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차치홍 기자]
시선은 방영호 회장의 휴대폰으로 향하고, 귀에는 차치홍 기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제보를 하나 할까 합니다.”
― 실례지만 어디시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 일단 제 얘기부터 들으시죠.”
제보는 출처가 중요하다.
믿을 만한 곳에서 나왔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제보의 신뢰성을 가리니까 말이다.
다만, 제보가 흥미로울 때는 기자들조차 그 사실을 잊기도 하지만…….
― 아니 그게 무슨…….
“방 회장님의 아들이 납치되었다가 구출되었습니다.”
― 네?! 성훈산업 방영호 회장님 말씀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다급해지는 걸 보니 차치홍 기자 역시 여느 기자들과 마찬가지였다.
“네. 방영호 회장님의 아들 방성훈이 지금…….”
톡톡.
휴대폰을 귀에서 떼고 옆에 있던 민태호의 두꺼운 팔뚝을 쳤다.
“삼촌 어디 병원이에요?”
‘중앙 병원.’
조용히 속삭이자 민태호가 궁금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입모양으로 대답했다.
“지금 구출되어 중앙 병원에 있습니다.”
― 일단 감사합니다. 찾아가 보겠습니다.
“네.”
탁.
내 휴대폰의 폴더가 닫힌 지 5초도 되지 않아 방영호 회장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 회장님!
“사정이 있어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 어?
목소리가 멀어지다가 가까워진 걸 보니, 혹시나 해서 통화 기록을 확인해 본 모양이다.
하지만 그의 휴대폰에는 선명히 찍힌 방영호 회장의 이름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믿음이 안 가시면 방 회장님한테 먼저 찾아가 보시던지요. 집 주소는…….”
― 아니요. 방영호 회장님의 휴대폰을 가질 사람은 몇 안 되죠. 그걸로 됐습니다. 지금 바로 가 보겠습니다.
탁.
전화가 끊기자 어깨를 주무르던 민태호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휴∼ 꼬맹이 니 하는짓 보니께 또 머리 아픈 일 만들고 있고만.”
“하하하, 이제 익숙해질 만도 하잖아요.”
“뭘 익숙해진다는 겨?”
과거로 돌아오기 전 나는 민태호의 머리가 되어 다른 조직들을 하나씩 집어삼켜 왔다.
덕분에 서울연합파는 SY라는 기업이 될 수 있었고.
지금이라고 해서 별다른 건 없다.
민태호의 주먹과 나의 머리가 합쳐지는 순간 세상에 두려울 것은 없으니까.
“제 머리 돌아가는 소리요.”
“내 머리도 안 돌아가는디 뭔 헛소리여. 그리고 머리 돌아가는 소리가 어찌 나것냐!”
“거참, 그냥 좋게 알아들어요. 간단하게 말하면 앞으로 삼촌한테 제가 필요할 거라는 소리니까.”
“그건 모르겄고 꼬맹이 니랑 있으면 스펙터클한 일이 계속 생기는 것은 확실헌 거 같다.”
드르릉.
민태호가 차에 시동을 걸며 말한다.
“그려. 그래서 어디로 가?”
그런 일이 피곤하지만, 영 싫기만 하지는 않은 듯 민태호의 표정이 밝았다.
“스펙터클한 일이 생기는 곳으로요.”
* * *
잔잔한 재즈 음악이 귀를 간지럽히는 어느 바에 두 남성이 앉아 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래도 축하드립니다, 대표님.”
“축하는 무슨.”
“이번 작전만 끝나면 클럽에 들어가시게 되는 겁니까?”
“아마도?”
대표라 불리는 남자는 티를 내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지만, 내심 기분이 좋은지 연신 입꼬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쪼르륵―
“저 잊으시면 안 됩니다.”
비어 있는 대표 잔에 술을 따르는 검은 정장의 남자가 말했다.
“내가 우리 김 실장을 잊을 수가 있나. 걱정 말고 기다리고 있어 월요일 날 마무리 잘하고.”
“네, 대표님!”
“크으! 달다 달어.”
하지만 두 사람은 모르고 있었다.
잔에 채워진 술이 축하주가 곧 쓰디쓴 독주가 될 것이라는 걸.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두 사람에게 헐레벌떡 뛰어온 부하 직원이 크게 소리 질렀다.
그러고는 곧장 자신의 대표에게 신문을 들이밀었다.
“뭔데 이리 호들갑이야.”
“이거, 이거 먼저 보시죠!”
[성훈산업 방영호 회장 아들 납치!]
[방영호 회장 아들인 방성훈 군이 의문의 남성들에게 납치되었다가 극적으로 구출…….]
덜덜덜.
남자가 전한 석간신문을 보며 대표는 온몸을 떨었다.
“게다가 사무실도 털렸습니다.”
“사무실이?!”
“네! 아까 가보니 웬 조폭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씨발,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박 실장은?”
“모르겠습니다. 박 실장뿐만 아니라 박 실장 식구들까지 전부 행방불명입니다.”
지잉∼
바로 그때, 대표의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TOM]
휴대폰을 꺼낸 대표는 화면에 띄워진 이름을 보고 크게 침을 삼켰다.
별것 없어 보이는 이름이지만, 지금 대표에게는 지옥의 사신과도 같게 느껴졌다.
“여보세요?”
― 두 번 실수는 용납하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저도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 클럽 내부에서 자네에 대한 불만이 아주 많아.
“제가 어찌 해서든 원금이라도 회수하겠습니다! 제발 믿어 주…….”
― 그래야 할 거야.
절박한 목소리로 내뱉은 대표의 변명을 싹둑 잘라낸 전화가 이내 뚝 하고 끊겨 버렸다.
“대표님… 도망가야 합니다. 사무실이 털린 거면 여기도 안전하지 못합니다.”
“멍청한 소리!”
“하, 하지만…….”
갑작스런 고함에 놀란 김 실장이 더듬거리며 다시 한번 말을 해 보려 하지만, 대표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다시금 입술을 열었다.
“일단 원금이라도 건져야 돼. 조폭한테 잡히면 죽을 만큼 고통스럽겠지만 클럽이 움직이면 우린 그냥 죽는 거야.”
최악보다는 차악?
둘 다 좋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아직 여길 안 쳐들어온 거 보면 박 실장이 우리 위치를 말하지 않은 거 같아. 아니면 말하기도 전에 죽었던가.”
“그럼 어떻게…….”
“일단 월요일까지 숨어 있다가 성일 바이오 물량 털고 최대한 원금을 건진다. 그러고 나서 밀항을 하든 살려달라고 빌든 선택해야지.”
덜덜덜 다리를 떨며 빈 잔을 바라보는 미래 인베스트먼트 대표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생각했다.
‘씨발, 좆 됐네.’
* * *
중앙 병원 꼭대기 VIP 병실에 다가가자 방영호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아들 괜찮은 겁니까?”
“머리에 찢어진 상처와 약간의 타박상 빼고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왜 정신을 못 차리는 거요?”
“극도의 불안감과 스트레스 때문에 뇌가 쉬는 것일 뿐입니다. VIP 병동 의사들 모두가 캐어할 테니 걱정 마시죠.”
“부탁 좀 드립니다.”
“의식 돌아오면 정신과 상담 스케줄도 잡아 놓겠습니다.”
“고마워요, 강 원장.”
“네. 너무 걱정하지 말고 계세요. 그럼 이만.”
드르륵.
굳이 내 손으로 문을 열지 않아도 성훈이의 병실 문이 열렸다.
“절대안정을 취해야 하는 환자야. 병문안은 나중에 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병원장 강필모]
강필모 병원장은 문 앞에 선 채 나를 보며 말했다.
아마 친한 친구의 병문안이라 생각해서 그러는 듯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아들 친구이기도 하지만 제 손님이기도 하니까요.”
힐끔.
뒤에서 들려오는 방영호 회장 목소리에 강필모 병원장이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막고 있던 문 앞을 열어 줬다.
“뇌는 쉬고 있어도 귀는 열려 있으니 웬만하면 나가서 대화하시죠, 회장님.”
문 앞에서 물러난 강필모 병원장이 멀리서 뒤따라오던 민태호를 보고는 평범한 병문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한 말이었다.
“알겠소 강 원장.”
강필모 병원장이 떠나고 방영호는 누워 있는 아들의 모습을 한참이나 조용히 바라봤다.
“민 사장 식구한테 얘기 들었어요. 고마워요. 내 아들 구해 줘서.”
“아녀라. 요 꼬맹이가 불러서 갔는디요, 뭐.”
방회장의 감사가 부끄러운지 머리를 긁적거리며 민태호가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내 아들 옆에 좀 있어 줘요. 난 치우랑 잠시 얘기 좀 하고 올 테니.”
“예, 걱정 마셔라.”
드르륵.
성훈이가 누워 있는 병실 침대가 전부 가려질 만큼 큰 덩치를 자랑하는 민태호의 뒷모습이 미닫이문으로 가려졌다.
민태호가 병실 안에 있는 이상 그 누구도 성훈이를 다시 데려가지 못하겠지.
“옥상 가서 얘기하지.”
옥상에 도착한 방영호는 가장 먼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앞에서 한 대 펴도 되겠나? 성훈이한테는 비밀로 해 주고.”
“괜찮습니다. 비밀 지켜 드리겠습니다.”
“휴… 이걸 15년 만에 무는구나.”
답답함을 한숨으로 쏟아 내기에는 부족한지 연신 담배 연기를 섞어 내쉬는 방영호 회장이었다.
“고맙네. 아들을 구해 줘서.”
“아닙니다. 회장님의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제 친구이기 때문에 구한 겁니다.”
“고마운 건 마음에 담아 두겠다만, 별개로 치우 너에게 화를 내야 할 것 같구나.”
방영호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머릿속에 전부 그려졌다.
“제보 네가 한 거지?”
다행히도 내 머릿속에 스케치해 놓은 그림은 틀리지 않았고, 그 탓에 미리 색칠해 둔 완성품을 곧장 꺼낼 수 있었다.
“네, 맞습니다.”
“이번 일은 경솔했다. 치우 네 덕분에 아들 하나 지키지 못하는 회장이란 소리를 듣게 생겼구나.”
아니.
그것보다 자신의 아들을 납치한 놈들을 직접 손 댈 수 없는 이유가 더 클 것이다.
놈들이 사라지는 순간, 모든 화살은 방영호 회장에게 날아갈 테니 말이다.
“제보하는 것이 회장님에게 더 좋을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이유는?”
“그들에게 알려야 했으니까요.”
“그들이 누구지?”
“성훈이를 구한 일이 회장님한테는 다행이지만, 놈들한테는 자기 목숨을 빼앗긴 것과 다름없습니다.”
“녀석들 뒤에 누가 있다는 소리인가?”
250억이라는 비자금을 아무렇지 않게 품을 수 있는 인물.
혹은 인물들.
“네. 그러니 굳이 회장님 손에 피를 묻히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분노에 떨리고 있는 내 손은 어떻게 진정시키지?”
스윽.
담배를 쥐고 있던 방영호 회장 손에 작은 쪽지 하나를 쥐어 줬다.
“복수보다는 합의금을 받는 쪽이 어떠십니까?”
“합의금?”
방영호가 내가 건넨 쪽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합의금으로 괜찮은 제약 공장 하나 받으시죠.”
스윽.
“성일 바이오?”
“네.”
놈들은 주가조작의 타깃으로 저평가된 성일 바이오를 이용하려 했다.
그래야 성훈산업의 투자 소식이 들려도 아무도 의심을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여기는 놈들이 매수하라고 하던 곳이 아니었나?”
“네, 맞습니다.”
그러니 주가조작이라는 단어만 뺀다면 꽤 괜찮은 기업이라는 말이다.
규모는 작지만 일당백 연구진들이 있고, 꽤 훌륭한 시설을 갖춘 공장까지 있으니까.
거기에 내가 알고 있는 미래 지식들의 도면을 넣는다면 꽤 훌륭한 결과물이 나올 것이다.
나중에 혹시 빵빵한 주머니가 필요할 수도 있고.
“지금 내 아들 납치한 놈들 입에 밥을 넣어 주라는 건 아니겠지?”
“아니요. 놈들 입에 독약을 넣자는 말입니다.”
“독약?”
“일요일에 지금까지 있던 모든 사실을 언론에 제보할 겁니다. 성일 바이오 대표가 미래 인베스트먼트 대표와 짜고 주가조작을 하려 한 사실과 성훈이를 납치한 사실까지도 말입니다.”
그런 공시가 뜨면 놈들이 가진 엄청난 양의 성일 바이오 주식은 수직으로 하락할 것이다.
“성일 바이오 대표는 구속될 것이고 바닥까지 떨어진 놈들의 주식을 회장님이 전부 받으시면 됩니다.”
“참… 도대체 몇 수 앞을 보고 있는 거냐. 네 녀석은?”
답답함이 조금은 해결된 탓인지 연신 줄담배를 태우던 방영호의 손이 더 이상 담뱃갑으로 향하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꽤 괜찮은 합의금이라 생각되는데.”
* * *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렸는데도 차치홍 기자는 선뜻 방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서성였다.
살집이 조금 붙어 있는 몸.
뿔테 안경과 가슴에 포켓이 붙어 있는 줄무늬 와이셔츠.
포켓 속에는 반쯤 나와 있는 수첩과 볼펜이 보인다.
머릿속에 차치홍의 프로필이 없다 해도 외모에서 글 냄새가 연신 풍겨 왔다.
“혹시?”
“네, 한치우입니다. 들어오시죠.”
미로 같은 방을 찾느라 지쳐서?
혹은 테이블에 깔린 화려한 음식들이 부담스러워서?
아니다.
차치홍이 서성이는 이유는 그런 것들과 어울리지 않는 내 모습 때문이리라.
“아, 네…….”
드르륵.
차치홍이 안으로 들어오자 밖에 서 있던 여성이 미닫이문을 다시 닫는다.
― 있을까요? 물러날까요?
“필요하면 부르겠습니다.”
― 그럼 물러나 있겠습니다.
능숙한 내 행동과 겉모습이 매치가 되지 않는지 방에 들어왔음에도 선뜻 앉지 못하고 내 눈치를 살피는 차치홍 기자였다.
“천장 안 무너지니 앉으시죠.”
차치홍 기자도 나도 한 테이블에 100만 원을 웃도는 이런 고급 식당이 낯선 것은 아니었다.
조직폭력배 소속 법무 이사가 양지의 높은 분들을 만나기 위한 장소와 그런 높은 분들 입에서 나올 비밀을 취재하기 위한 장소로서는 이만한 데가 없으니까 말이다.
“이걸 참… 치우 씨라 불러야 할지 치우 군이라 불러야 할지 난감하네요.”
“편한 대로 부르시죠.”
“여기서 뵙자 그러기에 목소리만 어린 줄 알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남은 음식을 포장해 가는 상자 속에 현금 다발이 들어 있기도 했고, 종종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고급 정보가 오가는 곳이었다.
그러한 곳에 많아 봐야 20대 정도로 보이는 내가 앉아 있으니, 말끝이 절로 흐려지는 것이다.
“제가 부탁드렸고 방 회장님이 차려 주신 테이블입니다. 제가 아직 미성년자라 술은 못 마시니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네? 미성년자요?”
“네. 미성년자 맞습니다.”
쪼르륵.
나는 주전자에 담긴 탁주를 차치홍 잔에 따르며 말했다.
“아… 뭐 그건 그렇고 왜 보자고 하신 겁니까?”
“제 제보는 괜찮으셨습니까?”
“아, 네! 치우 씨, 만나러 간다니까 부장님 지갑에서 이게 나오더군요.”
차치홍이 포켓 수첩 뒤에서 카드를 하나 꺼내 들었다.
[송암 일보]
사출된 이름에 회사명이 적혀 있는 걸 보니 법인 카드이다.
“여길 들어오면서 이걸 써야 되나 말아야 되나 부담스러웠는데, 방 회장님이 차려 주신 테이블이라니 마음이 한결 편해집니다. 하하하.”
“네, 얼마든지요.”
꼴깍.
차치홍이 잔을 단숨에 들이킨다.
“그나저나 그럼 이걸 어디에 써야 되나 고민되네요. 치우 씨한테 쓰라고 준 카드인데 술은 안 되고…….”
도리도리.
익숙함에 속아 꺼낸 말이 머릿속 내 나이에 걸리는지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차치홍.
“흠, 뭐가 좋을까.”
“뭐가 됐건 일단 킵해 두시죠. 아직 제보가 남았으니.”
내일 저녁.
지금까지 있던 모든 일을 대중에게 알린다.
차치홍이라는 확성기를 통해.
“성훈이를 납치한 범인을 알려드리려 합니다.”
“방 회장님 아드님은 아직 안 깨어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제가 알고 있습니다. 제가 구했으니까요.”
“네?”
“수첩 좀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차치홍의 포켓을 보며 말하자, 시선을 나한테 고정한 채 자신의 수첩을 건넸다.
슥슥―
[일요일 저녁 8시]
[성훈산업 방영호 회장의 아들 방성훈 군을 납치한 범인은 조직폭력배 박민구. 죄책감에 자수해.]
[성일바이오 대표이사 조폭을 이용해 주가조작 공모.]
예언을 하듯 기사의 헤드라인을 수첩에 적었다.
내 예언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일요일 저녁 기사로 월요일 아침 성일 바이오의 주가가 떨어질 것이며, 미래 인베스트먼트 대표는 엄청난 물량을 처분도 하지 못한 채 주가가 떨어지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을 것이다.
슥슥―
[월요일 저녁 8시]
[조직폭력배 박민구, 미래 인베스트먼트 대표의 사주를 받고 방성훈 군을 납치.]
[미래 인베스트먼트 대표 행방불명. 검은 세력의 존재?]
그렇게 장이 끝날 때쯤 주가는 하한가를 기록할 것이고 방영호 회장이 미래 인베스트먼트 대표가 던진 물량을 전부 받아 버림으로써 작전은 끝난다.
그렇게 실패한 작전을 이용해서 성일 바이오를 인수하는 것이다.
그럼 내가 적은 월요일 두 번째 예언은 현실이 되겠지.
스윽.
“적어드린 순서대로 터트리시면 됩니다.”
가득 채워진 수첩의 한 면을 펼쳐 보인 채 차치홍에게 다시 건넸다.
“이게 지금 무슨… 박민구가 누구죠? 자수를 했나요?”
“아니요. 아직 안 했습니다.”
“그럼… 지금 허위 사실을 기사로 쓰라는 것입니까?”
“걱정 마세요. 기사가 나가는 내일 저녁까지 자수시킬 테니까요.”
쪼르륵.
비워진 차치홍의 잔에 다시 한번 술을 따랐다.
“계산은 방 회장님이 나중에 하신다니까 천천히 드시다 가시죠. 저는 할 일이 있어서.”
띵동.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붙어 있는 차임벨을 눌렀다.
“필요한 거 있으면 오시는 분한테 더 시키시고요. 아니면 그분을 방 안으로 들이셔도 되고.”
드르륵.
“필요한 거 있으세요?”
나는 그녀의 물음을 지나쳐 밖으로 향했고, 코끝을 간지럽히는 분내에 뒤를 돌아보자…….
수첩을 들고 미소를 짓고 있는 차치홍이 보였다.
“저분이 해 달라는 대로 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녀가 공손히 답을 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가 미닫이문을 닫았다.
“휴, 그럼 박 실장이나 풀어 주러 가 볼까.”
* * *
다시 미래 인베스트먼트 건물을 찾아갔지만, 이전과 크게 다른 게 없었다.
“요즘 큰 형님 좀 이상해진 거 같지 않아?”
“맞아. 일주일 전인가, 큰 형님 업소에 계셨거든? 그런데 그때 술 취한 양아치들이 시비 거는데도 한마디도 안 하고 웃으시더라.”
“아무래도 그 꼬맹이 때문인 것 같아. 그때 시골에서 그 꼬맹이 만나고 오신 다음부터 변하셨어.”
입구에는 여전히 건달들이 대화를 하고 있었고, 주변은 허허벌판이었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굳이 숨지 않아도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다는 것 정도.
“어? 뭐야 그 꼬맹이 아니야.”
가까워지는 인기척에 나를 돌아보는 두 사람.
“맞습니다. 박 실장 좀 만나야겠습니다.”
전과 같이 조폭들이 박 실장을 지키고 있지만, 내 걸음을 막지는 않았다.
“형님한테 보고…….”
휙.
“됐어. 분명 들여보내라고 하실 거야.”
한 명이 전화기를 들자, 다른 한 명이 손을 저지한 채 말했다.
“감사합니다.”
가볍게 인사를 한 나는 그들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난 변한 큰 형님보다 쟤가 더 이상해.”
“그니까. 깡 하나는 겁나 좋네.”
수군거림이 들려 왔으나, 적대적이지 않은 탓에 나는 피식 웃으며 박 실장이 있는 사무실 입구에 다가갔다.
그곳에는 또 다른 남자가 문을 지키고 있었다.
“입구에서 얘기 끝났으니 걱정 마시죠.”
“어… 그래.”
드르륵―
자신보다 서열이 높은 형님들을 뚫고 왔으니, 다시 되묻지 않고 두꺼운 쇠사슬을 풀기 시작했다.
“박 실장 상태는 어떻습니까?”
“몰라. 새벽까지는 지랄발광을 하더니 지금은 조용하네.”
덜컥.
“알겠습니다. 제가 들어가면 문은 다시 닫아 주세요.”
쾅.
내 등 뒤에서 전해진 문소리에 박민구가 움찔거렸다.
“물…….”
똑똑.
박민구의 말에 나는 문을 두드렸고,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응?
“죄송하지만 물 좀 가져다주실 수 있을까요?”
― 그래. 조금만 기다려.
마음 같아선 조금 더 즐기고 싶지만, 시들어져 있는 녀석에게 물을 줘야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이내 사무실 문이 열리고 물통이 들어왔다.
“여기.”
“고맙습니다.”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의자 하나를 녀석의 앞에 놓고 앉았다.
“이제… 그만해… 죽을 것 같아…….”
쓱쓱―
다시 빛을 보여 주려 했지만, 봉지가 피에 굳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박민구는 그 상황이 고통스러운지 몸부림을 처댔다.
“움직이지 말아요. 더 아프니까.”
쪼르륵.
물을 쏟아 부으며 겨우 봉지를 벗겨 냈고 찬물에 정신이 조금 드는지 시들어 있던 몸을 서서히 세웠다.
“너… 이 개새…….”
“살려 주러 왔더니 욕부터 내뱉네.”
휙.
반쯤 차 있는 물병을 저 멀리 던져 버리자 박민구의 시선이 다급히 따라갔다.
“무, 물…….”
“벌입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이제 곧 풀어 줄 테니까.”
그 말을 듣고서야 그가 다시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여기 대표는 찾았나?”
“아니요. 굳이 찾을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죽은 목숨이니까요.”
내 말에 주변을 둘러보지만, 자신을 지켜 줄 민태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태호… 형님은?”
“성훈이를 지키고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약속대로 지켜 드려야죠.”
“휴…….”
박민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아직 밖의 상황을 모르기도 하고, 민태호가 자신을 지켜 준다는 약속이 깨지지 않았다고 생각할 테니까.
뭐,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지.
“자, 그럼 당신이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나는 자세를 고쳐 잡고 박민구를 가만히 응시하며 말했다.
어떤 세력이 뒤에 있는지 자세히 모르지만, 지금 위험한 건 미래 인베스트먼트 대표뿐만이 아니다.
주가조작 명령의 끝자락에 있는 박민구.
직접 성훈이를 납치한 녀석의 입이 살아 있는 게 신경이 쓰이겠지.
“자수하십시오.”
“뭐?!”
“그게 지금 당신이 살 수 있는 방법입니다.”
“태호 형님이… 지켜 준다고 하지 않았나?”
“민태호 삼촌 옆에 24시간 붙어 있을 자신 있어요?”
민태호는 분명 녀석을 떼어 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건 모든 약속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던 사람이니까.
“그건…….”
“아마 그런다고 해도 지금 상황과 별다르지 않을 텐데요.”
보호라는 명목 아래 사방이 막혀 있는 곳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똑같으니까 말이다.
“자수해요. 당신을 지켜 줄 사람은 감옥에도 많으니까.”
민태호의 이름을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민태호의 말이 그곳에 전해지는 순간, 민태호의 성은을 받으려 너도나도 박민구를 지키려 할 것이다.
꾸욱.
“첫날은 입 다물고, 둘째 날에 거기 적혀 있는 대로 자백하세요.”
묶여 있는 박민구의 팔 사이로 작은 수첩 하나를 끼어 넣었다.
내 예언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대본.
물론 거짓은 아니다.
사실을 바탕으로 작성한 대본이니까.
“감옥은 안전할 거라고 어떻게 보장하지? 녀석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면서.”
“걱정 마세요. 당신이 죽으면 안 될 이유를 만들어 놓을 테니까요.”
머릿속이 무거운지 다시 고개가 숙여졌다.
“그리고 벌 받아야죠. 당신이 안전하다고 해도 나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거든요. 그러니 자수하시죠. 참작 받을 수 있게 도와줄 테니까.”
입을 연 김에 그의 머릿속을 가볍게 해 주기로 했다.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봐야 몇 바퀴입니다. 새 삶 살아야죠. 조직도 해산되고 돈벌이도 없는데 혹시 알아요? 다시 나오면 민태호 삼촌이 당신을 받아 줄지.”
만약 박민구가 정말 교화가 된다면 다시 받아 줄 것이다.
그때쯤이면 민태호는 조폭이 아닐 테니 말이다.
“다시 재갈 안 물릴 테니 잘 생각하시고, 밖에 말씀하시면 들어와서 풀어 줄 겁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향할 때는 박민구의 고개가 완전히 들려 있었다.
“반드시 대본에 쓰여 있는 대로 자백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당신을 안전하게 지켜 줄 수 있으니까요.”
반쯤 문을 연 채 말했다.
한데 눈앞에 있는 것이 희망인지 아닌지 고민하는 놈의 눈빛을 보다 보니, 이대로 가기가 그래서 밖으로 향하기 전에 한마디를 던졌다.
“음지에 오래 있어 봐서 아는데, 착하게 사는 것도 꽤 즐겁습니다.”
쾅!
* * *
― 작은 선물 하나 보내겠습니다, 지검장님.
탁.
치우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강철호는 음소거가 된 뉴스의 자막을 바라봤다.
[성훈산업 납치 사건 범인 자수]
텔레비전을 바라보던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선물인지 폭탄인지는 상자를 열어 봐야 알겠지.”
혼잣말을 하며 팔걸이를 지렛대 삼아 일어난 강철호가 뒤에 있는 명패를 향해 움직였다.
삑―
― 네, 검사장님.
인터폰을 누르자 벽 너머 비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TV뉴스 관할서가 어디죠?”
― 용산 경찰서로 자수한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그리고 정 부장 좀 올라오라고 전해 줘요.”
― 네, 지검장님.
선물이든 폭탄이든 손에 들어와야 상자를 열 수 있는 법.
치우로 인해 박민구가 서부 지검 관할 구역에 자수했지만, 강철호의 성격을 아는 누군가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었다.
외압이 통하지 않는 인물이니까.
똑똑.
“들어와요.”
물론 그 사실을 강철호 본인도 알고 있어 더 빨리 움직이려 하는 것이고.
“부르셨습니까, 검사장님.”
한 남자가 지검장실을 열고 들어왔다.
강철호의 말을 밖으로 흘려보내지 않고 담아 둘 수 있는 남자일 것이다.
“저놈 좀 데려오죠.”
강철호가 텔레비전을 가리키며 말하자, 정 부장 역시 강철호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이 향했다.
“송치 전에 데려오라는 말씀이십니까?”
“우리 지검으로 송치가 안 될 것 같으니 데려오라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군요.”
“흠… 아무리 지휘 관서라고 해도 스포트라이트 받을 기회인데 용산 서장이 쉽게 내줄까요?”
정 부장은 강철호의 부담스러운 명령에 몸을 배배 꼬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직접 가죠.”
“아닙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그런 강철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니 기에 눌린 정 부장이 쪼그라드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허허허, 그럼 부탁 좀 할게요. 어디 안 다치게 데려오시고.”
인자한 미소로 말하는 강철호이지만 정 부장의 몸은 이미 지검장실 문을 열고 있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인자한 미소 뒤에 숨겨진 강철호의 진짜 표정을 알고 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정 부장이 떠나자 올라가 있던 강철호의 입꼬리가 다시 내려왔다.
“그래 일단 받아 보자고, 한치우.”
* * *
점심이 지난 시간 방영호 회장의 서재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자자, 준비들 하자고!”
네 명씩 줄지어 마주 앉은 두 팀.
그들의 시선은 전자파를 내뿜는 모니터로 향해 있었다.
“치우 군, 내가 합의금이 아니라 쓰레기를 긁어모으는 게 아닐까 싶네만.”
“걱정 마시죠. 저들의 손에 있으면 쓰레기일지 모르지만, 회장님 손으로 들어오는 순간 금덩어리가 될 테니 말입니다.”
그런 두 팀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방영호 회장과 나였다.
“팀장님 누가 20만 주를 던졌습니다.”
“전부 받아! 매수 예약 걸어 놔!”
마치 총성 없는 전쟁터를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매수 성공했습니다.”
어젯밤 박민구가 일으킨 바람이 나비효과를 일으켜 성일 바이오 주식을 흔들고 있었다.
“호가창 10단계로 보여줘 봐.”
얼마나 많은 차명을 이용해 주식을 긁어모았는지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가상의 슈퍼 개미들이 물량을 족족 던지고 있었다.
“자! 너희가 마우스에서 손을 떼는 몇 초 동안 수만 개의 주식이 거래되고 있다. 정신 놓지 마. 물도 마시지 마!”
“네!”
오늘 아침 장이 열리기 전부터 성일 바이오는 가장 핫한 주식이 되었고 수직으로 떨어질 걸 알면서도 1∼2%의 시세 차익을 노리는 단타 매매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한가가 15%인 게 아쉽네.”
10년 후에 15%이던 주식의 가격 제한폭은 30%로 오른다.
“어쩔 수 있나.”
내 혼잣말에 방영호 회장이 대답했다.
“그러게요.”
물론 지금은 10년 후를 아쉬워하는 게 전부이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보유 물량이 많아질 것 같습니다. 저런 훌륭한 군인들이 싸우고 있으니.”
총성 없는 전쟁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회사 재무 팀이네. 내가 가장 신뢰하는 조직이기도 하고.”
방영호는 자신이 만든 조직이 자랑스럽다는 듯 미소 지으며 얘기했다.
사실 저 전쟁의 승자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총성은 없지만 저들의 총 속에는 돈이라는 총알이 무제한으로 제공되고 있으니까.
바로 방영호 회장의 주머니에서 만들어진 총알이 말이다.
다만, 이미 승리를 정해 놓고 하는 싸움이지만, 총알을 아끼고 또 내 몸에 상처가 덜 나면 그게 승리의 기쁨을 더해 주는 것일 뿐이었다.
“후∼ 시장에 풀린 굵직한 물량은 어느 정도 담아낸 것 같습니다. 팀장님.”
“그래 물 한잔 마시고. 3시까지는 화장실 갈 생각도 하지 마.”
“네!”
스윽.
[12%]
두 팀과 우리 사이를 이어 주는 한 남자가 쪽지를 계속해서 건넨다.
방영호 회장의 총알을 써서 얻은 전리품의 숫자가 적힌 쪽지였다.
쪽지가 쌓여 갈수록 숫자는 높아지고, 보유 물량은 늘어난다.
“걱정 마시죠. 그 쪽지가 많이 모일수록 황금 덩어리도 많아지는 것이니까요.”
쌓여 가는 쪽지를 바라보는 방영호 회장의 표정이 좋지 않아 건넨 말이었다.
“제가 꼭 바꿔드리겠습니다. 회장님이 가진 쓰레기를 황금 덩어리로.”
“하하하, 치우 네 손이 미다스의 손이라도 되는 것이냐?”
“손이 아니라 머리가 그런 재주를 부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내 말이 달콤해서 방영호 회장의 표정이 풀어지는 게 아니다.
“그래. 믿어 보마.”
언제나 그랬듯 내 확신을 믿는 것일 뿐.
그리고 그 믿음이 틀리지 않을 거라는 자신의 확신이 표정에 드러나는 것이었다.
[매수 주문이 체결되었습니다.]
댕∼ 댕∼
전체 상황을 보여 주는 벽면 스크린 위에 탁종 시계가 3시를 알리는 종을 치고 마지막 매수가 체결되었다.
“다들 수고했어.”
자리에서 일어난 재무팀장이 직원들을 격려하고 방영호 회장 역시 그들을 격려하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생들 했네.”
전쟁을 마치고 직원들이 방 회장 앞에 도열했다.
“총 매수 물량 26%로… 대주주인 주필현 대표보다 2%더 많은 지분입니다. 내일 장을 지켜봐야 하겠지만, 앞으로 시장 거래 물량은 매수해 봤자 의미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끄덕끄덕.
재무팀장이 결과를 보고하자 방영호 회장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자신이 사들인 주식이 황금으로 보일 테니 말이다.
“그래, 수고했네. 이제 물러들 가 보게나. 정리는 시설팀에게 시킬 테니.”
“네, 알겠습니다.”
재무팀 직원들이 서재를 바쁘게 빠져나가고 정리 안 된 서재 구석에서 방영호 회장이 커피를 내렸다.
“자, 이제 들어 볼까? 네 머릿속이 부리는 재주를 말이야.”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는 방영호 회장의 물음에 나 역시 아무 말 없이 TV를 켰다.
[성일 바이오 대표 구속영장 신청]
지지직 소리에 방영호 회장의 시선이 커피 머신에서 TV로 향했다.
“황금을 만들려면 쓰레기부터 치워야겠죠.”
[내일 오전 구속 여부 결정]
“쓰레기들이 가장 어울리는 장소로 말이죠.”
박민구는 서부 지검으로 인도되었고, 조사실에 갇혀 있을 것이다.
그의 존재가 불안한 어떤 세력들은 서부 지검 문을 부셔 보려 할 테지만, 강철호라는 문지기는 너무나 강직한 인물이었다.
“박민구는 그렇다 쳐도 성일 바이오 대표는 구속이 힘들 텐데.”
“아니요. 박민구 입이 열리면 법원에서 구속영장을 기각할 명분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사실 기각을 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놈의 입이 열린다기보다는 내가 준 대본을 그대로 읽는 거겠지만.
“그게 무슨 소리지?”
“영장에 손을 대려 한다면 일단은 서부 지검 문을 부셔야 하는데. 그러려면 수면 위로 정체를 드러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방영호 회장이 입을 꾹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굳이 수면 위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방법은 많지 않은가. 예를 들면 누군가의 손을 빌리던가?”
“강철호 검사장님이 지키고 있는 서부 지검 문을 부술 수 있는 손은 몇 개 되지 않습니다.”
검찰총장 경쟁에서는 밀렸지만, 이제 곧 중앙 지검으로 이사하는 강철호 검사장이었다.
등에 여론을 업고 있는 강철호가 지키는 문.
아마 그 문을 부순다면 누군가의 손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할 것이다.
사실 누가 부순다고 해도 쉽지는 않겠지만.
“하하하, 그러겠구먼.”
방영호 회장의 꾹 다문 입이 열리고 이내 호탕한 웃음을 내뱉었다.
“그나저나 커피가 식었네요.”
내가 방영호 회장이 내려준 커피를 보며 말하자 방영호 회장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새로 내려 줄까?”
“아닙니다.”
스윽.
생각은 있었지만, 아직은 뜨거운 커피를 마실만한 여유가 없었다.
“다음에 올 때 다시 내려 주시죠. 그때는 성일 바이오에서 황금을 만들 수 있는 도면을 가져오겠습니다.”
“하하하, 그러게나. 그럼 나는 공장 돌릴 준비를 하고 있겠네.”
“네, 알겠습니다.”
쾅.
문이 닫히고.
스르릅.
웃으며 치우를 배웅한 방영호가 식어 버린 커피를 마셨다.
“그 어떤 황금보다 치우 네가 더 탐이 나는구나.”
* * *
해가 진 강철호 검사장의 집 앞.
전화를 하고 온 덕에 밸을 누르지 않고서도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검사장님이 댁에 계시면 박민구가…….”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내가 집에 있든 지검에 있든 조사실 안으로 들어갈 사람은 내 입에서 결정되니까 말이야.”
마당에서 건넨 내 첫 인사가 잘리고, 이내 그의 입에서 완벽해져 돌아왔다.
“선물이라고 해서 받긴 받았다만, 따히 설레지는 않구나.”
“죄송합니다. 제가 선물의 의미를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네요.”
“의미?”
“검사장님한테 건넨 박민구는 목줄입니다. 누군가가 잃어버린 목줄이죠.”
“흠…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집안으로 들어가지.”
집안으로 들어가자 강철호 역시 커피를 내려 내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래. 누구의 목줄인지는 모르는 것이고?”
“네. 하지만 지체 높은 누군가의 목줄이 될 수 있습니다.”
박민구가 지검에 잡혀 있는 그 순간이 불안한 사람들의 목줄.
그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고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니 말이다.
“그 목줄을 찾고 싶은 자가 한 명은 아닐 거 같으니 아무나에게 채우시면 됩니다.”
목줄을 찾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티를 낼 테니 말이다.
“곧 그걸 담보로 검사장님을 찾아올 누군가가 있을 겁니다.”
박민구가 보고 들은 기억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 주는 대신 목을 내어 줘야 하니…….
“하하하, 내가 선물 보낸 사람 뜻도 못 헤아리고 있었구나.”
강철호가 이리 크게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닙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렇게 또 강철호의 명함 몇 장이 내 지갑 속으로 들어왔다.
“그래, 치우야. 잘 가고 언제 평일에 밥 한번 먹지. 아주 괜찮은 식당을 하나 알거든.”
선물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대문 앞까지 웃으며 배웅하는 강철호였다.
지잉∼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시작점이 보낸 문자가 내게 왔다.
[치우야, 나 깨어났어.]
성훈이는 깨어났고, 성훈이를 잠들게 한 미래 인베스트먼트 대표는 곧 사라질 것이다.
그게 대한민국에서인지 세상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또한 박민구와 성일 바이오 대표는 구속이 되었다.
그들이 잘못을 뉘우칠지, 아니면 감옥에서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낼지는 모르는 일이다.
다만,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낸다면 미래에 검사 한치우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게 완벽한 끝은 아니다.
거대한 악의 무리에서 꼬리 비늘 하나 떼어 낸 것뿐이니까.
[병원이지? 지금 갈게.]
* * *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가는 속도가 빨라진다 했다.
열아홉.
성인이 되기 전 마지막 1년.
어떤 성인으로 살 것인지 설계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기도 하다.
열여덟 과거로 돌아와 이제 열아홉이 되었지만, 시간이 가는 속도는 41살의 한치우처럼 느껴졌다.
“치우야∼ 우리 또 같은 반이네.”
다만, 그 말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고통은 시간을 느려지게 만드니까.
“몸은 괜찮아?”
“응. 멀쩡해 이제.”
긴 고통 속에서 깨어난 성훈이는 무사히 학교로 돌아왔다.
물론 쉽게 돌아올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긴 고통에 웃음을 잃어버린 성훈이는 방학이 끝나고도 몇 달간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나 없는 동안 심심했지?”
“심심은 무슨…….”
유일한 말벗이던 성훈이가 없어지자, 지루한 수업 시간이 더 지루하게만 느껴졌었다.
“이제 병원 안 가도 되는 거야?”
“응. 완전히 퇴원했어.”
그 지루함을 성훈이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찾아가 풀었다.
“매일 병문안 와 줘서 고마웠어. 치우 너 때문에 빨리 나은 것 같아.”
병원을 찾아갔을 때마다 넓은 VIP 병실에 홀로 누워 있는 성훈이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고맙긴. 친구가 아프면 가야지.”
성일 바이오라는 합의금을 받은 방영호 회장은 하루를 이틀처럼 살고 있기에 성훈이의 병실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나와 의사들뿐이었다.
그 사실이 방영호 회장 귀에 들어갔지만, 대가를 바라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죄책감이 들어서일지도 모른다.
성훈이가 고통 속에 빠진 이유는 줄기세포 조작 사건을 통해 방영호를 내 조력자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덕분에 성훈이가 평생 받게 될 고통이 짧게 줄긴 했지만…….
대가를 바랬다고 해도 앞으로 고맙다는 인사는 방영호 회장이 아닌 성훈이에게 받아 놓는 게 좋다.
나이가 들수록 대가를 줄 수 있는 힘은 방영호 회장이 아니라 내 친구인 성훈이에게 기울 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치우야. 이제 우리도 말로만 듣던 고3이야.”
“뭐가 문제야? 전교 2등인 분께서.”
“…전교 1등은 치우 너잖아.”
“내가 좀 하지.”
“하하하, 드라마에서 보면 2등이 1등을 옥상에서 밀고 그러던데.”
현재는 나와 수많은 의사들이 모여 잃어버린 성훈이의 웃음을 되찾으려 노력했고, 성훈이는 그 노력이 미안함인지 진심인지 모를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밤늦게까지 공부하지 말라고. 너만 없으면… 내가 1등이다!”
“진짜 무서워… 성훈아.”
“장난이야, 장난! 하하하!”
뭐가 됐건 성훈이는 처음, 나는 두 번째로 고3이라는 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흘러가는 속도는 서로 조금은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런 시간을 두 번째로 느낄 수 있는 기회는 아마 흔치 않을 것이다.
아니, 나밖에 없겠지.
“장난을 쳐? 감히!”
성훈이에게 주먹을 보이며 다가갔다.
“아, 살려 줘!”
전교 1등과 2등이 교실에서 가장 크게 웃고 떠드는 이 상황도 흔치 않은 건 마찬가지이다.
내가 경험한 첫 번째 시간에서 나는 얼굴이 망가진 채 성훈이와 구석에서 조용히 속삭였으니까.
“방성훈, 너 오늘 죽었어.”
“살려 줘!”
탁!
“미안해 선호야!”
장난을 치는 나에게서 도망가던 성훈이가 명선호와 부딪쳤다.
“이런 씨…….”
부딪친 건 성훈이었지만, 명선호는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고는 목까지 올라온 욕을 다시 집어넣고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성훈이에게 말했다.
“…아니야, 괜찮아 성훈아. 하. 하. 하.”
명선호 역시 나와 같은 반이었다.
녀석에게는 그 사실이 아주 많이 고통스러울 것이었다.
첫 번째 시간에서는 내가, 두 번째 시간에서는 명선호가 말이다.
“이제 그만해 얘들아. 곧 수업 시작이야.”
우리의 소란이 신경에 거슬리는지 반 아이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 미안. 치우야, 그만해. 우리 때문에 애들이 피해 보잖아.”
달라진 내 모습에 피해를 주는 쪽에서 받는 쪽으로 바뀐 녀석들과 달리 성훈이는 어떠한 시간에서도 여전히 착해 빠진 녀석이었다.
“미안하다. 공부 열심히 해라.”
나 역시 그만하라 말한 녀석에게 순순히 사과를 건넸다.
“응? 아니야… 괜찮아…….”
비록 사과를 받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하는 사람의 표정이었지만.
이것들이 진짜 왜 그럴까.
괜한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내가 주변을 쓱 둘러보자 하나둘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내가 불편한 건 명선호뿐만이 아닌가 보다.
처음 보는 얼굴도 꽤 있었지만, 여기 있는 모두는 나를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전교 1등.
일진 명선호를 때려눕힌 일.
민태호라는 조폭의 방문.
이런 것들은 고등학교에서 퍼지기 아주 쉬운 소문들이었다.
그런 소문이 고등학교에서는 스펙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필요한 건 고등학교에서의 소문도, 철없는 스펙도 아니다.
“그럼 수업 준비하자.”
의미 없는 시간일 테지만 자리에 앉아 교과서를 폈다.
하지만 그것조차 무의미해지게 갑자기 들이닥친 담임이 나를 급하게 불렀다.
“선생님, 치우 좀 데려갈게요. 치우야, 교무실로 좀 올래?”
“왜요?”
“일단 좀 와 줄래? 선생님이 부탁 좀 할게.”
비굴해 보이기까지 하는 담임의 부탁이었다.
왜?
내 소문은 고등학교가 아니라 전국에 퍼졌고, 역사상 가장 화려한 스펙을 가진 고등학생이 탄생되는 순간이었으니까.
담임을 따라 교무실에 들어오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그 이유가 대충은 짐작이 갔다.
[제47회 1차 사법시험 합격자 발표]
오늘 새벽에 신문을 보고 등교했으니 말이다.
“음… 치우야. 혹시 방학 때 사법고시 봤니?”
“네, 봤습니다.”
내 대답에 같은 반 아이들에게만 있던 불편함이 교사들에게까지 전파되었다.
“아 그렇구나… 방학 때 놀기도 바쁠 텐데 기특하구나.”
그저 공부 잘하는 학생이라 생각하던 내가 불편해지는 이유?
비록 1차이지만 사법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다는 사실로 인하여 내게 할 말이라고는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조언 정도밖에 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한데 그것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삼십 대 교사들이 나에게 조언을 해 봤자, 내 속에 있는 마흔한 살의 한치우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테니까.
“판사가 꿈이니, 검사가 꿈이니, 아니면 변호사?”
셋 중 뭐가 됐건 자신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을 것이니 그것 또한 부담스러운 것이다.
진학 상담조차 필요가 없다.
이번 년도에 3차 시험까지 합격한다면, 대학이 아닌 사법연수원에 들어갈 테니 말이다.
“자자! 여러분. 우리 학교 학생이 1차 사법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그것도 수석으로요!”
짝짝짝!
담임이 크게 말하자 교무실 안 모두가 기립박수를 쳤다.
“하하. 치우가 우리 학교의 자랑거리가 되겠구나!”
나와의 악연을 표정 뒤로 숨긴 교감이 웃으며 말했다.
자랑거리?
아니 돈벌이가 되겠지.
대학까지 통틀어 서원 재단에서 나온 유일한 사법고시 수석 합격자니까.
“언론사에서 치우와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데 치우 네 생각은 어떠니?”
교감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본색을 드러낸다.
“안 합니다.”
“그러지 말고 치우야… 출연료도 많이 준다는데.”
“한 3억쯤 준다고 하던가요?”
흠칫.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교감의 표정이 굳어진다.
교사들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교감이 나에게 건넨 3억이라는 돈과 그리고 그 돈을 건넨 이유까지.
“그 정도 아니면 안 합니다. 그리고 제 이름이 서원 재단의 홍보 수단으로 이용된다면 법적으로 문제를 삼을 테니 조심해 주시고요.”
흠칫.
교감의 몸이 순간적으로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평범한 고등학생의 멋모르는 협박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미 이들보다 법과 가까운 위치에 있으니까.
“말씀 끝나셨으면 가 봐도 될까요?”
“응, 그래…….”
복도를 향해 멀어져 가는 나를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학생주임]
“어? 치우야.”
복도로 나가자 교무실로 다가오는 학생주임의 완장이 보였다.
“그땐 내가 생각이 짧았어. 내가 내 본분을 잃어버리면 안 됐는데.”
본분을 잃어버린 게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완장을 차고 있는 것은 똑같았으니까.
변한 것은 학생주임이 아니라 나였다.
당시의 나는 학생주임의 본분이 필요했고, 지금의 나는 진정성 있는 사과가 필요했다.
“미안해 치우야. 그나저나 내가 치우 번호가 없더라. 번호 좀 알려 줄래?”
표정 변화 없이 미안하다 말하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뒤지는 학생주임이었다.
‘역시, 사람은 쉽게 안 변해.’
그가 나에게서 필요한 건 용서가 아니라 앞으로 검사가 될 한치우 번호일 것이다.
“번호는 못 드릴 거 같습니다.”
“왜? 아직도 내가 원망스럽니?”
“사법고시 합격자 한치우가 아닌, 보호해야 할 고등학생 한치우의 번호가 필요하실 때 찾아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진심 어린 사과도 같이요.”
진짜 그럴 것이다.
나는 이제 곧 학교를 졸업하지만, 학생주임은 그렇지 않을 것이니.
다만, 그가 진짜로 변한다면 앞으로 서원 고등학교를 입학하게 될 학생들은 나보다는 조금 덜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
“부디 그 완장에 기대고 숨을 수 있는 선생님이 되어주세요. 협박이 아니라 부탁입니다. 저는 선생님이 원망스러웠지만, 다른 학생들은 그렇지 않게 해달란 의미입니다.”
“…….”
굳어버린 학생주임 옆을 지나쳤다.
아마 한참 동안은 움직이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나쁜 징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나쁜 생각을 가진 뇌가 멈춰 버린 것에 불과한 테니 말이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 * *
[제47회 사법시험 2차 시험장]
사법시험장 앞에서 나를 바라보는 고시생들의 시선도 두 번째가 되니 이제 조금 익숙해졌다.
추리닝 차림에 필기도구를 주머니에 넣고 껄렁하게 있는 그 모습이 말이다.
“쟨가 봐, 1차 시험 수석으로 합격했다는 그 고등학생.”
“맞네. 1차 시험에도 추리닝 차림으로 사인펜 하나 들고 왔다던데.”
“진짜 천재인가? 말이 돼? 고등학생이 저렇게 여유가 넘치는 게?”
“그것보다 성적이 더 말이 안 되지. 쟤 때문에 내년부터 1차 시험이 더 어려워진다는 소문이 있어.”
다만 1차 시험에서 내 껄렁함이 지금은 여유로 보이는 것이다.
“역사상 처음이래. 수석이랑 차석 점수가 10점 이상 차이 나는 게.”
“차석이 못한 게 아니라 재가 압도적인 거였지. 거의 만점을 받을 뻔했으니. 그것도 고등학생이 말이야.”
너무 잘 들리는 수군거림이 듣기 싫어 조금 일찍 시험장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꼭 연락해!”
입구에는 1차 시험에서 본 마담뚜가 여전히 명함을 돌리고 있었다.
1차 시험과는 달리 조금 더 적극적인 자세로 말이다.
“어머∼ 그때 그 학생 아니야.”
“이번에도 역시 명함은…….”
스윽.
“넣어 둬! 내가 학생한테는 특별히 이 명함으로 줄게.”
마담뚜가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주머니에 막무가내로 명함을 집어넣었다.
손에 들고 있던 명함이 아닌, 가슴 속에서 꺼낸 황금색으로 코팅된 명함이었다.
“다른 사람 주시죠. 비싼 명함 같은데. 별로 만지고 싶지도 않고.”
“처음부터 너 주려고 품고 있던 거였어.”
“말씀드렸을 텐데요. 명함 필요 없다고.”
“알아. 연락을 하든 말든 네 자유야. 그런데 그 명함은 꼭 맞선이 아니라 그냥 114라고 생각해. 높은 사람들과 연결할 수 있는 114.”
주머니 속에서 꺼내려 했던 명함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녀의 말에 이 명함이 언젠가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부담 갖지 말고 시험 잘 봐. 뭐 어차피 잘 보겠지만.”
다소 불편한 관문들을 지나치고서야 시험장으로 들어가 자리를 찾아 앉을 수 있었다.
* * *
“벌써요?”
“네. 다 적었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차 시험의 객관식이 2차 시험의 주관식으로 바뀐 것 말고는 크게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복도를 지나가며 고객숙인 시험생들을 볼 수 있었다.
“후, 이제 면접만 보면 되네.”
텅 빈 시험장 밖에서 나 홀로 푸념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사람들은 길고 긴 문제를 읽고 서술한 것이고, 나는 머릿속 정답을 종이에 옮겨 적은 것일 뿐이니까.
아무리 주관식이라지만, 기본적인 가이드라인은 있기 마련이었다.
어쨌건 그 탓에 감독관은 내 시험지에 놀랄 게 분명했다. 남들이 생각하는 시간에 나는 이미 다 적어 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감독관만 놀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감독관이 속도에 놀랐다면, 채점을 하는 교수들은 정리가 잘 된 답안지를 보고 놀라겠지.
“내가 커트라인을 너무 높게 만들어 놨나?”
내 기억으론 2005년 2차 사법시험의 커트라인이 48점이었으니.
아마 역대 사법시험 중, 아니, 앞으로 사법시험이 폐지되는 그날까지 깨지지 않는 기록 하나를 내가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만점은 나오지 않을 테다.
내 서술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해도 내 시험지는 OMR 판독기가 아니라 교수들의 손에 의해 채점이 되니까 말이다.
“어차피 천 명 뽑을 텐데 1등 점수 높다고 다른 사람들이 피해 보지는 않겠지 뭐.”
혼자 중얼대며 시험장 밖에 다다르자 익숙한 장면들이 보였다.
누군가의 가족, 혹은 연인, 때로는 친구들까지.
두 손을 모으고 시험장 안을 향해 연신 고개를 숙이고 있다.
간절함이 잔뜩 담겨 끈적거리는 엿을 문에 붙여 놓은 채.
“어머, 지금 나오는 사람 그 학생 아니야? 1차 시험 수석 합격한 고등학생?”
“맞네∼ 맞아!”
자유롭던 1차 시험의 귀가와 달리 2차 시험에서는 시험장 입구를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누군가를 위해 미신이라도 믿고 싶을 만큼 간절한 사람들 때문이었다.
“학생, 미안한데 학생 손 한 번만 잡아 봐도 될까?”
안돼요.
“이보게, 내 손주도 자네 기운을 받게 그 필통 좀 줄 수 있나?”
싫어요.
“나는 조금 무리한 부탁일 수도 있는데… 속옷 좀 줄 수 있어? 아니면 팔아! 비싼 값에 사 줄 테니까.”
꺄악, 꺼져요!
순간 속으로 하던 말이 입으로 나올 뻔했지만, 꾹꾹 목구멍에 다시 눌러 넣고 인파를 헤쳐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몰린 탓에 속도가 나질 않았다.
“집은 어디야? 우리 아들내미도 거기로 이사 보내 버리게!”
지체하다간 온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바로 그때, 등 뒤에서 구수하고 느림직한 사투리가 들려왔다.
“학생∼ 부모님은 어디서 기도하셨디야∼”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법칙이 있다.
대가 없는 희생을 숫자로 통계할 수만 있다면, 세상 모든 어머니의 숫자보다는 항상 많을 것이라는 법칙.
“워, 육상 하셨어요? 그만 따라오세요! 그리고 저희 부보님은 기도 안 하셨어요!”
“아들내미 일인데 뭔들 못 하것어. 말해 줘 봐아. 어디 가서 말 안 할게에.”
그 희생정신은 50대 여자 몸으로 파릇파릇한 열아홉 살의 전력 질주를 따라잡을 수 있을 만큼 강했다.
숨이 차 헐떡거리는 나와 달리 아주머니는 아무렇지도 다시 물었다.
“요즘 다니는 절은 기도 빨이 좀 약한 것 같어. 학생 생각은 어뗘, 이참에 교회를 나가 볼까?”
“저희 부모님은 두 곳 다 안 가셨고요. 저는 어머니한테 지은 죄가 좀 있어서 보답하려는 마음에 공부 열심히 한 것뿐입니다!”
과거로 돌아왔다고 말하면 당장에라도 어디 가면 얼마에 할 수 있냐고 물을 것 같기에 대충 둘러댔다.
“도대체 얼마나 큰 죄를 졌기에 그런 보답을 하는 거여?”
“이것도 아직 부족… 아니, 이걸 내가 왜 답하고 있지? 헉헉. 그만 따라오세요! 집까지 따라오실 거예요?”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에도 뒤에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어디든 못 따라가겠어?”
“이제 곧 시험 끝날 텐데 아드님 마중하셔야죠!”
“이번 시험은 경험만 한다고 그랬으니께 걱정 말어∼”
아니요.
걱정 안 해요.
그러니까 제발 그만 쫓아와요!
마음 같아선 매몰차게 떨쳐 내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라 그러지 못했다.
아주머니 또한 누군가의 어머니일 테니까…….
“탓네, 탔어. 결국 따라 탔어. 에휴∼”
버스에 따라 탄 아주머니를 보며 말했다.
“그니까 알려 주면 안 따라갈 거 아니야.”
“앉기라도 하시든가요!”
“됐어. 옆에 꼭 붙어 있어야 뭐라도 하나 건질 거 아니야!”
자리가 텅텅 비었지만, 아주머니는 굳이 내 자리에 붙어 손잡이를 잡고 서 있으려 했다.
“빨리 여기 앉아요.”
“그냥 학생 앉아. 남의 집 귀한 자식 괴롭히면 안 되지.”
“위험해요. 어디 안 도망갈 테니 앉으시라고요. 그리고 이미 괴롭히고 있거든요?”
꾹꾹.
자리에서 일어나 아주머니를 강제로 앉혀 버렸다.
“일단 물어는 볼게요.”
어머니는 집에 1차 시험 합격 통지가 날아와서야 내가 사법 시험을 본 사실을 아셨다.
당시에 일부로 숨긴 것은 아니었다.
깜짝 선물을 해드리려 했으니까.
― 이게 뭐야 치우야?
웃음과 울음을 같이 보이셨던 어머니의 얼굴이 기억난다.
― 검사가 되고 싶어요, 엄마.
― 아이고∼ 우리 아들 진짜 장하다 장해!
끝은 당연히 활짝 피어 있는 웃음꽃.
하지만 어쨌거나 시험을 보기 전까지 알지 못하고 계셨으니, 어머니가 나에게 기도를 한 적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저 어떤 액션이라도 취해야 아주머니가 편히 돌아가실 것 같은 생각에 전화를 걸었을 뿐이었다.
― 응, 아들∼
“엄마, 혹시 1차 시험 말고 오늘 제가 볼 2차 시험 때문에 기도하신 적 있어요?”
― 그럼∼ 당연히 했지. 그리고 굳이 시험 때문이 아니라도 건강하라고, 좋은 친구들 만나라고, 좋은 여자 만나라고, 얼른 돈 벌어서 우리 아들이 원하는 거 다해 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할게 엄청 많아서 문제지. 호호호.
“엄마…….”
뚝.
눈에서 흐른 눈물이 아주머니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 왜 그래 치우야? 시험 잘 못 봤어?
“아니요. 너무 잘 봤어요.”
― 목소리가 안 좋은 거 같은데…….
“너무 좋아서 그런 거예요. 금방 갈게요, 엄마.”
― 그래! 치우 좋아하는 된장찌개 끓여 놓을게.
탁.
전화가 끊겼음에도 아주머니는 침묵을 유지했다.
눈물이 흐르고 있는 내 모습에 말을 걸기 미안해서일까?
아니.
어머니와의 통화에서 자식이 눈물을 흘리는 이유를 잘 알고 있어서 일 것이다.
“아주머니. 아까 제가 잘못 말한 거 같아요. 어머니가 기도한 거 맞네요.”
“그래. 그래서 울고 있는 것도 알고 있고.”
1차 2차를 떠나서 모든 시험이 합격할 수 있던 이유는 어머니 때문이었다.
과거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지은 죄를 갚을 수 있던 이유도 어머니의 기도였으니까.
“기도를 어디서 하는 게 중요하진 않아요.”
“나도 알어. 답답하니까 글치! 답답하니까!”
“아주머니 아드님도 꼭 합격하실 겁니다. 아주머니가 절실히 기도하고 계시잖아요.”
어쩌면 아주머니가 가장 듣고 싶던 말은 정답이 아니라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
삑―
“전 내릴게요.”
“고마워∼”
“뭐가요?”
원하시던 물음에 답을 하지 못했는데.
치익―
이내 버스 뒷문이 열렸고, 나는 뒤돌아 물었다.
“덕분에 힘이 나네!”
“하하하. 나중에 봬요.”
“나중에?”
“혹시 모르잖아요. 아드님이 합격하면 저랑 연수원 동기가 될지.”
부우우웅!
떠나가는 버스 창문에 아주머니의 미소가 보였고, 덕분에 내 마음은 조금이나마 가벼워졌다.
하지만 그건 잠깐이었다…….
“저기 온다!”
“아오… 산 너머 산이네.”
집 앞에 몰려 있는 언론사들의 모습.
나는 결국 없는 체력에 동네를 몇 바퀴나 돌고서야 겨우겨우 그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
“하, 좋다∼”
그래서인지 집 근처에서 풍겨 오는 된장찌개 냄새가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오래된 빌라 계단을 오를 때마다 가까워지는 냄새와 온기.
바닥나 버린 체력이 벌써부터 회복되는 듯했고, 삐걱거리는 문이 평소보다 더욱 가볍게만 느껴졌다.
“다녀왔습니다!”
* * *
강철호 검사장님 : 치우, 네 법복은 내가 직접 다려서 임관식 때 입혀 주마.
성훈이 : 와! 내 친구 최고! 난 네가 사랑스러워… 아니, 자랑스러워!
방영호 회장님 : 입고 싶었던 법복을 생각보다 더 빨리 입을 것 같구나.
어머니 : 우리 아들 파이팅!
태호 삼촌 : 워메∼ 이 꼬맹이 결국 일을 내뿔었구만!
010-XXXX-XXXX : 저, 박민호입니다. 오케이 흥신소 사장… 파이팅…….
019-XXX-XXXX : 가문국밥 아저씨야. 엄마랑 국밥집에서 기다릴 테니까 끝나고 와
011-XXX-XXXX : 학생주임이야. 성훈이한테 네 번호 허락 없이 받았어. 미안했다. 진심으로…….
3차 시험인 면접 당일.
휴대폰은 쉴 새 없이 울렸다.
오른쪽 주머니가 뜨거워질 만큼 말이다.
사실 사법 시험은 2차가 끝이라 봐도 무방했다.
3차는 면접이라기보다는 예비 법조인이 될 사람과 법조계 인사들의 상견례 같은 자리이니까.
더군다나 1차와 2차 시험 전부 압도적인 점수로 수석을 차지한 나를 이유 없이 떨어트린다면 오히려 공격을 받는 쪽은 면접 위원들이 될 터였다.
“11조 들어오세요”
내가 속한 조가 불리고 면접장으로 들어갔다.
조 마다 다른 위원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내가 속한 조에는 교수와 지청장 그리고 부장판사가 있었다.
다른 조도 커리어가 화려한 면접 위원들이 앉아 있었지만, 내가 속한 조는 그 화려함이 더 컸다.
“이야∼ 말로만 듣던 한치우 학생을 여기서 보내.”
“하하하, 그러게요. 이제 학생이 아니라 사법연수생으로 불러 드려야 하나?”
“내가 치우 학생 시험지 채점한 교수로서 말하는데 검사보다는 판사가 나을 것 같은데. 아니면 천재?”
“하하하하하.”
교수의 말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합격증을 받은 기분이었다.
같이 들어온 다른 사람들이 무안해질 만큼 질문은 나에게만 쏟아졌으니…….
물론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불합격하지는 않을 것이다.
말하듯 이 자리는 상견례이며, 가장 관심 있는 사람에게 질문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그래요. 모두 수고하셨고 앞으로 훌륭한 법조인이 되어 주시길 바랍니다.”
합격증보다 더 확실한 면접 위원들의 웃음을 들고 시험장을 빠져나왔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싸워 볼까?”
조금은 크게 말한 것 같다.
시험장 문밖으로.
아니, 그보다 더 넓은 곳을 향해.
[한치우, 47회 사법시험 최종 합격!]
깡으로 싸우는 검사 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