤로 보이는 열 명의 사람들.

하얀 슈트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꽤 깔끔한 인상들이었다.

“본래 고려전단 건물은 블랙요원들을 위한 장소였지만, 이번 수사를 위하여 일시적으로 수사본부로 이용될 것이며, 여러분 모두는 이곳에 대한 비밀 유지 서약서를 작성해야 됩니다.”

백성원 차장 뒤에 있던 직원들이 한 장의 서류를 우리 모두에게 나누어주었다.

“한 번 공개된 장소라 수사가 끝난다 해도 다시 블랙요원들을 위한 장소로 이용되지는 않겠지만, 여기서 보고 듣은 것과 또 이런 지부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외부에 발설하시면 안 된다는 서약서입니다.”

서약서의 내용은 간단했다.

어떤 것도 말하지 말 것.

어떤 물건도 유출하지 말 것.

다만, 마지막 한 줄에 적힌 내용을 본 우리의 표정은 조금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위 내용을 어길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을 수 있음.]

“여기…….”

사인을 마친 우리는 서류를 국정원 직원들에게 넘겼고, 그들은 서류를 검은 봉투에 담아 자신의 가방에 넣었다.

“그나저나 소개 안 시켜 주십니까, 선배님?”

서약서로 인해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듯 밝은 목소리로 말하는 정일현 부장.

“아∼ 죄송하지만 저희 직원들의 이름과 나이를 밝힐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쪽부터…….”

백성원 차장이 직원들 옆으로 향했다.

“K1, K2… K10까지 부르시면 됩니다.”

“아…….”

“K1은 대한민국 국익을 위한 정보를 수집하는 국익정보국 국장이며, K2는 정보의 사실 유무를 판단하는 정보판단실 실장… K3는 광역시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 광역단장이며…….”

이름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우리들과 번갈아 가며 악수를 청했다.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국장급과 실장급이 있는 걸로 보아 국정원 쪽에서 파견된 인원들이 꽤 고위직이란 건 알 수 있었다.

국정원 국장급이면 1급 공무원 상당이며, 단장은 2급 공무원이다.

즉, 차관급인 백성원 차장과 고공단(고위공무원단)에 속하는 인사가 두 명이나 있다는 소리이다.

‘휴… 주한호 대통령의 뜻이겠지.’

우리에게 있어 좋은 것은 아니었다.

검사가 독립관청이라지만 같은 공무원이고 급수로 따지자면 국정원 직원들 쪽 인원이 훨씬 높으니까 말이다.

열 명의 사람들 중 가장 낮은 사람이 4급 파트장이니…….

주한호 대통령은 계급으로 우위를 세워 보고, 체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편성한 인원일 것이다.

저런 인원들이 열 명이나 수사팀으로 파견됐다는 건 대통령의 뜻 없이는 불가능하다.

가뜩이나 바쁜 국가정보원에서 검찰 수사를 위해 고위 임원들을 파견시켜줄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검찰 쪽 인원들도 소개해 줄 텐가?”

“네, 선배님.”

우리 역시 정일현 부장을 필두로 한 명 한 명 소개를 해 나갔고, 그들은 박수를 치며 우리를 환호했다.

박수 속에 어떤 뜻을 품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사무실은 회의실을 검찰 쪽에서 쓰고, 미팅실을 저희가 쓰겠습니다. 또 컴퓨터는 사무실에 있는 것으로 쓰시면 되고, 이 안에서는 휴대폰 촬영과 외부 인터넷이 불가능할 겁니다.”

“그럼 어떻게 수사를 하죠?”

“인터넷은 사무실에 있는 컴퓨터를 사용하시면 되고, 원하시는 자료는 저희가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정대필 수사관과 백성원 차장과의 대화.

두 사람의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로 향했다.

“잠시만요, 차장님.”

“왜 그러나, 한 검사.”

“국정원의 보안이 중요하다지만 저희는 수사 협력을 위해 모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스템으로 수사를 한다면 모든 정보를 국정원 측에서 검수하고 저희에게 넘겨주는 꼴밖에 안 됩니다.”

아직 내부에 스파이가 누군지 모른다.

그러니 모든 정보는 공유되어야 하고 열람의 순서가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또한 아무리 협력을 위해 모였다지만, 객식구와의 일이 순조롭기만 할 순 없었다. 그러니 주도권 역시 뺏겨서는 안 된다.

“검찰 측 심정은 이해하나 국정원에서 취급하는 정보들을 검찰 측에서 자유롭게 열람하게 할 수는 없네.”

“국정원이 취급하는 자료를 열람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지금부터 취득하는 모든 수사 자료들만 같이 공유하자는 거죠. 그건 국정원이 취득한 자료가 아니라…….”

말끝을 흐리며 검찰 쪽 인원들과 국정원 쪽 인원들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우리 모두가 같이 취득한 자료죠. 또 우리는 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 돕자고 모인 사람들입니다. 제 방법이 수사에 도욱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차장님.”

“흠…….”

고민을 하는 백성원 차장.

내 눈치를 살펴보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알겠네. 일단 원장님께 보고하고 그렇게 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차장님.”

백성원 역시 그 사실을 알기에 수긍했고, 우리는 본격적인 수사를 위해 각자의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이제 김수철 장관의 계획과 범죄 혐의, 그리고 클럽이라는 곳을 낱낱이 파헤칠 것이다.

깡으로 싸우는 검사 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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