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짧은 겨울방학.
딱히 특별한 일은 없었다.
잠시 고향에 내려가 어머니가 차려 주신 따뜻한 집밥을 먹고 대학생이 된 성훈이와는 술잔을 기울였다.
“이제 이런데 가도 되는 거 아니여?”
“됐다니까 자꾸 그러시네!”
“아무리 검사가 될 양반이지만 이런 것도 쪼까 알아야지잉∼ 내가 아는 검사들은 하나 같이 이런 데 좋아허드만.”
“강철호 검사장님은 안 그런데요? 얘기해 드릴까요?”
“아따, 그 양반은 제외해야지.”
가볍게 술잔을 기울이려 만난 민태호와는 룸살롱 앞에서 약간의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해장국이나 한 그릇 먹고 집에 가요, 삼촌”
“워메… 진짜 술만 먹으려고 부른 겨?”
“그럼요?”
“아녀… 니 눈빛 보니께 대답 안 해도 알 것 같혀.”
조폭으로 살던 시절 수도 없이 가 지겹기도 했고.
여자를 가까이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곳에 낭비하기에는 다시 주어진 이 시간이 너무 아까웠으니까.
“하여튼 배운 놈들은 재미가 없당께.”
시간이 아까운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법연수원에서 방학이라 말하는 것은 집에서 공부를 하는 자습과도 같으니까 말이다.
연수생들은 무슨 일이 있건, 또 어디에 있건 경쟁을 한다.
집안이 빵빵한 연수생들은 방학 기간 동안 몇천만 원을 들여 특별과외를 받기도 했으니.
어찌 보면 집밥을 먹고 지인들과 술잔을 기울이느라 쓴 작은 시간조차 내가 과거로 돌아왔기 때문에 누릴 수 있었던 혜택이었다.
“이제 진짜 실전이네.”
그렇게 잠시 머리를 식혔고, 겨울방학이 끝난 지금 나는 잠시 연수원을 떠나왔다.
[서울 중앙 지검]
강철호의 뜻이 잔뜩 담겨 있을 내 첫 시보 발령지.
앞으로 2개월간 이곳을 드나들 것이다.
“시보 발령 왔습니다.”
“아, 네! 들어가시죠.”
입구 경비의 공손한 인사를 받고 지검 안으로 들어오니 새로운 세상에 들어온 것 같았다.
높은 사람들과 같이 취할 수도, 혹은 높은 사람들을 취조할 수도 있는 그런 세상에 말이다.
“특수 1부로 발령받은 검사직무대리 한치우라고 합니다.”
“아∼ 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검찰 내부에는 3대 권력 조직이 있다.
법무부 감찰국, 대검 중수부, 중앙 지검 특수부.
중수부는 사라지고 특수부는 반부패부로 이름을 바꾸겠지만, 지금은 이 세 개의 조직이 검찰의 실세라고 할 수 있고 검사가 될 연수생들이 초임발령지로 가장 선호하는 곳이기도 하다.
“쟤구나 사법고시 수석에 검사장님 낙하산이.”
물론 아무나 갈 수는 없다.
같은 검사라고 해도 3대 조직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보고 듣고 휘두르는 권력이 다르니까 말이다.
“누구는 대학 4년 다니면서 선배들 똥꼬 빨면 뭐하냐고, 검사장님 낙하산 한 번이면 바로 특수부로 오는데.”
“아직 시보잖아. 듣기로는 고졸이라던데.”
“시보부터 특수부로 보낸 뜻이 뭐겠어? 검사장님이 직접 키우겠다는 소리잖아. 그리고 쟤가 초임 검사될 때쯤이면 검사장님도 대검으로 이사 가실 텐데 말 다했지 뭐. 검찰총장 직계 라인이니.”
출입 카드 신청서를 작성하고 있는 내 등 뒤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뻔히 들으라고 하는 행동은 아닐 것이다.
내 귀에는 이어폰이 꼽아져 있으니까.
물론 어떤 음악도 나오지는 않지만 말이다.
“혹시 모르지 임용 성적 안 되서 검사 임관이 안 될지도.”
“그게 말이 되냐. 1차 시험 만점에 2차 시험이 90점이 넘는다고 하더라. 연수원에서는 날아다니고 있고 거기에 차기 검찰총장 라인까지… 넌 안 보이냐? 쟤 앞에 펼쳐진 꽃길이?”
“휴… 부럽다 부러워∼ 중앙 지검 발령 받았다고 잔치벌인 내가 한심하다.”
이미 신청서는 다 적었지만, 마침표를 찍을 수가 없었다.
등 뒤의 목소리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저기… 저분들한테 말씀드릴까요?”
내 이어폰에 음악이 흘러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민원실 직원이 조용히 속삭였다.
“괜찮아요. 앞으로 자주 마주칠 선배들인데 불편해지고 싶지 않네요.”
“아… 네.”
내 등 뒤에서 속삭인 말이 틀린 말도 아니었고. 이 정도 시기는 참아야 했다.
앞으로 시기와 질투는 더 심해질 테니까 말이다.
섣불리 마침표를 찍고 뒤돌아볼 수는 없었다.
“여기 다 작성했습니다.”
꾸욱.
앞으로 내가 찍어나갈 마침표는 이 서류보다 훨씬 더 가치 있을 테니 말이다.
[검사직무대리 한치우]
첫 마침표를 찍고 목에 검사라는 신분을 걸었다.
“그럼 특수 1부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직접 찾아가겠습니다. 내부 구경도 좀 할 겸.”
“아, 그럼 그러시겠어요?”
시보 생활이 끝나고 진짜 검사가 되어서도 다시 올 이곳.
길 정도는 익혀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특별 수사 제1부 검사 이천웅]
무엇보다 특수부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검사장실 바로 밑층이자 가장 가까웠으니까 말이다.
똑똑―
“안녕하세요. 한치우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치우 씨. 시보 생활을 함께할 특수 1부 이천웅 검사예요.”
웃으며 악수를 건네는 이천웅의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인사 기록지보다 실물이 훨씬 더 잘생기셨네.”
왜 소름이 돋았냐고?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류 때문에?
아니다.
잊기에는 특이한 이천웅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조금 전 내 등 뒤에서 들리던 목소리와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연수원 성적도 좋다고 들었어요. 아, 이거 지도검사로서 부담스러운데요. 하하하.”
그래도 다행인 게 있었다.
나에게 보이는 웃음이 거짓이라는 것과 그걸 알기에 꽤 불편해질 거라는 사실까지도.
근데 왜 다행이냐고?
이천웅의 말을 걸러들을 수 있는 필터가 생겼으니까.
“우선 첫날이니 저희 식구들 먼저 소개시켜 드릴게요.”
“네.”
“우선 이쪽은 김미래 실무관님.”
“안녕하세요, 한치우라고 합니다.”
그래도 우선은 불편한 감정을 숨기기로 했다.
그의 속마음을 알지만 특수 1부에 들어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천웅이 엘리트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특수부는 연수원 성적 상위 20%에서 임관되는 검사들 중에서도 최고의 엘리트들만 올 수 있는 곳이니까.
그의 가르침에 시기와 질투가 섞여 있다고 해도 얻어 갈 것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쪽은…….”
검사실은 보통 검사와 수사관 두 명, 그리고 실무관 한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검사의 수사를 보조하는 수사관.
행정과 사무를 담당하는 실무관.
또 규모가 큰 수사를 담당할 때는 가끔 객식구들이 들어오기도 한다.
“반가워요, 정일영 수사관입니다. 앞으로 한 검사직무대리님이라 부르겠습니다.”
“에이∼ 너무 길지 않아요? 그냥 한 시보님이라 불러요. 괜찮으시죠, 치우 씨?”
정일영 수사관의 말에 나를 보고 웃으며 말하는 이천웅.
“편하신 대로 불러 주십시오.”
직급으로만 따지자면 3급 평검사, 다음으로 5급 사법연수생, 7급 수사관, 실무관 순이었지만, 수사관들 옆에 쌓여 있는 서류 높이만한 경력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쪽은 우리 수사관계의 전설 최강원 수사관님.”
“잘 부탁드립니다, 한 시보님.”
“네.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여기는 특수부이고 저 서류에 쓰여 있는 피고인들의 이름은 꽤 유명 인사일 것이다.
그 말은 즉 검사들뿐만 아니라 수사관들 또한 능력 있고 경험 많은 사람들이란 소리다.
“이쯤이면 식구들 소개는 끝났고.”
더군다나 나는 객식구이며 실질적으로는 이제 경험을 쌓는 시보 검사이니 사실상 막내라고 볼 수 있었다.
“원래 첫날에는 부장님이 회식을 거하게 쏘시는데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니라서…….”
빨리 보고 싶겠지.
내가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회식은 금요일에 하고, 어떻게 바로 업무 시작해도 될까요, 치우 씨?”
“네, 괜찮습니다.”
오히려 나도 원하는 쪽이었다.
불편한 동거를 끝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이니까.
“자, 그럼 일단 드림 시티 사건부터 수사해 볼까요?”
“네, 좋습니다.”
이천웅 같은 사람에게 인정받는 방법?
녀석의 불만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강철호의 인맥일 것이다.
“검사장님이 직접 보내셨으니 치우 씨 실력이 출중할 거라 믿겠습니다.”
시보 따위가 중앙 지검 특수부에 온 것 자체가 강철호 검사장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으니까.
물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앞으로 내 능력을 보여 준다면 이천웅의 시기와 질투가 조금은 줄어들 것이다.
“열심히 생활해 보겠습니다.”
이 방문을 여는 데까지는 누군가의 힘이 보태어 졌지만, 이곳에서 생활하는 것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알려 줄 테니까.
“그래요. 그럼 본격적으로 업무 시작합시다.”
“저는 뭐부터 할까요?”
그것을 입증한다면 내가 앉은 이 책상이 꼴 보기 싫지는 않겠지.
그러고 난 뒤 입증이 한 번이 아니라 계속된다면 이 책상을 소중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고.
“일단 우리 한 시보님 실력부터 볼까요? 정 수사관님.”
“네, 검사님.”
“소명 그룹 수사 자료, 치우 씨한테 몽땅 넘기세요.”
“네? 전부 다요?”
“걱정 마세요. 역대 최고 점수 사시 수석에 비록 연수생이지만 특수부로 발령받은 이유가 있을 겁니다.”
칭찬 속에 잔뜩 꼬아 놓은 마음을 숨겨 수사관에게 지시하는 이천웅.
‘끝까지 존대하는 것 봐라.’
그 마음을 너무도 잘 알기에 속으로 생각했다.
보통은 친해지기 위해 연수원 기수를 핑계로 말을 놓는다.
나이가 걸리는 것도 아니었다.
소년 급제한 내 나이조차 빤히 알고 있으니 나를 존대하는 것은 존중이 아니라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우선은 능력을 인정받아 보자.’
아마 그렇게 된다면 거짓 존댓말이 아니라 조금은 친근한 반말로 나를 대하겠지.
이천웅의 성격이 어떻든 정의로운 검사일지도 모르잖아?
내가 이천웅에게 인정받기 위해 생각한 시나리오는 그가 정의로운 검사라는 전제하에 가능한 것이니까.
뭐… 전제가 틀렸으면 상대하지 않으면 되는 거고.
“그럼 자료 드리겠습니다.”
쿵.
분홍색 보자기에 잔뜩 담겨 있는 서류.
얼마나 무거운지 정일영 수사관이 내 책상 위에 올려놓자, 책상의 진동이 몸까지 타고 흘러들어와 울리게 했다.
[소명 그룹 비자금 사건]
‘와∼ 만지는 사건 사이즈부터 다르네.’
보자기를 풀고 첫 장을 보자마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치우 씨 괜찮겠어요? 일단 훑어나 봐요. 어차피 시보가 수사할 수 있는 건이 아니니 잘 모르겠으면 물어보고요.”
놀라고 있는 내 표정을 힐끔 본 이천웅이 말했다.
근데 이거 어쩌나…….
놀란 게 아니라 이런 사건을 만질 수 있다는 생각에 나온 감탄이었는데.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심지어 벌써부터 머리에서 공소장이 써 내려졌다.
소명 그룹 비자금 사건.
대한민국 재계 8위 그룹인 소명 그룹이 저지른 국내 최대 규모의 비자금 사건.
정확히 말하자면 소명 그룹 천민호 회장의 두 아들들이 저지른 사건이다.
‘규모만 컸지. 하는 짓은 딱 양아치들이었는데 말이야.’
두 아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고, 공평하던 아버지는 똑같은 지분을 유산으로 남겼다.
어떻게 보면 그게 국내 최대 규모의 비자금 사건이 벌어지게 된 이유일지도 모른다.
천민호 회장이 아들들의 서열을 정해 놓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래도 이 정도 사이즈면 능력을 인정받는 것에는 문제없겠지.’
두 아들의 경영권 싸움으로 왕자의 난이 발발했고, 더 많은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가 앞 다투어 비자금을 조성했다.
당연히 그 피해는 소명 그룹의 주주들과 직원들에게 돌아갔다.
“저기… 정 수사관님.”
“나한테 물어요, 치우 씨. 정 수사관님 바쁘시니까.”
정 수사관에게 던진 말이 이천웅에 의해 잘렸다.
“뭐 막히는 문장이나 이해 안 되는 부분 있어요?”
“아니요. 그런 건 없습니다.”
수천 장은 훌쩍 넘어 보이는 수사 자료.
여기에는 없고 내 머릿속에 있는 것이 있다.
‘이 사건 때문에 대한민국이 떠들썩했지.’
바로 이 수사 자료를 바탕으로 드러날 사실들이었다.
“네. 그럼 저한테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어떤 말을 할지 지켜보겠다는 듯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는 이천웅.
역시 하던 일을 멈추고 내 질문에 대답하는 정일영.
순간 검사실은 고요해졌고 내 말이 검사실 전체를 울리게 만들었다.
“본격적으로 수사 시작하겠습니다. 영장 하나만 청구해 주시죠.”
* * *
“저··· 검사님?”
겁먹으라고 던진 서류에 오히려 흥분이 된 나를 보며 정일영 수사관은 이천웅의 눈치를 봤다.
‘재미있는 녀석이네.’
이천웅의 표정에서 읽히는 속마음.
수사관의 곤란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슬며시 웃으며 나를 응시했다.
“수사 자료는 다 읽어 보시고 영장 청구하시는 거예요? 다 읽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을 텐데.”
손목을 흔들고 시계를 보며 말하는 이천웅.
“다 읽진 않았지만, 아직 부족한 것 같습니다.”
“뭐가 부족하다는 말씀이세요?”
“그건 영장을 청구해야 구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무엇이 부족하든 영장이 있어야 보충할 수 있으니까.
“서류부터 갖추고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읽어 보겠습니다.”
읽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연매출이 20조가 넘는 소명 그룹.
1조 원의 개인자산을 보유한 두 형제.
그런 엄청난 자금의 흐름 속에서 역류한 부분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한 보따리로는 어림도 없지.’
눈앞에 보이는 보자기 하나 분량의 서류 뭉치.
70층짜리 소명 그룹 사옥 하나만 털아도 검사실 안이 서류로 가득 찼을 것이다.
“어떤 영장인지 감조차 안 잡히네요.”
“압수영장과 뒤따라올 수색영장입니다.”
“대상은?”
“소명 그룹 사옥과 천재학, 천재석 두 분의 자택입니다.”
“하하하하.”
분명 이천웅은 웃고 있지만, 같은 식구인 수사관들과 실무관은 긴장한 채 눈을 굴리고 있었다.
“진짜 재미있는 분이시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천웅의 웃음이 절대 유쾌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거기 보자기에 뭐라고 쓰여 있어요?”
“인지 수사 제 1호라고 적혀있습니다”
특수부가 다른 부서와 다른 건 사건의 크기뿐만이 아니다.
인지 수사.
수사권을 가진 경찰과 검찰이 말 그대로 어떤 사건을 인지해 시건을 수사하는 것.
보통 인지 수사는 수사권의 꼭대기에 있는 검찰로 인해 시작되며 검찰에서도 특수부가 인지 수사를 가장 많이 했다.
왜?
특수부에서 만지는 사건들의 피고인은 대개 사회적 명망이 높은 사람들이었고, 확실한 증거 없이 건들기에는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가 그런 곳이다.
터진 사건을 수습하는 게 아니라 터트릴 사건을 만드는 곳.
그렇다고 아무 이유 없이 소명 그룹을 털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 보자기에 왜 인지 수사라 적었는지는 아세요, 한 시보님?”
“네 알고 있습니다, 검사님.”
소명 그룹 내부자가 특수부로 비자금 문제를 흘렸을 것이고 특수부는 사건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휘슬 블로워의 내부 고발이 있었을 것이고 본격적인 수사를 개시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개 직원의 고발은 아니겠지.
특수부가 움직였다는 것은 적어도 이사급 이상, 혹은 사장단 중 누군가가 검찰에 직접 휘슬을 불어온 것이다.
“그래요. 잘 알고 계시네. 그렇다면 우리가 영장 청구를 안하는 게 아니라 못 하고 있는 사실 또한 알고 계실 텐데요.”
고위임원의 고발이 있다하더라도 임원과 사주는 엄연히 다르다.
더군다나 사주가 가진 기업의 규모가 클수록 정계에 뻗어 있는 줄기 또한 많을 것이니 말이다.
“네. 다만 영장을 청구할 수 있는 확실한 명분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명분이요?”
“네. 저한테 맡겨 주신다면 영장 청구 이유란에 적을 확실한 명분을 만들어 오겠습니다.”
비싼 술.
술집 주차장에서 트렁크에 옮겨 담긴 현금 다발.
혹은 대법관 매형이 있다고 하더라도 영장을 기각할 수 없는 확실한 명분.
“흠······.”
이천웅은 외마디 말과 함께 머리를 굴리고 있다.
아마 허락할 것이다.
“일단 명분부터 만들어 오세요. 그런 다음 다시 고민해 봅시다.”
“네, 감사합니다.”
손해 볼 게 없기 때문이다.
실패한다면 내 책임으로 돌리면 되는 것이고, 성공한다면 자신의 공으로 돌리면 되니까.
“어디 가세요?”
이천웅의 컨펌이 떨어지고 나는 곧바로 검사실 밖으로 향했다.
“명분 수집하러 갑니다.”
“하하하, 그래요 잘 수집해 와 봐요.”
발이 아플 뿐, 머리는 아프지 않을 것이다.
이미 알고 있으니까.
거대한 자금의 흐름 속 역류된 부분을.
“차 필요하면 총무과에 요청하시고요.”
“괜찮습니다.”
복잡한 서울 도심에서는 차보다 지하철이 더 빠를 것이다.
“음··· 서울을 벗어날 필요가 없다는 얘기인가?”
“네. 일단 오늘은요.”
내가 맡은 첫 사건.
첫 사건치고는 사이즈가 조금 되지만, 오히려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시보가 해결한다면 그 무엇보다 크게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까.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 * *
[특별 수사 제1부 부장검사 민재홍]
“이 프로, 너 미쳤어?”
명패 앞 남자가 이천웅에게 소리친다.
언론에 자주 노출되는 특수부라 그런지 부장검사의 외모는 꽤 깔끔했다.
여느 다른 부장검사와 달리 배가 나오지도 않았고, 슈트에 먼지가 묻지도 않았다.
물론 겉모습만 그렇다는 거지 속이 깨끗한지는 모르는 일이다.
“돌았냐고! 아니지··· 시보한테 그런 사건을 맡기는 게 제정신일 리가 없지? 안 그래?”
“저와 부장님한테 더 낫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뭐?”
민재홍 부장검사의 불같은 화를 듣고서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이천웅.
“생각해 보십시오. 한 시보는 검사장님이 직접 거두려고 특수부로 보낸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더 조심해야지. 그 사건 때문에 한치우가 다치기라도 하면 검사장이 가만히 있겠냐고.”
“아니죠. 한치우가 이리 쑤시고 저리 쑤시고 다니면 오히려 역풍은 검사장님이 맞게 되는 겁니다.”
이천웅은 권력에 눈이 먼 사람이었다.
민재홍 부장도 마찬가지였고.
문제는 자신들의 권력욕을 채워 줄 수 있는 강철호 지검장이 특수부 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한치우는 특수부에서 경험을 쌓게 하고 대검으로 데려가면 그만이지만, 강력부 출신인 강철호가 특수부 라인을 대검으로 챙길 리는 없을 것이다.
“흠··· 그러다가 검사장이 꼬리 자르면 나랑 차장님이 모두 뒤집어쓰게 되는 건데? 어차피 대검으로 넘어갈 사람 아니냐 이 말이야. 이천 검사들을 통솔할 감찰총장이 될 양반이라고.”
“검사장님 성격 아시지 않습니까. 불의와 타협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프로 네 말은 한치우라는 불쏘시개를 이용해서 소명 그룹과 검사장한테 불을 붙이자?”
불같이 화를 내던 민재홍 부장검사가 이천웅의 미소에 화답했다.
“소명 그룹 비자금 사건은 명백한 팩트입니다. 재무 이사의 내부 고발이니까 말입니다. 다만 후환이 두려워 특수부 안에 가둬둔 거죠.”
이천웅은 알고 있었다.
만약 이 사건이 강철호 귀에 들어간다면 강철호는 절대 소명 그룹과 타협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만약 들쑤시고 다니다가 탈이 난다면 검사장님은 분명 한치우 편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럼 소명 그룹과 검사장님의 싸움이 시작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얻는 이득이 뭔데?”
“소명 그룹이 이기면 검사장 라인들이 줄줄이 떨어져 나갈 것이고, 피해가 심하다면 혹시 모르죠. 검사장님의 대검 이사가 취소될지도······.”
“허허, 과연 검찰 엘리트 답구만.”
민재홍 부장검사가 이천웅을 보며 참아오던 야욕을 터트렸다.
“그럼 그 빈자리는 빤하지 않습니까. 저희 차장님이 가시게 될 거라는 거.”
“그런데 말이야··· 자네 계획에는 한 가지 오류가 있어.”
“오류요?”
“한치우 걔 사시 수석에 연수원 탑이라며. 아무리 경험이 없다지만 검사장을 등에 업고 싸운다면 소명 그룹도 꽤 부담스러울 텐데? 승부가 어찌 될지도 모르는 것이고.”
[재무 이사 내부고발 자료]
민재홍 부장검사의 말에 이천웅이 품안에서 등기 봉투를 꺼내 놓는다.
“갑작스럽게 생각해 낸 계획이 아닙니다.”
“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더니만.”
치우가 본 것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영장을 청구할 수 있는 명분은 이미 이천웅의 손에 들려 있었다.
보자기가 아닌 이천웅의 품에.
“시보일 뿐입니다. 기소권이라는 칼을 손에 쥐어 줘 봤자 아직 한 번도 휘둘러보지 못한 그런 시보 말입니다. 피고인들 피가 좀 묻고 어느 정도 날이 서야 날카로워지는 법이죠.”
두 사람이 품고 있는 욕심에 부장검사실 안이 뜨겁게 느껴졌다.
“혹시를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네. 그리고 정말 만에 하나라도 한치우가 소명 그룹을 잡는다면 그때는 인정하고 무릎을 꿇어야죠. 저희가 살기 위해서요.”
이천웅은 생각했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다만, 부장님도 여기서 멈추지는 않으실 거라 생각 됩니다. 저희가 이길 확률이 아주 높은 도박이잖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민재홍이 외투를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오늘 저녁은 천 대표님이랑 한잔해야겠군. 자네도 같이 가지.”
“네, 부장님.”
두 사람이 방 안을 빠져나가니 환기가 됐고, 그제야 방안이 좀 식은 것 같았다.
[소명 그룹 천재석 대표이사]
그들의 욕심이 남기고 간 명함과 함께 말이다.
* * *
청담동의 고급 오피스텔.
40대의 성공한 미혼 남자.
어렸을 때부터 펜을 손에 놓지 않았고, 배움을 펼칠 길을 정계가 아닌 재계로 선택한 남자.
“번쩍번쩍하네.”
그런 남자가 살기에 눈앞에 보이는 건물은 너무나도 알맞은 곳처럼 보였다.
“A동이라 그랬나?”
며칠 전 소명 그룹은 대규모 인사이동이 있었다.
조금은 예상 밖의 인사이동이 말이다.
MBA 과정을 수료하고 소명 그룹의 굵직굵직한 프로젝트를 성공시켜 30대의 나이에 재무 이사가 된 강서빈.
소명 그룹 내부뿐만 아니라 주주들까지 이번 사장단 인사에 강서빈 재무 이사가 당연히 승진할 것이라 믿었지만, 인사를 며칠 앞둔 그는 돌연 회사를 사퇴해 버렸다.
사퇴라 발표하고 힘으로 내쫓아 버린 거겠지만.
왜?
빤하지 않은가.
천재학, 천재석.
두 사람이 벌인 왕자의 난에서 어느 쪽의 장수도 되지 않은 이유였다.
심지어 두 사람의 싸움 과정을 검찰에 낱낱이 일러 바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안 보여 주면 내가 직접 찾으면 되지.”
인사이동이 있고 난 후 내부 고발자가 누구인지 드러나자, 이천웅의 검은 속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연매출 20조짜리 기업의 재무를 총괄하는 재무이사.
그의 머릿속과 관리하는 서류는 비자금뿐만 아니라 기업 내부 전체의 정보를 통괄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다만, 내가 본 보자기에는 그의 머릿속과 그가 관리하는 서류들은 일체 없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교묘하게 빠져 있었다.
재무이사가 내부 고발을 확실히 한 게 아니라고?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렇다면 그가 인사에서 물을 먹을 이유도 회사를 그만 둘 이유도 없지 않은가.
“탄을 쓴 것은 아닌 것 같은데······.”
혹은 두 왕자 중 한 명이 강서빈을 이용해 검찰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는 것일 수도 있다.
강서빈 재무이사를 내쫓는 척 연기를 하면서 말이다.
“뭐가 됐건 일단 만나 보자.”
어찌 보면 강서빈 이사가 내 첫 심문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물론 검찰이 아닌 개인 자택에서이지만, 조사실이 아니라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재무이사라고 해도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은 오직 나에게만 있으니까.
“A동 맞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겨우 찾은 A동 입구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 누구시죠?
“서울 중앙 지검, 검사직무대리 한치우라고 합니다.”
시작해 보자.
내 첫 심문을.
* * *
엘레베이터로 향하는 내 걸음이 조금 무거웠다.
“추린다고 추렸는데도 많네.”
강서빈 이사의 오피스텔을 찾기까지는 일주일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알고 있는 미래를 입으로 떠들어 봤자 믿지 않을 테니 말이다.
“무거워 죽겠네.”
자료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너무 쉬워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이천웅이 발 벗고 나서 도와줬으니까.
“뭔 개수작을 부리는 거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흩어져 있는 조각들이 얼추 보이기는 했다.
칼을 줘도 못 베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이거나, 베일 대상에게 단단한 갑옷을 건넸거나.
“하긴 경제 사건이 주된 업무인 특수부에 줄기를 안 뻗어 놨을 리가 없지.”
그렇게 생각해 보면 강서빈 이사가 갑자기 쫓겨난 것도 이해가 갔다.
자기가 내부 고발을 했다고 직접 밝히지는 않았을 것이고 휘슬을 분 게 강서빈 이사라고 특수부의 누군가가 소명 그룹에 알린 것이다.
“누굴까.”
이천웅?
그렇다고 해도 작은 줄기일 뿐이겠지.
평검사 줄기는 그리 큰 영양분을 빨아들일 수 없으니까.
분명 더 큰 줄기가 있을 것이다.
비자금 사건이라는 큰 배설물을 내려보낼 수 있을 만큼 큰 줄기가.
띵동―
‘그럼 지금 강서빈 이사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을 거라는 얘기인데······.’
꼭대기 팬트하우스 층에 내려 거대한 현관문의 초인종을 누르며 생각했다.
“직접 오기 미안하니 부하 직원을 보낸 겁니까? 직무대리면 검사는 맞는 거요?”
예상대로 문이 열리자마자 강서빈 이사는 좋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보며 톡톡 쏘아 댔다.
“맞습니다, 검사.”
“내 질문의 요지는 그게 아닐 탠데. 당신이 검사면 나한테는 손님이 아닙니다. 내쫓고 싶은 불청객일 뿐이지.”
직원들과 주주들을 대표해 용기를 내어 휘슬 블로워가 됐지만, 사실이 밝혀지기는커녕 용기의 대가로 회사에서 쫓겨나 버린 강서빈 이사였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그 모든 원망을 검찰에게 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특수부와 이천웅한테는 더 큰 원망을 하고 있겠지.
“그런데도 내가 문을 왜 열어 줬는지 알아요? 욕이라도 실컷 해 주려고! 그래야 맺힌 응어리가 조금이라도 풀어질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저 원망이 연기가 아니라면 강서빈 이사는 두 왕자들과 짜고 검찰을 속인게 아니라 그저 검찰에게 당한 것일 뿐이다.
“소속이 특수부라 욕은 감내하겠지만, 찾아온 목적은 말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모든 상황이 정리되니 이 사건을 해결할 방법이 떠올랐다.
우선 심문보다는 협조를 구해야 했다.
소명 그룹 전 재무이사 강서빈한테서 말이다.
꾸벅.
“뭐··· 뭐하는 거예요?”
머리가 바닥에 닿을만큼 허리를 굽혔고, 강서빈은 그런 내 모습에 당황하며 말했다.
연기가 아니라면 강서빈은 정의로운 검사를 기대하고 공익을 대표한 것이었다.
“다 끝난 마당에 이제 와서 사과하는 겁니까?”
하지만 썩어 버린 몇몇 검사들로 인하여 공익을 위해 강서빈이 낸 용기는 처참히 짓밟혔다.
아직은 시보이지만 나도 곧 검사가 될 몸이고, 내가 몸담고 있는 검찰이란 조직이 강서빈에게 한 행동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일단은 숙이자고.’
그렇기에 강서빈이 잃어버린 검찰에 대한 신뢰를 되찾아 줘야 한다.
“검찰을 대표해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저 한치우가 소명 그룹 비자금 사건을 확실히 밝혀내겠습니다.”
사실 강서빈은 고개를 숙여도 될 만큼 좋은 사람이잖아.
악을 벌하려면 선과 손을 잡아야하고, 지켜 주지 못한 미안함에 고개를 숙여야 될 일은 앞으로 얼마든지 많을 터였다.
그리고 썩어 버린 검찰은 내 손으로 정화시키면 되는 거고.
“휴, 고개를 숙여 얼굴에 침을 뱉을 수도 없고··· 일단 들어와요.”
뭐가 됐건 신뢰가 조금이라도 있어야 강서빈 집 안으로 발을 들일 수 있고 커피라도 대접 받아야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당신 보따리 풀 동안 차나 내올게요. 커피 괜찮죠?”
“네. 아무거나 주십시오.”
강서빈이 잔뜩 부풀어 오른 내 가방을 보며 주방으로 향했다.
탁.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블 위로 놓이는 커피잔.
잔이 깨질 것처럼 날카로운 소리를 내었다.
강서빈의 좋지 않은 기분이 커피잔을 통해 테이블로 전해진 것 같았다.
“다 풀었으면 얘기해 봐요. 무얼 말하든 그리 신뢰가 가지는 않겠지만.”
풀어놓은 보따리.
훗날 언론에 발표될 몇 개의 페이퍼 컴퍼니들과 몇몇 자료들.
문제는 이 서류들이 공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스르륵.
“기가 막히네 진짜.”
서류들을 천천히 살펴보던 강서빈이 혀끝을 차며 말했다.
“뭐예요? 찍은 거라고 하기에는 너무 정확한데.”
아마 검찰에 전부를 넘기지는 않았겠지.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나와 마주 앉아 있을 수 없을 테니.
“진짜 당신 뭐죠? 내가 가진 최후의 보루를 당신이 갖고 있으면 어떡하자는 겁니까?”
“이 서류들 이사님이 공증해 주십시오. 그래야 영장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내가 당신들을 뭘 믿고? 살짝만 던져도 회사에서 모가지가 잘렸는데 전부를 던지면 진짜 내 모가지가 잘리겠죠.”
“검사가 아닌, 이 한치우를 믿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표정을 보아하니 고민조차 하지 않는 강서빈.
“저는 경영자입니다. 그래서 신뢰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일을 맡기지 않죠. 다만 검사는 누구보다 공정하고 정의로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제 자신이 한심하고 그렇지 못한 당신들이 원망스럽습니다.”
지금 강서빈의 머릿속에 내 믿음을 채워 넣을 공간은 없을 것이다.
검찰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찼으니까.
[그랜드 시티 재무제표]
이천웅의 허락이 아닌 내가 가진 힘으로 얻을 수 있던 자료 하나.
정확히 말하자면 명문대를 다니던 성훈이 동기의 힘으로 구할 수 있던 자료였다.
“이건······.”
물론 쉽게 구할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천재 해커로 이름을 날리던 녀석이 운 좋게 성훈이의 동기였으니까.
내가 꺼내 놓은 자료에 놀랄 틈도 없이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내 들었다.
“서울 중앙 지검 특수 1부 한치우 검사직무대리는 소명 그룹 비자금 사건을 수사함에 있어 그랜드 시티라는 페이퍼 컴퍼니의 재무 자료를 불법으로 수집하였다.”
띡―
조금씩 불신을 빼내어 믿음을 채울 공간을 만든다.
혹은 믿음을 저장시킬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도 될 것이다.
“받으시죠.”
내 목소리가 저장된 녹음기를 그랜드 시티 재무제표 위에 올려놓았다.
“뭐하자는 겁니까?”
“믿지 않으시니 제 목줄을 내어 드리는 겁니다. 또한 저는 특수부 소속이지만 썩어 빠진 윗선과는 다릅니다.”
“검찰은 상명하복이 가장 심한 조직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건 맞습니다. 저는 검사 중에서도 직급이 가장 낮은 시보입니다. 다만 저한테 내려지는 명령은 누군가를 거치지 않는 꼭대기의 명령이며 그 꼭대기는 절대로 썩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꼭대기요?”
“강철호 서울 중앙 지검장이자, 이제 곧 검찰총장이 되실 분입니다.”
강서빈 이사의 협조가 있다면 내가 준비해 온 이 자료들에 확증이라는 도장이 찍히게 될 것이다.
표적 수사나 불법 증거라 떠들어 댈 수도 없다.
기업의 재무를 통괄하는 재무이사가 공증한 자료들이니까.
“하··· 또 흔들리게 하시네. 내가 정경 유착이라는 말을 뼈저리게 느꼈고, 당신들과는 상종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공익 제보로 엄청난 불이익을 받았음에도 흔들린다는 것은 강서빈의 심성이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그런 심성이 말이다.
“그런데 직급이 제일 낮다면서 할 수 있겠어요?”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누구도 거치지 않은 가장 높은 곳의 명령을 받는다고. 그 말은 즉, 명령의 완수 여부도 직접 보고할 수 있다는 말이죠.”
“하··· 골치 아프네.”
강서빈의 머릿속에 꽉 차 있던 불신과 원망이 어느 정도 사리진 것 같았다.
불신이 빠져나가려 하니 두통이 오는 것이고.
“저는 지금 검찰과 검사들을 다시 한번 믿어보려 하는 게 아닙니다.”
강서빈이 내가 올려놓은 녹음기를 힐끔 바라봤다.
“무슨 이유가 됐건 한치우 당신이란 사람을 믿어 보려는 거지.”
“직원들과 주주들을 위한 이사님의 마음을 저와 같이 나누시죠. 검사라는 이름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강서빈이 만들어 준 증거로 영장을 청구하고, 내가 가진 기소 권으로 처단한다.
누구를?
권력과 재물에 눈이 멀어 공익을 어지럽히는 두 명의 철없는 왕자들을.
“좋아요. 검찰한테··· 아니, 한치우 당신한테 협조하겠습니다. 단 출처만 제 이름으로 만들어 드릴 것이며 조사는 받지 않을 겁니다.”
“이사님 얼굴과 말이 브라운관의 나오지 않는다면 여론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소명 그룹은 국민들의 신뢰를 전폭적으로 받고 있는 거.”
여론의 표를 얻을 수 없다면 지휘 계통으로 찍어 누를 수도 있을 것이다.
강철호가 아무리 차기 검찰총장이라지만, 지금은 지검장일 뿐이다.
그래봤자 지검장 따위가 라는 말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윗선이 충분히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아시지 않습니까. 여론의 표가 개입되지 않는 일이면 무서울 게 없는 높은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많다는 걸 말입니다.”
또, 강철호가 목줄을 쥐고 있지만, 엄연히 현직 검찰총장이 대검을 지키고 있으며 소명 그룹이 정계에 심어 놓은 나무가 얼마나 높은 곳까지 가지를 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 저와 제 가족들의 안전은 누가 지키죠? 이 선택도 모두를 위해 희생하는 겁니다. 모든 걸 폭로하는 대신 동남아 작은 섬의 영주권을 사야하니 말입니다.”
“지켜 드리겠습니다.”
“제가 말했을 텐데요. 당신은 믿어도 검찰은 안 믿는다고. 아니면 당신 혼자 저희 가족을 지킨다는 말입니까? 어디 특수부대라도 나오셨어요? 그렇다 해도 제 가족들을 불확실한 손에 맡기지 않을 겁니다.”
맞는 말이다.
대한민국 어디를 가도 강서빈과 그의 가족들이 100프로 안전하다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경찰, 검찰, 군대, 혹은 국정원까지 발 벗고 나서 지킨다고 해도 결국 그들도 공무원이자 국가기관이다.
소명 그룹이 정계에 심어 놓은 나뭇가지에 얼마든지 찔릴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럼요? 경찰이라도 움직이시게요? 아니면 군인? 명령에 움직이는 사람들은 언제나 더 높은 명령에 굴복하는 법이죠.”
그 사실을 강서빈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맞습니다. 다만, 절대명령권을 가진 그런 사람이 지켜드리게 하겠습니다.”
“하하하, 대통령이라도 찾아가시게요? 하긴··· 대통령과 연이 있다면 나를 찾아올 필요도 없었겠지.”
정계도 재계도 아닌 곳에서 절대명령권을 가진 사람.
합법적인 명령은 아니지만, 자신의 명령에 목숨까지 받치는 사람들이 있는 그런 존재.
다행히 그 존재는 나와 꽤 가까웠다.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다음 만남은 더 조용한 곳에서 뵙죠. 전화기 밑에 쥐새끼가 잘라 놓은 귀때기가 하나 있는 것 같네요.”
턱.
무전기 모양의 도청 방지 장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혹시······.”
“오늘 저희 대화는 못 들었을 겁니다. 이 장비가 꽤 좋거든요.”
이 장비를 챙겨온 이유.
빤하지 않은가.
자신들의 범죄를 머릿속에 담고 있는 사람의 입이 언제 열릴지 감시하는 것은.
“제가 드린 자료들 증거로 만들어서 오시길 바랍니다. 저는 이사님과 가족들을 확실히 지켜드릴 수 있는 분과 동행하겠습니다.”
도청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는지 반쯤 넋이 나간 강서빈의 표정을 뒤로 한 채 오피스텔을 나왔다.
“여보세요?”
전화기를 들고 나와 꽤 가까운 존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서빈을 확실히 지켜줄 수 있는 그런 존재한테 말이다.
“아이고∼ 우리 검사님 아닌겨?”
* * *
발 디딜 틈 없던 강남 거리에 밤이 찾아오면 화려한 네온사인이 더해진다.
그렇게 화려한 네온사인이 더해지면 이 거리의 주인이 바뀌곤 한다.
높은 건물들 꼭대기 층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던 왕들은 집을 찾아갔고, 지하에서 밤이 되길 기다린 왕은 네온사인의 빛을 양분 삼아 조금은 더러운 옥좌에 앉는다.
“변한 게 없네.”
조금은 과거로 돌아와 밤거리를 헤맸지만, 내 기억 속과는 크게 다른 게 없었다.
“혹시··· 아는 웨이터 있습니까?”
거리 한가운데에 멈추자 어색한 정장을 차려입은 한 남자가 물었다.
“태호 삼촌 만나러 온 한치우라고 합니다.”
꾸벅.
“안녕하십니까.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안내를 받아 지하로 내려가자 곰팡이 냄새가 풍겨 왔다.
“사장님 손님 오셨습니다.”
― 어∼ 그래 VIP룸으로 모셔.
“네, 알겠습니다.”
무전기로 위치를 묻던 남자의 뒤꽁무니를 쫓아가자, 복도 끝 가장 큰 문이 열렸다.
“여기입니다.”
“고마워요.”
양쪽으로 길게 정렬된 가죽 소파.
방 안을 은은하게 비추는 샹들리에.
테이블을 가득 채운 고급 위스키들.
“워메, 우리 꼬맹이··· 아니지, 한 검사님 오셨네.”
그 모든 것들의 중심에 있던 민태호가 나를 반겼다.
“삼촌··· 제가 조용한 곳에서 보자 그랬잖아요.”
“그려 알어. 여기보다 조용한 곳이 또 없어야. 우리 말 소리도 안 새어 나가 뿔고.”
하긴.
이 안에서만큼은 민태호가 왕이고, 민태호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우리 대화를 엿들을 수 없으니······.
“장사도 안 되고. 손님도 얼마 없으니 걱정 말어.”
길고 긴 복도에 늘어져 있는 수많은 룸들을 지나쳐 왔지만,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는 방들은 몇 개 없었다.
민태호가 운영하는 업소가 장사가 잘 안 되는 건 아니다.
“왜 장사가 안 돼요?”
“왜 안 되긴. 여 업소는 1종 허가가 안 난 업소이고, 기존에 있던 가시나들 다 빼 부렸으니 손님이 찾아올 리가 있겄어? 술잔 채워 줄 아가씨가 없는디.”
민태호가 변해서 그런 것이다.
불법과 멀어지려 노력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하하. 그래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으신 거예요?”
웃음이 나왔다.
민태호가 변하고 있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뿌듯했으니까.
“그래도 마음은 편히 손님들끼리 쌈박질 혀도 짭새들··· 아니지 경찰들한테 전화할 수도 있고, 상납금 안 갖다 바쳐도 되어서 버는 돈도 고만고만하기도 허고······.”
불법이 빠졌다고 민태호의 표정이 굳어지지는 않았다.
물론 웃고 있지도 않지만, 주름이 더 생기지는 않겠지.
“삼촌······.”
“와?”
쪼르륵.
술을 마실 생각은 없었지만 민태호와 내 잔을 채우며 말했다.
“그때 말씀드렸죠. 제가 검사가 된다면 삼촌과 마주 앉아 국밥을 먹겠다고.”
“그려. 그랬지.”
“그 약속 지켜 주실 수 있으세요?”
“음······.”
상황을 보아하니 민태호는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와 마주 앉아 국밥을 먹을 준비를.
“그려. 그래서 불법을 걷어 내고 있는 겨. 니랑 국밥을 먹으려면 적어도 수갑 찰 일은 안해야 되니께.”
“고마워요, 삼촌.”
민태호의 마음이 변했으니 이제 서울연합파를 바꿔야 했다.
“그럼 이제부터 서울연합파라는 간판 SY로 바꾸시는 게 어때요?”
“SY?”
“서울연합파의 이니셜을 딴 새로운 사업체입니다.”
조폭들이 하루아침에 회사원이 될 수는 없다.
또 내가 걸을 검사라는 길에는 주먹이 필요하기도 했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불법적인 것들만 합법적으로 바뀔 뿐입니다.”
“건달이 불법 없이 어떻게 기업을 운영한단 말이여? 할 줄 아는 거라곤 쌈박질이고 쓸 줄 아는 거라곤 주먹밖에 없는디.”
“쌈박질도 주먹도 모두 정의를 위해 쓰는 겁니다. 세상에는 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혹은 법으로 벌을 주기에는 분이 풀리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과거로 돌아왔을 때부터 단 한 번도 변하지 않던 내 신념.
“저는 삼촌이 필요합니다. 삼촌은 주먹으로 저는 법으로 세상을 깨끗이 만들고 싶거든요.”
세상에는 악이 너무 많고 법은 부족하다.
부족한 법을 보조하기 위해서는 주먹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게 바로 내 신념이다.
“아따 폼 나지만 영화 같은 얘기여.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당께?”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가진 신념은 그저 신념일 뿐이라는 걸.
다만, 이미 나는 영화 같은 일을 이미 겪었다.
과거로 돌아왔으니.
그래서 앞으로 펼쳐질 세상을 직접 연출할 수 있을 것이다.
향후 펼쳐질 미래의 시나리오가 내 손 안에 있으니까 말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삼촌. 그 영화의 감독이 저니까요.”
“하하하, 하여튼 꼬맹이 때나 지금이나 허벌나게 대찬 건 똑같당께.”
일단은 내가 필요한 주먹을 깨끗이 씻어 놓기로 했다.
“일단 조금은 더럽게 쓰던 주먹부터 깨끗이 씻어요. 삼촌도 삼촌 식구들도.”
“이미 씻고 있는디······.”
“옷도 갈아입고요.”
스윽.
[사업계획서]
술병이 가득한 테이블 위와는 맞지 않는 서류 하나를 올려놓았다.
서울연합파를 SY로 바꾸기 위한 계획서.
“이게 뭐여?”
“사업계획서입니다. SY가 시행하게 될 사업들이 적혀 있는.”
조폭들이 돈을 버는 방법은 생각보다 꽤 많다.
불법 대출, 불법 도박장, 불법 용역, 불법 유흥주점, 불법 흥신소.
기타 여러가지 사업이 있지만 공통적인 게 하나 있다.
모든 사업 앞에 불법이 붙는다는 것.
몇 가지 사업은 불법만 뺀다면 꽤 괜찮은 사업이 있을 수도 있다.
물론 불법이 빠진다면 조폭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이걸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보는 겨?”
며칠간 고민해 만든 사업계획서.
불법을 모조리 걷어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거기에 주먹을 씻은 조폭들이라는 조건 안에서 사업 분야를 정해야 했으니 어려움은 배가 되었다.
“쉽지는 않을 겁니다.”
고르고 골라 미래를 알고 있다는 유리함까지 섞기는 했지만, 조폭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사업은 아니었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SY를 운영하는 것은 나와 몇몇 이사들일 테니까.
“그래서 삼촌과 식구들을 위한 훌륭한 선생님을 모셔올 겁니다.”
다만 다른 것은 이사들을 철저한 검증하에 내 손으로 앉혀 놓을 것이다.
민태호를 배신하지도.
혹은 나에게 총을 겨누지도.
더 큰 재물에 마음이 변하지도 않는 그런 사람들도 말이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 내가 만든 SY 기업은 실패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민태호라는 기둥이 병에 걸려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합법적인 기업이었지만, 이사들과 직원들 모두가 민태호라는 뼈대에 붙어 있었기에 그의 죽음만으로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민태호의 뜻을 이어 받아 사업을 진행하려 했지만, 그 기둥에 기대고 있던 이들은 한치우라는 새로운 뼈대를 인정하지 않았다.
내가 총을 맞은 이유이기도 하고.
“선상님?”
“선생님이자 동업자이죠. SY를 훌륭하게 키워 주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민태호가 죽지도 않을 것이며, 주춧돌부터 모든 걸 내손으로 직접 만들 것이다.
“지금 나한테 경영 수업이라도 받으라는 겨?”
“하하하, 늦깎이 학생이라도 되시게요?”
“그라믄?”
“경영보다는 새로운 인생을 가르쳐 주실 선생님이라 생각하세요. 음지가 아닌 양지의 세상을 가르쳐 줄 그런 선생님이요.”
계획대로 된다면 너무나 완벽한 시나리오였다.
양지에서 잘나가는 기업이 하나 생길 것이며, 직원들과 대표는 음지의 악을 주먹으로 처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곳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검사 한치우가 되겠지.
돈과 주먹, 그리고 법까지.
어떤 상대와 싸워도 쉽게 지지 않을 것 같은 완벽한 준비 상태를 만들어 놓을 것이다.
“그려 한 번 해뿔자. 나는 니와 한 배를 타기로 혔고, 식구라 생각하고 있응께.”
민태호가 어지럽혀진 테이블에서 사업계획서를 챙겨 품속에 넣었다.
“법으로 싸우든 주먹으로 싸우든 일단은 국밥 한 그릇 하기로 약속한 것도 있응께.”
“왜 자꾸 모든 얘기가 국밥으로 흘러요?”
“또 말해야 되는 겨?”
휙.
“됐어······.”
길고 지루한 얘기가 시작될 것 같아 손을 내저었지만, 민태호의 입은 열리기 시작한다.
“국밥 한 그릇에 니와 내 사이에 있던 일이 모두 담겨 있는겨. 마주 앉아 국밥을 먹는 것은 서로 믿고 일을 헌다는 뜻이기도 하니께.”
“됐다니까요······.”
“하여튼 싸가지 허고는. 글고 국밥 얘기는 니가 먼저 꺼냈어야.”
무겁던 분위기가 조금은 가벼워졌다.
몇 모금 들이킨 위스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톡톡.
“뭐가 됐건. 위험하긴 했어도 니 덕분에 나가 변할 수 있던 것 같고. 얻은 것도 있응께 이번에도 니 손잡고 따라갈 것이여.”
품속에 넣은 사업계획서를 치며 말하는 민태호.
분위기를 무겁게 만든 사업계획서가 민태호의 품으로 들어갔고, 테이블 위에는 위스키만 있었다.
그게 분위기를 가볍게 만든 것이고.
“뭐 얼추 얘기 끝난 것 같은디 본격적으로다가 술이나 마셔 뿔까?”
“제가 분명 말씀드렸을 텐데요. 삼촌 술 조금만 마시라고. 그리고 건강검진 6개월에 한 번씩 꼭 받으라고요.”
“워메∼ 또 그 얘기여?”
고단한 고3.
지옥 같은 연수원 스케줄.
심지어 군 생활에서도 민태호의 건강검진은 반드시 챙겼다.
내가 걸어갈 길에 있어 꼭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금은 내가 민태호를 변하게 했지만, 과거로 돌아오기 전 한치우를 변하게 한 것은 민태호였다.
모든 걸 잃어버린 지옥 끝 한치우를 구해 준 사람.
그런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누구보다 강하던 민태호가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고,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날려 버리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이번에 안 받으시면 공권력을 이용할 겁니다. 아시죠? 아직 삼촌 꼬투리 잡을 문제 많다는 거.”
“지금 내 건강문제를 공권력까지 들먹이며 협박하는 겨?”
“네. 삼촌이 좋아하시는 국밥 혼자 먹고 싶지 않거든요.”
“이건··· 싸가지가 없는 겨, 아니믄 내 생각을 허벌나게 하는 겨··· 도대체 뭐여.”
“둘 다입니다. 중앙 병원에 예약해 놓을 테니까 꼭 받으세요.”
쪼르륵.
민태호의 잔을 휴지통에 비우며 말했다.
“오늘은 그만 마시세요.”
“진짜 돌아 뿔겠구만. 이제 목 좀 축인 것 같은디.”
“건강도 건강이지만, 지금 술 마실 시간이 없습니다, 삼촌.”
“그건 또 뭔 소리여?”
술을 못 먹는다는 현실보다 내 입에서 나올 얘기가 더 불안한지 민태호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선생님을 모셔 와야 됩니다.”
“아까 그 선상? 그 사람 다리 한 짝이라도 없는 겨?”
“그건 아니고요.”
정확히 말하자면 지켜야 한다.
“불안하니께 곱씹지 말고 싸게 뱉어 뿌라.”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괜히 묻는다.
술이 됐건 국밥이 됐건 한바탕 일을 하지 않고서는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지켜야 합니다. 지금 위험하시거든요.”
쨍그랑.
테이블 밑에서 몰래 술잔을 채우던 민태호가 잔을 떨어트렸다.
“그려··· 니가 왔는디 스펙타클한 일이 안 생겨 뿔면 이상허지······.”
이제 몰래라도 술잔을 채울 생각이 없는 듯 민태호가 자리에서 육중한 몸을 일으켰다.
“야들아!”
민태호의 부름에 룸 안으로 수많은 덩치들이 들어왔다.
“어디로 가면 되는 겨.”
보기만 해도 든든했다.
오직 민태호의 명령으로만 움직이는 덩치들이.
그리고 이번 명령은 정의로울 것이다.
“일단 청담동으로 가면 됩니다.”
“그려 가자. 우리 선상님 지키러.”
* * *
“시민들 피해 안 끼치게 적당히 흩어져 있그라.”
“네, 형님.”
청담동에 한 파인 다이닝.
꽤 고급스러운 음식이 나오는 곳.
유명 셰프가 정성을 들여 오직 한 테이블에만 집중하는 원 테이블 식당.
“오늘 런치부터 디너까지 전부 예약해 놨으니 아무도 접근 못 하게 해 주세요.”
“검사님 말 들었지? 유난 떨지 말고 수상한 녀석만 막그라.”
톡톡.
민태호에게 조용히 속삭였고, 민태호는 한 덩치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들어가요, 삼촌.”
곳곳에 직접 심어 놓은 신선한 식재료들.
분위기를 위해 조성해 놓은 조경과 조명.
프라이버시에 민감한 사람들을 위한 복잡한 입구.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만남을 지켜 줄 것 같았다.
와······.
복잡한 입구를 어느 정도 들어가자, 유리창에 비친 강서빈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 표정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인간보다는 곰에 가까운 덩치를 가진 민태호가 내 뒤에 서 있으니 말이다.
“입구가 허벌나게 좁네잉.”
오랜 운동으로 넓어진 내 어깨에도 쉽게 지나다니는 입구가 민태호에게 만큼은 유독 작았다.
민태호가 주먹을 쓰지 않았다면, 세계를 떠들썩하게 할 운동선수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력이나 피지컬이나 어느 하나 빠지지 않았으니까.
“삼촌이 큰 거예요.”
거울에 비치는지도 모르고 주먹을 쥔 채 내 뒷통수를 때리는 척하는 민태호.
“다 보입니다, 삼촌.”
“크흠··· 그려? 얼른 가자고.”
“그리고 그 주먹 휘두르면 살인미수입니다.”
“검사 돼 뿔더니 자꾸 법을 들이밀어 뿌네··· 겁나게시리.”
딩동―
민태호의 궁시렁이 차임벨에 묻혔다.
곧 우리는 식당 문을 열었지만 반겨 주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뭐여 비싼 식당이라고 째는 겨?”
“더 비싼 값을 치루어서 일부러 서버들을 뺀 겁니다. 먹는 입은 셋인데 듣고 있는 귀가 더 많으면 안 되니까요.”
“어! 저 양반 티비 나오는 양반 아니여? 근디 왜 귀때기에 뭘 꼽고 있디야. 요리사들은 다 저런 겨?”
끼익―
우리가 가까워지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강서빈.
나무 의자가 빠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에 다시 한번 민태호의 말이 묻혔다.
‘휴······.’
그 소리가 오히려 반가웠다.
보안을 위해 만든 여러 상황을 민태호에게 일일이 설명해 줘야 하는 귀찮음을 대신해 주었으니까.
“일찍 오셨네요, 이사님. 이쪽은 민태호 씨입니다.”
“아··· 네, 반갑습니다. 강서빈이라고 합니다.”
“아! 예 지도, 아니, 저도 반갑습니다.”
민태호의 큰 손이 강서빈 이사의 손을 먹어 버릴 듯 잡고 흔들었다.
잡은 손의 크기가 다르듯 살아가는 삶조차 완전히 다른 두 사람.
“삼촌, 그냥 사투리 쓰세요. 몸에 개미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요.”
입이 불편한 민태호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음지에 왕 민태호는 양지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될 것이다.
그 와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음식과 풍미를 더해 주는 와인 앞에서 말이다.
“일단 앉으시죠.”
“네.”
“그려······.”
쪼르륵.
만날 일이 없는 두 사람이 한 테이블에 앉아 와인 잔을 채우려 잔을 높이 들었다.
“먹어도··· 되는 겨?”
“네? 와인 못 하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요 검사 양반이······.”
끄덕.
눈치를 보는 민태호에게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주자 무안한 강서빈의 손이 다시 와인 병으로 향했다.
“한 잔만 하세요.”
“에휴··· 없던 마누라가 생겨 분 기분이여······.”
우리의 대화에 눈치를 보고 있는 강서빈.
“술을 잘 못하셔서요.”
병을 들고 우물쭈물하던 강서빈에게 말했다.
“뭣이여? 나가 술을 못해 뿐다고?”
간암에 걸려 세상을 떠난다고 말할 수도 없을뿐더러 자신을 지켜 줄 민태호의 건강에 문제가 있을 거라는 불안감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아, 네··· 그럼 잔만 채우시죠.”
뭐··· 이런 식이라면 그런 일이 생기지도 않겠지만.
잔이 채워지자 테이블에 어색함이 조금은 사라졌고, 두 사람은 내 입을 보며 집중했다.
“눈치챘겠지만, 여기 민태호 씨가 이사님을 지켜 주실 겁니다. 저한테 있어서는 친 삼촌과 같고, 제가 가장 믿고 신뢰하는 분입니다.”
단순히 강서빈을 지키기 위해 민태호를 대동한 것은 아니었다.
“실례지만··· 뭐하시는 분인지?”
“서울연합파 두목입니다.”
“그럼 혹시··· 조폭?”
“네, 맞습니다.”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다.
“아야··· 쪽팔리게 대놓고 말을 허면 어쩌냐······.”
어차피 숨길 수도 없었다.
처음 본 거리낌에 불안해하는 강서빈이지만, 이제 곧 민태호의 보호가 가장 안전하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고 지금의 신분을 창피해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미래에는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하시고요.”
“휴··· 제가 원한 보호는 이런 게 아닙니다, 한치우 씨.”
“서울연합파는 서울 25개 구를 통합하고, 거느린 식구만 2,000명이 넘습니다. 과장을 보태면 서울 안에서 민태호 씨 한마디면 피 빨아먹은 모기 한 마리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모기 한 마리까지도 보호할 수 있다는 말이죠.”
“워메··· 대놓고 나 잡아가쇼 하는구먼.”
“그래도······.”
강서빈이 민태호의 눈치를 보더니 내 귀로 얼굴을 밀착시켰다.
“조폭이지 않습니까. 경찰이 공권력으로 밀고 들어오면 보호막이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귓속말로 조용히 속삭였지만 민태호 역시 무슨 말인지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전에 말씀드렸죠. 강철호 검사장님과 알고 있다고.”
“네.”
“강력부 출신 서울 중앙 지검장입니다. 강력부 라인을 꽉 잡고 있으며 서울의 기소권을 가지고 계시죠.”
이미 대부분의 불법을 걷어 낸 서울연합파였지만, 잡을 꼬투리는 수도 없이 많았다.
다만 강철호가 존재하는 한 쉽게 꼬투리를 밟을 수는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말입니다··· 경찰의 수사는 결국 검찰의 판단하에 이루어집니다. 또한 사람을 벌해 달라 요청하는 것은 검사만이 할 수 있죠.”
기소 독점 주의.
경찰이 아무리 발버둥 쳐 봤자 검사의 허락 없이는 죄를 물을 수 없다.
검찰의 기소권 독점은 수도 없이 많은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내가 총에 맞아 눈을 감는 그날까지도 변한 것은 없었다.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저보다 더 안전하게 이사님을 지켜 주실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일어나셔도 좋습니다.”
“제가 가져온 가방을 열지 않는다면 누군가의 보호를 받을 필요도 없을 텐데요.”
두꺼운 서류 가방을 보며 말하는 강서빈.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저 가방을 채우지 않았겠지.
불안에 떨며 이곳을 찾지도 않았을 것이고.
“강요는 하지 않겠습니다. 근데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뜬다 하셔도 이사님 마음이 결코 편하지 않을 거라는 걸요.”
두꺼운 가방을 풀지 못하고 다시 들고 간다면 마음 또한 무거워지는 것은 당연한 얘기 아닌가.
그 이유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더더욱이나.
“휴··· 한치우 씨. 진짜 못되셨습니다. 제가 거절 못할 걸 아시고 처음부터 계획하신 겁니까?”
“그건 맞습니다만 잡은 물고기라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이사님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습니다. 존중 받아 마땅한 분이니까요.”
강서빈의 손이 가방으로 향했다.
마음이 열렸고 가방의 입구 또한 열렸다.
“치우 씨가 준 자료에 제가 가진 기밀 자료를 더했습니다. 워낙 꼼꼼하게 준비해 주셔서 그리 어렵지도 않았고요.”
“감사합니다.”
“다만,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자료를 정리하다보니 저도 모르는 돈 세탁기가 몇 개 있던데 어떻게 아신 겁니까? 검찰에서는 절대 파악할 수가 없었을 텐데요. 저도 모르고 있었으니.”
첫 번째 삶에서 나는 살인을 저질렀다.
그렇게 사법연수생은 감옥에 가게 되었고, 민태호를 만나 서울연합파이자 SY의 법무이사가 되었다.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서울연합파를 SY로 바꾸기 위해 밤낮으로 한 경영 공부였고 소명 그룹 비자금 사건은 꽤 훌륭한 교재가 되어 주었다.
‘모를 수가 없지.’
워낙 유명한 사건이었고 굳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알만큼 언론에 수많은 보도가 나왔으니 말이다.
물론 모든 걸 기억할 수는 없기에 몇몇 자료들은 빼먹었지만, 이 정도만 있어도 소명 그룹을 압수 수색할 이유는 충분할 것이다.
“제 손에서 어떤 자료가 나오든 이사님을 거치지 않으면 추측이 될 뿐입니다.”
“제가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닌데요. 치우 씨 손에서 나온 자료가 추측이 아니라 너무 정확하니 묻는 겁니다.”
“요 검사 양반이 가끔 보면 신통한 데가 있다니께요······.”
대충 넘어가려 했지만 강서빈은 집요했다.
불안한 상황이니 무슨 일에도 확신을 원하는 것이다.
“제가 드린 자료의 출처를 밝힐 수는 없습니다. 믿지도 않으실 테고요. 민태호 씨 말대로 제가 쫌 신통하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흠······.”
부족했다.
강서빈의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기에는 내 대답이 말이다.
“다만 제 이름 석자를 걸고 한 가지 약속하겠습니다.”
“무슨 약속이요?”
“제가 가진 신통함을 절대로 나쁜 일에 쓰지 않겠습니다.”
“하하하.”
처음 보는 강서빈의 미소와 함께 나를 보는 눈빛이 조금은 달라진 것 같았다.
더는 눈빛 속에 불안이 섞여 있지 않았으니.
또 힘을 주어 서류에 올려놓던 주먹이 풀어졌다.
“출처보다 더 마음에 드는 대답이네요.”
“감사합니다. 믿어 주셔서.”
스윽.
그렇게 미소와 함께 두꺼운 파일 철이 내 손으로 들어왔다.
“앞으로 어떡하면 되죠?”
“그건 민태호 씨가 말씀해 주실 겁니다.”
톡톡.
“그려! 와?”
귀에 들어오지 않는 우리의 대화.
집중을 하지 못한 탓에 음식을 커트러리로 콕콕 찔러 보던 민태호를 치자 기계처럼 반응했다.
“삼촌 이사님이 묻잖아요. 어떻게 하면 되냐고.”
“아∼ 우리 아그들 숙소에 이사님 거처를 마련해 두었으니께 걱정 마쇼잉. 위아래로 우리 식구덜이 지키고 있을 테니께.”
“숙소요?”
“동네 여관 같은데 아니어라. 이사님 모신다고 호텔 하나 접수했는디······.”
콕콕.
긴장을 했는지 새어 나오는 민태호의 버릇을 옆구리를 찔러 막았다.
“접수요?”
“아이고. 내가 또 실수를 해 뿟네. 접수가 아니라 큰 돈 들여 빌렸어라. 좋은데 사신다고 들었는디 최대한 똑같이 하려고 고생 좀 했으니께 불편하시지는 않을 겁니더.”
비록 불편하다고는 해도 안전할 것이다.
민태호가 호텔 입구를 떡 하니 지키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염치없지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치우 씨.”
“서울연합파는 불법적인 사업을 정리하고 합법적인 사업을 시행하려 합니다.”
스윽.
민태호에게 눈치를 주자 품속에서 사업계획서를 꺼내 놓는다.
“SY?”
“서울연합파의 이니셜을 딴 기업입니다. 아시겠지만··· 민태호 씨는 아직 대표가 되기에는 경영 능력이 부족합니다.”
꾸벅.
“앞으로 스승님으로 모시겠어라!”
민태호가 형님을 만난 듯 허리를 접고 큰 소리로 외쳤다.
“비록 소명 그룹으로 복귀는 못하시겠지만, SY의 재무 이사가 되어 주십시오.”
꾸벅.
나 또한 강서빈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크고 더러운 것보단 작지만 깨끗한 기업이 될 겁니다. 이사님이 있다면요.”
“하하하, 참 재주가 좋으시네.”
“어떤 재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거절 못하게 부탁하는 재주 말입니다.”
“제가 가진 재주는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을 찾는 겁니다.”
“하하하하, 미치겠네요, 진짜.”
굳이 수락을 듣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마음에 서류를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분은 식사하시죠. 유명한 셰프님이 만드신 것이니 먹을 만하실 겁니다.”
“치우 씨도 먹고 가시죠?”
“괜찮습니다. 맛있는 음식 급하게 먹고 싶지 않아서요.”
“그래요. 나중에 제대로 식사 한 번 합시다.”
“불편하시겠지만 잠시만 호텔에 계십시오.”
쉽지는 않았지만 내 손에 들어온 자료.
소명 그룹 사옥과 두 왕자의 자택에 걸려 있는 자물쇠를 끊어 버릴 수 있는 무기가 될 것이다.
“이사님 집 밖에 있는 더러운 것들 먼저 감옥에 집어넣고 모시러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