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모든 준비를 마치고 법원으로 직접 향하는 길에 강서빈의 전화 한 통으로 핸들을 틀었다.
“네?”
“제가 언론에 직접 발표하겠습니다.”
급하게 호텔을 찾아가 만난 강서빈의 말은 조금 뜻밖이었다.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영장 나올 확률이 아주 농후합니다.”
“떳떳한 선생님이 되고 싶어서요.”
옆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민태호를 바라보며 말하는 강서빈.
“진짜 괜찮으시겠어요?”
“네. 정리 다 끝났습니다.”
“정상참작으로 집행유예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고마워요, 치우 씨.”
“너무 긴장하지 마시고 녹화 시작되면 저는 법원으로 가서 바로 영장 청구하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텔 내부는 스튜디오처럼 변했다.
성훈이 납치 사건으로 연이 생긴 차치홍 기자는 카메라를 준비하고 있었고, 강서빈은 대본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사님 준비되셨어요?”
“네.”
“자 그럼 1분 뒤에 큐 싸인하겠습니다.”
카메라에 빨간 불이 켜지면 세상이 떠들썩하게 될 것이다.
“5, 4, 3, 2, 1.”
카메라를 통해 더러운 진실이 만천하에 공개될 테니까 말이다.
“저는 법원으로 출발하겠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움직이는 몇몇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카메라처럼 빨간 불이 켜지겠지.
“큐!”
― 소명 그룹 전 재무이사 강서빈입니다.
신변의 위협이 있어 기자회견이 아닌 영상으로 모든 내용을 발표하는 점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우선 저는 재무팀장으로 소명 그룹에 입사를 하였고······.
TV에서 흘러나오는 강서빈의 목소리가 대한민국 곳곳에 퍼지고 있었다.
― 15년 후, 소명 그룹의 재무를 총괄하는 재무이사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길다면 긴 회사 생활 동안 천재석, 천재학 두 형제의 주도하에 불법 자금이 만들어지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고, 그 사실을 검찰에 알렸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해고되었습니다······.
MBA를 수료한 강서빈은 처음부터 팀장급으로 소명 그룹에 입사하였다.
두 왕자의 비자금 문제를 몰르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묵인한 것일 뿐.
― 저는 사실을 빨리 알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성공에 눈이 멀었고 모른 체 한 대가는 달콤했습니다.
화려한 스펙.
무거운 입.
강서빈이 역대 최연소 소명 그룹 임원 자리에 오를 수 있던 이유였다.
― 해고당했다는 복수심에 진실을 밝히려는 것은 아닙니다. 현직에 있을 때 이미 특수부에 모든 자료를 넘겼지만 수사는 진행되지 않았고, 휘슬 블로워를 보호해야 하는 검찰은 내부 고발 사실을 소명 그룹에 알렸습니다······.
택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강서빈의 목소리에 주머니 속 휴대폰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 회사를 잃고 공익을 위해 내부 고발을 한 제 자신이 한심스러웠습니다······.
[이천웅 검사 : 한 시보 어디야!]
[민재홍 부장검사 : 너 뭐하는 새끼야!]
[강철호 검사장님 : 하하하, 특수부 앉혀 놨더니 시보부터 세상을 바꾸려 하는구나. 윗선 전부 커트해 줄 테니까 밀어 붙여.]
수 없이 문자가 날아왔지만, 마지막 강철호의 한마디로 정리되었다.
―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을 때 특수부 한치우 검사직무대리가 저희 집을 찾아왔고, 공익을 위해 다시 한번 용기를 내보라 설득하고 또 설득했습니다······.
[시보라 영장 청구에 제약이 있을 수 있습니다.]
라디오는 계속 흘러나왔고 나는 강철호에게 문자를 보냈다.
[강철호 검사장님 : 서류에 내 이름 적어서 제출해. 법원으로 1차장 보낼게. 직접 가고 있지?]
[네. 직접 가고 있습니다.]
수사관들을 못 믿는 것이 아니다.
이천웅을 못 믿는 거지.
같은 방 검사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을 테니까.
[강철호 검사장님 : 그래, 알았다. 나는 기자회견이나 준비해야겠군.]
중앙 지검 차장검사와의 동행.
입구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막는다고 해도 내가 더 빠를 것이고.
― 한치우 검사직무대리의 설득에 다시 한번 용기를 내보려 합니다. 안전을 위해 남겨 둔 자료까지 전부 한치우 씨에게 넘겼고, 이번만큼은 제가 낸 용기가 결실을 맺을 거라 믿고 있습니다······.
“좋은 기업인 줄 알았는데 아주 못된 기업이구만!”
“기업은 잘못이 없습니다. 잘못된 사람이 경영권을 잡은 것뿐이죠.”
“그런가?”
“죄송하지만 빨리 좀 가 주세요.”
라디오 뉴스를 듣고 반응하던 택시 기사가 내 말에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아니. 왜 그쪽이 안절부절 못하고 그러는 거야?”
“제가 한치우니까요.”
뒷자리에 복잡하게 펼쳐진 서류.
검찰이라 적혀 있는 내 목의 신분증.
룸 미러를 통해 상황을 확인한 택시 기사의 입이 벌어진다.
“그럼 지금?!”
“네. 강서빈 이사가 말한 용기의 결실이 제 손에 달려 있습니다.”
“빨리 가지.”
부우우웅!
보고 있던 서류의 글씨가 흔들릴 정도로 택시의 속도가 빨라졌다.
― 저는 소명 그룹의 전 재무이사로서 두 사람의 잘못을 묵인한 벌을 받을 것이며 수사 과정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입니다.
끼익―
“빨리 온다고 왔는데······.”
“충분합니다. 감사해요.”
도로에 스키드 마크를 새기며 멈춰 선 택시.
그 마크가 굳이 손목시계를 확인하지 않아도 될 증표 같았다.
“후∼ 세상에서 가장 정의로운 과속이였군. 딱지 날아오면 마누라한테 한소리 듣겠지만.”
“여기 택시비요.”
왠지 모르게 뿌듯해하고 있는 택시기사에게 만 원짜리 하나를 건넸다.
“좋은 일하는 검사님 돈 받고 싶지 않습니다. 검사님이 밝히실 진실에 제 마음도 넣어 주세요. 하하하.”
“어차피 영수증 처리되는 돈인데······.”
팔걸이 위로 다시 돈을 올리며 말했지만, 이미 자아도취에 빠졌는지 내 말이 귀에 안 들어오는 듯했다.
‘특이한 아저씨네. 그냥 놓고 내리자.’
― 저로 인하여 피해를 보신 주주들과 직원들에게 다시 한번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상 강서빈이었습니다.
쾅.
택시 문이 닫히고 강서빈의 발표 역시 끝이 났다.
“이제 내 차례네.”
[법원]
법원 앞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정의의 여신 디케 상이였다.
눈을 가리고 한 손에는 법전, 또 다른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는 법원의 상징과도 같은 동상.
눈을 가려 편견을 가지지 않고 모든 죄를 저울에 달아 오직 법에 의해 합리적인 판결을 내리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꽤 무거울 것 같은데.”
그런 디케 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손에 서류 뭉치가 저 저울에 올라간다면 꽤 무거울 것이다.
정의에 여신 앞에서 판사들이 한 선서가 진심이었다면 말이다.
사실 크게 상관은 없었다.
지금 저울을 향해 가는 내 걸음을 막는 판사가 있다면 국민들에 의해 탄핵이 될 테니까.
“자네가 한치우인가?”
“네, 맞습니다. 혹시 차장검사님이십니까?”
법원 앞은 기자들과 통제를 위해 나온 경찰들로 인하여 북적거렸다.
하지만 일면식이 없던 차장검사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한테는 검사의 상징인 서류 보자기와 끓어오르는 의지가 눈빛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고, 차장검사는 그런 검사들을 많이 봐 왔기에 말이다.
“그래. 중앙 지검 1차장 이남윤이라고 하네.”
“특수 1부 한치우 검사직무대리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광은 무슨··· 고맙지만 존경은 나중에 표하고 일단은 서둘러 가지.”
“네. 뒤따르겠습니다.”
“아니.”
살포시 뒤로 물러났지만, 이남윤 차장은 걸음을 떼지 않았다.
“선배가 되어서 후배 스포트라이트 뺏으면 되겠나. 오늘은 뒤에서 밀어줄 테니 마음껏 날뛰어 보게.”
“네? 그래도······.”
“나로는 부족한가?”
휙.
차장검사의 손짓에 한 무리의 남자들이 내 뒤에 도열했다.
“내가 거느린 검사들이네. 이건 검사장님의 명령과 별개로 내가 정의로운 후배 기 살려 주려고 한 이벤트이고.”
나이를 보아하니 1차장 산하 부부장급 이상 검사들이 모두 모인 듯했다.
“···감사합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더욱 굳은 표정으로 답을 했다.
“데뷔가 좀 빠르겠네, 한 검사?”
“아직 직무대리입니다······.”
“배포만 보면 나보다 더 큰 것 같은데. 자네들 생각은 어때?”
“하하하, 맞습니다! 특수부라 아쉽긴 하지만 유능한 후배가 생긴 것 같아 좋습니다.”
톡톡.
이남윤 차장이 내 어깨를 치며 신호를 주었다.
등 뒤는 걱정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신호를 말이다.
“가지. 자네 데뷔 무대로.”
“네, 차장님.”
혼자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내 착각이었다.
정의롭고 깨끗한 검사는 나만이 될 수 있다는 착각.
그래서 겁도 없이 이 법원을 무작정 혼자 달려왔다.
“서울 중앙 지검 한치우 검사직무대리입니다. 영장 청구하러 방문했습니다.”
“들어가십시오, 검사님.”
“고마워요.”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내 등 뒤에 있는 열 명의 부장검사와 열한 명의 부부장 검사.
모두가 나와 같다고 자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 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내 편이 되어 줄 거라 믿었다.
“노 부장이 경제 범죄 전담부니까 한 검사 바로 뒤에 서고······.”
팟팟팟.
빠르게 자리 배치가 완료되고 법원 정문에 다다르자 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져댔다.
세상에 모든 카메라가 우리를 찍고 있는 것 같았다.
“짧게 몇 가지 질문만 받겠습니다.”
번쩍번쩍.
한마디를 던진 이남윤 차장이 다시 뒤로 물러나고, 기자들은 너도나도 손을 들기 시작한다.
“맨 앞에 분이요······.”
처음이었다.
과거로 돌아온 한치우가 떨면서 말을 하는 건.
톡톡.
“데뷔 무대 망칠거야? 자신감 있게 해 커버는 우리가 쳐줄 테니까.”
“네, 차장님.”
조용히 들려오는 귓속말.
내가 서 있는 포토 라인이 무대였다면, 이보다 완벽한 매니저는 없을 것이다.
“시민 일보 이진용 기자입니다. 이 사건을 수면 위로 드러낸 사람이 시보 생활을 하는 연수생이라던데 맞나요?”
“네, 맞습니다.”
“혹시··· 본인이신가요?”
꾸벅.
“네. 서울 중앙 지검 검사직무대리 한치우라고 합니다.”
팟팟팟.
소개를 하며 고개를 숙이자 조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플래시들이 터졌다.
번쩍.
“네. 바로 뒤에 분이요.”
“강서빈 이사의 발표에 따르면 이미 특수부에 내부 고발을 했고, 특수부가 자료를 소명 그룹 쪽에 건넨 것이라 했습니다. 한치우 씨도 그걸 알고 계셨나요? 같은 특수부인 걸로 아는데요?”
“자료를 넘겼단 사실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고, 그래서 정보원인 강서빈 이사님을 보호했습니다. 자료를 넘긴 특수부 검사는 누군지 밝혀낼 예정입니다.”
“연수생이 선배 검사를 수사라도 하겠다는 말씀입니까? 검찰은 상명하복이 심한 조직으로 알고 있는데요?”
“네. 맞는 말씀입니다만, 검사는 개개인이 독립관청인 특수 공무원입니다. 죄가 있다면 상명하복을 떠나서 누구든지 수사하고 누구든지 기소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시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다만 내 등 뒤에 있는 사람들과 강철호가 있다면 말이 안 되는 소리도 아닐 것이다.
“마지막 질문 받겠습니다.”
번쩍.
“이번 일로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셨는데요. 연수생 신분으로 계속 수사를 하실 것인지, 아니면 사건을 이관하실 것인지 궁금합니다.”
힐끔.
기자의 질문에 뒤돌아 이남윤 차장을 바라보았고 웃고 있는 그의 속마음이 읽혔다.
‘네가 주인공이야.’
그래.
이 무대의 주인공은 나잖아.
“강서빈 이사님은 저를 믿고 모든 자료를 넘기셨고, 검찰이 기회를 주신다면 제 뒤에 계신 선배 검사님들과 함께 이 사건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미친 듯이 날뛰어 보는 거야.
이렇게 훌륭한 백댄서들이 있으니까.
“이상 마치겠습니다. 한치우였습니다.”
꾸벅.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자 뒤에 있던 모든 검사들이 나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팟팟팟!
국민이란 관객 앞에 선 나만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 * *
차는 서울의 중심으로 향했다.
높고 화려한 건물들 사이로 유독 빛나는 한 건물.
[SO MYEONG]
건물의 모습은 바뀌었지만 서울 중심에서 벗어난 적은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1위.
바로 소명 그룹이다.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인해 어떤 제품이든 소명이라는 브랜드가 붙는 순간 불티나게 팔렸다.
제품의 퀄리티와 가격은 중요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소명 그룹에게 마음이 빚이 있다 믿었으니까.
“아이고··· 이 박스들고 소명 그룹을 찾아갈지는 꿈에도 몰랐네.”
“그러게. 훌륭한 집안에서 어떻게 그런 인물들이 나왔을까.”
승합차 뒷자리에서 들려오는 수사관들의 목소리.
그 말이 단번에 공감됐다.
내 생각에도 소명 그룹은 존경받아 마땅했다.
조선 시대 거상의 아들로 태어난 천병호.
그의 아버지 천성욱은 청나라와 조선을 오가며 인삼과 담배 등을 중계했고 큰돈을 벌었다.
뼈대 있는 가문은 아니었다.
가난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천성욱은 유독 상인 기질이 타고 났다.
그렇게 큰돈을 벌게 된 천성욱은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해 주었고, 그 사실이 임금에 귀에 들어가 관직까지 하사받을 수 있었다.
임금은 천성욱에게 인삼과 담배 무역권을 독점할 수 있도록 권한을 줬고, 천성욱은 국경지에 큰 땅을 구매해 인삼 밭과 담배를 재배해 본격적으로 사업의 규모를 키워갔다.
뼈대 있는 양반가들은 그런 천성욱을 시기했지만, 조선 후기에는 양반이라는 신분을 돈으로 쉽게 구매할 수 있는 상태.
천성욱의 재산은 이미 조선을 쥐고 흔들 수 있을 정도로 많아져 있었다.
피는 못 속인다 했던가?
고초를 겪은 아버지와 달리 금 보자기에서 태어난 천병호이지만 여타 다른 재벌들과는 조금 달랐다.
아버지의 재산으로 소명 상회를 창업했고,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독립군에게 6.25에는 국군에게 엄청난 자금을 지원했다.
물론 국민을 돌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국민들이 얼마나 소명 그룹을 존경했냐면, 천병호와 친하다는 이유로 지지율 1퍼센트 국회의원이 갑자기 당선되기도 했다.
문제는··· 천병호의 손자들이였다.
재산은 물려받았어도 마음은 물려받지 못한 두 손자.
아들인 천민호는 마음까지 물려받았는지 천병호의 뜻을 이어 소명 그룹을 재계 8위까지 올려놓는가 하면 재단을 만들어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을 도왔다.
남을 생각하느라 정작 자신의 아들들을 돌보지 못했던 걸까?
증조할아버지 당시부터 쌓아 올린 아름다운 건물이 천재학, 천재석, 두 사람이 경영권을 맡은 순간부터 더렵혀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자! 하드디스크부터 포스트잇에 적은 메모까지 전부 수거해 오십시오.”
“네, 한 검사직무대리님.”
다섯 대의 승합차에 꽉차 있는 수사관들.
빈 압수 수색 박스를 실은 차가 따로 있을 정도 엄청난 규모의 압수 수색이다.
“그냥 시보라고 불러주십시오, 수사관님.”
“아, 저도 조금 어색하네요.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편하게 시보님이라 부르겠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런 엄청난 규모의 압수 수색을 지휘하는 사람이 이제 시보 생활을 하는 연수생이란 사실이 어색한 수사관들이였다.
끼익―
“자! 하드디스크 렌지에 돌리거나 서류들 파쇄기에 넣는 사람은 공무집행방해로 그 자리에서 즉시 체포해도 좋습니다.”
“네, 시보님!”
차는 소명 그룹 사옥 앞에 멈추었고 나는 무전을 통해 수사관들에게 말했다.
“그럼 모두 가시죠!”
나는 지금 더럽혀진 소명 그룹을 청소하려 한다.
검사의 선서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나는 공익의 대표자로서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우고, 범죄로부터 내 이웃과 공동체를 지키라는 막중한 사명을 부여 받은 것이다.
무엇보다 공익을 위해 노력했던 소명 그룹.
국민들의 존경이 헛되지 않게 하고, 공익을 더럽히는 쓰레기들을 청소한다.
내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서 말이다.
나는 대한민국 검사이니까.
“당신들 뭐야.”
소명 그룹 사옥 입구가 승합차들로 가려졌고, 이내 30명의 수사관들이 압수 수색 박스를 든 채 입구 앞에 도열했다.
“서울 중앙 지검 한치우 검사직무대리입니다.”
압수 수색 사실을 모르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비할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다.
내 손에 들려 있는 압수 수색 영장이 인쇄된 지 얼마 안 돼 아직 뜨거우니까.
영장 발부를 한 판사의 심사 기준에는 혐의에 대한 소명보다 여론의 목소리가 더 많은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빨리 영장이 나올 수 없으니까 말이다.
“지금부터 소명 그룹 본사에 대한 압수 수색을 진행하겠습니다. 형사소송법 제118조······.”
휙.
내 손짓에 도열해 있던 수사관들이 로비로 모이기 시작한다.
곧 가득 채워질 파란 박스를 들고 말이다.
“뭡니까!”
소식이 위층까지 전해졌는지 높아 보이는 임원 하나가 소리치며 로비로 내려왔다.
“형사소송법 제119조의 의해 영장 집행 중에는 타인의 출입을 금지할 것이며 형법 제136, 137조에 의해 공무집행을 방해한 자는 그 자리에서 체포될 것을 알립니다.”
“저··· 영장 좀 제대로 보여 주시죠.”
“누구시죠?”
“소명 그룹 부사장 모태호입니다”
“여기 있습니다.”
빤했다.
내 눈을 맞추면서 뒷짐 지고 있는 손으로 보안 요원들에게 지시하겠지.
중요 서류들을 폐기하라 전하라고.
“잠시··· 여기 보면··· 집행 대상이······.”
“나중에 천천히 읽어 보시고 위법하다 생각하시면 조치 취하십시오. 시간 끌지 마시고.”
다다닥.
뒤늦게 온 경찰 인력들이 발소리를 내며 소명 그룹 사옥을 삥 둘러 감쌌다.
“지금부터 본사 안에 있는 어떤 물건도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할 겁니다. 비키시죠.”
“잠시만요! 검사님······.”
꽈악.
모태호 부사장을 지나쳐 엘리베이터로 향하자 그가 내 어깨를 잡았다.
“놓으시죠. 공무집행 중인 검사 몸에 손을 대시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십니까?”
고개만 살짝 돌려 곁눈질로 말하자 겁에 질린 듯 손을 떨기 시작하는 모태호.
“놓아주시길 바랍니다.”
“아··· 네······.”
모태호의 무기력함을 본 이들이 중에 이제 내 걸음을 막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집행하시죠, 수사관님.”
“네, 검사님!”
수사관들로 꽉 찬 엘리베이터.
“타시죠, 검사님.”
“네.”
나는 맨 앞에 섰고, 이윽고 엘레베이터 문은 닫히기 시작했다.
옅게 진 내 미소와 함께.
― 모든 분들에게 알립니다. 압수 수색을 진행할 예정이니 모든 업무를 멈추시고 자리에서 이탈해 주시길 바랍니다. 집행 범위는 건물 안이고 집행 대상은 건물 안 모든 물건입니다. 집행을 방해하거나 증거를 훼손할 경우 처벌받게 됩니다.
* * *
쨍그랑!
천재학의 분노가 담긴 유리잔이 허공을 갈라 벽으로 향했다.
“당신 뭐야?!”
“죄송합니다··· 회장님.”
“비싼 밥 처먹이고 몸에 금덩어리 붙여 준 대가가 고작 이거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검장이 직접 나서서······.”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민재홍 부장검사.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이천웅.
소명 그룹 본사의 압수 수색은 끝이 났고, 비자금을 만들려 어쩔 수 없이 남긴 기록들은 검찰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치우의 손으로 넘어갔다.
“회장님, 자택 압수 수색은 어떻게든 막아 보겠습니다.”
“어떻게? 동생 녀석 집도 이미 털린 마당에.”
“이참에 부회장님을 감옥에······.”
“동생이 감옥에 가면 나는 무사할 것 같나? 입이 얼마나 가벼운 녀석인지는 알고 그런 소리를 하냐는 말이다.”
치우는 빠르게 증거들을 모아 갔다.
야간에는 압수 수색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천재석은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보려 했지만 치우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검사도 아니고 시보라며. 그럼 사법연수생 하나 못 막은 거야? 특수부 부장이라는 사람이 말이야. 자네 그 자리에 앉아서 할 수 있는 게 있긴 하나? 내가 지금까지 아무 쓸모없는 입구멍에 밥을 처먹인 거야?!”
“죄송합니다··· 한 시보가 직접 법원으로 가 영장을 청구할지는 몰랐습니다······.”
민재홍이 모든 일을 계획한 이천웅을 노려보며 말했다
불과 하루.
그것도 해가 지기 전에 소명 그룹 사옥과 천재석의 자택에 대한 압수 수색이 끝이 났다.
그리고 다음 차례가 자기일 거라는 걸 뻔히 알고 있는 천재학은 분노와 불안감을 두 검사에게 풀고 있다.
“그게 지금 네 입에서 나올 소리야?!”
침까지 튀어 가며 소리를 치는 천재학.
침이 두 사람의 옷에 묻었지만, 이미 더러워진 법복이라 그런지 티가 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공익을 위해 진실을 밝히려는 치우.
똑같이 검사의 선서를 한 두 사람은 그와 정반대였다.
이미 재물의 꼭두각시가 되어 국민이 아닌 재물에게 복종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누구에게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는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꼴도 보기 싫으니까 꺼져!”
쾅!
천재학 부회장이 방 안으로 들어갔고, 더 이상 재물을 손에 넣을 수 없는 이유를 노려보는 민재홍이었다.
“이 프로 자네 계획이 혹시 내 옷을 벗기려는 건가?”
“아닙니다······.”
“씨발, 옷만 벗으면 다행이지 개업도 못하게 생겼단 말이야.”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방법? 이제 손잡고 징역갈 일만 남았는데. 우리가 잡아넣은 도둑놈 새끼들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칼자루를 뺏어 오면 됩니다.”
“뭔 소리야 그게?”
이천웅은 생각했다.
치우 손에 들려 있는 칼자루를 빼앗아 천재학과 천재석을 베겠다고.
“칼로 저희와 회장님 사이에 연을 끊고 저희가 직접 수사를 하면 됩니다.”
“지금 우리 손으로 회장님을 기소하자는 말이야?”
닫힌 방문을 바라보며 조용히 속삭이는 민재홍.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안 그러면 저희가 베입니다. 스폰이야 새로 만들면 되는 거고.”
“흠··· 지검장이 사건을 내주려 할까? 우리가 자료 빼돌린 거 뻔히 알고 있을 텐데.”
“뭐가 됐건 특수부 사건 아닙니까. 한치우 역시 특수부 소속이고 협조하는 척 긴장 풀게 한 다음에 손아귀 힘이 빠지면 칼자루를 뺏어 오면 됩니다.”
“만만한 녀석이 아닌 것 같던데······.”
민재홍의 말에 살며시 미소를 짓는 이천웅.
“미쳐 날뛰어 봤자. 20대 애송이일 뿐입니다. 경험이 섞이지 않은 능력은 노련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 * *
수많은 자료가 쌓여 있는 책상에서 압수 수색한 증거 자료들을 살펴보고 있는 내 눈치를 보는 이천웅.
“쉬엄쉬엄 해요, 한 시보.”
“볼 게 아직 많아서요.”
“좀 도와드릴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왜?
또 자료 빼돌려 소명 그룹한테 갖다 바치게?
사실 이천웅이 자료를 보는 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지도 검사로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까 말이다.
다만, 그도 알고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지 않은가.
이천웅이 소명 그룹과 연관되어 있다는 걸.
그래서 쉽게 다가오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그나저나··· 천재학 자택 압수 수색은 언제 집행하려고 그래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영장 청구하러 갈 예정입니다.”
착착.
서류들의 모서리를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요. 다녀와요.”
배웅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내가 모르고 있을 것 같아?
당신이 짓는 미소의 진짜 의미를.
허나 당신은 모르겠지.
20대인 내 몸에 산전수전 다 겪은 진짜 한치우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아! 맞다. 수사관님, 강서빈 이사님 참고인 소환 좀 부탁드립니다. 영장 청구하고 돌아오면 뵐 수 있도록요.”
“네, 알겠습니다. 비자금 사건 조사 때문에 그러시죠?”
“그것도 그런데 공식적으로 조서를 써야 되고 영상도 녹화해야 될 것 같습니다. 확인해 볼 것도 있고.”
“무슨 확인이요?”
흠칫.
내 말 이천웅의 눈을 빠르게 돌아가게 했다.
‘당신이 아무리 머리 굴려봤자 소용없을 거야.’
강서빈이 내부 자료를 넘겼고, 그 내부 자료는 사라졌다.
“강서빈 이사님이 넘긴 자료 하나가 유실된 것 같아서요.”
* * *
중앙 지검 앞 검은색 세단이 한 대 멈춰 섰다.
스르륵.
“워메 내가 여길 포승줄에 안 묶이고 오는 일이 다 있구마잉.”
창문이 열리고 익숙한 민태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 그럴 일 안 만드실 거잖아요.
“그라지. 이제 죄 안 짓고 살 것인디.”
“고생하셨어요, 삼촌.”
뒷자리에 나란히 타 있는 민태호와 강서빈 이사.
정식적인 기록을 위하여 수사관을 통해 참고인 소환장을 보냈지만 실질적인 연락은 나로 인해서 이루어졌다.
“불편하지는 않으셨나요, 이사님?”
“불편하긴요. 요즘 치우 씨 덕분에 속이 뻥 뚫린 기분입니다.”
민태호의 철저한 보호 아래 강서빈 이사는 무사히 중앙 지검으로 올 수 있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사님, 이제부터 제가 모시겠습니다.”
“고마워요.”
“지는 입구에서 기다리겄습니다, 선상님.”
“태호 씨도 고맙습니다.”
“아녀라.”
마음과 거리는 비례한다 했던가.
전혀 다른 삶을 살던 두 사람은 어느새 꽤 친해져 있었다.
민태호가 강서빈 이사한테 배운 것은 경영뿐만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나저나 삼촌 그 옷은 뭐예요?”
“아∼ 선상님이 샐라리맨들은 이렇게 입는다 카더라.”
“샐러리맨.”
“뭣이여?”
“샐라리맨이 아니라 샐러리맨이라구요.”
얼굴에 나 있는 흉터를 제거했고, 건달 티가 전혀 나지 않는 진짜 슈트를 입은 민태호였다.
음지에서만 살던 민태호에게 강서빈 이사는 경영뿐만 아니라 양지의 삶 또한 가르쳐 주고 있던 것이다.
“태호 씨가 생각보다 배움이 빠르더군요. 한 번 알려드린 것은 곧잘 따라하셔서 가르쳐드리는 게 뿌듯하기도 하고.”
“하하하, 지가 뭐 한 게 있다고. 이게 다 이사님이 잘 알려 주셔서 그런 것이어라.”
그런 둘의 모습에 나 또한 뿌듯함을 느꼈고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자세한 건 일 끝나고 회포 풀면서 하시고 일단 가시죠.”
“그래요.”
꾸벅.
계단을 오르는 강서빈 이사 뒤로 고개를 숙이는 민태호.
조폭들의 어깨 인사가 아닌, 다소 젠틀한 인사였다.
“대단하시네요. 삼촌이 정말 많이 변하신 것 같아요.”
“마음이 열려 계시니 빨리 배우는 겁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소귀에 경 읽기라 생각했지만, 습득력이 생각보다 빨라 저도 놀랐습니다. 변하려는 의지가 다른 부족한 것들을 채워 주더라고요.”
민태호의 근황이 조사실로 향하는 심심한 걸음을 지루하지 않게 해 주었다.
“어? 한 시보! 직접 모셔온 거야……?”
조사실 앞에서 초초함에 다리를 떨며 손톱을 깨물고 있던 이천웅이 보였다.
“네.”
“어떻게… 직접 조사할 거야? 한 시보 할 일도 많은데 수사관님한테 맡기지.”
“아닙니다. 안면도 있으니 제가 조사하겠습니다.”
“자, 잠깐만!”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복도 끝을 바라보는 이천웅.
덜컥.
“어이, 한 시보.”
조사실 문고리를 돌리자 이천웅이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부장님.”
“그래. 강서빈 이사님 조사는 이 프로한테 맡기지.”
“제가 직접…….”
“이봐! 나 특수부 부장이야. 내 말에 토 달지 않으면 좋겠는데.”
어쩔 줄 몰라 하는 강서빈 이사와 씨익 하고 미소를 짓는 이천웅.
“이번 사건 우리 특수부한테 아주 중요한 사건이야. 그런데 중요한 참고인 조사를 시보한테 맡기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차장님도 그렇게 하라 하셨으니 물러가서 시보가 할 일이나 찾아보게.”
민재홍이 강하게 말했지만 문고리를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손을 놓는다면 강서빈 이사의 증언이 왜곡될 것이고 내부 자료를 넘긴 사람을 밝혀내지 못할 것이 분명할 테니 말이다.
“그냥 한 시보가 하라고 하지?”
휴…….
멀리서 들려오는 굵고 낮은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꾸벅.
“검사장님.”
강서빈 이사를 제외한 모두의 고개가 숙여졌다.
누구든 중앙 지검에 소속되어 있다면 강철호 검사장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 할 것이다.
“한 시보가 모셔온 참고인을 왜 이 프로가 조사를 하나?”
“그게… 아직 시보이고, 중요한 사건의 참고인이라서…….”
강철호 검사장의 기에 눌려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민재홍 부장까지도 말이다.
“그런 중요한 사건을 밝혀낸 게 한 시보 아닌가?”
“인지 수사를 시작한 건 제 검사실이었고, 한 시보한테는 연습 삼아 읽어 보라고 준 자료였습니다.”
기에 눌려 있던 민재홍을 대신해 눈치를 보던 이천웅이 답했다.
어찌 보면 이천웅은 자신의 무덤을 자신이 판 것이다.
질투와 시기에 눈이 멀어 던져 준 자료를 내가 덥석 물어 버린 것이니까.
하지만 몰랐겠지.
자신이 나한테 던진 게 미끼가 아니라 먹이었다는 걸.
“하하하. 기분 좋았겠네, 이 프로?”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지도 검사로서 열정 있고 능력 있는 시보가 들어온 게 말이야.”
“아… 네, 맞습니다.”
말로는 절대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강철호 검사장은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능글맞으니까 말이다.
거기에 높은 직위와 능력까지 겸비하고 있으니 애초에 상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지도.
“그런 능력 있는 시보가 자네 후배가 될 지도 모르는데 밀어줘야 되지 않겠나? 혹시 두려운 건가?”
“네? 두렵다뇨?”
“능력 있는 후배한테 자리를 뺏길까 봐 말이야. 혹시 모르지 자네가 먼저 옷을 벗을지도.”
슬며시 웃으면서 말하는 강철호 검사장.
그의 말에는 많은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검사장님. 옷을 벗을 만한 짓도 한 적 없고요.”
“하하하, 농담일세. 뭘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러나.”
“그게…….”
이천웅은 이미 강철호 검사장의 손아귀 위에 안착한 듯했다.
그는 강철호 검사장의 말에 놀아나고 있었고, 어떠한 반항도 하지 못했다.
“그런 거 아니면 한 시보한테 조사 맡겨 보는 게 좋지 않겠나? 민 부장 생각은 어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사건을 시보한테 맡기는 게 좀 그렇습니다. 차장님도 이 프로한테 이관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이봐, 나 검사장이야. 내 말에 토 달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하하하.”
멀리서 들었는지 민재홍이 내게 한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강철호 검사장이었다.
분명 웃으면서 던진 농담이었지만 민재홍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그리고 말이야. 차장까지 결재가 올라간 인지 수사 건을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지? 대검 건너간다고 바쁜 나를 배려해 준 것인가? 아니면 숨겨야 되는 이유가 있던가.”
강철호 검사장의 얼굴에서 웃음기마저 사라지자 그가 풍기는 카리스마는 배가 되었다.
“인지 수사였고 증거들 모아 혐의가 확실해지면 직접 보고 드리려 했습니다.”
“이해가 안 가는군. 시보도 터트릴 수 있는 사건을 부장 검사가 못 터트린다는 사실이. 그리고 강서빈 이사님이 넘긴 자료가 증거로서는 부족했나?”
“네? 그건…….”
강철호 검사장의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화들짝 놀라는 민재홍이었다.
“아니면… 검사실에서 자료가 사라진 건가?”
곁눈질로 이천웅을 보며 말하는 강철호 검사장.
“아닙니다! 아무래도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소명 그룹이다보니 더 확실한 증거를 모아 수사를 개시하려 했습니다. 잘못하면 표적 수사라는 화살이 저희한테 날아올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 특수부 엘리트인 두 사람이 다 뜻이 있으니 그랬겠지. 하하하. 그나저나 특수부 부장께서 칠칠맞게 옷에 뭘 묻히고 다니면 어떡하나. 우리 지검의 얼굴인데.”
톡톡.
민재홍의 슈트에 묻은 먼지를 털며 말하는 강철호 검사장이었다.
하지만 입에서 나온 말과 행동은 완전히 다를 것이다.
민재홍이 소름이 돋는 듯 벌벌 떨고 있으니까.
“가, 감사합니다.”
“검사가 입고 있는 슈트가 더러워지면 쓰나. 앞으로 관리 잘해. 관리 못 할 거 같으면 벗던가.”
“네?”
“옷 하나 관리 못 할 만큼 나이든 것도 아닌데 말이야. 봐봐 나이든 내 슈트도 이렇게 깨끗하지 않은가.”
강철호 검사장이 두 팔을 양옆으로 뻗으며 말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안과 밖이 모두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으니까.
“안 되겠네. 두 사람은 나랑 사우나나 가고, 조사는 한 시보한테 맡기지. 오랜만에 같이 씻으러 가자고.”
“아직 업무 시간이라…….”
“몸이 더러운데 어떻게 업무를 보나. 우리는 누구보다 깨끗해야 할 검사 아닌가?”
“네, 맞습니다…….”
두 사람의 표정은 사우나가 아닌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 같았다.
“자, 가자고!”
“네, 검사장님…….”
톡톡.
두 사람을 달고 걸음을 뗀 강철호 검사장이 내 어깨를 쳤다.
“자네는 먼지 안 묻게 잘 하라고 워낙 깔끔해서 걱정은 안 된다만.”
꾸벅.
“네, 검사장님.”
“하하하.”
이내 강철호 검사장의 웃음이 멀어지고, 불안감이 역역한 이천웅과 민재홍의 모습 또한 멀어졌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살벌하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손에 땀이 다 나네요.”
강철호 검사장이 뿜어내던 부드러운 카리스마에 조사실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에서 땀이 촉촉하게 느껴졌다.
“들어가시죠, 이사님.”
“네.”
쾅.
* * *
끼익―
서울 외곽 야산 입구에 검은색 세단 한 대가 멈추어 섰고 뒷자리가 더 어울릴 법한 한 남자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그는 곧장 좁은 산길을 향했고 깨끗하던 구두에는 진흙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한숨 속에는 거친 산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됨보다는 뭔지 모를 고민이 더 많이 섞여 나오는 듯해 보였다.
[웅진 백숙]
야산 속으로 한참을 들어가자, 반쯤 떨어져 덜렁거리는 한 백숙 집 간판이 보였다.
음식 냄새는 전혀 풍겨오지 않았고, 입구에는 거미줄이 가득한 그런 백숙집이 말이다.
삐익―
“양념 백숙 2인분이요.”
누가 보아도 영업을 하지 않을 것 같은 백숙집의 입구로 향한 남자가 붙어 있던 초인종을 누르며 말했다.
― 네, 어디시죠?
“중앙 지검 3차장 유대명입니다.”
― 예약되어 있지 않는 손님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정말 급해서 찾아왔으니 한마디만 전해 주십시오.
― 아무리 급하셔도 예약 없이는 음식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돌아가 주시죠. 초인종 지문 지우겠습니다.
거미줄이 가득하던 입구에서 물줄기가 쏟아져 내렸고, 세차장처럼 와이퍼가 문을 닦아 냈다.
그 모습을 본 유대명은 한 가지를 깨달았다.
거미줄과 거미가 자연 속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걸.
삐익―
“정말 급한 일이란 말입…….”
― 한 번 더 초인종을 누르면 블랙리스트로 등록됩니다.
“잠깐만요! 클럽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일입니다. 제발 한마디만 전해 주십시오.”
― …….
기계적으로 대답하던 초인종 너머 여성의 목소리에 버퍼링이 걸렸다.
― 말씀하시죠.
“제 선에서는 소명 그룹 비자금 사건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특수부도 이미 강철호 지검장한테 털린 것 같고요. 대책이 필요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 잠시만 기다려 주시죠. 주방에 전하겠습니다.
“휴…….”
유대명이 긴 한숨을 쉬며 바닥에 주저앉아 담배를 입에 물었다.
― 여의도 부띠끄 호텔 303호로 배달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채 담배에 불을 붙이기도 전에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 *
여의도 부띠끄 호텔.
그리 높지 않은 호텔이지만, 외관만 봐도 화려하고 깔끔하단 걸 알 수 있었다.
정사각형의 큐브를 연상케 하는 호텔.
그곳을 들어갈 수 있는 입구는 오로지 주차장뿐이었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 차량이 자연스레 주차장 입구로 향했다.
― 성함이?
차단기 인터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유대명입니다.”
― 혼자이신가요?
“웅진백숙에 배달시켰습니다.”
― 네. 지하 2층 A3 구역에 주차하시면 되고, 룸은 303호입니다.”
지잉―
차단기가 열리자 능숙한 운전 솜씨로 좁은 지하 주차장 입구를 지나 밑으로 향했다.
넓은 지하 주차장을 헤매지 않고 곧장 지하 2층까지 내려가는 그의 모습으로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A3가 이쯤이었나.”
혼잣말을 할 정도로 여유로웠으니까 말이다.
자리를 안내라도 해 주려는 듯 반짝거리고 있는 주차 구역 표시등.
얼마나 프라이빗한 호텔인지 이미 주차되어 있는 차량에는 검은 천막이 씌워져 있었다.
“보안 확실히 해 줘요.”
띵―
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른 유대명이 허공에 말하자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윽고 룸에 들어간 유대명이 소파에 주저앉았다.
차량에서 내려 호텔 룸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마주친 적은 없었다.
호텔의 빈방이 많아서가 아닐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관제실 모니터 앞에 앉아 고객들의 동선을 철저히 관리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휴…….”
다만, 그런 철저한 보안 속에도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는 유대명이었다.
깨끗한 호텔 룸을 담배 연기로 가득 채우고 있으니까.
띵동―
“누구세요?”
― 백숙 배달 왔습니다.
“잠시만요…….”
평범한 배달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벨을 누를 수 없는 곳이 바로 이 호텔이었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문으로 향하는 유대명의 발걸음은 너무나도 무거워 보였다.
“21,000원입니다.”
문이 열리고 유대명의 초조함이 섞인 담배 연기가 조금은 빠져나갔다.
헬멧에 가려 보이지 않는 배달원의 얼굴.
손에는 백숙 냄새가 풍기는 비닐봉지가 들려 있다.
“잔돈을 찾아야 돼서 그런데 잠시 들어오시겠어요?”
“예.”
쾅.
자연스럽게 룸 안으로 들어온 배달원이 백숙과 헬멧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애초에 두 물건은 룸 안으로 들어오기 위한 귀찮은 도구일 뿐이다.
“말씀하시죠. 10분 드리겠습니다.”
배달원은 유대명보다 이 호텔에 더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자리를 찾아 앉아, 멀찌감치 서 있는 유대명을 향해 말했다.
“실례지만 그때 뵌 그분인가요? 목소리가 다른 것 같은데.”
헬멧은 벗었지만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탓에 배달원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다.
“배달원은 수시로 바뀝니다. 내용은 전부 공유하고 있으니 저한테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럼 시간 없으니 빨리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제야 유대명이 자리를 찾아 앉았다.
“제가 계획보다 빨리 중앙 지검장 자리에 앉아야 될 것 같습니다.”
“비자금 사건 때문이라고 전해 들었습니다. 클럽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조금 더 정확히 말씀해 주시죠.”
“강철호 지검장을 깎아내릴 방법은 도저히 없고, 차라리 대검으로 빨리 보내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비게 될 중앙 지검장 자리에 제가 앉아야 비자금 사건을 컨트롤 할 수 있고요.”
“결국 차장님의 자리 욕심 때문이라는 말씀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유대명의 말에 욕심이 담겨 있긴 하나, 딱히 왜곡된 사실은 아니었다.
그동안 강철호를 끌어내리려 수도 없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잡을 깃조차 내주지 않을 만큼 강철호의 처신은 완벽했다.
그러니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차라리 높은 곳으로 올려 보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대검으로 올라가는 서류에 마지막 결제권자는 유대명이 될 테니까.
“천재학, 천재석, 두 분이 클럽 소속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이 사건이 세세하게 밝혀진다면 클럽의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흠, 두 분은 이미…….”
“클럽에서는 제명됐을지 몰라도 검찰 조사를 피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미 여론의 스포트라이트가 두 사람을 향해 있으니까요.”
유대명은 이번 일이 전화위복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중앙 지검장 자리에 오르며 귀찮은 것들을 완벽히 처리할 수 있는 기회.
그리고 두 사람이 빠진 클럽의 빈자리를 자신이 앉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
“저한테 맡겨 주시면 확실히 처리하겠습니다.”
“클럽은 근거 없는 자신감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초조하던 유대명의 눈동자에 강한 의지가 어렸다.
“제가 중앙 지검장이 되면 사건을 주무를 수 있고 천재학, 천재석 두 분과 협상을 하려합니다.”
“무슨 협상이요?”
“검사가 범털과 할 수 있는 협상이 뭐가 있겠습니까.”
“형량을 대가로 입에 자물쇠를 채우겠다?”
씨익.
유대명이 옅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살아 있는 입은 언제든지 열릴 수 있죠. 입에 자물쇠를 채우기보다는 심장에 총알을 박는 게 더 확실한 방법 같은데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유대명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제계 8위 그룹의 수장들입니다. 갑자기 실종된다면 더 큰 소란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유대명이 자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흠…….”
배달원에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두건에 쌓인 턱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깨나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했다.
“굳이 소란 만들일 없지 않습니까. 클럽에서 저를 한 번만 믿어주신다면 확실하게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일단 차장님 말씀은 클럽에 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번 일을 잘 끝내면 클럽 가입 심사서에 한 줄 적어 주심이…….”
“중앙 지검장 자리로는 만족을 못하시는군요. 욕심과 위험은 항상 비례하는 법입니다, 차장님.”
유대명이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권력은 너무나 달콤하기에 과한 욕심이 생겼고,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는 것일 뿐이지.
“클럽에 앉을 만한 인물이 되시면 저희가 먼저 찾아뵈니 재촉하지 마십시오.”
“이번 일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제가 클럽에 어울릴 만한 인물이라는 걸요.”
“욕심만 생각하시고 위험은 생각하지 않으시는군요. 클럽에서 일을 맡기는 순간 책임이 뒤따를 겁니다. 실패의 대가가 아주 고통스러운 책임이 말입니다.”
“대가가 두려웠다면 이 자리에 앉지 못했을 겁니다. 욕심만 채웠기에 가능한 일이죠. 그리고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높은 사람의 욕심을 채워 주는 일을 평생 해 왔습니다. 누구보다 잘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유대명은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능력으로 욕심을 채우기에는 부족했기에 남의 욕심을 채워 주며 조금씩, 조금씩 더 큰 자리에 앉는 방법.
“좋습니다. 차장님 의지도 클럽에 전하겠습니다.”
그 방법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했고 그렇게 살아왔다.
“대신. 실패의 대가도 만만치 않다는 걸 기억해야 할 겁니다.”
단 한 번의 실패로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리스크 따위는 생각하지도 못한 채 말이다.
“아! 그리고 한치우 좀 리포팅해서 자료 좀 보내 주십시오.”
“한치우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운 좋게 얻어걸려 언론에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거지 이제 겨우 시보일 뿐입니다.”
“클럽 마스터가 신경 쓰고 계십니다.”
“네? 마스터가요?”
척.
유대명의 물음에 배달원이 나갈 준비를 하려 헬멧을 썼다.
“어쩌면 차장님보다 클럽에 더 빨리 들어올 수도 있을 겁니다.”
“허… 시보 따위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
“마스터는 지금이 아니라 앞을 보고 계시는 겁니다.”
한계가 정해져 있는 유대명과 달리 치우의 끝은 아직 정해져 있지 않았다.
둘 다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지만, 잠재된 힘은 치우 쪽이 훨씬 더 많으니까 말이다.
“제가 확실히 처리할 테니 신경 안 쓰셔도 된다고 전해 주십시오.”
“지금 마스터가 시키신 일을 거부하는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리포팅 자료 보내 주시길 바랍니다.”
나갈 준비를 마친 배달원은 문을 열었고, 유대명은 깊은 생각에 빠진 듯했다.
‘씨발… 시보 따위가…….’
뭔지 모를 패배감.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다.
호랑이가 될 치우와 달리 자신은 그저 누군가의 개밖에 되지 못할 거라는 걸.
씨익.
‘근본부터가 다른데 별 수 있나.’
고개를 숙인 채 분노하고 있는 유대명의 모습을 보며 배달원은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이나 나나 그저 심부름꾼이라는 걸.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 * *
쾅.
“이 정도면 될까요?”
“네. 필요한 영상은 다 녹화했으니 돌아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조사실 문이 닫히고 조금 지쳐 보이는 강서빈 이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검찰이 가진 수많은 자료를 봐야 했기 때문이다.
없어진 단 하나의 자료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리고 없어졌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 말이다.
“그럼 사라진 게 두 사람이 가진 차명 계좌 목록인거네요?”
“네, 맞습니다. 제가 특수부에 넘긴 자료 중에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이죠.”
“사본은 당연히…….”
사실 자료의 유무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가진 자료만으로도 천재학, 천재석을 기소하는 것은 충분하니까.
다만, 두 사람의 숨겨 놓은 비자금을 찾기 위해 필요한 지도로써 역할을 할 것이었다.
“네, 있습니다. 검사실로 다시 보내겠습니다.”
“아니요. 저한테 직접 주시죠. 아직 제 검사실이 아니거든요.”
웃기지 않은가.
도둑놈 잡는 검사실에 도둑이 있다는 사실이.
그 도둑이 누구인지 대충 예상은 가지만, 겁만 주어서는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증거가 없다면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네. 그럼 치우 씨한테 직접 보내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쳐 보이는 강서빈을 부축하다시피 길을 안내해 지검 밖으로 나오자 멀리 민태호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구, 선상님. 수고하셨어라.”
민태호가 뒷문을 열며 말했다.
“그럼 편히 쉬쉽시오. 이사님. 본격적으로 사건이 진행되면 기소는 되시겠지만, 불구속 수사 받으실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탁.
“당분간 이사님 경호 좀 더 신경 써 주세요, 삼촌.”
“그려. 아그들 24시간 붙여 놓을 테니께 걱정 말어.”
문이 닫히고 민태호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다시 몸을 펴 주변을 바라보자, 심각한 얼굴로 대화하며 지검 입구로 다가오는 두 사람이 보였다.
“자료 사라진 거 빤히 알았을 텐데 어떡합니까, 부장님.”
“우리가 빼돌렸다는 증거가 없잖아.”
“그래도 강서빈 이사가 저희한테 넘겼다는 증거가…….”
흠칫.
몸은 깨끗해졌을지 몰라도 속삭이는 입에서는 여전히 악취가 풍겨왔다.
“그래. 조사는 다 끝났나?”
“네.”
“좋겠구나. 검사장님 총애를 받고 있어서.”
“아직 같이 사우나 갈 정도는 안 됩니다.”
“아무리 총애를 받는다지만 적당히 까불지 그래. 소속 부장한테 감히 야지를 주고 말이야.”
애써 침착하려 하지만 이천웅의 다리에는 떨림이 보였고, 민재홍은 떨림을 숨기려 화를 내며 지검으로 들어가 버렸다.
“건방진 새끼. 시보 끝나고 특수부는 오지 마라. 곧 부장님이 차장님 되시면 내가 부장이 돼 있을 테니까.”
“하하하, 과연 그럴까요?”
“웃어? 진짜 미쳤네, 이 새끼가.”
후환이 별로 두렵지 않기에 나온 행동이었고, 이천웅 역시 속마음을 숨기지 않고 거친 말을 내뱉었다.
그럼 나도 굳이 숨길 필요가 없지.
“슬슬 주변 정리해 놓으시죠. 지낸 시간은 얼마 안 되지만, 그래도 후배라 드리는 배려입니다.”
“뭐?”
당신과 민재홍의 법복이 수의로 바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뒷말을 삼키고 그들을 다시 바라봤다.
덜덜.
떨림이 심해지는 이천웅.
그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아실 텐데요. 떨리는 검사님 몸이 곧 포승줄로 묶일 거라는 걸.”
* * *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서초동의 한 바.
독한 위스키가 목에 걸리는 느낌이 기분 좋게 느껴지게 하는 음악이었다.
“하하하, 미운털이 제대로 박혔구나. 독주를 음료수처럼 들이키는 걸 보니.”
“네?”
“널 좋아했다면 지금 술병만 봐도 표정이 굳어질 텐데 반가운 것 같아서 말이야.”
옆에 앉은 이남윤 차장이 웃으며 말했다.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들이키는 이 술이 꽤 오랜만이라는 걸.
“아, 네…….”
회식은커녕 특수 1부는 내 존재가 눈엣가시일 것이다.
열 기수 이상 차이 나는 부장과 지도 검사에게 선전포고를 해 버렸으니 말이다.
그것도 직속 선배들을 기소하겠다는 엄청난 선전포고를.
그렇기에 이천웅 검사실은 전쟁이 터지기 일보직전인 상태였다.
이천웅과 내 자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있었고, 두 강대국의 긴장 속에 약소국과도 같은 수사관들은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래. 술을 사 주는 건 잘한 것 같다만, 네 목적은 한잔 얻어먹으려는 것만은 아니겠지?”
“네. 차장님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유능한 후배님께서 할 말이 기대되는데?”
“이천웅 특수 1부 검사와 민재홍 부장검사가 소명 그룹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흠…….”
이남윤 차장의 대답은 쉽게 들려오지 않았다.
술을 몇 잔 들이키며 머릿속에서 내 말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듯했으니까.
“연관이라… 조금 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있나?”
“네, 물론입니다.”
이남윤의 생각이 깊어진 이유.
이미 머릿속에 있는 무언가가 내가 건넨 말과 섞이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강서빈 이사님이 건넨 자료를 빼돌려 소명 그룹으로 건넨 정황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명 그룹의 스폰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확신하나?”
“그게…….”
말끝을 흐리며 이남윤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 그의 머릿속이 어떤지 모르니 말이다.
“그저 자네 생각을 묻는 걸세. 나도 비슷한 짐작은 하고 있었으니까.”
“차장님도 알고 계신 겁니까?”
“나는 1차장이고 특수부는 3차장 소관이니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우리한테 배당된 사건도 소명 그룹과 연관되어 있으면 전부 특수부로 넘어가니 모를 수가 있나.”
“강철호 검사장님이 사건을 이관시켰다는 말씀입니까?”
아무리 3차장이 특수부를 맡고 있는 요직이라 하여도 남의 사건을 빼앗아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남윤 역시 차장검사니까.
“아니. 강 지검장님 오시고 나서는 사건이 없었고, 지금 총장님이 중앙 지검장 자리에 계셨을 때는 비일비재했지.”
“그럼 혹시 검찰총장님도 소명 그룹의 스폰을 받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게 아니면 좋겠지만. 잘 모르겠네. 사건 이관이야 자주 일어나는 일이고, 대기업과 연관되어 있으면 특수부로 사건이 넘어가는 것이 썩 이상해 보이는 건 아니니까.”
“그럼 왜 의심하고 계시던 거죠?”
“기소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단 말이지. 처음에는 여론의 지지를 받는 기업이라 특수부가 소극적이라 생각했는데, 자네 말을 들어 보니 확신이 생겼네. 문제는…….”
두 사람이 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
혹은 자신보다 윗선이 연관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걱정.
“같은 검사를 그것도 중앙 지검 식구를 조사한다는 게 쉽지 않네.”
또는 더러워도 같은 식구라는 사실.
그런 것들이 이남윤 차장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한 것이다.
피나는 노력 끝에 사법고시를 보고, 죽을 것 같이 공부해 사법연수원을 상위권으로 수료한 사람들이 모인 검찰.
뭔지 모를 끈끈함이 서로를 가깝게 만들어 주었고, 선배든 후배든 뭐 하나 모자람이 없는 사람들이니 기수에 따른 상명하복이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길 건너편 식구가 있지 않습니까?”
“뭐?”
“대검 감찰부장님과 막역한 사이라 들었습니다.”
“하하하, 나보고 고자질을 해라?”
같은 지역 출신에 고등학교와 대학 동문인 두 사람.
“송 부장님이랑은 아삼육이긴 한데…….”
검사의 직급은 검찰총장과 검사 두 가지로 나뉜다.
다만 직명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검찰은 차장이 부장보다 높지만, 대검 감찰부장은 이남윤 차장보다 기수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마주보기도 힘든 선배일 것이다.
검찰의 최상위 기관인 대검의 부장은 지검장급이니까 말이다.
그중에서도 감찰부장은 2,000명의 검사를 감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실세 중에 실세다.
“정황 말고 증거가 있나? 식구를 고자질하는 데 뭐라도 들고 있어야지. 확실하면 더 좋고.”
스윽.
비워진 이남윤 차장의 잔 앞으로 CD를 건넸다.
USB에 익숙하던 내가 낑낑대며 복사한 CD 한 장.
물론 지금 세상에 USB가 없는 것은 아니다.
중앙 지검에서 아직 사용하지 않을 뿐이지.
“이게 뭔가?”
“강서빈 이사님의 참고인 조사 영상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고.”
“거기 보시면 저희가 가진 자료와 이사님이 특수부에 건넨 자료를 하나하나 대조하는 영상이 있습니다.”
영상속 내용을 열심히 설명했지만, 이남윤 차장의 고개는 끄덕여지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 아니니까 말이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특수부에 건넨 자료 하나가 사라졌더군요.”
“어떤 자료지?”
“두 사람이 비자금을 만드는 데 사용한 차명 계좌 목록입니다”
“아무리 담당 검사실에서 사라졌다지만, 그 사실이 증거가 될 수는 없네. 검사실에는 하루에도 수십 명이 다녀가니까.”
맞는 말이었다.
검사실에는 검사뿐만 아니라 수사관과 실무관이 있고 같은 부서의 다른 검사들이 얼마든지 오갈 수 있으니까.
“만약 검찰 도장이 찍힌 그 자료가 천재학 회장에게서 나온다면요?”
“뭐?”
착.
[수색영장]
품속에서 꺼낸 수색영장을 이남윤 차장 앞에 펼쳐 보였다.
“여기 오기 전에 법원에서 받은 따끈한 영장입니다.”
“하하하하하! 능력을 떠나 노련하기까지 하구나.”
“만약 천재학 회장한테 차명 계좌 목록이 적힌 서류가 나온다면 범위는 특수부로 좁혀지고, 감찰부장님이 나설 수 있는 충분한 명분이 생길 겁니다.”
“그렇지. 차명 계좌를 파다보면 검찰 내 누군가에 또 다른 차명 계좌로 뇌물을 준 흔적을 발견할지도 모르고.”
쪼르륵.
“이 정도면 감찰부장님께 고자질하러 들고 가실만 합니까?”
이남윤의 빈 잔을 채우며 말했고, 이남윤 나를 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런데 말이야… 천재학 회장 집을 압수 수색했는데 그 자료가 안 나오면 어떻게 할 생각이지?”
“무조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압수 수색 영장의 범위는 천재학 회장의 집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자료는 분명 천재학 회장에게 있을 것이다.
차명 계좌 목록이자 자신의 치부가 적혀 있는 자료를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더 이상 옆에 없으니까.
지금 당장은 강서빈 이사를 대체할 만한 사람을 찾지는 못했을 것이고.
“바보가 아닌 이상 집에 놓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럼?”
짠.
웃으며 술잔을 들자 이남윤 차장이 내 잔에 건배를 했다.
“자신만 안다고 착각하는 곳에 숨겨 놓았을 겁니다.”
“자네는 마치 그곳이 어디인지 아는 것처럼 얘기하네?”
꼴깍.
잠시 음악이 멈췄지만 술은 여전히 달콤했다.
“내일 저녁 술은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하하하, 그래 기대하고 있지.”
* * *
압수 수색 영장을 집행함에 있어서 굳이 많은 인원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70층짜리 소명 그룹 사옥도 천재학 회장의 대저택도 아니니까 말이다.
“시보님 여기가 어디죠?”
운전을 하던 수사관이 목적지에 도착하자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논현동의 한 오피스텔.
여기를 찾아온 이유?
천재학이 세상에 숨기고 싶은 몇 가지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집안에서 정해 준 아내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한 여인.
그 여인의 집에 있을 차명 계좌 목록과 기타 비밀 서류들.
“천재학 회장의 내연녀 집입니다.”
“네?”
꽁꽁 숨겨 놨다고 생각한 그 모든 것들이 이제 세상에 밝혀질 것이다.
내가 여기를 알고 있는 이유?
천재학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절대 모를 사실이 하나 있었다.
지금 이 세상에서 과거로 돌아온 한 사람이 있다는 걸.
“내연녀요? 지라시라도 돌았나요? 아니면 내부 조사 자료?”
“둘 다 아닙니다. 강서빈 이사님의 제보가 있었습니다.”
진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거짓 또한 아니었다.
내게 일어난 일 자체가 진실로는 설명할 수 없으니까.
훗날 엄청난 스캔들과 재산 분할 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천재학 회장.
그리고 그 사이에 내연녀가 있다는 사실.
이 모든 게 몇 년 뒤 뉴스에서 나온다는 말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아무리 제보가 있다고 해도 소명 사실 없이 수색영장이 나올 리가 없는데…”
“주변 CCTV를 다 뒤졌습니다.”
쉽지는 않았다.
이 동네는 검사 배지를 들이민다고 겁을 먹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논현동의 건물주.
가족, 혹은 한 다리만 건너면 집안에 법조인이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어렵게 구한 CCTV 영상.
천재학 회장이 비서실장과 함께 박스를 옮기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 내 손에 영장을 들려 있게 해 주었다.
“과정이 어떻든 영장주의에 의한 정당한 공무집행입니다. 집안을 샅샅이 뒤져 차명 계좌 목록을 찾아내 주시기 바랍니다.”
오피스텔 입구에서 두 명의 수사관과 한 명의 여성 실무관에게 말했다.
물론 이천웅 검사실의 식구들은 아니었다.
빈 압수 수색 박스를 수도 없이 채워 본 경험을 가진 차장검사실 식구들.
꽤 괜찮은 지원군이었다.
“네!”
쾅쾅쾅!
― 누구세요?
초인종에서 흘러나오는 겁을 잔뜩 먹은 여성의 목소리.
“검찰에서 나왔습니다. 지금부터 유하나 씨의 집 압수 수색을 진행하겠습니다.”
문을 두드리며 말하자 집안의 인기척이 분주해짐을 느꼈다.
쾅쾅쾅!
“문 여시죠, 유하나 씨!”
― …….
천재학 회장에게 전화로 조용히 속삭이고 있을 것이다.
빨리 와 달라고.
“어떡하죠, 시보님?”
하지만 소용없을 것이다.
법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으니까.
“형사소송법 120조. 압수, 수색영장의 집행에 있어서는 자물쇠를 강제로 열거나 기타 필요한 처분을 할 수 있다.”
눈에 들어온 소화기를 집어 들며 말했다.
스윽.
보지는 않겠지만, 현관문 카메라를 향해 영장을 들이밀었다.
“영장도 제시했고…….”
“시보님 다치십니다. 저희가 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몸 쓰는 거 하나는 자신 있거든요.”
쾅! 쾅! 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달리 약간 거친 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문고리는 힘없이 부서졌다.
“실무관님, 먼저 들어가서 유하나 씨부터 격리시켜 주세요.”
“네, 시보님.”
위이잉.
와이어 돌아가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엘리베이터가 1층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신은 한 발 늦었어.’
지금 그의 눈에는 영장도 검사라는 직책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들어가셔서 전부 압수하세요. 문은 꼭 닫고.”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니 검사 배지와 수색영장만으로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천재학의 눈에는 그저 플라스틱과 종이로밖에 보이지 않을 테니까.
지원요청은 이미 늦은 것 같았고, 그렇다고 논현동 한복판에서 총질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얼른 들어가세요!”
“네.”
쾅.
수사관들에게 소리치자 문이 닫혔고 나는 문지기가 되었다.
두렵지는 않았다.
법뿐만 아니라 주먹도 자신 있었으니까.
띵.
― 11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