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하하하, 치우가 날 여러 번 놀라게 하는구나.”
대수롭지 않은 척.
그저 치기 어린 고등학생이 내뱉은 말이라 웃어넘기고 싶겠지만, 그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이유를 안 물어봤구나.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증거가 있습니다.”
비윤리적인 실험.
수많은 불치병 환자들에게 거짓 희망을 심어준 사건.
“증거?”
“네. 애초에 체세포 줄기세포는 존재조차 하지 않습니다.”
여유로운 미소를 유지하기에는 내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는 듯했다.
“증거는? 증거를 보여 준다면 나도 한 번 알아보마.”
지금이야 인류 역사를 뒤바꿀 만큼 대단한 업적이라 떠들어 대지만, 시간이 지나 진실을 알고 나면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이 쓴 논문인 게 의구심이 들 정도로 어설픈 면이 많았다.
이후, 논문 조작의 증거는 인터넷의 한 유저에 의해 밝혀지고, 난자를 제공했던 병원의 이사장은 기자회견에서 줄기세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폭탄 발언을 해 버린다.
“대신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하하하, 거래를 할 줄 아는구나.”
“괜찮은 전셋집 하나 구할 돈을 빌려주십시오.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괜찮은 전셋집을 하나 구해 주십시오.”
“뭐?”
정보의 가치는 지불하는 대가와 비례한다.
방영호의 머릿속에는, 이 아이가 가진 패가 진짜라면 고작 전셋집이 아니라 더 많은 대가를 치르더라도 패를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었다.
“흠, 아저씨가 조금 당황스러운데?”
“100억. 지금 성훈산업의 재정 상태를 봤을 때 거의 전부를 배팅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이 패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확신이 설 것이다.
그저 어른 놀이에 심취해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확신.
“그래. 네 말이 맞다. 우리 기업은 줄기세포에 곧 전부를 배팅할 예정이야.”
“일찍 찾아와 다행이네요.”
“내가 볼 수 있을까 그 증거?”
“오픈된 패에는 베팅을 하지 않는 법이죠. 증거를 들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때 제 이름이 쓰인 등기부 등본을 내어 주시길 바랍니다.”
* * *
치우가 나가고 방영호는 서재를 떠날 수 없었다.
“흠…….”
왜 단 한 번도 의심을 하지 않은 거지?
어째서 줄기세포가 무조건 될 거라 확신하고 있던 거지?
시골 촌놈이 탄탄대로를 달려 지금의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실패하지 않은 이유는 실패의 가능성이 없는 사업만을 해 왔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지금껏 신념을 지키며 쌓아온 모든 것이 한 번에 무너질 수도 있는데 말이다.
“박 상무님.”
― 네, 회장님.
그래, 황희석 박사에게 홀린 것이다.
정부도, 수많은 대중도, 혹은 잘 나가는 기업인들까지.
줄기세포 투자에 말이다.
문제는 홀려 있는 이 방영호를 깨워 준 사람이 왜 하필 고등학생인 거냐는 말이다.
사실 깨워 줬다기보다는 더 강한 누군가에게 새롭게 홀렸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였다.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눈빛과 행동이었으니까.
― 회장님?
방영호는 수화기 속 박 상무에게 말끝을 잇지 못하며 고민을 내비쳤다.
이윽고 진중히 열린 그의 입술엔 단호함이 엿보였다.
“투자 보류합시다.”
* * *
증거를 수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황희석 박사 논문에 실린 사진과 같은 사진이 실려 있는 다른 논문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 논문을 스크랩했다.
“사기를 치려면 성의라도 있어야지. 완전 복사에 붙여 넣기네.”
또 거짓이라는 사실을 못 박아 놓고 들여다보자 잘 맞춰진 퍼즐 속에 엇나간 조각들이 나타났다.
“가장 확실한 건 이사장의 증언인데.”
그렇다고 고등학생이 잘 나가는 병원의 이사장을 찾아가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실토한다 해도 이사장의 말을 담아 올 수조차 없을 거고.
고등학생인 내 손에 들려 있다면 그 말은 변질될 확률이 높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전셋값 정도는 되겠지.”
다시 방영호의 집을 찾았을 때는 그전과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그래 왔구나.”
집이 바뀐 것은 아니다. 집주인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일 뿐.
“서재로 올라가자꾸나.”
두꺼워진 책가방을 눈치챈 방영호가 계단 중간쯤에서 나에게 손짓했다.
[등기필증]
보란 듯이 꺼내든 의미는 책가방 속에 있을 패를 빨리 보고 싶다는 뜻이었다.
“주스 줄까?”
“커피 주세요. 그것보다 이거 먼저 보시죠.”
내가 준비한 패를 책가방 속에서 꺼내 펼쳐 보인다.
“회장님 시선에 뜨거운 커피가 목에 걸릴 것 같아서요.”
이 집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방영호의 시선은 오로지 내 가방이었다.
“신기하구나. 치우 네가 열여덟이라는 게.”
책가방이 열린 뒤 다시 방영호의 눈빛을 살폈다.
책가방을 향하던 그의 눈동자 속에는 내 모습이 비쳤고, 그 눈동자 속에 비친 내 모습은 더 이상 열여덟 살짜리 고등학생도, 아들의 친구도 아니었다.
삐익!
― 네, 회장님.
― 아주머니, 커피 좀 올려줘요.
인터폰에서 손을 뗀 방영호가 자연스레 서류들을 읽어 내려갔다.
“진짜 놀랄 노 자네.”
스르륵.
“이거 네가 직접 스크랩한 게냐?”
“네.”
도저히 적응 안 되는 구식 데스크톱을 가지고 만든 스크랩 자료.
방영호는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자료를 수도 없이 많이 봤을 것이다.
그런 방영호에게 조금 부족한 증거를 팔기 위해 많은 시간을 쏟아 부었다.
“스크랩이 아니라 PT 자료였으면 이게 몇 십억짜리 계약서라도 쉽게 사인을 할 것 같구나.”
“이제 결정하시겠어요?”
“결정은 어제 치우 너를 봤을 때 이미 바꿨고, 오늘은 바꾼 내 결정을 확신하는 자리다.”
스윽.
방영호가 등기필증을 스윽 밀어내 내 앞으로 보냈다.
“치우 네가 준비한 패가 아주 마음에 드는구나. 자, 내가 너에게 거는 배팅금.”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어머니에게 말하기가 그렇지?”
“네.”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다.
사기극에 놀아난 게 이해가 안 갈 정도로.
그는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부의 대물림이 아닌 밑바닥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자리에 맞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나요?”
“이 서재에는 참 많은 사람이 다녀갔단다. 그리고 여기를 찾은 사람들과 그들의 목소리는 높은 책장에 막혀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지. 대신 그 목소리들은 이 책장 속 책에 수집된단다.”
“제 배경도 수집됐나 보네요.”
“미안하구나. 이번 줄기세포 투자는 나한테 중요해서 말이다. 패를 볼 수는 없지만, 패를 들고 있는 사람 정도는 알아야 내 직성이 차거든.”
척.
자리에서 일어난 방영호가 책장 속에서 하나의 파일을 꺼냈다.
[한치우 보고서]
“어제 치우 너를 보고 이 파일이 꽤 두꺼울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여백이 많더구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학생, 그리고 집안 형편이 어렵다는 점이 끝이었지.”
아니다.
여백에는 마흔다섯 살 한치우의 인생이 새겨져 있지만, 과거로 돌아와 지워졌을 뿐이다.
지워진 여백의 무엇을 새겨 넣고 무엇을 바꿀지 결정하는 행운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내 눈앞에 방영호는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르겠지.
“그래서 치우 너의 모습이 더 믿기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의 너를 설명해 줄 이력서가 없으니.”
“열여덟 살 짧은 줄에 채워 넣을 게 뭐가 있겠어요. 그저 남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학생이라 생각해 주세요.”
“하하하, 그 짧은 줄에 내가 감겨 버리다니.”
스윽.
방영호가 내 앞에 놓여 있던 등기필증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이 필증은 부모님이 놀라시지 않게 다시 전하마.”
“감사합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일어나는 엉덩이가 가벼웠다.
웃음을 보이실 어머니의 모습이 상상돼서.
“치우 네가 입고 있는 옷이 교복이 아니라 양복이었으면 참 좋겠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굳이 뒤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으니 말이다.
“졸업식 때나 입겠죠.”
“그러니까 말이다. 지금의 치우 너도 내 옆에 두고 싶은데 네가 정말로 양복을 입게 되는 날까지 어떻게 참아야 할지 모르겠구나.”
드르륵.
“양복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서재의 넓은 문이 열렸다.
“제가 입고 싶은 옷은 양복이 아니라 법복이니까요.”
치우가 나가자 방영호는 넓은 집무 테이블 위 전화기를 들었다.
― 네 회장님.
“어제 제가 한 말에 지금 보낸 자료를 대입해 보세요.”
― 혹시… 황희석 박사 논문을 의심하는 겁니까?
그 말에 방영호는 한치우 이름이 적힌 보고서와 등기필증을 번갈아 바라봤다.
“아니요. 의심이 아니라 조작이 맞는 것 같습니다.”
* * *
― 글쎄 그렇다니까!
평소 조곤조곤하시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방안까지 흘러들어 왔다.
― 몰라. 새로 바뀐 집주인이 엄청 부자인가 보지. 지금 전세금 그대로 똑같이 재개발 아파트 전셋집을 내준다고 말했다니까.
다소 티가 나는 방법이었지만 방영호가 전달한 등기필증은 무사히 전달되었다.
그리고 오랜만이었다.
어머니가 저렇게 웃으며 통화를 하시는 모습은.
― 재개발 기간 동안 거취 비용까지 내준다니까 천운이지 천운! 그렇지 않아도 이사하면 치우 학교 문제도 그랬는데, 지금 전세금으로 구할 집도 없었고…….
비록 작지만 따뜻한 보금자리의 위치는 바뀌겠지만, 여전히 나와 어머니의 온기로 가득할 것이었다.
― 우리 치우? 그럼∼ 여전히 공부 잘하고, 착하고, 건강하고, 잘생겼지. 너는 잘 지내? 못 본 지 오래됐는데.
예전에는 매일 같이하시던 친구와의 통화를, 또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 어머니의 나이를 나 또한 겪고 나서야 알았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면 자기 자신의 삶이 문득문득 그리워진다는 것을.
― 그래. 잘 지내고 치우 방학하면 같이 놀러 갈게.
이제 곧 겨울 방학이 시작된다.
학교 생활?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굳이 다가가려 하지도 않았다.
조금 달라진 것은 나를 괴롭히던 명선호와 그의 무리는 내가 손만 올려도 몸을 바르르 떤다는 것과 날이 갈수록 근육이 붙는 나를 보며 이제 내가 자신을 괴롭힐까 두려워했다.
이 상황은 교사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교감과 학생주임은 나를 보면 억지웃음을 보였고, 다른 교사들은 나를 피해 다니기 일쑤였다.
한 명도 나에게 다가오는 교사가 없는 걸 보니 지금껏 학교 폭력 피해자 한치우에게 떳떳한 교사가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딱히 불편한 점은 없었다.
이미 내가 어떤 아이인지 소문이 돌아 내 성적에 자신들의 감정을 섞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히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학교는 미래를 계획하며 졸업장을 받기 위한 시간을 때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였다.
“사시는 내년이고, 방학은 약 3개월.”
이제 곧 방학이 시작되면 꽤 많은 시간이 생긴다.
시장통 어머니의 야채 노점을 번듯한 가게로 만들어 줄 시간도 함께.
그리고 때마침 괜찮은 목표물이 모니터 속에 나타났다.
“그래 예행연습도 할 겸.”
드르륵.
치우가 방을 떠나고 멈춰 있는 모니터 속 화면에는 현상수배범 명단이 떠 있었다.
* * *
사실 처음부터 현상수배범을 잡자는 계획이 떠오른 건 아니었다.
책상에 앉아 인터넷을 뒤적거리면 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그 정보가 미래를 알고 있는 내 머리에 대입되면 아드레날린을 뿜어냈다.
주식을 할까?
앞으로 어떤 종목이 오를지 대충은 알고 있는데.
‘밑천이 없지.’
사실 밑천이 있다 해도 전문가가 아닌 이상 큰 틀만 알고 있지 현재 시점에서 내일 어떤 종목이 오를지는 자세히 모른다.
‘이건 나중에 써먹고.’
아! 복권을 사면 되지 않을까?
꽤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했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번호를 모르잖아.’
과거로 돌아올 걸 대비해 매주 복권 번호를 외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설령 그런 사람이 있다 해도 나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지금의 나는 학생이었고 꽤 많은 정보가 미성년자라는 단어에 튕겨 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찾던 중 머릿속에 ‘팍!’ 하고 꽂히는 단어 하나가 보였다.
[현상수배범 명단.]
법복을 입기로 한 나에게 꽤 훌륭한 꼬리표가 돼 줄 단어.
아무런 밑천 없이 점포를 계약할 돈을 마련해 줄 단어.
현상수배범 명단 중 낯익은 몇 명은 차후에 흉악 범죄를 저질러 잡히게 된다.
내 목적이 정의롭다고 자부할 수는 없었다.
내게는 복수와 정의 등의 여러 이정표가 있고, 그 끝이 아름답다고 확신할 수 없으니 말이다.
하나 사전에 범죄를 막을 수 있고 가장 정의롭게 돈을 벌 방법이라 생각한다.
법복을 입기 전에 범죄자를 잡아 볼 흔치 않은 기회이기도 하고.
성공하면 입게 될 법복에 몇 개의 훈장이 달려 있을 것이었다.
‘일단 이놈부터.’
모니터 속 수배범의 몽타주 중 가장 먼저 X를 친 녀석은 현직 검사장의 딸을 납치 성폭행한 후 살인까지 저질러 언론을 꽤 시끄럽게 한 놈이었다.
경찰이 건 현상금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피해자의 아버지는 검사장이며 외할아버지는 송암 그룹의 회장이었다.
돈도 돈이지만 어쩌면 이놈이 검사가 되기 전 아주 괜찮은 뒷배를 만들게 해 줄지 모른다.
그리고 아마… 경찰이 건 현상금보다 훨씬 더 많은 현상금이 생기지 않을까?
* * *
집에서 나와 둑방 길을 걷다 보면 작은 시장 하나를 볼 수 있다.
하굣길 시장 앞을 지나지 않으려 먼 길을 돌아 집으로 향하곤 했다.
한겨울 시장통에 쭈그리고 앉아 야채를 파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모습이 보기 싫은 건 똑같다.
다만, 그때는 창피함이 싫은 나를 위해서였고, 지금은 창피함을 무릅쓰고 나를 위한 희생을 감수하는 어머니를 위해서이다.
‘엄마, 학교에서 들었는데 앞으로 며칠간 불법 노점 단속한대요.’
‘응? 학교에서 그런 것도 말하니?’
‘선생님들이 얘기하는 거 우연히 들었어요.’
다소 어설픈 거짓말이었지만, 어머니는 며칠간 노점을 쉬기로 결정하셨다.
평소 같으면 야채 보따리를 옮겨가며 단속을 피해 노점에 나가시겠지만, 막막하던 집 문제가 해결되었고 용돈을 달라며 떼를 쓰던 아들의 변화가 조금 편한 결정을 하게 만들었다.
“아따! 아줌마 다 퍼주면 나는 풀 뜯어 먹고 살까?”
시장에 들어서자 주변 소리와 냄새가 아주 엿 같은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아침에 달라고 했잖아! 여기 쪽팔려서 오기 싫단 말이야!”
“미안해… 엄마가 아침에는 돈이 없어서…….”
당시에 철없는 아들의 손에 쥐여 줄 돈이 없던 어머니는 평소보다 일찍 시장에 나갔다.
한겨울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쭈그려 앉아 목청이 터지도록 외친 끝에 주머니에 채워 넣은 푼돈.
“엄마가 집에 밥해 놨으니까 가서 먹어.”
“됐어! 짜증나!”
모진 말을 내뱉고 시장을 뛰쳐나왔다.
빨리 가서 돈을 바쳐야 한 대라도 덜 맞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 두려움과 스트레스를 어머니의 가슴에 못을 박으며 풀었으니.
“내가 병신 같은 새끼지…….”
퍽!
“한심한 새끼…….”
퍽!
그때의 나를 때리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고, 얼마나 세게 쳤는지 입안에서 피 비린 맛이 났다.
그래도 참 다행이다.
지금의 나는 그때와 달랐다.
이제 어머니는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쭈그려 앉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시장 안을 돌아보며 비어 있는 점포를 확인했다.
비어 있다 해도 지금 당장 점포를 계약할 돈은 없었다.
다만, 아주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고, 그 계획이 크게 빗나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장을 찾은 이유는 단순히 점포를 둘러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오케이 흥신소] [오케이 일수]
점포를 둘러보다 시장 입구 반대쪽 길 끝에 다다르자 낡은 건물 이 층에 두 개의 간판이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상호를 보면 알겠지만, 간판만 두 개일 뿐 사무실은 하나다.
사무실 안에는 껄렁거리는 동네 조폭들이 담배를 뻐끔뻐끔 피며 카드를 치고 있을 것이다.
여기를 찾아온 이유?
나는 목격자들의 토대로 만들어진 몽타주 속 범인의 진짜 얼굴을 알고 있었다.
이름과 살아온 인생까지.
오양호.
내가 과거로 돌아오기 전 놈은 더 이상 수배범이 아닌 살인범으로 교도소에 복역 중이었으니까.
오양호가 앞으로 10년이나 더 자유로울 수 있던 이유는 신분 때문이다.
밀항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온 불법체류자이자 조선족 조폭.
경찰서에 달려가 놈의 정보를 알려 줄 수도 있지만, 경찰서 컴퓨터에는 놈의 이름도 지문도, 그 어떤 정보도 없을 것이다.
나 또한 지금의 오양호의 행적을 모르니 경찰은 장난을 의심하며 내가 설명해 준 오양호의 몽타주를 새롭게 그릴 것이고, 몽타주가 조금 더 정확해질 뿐이었다.
하지만 저 낡은 건물 속 컴퓨터는 조금 다르다.
합법적이지 않은 정보들이 저장될 수 있으니까.
과거 교도소 복역 시절, 살인을 저질렀다는 공통점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오양호는 나와 같은 교소도에 수감 되었고, 우연히 그를 도와준 한 남자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니 검사장 딸내미 죽였다는 저 양반 알지? 내가 그때 당시에 흥신소하고 있었잖아. 그런데 오양호 저 양반이 찾아와서 지가 대단한 사람 딸내미를 죽였다고 천만 원을 주면서 자기를 좀 도와 달라 더라고.”
그런 정보들이 저장되어 있으니 당연히 놈을 찾는 속도는 저 낡은 건물 속 컴퓨터가 더 빠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찰이 아닌 내 손에 잡혀야 목적을 이룰 수 있지.’
생각을 정리하고 칠이 다 벗겨진 손잡이를 잡았다.
끼익―
아귀가 맞지 않는 녹슨 철문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열리자 갇혀 있던 담배 연기가 빠져나왔다.
“어서 오…….”
꽃무늬에 쫙 달라붙는 티셔츠.
얼마나 빨빨거리며 양아치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지 보기 싫을 정도로 앙상한 몸.
유니폼이라도 되는 듯 모두가 같은 옷을 맞춰 입고 옹기종기 모여 카드를 치고 있었다.
“뭐여? 학생 아니여?”
시장 상인들을 꼬드겨 사채를 쓰게 해 불법 고리를 받아먹고, 심부름센터를 가장해 온갖 추잡한 짓은 다하고 다니는 양아치들.
겉모습은 조폭을 따라 하려고 하지만 녀석들은 그저 양아치일 뿐이었다.
선과 악, 어디에도 섞이지 못하는 쓰레기들.
“사람 좀 찾고 싶은데.”
“꼬마야∼ 사람을 찾으려면 경찰서를 가야지. 여기서 찾으려면 엄마한테 용돈을 받아 오던가, 아니면 엄마를 줘도 되고.”
“하하하하하하! 아따, 형님. 애한테 말이 심하요.”
쓰레기들한테 인간 대접을 해 줄 필요는 없었다.
“하여튼 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처먹는다니까. 귓구멍이 양아치라 못 듣는 건가?”
오양호라는 더러운 짐승을 잡기 위해서 쓰레기를 만져야 할뿐.
내 말에 나를 조롱하며 카드를 치던 녀석들의 행동이 멈췄다.
“꼬마야, 지금 죽고 싶다 그런 거여?”
“하하하.”
분명 겁을 주려고 한 말일 텐데 내 눈에는 헛웃음이 나오는 코미디였다.
“얼씨구? 쪼개 버리네. 아나, 꼬마한테 주먹 쓰기 싫은데.”
“너희 나 모르지?”
“또라이 아니여? 갑자기 뭔 소리야. 니가 누군데?”
“모의고사 전국 1등.”
“얘 뭐라는 거여?”
톡톡.
책상 위에 있는 도청 장치와 말도 안 되는 이자율이 적혀 있는 대출 서류들을 건드렸다.
“너희보다 똑똑하니까 건들면 안 된다는 소리야.”
“그런데 이 새끼가 아까부터 무슨 개소리를 찍찍 해대는 거야.”
“그리고 사실… 주먹도 좀 쓸 줄 알아.”
처음 민태호를 따라 조폭이 되었을 가장 먼저 배운 게 뭐였겠는가.
쌈박질이다.
내 눈앞에 보이는 세 녀석은 공통점이 있다.
“어린 노무 새끼가 어디서 주먹 좀 쓰나 본데 칼로 배때기 좀 쑤셔 줄까?”
주먹보다 입이 더 세며.
“꼬마야, 네가 서울연합파라고 알려나 모르겠네. 이 몸이 지금은 시골에 내려와 있지만 내가 한때 서울 연합파의 행동대장으로…….”
자신의 나약함을 허세로 둔갑시킨다.
스윽.
나는 느긋이 팔을 걷어 올리며 목을 풀었다.
“한번 볼까? 정말 너를 건드리면 안 되는지?”
“아이고, 애새끼들은 대가리가 덜 여물어서 돌려 말하면 못 알아듣는다니까.”
그 모습을 보자 마지막까지 앉아 있던 한 녀석이 테이블 위 재떨이를 손에 들고 다가온다.
“못 볼 걸?”
과거로 돌아오는 바람에 단단한 근육이 사라졌다 하더라도 밤마다 공원에 나가 다시 몸을 키웠다.
무엇보다 저 앙상하디 앙상한 팔에 문신을 둘렀다고 내가 위축될 리가 없었다.
게다가 허세를 제외한다면 녀석들 피지컬이 나보다 더 낫다고 할 수도 없고 말이다.
“건들 수가 없으니까.”
퍽!
녀석의 턱을 향해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쨍그랑!
“뭐야… 이거…….”
들고 있던 사람의 턱이 돌아가 힘을 잃어버리니 자연스레 재떨이가 떨어져 깨졌다.
나는 알고 있다.
이제 남은 두 녀석의 더러운 몸에는 손을 대지 않아도 된다는 걸.
나약함을 보호하기 위해 허세로 둔갑한 방어막과 앙상한 팔을 감추기 위해 두른 문신이 통하지 않는 대상에게는 너무나 순종적이라는 걸.
“덤빌 거 아니면 앉아요.”
“아! 네… 아니, 어…….”
“그리고 아까 뭐? 서울연합파? 내가 알기론 태호 삼촌이 당신 같은 사람을 식구로 받을 리가 없는데.”
게임 끝.
동네 양아치인 놈들에게는 민태호의 이름 석 자만으로도 내게 덤빌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혹시… 민태호 형님을 아시는 거예요? 아니, 알고 있어?”
“존대할 거면 존대하고, 반말할 거면 반말로 하지? 머저리 같으니까.”
“아… 네. 그럼 존대로 하겠습니다.”
“됐고.”
스윽.
그림을 잘 그리는 성훈의 도움을 받아 조금 더 정확해진 오양호의 몽타주를 꺼내 놓았다.
“이놈 알지?”
“잘… 모르는데요?”
어쩜 이리 티가 날까.
“태호 삼촌한테 말해 줄까? 너희가 태호 삼촌 이름 팔아서 헛짓거리 하고 다닌다고?”
“아니요… 근디… 이놈을 왜 찾으시는지…….”
“잘 알잖아, 너도. 이놈을 왜 찾아야 하는지.”
“저는 잘…….”
“또 돌려 말하니까 못 알아듣네.”
머리가 딸리니 입을 못 놀리고, 살인범에게 받은 돈이 있으니 후일이 두려운 것이다.
“자, 이해하기 쉽게 말해 줄게.”
삐딱하게 기대고 있던 자세를 고쳐 잡았다.
“세 가지 선택이 있어. 첫 번째는 태호 삼촌 귀에 너희 이름이 들어가 어디 야산에 조용히 묻히는 거고, 두 번째는 너희가 돈을 받고 오양호를 숨겨 줬다는 사실이 피해자 아버지인 검사장에게 들어가 거시기가 안 설 때까지 감옥에서 썩는 것.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이놈을 잡아다 내 앞에 데리고 오는 거야.”
내가 내준 문제는 객관식이었지만, 녀석의 머릿속은 주관식일 것이다.
“3번으로… 하죠…….”
* * *
선택을 마친 흥신소 사장이 손짓하자 옆에 있던 직원이 컴퓨터 앞으로 향했다.
“얼굴.”
“네?”
“얼굴 좀 가까이 와 봐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미는 얼굴.
슥슥―
“이게 지금 뭐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손에 든 사인펜.
[저는 양아치입니다.]
[010―XXXX―XXXX]
사인펜을 들고 녀석의 이마를 메모지 삼아 내 전화번호를 적어 넣었다.
“찾으면 거울 보고 이 번호로 연락하세요.”
“이게 무슨…….”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녀석이 거울로 향했다.
“이런… 씨…….”
“대가리 또 안 돌아갈까 봐 말해 주는 건데, 딴짓하지 말고 여기 틀어박혀 오양호 위치 찾을 때까지 일하라는 거야.”
“그럼 종이에 적으면 될 거 아니요!”
“잘 들어. 내가 여길 나가서 3일 안에 연락이 안 오면 나는 태호 삼촌이나 검사장을 찾아갈 거야. 그렇게 되면 누군가에게 아주 큰일이 생기겠지?”
번쩍.
“찾았습니다!”
컴퓨터를 열심히 두드리던 직원이 손을 번쩍 들고 소리쳤다.
“휴∼”
그 모습을 본 사장 녀석은 물티슈를 꺼내 이마를 빡빡 문지르며 직원에게 메모지를 건네받았다.
“오양호가 있는 위치입니다.”
직원에게 건네받은 메모지가 다시 나한테 향한다.
“왜요? 이것도 이마에 적어서 보여드릴까요?!”
아까 내 행동이 기분 나빴는지 자기 이마를 톡톡 치며 비꼬았다.
“됐고. 내 앞에 데리고 온다 하지 않았나?”
“그놈 살인자에 조선족 조폭입니다. 불법체류에 신분도 없고요. 거기 들어갔다가는 통나무 될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마음에 안 들면 알아서 하시든가. 어차피 죽을 거면 몸속 장기라도 지키렵니다.”
* * *
맞아.
우리 동네에 꽤 규모가 있는 차이나타운이 있었지.
곧 대대적인 재개발로 인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질 곳이 지금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No Korean Entry]
대문짝만한 팻말.
“참, 주객전도가 따로 없네.”
그들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조선족들은 폐쇄성이 강하고 오양호 같은 몇몇 부적응자들과 이런 팻말이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이미지를 더 깎아 내렸다.
조선족 모두가 오양호 같은 것은 아니고, 모두가 같은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당시에 주변 어른들은 이곳을 출입하지 말라 당부했고 나 또한 별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경찰들까지도 차이나타운 근처만을 순찰할 뿐 신고가 들어오지 않는 이상 내부로 들어가지 않았다.
“아주 위험한 곳으로 숨어 버렸네.”
돈을 받은 흥신소 사장은 차이나타운 속에 오양호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위조 여권과 약간의 생활비를 포함해서 말이다.
“목줄 없는 짐승 새끼가 이 안에 있다는 말인데…….”
오양호는 조선족 조폭이었고, 대한민국에서 세력을 꽤 만들었지만 쫓기는 몸이었다.
그 탓에 익숙한 동네를 떠나 이 지역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들어가려면 몸에 갑옷이라도 둘러야겠네.”
강한 놈보다 무서운 놈?
포기한 놈이다.
포기한 놈보다 더 무서운 놈?
바로 미쳐 날뛰는데 통제조차 할 수 없는 놈.
도시 전체를 비교하면 크기는 얼마 안 되지만 오양호는 분명 저 안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어 놓았을 것이고, 그 생태계 안에서 통제 없이 미쳐 날뛰고 있을 것이다.
“일단은 갑옷부터 구하러 가 볼까.”
* * *
차이나타운이 일종의 던전이라 치자.
오양호라는 보스 몬스터가 있고, 그를 따르는 작은 몬스터들이 있다.
그런 던전을 맨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자살행위이다.
같이 들어갈 동료를 구하거나 좋은 갑옷과 좋은 무기를 장착해야 하고, 그런 것들은 지금 내가 서 있는 좋은 저택에서 나올 확률이 높았다.
띵동!
― 안녕하세요. 성훈이 친구 한치우라고 합니다.
띡.
다소 클래식한 전자음을 내며 높은 대문이 열렸다.
“어? 치우야! 어쩐 일이야?”
친구의 방문에 버선발로 나온 성훈이.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웃으며 나를 맞이하는 이유.
내 친구가 성훈이 하나 듯, 성훈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성적인 탓에 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다만, 돈 많고, 공부 잘하는 탓에 아무도 건들지 못한 것일 뿐.
어쨌건, 미안하구나.
지금 내게 필요한 동료는 고등학생 친구가 아니라서 말이야.
“아버지 계셔?”
“응.”
― 황의석 박사의 줄기세포 논문 조작 의혹이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마당을 지나 집안에 들어서자 텔레비전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방영호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텔레비전 속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이곳에서 좋은 무기와 갑옷이 나올 확률을 높여 줬다.
“치우 왔어요. 아빠 보러 온 것 같아요.”
“그래. 아빠 치우랑 잠깐 얘기 좀 할게.”
아버지가 자신보다 더 나를 반기는 상황에 성훈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치우구나, 잘 왔다. 그렇지 않아도 보고 싶었는데.”
방영호가 좋은 아버지였는지는 모른다.
다만, 방영호의 어깨에는 가족과 수천 명의 직원, 또 직원들의 가족들이 있다.
그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어깨에 이고 지켜야 한다는 사실이 방영호가 좋은 아빠가 되지 못하게 방해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까지 지켜오던 모든 것들이 한 번에 무너질 수도 있던 상황을 내가 막아 줬으니, 오랜만에 환한 미소를 보이는 것이 이해가 갔다.
문제는 미소의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이 성훈이가 아니라 나라는 것이지만.
“치우야 서재에 가서 얘기하자꾸나.”
방영호는 서재로 올라가 버렸고, 나는 뒤따라가던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왠지 모를 서운함을 내비치는 성훈이의 얼굴.
친구와 아버지가 자신을 뒷전 시 하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성훈아.”
“응?”
“내가 불행한 니 미래 바꿨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건 몰라도 되고, 나중에 어른 되면 나한테 비싼 술 한번 사.”
성훈이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금 내 행동에 서운해 하지 마.
어떻게 보면 방영호의 미소는 너를 위한 거니까.
방영호의 어깨에서 가장 무거운 사람은 너일 테니까.
조금은 풀어진 성훈이의 표정을 뒤로 한 채 서재로 올라갔다.
넓은 서재에 퍼지는 은은한 커피 향.
“그때 보니 커피 취향이 나랑 같더구나.”
처음 이 서재를 방문했을 때 방영호가 나에게 내준 것은 등기필증이었고, 지금은 내 취향을 고려한 커피다.
모두 나를 위해 준비한 것이지만 뜻이 다르다.
값어치로 따지자면 등기필증이 훨씬 더 높겠지만, 방영호가 쓰는 마음은 등기필증보다 커피 한 잔이 훨씬 더 많으니까 말이다.
“벌써 설레는구나. 네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거래는 마음에 드셨어요?”
“사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내 입장에서는 거래라기보다 도박이었거든. 고등학생의 말을 믿고 전부를 움직이는 걸 투자라고 할 순 없지.”
홀짝.
은은한 커피 향을 뿜는 커피 잔이 방영호 코에 가까워졌다.
입이 커피 잔에 가려졌지만, 방영호의 은은한 미소는 숨겨지지 않았다.
“거래는 득과 실이 공존하지만, 도박은 달라. 둘 중 하나거든. 그리고 나는 도박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하하하.”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에게는 머릿속의 미래가 시간의 흐름대로 나타나는 것일 뿐인데 방영호의 시간은 꽤 불안했을 테니 말이다.
“웃는 걸 보니 이미 내 말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구나.”
“이해할 걸 알고 말씀하셨겠죠. 보통의 고등학생에게 할 말씀은 아니니까요.”
“하하하, 네가 내 머릿속에서 놀고 있구나.”
방영호가 내 웃음의 의미를 파악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얘기할 수는 없었다.
“여튼 나는 도박을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 포장하는 걸 아주 싫어해. 남들보다 앞서가고 남들이 쉴 때 일을 한다면 리턴은 키우고, 리스크는 줄 일 수 있으니까. 도박은 노력하지 않은 자들이 바라는 희망일 뿐이지.”
스윽.
방영호가 테이블 밑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 쪽으로 밀어냈다.
투명 케이스에 들어 있는 통장과 도장.
“이번 줄기세포 투자에도 그런 신념을 대입했고, 남들보다 앞서가고 있다고 믿었지.”
“신념을 깨 버리신 거네요?”
“맞아. 신념을 깨고 너에게 모든 것을 배팅했지. 그래서 모두를 지킬 수 있었고.”
스윽.
방영호가 꺼내 놓은 통장을 슬며시 바라보았다.
“거래는 이미 끝난 거 같은데요. 회장님이 보내 주신 전셋집을 무사히 받았으니까요.”
“이건 너에게 배팅한 당첨금이 아니야. 내 신념을 깨 준 대가지.”
스윽.
통장을 다시 방영호 쪽으로 밀어냈다.
“그 대가 돈 말고 다음 거래에 얹어 주시죠.”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분명 어머니 점포 하나 정도는 쉽게 구할 수 있을 만큼의 액수일 것이다.
하지만 이 통장을 받는 순간, 방영호와의 다음 거래는 없다.
방영호는 나에게 있어 아주 훌륭한 거래처이다.
내 머릿속에 있는 미래의 정보들을 가장 훌륭한 값에 사 줄 그런 거래처.
자신의 신념을 깨준 대가?
그래.
그런 대가라 생각하며 저 통장 위에 덥석 손을 올려도 되겠지.
하지만 저 통장이 나한테 넘어오는 순간, 방영호는 내 손에 있는 통장에 언제든지 입출금을 하려 들 터.
그렇게 되면 내가 팔 정보들의 값은 내가 아니라 방영호가 정하게 되겠지.
“다음 거래?”
“네. 회장님이 괜찮으시다면 한 번 더 거래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꽤 괜찮은 거래를요.”
스윽.
반으로 접힌 작은 포스트잇 하나를 방영호에게 건넸다.
내가 팔 미래의 정보를 말이다.
“동현 바이오…?”
성훈산업이 줄기세포에 투자하려 하던 건 단순히 투자 수익을 바라서가 아니었다.
성훈산업은 의료기기를 제작하는 기업이었고, 줄기세포는 바이오산업의 혁신이라 떠들어 댔다.
그런 혁신에 투자할 기회를 잡았으니, 방영호 회장이 얼마나 설렜을지는 불 보듯 빤했다.
물론 줄기세포는 거짓이었지만.
“성훈산업은 투자 철회로 사내 잉여금이 넘쳐 나는 상태이고, 회장님은 또다시 새로운 투자처를 찾고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내 머릿속에서 노는 것도 모자라 내 머릿속을 읽고 있구나.”
“동현 바이오는 내년에 새로운 PDE5 억제제를 개발합니다.”
“PDE5면… 비아그라?”
“비아그라의 일종이죠. 다만, 국내 개발 PDE5 억제제 중 가장 부작용 케이스가 적으며 효과 또한 가장 좋습니다.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내년에 오를 주식 리스트 중 가장 첫 번째 줄은 동현 바이오라는 뜻이죠.”
대답이 돌아오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내년에 신약 개발 발표가 난다면 지금쯤 임상시험을 하고 있을 텐데… 혹시 치우 네가 시험에 참여했느냐? 만약 그렇다면 이건 받을 수 없어. 치우 너는 내부 기밀을 유출한 것이고, 나는 그 유출된 정보로 투자를 한 것이니까.”
“보통 그런 중요한 신약의 피실험자를 고등학생으로 뽑지 않죠. 그리고 그게 범죄라는 사실은 저도 알고 있고요.”
크게 한숨을 내쉬는 방영호.
“그리고 아쉽지만 이번엔 증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증거를 만들려면 동현 바이오의 신약 개발 자료가 유출되었다는 또 다른 증거를 남겨야 하니까 말이다.
“제가 제시한 거래 대금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니. 치우 네 입에서 나왔다는 걸 증거로 믿어 보마.”
만약 방영호와의 만남이 처음이고 똑같이 이런 거래 대금을 제시한다면 고등학생의 소설이라며 웃어넘길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미 깨질 수 없는 신뢰가 생겨 버렸으니 말이다.
“대신 출처가 없는 작물이니 싸게 팔겠습니다.”
“하하하하하, 나를 갖고 노는구나.”
이미 머릿속이 정리된 듯 ‘진짜’ 웃음을 보이는 방영호였다.
“그래. 이건 받고 내가 너한테 뭘 내어 주면 될까?”
방영호가 포스트잇을 접어 자신의 포켓에 집어넣었고,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씩 입꼬리를 올리며 입술을 뗐다.
“차이나타운에서 미쳐 날뛰는 놈 하나만 잡아다 주십시오.”
* * *
“미쳐 날뛰는 놈을 사 달라면 모를까 잡아 달라는 건 내 전문이 아닌데.”
“환불은 좀 곤란한데요.”
포스트잇을 넣은 방영호의 포켓을 바라보며 말했다.
톡톡.
포스트잇을 넣은 포켓을 손바닥으로 톡톡 치는 방영호.
“아무리 작물이라지만, 이미 내 주머니에 집어넣은 걸 환불해 달라는 건 도리가 아니지.”
휙휙.
방영호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높은 책장들을 살폈다.
“혹시, 그놈을 잡는 과정도 이번 거래에 포함되는 건가?”
“아니요. 결과만 받으면 됩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원하는 책장을 발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난 방영호가 넓은 서재의 어느 한 책장으로 향했다.
스윽.
빼곡한 책장에서 꺼내지는 하나의 수첩.
스르륵.
“어디 보자.”
무언가를 찾는 듯 보이지만, 크게 관심이 기울여지지는 않았다.
어차피 난 그놈이라는 결과만 받으면 되니까.
“민 사장님 요즘 뭐 하세요? 하하, 고마워요. 그때 봅시다. 그럼.”
방영호가 직접 가져다주건 방영호의 통화 속 누군가가 대신 가져다주건 간에 말이다.
“미안한데 치우야, 3일만 줄 수 있을까?”
“네.”
슬며시 자리를 뜨려 했지만, 방영호의 눈빛이 나를 붙잡는다.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그게 고민이네. 말을 할까 말까.”
“말씀하세요. 회장님 눈빛 때문에 엉덩이가 무겁네요.”
“미쳐 날뛰는 놈을 왜 잡으려는 거지?”
“정확한 질문은 잡아서 어떻게 하려고 하냐? 이거죠?”
피식.
방영호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되팔 겁니다. 그 뒤에는 어떻게 될지 저도 모르죠. 사 간 사람 마음이니까요.”
“중간 마진을 챙기겠다?”
“그것보단… 새로운 거래처를 만들려고요.”
방영호는 아무 말 없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눈싸움은 잘 못합니다만.”
“이상해… 아무리 봐도.”
“무슨 말씀이신지.”
“분명 껍데기는 평범한 고등학생인데 내용물은 산전수전 다 겪은 능구렁이 같달까?”
나도 모르게 방영호의 눈빛을 피했고, 또 움찔거렸다.
“어라? 치우가 당황하는 모습을 다 보네.”
“그러니까 그만 찍으시죠. 그러다 도끼병 걸리겠습니다.”
“하하하, 미안하구나. 네가 고등학생이라는 게 더 말이 안 돼서 말이야.”
스윽.
지금 내 상황을 들킬 일은 없겠지만, 더 있다고 좋을 일도 없을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3일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쾅!
치우가 나가자 방영호가 두 손을 모아 턱을 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간간이 보이던 미소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곧장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네, 회장님.
“뭐 나온 거 있습니까?”
― 국정원 라인까지 돌려봤는데도 없습니다.
“후, 일단 사생아는 아니라는 거지…….”
― 네? 잘 못 들었습니다.
“아닙니다. 계속 지켜보세요.”
* * *
3일이 지나 다시 방영호의 서재 문을 열었을 때, 나는 두 발이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흔치 않은 성이라 설마 했지만, 통화 속 민 사장이 나와 이렇게 가까운 사람인줄은 몰랐다.
“어?”
눈을 비빌수록 더 흐려진다.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더 선명해져 눈물이 맺혀서 그런가 보다.
“이분한테 자세히 얘기해 봐, 치우야. 미쳐 날뛰는 그놈이 누군지.”
이런…….
보기만 해도 눈물이 흐르는데 어떻게 얘기를 꺼낼까.
“뭐여∼ 쟈 왜 우는 거여?”
왜 방영호와의 인연을 나에게 말하지 않았던 거지?
술을 좋아하던 민태호는 술자리를 핑계 삼아 자신의 얘기하는 걸 좋아했다.
물론 아무한테나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사람이라 생각되면 출생사부터 살아온 인생 전부를 서사시처럼 읊어 댔다.
더군다나 방영호는 스쳐지나 보내기에는 꽤 큰 인물이었고, 민태호는 방영호의 서재가 처음이 아닌 듯 꽤 자연스러워 보였다.
특히나 나에게만큼은 모든 것을 말하던 민태호인데…….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런데 내 몸은 민태호에게로 향한다.
방영호와 민태호가 구면인 사실도.
과거로 돌아온 사실도.
지금은 민태호가 나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도.
그리고 분명 지금 내 행동이 이상해 보일 거라는 사실도.
그런 모든 사실을 뒤로 한 채, 눈물을 보이며 민태호를 끌어 앉았다.
와락.
“보고 싶었어요…….”
“시방 이게 뭔…….”
내 귀에는 너무나 익숙한 민태호의 사투리가 조금 더 가까이 들려왔다.
“워메, 당황스럽구마잉.”
팔팔하던 30대 민태호의 모습을 보는 것은 나도 처음이다.
내 기억 속 민태호와의 첫 만남은 앞으로 몇 년 후 교도소이니까.
그래도 확실한 건 지금 내 품에 있는 사람은 벼랑 끝에서 나를 잡아 주던 민태호였다.
“치우야?”
마음을 진정시키기에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아차.
가뜩이나 나를 이상하게 보는 방영호의 눈빛을 보고 서둘러 핑곗거리를 생각했다.
슬쩍.
“죄송합니다.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와 너무 닮으셔서. 제가 잠시 어떻게 됐나 봅니다.”
눈물을 훔치고 커피 잔이 놓여 있는 빈자리에 앉았다.
“하하하, 이렇게 보면 영락없는 아이구나.”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이상함을 느끼고 있는 방영호의 머릿속에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들어갔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방영호의 저 눈빛은 뭐지?
분명 눈빛 속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아따∼ 오늘 희한한 일 많이 겪어 뿌네. 나가 사람 잡아 달라는 부탁은 많이 받아 봤는디. 부탁한 사람이 방 회장님이 아니라, 요 꼬맹이란 말이제?”
“네, 처음 뵙겠습니다. 한치우라고 합니다.”
“그려 근디 누가 보면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한 줄 알겠어. 아차! 아무리 얼라여도 방 회장님 지인인디… 이렇게 막, 말을 까도 될런지…….”
“괜찮습니다.”
대답은 내가 했지만, 민태호는 방영호의 눈치를 살피고 방영호는 눈웃음을 보이며 허락했다.
“그려 아무리 얼라여도 나한테 일을 시키는 클라이언트인디 말부터 혀 봐.”
“동네 차이나타운 안에 조선족 조폭 놈이 하나 있습니다.”
“음…. 근께 지금 짱깨 조폭 놈을 잡아달라는 거제?”
“네, 맞습니다.”
“아이고… 머리 아프구먼. 차라리 죽여 달라하면 쉬울 턴디. 야무진놈 하나 보내서 몰래 작업하면 되니까. 근디 모가지 붙여서 잡아올라면 아 여럿 데리고 짱개 타운에서 전쟁을 해야 한다는 소리구만.”
시선을 방영호에게 돌리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이 꽤 비싸다는 것을 알린다.
“약속한 금액에 ‘공’ 하나 더 붙여드리겠습니다.”
얼마에 공을 붙인다는 거지?
뭐,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것은 아니니까.
“그건 고마운디… 그 짱개 조폭놈 말이여.”
“죽어 마땅한 놈입니다. 걱정 마시죠.”
“하하하! 이 얼라 사람을 꿰뚫어 보는구먼.”
잘 알고 있으니까.
민태호는 억만금을 줘도 자신보다 약한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다.
상대가 같은 조폭이어도 돈과 함께 자신이 납득할 이유를 섞어 줘야 움직인다.
“그람 애들 준비 다 시키믄 연락드리겄습니다.”
스윽.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 밖으로 향하는 민태호의 옷깃을 붙잡았다.
“저…….”
“할 말 남았드나?”
“술, 적당히 드세요.”
“하하하, 나가 니 아부지랑 그렇게 닮았나?”
삼촌 간암으로 죽었잖아.
지금이야 들어먹지도 않을 말밖에 못하지만.
기다려.
내가 삼촌 죽게 안 놔둘 거니까.
“니가 그러니까 내도… 죽은 아들내미 생각나뿌네……. 그려 오늘 술 약속은 취소해야겄네.”
민태호에게도 아들이 있었다.
누구 뱃속에서 나왔는지도 모르는, 자신의 집 앞에 ‘민태호에게’라는 쪽지와 함께 버려져 있던 아들이.
조폭 노릇하면서 잘 챙기지 못한 탓에 병에 걸려 죽은 아들.
어쩌면 민태호가 조폭 생활에 회의감을 느끼고 세상에 이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 계기가 아들의 죽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삼촌 아들은 못 살려 내도 세상에 이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은 반드시 이루어줄게.
지금의 나는 살인범이라는 꼬리표가 없고 앞으로의 나는 세상을 바꿀 위치에 올라갈 테니까.
“민 사장에게 연락 오면 바로 연락해 주지.”
“저…….”
민태호가 떠나고 나 역시 커피 잔을 모두 비웠지만, 자리에서 떠나지 못했다.
“할 말 남았느냐?”
“네. 민 사장이라는 분과는 어떻게 아시는 거죠?”
“네가 보기엔 민 사장이 뭐 하는 사람 같은데?”
“조폭이요.”
“하하하, 그래 잘 아는구나. 저 사람은 주먹을 쓰는 사람이고 나는 펜대를 굴리며 사업을 하는 사람이다.”
본론만 말했으면 좋겠는데.
당신이 말하려는 서론은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아니까.
“그런데 사업을 하다 보면 펜대보다 주먹이 필요할 때가 있고, 혹은 주먹이 더 쉬운 일도 있어. 그럼 우리는 민 사장 같은 사람들에게 주먹을 돈을 주고 사지. 그들은 그런 우리를 스폰이라고 부르고.”
그러니까.
민태호를 스폰하던 모든 사람을 알고 있는데 왜 방영호 당신은 내 기억에 없는 거냐고.
“주먹을 쓰는 사람은 민 사장님 말고도 많을 텐데요.”
“하하하, 내가 치우의 질문을 잘못 이해했구나. 그건 나도 아는데. 왜 하필 민 사장이냐? 이걸 묻고 싶은 거지?”
하하하.
어색한 미소를 보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아까 민 사장이 말했지 죽은 아들이 있다고.”
“네.”
“많이 아팠어. 희귀 병에 걸렸거든. 그리고 그때 마침 규모가 커진 성훈산업은 주먹이 필요했고…….”
방영호의 긴 얘기와 함께 서재의 계단을 반쯤 내려오고 나서야 모든 실마리가 맞추어졌다.
민태호는 오로지 돈 때문에 방영호를 찾아간 것이 아니었다.
성훈산업은 의료 기기와 약을 만드는 기업이었고, 여러모로 자신과 자기 아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계단을 다 내려가자. 먼저 내려가 있던 민태호와 성훈이가 보였다.
“어? 아저씨 누구세요?”
“니가 방 회장님 아들인교?”
“네…….”
“아따∼ 귀엽게 생겼네.”
자기 아들이 떠올랐는지 1층에서 마주친 성훈이의 볼을 꼬집는 민태호였다.
아빠가 서울을 접수한 조폭이면 무엇하리.
정작 아들이 학교에서 왕따와 괴롭힘을 당하는 것도 모르는데.
워낙 몸이 허약했던 아이가 매일매일 스트레스와 구타 때문에 악몽에 시달리니 죽을병에 걸리는 게 당연할지도…….
준비가 안 된 철없는 조폭 민태호에게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진 아들.
서울을 접수하고 여유가 좀 생겨 아들이라 인정하고 사랑을 주려 마음먹었을 때는 이미 늦어 버렸다.
“아빠… 원망 안 해요…….”
남자는 울지 않는다고 말하던 민태호는 병실이 떠나가라 울었을 것이다.
“내는 니 아부지랑 같이 일 하는 사람이여.”
“아, 안녕하세요. 방성훈이라고 합니다.”
“허허, 그려.”
생각해 보니…
내가 불행한 성훈이의 미래를 바꾸지 않았다면, 성훈산업은 또다시 부도가 났을 것이다.
몇 천 명의 직원들에게 임금을 체납하고, 몇 천억의 세금을 탈루한 방영호가 잡히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바로 민태호.
방영호 가족의 도피를 도운 것은 바로 민태호였으리라.
누구보다 아들을 지키고 싶던 방영호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은 게 아니라 숨겨 준 거구나.
쾅!
민태호가 나가고 계단 중간에 멈춰 있던 발걸음을 옮겼다.
“어? 치우 너도 있었어?”
“어. 학원 갔다 오는 거야?”
“응… 아! 그리고 그때 비싼 술 사달라고 했던 거 있잖아……. 그거 나중 말고 지금 줄 수 있어.”
“아따, 어떤 놈은 나한테 술 마시지 말라고 했는디. 그놈이 술을 마셔불라 하네.”
민태호는 그말을 남기고 키득거리며 밖으로 나갔고, 나는 괜시리 얼굴이 붉어졌다.
‘하필 이 타이밍에…….’
“미, 미안해. 둘만 있을 때 말할 걸.”
성훈이가 울상인 채로 책가방에서 위스키가 담겨 있는 양주 박스 하나를 꺼내 나에게 넘겨줬다.
“그런데… 이거 치우 네가 먹는 건 아니지? 어머니 줄 거지?”
아이고… 이 눈치 없고 착해 빠진 녀석.
그걸 기억하고 가져온 거야?
“아니. 이건 너랑 먹을 거야.”
“우리 학생인데…….”
“그럼 내가 가지고 있다가 너도 어른 되면 그때 먹자.”
“응? 나도?”
“응, 너도.”
너도 언젠간 어른이 될 테니까.
네가 빨리 어른이 됐으면 좋겠구나.
* * *
“야들아∼”
“네, 형님!”
[NO Korean Entey]
차이나타운 앞에 모여 있는 수많은 덩치들.
앞장선 민태호의 한마디에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잘 들어라잉. 얼라들이랑 아주매들. 그리고 노인들은 건들지 말고 연장차고 달려드는 놈들만 패는 거여. 알겄냐?”
“네, 형님!”
“요 얼라 클라이언트 부탁이 최대한 깨끗하게 잡아 오랬으니까 웬만하면 칼은 주지 말고. 되도록 소란피우지 말고 오양호 요 짱개놈만 잡아올 수 있도록.”
“네 형님! 알겠습니다!”
민태호 뒤에 있던 수많은 덩치들이 앞으로 몰리자 차이나타운 입구가 까맣게 변해 버렸다.
“자! 들어가 불자!”
* * *
좁은 차이나타운 골목이 빽빽하게 채워지고, 빽빽하게 채워진 덩치들을 방패삼아 차이나타운에 들어섰다.
“어디까지 따라올려는 겨? 밖에서 기다리면 예쁘게 포장해서 가져다줄라 캤는데.”
시커먼 덩치들로 막힌 차이나타운 골목.
그 끝줄 민태호의 옆으로 향하자 민태호가 묻는다.
“포장 과정을 보면 믿음이 더 가니까요.”
거리를 행군하며 오양호에게 가까워질수록 주변이 고요해진다.
검은 양복을 맞춰 입은 조폭들.
이들은 분명 음지에 있어야 할 악(惡)이다.
수많은 악(惡)이 양지로 나와 거리를 활보하니, 주변의 선(善)들은 상점 안으로 들어가 문을 꼭꼭 걸어 잠근다.
그리고…….
음지의 악(惡)이 왔다는 소문이 퍼지면 차이나타운에 숨어 살던 또 다른 악(惡)이 슬금슬금 기어 나오겠지.
“꼬맹이가 보기엔 꽤 충격적일 터인디…….”
“하하, 삼촌 패션이 더 충격적이에요.”
워낙 민태호가 옷을 못 입는 것도 있었지만, 2020년의 시선을 가지고 2004년의 민태호의 패션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워메∼ 이 꼬맹이 싸지지 없는 것 보소.”
오랜만이다.
어린 클라이언트도 고등학생도 아닌, SY 법무 이사 한치우에게 보이던 시선과 말투.
민태호의 시선에는 그저 고등학생인 나이지만, 민태호와의 인연이 조금 빨라졌다고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아니지.
오히려 다행이다.
민태호가 성원파 때문에 교도소에 갈 일도.
세상에 이로운 일을 하고 싶다던 민태호가 후회하며 눈을 감는 일도.
그 모든 걸 내가 막을 수 있으니까.
“조폭이 꽃무늬가 뭐야 꽃무늬가…….”
“꼬맹이 니가 몰라서 그라는데 이게 말이여 내가 패션을 너∼무 앞서가서 그러는 겨.”
“얼마나 앞서 갔는지는 모르겠는데, 앞으로 15년 동안은 삼촌 패션 유행할 일 없어요.”
“내는 니 같은 조카 둔 적 없다. 말 그만 시키그라.”
하하하.
뾰로통하게 삐진 민태호를 보니 속으로 웃음이 나온다.
전신에 문신을 두르고 남산만 한 등치를 가진 민태호는 유독 아이들에게만큼은 약했다.
지난 시간 자신의 아들에게 한 후회와 반성을 아이들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하는 것이다.
스윽.
고요해진 차이나타운 거리에 인기척이 느껴지자 민태호는 본능적으로 나를 자신의 뒤쪽으로 잡아당겼다.
“니들 뭐이가?”
사시미부터 과도까지.
날이 서고 끝이 뾰족한 물건들을 수집이라도 해온 듯 조선족 조폭들이 골목길 어귀에서 기어 나와 무리를 이뤘다.
“형님.”
끄덕.
조선족 조폭 무리와 대치하고 있던 덩치들 중 한 명이 뒤돌아보자 민태호 고개를 끄덕이며 신호를 줬다.
스릉―
민태호의 신호에 수십 명의 덩치들이 양복 주머니에서 일제히 칼을 꺼내 든다.
수십 개의 칼끝에 반사되는 달빛.
달빛이 묻어 있던 칼끝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핏빛이 묻게 될 것이다.
“중국 야들은 대가리 수가 많아서 그른가. 연장 종류도 천지삐깔이네잉. 위험한께 뒤로 가 있그라.”
“잠깐만요.”
덩치 무리를 뚫고 앞으로 나가려 하자 민태호가 내 팔을 붙잡았다.
“뭣 하는 거여 시방.”
“걱정 마세요. 저도 제 몸 하나 지킬 능력은 됩니다.”
“워메∼ 참말로 이상한 꼬맹이네. 시골 야들은 원래 이렇게 겁이 없는 겨?”
“서울 토박이면서 이상한 사투리 쓰는 삼촌이 더 이상해요.”
달빛이 묻은 아름다운 칼끝에 굳이 핏빛을 묻히고 싶지는 않았다.
속닥속닥.
무리를 뚫고 앞으로 나가자 뒤에 있던 민태호가 한 덩치에게 속삭인다.
아마 나를 지키라는 명령을 하겠지.
“니들 뭐이냐고!”
오양호다.
파란 수의에 빨간 명찰을 달고 나이가 먹은 오양호의 모습밖에 기억이 나지 않아 걱정했다.
하나 십 년 전 오양호는 그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어이, 오양호. 당신만 순순히 잡혀 주면 다른 사람들은 몸에 칼 구멍 생길 일 없을 것 같은데.”
“이 아새끼는 또 뭐이가?”
어린 여자아이를 유린한 살인자의 눈빛.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지금도 교도소에서도 말이다.
“그냥 순순히 이리 오지?”
“하하하, 니가 거 대장이가?”
오양호의 웃음에 옆에 있던 조선족 조폭들도 실소를 보인다.
웃기긴 하지.
예전 서울연합파의 한치우였으면 덩치들 앞에 서 있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겠지만, 지금 덩치들 앞에 서 있는 건 고등학생 한치우이니까.
“아니. 그런데 그걸 다행으로 알아.”
“뭐?”
“여기 대장이 네가 한 짓 알면 너 죽어.”
같은 조폭한테도 이유 없이는 절대로 주먹을 쓰지 않는 민태호가 유일하게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상대가 있다.
아동 성폭행범.
교정 본부에서는 민태호가 복역 중인 교도소에 아동 성폭행범을 수감시키지 않았다.
민태호가 수감 중인 교도소에 아동 성폭행 범을 수감시켰다가는 매일 저녁 피떡이 되고, 운이 나빠 가석방이라도 된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일쑤였으니.
“하하하, 아새끼 느그 대장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느그 대장도 좋아하지 않겠니? 어리고 싱싱한 거 싫어하는 사람이 어 있겠니.”
절레절레.
“후…….”
땅바닥을 보며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 넌 치료가 필요해. 침 좀 놔줄게.”
“아새끼 뭐라 중얼거리네.”
“뭐, 칼침 몇 방 놓고 데려간다고 큰 문제는 없겠지.”
뒤 돌아 다시 민태호에게 향했다.
“저, 삼촌.”
“워메∼ 징그럽게 왜 귀때기에 대고 속삭이는 겨.”
“오양호 저놈, 어린아이 성폭행하고 살해한 살인범이에요.”
삼.
이.
일…….
“이런 씨불! 개 샹노무 쉐끼! 개 좆같은… 배때지를 열어 장기를 전국 팔도로 보내 버리고…….”
이것 또한 오랜만이다.
쉬지 않고 몇 분 동안이나 뱉어 대는 민태호의 쌍욕이.
“야!”
이성을 잃어버린 민태호의 부름에 달려오는 덩치.
“네, 형님!”
민태호의 눈빛에 겁을 잔뜩 먹은 덩치가 몸을 바르르 떨며 대답한다.
“저 개 샹노무 쉐키 잡아다 내 앞에 갖고 와. 시방 당장.”
“네, 형님!”
톡톡.
무리로 돌아간 덩치가 톡톡 치며 신호를 주자 모두가 칼자루를 움켜잡았다.
“와아아아아!”
검은 양복을 맞춰 입은 검은 악(惡)들이 또 다른 악(惡)인 조선족 조폭들을 뒤덮는다.
서울연합파.
서울을 접수하고 전국에 영향력을 끼치는 대한민국 최대의 조직.
웬만한 조폭들은 민태호라는 이름 세 글자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아직 앳되지만, 덩치들 중 낯이 익은 얼굴들이 보이는 걸 보니 서울연합파 중에서도 민태호의 최측근들이다.
얼마 전 드디어 서울을 접수한 서울연합파의 핵심 멤버.
일상이 칼부림이던 멤버들이 모였으니 결과는 빤하디 빤하다.
쓰러져 있는 조선족 조폭들.
그 위를 검게 덮고 있는 서울연합파.
위치는 다르지만 쓰러져 있던 조선족 조폭들의 몸에서는 피가 솟구치고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콘크리트 바닥마저 검게 변해 버렸다.
“사, 살려주…….”
피 칠갑을 한 채 애원하는 오양호의 목소리는 희미했다.
“형님, 어떻게 할까요?”
오양호의 무릎을 꿇리고 양팔을 포박한 채 한 덩치가 민태호에게 물었다.
“어디 조용한데 만들어서 묶어 놔. 저 새끼도 느껴봐야지. 짐승한테 유린당하는 기분이 어떤지.”
화가 머리끝까지 나야 나오는 민태호의 표준어.
민태호는 오양호를 끝까지 노려보며 차이나타운을 떠났다.
톡톡.
“이놈들 불법체류라 어차피 경찰서도 병원도 못 가니까 걱정 마세요. 그리고 여기 상황은 방 회장님이 정리해 주신다니까. 대충 마무리 짓고 오양호는 성훈산업이 소유한 폐 창고로 데려가세요.”
쓰러져 있는 조선족 조폭을 발로 톡톡 차며 덩치들에게 말했다.
“네! 아니, 어… 그래.”
칼에 찔려 피가 솟구치는 모습을 봐도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하는 내 모습이 당황스러운지 대답을 더듬었다.
톡톡.
“그리고 너희 나중에 또 짐승 새끼 보호해 주거나 나쁜 짓할 거면 꼭! 경찰한테 잡혀라. 또 나한테 잡히면 그땐 칼 구멍 한두 개로 안 끝날 테니까.”
* * *
“잡아!”
오양호가 묶여 있다.
그를 노려보며 손도끼를 집고 있는 민태호의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도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오, 오, 오지 마!”
아무리 소리쳐봐야 소용없단 걸 알고 있다.
과거에도 지금에도 이성을 잃은 민태호를 막을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삼촌.”
“놔. 클라이언트 네 돈 안 받을 테니까.”
도끼를 들고 있던 손을 꽉 잡았다.
“제발 그 정도만 하세요.”
팍!
“아!”
온 힘을 다해 팔을 잡고 있었지만, 한 번의 휘두름에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민윤호!”
민태호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말.
“아무리 저놈이 죽일 놈이라고 해도 삼촌 손에 피 묻히는 거 원치 않을 겁니다.”
“너… 내 아들 이름 어떻게 알았어?”
“방 회장님이 말씀해 주셨어요. 삼촌한테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아들이 있었고, 희귀병에 걸려 하늘에 별이 되었다고.”
이성을 잃은 민태호를 바로 잡는 법은 이성이 빠져나간 자리에 아들에 대한 기억을 주입하는 것이다.
“그만하세요. 하늘에서 아들이 보고 있을 겁니다.”
부르르.
기억이 주입되자 몸이 반응하는 듯 민태호의 몸이 떨려온다.
“이런… 니미!”
탕.
둔탁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손도끼.
그 소리를 듣고 몸에 힘이 풀린 나머지, 나 또한 손도끼처럼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워메, 오랜만에 필름 끊겨 부렸네. 꼬맹이 괜찮은 겨?”
“던져 놓고 괜찮냐고 하면 답니까?”
“미안혀… 나가 저런 놈들만 보면 필름이 끊겨 버려서…….”
시간이 지나 진정이 된 민태호가 의자에 앉아 물었다.
“어째? 저 썩을 놈을 탁송해 줄까, 아니면 여기 두고 우리는 이만 물러가 불까? 아니면 나한테 맡겨도 되고.”
“잠시만 대기.”
“아따, 아무리 그래도 말끝은 끊어 먹지 말고… 내가 어른인디…….”
얼추 상황이 정리되고 오양호가 묶여 있는 의자로 향했다.
“쫄지 마. 네가 죽인 아이가 느꼈을 고통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니까.”
바지를 적신 오줌의 지린내와 온몸에 두른 피비린내가 섞여 코끝을 찌른다.
“살…려…….”
“흠… 너를 어디로 보내야 될까.”
눈물을 글썽거리며 애원하는 녀석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경찰일까.
아니면 검사장일까.
전자는 공식적으로 유명해질 기회와 약간의 현상금이고.
후자는 비공식적으로 검사장이라는 뒷배와 많은 양의 현상금일 것이고.
명예냐. 권력이냐. 둘 중 하나인데…….
“어디로 갈래 너?”
“네? 여기서 내보내 주시라요… 제발 부탁드리갔…….”
피를 많이 흘려 기운이 딸리는지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는 안 되지. 너도 무시했잖아. 살려 달라, 보내 달라, 하지 말라는 간절한 외침을 말이야. 대신 죽이지는 않을 게.”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해. 앞으로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울 텐데.”
그래.
난 도저히 네가 교도소에서 삼시 세끼 다 처먹고 편히 자는 걸 못 볼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필요한 건 비공식적인 것에서 나올 것 같기도 하고.
번쩍.
“어∼ 그려 꼬맹이 말혀.”
오양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손을 들자 뒤에서 민태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삼촘, 이놈 탁송 좀 부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