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서울 중앙 지방법원.
건물의 크기, 재판부의 수, 거기에 처리하는 사건의 양까지.
대한민국의 모든 법원을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크다.
또한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사건 또한 중앙 지법에서 처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민사소송법 제6조.
국가의 보통재판적은 그 소송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관청 또는 대법원이 있는 곳으로 한다.
여기서 재판적이란 소송의 당사자가 어떤 법원 재판권의 행사를 받게 될 것인가에 대한 근거가 되는 관계를 말한다.
그렇기에 국가가 당사자가 되는 소송의 재판적은 법무부 또는 대법원이 되며, 각각 법무부가 있는 과천과 대법원이 있는 서초구를 관할하는 법원이 재판권을 행사하게 된다.
물론 모든 국가 소송을 두 법원이 담당하는 것은 아니다.
사건 종류를 막론하고 중앙 지법의 사건 종류가 워낙 많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아 보이는 거지.
얼마나 많은지 감이 안 올 수도 있는데, 간단히 말하면······.
1년에 수십만 건 많으면 백만 건 이상의 사건을 처리한다고 보면 된다.
“중앙 지검 한치우 검사입니다. 형사 24부가 어디죠?”
“서관 7층입니다.”
“감사합니다.”
뭐가 됐건 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쁘게 돌아가는 법원을 찾았다.
[형사 24부 합의재판부]
똑똑.
“들어오세요.”
몇 번의 노크를 하고 나서야 들어오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재판부 방 안은 노크를 하는 사람을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바빴기 때문이다.
“소병철 부장판사님 좀 뵈러왔습니다.”
“검사님이신가요?”
경제 사건을 전담하는 형사 24부.
특수부와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판사들을 보좌하는 계장과 그 밖의 법원 공무원들이 내 도장이 찍혀 있는 서류들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네, 한치우 검사입니다.”
힐끔.
시선은 서류에 고정한 채 말을 이어가던 한 남자가 내 이름을 듣자 나를 힐끔 쳐다본다.
“담당 검사님이 여기는 왜···?”
“재판장님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잠시만요.”
사실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고 해도 재판부에 그것도 재판장인 부장판사를 만나러 오는 행위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재판은 공정해야 하며 검사든 변호사든 재판장을 만나러 오는 건 본인의 뜻을 전달하러 오는 것으로 비춰지니까 말이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재판부를 찾은 이유?
탁.
“안녕하십니까, 판사님. 중앙 지검 한치우 검사입니다.”
소병철 부장 판사의 집무 테이블에 무거운 보따리를 내려놓기 위해서였다.
“아∼ KH 사건 담당 검사님이네.”
“네, 맞습니다. 우대현 회장의 추가 혐의들이 나와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협박 아닌 협박을 받은 차정민 팀장.
그는 지금껏 자신이 도맡아 처리하던 우대현 회장의 불법적인 일들의 증거를 나에게 건넸고, 그 보따리는 다시 소병철 판사실로 옮겨졌다.
“며칠 뒤면 선고인데 제 책상에 보따리 올려놓으면 어쩌라는 겁니까?”
“변론재개 해 주십시오.”
“뭐요? 하하.”
변론재개.
재판은 몇 번의 공판 동안 변론이 이루어지며 공판이 끝나면 변론을 종결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선고를 통해 재판이 끝나게 된다.
하지만 선고 기일이 잡히고 추가로 제출해야 할 증거나 변론이 생길 경우 검사, 피고인, 변호사는 법원에 변론을 재개할 수 있도록 요청할 수 있다.
다만 변론을 재개할지 말지의 여부는 온전히 법원에 재량하에 있다.
즉 소병철 판사의 판단하에 있단 말이다.
“한 검사······.”
“네.”
“혹시 KH 경쟁 그룹에서 돈이라도 받았습니까?”
찡긋.
소병철 판사의 말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회의적인 태도를 보일 걸 모르지는 않았다.
소병철 부장판사.
우대현 회장의 사위인 서울 고법 부장판사와 같은 학교 선후배 사이.
게다가 얼마 전까지 중앙 지법에서 같은 재판부 생황을 하던 꽤 가까운 사이였으니까 말이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뭐죠?”
“이만하면 되지 않았습니까. 우대현 회장은 이미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추가 혐의가 빤히 있는데도 덮자는 말씀이십니까?”
“법도 관용이라는 게 있습니다. 우대현 회장이 경제사범이긴 하지만 중견 기업 회장이며 대한민국 경제에 이바지한 인물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나와 있는 혐의점만으로도 충분히 중형이 선고될 거라 예상됩니다.”
관용이라······.
우대현 회장이 창출한 일자리.
이리저리 빼돌리긴 했지만 국가에 낸 세금.
그래. 물론 경제에 이바지했다는 말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빤히 드러나 있는 죄를 묻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왜?
경제에 이바지하든 하지 않았든 법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하니까 말이다.
“적당히 하란 말씀입니다, 한 검사.”
“변론재개 기각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이 자료들이 어떻게 한 검사 손에 들어갔는지 모를 것 같습니까?”
빤히 알겠지.
차정민 팀장··· 아니, 차정민 변호사가 KH 그룹을 그만두고 우대현 회장의 변호인 직에서도 사임했으니까.
“무슨 탄을 썼는지 모르겠는데. 상대측 변호사 회유해서 받은 자료들 입증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니지··· 그 행동은 올바르다고 생각하세요?”
“변호사법 제26조. 비밀유지의무 형법 제317조 업무상비밀누설죄에 접촉되고 있죠. 하나 법률에 규정하는바 혹은 공익을 위해서라면 얘기가 달라지죠.”
피식.
옅은 미소와 함께 소병철 판사를 응시했다.
“판사님이 말씀하셨다시피 법도 관용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차정민 팀장은 꽤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끝까지 우대현 회장의 곁을 지키며 언론에서 같이 매장당할지.
아니면 징계를 받고 언론에 찬사를 받을지 말이다.
그가 좋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내가 준 문제지에서 보기는 오직 두 개뿐이었고 자신에게 더 나은 선택을 한 것뿐이지.
“변론재개 인용해 주시죠. 아니면······.”
“아니면?”
“기각의 이유를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여론에 알릴 것이다.
소병철 부장 판사와 우대현 회장의 사위인 서울 고법 부장판사가 꽤 가까운 사이라는 걸.
“또한 1심 선고가 부당하다 여길 경우 항소심에서 대등재판부를 신청할 겁니다.”
“참··· 우대현 회장이 한 검사 부모의 원수라도 되는 겁니까?”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대등재판부.
한 명의 부장판사와 두 명의 배석판사가 재판부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 법조 경력 15년 이상인 세 명의 부장판사가 번갈아 가며 재판부를 구성하는 걸 말한다.
즉 한 명의 부장판사 주도 아래 재판이 진행되는 게 아니라 동등한 위치인 세 명의 부장판사들이 재판을 진행하는 재판부이다.
“대등재판부는 말만 나왔을 뿐 아직 없는 제도입니다.”
“혹시 모르죠. KH 사건이 첫 대등재판부가 될지도.”
내년에나 신설되는 대등재판부.
소병철 판사는 모르겠지만 대등재판부는 앞으로 꽤 규모가 커지며 언젠가는 고법이 아니라 지법에까지 신설될 것이다.
또한 앞으로 사회에 굵직한 사건들은 거의 대등재판부에게 배당되는 일이 많아지며 특수부 검사로서 대등재판부의 구성과 특징에 대해 미리 알고 있다는 것은 나에게 꽤 큰 이점이 될 터이다.
“후··· 누가 재판장인지 모르겠네······.”
“무슨 말씀이신지.”
“이미 한 검사가 그림 다 그려 놓고 나한테 도장만 찍으라고 하는 거 아니요, 지금.”
“그럼 하나 여쭙겠습니다, 판사님.”
“말씀하세요.”
“만약 판사님이 우대현 회장 사위와 아무 연관이 없다면 변론재개를 기각할 만한 이유가 있습니까?”
찡긋.
이번에는 소병철 판사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판사님 말대로 이미 우대현 회장은 사회에서 매장 당했습니다. 그럼 판사님의 선배이자 고법 부장판사인 분은 어떤 결정을 내리실 것 같습니까?”
손절.
장인의 범죄가 자신의 커리어에 영향을 끼치지 않으려면 어떤 선택을 할지 빤하다.
“참··· 당신 초임검사 맞아요? 내가 지금껏 엘리트란 엘리트 검사들을 다 만나봤는데 당신은 조금 다르단 말이지.”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이 아닙니다.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
재판에는 수많은 변수가 생긴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일어날 변수는 없을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다가는 언젠가 크게 넘어질 날이 올 겁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의 행동은 결코 올바르다 할 수 없습니다.”
나도 알고 있다.
대한민국이 삼권분립이듯 법조계 역시 법조 삼륜이라는 단어가 있다.
검사와 변호사 그리고 판사까지.
세 개의 독립된 사람들이 한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하나 지금 내 행동은 나를 제외한 두 사람을 내 손아귀에 넣고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과연 올바른 판결이 나올 수 있었을까 묻고 싶습니다.”
“하하, 다른 초임검사랑 뭐가 다른지 확실히 알겠네.”
올바르지 못한 내 행동을 대신할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그것 또한 재판의 일부분이라고 말하면 마땅한 변명거리는 없었다.
“당돌한 걸 넘어서 세상을 바꾸려고 하네.”
“용건은 이게 다 입니까?”
“나머지 용건은 재판장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하, 그래요. 가 보세요.”
지검으로 돌아오는 길.
가까운 만큼 생각할 시간도 많지 않았지만 의외로 금방 머릿속을 정리할 수 있었다.
긴 싸움의 끝은 어느 정도 보였고, 나의 승리가 확정되다시피 한 판결을 보며 즐기면 될 테니까 말이다.
“가 볼까.”
* * *
서울 중앙 지법.
[서관 423호]
[개정 중]
“지금부터 2010 고합 331 우대현 피고인에 대한 선고 공판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여죄를 묻는 변론을 끝마치고 다시 개정된 선고 공판.
세 명의 검사들과 다섯 명의 변호인들.
그리고 수많은 기자와 피해자가 넓은 재판장을 가득 메웠다.
하나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피고인인 우대현 회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제 피고인이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하였고, 아시다시피 피고인의 출석 없이는 선고 공판 개정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구속된 피고인이 건강상의 이유로 출석을 거부하고 있으며 교도관에 의해 인치가 불가능하거나 곤란하다고 인정될 때에는 피고인의 출석 없이 공판 절차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공판이 진행되는 동안 구속된 우대현 회장.
범죄 혐의가 검찰로 기울어지자 증거인멸의 이유로 우대현 회장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검사 측 출석하셨고··· 변호인 측도 출석하셨습니다.”
수천만 원의 수임료를 받는 유명 로펌의 변호사들?
우대현 회장이라면 당연히 그런 변호사들을 선임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나 변호인 석에 앉아 있는 어두운 표정의 사람들은 그런 변호사가 아니다.
이미 승소의 가능성은 없기에 돈보다 로펌의 브랜드 이미지를 더 생각한 탓이었다.
“변호인 측은 검찰 측에서 제시한 증거를 전부 인정하였으나 대부분의 증거가 위법하게 수집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재판부도 고민을 많이 했지만 결론적으로 모든 증거는 공익을 위해 인정되어야 된다고 판단하였고 변호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재판장에 말은 오랜 시간 이어졌다.
“일단 검찰에 공소 제기 순서대로 판결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혐의가 워낙 많고 재판장은 판결 이유를 일일이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기자들과 피해자들 앞에서 말이다.
“···이에 검찰은 우대현 회장에게 징역 30년을 구형했고,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특수상해, 뇌물공여······.”
그리고.
“이에 따라 판결을 선고하겠습니다.”
재판장에 최종 선고로 인하여 내 첫 사건이 끝이 났다.
“피고인을 징역 20년 및 벌금 740억 원에 처한다. 피고인이 위 벌금을 납입하지 않는 경우 피고인을 3년 간 노역장에 처한다. 또한 피고인으로부터 631억 3,000만 원을 추징한다.”
짝짝짝.
방청석에서 터져 나오는 박수 소리와 함께 말이다.
* * *
[우대현 회장 징역 20년 선고]
[우대현 회장 변호인 측 항소 의사 없다고 밝혀]
[KH 사건 담당 검사, 특수 1부 한치우 검사. 일약 스타덤. 새로운 스타검사의 탄생?]
재판이 끝나고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며 신문과 뉴스를 정독할 수 있었다.
“저는 사건 끝나고 뉴스 보는 게 가장 좋아요.”
여유를 즐길 수 있던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정대필 수사관과 한미래 실무관.
두 사람 모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잔을 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검사님은 더 뿌듯하시겠어요.”
내가 바꾼 세상.
내가 쓰러트린 거악.
그 모든 걸 인정이라도 해 주려는 듯 뉴스에서는 온통 내가 끝낸 사건얘기 뿐이었다.
“저는 뉴스에 제 이름만 나오는 게 불만입니다. 인간적으로 수사관님이랑 실무관님 이름도 넣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하하, 됐습니다. 굳이 제 이름이 나오지 않아도 얼마나 보람찬데요.”
검사들이 미치도록 특수부를 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해결한 사건 하나하나가 뉴스에 나올 확률이 높으며, 다른 부서 검사들이 쌓아 온 수백 개의 커리어를 단 하나의 사건으로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최연소 부부장 검사가 우리 부서에서 탄생하는 거 아닐까 모르겠네요.”
그렇기에 당연히 특수부 검사들이 탄탄대로를 걸을 수밖에 없다.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유명하면 똥을 싸도 박수를 쳐줄 것이라고.
그 말을 검사에게 대입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첫 사건 해결하자마자 스타 검사 타이틀! 대단하십니다.”
엄정한 법 집행을 계속해 나간다면 국민의 성원과 언론의 보호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런 사실이 특수부 검사에게 있어 어떠한 도움보다 큰 도움으로 느껴질 테고.
어떤 사건을 맡는다고 해도 여론은 박수를 쳐 줄 테니까.
“이 사건 하지 말자고 반대하던 게 누구더라∼”
“아이고…! 그때는 우리 검사님이 이렇게 대단한분인줄 모르고 제가 실례를 범했네요.”
“하하하하!”
능청맞게 말하는 정대필 수사관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단지 그의 행동이 웃겨서 나온 웃음은 아닐 것이다.
지금 나는 검사가 된 이후로 가장 보람찬 순간을 경험하고 있으니까.
이 순간을 즐기고 싶을 뿐이었다.
“좋다…….”
수많은 피해자들의 행복을 뺏은 우대현 회장.
다시 되찾아 피해자들에게 돌려주었다.
그게 맞는 것이니까.
감옥에 있는 우대현 회장은 미소를 잃었고, 피해자들은 미소를 되찾았다.
“뭐가요?”
“아닙니다. 그냥 날씨도… 기분도… 다 좋네요.”
그런 일을 내가 해냈다는 사실에 스스륵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이제 시작입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 저희도 앞으로 검사님 잘 보좌하겠습니다.”
비록 앞으로 해야 될, 그리고 바꿔야 될 게 산더미 같지만 시작은 꽤 훌륭하며 결과 또한 마음에 들었다.
“아! 그리고 KH 가맹점주 협회에서 검사님한테 이게 왔는데요.”
스윽.
정대필 수사관이 건넨 물건.
몇 백 개의 편지 봉투가 노끈에 묶여 있었다.
“모든 가맹점주들이 검사님한테 감사 편지를 작성해 보냈습니다.”
“아…….”
수천 개의 가맹점.
모든 점주들이 써내려 간 편지의 양은 읽는 데만 며칠이 걸릴 것처럼 많았다.
“…….”
뭐지?
분명 보람차고 뿌듯한 물건인데 왜 눈물이 흐르는지는 모르겠다.
“저… 검사님?”
“네!”
물론 눈이 아닌 마음속에서 흘러내린 눈물이었다.
“저희가 대신 읽어보고 특별한 일 없으면 보관하겠습니다.”
“아니요. 제가 직접 읽고 답장하겠습니다.”
“이 많은 걸요?”
“시간 날 때마다 짬짬이 읽어보죠, 뭐. 나중에 혹시 제가 흔들린다면 이 편지를 보며 다시 마음을 붙잡을 수도 있잖습니까.”
긴 싸움의 끝.
내가 얻은 전리품은 편지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건 폭행당한 피해자들이 보낸 선물입니다.”
“공무원은 업무에 있어 금품을…….”
“하하, 그런 거 아니니까 열어 보시죠.”
또다시 정대필 수사관이 건넨 큰 선물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다.
“이게 뭐…….”
[한국대 입학증]
[전세 계약서]
[병원비 영수증]
…
…
…
“꼭 보여주고 싶었나 봅니다. 검사님 덕분에 합의금을 받은 폭행 피해자들이…….”
“제가 착각했나 봅니다.”
“무슨 착각이요?”
나는 세상을 바꾼 것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떠들썩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잊히게 될 것이고 새로운 거악은 언제든지 탄생할 테니까 말이다.
다만… 몇몇 사람들의 인생을 바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몇몇 사람들의 인생을 바꾸다 보면 언젠간 세상도 바뀌게 되겠지.
“그냥… 너무 앞서간 거 같아서요.”
“우리 검사님 감수성이 이렇게 풍부한지 몰랐네.”
“그건 그렇고 우대현 회장 형집행장 발부되었습니다.”
검사의 또 다른 업무.
형의 집행.
재판에서 검사는 피고인에게 구형을 하며 판사는 선고를 하게 된다.
그리고 재판이 끝나 피고인의 형량이 확정될 때에는 검사가 형의 집행을 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말이다.
“끝까지 말썽이네, 그 양반.”
“그러게요.”
불구속 재판을 받은 우대현의 형이 확정되고 집행을 위하여 소환장을 보냈지만…….
결과는 알다시피 불응했다.
“그럼 데려오겠습니다.”
“아니요. 같이 가시죠.”
* * *
용산의 한 저택.
크고 아름다운 저택 앞에는 수많은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어? 한치우 검사다!”
내가 탄 차량이 멈추어서고 내 모습을 본 기자들은 어김없이 나에게 향했다.
“오늘 우대현 회장이 구속되는 겁니까?”
“공무집행 중이니 인터뷰는 차후에 하겠습니다.”
띵동―
몰려든 기자들을 뚫고. 정확히 말하자면 수사관들의 도움을 받아 우대현 회장의 저택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수갑은 채우지 않을 테니 편히 가시죠.”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나?”
며칠 동안 깍지 않은 듯한 수염.
염색이 되지 않아 티가 많이 나는 흰머리.
우대현 회장…….
아니, 이제는 그냥 절망 속에 빠진 노인의 모습이었다.
“형사소송법 제473조에 의거, 형의 집행을 위해 피고인 우대현 씨를 소환하였지만 불응하였고 형집행장을 발부받아 구인하겠습니다.”
힐끔.
법조문을 말하고 수사관에게 눈치를 주자 우대현 회장의 양팔이 포박되었다.
“길어야 3∼4년이야. 대선은 꽤 많은 돈이 필요하고 나는 그 돈을 충당해 줄 능력이 되지.”
사면을 대가로 건네는 불법 선거 자금.
선거 자금을 받은 후보가 청와대에 입성한다면 우대현 회장의 사면은 충분히 가능한 얘기이다.
“제가 그때까지 살아 있는 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자네가 그때까지 살아 있다고 장담할 수는 있나?”
“협박하시는 겁니까?”
“모르지.”
“하하,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네요.”
협박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지금 그가 향할 곳은 차디찬 교도소니까.
“데려가세요.”
질질…….
“나 우대현이야! 아직 안 끝났다고!”
어쩌면… 끌려가는 우대현 회장의 모습이 마지막이 아닐지도 모른다.
20년이라는 긴 형량이 그에게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두고 봐! 한치우 너 내가 반드시 끝장을 내 버릴 테니까!”
다만, 지금 우대현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 의미 없는 분노를 표출하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요. 20년 후에 봅시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내가 살아 있을 확률이 높으니까.
또 우대현이 만약 그때까지 목숨을 유지해 빛을 다시 보게 된다면 세상은 많이 변해 있을 테니까.
* * *
[서울 구치소.]
이번 사건을 끝으로 차가운 감옥에 들어간 것은 우대현 회장뿐만이 아니었다.
“한치우라고 합니다.”
신분을 말하고 싶지 않아 이름과 주민등록증을 건넸지만, 교도소 신원 조사 시스템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국가인재데이터베이스 등록 인물.]
[등록 이유: 서울 중앙 지검 특수부 검사]
“혹시… 검사님이세요?”
“네, 맞습니다.”
“방문 조사 오신 겁니까?”
“아니요. 검사가 아니라 한치우라는 개인 자격으로 온 겁니다.”
질질 끌려 교도소로 향한 우대현과 달리 제 발로 구치소에 들어온 한 남자.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왜 그런 선택을 한 건지.
“면회 대상자는요?”
“차정민입니다.”
그런 선택을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말이다.
끼익―
1평 남짓한 면회실로 걸어 들어오는 차정민.
“하하… 반가운 얼굴이네.”
분명 겉모습은 우대현 회장과 같이 초췌했는데 표정은 밝아 보였다.
“여기까지는 어쩐 일입니까. 우대현 회장 사건은 끝난 걸로 아는데 더 물어볼 게 있어요?”
우대현 회장에 변호인 자격에서 사임한 차정민은 자신이 우대현 회장을 위해 저지른 모든 범죄를 자백하고, 담당 검사의 만류에도 기어이 구속을 요청했다.
“우대현 회장 사건 때문에 방문한 게 아닙니다. 차정민 씨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온 거지.”
“하하, 나한테? 뭡니까 묻고 싶은 게.”
“자수하신 건 너무나 괜찮은 일이지만, 굳이 구속 수사를 받으시려는 이유가 뭡니까?”
“그냥… 흔들리기 싫어서요.”
모든 혐의와 증거를 순순히 검찰로 가져와 자수했고, 담당 검사는 당연히 구속 수사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자수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상당한 감형 요소가 되며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자수였으니까 말이다.
“협박까지 했다면서요. 구속 안 시키면 추가 증거들을 내놓지 않겠다고.”
“예, 뭐…….”
“하루아침에 이렇게 변하신 이유가 뭡니까?”
“뭐긴 당신 때문이지.”
“제가 가진 녹취록은 이미 깨끗이 삭제했습니다. 복사본 또한 없고요.”
차정민이 우대현 회장의 자료들을 가져왔을 때 말이다.
딱 그 정도면 차정민의 죄를 덮어 주려고 했으니까.
“목줄 때문에 자수한 게 아닙니다.”
“그럼 더 이상 충성할 주인이 없어서입니까?”
“아니요. 충성할 대상을 바꿔 보려고요.”
“충성할 대상을 바꾸다니요?”
스스로 자신의 몸을 구속시켰지만, 차정민에게 실형이 떨어질 확률은 극히 낮을 것이다.
그가 한 모든 범죄는 우대현 회장의 변호사 직에서 수행한 것이며 자수를 한 점과 우대현 회장의 사건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는 점.
거기에 여론 또한 차정민을 어느 정도 용서하고 옹호해 주었기 때문이다.
“변호사협회 징계는 피할 수 없겠지만, 제명이 되지 않는다면 인권변호사를 해 볼 생각입니다.”
“그건 돈이 안 될 텐데요.”
“이제 돈은 필요 없습니다. 지금껏 KH 그룹에서 받은 모든 돈을 인권 변호를 위해 쓸 겁니다.”
“…….”
검사에 구형량과 재판부의 판단을 예상해 보았을 때 집행유예가 선고될 가능성이 크고, 그렇게 된다면 차정민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 계획이 꼭 이루어지길 바라기도 하지만…….
“참 다르네요.”
“뭐가요?”
“한 명은 죄를 인정하지 않고, 다른 한 명은 자신의 잘못을 뼈저리게 반성한다는 점이요.”
“하하, 다행이네요. 저는 반성하는 쪽이라…….”
굴복.
차정민이 느낀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차정민의 계획이 잘 지켜질 거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스스로 감옥에 들어오긴 했다.
하지만 다시 자유의 몸이 되고 자신을 옥죄고 있던 모든 게 사라진다면 지금의 결의가 어떻게 바뀔지는 모를 테니까.
말했듯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스윽.
멋쩍은 웃음을 보이는 차정민을 뒤로한 채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네, 고마웠어요. 한 검사, 나를 변하게 해 줘서.”
“아니요. 제가 고맙습니다. 변해 주셔서.”
그리고 면회실 문을 반쯤 연 채 뒤돌아 차정민을 바라본다.
“선배님.”
구치소 안으로 들어가는 차정민 역시 뒤돌아 미소를 보냈다.
피식.
“다음에는 후배로서 술 한잔 사겠습니다.”
쾅.
그렇게 차정민이 들어가고 나 역시 구치소를 나왔다.
그리고 내 첫 사건은 이렇게 끝이 난 것 같았다.
“오늘 따라 유난히 하늘이 맑네.”
맑은 하늘 아래 구치소라는 어둠 속에 갇힌 차정민.
또 교도소에 갇힌 우대현.
기소와 형 집행을 하는 검사로서 부디 두 사람의 교화가 완벽히 이루어지길 바랐다.
하나 며칠 뒤 케이블 채널 경제뉴스를 보고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 청아 그룹 신임 법무 이사에 차정민 변호사가…….
* * *
KH 사건이 끝나고 나는 이틀간의 포상 휴가를 받을 수 있었다.
“휴… 주말 쉬게 해 주는 게 무슨 대단한 것처럼 말을 하네.”
박현주 부장의 배려 아닌 배려로 나는 토요일 점심을 집에서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랜만에 어머니가 끓여 준 된장찌개를 먹을 수 있겠네.”
다 뜯어진 벽지와 수압이 약해 물을 받아 놓고 씻어야 하는 단칸방이 아닌, 어머니가 있는 진짜 내 집에서 말이다.
“맛있겠다…….”
“아니, 형은 도대체 왜 따라오는 거야?”
“야, 한치우. 나도 너희 어머니랑 친하거든.”
“그게 무슨 상관인데.”
좋다고 해야 할지 싫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버스 옆자리에는 서윤호가 앉아 있었다.
“형은 부모님 뵈러 안 가?”
“우리 집은 멀잖아.”
“우리 집도 가깝지는 않아, 형.”
“그래도 경기도잖아.”
서윤호와 아웅다웅 하는 사이 어느덧 창밖에는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내가 다니던 학교.
자주 가던 마트.
매일매일 걷던 뚝방길까지.
고등학생이던 한치우는 특수부 검사가 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하하, 저거 뭐냐?”
“뭐가…….”
[신선청과 김정숙 여사 아들, 한치우! 특수부 검사 발령!]
“이 정도면 마을 잔치라도 열어야 되는 거 아니냐?”
“저게 뭐야…….”
“뭐긴 개천에서 용 났다는 증거지.”
마을 입구에 걸린 대형 현수막.
크기가 얼마나 큰지 마을 입구에 비치는 햇빛을 가릴 정도였다.
“어머니가 했을 리는 없을 텐데…….”
현수막을 단 사람이 누구인지는 마을 입구를 지나 작은 현수막을 보고야 알게 되었다.
[가문국밥 진철민 사장 양아들 한치우 KH 그룹 사건 해결!]
“하하하하! 치우야 네가 해결한 사건들 앞으로 이 마을에 다 걸리는 거 아니냐?”
“아니 뭐 저런 것까지…….”
“치우 너 온다고 미리 말했으면 진짜로 마을 잔치 열었겠네.”
경기도 외곽의 작은 마을에서 특수부 검사가 배출됐다는 소식은 꽤 이슈가 될 만했다.
“내릴 준비하자.”
삐익―
목적지에 다다른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벨을 눌렀다.
사고 후 몇 달간 병원에 누워 있던 나와 또 몇 달간 나를 보살핀 어머니.
나는 누워 있을 뿐이었지만 힘겹게 차린 어머니의 가게와 야채는 썩어문드러져 갔다.
의식이 돌아온 검사 한치우는 첫 사건을 맡아 훌륭히 해결했고,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하나 바쁜 나날을 보낸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나를 보살피느라 멈추어 버린 가게를 어머니는 다시 살려야 했으니까 말이다.
“이런 전통 시장은 진짜 오랜만에 와 보네.”
“집은 나중에 구경시켜 줄게 어머니 먼저 뵙고.”
“그래그래. 나도 어머니한테 먼저 인사드리는 게 좋지.”
그래도 다행인 건 가문국밥 사장님이 멈추어 버린 어머니 가게를 간간히 들여다보았고, 오랜 기간 야채를 공급받지 못한 거래처들은 어머니를 끝까지 기다려 주었다.
“아, 맞다! 기다려 봐 치우야.”
“형 어디가!”
“빈손으로 갈 수는 없잖아.”
다시 돌아온 서윤호의 손에는 어이가 없게도 과일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형… 우리 어머니 가게 야채랑 과일 팔아…….”
“아…….”
“하하, 됐어. 물건이 중요한가? 마음이 중요하지. 그래도 고마워.”
서윤호의 마음이 담긴 과일 바구니와 두 명의 검사.
정장을 곱게 차려입은 두 검사는 시장 안으로 향했다.
“어머, 신선청과 김 여사 아들내미 아니야?”
“맞네! 맞아!”
권위적이거나 꽤 성공한 인생을 티내고 싶지 않았다.
“아주 빛이 나네 그려.”
하지만 우리의 방문에 모든 시장 상인들은 일을 멈추고 한마디씩 건넸다.
“치우야∼ 아주머니 알지? 엄마 노점하실 때부터 같이 커피 마시고 그랬잖어.”
“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기억난다.
노점에 쪼그려 앉아 야채를 파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보기 싫었고 창피했다.
철없던 과거에 한치우 눈에는 말이다.
꼬깃한 돈을 받고는 시장을 나올 때마다 어머니 옆에 계시던 아주머니.
작은 떡집을 하시는 분이다.
“그렇게 엄마 울리더니 이렇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어 버렸네.”
“하하… 아닙니다.”
“방금 찐 인절미야 좀 먹고 가.”
“그러지 마시고 만 원 어치만 주세요, 아주머니.”
“됐어∼ 팔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아니요. 제가 사 먹고 싶어서요.”
코끝을 찌르는 고소한 냄새 때문만은 아니었다.
울고 계시던 어머니 옆을 지켜 주고 심심치 않은 위로를 건네던 아주머니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었을 뿐이지.
“죄송해요. 먹을 사람이 별로 없어서 많이 못 사네요.”
작게나마 말이다.
톡톡.
“치우야. 너 이 동네에서 국회의원 출마하면 무조건 당선될 것 같은데?”
옆에서 나와 아주머니를 지켜보던 서유호가 귓속말로 말했다.
“형이나 출마해 봐. 말 많은 걸로 따지면 국회의원보다 형이 더 나은 것 같은데.”
“됐다. 정치에는 관심 없어.”
“나도 마찬가지야. 우리는 정치보다 법을 어기는 정치인에게 관심을 기울여야지.”
탁! 탁! 탁!
우리에 대화 속 아주머니는 큰 칼로 떡을 썰었고, 넉넉히 뿌려진 콩가루가 흩어지자 고소한 냄새는 더욱 강하게 풍겨왔다.
“자! 뜨끈할 때 먹어.”
“잘 먹을게요, 아주머니.”
“그래 얼른 가 봐. 어머니 기다리시겠다.”
“아직 모르세요. 저 오는 거.”
“호호, 그럼 더 좋아하시겠네.”
따끈한 인절미가 담긴 검은 봉지를 받아든 채 우리는 어머니의 가게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아따! 검사 양반 엄마 보러 왔나 보네.”
짧은 거리였지만 평소보다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시장 안 모든 상인들의 넉담과 격려, 그리고 부러움을 거쳐야 했으니까.
“저기야!”
“가게가 되게 깨끗하네.”
“위에 흥신소 사장이 가끔씩 대청소해 주거든.”
“무슨 말이야 그게.”
“하하, 그런 게 있어.”
[오케이 흥신소.]
어머니에 가게 위층에 있는 흥신소.
서윤호는 모를 것이다.
건물주이자 사장인 박민호와 나와의 깊은 인연을 말이다.
“저기 나오네.”
“잉?”
꽃무니 셔츠와 간간히 보이는 문신.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기어이 밀어 버렸는지 어머니 야채 가게 조명이 민머리에 강하게 반사되었다.
“아는 사람이야?”
“응, 잘 알지.”
다만, 그런 모습 때문에 서윤호의 당황스러움은 더욱 커졌다.
누가 봐도 양아치 같은 박민호가 웃으며 어머니에게 건넬 음료수를 들고 어지럽혀진 파뿌리를 정리하고 있었으니까.
보통 사람의 머릿속에서 박민호 같은 인간은 정리가 아니라 행패를 부리기 마련인데 말이다.
“어! 검사님?”
“하하, 제발 그 양아치 같은 패션 좀 바꾸면 안 돼요?”
“이거 우리 작업복입니다, 검사님.”
그동안 간간히 박민호의 소식을 들어왔다.
은행보다 싼 이자로 시장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 주었고, 흥신소 간판을 달고 시장 상인들의 심부름꾼 노릇을 했다.
물론 무료로 한 건 아니었지만, 시장상인들은 어떤 심부름도 완벽히 해내는 박민호를 찾았다.
그렇게 합법적이고 뿌듯하게 번 돈은 박민호를 변하게끔 만들었다.
“아주매∼ 아들내미 왔어요.”
“무슨 소리야? 우리 치우가 왔다고?”
“그렇다니까!”
박민호의 외침에 안에 있던 어머니가 나왔고, 왠지 모르게 내 가슴은 턱하고 막혀왔다.
분명 지금의 나는 너무나 행복하고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인데 왜 그런 감정이 드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머니.
이름만 들어도 가만히 바라만 보아도…….
내 감정이 어떤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이다.
“아이고! 우리 아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야!”
“주말이고 해서 왔어요.”
사고 후 내 병실을 매일같이 지키던 어머니와 서윤호.
두 사람은 내가 모르는 사이 꽤 가까워졌다.
“엄마! 두 번째 아들도 왔습니다.”
“어머! 윤호도 왔네.”
자신을 아들이라 부를 만큼 말이다.
“그런데 두 번째 아들이 엄마 가게에 과일을 사 가지고 왔네?”
“그게…….”
“하하하, 장난이야. 밥 안 먹었지? 가문국밥으로 가 있어. 엄마도 금방 갈게.”
당황하는 서윤호에 과일 바구니를 받아든 어머니는 호탕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민호야∼ 가게 좀 잠깐 보고 있어.”
“네! 가게는 세 번째 아들이 보고 있겠습니다.”
“아이고! 이렇게 듬직한 아들들이 있어 엄마 기분이 좋네.”
어머니를 보며 능청스레 말하는 박민호.
다행이다.
어머니 곁을 지켜 주는 사람이 많아서.
“가자, 형. 국밥집 맛있는 데 있어.”
“나도 알아, 가문국밥.”
“형이 어떻게 알아?”
“왜 몰라. 내 새 아빠 되실 분인데.”
“아니… 나 누워 있을 때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우리 동생은 몰라도 돼.”
그래.
나는 지금 너무나 행복하다.
건강한 어머니와 동기이자 때로는 친형 같은 서윤호가 함께 있어서 말이다.
“참, 그런 사람이 어머니 야채 가게 하는 건 왜 몰랐데?”
“…까먹고 있던 거야.”
“핑계는.”
[가문국밥]
굳이 간판을 보지 않아도.
길을 모르고 있다 하여도.
가문국밥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맛있는 국밥 냄새가 훌륭한 내비게이션이 되어 주었으니까.
“와∼ 냄새 죽인다, 진짜.”
“아들이 되어서 엄마 가게는 뭔지도 모르고 새 아빠가 만든 국밥은 먹어 보지도 못했나 보네.”
“그만해라. 동생아 철없는 형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면.”
“와! 검사가 사람 치려 하네.”
꽉 지어진 주먹을 보이며 장난치는 서윤호.
“어이! 초등학생 검사 양반들 얼른 들어오세요.”
그 모습을 본 가문국밥 사장님이 문을 열고 나와 말한다.
꾸벅.
“안녕하세요, 아저씨.”
“안녕하세요, 아버지.”
힐끔.
가문국밥 사장님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 우리는 고개를 들고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내가 해야 될 호칭과 서윤호가 해야 할 호칭이 바뀐 것 같아서 말이다.
“아니 형… 적당히 해.”
“너나 아버지라고 불러.”
사실… 어색했다.
이미 서류상으로까지 부부가 된 어머니와 가문국밥 아저씨.
처음 혼인신고를 한 사실을 어머니가 알려왔을 때 속으로 기뻤고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하나… 아직 아버지란 말이 쉽게 나오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 윤호 장난기는 여전하네.”
“윤호 형을 어떻게 아세요?”
“어떻게 알긴. 치우 네 병실 찾아갈 때마다 있었는데 모를 리가 있나.”
“아…….”
하여튼…….
미워하려고 해야 미워할 수가 없는 사람이다.
아니, 어쩌면 서윤호의 이런 모습이 나를 끌리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니까 이 형한테 잘해라. 하루에 두 시간도 못자고 매일 병실에 찾아갔으니까.”
“아, 예∼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형님.”
“그렇지. 앞으로 그런 공손한 태도 유지하기를 바란다.”
피식.
어린아이처럼 유치한 모습을 본 가문국밥 사장님은 주방으로 돌아가 국밥을 만들었고 우리는 빈 테이블에 앉았다.
“술 한잔 할까?”
“좋지!”
쪼르륵.
빈 술잔에 술이 따라지고, 빈 의자 역시 어머니와 가문국밥 사장님… 아니, 어머니와 아버지로 인하여 채워졌다.
“아니! 그때 형이 치킨 값 낸다고 해서 시킨 거 아니야!”
“내가 언제 그랬어!”
싸우는 나와 서윤호를 바라보는 어머니와 아버지.
“그만들하고 밥 먹어 이것들아!”
“사람들이 알아야 되는데. KH 그룹 사건 해결하고 뉴스에 나온 검사가 초등학생처럼 형이랑 싸운다고 말이야…….”
혀끝을 차시며 한마디씩 하셨다.
짠!
“그건 그렇고 연수원 수료식 때 못가서 미안하구나, 치우야. 둘 중에 한 명은 어머니 가게랑 국밥집 지켜야 해서 말이야. 그렇다고 어머니 대신 내가 갈 수는 없잖아.”
“하하! 아니에요. 그리고 감사해요. 저 대신 어머니 지켜 주셔서.”
“너 대신이 아니라 내가 사랑해서 지키는 거야.”
“…….”
살면서 누구나 겪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어떤 한마디가 모두의 말문을 막아 버리는 경험을.
“으… 오글거려.”
“하하하.”
다행히 서윤호의 재치로 어색해진 분위기는 되살아났다.
“아! 이따가 성훈이도 온다고 그랬는데.”
휴대폰을 보시던 어머니가 말했다.
“진짜요? 요즘 성훈산업 장난 아니게 바쁘다고 들었는데.”
사실 나도 성훈이가 보고 싶었지만, 따로 연락을 하지는 않았다.
연일 뉴스에서 보도되는 성훈산업 중심에 있는 성훈이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성훈이는 이 동네에 살지 않았고, 주말 동안의 짧은 방문에 나를 찾아오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성훈이 아버지가 좋아하셔서 내가 성훈이한테 매달 버섯 보내 주거든. 그것 때문에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너 왔다고 하니까 지금 온다더라.”
“잘됐네요. 윤호 형 한 번 소개시켜 주고 싶었는데.”
얼마나 바라던 일인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화목한 식탁에서 맛있는 밥을 먹는 일.
여유로운 주말에 술잔을 기울이는 일까지.
모든 게 원하던 일이다.
“아버지가 건배사 한 번 해요!”
“하하, 그럴까 그럼?”
행복하다.
더 나은 표현은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을 표현할 단어로 말이다.
“우리 두 아들들 건강하고 좋은 검사가 될 수 있게 해 주시고 내가 사랑하는 김정숙 여사도 건강하고 오래 살게 해 주세요!”
“아버지 그건 건배사가 아니라…….”
톡톡.
“됐어. 그냥 해.”
투덜거리는 서윤호의 팔을 치며 입을 막았다.
건배사든 아니든 아버지의 말이 꼭 이루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건배!”
* * *
월요일 아침.
짧게 느껴진 주말이 지나고 나는 다시 중앙 지검행 버스에 올랐다.
“휴…….”
한숨이 나오는 건 당연했다.
손잡이조차 잡을 수 없이 꽉 찬 버스 안에서 한숨을 쉬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으니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긋지긋한 일주일의 시작.
바로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걸.
오랜만에 다녀온 고향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물론 사람들만 기억되는 것은 아니였다.
학창 시절에 추억이 담긴 모든 곳이 머릿속에 생생했으니까 말이다.
매일 걷던 뚝방길.
이제는 작아져 입지 못하는 옷들이 있는 고향 집.
추억의 냄새가 풍겨오는 전통 시장.
한동안 보지 못할 걸 알기에 두 눈으로 담아왔다.
“아침을 너무 많이 먹었나. 졸리네.”
부모님은 도저히 버스를 타지 못할 만큼 많은 반찬들을 내 손에 쥐어 주셨고 성훈이와는 일요일 하루를 버려야 될 만큼 많은 술을 마셨다.
“어? 윤호 형이네.”
중앙 지검에 다다르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머리를 감지 못했는지 산발이 된 상태로 중앙 지검으로 걸어가는 서윤호.
서윤호 역시 나와 성훈이의 술자리에 있었고 꼴을 보아하니 아직까지 숙취가 가시지 않은 듯했다.
“형.”
“어…….”
“괜찮아?”
“아니… 숨만 쉬어도 술 냄새가 나는 것 같아… 그리고 그 술 냄새에 다시 취하는 것 같고…….”
그와 함께한 사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 있다.
서윤호가 꽤 기분파라는 걸.
성훈이의 성격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의형제를 맺고 싶다는 헛소리를 하면서 병나발을 불었으니…….
“아… 병가 낼까. 술병도 어떻게 보면 병인데.”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좀비처럼 지검 안으로 들어가는 서윤호의 상태가 말이다.
“응. 2년 뒤에 바닷가로 가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하…….”
뭐가 됐든 새로운 일주일이 시작되었고, 지검은 평소보다 북적거렸다.
검사들이야 주말 없이 일을 한다지만 각종 민원과 고소는 주말 동안 쌓여 있으니 월요일 아침에 물밀 듯이 밀려들어 오는 것이다.
“이따 봐, 형.”
“그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같은 층에 내린 서윤호와 나는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걸었다.
같은 특수부라 하여도 방을 같은 쓰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만나겠지만…….
“좋은 아침입니다!”
“하하, 검사님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
“오랜만에 고향에 다녀왔거든요. 두 분은 잘 쉬셨어요?”
“네. 저도 오랜만에 가족들이랑 외식하고 근교로 놀러가고 했네요.”
오랜만에 보낸 주말 휴식에 쌓인 스트레스가 풀린 건 나만이 아니었다.
정대필 수사관 역시 가정이 있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게 행복한 건 마찬가지였다.
“실무관님은요?”
“저야 신혼이잖아요. 집에만 있기에도 바빠요, 호호.”
입을 가리며 웃는 한미래.
“쉿! 됐습니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네요.”
새로운 가족이 생긴 그녀 역시 꽤 즐거운 주말을 보낸 것 같았다.
“하하하! 검사님 표정은 왜 그러신데.”
“아닙니다. 회의 다녀오겠습니다.”
“엄청 부러워하던 얼굴이던데?”
“그럴 리가요, 하하.”
쾅.
머뭇거리다가는 내 거짓말이 티가 날 것 같아 서둘러 검사실을 나왔다.
“연애를 할 시간이 있어야지…….”
방 식구들과 짧은 담소를 마치고 나는 부장검사실로 향했다.
매일 아침 하는 회의를 위해서 말이다.
평소에는 지긋지긋했지만, 오늘만큼은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준 것 같았다.
똑똑.
“들어와.”
평소보다 일찍 온 탓에 부장검사실은 박현주 부장밖에 보이지 않았다.
“일찍 왔네, 한 프로.”
검사는 매일 아침 회의를 통해 이전 날에 중요 상황을 보고하며 새로 해야 할 일을 지시받는다.
“그래 앉아. 가장 먼저 온 상으로 내가 직접 커피를 타 주지.”
또 퇴근 시간 전에 다시 한번 회의를 한다.
형사부 검사들은 새로운 10건 정도의 사건을 배당받고 특수부 검사들은 어떤 사건을 맡을지 큰 가닥을 잡기 위해서 말이다.
“감사합니다.”
“그래. 첫 사건 해결한 기분이 어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가 내 앞에 놓이고 박현주 부장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나를 보며 말한다.
“많은 걸 깨달았습니다.”
일일이 말하기에는 너무 많을 정도로 이번 사건을 통해 많은 걸 깨달았다.
특수부 검사인 내가 한 행동으로 인해 세상이 변했고, 또 몇몇 사람들의 인생 또한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과 그런 사실을 통해 나는 조금 성장했다는 것까지.
“기분이 어때?”
“네?”
“네 손으로 직접 거악을 쓰러트린 기분이 말이야.”
“아…….”
말해 뭐 하겠는가.
검사라는 직업에서 느낄 수 있는 뿌듯함 중에 최고인데.
“하하, 반응이 시원찮네? 초임 검사가 그런 엄청난 일을 해 놓고서.”
그럼에도 쉽게 티를 내지 못했다.
뿌듯함 뒤에 따라온 뭔지 모를 씁쓸함 때문에 말이다.
“아닙니다… 좋습니다.”
“그 기분 나도 알지.”
“네?”
그 씁쓸함이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 내릴 수는 없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더 깊이 들어갔을 테니까.”
그리고 그 정의는 박현주 부장 말에 정의될 수 있었다.
“깊은 곳에서 보다보면 추악하고 더러운 진실이 보이니까 말이야.”
맞다.
이미 겪어본 사실.
우대현 회장을 집어넣기 위해 법이 정한 올바른 수사만 하지 않았으니까.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우대현 회장은 아마 교도소가 아니라 화려한 저택에 앉아 비싼 위스키를 마시며 검찰을 비웃고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부디 한 프로는 그 진실에 융화되지 않았으면 좋겠네.”
“걱정 마십시오.”
섣부른 다짐이 아니다.
변하지 않을 자신도 있다.
“하하, 너무 꼰데 같았나?”
“아닙니다. 부장님은…….”
“나는 어떻게 융화되지 않고 버텼냐고?”
곤란한 질문에 말끝을 흐렸지만, 박현주 부장은 내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질문 자체가 웃기다고 생각 안 하나? 그게 당연한 건데 당연한 걸 했다고 대단하단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게 말이야.”
박현주 부장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그 역시 섣부른 다짐이 아니었고, 변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유혹이 많을 수밖에 없는 특수부.
10년 넘게 특수통으로 생활하면서 박현주 부장에게 청렴은 그저 당연한 것이었다.
“부패하지 않았다고 대단한 게 아니야. 당연한 거지.”
“부장님 말씀이 맞네요.”
“괜히 일찍 와서 이제 첫 사건 해결한 초임 검사가 부장한테 꼰대 같은 소리나 듣고 미안하네. 하하.”
“아닙니다.”
똑똑.
박현주 부장의 말과 함께 들려오는 노크소리.
가슴 깊이 새겨진 박현주 부장에 말을 다시 한번 조용히 되뇌고 싶었지만, 어느덧 빈 회의실은 가득 차 버렸다.
“자! 새로운 일주일 힘차게 시작해 보자고.”
“네!”
회의 내용에는 딱히 특별한 것이 없었다.
더군다나 큰 사건을 해결한 초임 검사를 배려라도 해주려는 듯 박현주 부장은 나에게 업무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할 거 없으면 한 프로는 광수대 좀 다녀와.”
“광수대요?”
“어. 서울청 광역수사대 대장이 특수부 미팅 요청해 왔거든. 어디보자…….”
손목을 흔들며 시계를 확인하는 박현주.
“지금 출발하면 되겠다.”
그의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오겠습니다.”
* * *
검찰청에 특수부가 있다면 경찰에는 광수대가 있다.
하는 일 역시 비슷하다.
관할이 다른 두 지역에서 일어나는 광역 사건과 사회적 관심도가 큰 사건.
중요 사건의 첩보수집 및 인지수사와 기획수사.
그밖에도 지방경찰청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범죄 수사.
모든 면에서 말이다.
그렇기에 같은 일을 하는 특수부와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서울 지방경찰청]
중앙 지검이 검찰의 칼날이듯 경찰 역시 서울 지방청이 가장 굵직한 사건을 맡는다.
그렇기에 대한민국 모든 지방청에는 광역수사대가 있지만 서울 지방청이 가장 규모가 크고, 맡는 사건 또한 사회적 관심도가 높은 사건을 주로 맡을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정재계, 혹은 전국구 조폭들이 모여 있는 곳은 서울이니까 말이다.
“광수대가 몇 층이죠?”
“3층입니다.”
“감사합니다.”
또한 광수대는 관할서장 지시가 아니라 지방경찰청장의 지휘를 직접 받는다.
특수부가 지검장 지시하에 움직이는 칼날인 것처럼 말이다.
똑똑.
“네∼”
“중앙 지검 특수부 한치우 검사입니다.”
“아! 네, 들어오시죠.”
그리고 사실 밀접한 관계라고는 하지만, 한 지붕 아래 있는 경찰과 검찰은 가끔 불편한 관계를 보이기도 한다.
형사소송법 제196조 1항.
수사관과 경무관부터 경위까지는 사법경찰관으로서 모든 수사에 있어 검사의 지휘를 받는다.
서울지방청 광수대 대장의 계급은 총경.
법적으로 검사의 지휘를 받는 대상이지만, 광수대는 치안정감인 서울 지방경찰청장의 직속 기관이다.
복잡한가?
쉽게 생각하면 된다.
서울 중앙 지검장과 서울 지방경철청장.
한 사건을 수사함에 있어 누구의 파워가 더 셀 것 같은지.
경찰이 아무리 불편한 내색을 한다지만, 결국 수사 지휘는 검찰이 하게 되어 있다.
훗날 검찰과 경찰이 수사권 조종으로 심각한 대립을 보이기도 하는 이유다.
“반갑습니다. 서울 지방청 광역수사대 대장 남영훈이라고 합니다.”
“네. 중앙 지검 특수부 한치우 검사입니다.”
“앉으시죠.”
곱게 정복을 차려입은 남영훈.
미팅을 위해서인지 평소 그의 성격인지는 모르겠다.
“어?! 혹시… KH 그룹 사건 담당 검사님 아니세요?”
“네, 맞습니다.”
뉴스를 자주 보는 직종의 공무원들.
브라운관 속 내 얼굴이 익숙할 수밖에 없다.
“미팅을 요청하셨다고?”
“네. 아무래도 광수대가 맡기에는 사이즈가 제법 되는 사건이라서요.”
“무슨 사건이죠.”
“잠시만요.”
스윽.
[온라인 불법 도박 사이트 수사건.]
자신의 집무 테이블로 향한 남영훈이 얇은 서류 하나를 가져와 내밀었다.
“요즘 스마트폰이 생기고 온라인 불법 도박 규모가 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2011년.
전 국민이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2020년과는 다르지만 수요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시대였다.
그렇게 새로운 시장과 새로운 문화가 생기면 반드시 뒤따라오는 것이 있다.
신종 범죄.
물론 불법 도박이 신종 범죄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언제 어디서든 휴대폰으로 도박을 할 수 있다는 편리함이 범죄의 규모를 키웠다.
“상반기 온라인 불법 도박 시장 규모만 40조 원 가까이 됩니다. 물론 계속 늘어날 것이고 뿌리를 뽑을 수는 없겠지만…….”
“가지치기를 한 번 하자는 말씀이시군요.”
“네, 맞습니다.”
“흠…….”
보통은 경찰에서 수사를 인지하고 검찰로 올려 보내 결재를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남영훈 대장은 정 반대의 계획을 짰다.
“어차피… 저희가 계획을 짜고 수사해 봤자 특수부에서 지휘통지서 보내면 처음부터 다시 짜야 하지 않습니까. 애초에 수사 계획서를 내려보내 주심이…….”
“그런데 이 사건은 특수부보다는 경제부 쪽이 사건을 맡는 게 더 맞을 듯싶은데요.”
사실 그렇게 구미가 당기지는 않았다.
“그게…….”
하나 남영훈 대장의 한마디는 떨어진 내 입맛을 확 살아나게 하였다.
“도박 자금들이 정치계 쪽으로 흘러들어 간 증거가 있습니다.”
* * *
돈과 정치인.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40조 원이었던 온라인 불법 도박의 규모는 향후 100조 원까지 커진다.
또 불법 도박 특징상 이용자가 송금하는 돈은 대포 통장 혹은 법인 통장을 통해 세탁 과정이 이루어진다.
이후, 해외에 거주하며 서버를 관리하는 운영자의 저택에는 현금 다발이 쌓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현금 다발은 정치인들의 더러운 정치 비자금으로 쓰이게 된다. 단속을 하는 경찰이 아니라 국회의원에게 뇌물을 바치는 이유는 간단하다.
경찰이 아니라 법이 바뀌어야 하니까.
사행성 게임을 단속하는 사감위든 경찰 관련 법안을 만드는 행안위든 결국 국회의원들이 움직여야 하니까 말이다.
대한민국에 합법적인 사행 산업.
토토와 경륜, 경마 등에 총 매출이 불과 20조 원밖에 되지 않는다.
반면…….
“앞으로 온라인 불법 도박의 규모는 경찰이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릴 겁니다.”
“네, 맞습니다. 역시 정확히 알고 계시네요, 검사님. 막을 수도 없습니다. 법이 바뀐다면 모를까…….”
100조 원짜리 불법 도박 시장에서 실제로 경찰 수사가 의뢰된 것은 불과 서른 건도 되지 않는다.
어차피 불법이고 경찰이 잡는 거지만, 법을 바꿔야 된다는 소리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인력 수사 기법, 해외 수사 당국과의 협조, 모든 게 부족하며 처벌이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다만, 정부도 사태가 심각해지자 대대적인 단속에 나섰지만, 문을 닫는 사이트보다 새로 생기는 사이트의 수가 더 많았다.
이름만 바꿔서 새로 오픈하면 되니까.
아무런 제약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단속으로 문을 닫고 징역살이를 한다고 해도 해외 땅속에 묻어 놓은 현금 다발을 어떻게 추징한단 말인가.
전과자는 몇 십 억 원의 추징금 딱지를 받고 황제 같은 삶을 살겠지.
과연 사이트 운영자들이 현재 대한민국의 법을 무서워하기나 할까?
아니, 비웃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검찰에 도움을 청하시는 거군요.”
“그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특수부가 대대적으로 수사를 한다는 게 알려지면 여론도 움직일 수 있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남영훈이 내 눈치를 살피며 말한다.
그러자 그의 속마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단속이 까다로운 불법 도박 사이트를 검찰의 힘을 빌려 처리함과 동시에 여론에 광수대와 경찰에 위상을 드높이고 싶은 것이다.
“아무리 불편하다지만 결국 경찰과 검찰은 한 식구 아닙니까. 하하.”
그의 목적이 빤히 보이기는 했지만 과정이 마음에 들었다.
특수부에 들어온다면 한 번쯤은 건드려 보고 싶은 이슈였으니까 말이다.
“좋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약속이 필요합니다.”
“무슨 약속이요?”
“경찰이 첩보한 자료 전부 저한테 넘겨주십시오.”
“그거야 당연히…….”
아니.
당연히 넘겨주겠다는 남영훈의 말은 거짓일 확률이 높다.
지금껏 파악한 혐의점을 넘겨줄 뿐 검거에 결정적으로 필요한 기밀 자료들은 넘겨주지 않을 테니까.
그래야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들이 여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죽 쒀서 검찰 수사관들에게 갖다 바치는 꼴을 도저히 볼 수 없을 것이다.
스윽.
남영훈이 건넨 또 다른 자료.
[불법 도박 사이트 사건 비자금 증거 자료]
꽤 흥미로운 제목의 서류였지만, 섣불리 열어보지는 않았다.
“‘당연히’는 없습니다. 청장님 뜻을 제가 모를 것 같습니까.”
남영훈을 쳐다보며 확인하고 싶던 게 있으니까.
“무슨 뜻이요?”
채현우.
서울 지방경찰청장.
나는 이 남자의 최종 목적지를 알고 있다.
왜?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와 내 고향집이 있는 지역구의 국회의원이었으니까.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앞으로 말이다.
그렇다고 부패하거나 비리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꽤 훌륭한 분이시죠. 순경 출신으로 치안정감까지 올라간 전설적인 인물.”
“네, 맞습니다.”
“엄청난 실적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죠.”
그런데 지금은 내 생각이 맞다고 확신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스르륵.
대화를 하며 남영훈이 건넨 서류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역시나…….
“그런데 참 이상하네요. 총선 앞두고 정치인들을 건든다… 그것도 야당 정치인들만을 골라서?”
“그건… 아직 저희가 파악한 게 그 정도뿐입니다.”
“혹은 이 정도만 파악한 것일 수도 있죠.”
검찰의 힘을 빌려 광수대와 경찰의 위상을 드높인다.
그리고…….
“공천권을 대가로 말이죠. 그리고 제가 알기로 대장님은 곧 경무관으로 승진하는 걸로 아는데요.”
그렇게 채현우는 정계로 발걸음을 옮기고 남영훈은 차장을 거쳐 몇 년후 새로운 서울지방경찰청장 자리에 앉게 된다.
“상상력이 지나치시군요, 검사님.”
과연.
빈틈없이 잘 짜여진 이 시나리오가 우연일까?
“좋습니다. 제 상상력이라 치고. 수사 지휘서 보내겠습니다.”
“네, 뭐…….”
“다만, 경찰이 올려 보낸 서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제 상상력이 자극될 수도 있다는 점은 알아 두십시오.”
일단은 건드려 보자.
경찰에 뜻대로만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다.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앞으로의 미래에서 미심쩍은 경찰의 행동이 걸린다면 말이다.
“다시 찾아뵙죠.”
* * *
똑똑.
지검으로 돌아온 뒤 나는 곧바로 부장검사실로 향했다.
“들어와.”
이 사건이 꽤 흥미로웠고 본격적인 수사를 진행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잘 다녀왔나?”
“네. 그리고 부장님…….”
“알아. 한 프로가 무슨 말할지.”
뭐야.
광수대 대장이 무슨 말할지 다 알고 보낸 거야?
“혹시…….”
“그래. 다 알고 있었어. 한 프로 네가 관심을 보일 거라는 것까지.”
“하하…….”
그런데 굳이 왜 숨긴 거지?
어? 설마…….
“혹시 지검장님 직보 사건입니까?”
“뭐야, 너 어떻게 알았어?”
박 부장님…….
여우인줄 알았는데 완전 곰이네.
“한 가지만 여쭈어보겠습니다.”
“그래 말해 봐.”
“혹시 지검장님과 채현우 청장님과 무슨 관계인지 아십니까?”
“서로 친하지. 동향에다가 같은 대학에 같은 과였는데.”
그렇다.
지금 채현우 청장과 유대명 지검장은 총선을 앞두고 반대 세력들을 쳐내려는 것이다.
유대명은 박현주 특수 1부 부장한테 그 임무를 맡긴 것이고.
하나. 유대명이 예상하지 못한 게 있다.
그 사건을 한치우가 맡게 될 거라는 걸.
물론 걱정은 하고 있었을 것이다.
속내를 비추며 박현주 부장에게 지시할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도 설마 박현주 부장이 초임 검사인 나에게 이 사건을 맡길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건 왜 묻나?”
“…아닙니다.”
“오히려 잘됐잖아. 수사 결정권자들이 친한 사이라서 말이야.”
아니요, 부장님.
지금 그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럼 저한테 이번 사건을 맡기시는 이유가 뭐죠?”
“내가 한 프로가 마음에 들어서 말이야. 그리고 지검장님도 자네를 강력히 추천했고.”
“네?”
예상치 못한 박현주 부장의 말.
유대명이 나를 원하고 있다?
이건 또 무슨 속셈이야.
“아마 KH 그룹 사건이 마음에 드셨겠지.”
유대명이 나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하나 그 사실을 내가 알고 있다는 걸 유대명은 모른다.
위험하지만 가장 확실한 칼을 쓰겠다는 건가…….
자신을 찌를지도 모르는 양날의 칼을?
“뭘 놀라고 그래. 자네가 보여 준 능력에 비하면 그리 큰 사건도 아닌데.”
“큰 사건이 될 것 같아서요.”
“정치인들이 연관되어 있다고 해서 그런 건가?”
“네.”
“어차피 회기 중이라 의원들 체포 못해. 그냥 도박 사이트들 가지치기 한다는 마음으로 가볍게 수사하는 게 좋을 거야.”
아니요.
저를 양날의 칼로 쓰겠다는 데 제대로 놀아 줘야죠.
자신이 다칠 수도 있다는 경박심도 일깨워 주고요.
“부장님,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무슨 약속?”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이건 혐의만 있다면 수사할 수 있게 해달라는 약속이요.”
“흠… 시작하기도 전에 겁을 주고 그러나.”
단독제 독립관청.
법적으로 상급자의 결재가 없다 하더라도 범법자의 대한 영장과 수사를 진행할 수 있다.
다만, 법원도 엄연한 조직이며 상급자의 푸쉬가 있느냐 없느냐는 수사를 진행함에 있어 큰 차이가 난다.
이왕이면 다홍치마 아닌가.
그리고 박현주 부장은 꽤 공명심 높은 검사이며, 내가 부탁한 약속을 들어줄 거라 생각했다.
“약속 못해 주시는 겁니까?”
“아니, 약속하지. 대신 확실한 혐의가 있어야 하네.”
“감사합니다.”
“아참! 한 프로.”
“네?”
서두르고 싶은 마음에 부장검사실을 나오려 했지만 박현주가 나를 붙잡았다.
“난 자네를 믿지만. 아직 검사 옷을 벗고 싶지는 않아.”
“걱정 마세요. 이번엔 부장님 성함이 뉴스에 나올 테니까요.”
도와준 만큼 공도 나눠 갖는다.
그게 조직에 순응하는 방법이니까.
물론 내가 충성하는 조직이, 아니, 상급자가 올바르다면 말이다.
“하하하하! 그래 기대하지.”
* * *
쪼르륵.
채현우가 따른 술이 유대명의 술잔에 채워진다.
“그놈 꼴통이라며?”
“대신 일처리 하나는 확실해.”
“불안한데…….”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의 술자리.
더러움을 청소한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려는 두 사람.
드르륵.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또 다른 남자.
“아이고, 정무수석님 오셨네.”
그렇게 세 사람이 모인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됐어요∼ 앉아들 계세요. 뭘 그리 유난스럽게.”
“하하! 후배된 도리로써 그럴 수가 있나요.”
정무수석비서관.
대통령을 보좌하며 청와대와 국회를 이어주는 사람이다.
쉽게 말해 대통령의 뜻을 국회에 전하고, 국회의 뜻을 대통령에게 전하는 비서관이란 말이다.
또 정무라는 말이 앞에 붙어 있는 만큼 국가 행정에 관련된 모든 사무에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 유난이 아니라 이번 프로젝트에서 유난을 떨지 말라는 말이에요.”
“네?”
“채 청장 지역구 의원만 확실히 잘라 내고 야당에 똥물만 끼얹으면 됩니다. 그리고 유 지검장은 VIP가 알아서 대검으로 보내 줄 터이니 걱정 말고.”
“네!”
사실 정무 수석의 주된 업무는 대통령이 국정 운영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국회의원들에게 비위를 맞춰 주는 것이다.
“칼은 누가 잡았나?”
꼴깍.
채워진 술잔을 들이키며 정무수석이 말했다.
“한치우 특수 1부 검사입니다.”
“아∼ KH 우대현 회장 잡아넣은 검사?”
“네.”
“무데뽀 같던데 컨트롤 잘할 수 있겠어요, 유지검장?”
피식.
정무수석에 물음에 유대명이 은은한 미소를 띠웠다.
“대신 한치우 만큼 확실한 검사도 없죠.”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혐의가 있으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드는 아이입니다. 채 청장이 출마할 지역구 의원 확실히 잡아넣을 겁니다.”
“하하… 마음에 드네.”
채현우 의원이 출마할 지역.
바로 한치우의 고향이다.
“그런데… 현역 의원인 김석원 의원을 잘라낸다 하더라도 채 청장이 출마할 지역구는 야당색이 짙은 지역입니다.”
쪼르륵.
채현우 청장이 눈치를 보며 정무수석의 잔을 채운다.
“하하, 공무원이라 정치를 잘 모르시나 봅니다.”
“수석님에 비하면 아직 애송이죠.”
“김석원 의원이 똥물을 뒤집어쓰고 잘려 나가는 순간 그 지역의 정치색 또한 변하는 겁니다.”
한동안 다시 변하기 힘들만큼 말이다.
한 지역구를 자신들 쪽으로 변하게 만들고 그 자리에 채 청장을 출마시켜 당선되게 만드는 것.
그게 최종 목표인 것이다.
“두 분은 제가 시키는 대로만 하세요. 정치적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네, 수석님!”
짠!
밝은 표정으로 술잔을 부딪치는 세 사람.
그들은 양날의 검이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아직 모르고 있었다.
빙글빙글 돌다 어쩌면 자신들에게 향할지도 모른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