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제1장 (1/35)

목차

제1장

제2장

제3장

제4장

제5장

제1장

“SY 그룹의 새로운 대표님을 소개합니다!”

짝짝짝!

박수 소리 사이로 걸었다.

멀리 보이는 한 자리.

[대표 한치우]

얼핏 보면 한 기업의 새로운 대표를 환영하는 자리 같겠지만, 나를 에워싼 사내들의 슈트 속에는 문신이 가득할 것이다.

서울연합파.

거느린 조직원만 수천 명이 넘는 거대 조직.

전국구를 넘어 하나의 기업체가 되어 가고 있는 조직의 두목이 될 수 있던 이유는 특이한 내 이력 때문이었다.

사법연수원생 출신 조폭.

어릴 적부터 몸이 허약했다.

안경을 쓰지 않으면 앞을 볼 수조차 없었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뼈가 부러지곤 했다.

왜소한 체구의 안경잡이.

굳이 보지 않아도 어떠한 학창 시절을 보냈을지 상상이 될 것이다.

참고 또 참았다.

얼굴과 몸은 성한 날보다 검푸른 멍과 새빨간 얼룩으로 뒤덮인 날들이 더욱 많았고, 시장통에서 힘들게 버신 어머니의 돈을 갖다 바치면서도 교과서를 놓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몇 년만 참으면 모두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될 거라고.

합격.

그 의지 때문인지 대학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법 고시에 덜컥 합격해 버렸다.

단순히 경험 삼아 본 시험이었지만, 언론사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것이 더욱 흥미를 돋았다.

[만 19살의 나이에 소년 급제!]

덕분에 내 이름은 꽤 많은 언론사에 대서특필되었다.

고시생과 고시 합격생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합격 발표가 난 지 하루가 지나자 담당 교수가 나를 교수실로 불렀다.

“치우야.”

“네, 교수님.”

“내 딸이 이번에 유학 끝내고 귀국하는데 한국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말이다…….”

담당 교수는 자신의 딸을 내 자취방으로 보냈다.

“교수님… 지금 남자랑 여자랑 단칸방에서 룸메이트를 하라는 겁니까?”

“한국에 아는 사람이 없다니까 치우 네가 데리고 다니면서 적응 좀 할 수 있게 도와줘.”

법학과 교수에 장인은 중견 기업의 회장.

딸에게 아파트 한 채 정도는 우습게 마련해 줄 수 있는 재력이 충분했고, 여학생들에게 혼전순결을 강요하던 교수는 기어코 자신의 딸을 여덟 평짜리 자취방으로 밀어 넣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의 기억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외국물 먹은 예쁜 여자가 내 방 침대에 누워 있으니 말이다.

이미 정상에 도착해 버린 나머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

친구들이 독서실을 갈 때 헬스장에서 몸을 만들었고, 수술을 통해 십수 년간 나를 괴롭히던 안경을 벗었다.

“저… 혹시 연예인해 보실 생각 있어요?”

“저 사법연수원생입니다.”

“하하하! 유머 감각도 있으시네. 여기 명함 드릴 테니 꼭 연락해 주세요.”

외모도 꽤 봐줄 만했다.

나만 보면 얼굴이 붉어지는 여자들 눈에 사법연수생이라는 타이틀은 보이지 않으니까 말이다.

지옥 같은 세상이 천국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천국이 영원할 줄 알았다…….

서원고 동창회.

그곳에 가기 전까진.

현실이 천국으로 변하니 지옥 같던 과거의 기억을 바꾸고 싶었다.

“뭐? 제가 한치우라고? 그 말라깽이 한치우?”

“사법 고시 합격해서 지금 사법연수생이라더라.”

동창들의 속삭임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생전 나오지 않던 동창회를 나온 이유는 학창 시절 나를 벌레 보듯 한 여자들이 바짝 달라붙어 내 팔에 가슴을 비비는 것도, 탄성을 뱉으며 나를 부러워하는 남자들을 보러 온 것도 아니었다.

멀리 보이는 한 무리.

쌀쌀한 가을 날씨임에도 부실해 보이는 점퍼와 배달 브랜드가 적힌 헬멧을 든 채 다가오는 이들.

아직은 껄렁함이 채 빠지지 않은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꼴을 보아하니 내 예상이 맞아떨어진 듯했다.

“오랜만이다.”

공부의 필요성을 일깨워 준 무리.

소년 급제를 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의지를 심어준 무리.

상황은 역전되었다.

지금의 나는 천국 속에 살고 있지만, 이들은 지옥 속에 살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 뭐하는데 그렇게 탔어?”

여기로 오는 차 안에서 수도 없이 많은 생각을 했다.

승자의 여유로운 미소로 녀석들에 대한 악감정을 털어 내겠다고.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술을 따라 주며 당당하고, 사려 깊은 모습으로 새 삶을 시작하겠다고.

“검사… 됐다며?”

“아직 사법연수생이야. 너희는 춥지도 않냐? 그런 옷차림에… 그 이상한 헬멧은 또 뭐고……. 아, 미안하다 일하다 왔나보구나.”

하지만 정작 녀석들과 말을 섞었을 땐 그러한 생각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여유로울 줄 알았던 내 얼굴은 굳어졌고, 고통을 심어 주고 싶었다.

“어… 뭐…….”

“그래 직업의 귀천이 어디 있냐. 술이나 먹자.”

한 잔도 못 하던 술을 연거푸 마셔댔다.

“너희 설마 지금도 양아치 짓하는 거 아니지?”

“한치우, 그만하지? 우리도 반성하고 있으니까.”

“반성? 좆 까고 있네. 사람은 겉은 변해도 속은 그리 쉽게 안 변해.”

술이 오르자 어떤 경계선이 무너졌다.

나도 그들도 말이다.

“똑바로 살아 병신들아. 부모님이 불쌍하지 않냐?”

“이런 씨발! 사법 고시 합격했다고 유세 떠냐? 좆만 하던 새끼가.”

“하하하, 거봐 사람은 안 변한다니까.”

“너 외국물 먹은 여자 만난다며? 개랑 떡 치면 신음도 영어로 하냐?”

쨍그랑!

“뭐? 다시 말해 봐, 씨발 새끼들아!”

맥주병을 깨자 자리에 있던 모두가 우리를 뜯어 말렸다.

“야! 너희 왜 그래 진짜. 그만해 이러다 일 나겠어.”

참아야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놔 봐! 사법 고시 합격한 새끼 인생 한번 좆돼 보라고!”

“내가 못할 것 같아?”

“니 여자 친구 탱탱하냐? 언제 나도 한번 빌려줘 봐.”

“이런 개새끼가!”

* * *

정신을 차렸을 때는 너무 늦어 버렸다.

[소년 급제한 사법연수생의 살인!]

언론이 보기에는 너무나 맛있어 보이는 기삿거리였다.

수의를 입고 있는 내 모습을 보려 많은 사람이 모였다.

“피고는 사법연수생으로서 사회에 모범이 되어야 할 예비 법조인의 책무를 저버린 채 살인이라는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점을 물어 징역 11년에 처한다.”

스폰서 검사와 성추행 검사 등 당시 여론은 검찰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하던 시점이었다.

― 와!

많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검사는 8년을 구형했고, 여의도에 건너가고 싶던 판사는 11년을 선고했다.

“항소 준비할게요. 박 교수님도 도와주신다고 했습니다.”

선고가 끝나고 방청석 모두가 환호했다.

환호 속에서 나를 보며 울고 있던 한 여자.

“됐어요. 교수님한테 죄송하다고 전해 주세요.”

눈물이 날 것 같아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치우 씨… 박 교수님 따님 생각도 하셔야죠.”

“생각해서 하는 말입니다. 미련이 없어야 포기를 하죠.”

“치우 씨!”

재판장을 나와 포승줄이 묶이자, 참고 있던 눈물이 미친 듯이 흘러내렸다.

‘이렇게…….’

내 천국은 다시 지옥이 되었다.

* * *

“고생하셨어요, 치우 씨.”

쾅!

철문을 내 손으로 직접 열 수 있게 된 것은 9년 만이었다.

“하늘 예쁘네.”

교도소 안에서도 하늘을 볼 수 있었지만, 담벼락 안과 밖의 하늘은 달랐다.

끼익!

“어? 깡패 삼촌?”

“아따∼ 싸가지는 여전하구먼.”

차량의 창문이 열리고 매서운 인상의 남자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진짜 오실 줄 몰랐는데.”

“동상 아니면 아직도 저 담벼락 안에 있었을 텐데 은혜는 갚아야지. 뭐부터 할 텨? 가시나? 아니면 술?”

“술만요.”

“하하하, 거참 재미없는 건 하나도 안 변했구먼. 가시나들이 니 얼굴 보면 겁나 좋아할 텐디 어쩔 수 없쟈.’

민태호.

서울연합파의 두목.

지옥 같은 교도소 생활을 버틸 수 있게 해 준 사람이었다.

사법연수생이라는 타이틀은 천국에서나 날개였지 교도소라는 지옥에서는 올가미일 뿐이었다.

“어이∼ 배운놈, 이리 와서 내 항소장이나 써 봐.”

“좆까. 너 같은 쓰레기 항소장 써 주려고 고시 본 거 아니니까.”

“워메∼ 이 살인자 새끼 싸가지 보소.”

문신이 자랑이 되고 주먹이 서열을 정하는 곳.

“치우 씨, 배운 사람인 것도 알고 여론 때문에 형량 많이 받은 것도 아는데 1∼2년도 아니고 맨날 그렇게 묵사발돼서 어떻게 버티려고 그래? 도둑놈들한테 객기 부린다고 겁낼 것 같아? 아니야. 객기를 부릴 거면 등에 깔(칼)이라도 꼽든가. 그럼 추가 떠서 형량은 더 늘어나겠지만, 건들지는 않아. 그렇게 안 할 거면 대충 적응하면서 살고.”

교도관이 내게 한 말은 틀리지 않았다.

객기를 부린 대가로 매일 저녁이 지옥이었다.

학창 시절 당하던 구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결국 나는 바뀌어야 했고, 지옥에서 버티기 위해 머리를 숙였다.

현실을 깨달은 지 2년쯤 지났을 때 교도소의 왕이 찾아왔다.

“아가야∼ 니가 검사되려다 살인자 된 갸 맞나?”

“네, 맞습니다.”

“항소장 써 드릴까요?”

나는 곧장 폭처법(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판례문을 전부 읽었고, 민태호의 항소장을 작성했다.

10년을 선고받은 민태호는 항소심에서 형량이 3년으로 줄었다.

“이야∼ 몇 천만 원짜리 변호사보다 살인자가 더 낫네. 아따, 내가 이 은혜를 뭐로 갚아주면 될까?”

문신이 자랑이 되고 주먹이 서열을 정하는 곳의 왕, 민태호.

“남은 형기 동안 아무도 못 건드리게 해 주세요.”

“그거면 되나?”

“네, 충분합니다.”

민태호는 교도소장조차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다.

“야들아∼”

“네, 형님.”

“애들한테 전해라 여기 치우 동상이 내 친동상이라고.”

* * *

“그려 치우 동상은 이제 뭐 할껴?”

“아직 모르겠습니다.”

질퍽한 술자리가 끝나고 민태호가 물었다.

“내 밑에 들어오는 건 어뗘?”

“깡패 하라고요?”

“아따 이 싸가지 없는 자식이. 깡패가 뭐여 깡패가. 옛날처럼 연장질하던 시대는 갔어. 우리는 기업이여 기업!”

‘기업은 무슨… 그래 봤자 깡패지.’

내 생각이 어떻든 간에 민태호는 계속 말을 이었다.

“동상, 가슴에 살인전과 별 달고 취직이라도 하려는 겨?”

“막노동이라도 알아봐야죠.”

“아따∼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구먼. 별을 인정해 주는 조직은 조폭밖에 없어, 전과가 이력서가 되지.”

“하하하, 쓰레기 같은 조직이네요.”

“같은 쓰레기라면 주머니 빵빵한 쓰레기가 낫지. 이미 마빡에 살인자 도장은 찍혀 부렸는데 막노동은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어?”

더 나은 선택이 없던 건지.

아니면 내가 찾지 못한 건지.

그것도 아니면 술기운에 판단력이 흐려진 것인지.

민태호의 말이 구구절절 맞는 것 같았다.

명문대 출신의 사법 고시 패스.

살인 전과가 생기는 순간, 아무 의미 없는 과거일 뿐이었다.

“깡패하면 돈 많이 벌어요?”

“나가 특별히 치우 동상은 우리 회사의 법무 이사로 스카우트할라니까 걱정 붙들어 매라고.”

이미 양지로 갈 수 없는 몸.

이왕이면 음지에서라도 왕이 돼 보고 싶었다.

“아무리 깡패 회사라도 이사 직함이면 높은 거 맞죠? 개나 소나 이사면 안 하고.”

“하하하, 이래서 배운 놈들은 틀리당께.”

* * *

잘 차려진 술상 위에 걸터앉은 남자가 들려진 발목을 까닥이며 입을 열었다.

“거참, 내가 명문대 출신 깡패는 봤어도 사시 패스한 깡패는 또 처음 보네”

“좋게 봐주십시오, 검사님.”

정권이 바뀌고 검찰은 대규모 인사이동이 이루어졌다.

검사실로 나를 부르지 않고 여길 찾아왔다는 건 자리의 주인만 바뀌었을 뿐 내게 원하는 것은 똑같다는 의미였다.

스윽.

나는 그가 걸터앉은 테이블 옆으로 USB 하나를 올려놓았다.

“코인 지갑입니다. 달마다 넣어드리겠습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그는 심기가 좋지 않은지 손을 들어올렸다.

짝!

뺨에 따끔한 열감이 전해져 왔다.

“어디 감히 깡패 새끼가 검사 목에 목줄을 채우려 들어.”

뇌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아니다.

허리를 굽히지 않는 내 떳떳함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 뿐.

“범단 수괴죄(범죄단체 수괴죄)로 사형 때려 줘? 사시 패스한 놈이니까 더 잘 알겠지?”

털썩.

“죄송합니다, 검사님.”

꾸욱―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바닥에 조아리자 그의 구두 굽이 내 뒤통수를 누른다.

“잘 들어 지검장님 여의도 건너가신다니까 깨끗한 걸로 세 장만 준비해서 보내고, 마지막 커리어 쌓으시게 성원파 애들 잡아놔.”

성원파.

강북 최대 규모의 조직.

오랑캐로 오랑캐를 잡겠다는 소리다.

“검사님, 3장 보내드리는 건 문제가 안 되지만, 저희 식구들 이제 전쟁 안 합니다”

“하하하, 깡패가 주먹질을 안 한다고?”

“불법적인 사업도 전부 정리 중입니다. 그렇게 되면 검사님 앞에서 고개를 숙일 이유도 없어지겠죠.”

“이런 미친 새끼가. 너 뭐라 그랬어?”

퍽!

또다시 내 뺨으로 향하는 손을 붙잡았다.

“적당히 하시죠. 저랑 검사님이랑 다를 게 뭡니까?”

“다를 거?”

쨍그랑!

맥주병이 깨지며 날카로운 녹색 칼날을 만들어 냈다.

“이 깨진 병으로 내가 너를 찌르면 정의가 되지만, 네가 나를 찌르면 범죄가 되는 거야, 알아? 그게 너랑 나랑 다른 거고.”

스윽.

비릿한 맥주 냄새와 함께 점점 목 쪽으로 서늘한 깨진 병이 다가온다.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간판 내리고 싶지 않으면.”

* * *

“한 이사∼ 오랜만에 쇠주나 한잔하지.”

불그스레진 뺨을 어루만지며 룸살롱을 나오자 민태호가 기다렸다는 듯 뒷자리 창문을 열고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탁!

“새로운 중앙 지검 강력부 부장?”

“예.”

“아따∼ 감히 우리 동상 얼굴을.”

민태호가 붉어진 뺨을 보고 눈치챈 듯 말했다.

“어뗘?”

“빠꼼이에요.”

“빠꼼이면 달라는 거 주고, 야기 마무리 짓지 뺨은 왜 내준겨?”

“승진 물먹었다더니, 독기가 아주 바짝 올라 있더라고요.”

“잘 달래 봐. 돈은 얼마든지 써도 되니까.”

“저도 그러고 싶은데 나무가 아니라 숲을 그리고 있으니, 말이 잘 안 통하네요.”

“워메∼ 피곤한 놈이 우리 목줄을 잡았구마잉.”

“저놈 구워삶는 것보다 사업 정리하는 게 더 빠를 것 같습니다. 도박 사이트랑 용역 회사만 정리하면 저놈한테 우리 목줄 잡힐 일은 없으니까.”

“그려∼ 한 이사가 알아서 혀. 앞으로 한 이사가 이끌어 갈 기업이잖어. 나야 이제 뒷방 노인네지 뭐.”

민태호 목소리에는 쇳소리가 잔뜩 섞여 있었다.

1년 전 시한부 선고를 받은 민태호는 수억을 써 가며 생명을 유지해 오고 있지만, 조직의 실권은 전부 나에게 넘겨주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차가 멈춰 섰고, 나와 민태호는 차에서 나와 단골 횟집으로 향했다.

“아지매!”

“아이고∼ 우리 민 대표님 아닌겨.”

“동상이랑 쇠주 한잔 할라니까 싱싱한 놈으로 몇 마리 떠주이소.”

시장 상인들은 전부 서울연합파를 종교처럼 떠받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조합장 자리에 앉아 있던 성원파는 각종 이권을 얻기 위해 시장 상인들을 괴롭혔고, 민태호는 성원파와의 전쟁을 통해 성원파를 시장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그 과정에서 몇 명이 죽고 몇 십 명이 다쳤는데, 그 때문에 민태호는 징역살이를 하며 나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아니, 근데 그게 도대체 어디 사투리예요?”

나는 알 수 없는 민태호의 말투를 괜히 한 번 물었다.

“몰러. 전국구 조직 두목이 지역감정을 섞어서 되겠는감?”

“뭔 소리야 도대체.”

“하하하, 쇠주나 부으러 가지.”

서울이 내려다보이는 달동네.

민태호는 조직의 막내 시절 배고픔을 추억한다며 나를 이곳으로 데려오곤 했다.

“오랜만에 한 이사랑 둘이 있고 싶으니까 너희는 퇴근들 혀.”

“네, 고문님!”

민태호를 수행하던 덩치들이 언덕길을 내려가고, 와이셔츠를 풀어헤친 민태호의 팔에 화려한 문신이 드러났다.

“흉해요. 나이 먹고.”

“후회하니까 늦었어야. 3,000만 원이나 주고 혀 깨물면서 참고 했는디, 지우는 데는 2억을 달라니. 얼마나 미련 맞고 등신 같은지.”

쪼르륵.

민태호가 자신의 잔을 채운다.

휙!

“물 드시죠.”

“아이고, 서러워서 참. 뒷방 노인네라고 무시나 당하고.”

“말 들으세요. 민 고문님 이제 제가 SY 대표입니다.”

“이래서 살아 있을 때 물려주는 게 아니라 혔는디.”

“저도 깡패 기업 대표되는 거 싫습니다. 그러니까 오래 사세요.”

“내가 왜 동상한테 조직을 물려주려는지 알고는 있어?”

“또… 맨날 똑같은 소리.”

“이제 서울연합파는 없는 거여. 동상이 맡는 순간 SY 그룹은 합법적이고 지역민들을 위해 존재하는 기업이 되는 것이제.”

달동네에서 소주를 기울이며 민태호는 매일 똑같은 말을 했다.

후회한다.

이제 좋은 일을 하고 싶다.

생각만으로 잘못을 빌은 것은 아니다.

불법적인 사업들을 전부 정리했고, 합법적인 사업에서 나온 매출의 상당 부분을 지역 발전과 기부를 위해 썼다.

민태호의 역사를 모르던 사람들이 오죽하면 그를 국회의원 후보로 추천까지 했을까.

“나 죽으면 내 지분 갖다가 그 뭐시기, 재단인가 하는 거 하나 만들어줘, 동상.”

“하하하, 무슨 깡패 두목이 죽어서 재단을 만들어요. 뭔 자랑이라고.”

“내 이름 말고 죽은 내 아들 녀석 이름으로 만들어 달라는 거여. 남들한테 삥 뜯고 칼로 쑤시고 그러던 거 죽어서라도 갚아 부러야지. 그래야 염라대왕 앞에서 변명이라도 하지 않것어?”

하지만 매년 엄청난 기부로 용서를 구했음에도 신은 민태호를 용서하지 않았다.

콜록콜록.

“자! 그러니까 뭔 자랑이라고 팔을 걷어붙이고 그래요. 몸도 성치 않은 양반이.”

입고 있던 슈트를 벗어 민태호의 등에 얹었다.

“이제 진짜 갈 때가 됐나… 뽕을 맞아도 말을 안 듣니 원…….”

“윤 박사한테 말해서 마약 성분 강한 걸로 올려 달라고 할게요.”

“살아생전 안 하던 뽕을 뒤질 때 되니까 하네, 참. 흐흐흐.”

실없이 웃는 민태호.

그의 과거가 어떤지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웃기는… 죽기 전에 남들 못할 거 하나라도 더 해 봐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던가.”

확실한 건 그는 나에게 고마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옥도 살 만하다는 걸 알려준 사람.

때로는 부모와 형제의 빈자리를 채워 준 사람.

“아따∼ 취한다!”

민태호가 소주잔에 채워진 물을 마시며 소리친다.

“고맙다, 치우 동상.”

“또 뭔 느끼한 소리를 하려고 이래.”

입은 웃고 있지만, 슬퍼 보이는 눈이 또렷이 보였다.

고통을 티 내지 않으려 크게 말하는 민태호의 모습이 보기 힘들었다.

“동상 때문에 7년을 벌었잖어. 후회하며 속죄할 시간도 벌었고. 감방에서 죽지 않는 게 얼마나 다행이여.”

스윽.

민태호의 뒤로 가 그의 몸을 일으켰다.

고통을 얼마나 참고 있던 건지 몸의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속죄 다하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오래 사세요. 지옥 가기 싫으면.”

“하하하… 하여튼… 이 싸가지…….”

* * *

“……”

팔에 두 줄을 그은 채 검은 액자 속 민태호의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살아 있는 듯 생생한 사진이었다.

하지만 전국 각지 사투리가 섞인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이사님… 천안 박 대표님이십니다.”

“어….”

힘이 풀린 몸을 간신히 일으켜 조문객과 맞절을 했다.

“태호 형님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친동생 같은 분이라고…….”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밖에 날파리들이 많아 애들 몇 명 추려서 왔으니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괜찮습니다. 식사하시고 가세요.”

전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조폭 두목의 죽음.

장례식장 안은 조폭들의 친목회가 된 듯 덩치들의 고개가 연신 숙여지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형님! 분당 식구 왕민영입니다!”

조폭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던 민태호의 장례식장에서 이런 풍경이 벌어진다는 게 마음에 썩 들지는 않았지만, 그가 살아온 길이며 단지 그의 마지막 길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라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밖에 날파리들 얼마나 있어?”

“새까매요. 한 삼 개 중대는 출동한 것 같은데.”

“꼬투리 안 잡히게 잘하고 조폭들 술 먹으면 피 끓지 않게 미리 내보내. 서 마담한테 전화해서 조문객들 술상 봐 놓으라고 하고.”

“네, 이사님!”

새 정권이 들어서고 승진에 목말라 있던 경찰들은 기회의 타깃을 민태호의 장례식장으로 잡았다.

그러니 그저 술김에 한 싸움일지라도 이 안에서 벌어진다면 보통의 상황과는 많이 달라질 것이었다.

대부분 민태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찾아온 것일 테니 큰 걱정은 없었지만…….

조폭의 장례식장에는 조문객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톡. 톡. 톡.

단단한 대리석 바닥에 나무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인파를 헤치고 다리를 쩔뚝거리며 지팡이를 짚고 들어오는 한 남자가 보인다.

“아이고, 결국 뒤쟈 뿟네.”

“이런 씨발! 이 새끼들 입구 안 막고 뭐 했어!”

그 남자가 민태호의 영정 앞에 다가오자, 강상철 실장이 직원들에게 소리쳤다.

휙∼

“하지 마. 일단 다 나가 있어.”

“이사님…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소란 피우지 말고 직원들 데리고 나가.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네…….”

불청객.

평생 지팡이를 짚게 만들어 준 민태호를 찾아온 사람에게 딱 맞는 말이었다.

하물며 그것이 장례식장이라면 더더욱.

“한 이사 오랜만이네? 민 회장이 뒤쟈 뿌렸으니 이제 한 대표라고 불러야 하나?”

“네, 그래야겠죠.”

나성원.

성원파 두목.

성원파는 상대가 없을 만큼 거대한 서울연합파에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이었다.

여의도에 건너갈 지검장이 욕심을 낼 만큼이나.

“뭘 그리 빨리 간 겨 이 사람아. 내가 알아서 보내 줄라 했는데.”

“소란 피울 거면 돌아가 주시죠.”

“아무리 웬수라 해도 장례식장에서 그러는 건 상도덕이 아니지. 걱정 말어. 애기들 연장 안 채웠으니.”

“두 분 악연은 여기서 끝내시죠.”

“한 이사 조폭들은 말이야 한 대 맞으면 두 대는 때려야 끝이 나는 겨. 자존심을 굽히면 조폭이 아니라 양아치 돼 버리는 거여.”

“이제 서울연합파 간판 내릴 겁니다. 원하시면 저희 지역 업소들이랑 뿌려져 있는 사채들도 나 회장님께 넘기겠습니다.”

“하하.”

푹.

나성원이 비릿하게 웃으며 분향에 향을 꼽는다.

“다리가 불편해서 절은 못하겠네.”

“괜찮습니다.”

스윽.

얼굴을 들이민 나성원이 내 귀에 밀착한 채 조용히 속삭인다.

“잘 들어, 한 이사.”

“말씀하시죠.”

“깡패 간판 내리고 민간사업 한다지?”

“네.”

“깡패가 만든 기업이 민간사업을 한다고 평범한 기업이 될 것 같나?”

“나 회장님이 방해만 안 하신다면요.”

“하하하, SY 건물에 우리 아그들 피가 묻어 있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나.”

꾸벅.

내 귀에서 얼굴을 뗀 나성원이 나를 노려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겠소.”

* * *

“잘 살펴보고 있지?”

“네, 대표님. 조용합니다.”

장례식장에서 으름장을 놓고 떠난 나성원은 다행히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직원들한테 똑똑히 전해. 성원파 애들 건드리지 말라고.”

“대표님… 그래도 전쟁 준비는 해 놓겠습니다. 저희가 먼저 안 건드려도 저쪽에서 연장 차고 들어오면 우리 애들 여럿 죽습니다.”

“상철아. 우리 이제 깡패 아니다. 깡패일 때야 연장 차고 들어오면 우리도 연장 차는 거지만, 일반인일 때는 어떻게 해야겠어?”

“연장을 안 차고 싸워야 합니까?”

“아이고, 인마 경찰에 신고를 해야지.”

불법적인 사업을 모조리 정리하고, 수천만 원짜리 로펌 변호사들을 고용해 서울연합파를 SY 그룹으로 만들었다.

“떠나겠다는 직원들은 퇴직금 넉넉히 챙겨 주고 남는다는 직원들은 과외라도 시켜서 회사원처럼 만들어 봐.”

“네, 알겠습니다.”

“길이 막히네. 취임식은 몇 시야?”

“두 시입니다.”

“서둘러서 가자.”

* * *

“SY의 새로운 대표, 한치우 님 입장하십니다.”

짝짝짝.

상석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이 못마땅한지 손은 박수를 치지만 눈빛은 곱지 않다.

“반갑습니다, 이사님들. 한치우입니다.”

조폭이 만든 기업이라고 모든 구성원이 조폭은 아니다.

평생 머릿속에 채운 거라곤 욕이고, 컴퓨터로 할 줄 아는 건 도박밖에 없는 조폭들이 기업을 운영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렇기에 삥 둘러앉은 이사들은 몸속에 문신도 없으며 이력서에 써 낼 학력도 꽤 괜찮았다.

“현재 저희 그룹이 어려운 상황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조폭이라는 틀에서 벗어난 이상 이제 우리는 떳떳한 사업을 통해 그룹을 성장시킬 기회가 생겼습니다.”

SY 그룹의 간판은 합법적이지만 매출 대부분이 사채, 불법 도박 사이트, 용역 깡패 등의 불법적인 일이었고, 불법을 모조리 걷어 내니 매출이 심각할 정도로 하락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이사들 뒤에 서 있는 조폭들의 눈빛은 초롱초롱해지는 반면, 앉아 있는 이사들의 눈빛은 곱지 않다는 것이다.

“한 대표, 지금 회사 적자가 얼마인 줄은 아세요?”

“잘 알고 있습니다. 대신 저희는 이제 검찰과 경찰들에게 수 억의 뇌물을 뿌리지 않아도 되고, 직원들은 칼과 빠따가 아닌 서류 가방과 노트북을 들고 합법적인 비즈니스를 하게 될 겁니다.”

“불법적인 일도 머리 딸려서 허덕이는 조폭들이 노트북과 서류를 들고 뭘 한다고요? 비즈니스? 차라리 공부 잘하는 중학생을 데리고 하는 게 낫겠습니다.”

회의실에는 이사들만 있던 게 아니었다.

비아냥거리는 정태용 이사의 말에 뒤에 나열해 있던 조폭들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씨발, 지금 뭐라 그랬습니까? 정 이사님?”

예상한 대로 강상철이 정태용 이사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저 봐∼ 수틀리면 욕부터 나오는 깡패들 데리고 비즈니스? 할 거면 한 대표 혼자하세요. 우리가 무슨 대단한 비전을 기대하고 민태호 밑으로 들어온 것 같습니까? 우리는 그저 민태호가 그 깡패 짓해서 벌어다 줄 돈을 기대하고 들어온 겁니다.”

불법을 걷어 내는 것은 손해를 감수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지만, 불법으로 맺어진 관계는 합법적으로 돌아서는 순간 깨져 버린다.

“저희 지분 정리나 잘해 주세요. 한 대표가 원하는 사업은 골빈 애들 데리고 하시고.”

정태용은 그 말을 끝으로 일어났고, 많은 수의 이사들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밖으로 향했다.

쾅!

문이 닫힌 회의실을 둘러봤다.

몇 명은 남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를 해 봤지만, 텅 빈 회의실 의자들을 보자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대표님…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시는 게…….”

“생각을 바꿀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생각을 바꿔.”

“네?”

휙.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위에서 벌 받고 계시는데 우리가 까지는 못할망정 죄를 추가해서 되겠어?”

“죄송합니다… 대표님.”

“휴, 이제 나도 헷갈린다. 우리가 깡패인지 저놈들이 깡패인지.”

* * *

“댁으로 모실까요, 대표님?”

“아니, 술이나 한잔 먹으러 가자.”

“네, 대표님. 서 마담한테 전화해서…….”

“아니, 성북동으로.”

“달동네 말씀이십니까?”

“어.”

서울에서 가장 높은 곳.

그리고 민태호와 가장 가까운 곳.

묻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신이 원하던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깡패들을 소탕하며 썩은 세상을 맑게 만드는 방법을.

“그리고 대표님, 정 검사가 연락해 왔습니다.”

“받지 마.”

“괜찮을까요? 중앙 지검 강력부 부장입니다. 그놈이 서울의 깡패들 목줄을 쥐고 있잖습니까.”

“말했잖아 상철아. 우리 이제 깡패 아니라고.”

만약 내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 검사가 됐다면 정 검사와 달랐을까?

‘동상이 검사가 됐다면 분명 좋은 검사였을 거여.’

민태호의 말처럼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깡패들을 소탕하며 썩은 세상을 맑게 만드는 그런 검사가 됐을까?

살아온 길은 조금 달랐지만, 민태호와 나는 같은 목표가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어떤 후회가 목표를 이루지 못하게 발목을 잡고 있었다.

민태호는 조폭이라는 후회.

나는 살인이라는 후회.

“가서 소주 몇 병이랑 안주 될 만한 것 좀 사와.”

“네, 대표님.”

상철이 편의점을 찾아 떠난다.

“후∼”

밤하늘과 네온사인 가득한 서울의 밤거리가 수평을 이루었고,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자 답답함이 조금은 해결되는 것 같았다.

“거 땅 꺼지겠소, 한 대표.”

뒤돌아보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공을 예측할 수 있었다.

민태호와의 추억이 있는 이곳에서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한 사람.

탁탁탁.

나무 지팡이의 경쾌한 타닥거림이 들려왔다.

“다리도 불편하신 분이 여기까지 올라오신 겁니까?”

“에이, 설마 걸어왔을까 봐?”

“같이 소주잔 기울이실 거 아니면 돌아가시죠.”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그냥 내려갈 수 있나?”

지팡이를 껄렁하게 짚은 나성원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인다.

“참, 저도 주먹 짬밥이 몇 년인데 다리병신한테 작업당할 것 같습니까?”

“허∼ 조폭 안 한다면서 입이 거치네, 한 대표.”

“그러니까 오늘은 그만하시고 돌아가시죠.”

철컥.

익숙하지 않은 소리와 익숙하지 않은 물건.

나성원의 안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칼이 아닌 권총이었다.

“뭡니까 그건?”

“다리병신이 휘두른 칼은 피해도, 다리병신이 쏜 총알은 못 피하지.”

“지금 서울 한복판에서 조폭 두목이 민간기업 대표한테 총질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서울 한복판에서 총질해도 막아 줄 뒷배가 있으니까.”

“뭐?”

“잘 봐…….”

휙.

나성원의 손짓에 언덕 밑 어둠 속에서 익숙한 실루엣의 남자들이 나타난다.

“이 총은 여기 계신 정 검사님이 협찬해 주셨고, 총알은 SY 그룹 이사님들이 협찬해 주신 거고, 마지막으로…….”

괜찮았다.

그럴 만한 사람들이었으니까.

이 썩은 세상에는 검사와 기업인, 그리고 깡패의 경계선이 없어진 지 오래니까.

“너?!”

“죄송합니다, 대표님…….”

하지만 나성원 옆에 서는 상철의 모습은 꽤 많이 고통스러워 보였다.

“자∼ 한 대표, 잘 들어. 시나리오는 이래. 요놈 상철이라 그랬나? 뭐, 여튼. 요 상철이가 한 대표에게 총을 쏠 거야. 그럼 한 대표는 뒤쟈 뿔겠지? 그럼 정 검사가 상철이한테 최대한 관용을 베풀어 5년으로 맞출 것이고, SY 그룹은 여기 계신 이사님들 뜻대로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야. 그리고 서울연합파는 성원파로 흡수된 채 새로운 SY 그룹의 대표는 요 나성원이 되는 거지.”

“하하하, 아주 좆같은 시나리오네.”

허탈함에 웃음이 터져 나왔고, 웃음을 멈춘 뒤에는 상철이의 눈을 살폈다.

“왜? 이유라도 좀 알자, 상철아.”

“죄송합니다, 대표님…….”

“이런, 씨발! 이유를 말하라고!”

흔들린다.

도대체 무엇이 상철이의 눈을 흔들리게 한단 말인가.

“이놈 딸린 식구가 여섯이고 한 대표가 준 월급이 300이야. 흔들리지 않고 배기나.”

“정말이야? 그저 돈 때문인 거야?”

아닌데.

내가 10년 넘게 봐오던 상철이는 그런 애가 아닌데.

“얼마야? 태호 삼촌이랑 10년, 나와의 10년을 지워버리는 금액이 얼마냐고.”

“…죄송합니다. 가족들이 붙잡혀 있습니다.”

“뭐?”

척!

권총을 잡은 상철의 손이 떨려 오자, 나성원이 그의 손을 덮어 움켜쥐었다.

“뒈질 놈 말은 그만 듣고 어서 당기지?”

“너희가 인간이야? 그래 나성원이야 본성이 양아치니까 그렇다 쳐도 정 검사랑 이사들 당신들은 뭔데?”

헛기침을 고개를 돌리는 이사들과 내 눈을 똑바로 보며 웃는 정 검사.

“그러니까 깡패 새끼가 왜 자꾸 양지로 나오려고 그래. 사람 피곤하게. 그냥 음지에서 돈이나 갖다 바치면서 살지.”

“그래서 검사란 새끼가 가족을 인질로 붙잡고 살인 청부하는 걸 지켜보겠다는 거야?”

“지켜보다니? 적극적으로 도와야지. 나도 투자한 게 있는데.”

“그래… 인간 아닌 새끼들이랑 말 섞을 필요 없지.”

슈트를 벗어 재끼고 그들에게 달려갈 자세를 잡았다.

“한 대표, 조용히 가자. 머리를 정통으로 맞아야 고통 없이 죽는 거 알잖아. 괜히 객기 부리다가 잘못 맞아서 총알 낭비하게 하지 말고.”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괴롭힘을 당하던 학창 시절?

나 자신을 억누르지 못한 살인?

지옥에서라도 살아 보겠다고 선택한 조폭 생활?

그것도 아니면 발버둥 쳐도 소용없는 썩어 빠진 세상?

“죽어! 이 개새끼들아아아아아!”

탕!

* * *

탁!

“꼬봉 새끼가 감 잃었네!”

뭘까?

분명 이마 한가운데 총을 맞았는데, 너무나 생생한 이 느낌은.

이승에서의 죄가 많아 저승에서 벌을 받는 것일까?

“담배 사 왔냐?”

그렇지 않고서야 열여덟 그 끔찍하던 기억이 어쩜 이리 생생하단 말인가.

끔찍하던 기억 속 악마들이 내 뒤통수를 때리는 고통까지도 말이다.

그런데 실룩거리는 내 입꼬리는 어떡하지?

이 상황이 현실이란 걸 느낄수록 기분이 좋아졌다.

만약 신이 내 이승의 업적을 문제 삼아 지옥 같던 삶을 되풀이하는 벌을 준 것이라면, 나는 그 벌을 곱게 받을 생각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당신이 제게 준 것은 벌이 아닙니다.

제 분노와 후회를 해소할 수 있는 기회일 뿐.

제게 지옥 같은 삶과 그것도 모자라 죽어서까지 그 삶을 되풀이하는 벌을 주신 것.

그걸 후회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명선호]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훗날 내 손에 죽게 될 녀석의 명찰을 바라보았다.

물론 또다시 죽일 생각은 없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기에는 내 머릿속에 든 게 너무 많으니 말이다.

“너 원래 이렇게 좆만 했냐?”

“뭐?”

분명 시선은 내 눈보다 높은 곳에 있었지만, 열여덟 살 고등학생인 녀석은 너무나 작아 보였다.

“…….”

내 입에서 나온 말에 명선호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너. 원래. 그렇게. 좆만. 했냐고.”

또박또박 또렷이 말하자 소란스럽던 교실의 분위기가 명선호와 나에게 집중되었다.

끓는점이 낮은 열여덟 살짜리 고등학생의 다음 행동?

불 보듯 빤했다.

“이 새끼가 진짜 미쳐 가지고!”

그저 펄펄 끓는 것이다.

칼을 든 주먹을 보다가 맨주먹을 보니 긴장감조차 없었다.

퍽!

“피지컬이 안 되니까 힘이 안 들어가네.”

“너…….”

몸이 작아서인지 미쳐 날뛰는 녀석의 주먹을 요리조리 피하기는 쉬웠지만, 덜 여문 근육 때문에 녀석의 배에 꽃은 내 주먹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일어서지 마. 더 처 맞기 싫으면.”

힘이 들어가지는 않았어도 명선호의 무릎을 바닥에 꿇릴 정도는 충분했고, 모두의 머릿속 각인되어 있던 한치우의 이미지를 바꾸기에도 충분하였다.

사실, 꼬여 버린 내 인생의 시작은 이 녀석일지도 모른다.

아니, 이 녀석이 확실하다.

비록 억눌린 분노로 인해 녀석을 죽인 것은 잘못된 행동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당한 일과 이 녀석이 행한 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한치우, 이 개새끼야!”

내심 녀석의 이런 행동을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시는 주먹을 쓰지 않겠다는 민태호와의 약속을 기껏 열여덟 살 고등학생 때문에 어기는 죄책감을 조금은 덜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퍽! 퍽! 퍽!

“치우야, 그만해!”

끓어올랐던 녀석의 혈기는 식어 버린 채 바닥에 축 늘어졌고, 차가움을 유지하려 하던 나는 어느새 끓어올라 있었다.

“하아… 하아…….”

몸은 뇌가 지배한다.

50㎏도 안 나가는 내가 90㎏가 넘는 명선호를 때려 눕혀 버렸다.

“그만해, 치우야. 저놈 기절했어.”

내 흥분을 멈추게 한 건 꼬봉 한치우에 유일한 친구였던 성훈이였다.

넉넉한 집안에 공부도 잘하는 주제에 착하기까지 하던 녀석.

그리고 과거 나에게 날아오던 명선호의 주먹을 막아준 유일한 녀석.

상황이 바뀌어 지금은 명선호를 향한 내 주먹을 막아 새웠지만, 나를 위한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상상 속에도 없던 상황이 현실로 일어난 탓에 교실 안 모두는 입을 벌린 채 주먹을 쥐고 있는 나와 축 늘어져 있는 명선호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내 한마디는 모두의 눈빛에 두려움을 심어 주었다.

“고마워, 성훈아.”

“응?”

“죽일 것 같았거든.”

또다시 말이야.

딩동∼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나는 속으로 뒷말을 삼켰다.

* * *

수업 종이 울렸지만, 당연히 나는 교실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사실 앉아 있을 필요는 없다.

단순히 학습을 위해서라면 나에게는 시간 낭비일 뿐이니까.

“왜 그랬니?”

“왜 그랬다뇨?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요.”

학생주임.

팔에 걸린 완장을 보니, 그간 잊고 지내던 기억이 떠올랐다.

‘선생님… 선호가 자꾸… 괴롭힙니다…….’

‘친구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저도 그러고 싶은데…….’

‘바쁘니까 나중에 올래? 선생님이 선호 불러서 얘기해 볼게.’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완장을 달고 있는 학생주임이었다.

물론 상황을 완벽히 해결해 줄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자, 둘이 악수하고 이제 사이좋게 지내.’

그저 조금만 상황이 나아지길 바랐다.

하지만 학생주임은 완장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상황을 더 안 좋게 만들뿐이었다.

“미안했다, 치우야.”

당시 학생주임의 말에 웃으며 악수를 건네는 명선호.

명선호의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고, 학생주임은 그 모습을 보며 귀찮은 일을 해결한 듯 또다시 우리를 방치했다.

“그래. 선호가 너 괴롭히던 거 알고 있다. 그런데 지나고 보면 다 학창 시절의 추억이야.”

“추억? 지금 추억이라 그랬습니까?”

“그래, 추억.”

뜨득!

학생주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고 있던 교복 셔츠를 찢어 버렸다.

“이것도 추억입니까?”

“뭐하는 짓이야!”

갈비뼈가 훤히 보일 정도로 마른 몸.

곳곳에 보이는 피멍 자국.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내 몸에는 피멍 자국이 사라진 날이 없었다.

“제 추억 속에는 온통 이런 상처와 당신 같은 무능한 스승뿐이었습니다.”

“…다 싸우면서 크는 거다.”

“싸우면서 크는 건 조폭 아니면 양아치밖에 없는 겁니다. 조폭은 칼빵이 나면 자랑이라도 하지, 그저 힘없는 학생은 이 상처가 가슴에 남아 평생을 괴로운 기억 속에 살아가야 하는 겁니다. 만약 당신이 조금만 더 지혜로운 스승이었다면 제가 이렇게까지 안했겠죠.”

그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못했다는 쪽이 더 가까울 것이다.

내 말에 지금껏 자신이 해 오던 행동의 죄책감이 들었을 테니까 말이다.

심지어 교복 셔츠를 찢은 채 선생에게 대들고 있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그 어떤 교사도 개입하지 않았다.

이들은 딱 이만큼만 썩었을 뿐이다.

그간 봐온 조폭과 그들을 후원하던 스폰서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순수한 사람이다.

그런데…….

내 삶은, 과거는, 학창 시절은, 왜 이리 뒤죽박죽 꼬였던 걸까?

“선호 병원비 내주고 합의해. 내일까지 부모님 모셔오고.”

“그래요. 그리고 저는 오늘 바로 명선호와 그 무리를 경찰에 고발할 겁니다.”

“다친 건 선호다. 너도 무사하지 못할 텐데?”

“이미지 좋은 고등학교를 꽤 떠들썩하게 할 수는 있죠. 곧 학폭위가 열릴 것이고 지금껏 제가 당하던 모든 게 낱낱이 드러날 겁니다.”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구나. 학폭위는 학교 폭력의 가해자를 가리는 위원회다. 지금 가해자는 너고. 가해자 신고로 학폭위가 열릴 것 같아?”

“또한! 언론에 이 사실을 알릴 겁니다. 전교를 넘어 전국 1등인 수재 학생이 괴롭힘을 못 이겨 가해 학생을 폭행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전국 1등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순간 모든 기자가 저를 취재하려 들 겁니다. 왜냐?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니까요. 그리고 전국 1등이라는 수식어는 든든한 제 보호막이 될 거고요.”

일진이 모범생을 패면 욕을 하지만, 모범생이 일진을 패면 사람들은 이유를 찾는다.

“보호막에 막혀 제가 명선호를 폭행한 사실은 정당해집니다. 언론은 제 앞에 서서 폭력을 방치한 학교와 학생주임인 선생님, 그리고 제 폭력의 이유를 만든 명선호를 물어뜯겠죠.”

내 말에 앞으로의 일이 상상이 되었는지, 학생주임의 눈빛이 변했다.

“치우야… 선생님 생각이 짧았다.”

찢어진 교복 셔츠를 여며 주고 두 손을 꼭 잡으며 고개를 숙이지만, 내 눈에는 가증스럽게만 보일 뿐이었다.

“진심이든 거짓이든, 이미 늦었습니다.”

반성이 아닌 교사라는 직업과 학생주임이라는 완장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니까.

“잠깐만! 치우야!”

쾅!

* * *

학교를 나왔다.

아직 수업이 더 남았지만, 교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돌아가시기 전의 어머니 모습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집으로 향하는 길.

늦가을 선선한 바람.

선선한 바람을 타고 불어오는 바닷가의 비린내.

추수가 끝나 볏짚을 태우는 냄새까지도.

모든 게 선명했다.

찢어진 교복 셔츠를 여민 채 한참을 걷자 오래된 빌라 하나가 보였다.

뒤에는 산과 논이 있고 앞에는 바닷가가 보이는 집.

풍수 지리적으로 완벽한 집은 이제 곧 재개발이 된다.

좋은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지만, 나와 어머니에게 돌아오는 것은 그저 이사를 위한 푼돈일 뿐이었다.

어렵게 구한 전셋집을 나와 새로운 보금자리를 구하기 위해 어머니는 시장통에서 밤낮으로 일하셨고, 나는 도움은 못 줄망정 어머니의 주머니를 털어 명선호와 그의 무리에게 갖다 바쳤다.

― 아! 짜증나 이게 뭐냐고!

문 앞에 서자 과거의 내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분명 나를 괴롭힌 건 어머니가 아니었다.

하지만 내 모든 원망은 어머니에게 향했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했던 사람에게 말이다.

덜컥!

녹이 슨 철문이 열리자 따뜻함이 느껴졌다.

“엄마…….”

“치우 왔니?”

“…네.”

“아직 학교 수업 시간 아니야?”

20년 만이다.

불러본 것도, 마주한 것도.

“죄송했어요…….”

물음에는 답을 하지 않은 채 눈물을 쏟으며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오늘 아침에 나간 아들의 행동이 낯설 법도 한데 어머니는 내 등을 토닥여줬다.

“뭐가∼ 우리 치우 무슨 일 있니?”

“아니요. 없어요…….”

내가 박은 가슴에 못을 간직한 채 평생을 사신 어머니.

살인을 저지르고 감옥에 갔을 때도 어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면회를 오셨다.

그리고 어느 날 면회자에 내 이름이 불리지 않을 때 교도관은 작은 종이 하나를 전달해 주었다.

[귀휴 허가서]

과로의 영양실조.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유는 나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희생 덕분에 항상 가득하던 내 영치금.

나는 또다시 살인을 저질렀다.

장례식장이 떠나가도록 목 놓아 울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죽였다.

어머니의 가슴에 박은 못들이 전부 내 가슴에 박혀 버려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이제 행복하게 해드릴게요.”

“지금도 행복해 엄마는. 우리 치우한테 해 준 것도 없는데 공부도 잘하지, 건강하지…….”

어머니의 나이 마흔다섯 살.

열여덟로 돌아오기 전 내 나이.

어머니란 이름 때문에 많은 것을 희생하였다.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티셔츠와 아름다운 얼굴에 비해 너무나 거칠어진 손.

“약속할게요. 앞으로 웃으실 일만 가득할 걸.”

“호호호, 어른 다됐네, 우리 치우.”

* * *

어머니가 차려 주신 집밥을 배불리 먹고 낡은 데스크톱 앞에 앉아 앞으로의 계획을 짜던 중이었다.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밖에서 대화가 들려왔다.

“치우 어머님?”

“네. 맞는데 누구세요?”

“서원고 교감입니다. 치우 좀 볼 수 있을까요?”

“아, 들어오세요.”

교감이라는 말을 듣자 방문의 목적도 이유도 전부 알 수 있었다.

“아이고∼ 우리 치우. 나 알지? 교감 선생님이야.”

“네.”

학생주임의 보고에 발등에 불이 떨어졌고, 겨우 몇 시간 만에 집까지 찾아온 것이다.

“치우야, 밖에서 얘기할까?”

나와 교감의 대화에 어머니의 눈빛에 걱정이 생긴다.

“별일 아닙니다, 어머님. 치우가 공부를 워낙 잘하기도 하고, 우리 학교 자랑이라 입시 문제도 상담할 겸해서요.”

“아∼ 네네.”

어머니는 그제야 웃으며 나를 배웅했다.

탓!

밖으로 나오자 교감이 자신의 차 문을 열어줬다.

“고맙습니다.”

내 기억 속에서 교감은 흐릿했다.

마주할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지금의 행동을 보면 좋은 사람 같았다.

서글서글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대한 점.

어머니가 걱정하지 않도록 잘 둘러대고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온 점.

“그래, 치우야.”

“네, 선생님.”

그를 선생님이라 불렀다.

그럴 자격이 있는 것 같다는 착각 때문에.

“얼마 주면 조용히 할래?”

* * *

“3억.”

담배 연기에 섞인 한숨이 나에게로 향했다.

“뭐? 지금 나랑 장난하니?”

“반응이 왜 그래요? 싸게 부른 건데.”

사실 이 문제가 회자되고 시끄러워진다면 나도 좋을 게 없었다.

법복을 입게 되는 순간 사람을 폭행했다는 꼬리표가 평생 붙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러나 꼬리표가 두려워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교무를 책임지는 사람이 그렇게 수지 타산을 못해서 되겠습니까?”

“허, 학생주임에게 들었다만 진짜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한데 그 똑똑한 머리로 다른 생각은 안했고?”

“말해 보시죠.”

“그만한 돈을 주는 것보다 그냥 한 번 시끄럽고 마는 게 나을 거란 생각 말이야? 네가 아직 사회를…….”

나는 그의 말을 끊고 입을 열었다.

“서원 학원, 초중고, 그리고 대학교와 부속 병원까지. 서원 그룹이 만든 국내 최대의 학원 법인이죠.”

하나 서원 그룹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IMF를 기점으로 서원 그룹은 내리막길을 걸었고, 2004년 결국 파산하여 그룹 전체가 해체돼 버린다.

“서원 그룹은 망했어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재단법인은 결국 최후의 보루로 살아남게 되었죠.”

아무리 전국에서 노는 아이라지만 이제 겨우 열여덟 고등학생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듯, 교감은 담뱃불이 옷에 떨어지는지도 모른 채 넋을 놓고 있다.

“하지만 학교 폭력이라는 이슈가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정부는 옳다구나 하고 서원 학원을 조사할 겁니다. 왜냐? 서원 그룹은 현재 VIP를 탄압하던 과거 정부에게 엄청난 비자금을 갖다 바쳤으니까요.”

“너… 뭐야?”

“그 과정에서 단 1원이라도 불법적인 자금 이동이 있었다면, 정부는 서원 학원에 관선 이사를 파견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교감 선생님의 장인이자 서원 학원의 이사장은 지금 넋이 빠져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누군가를 원망하겠죠.”

“앗! 뜨거워!”

그가 떨어진 담뱃불을 눈치챈 건 바지를 뚫고 들어가 자신의 허벅지에 고통스러운 화상을 입히고 나서였다.

“선생이 학생 앞에서 담배를 피우니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런 젠장!”

고통은 가면 속 교감의 진짜 얼굴을 드러나게 했다.

“지금 네가 한 말이 네 머릿속에서 나온 말이야?”

“네. 그러니까 열여덟 고등학생에게 용돈이나 주면서 회유할 생각이면 돌아가시죠. 그리고 단순히 머릿속에만 입력해 놓지는 않았으니까 절 묻을 생각도 접으시고요.”

“음… 그렇게 큰돈이 왜 필요한 거지?”

“그걸 왜 궁금해하십니까? 영수증 처리라도 해드릴까요?”

“그래. 네가 평범한 고등학생이 아닌 것 같으니 나도 돌리지 않고 말하지. 영수증 처리 없이 돈 건넸다가 나중에 네가 말 바꾸면 내가 곤란해지는데.”

“이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서야. 세무조사 들어오면 분명 저까지 타고 들어올 텐데 제가 제 발등 찍을 것 같아요?”

“처음부터 노린 거냐? 일부러 괴롭힘 당해 주는 척한 거고?”

“아니요. 괴롭다고 말도 하고, 도와 달라 요청도 해봤지만 철저히 무시당했죠. 지금은 오히려 고맙네요. 그게 아니라면 3억이란 거금이 생기지 않았을 테니까 말입니다.”

원망만 하던 상황이 과거로 돌아오니 기회가 되었다.

약점을 잡아 협박으로 뜯어낸 큰돈.

조폭이 하는 짓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건 죄책감이 하나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

그래.

내 마음속엔 이미 원망과 꼬여 버린 인생에 대한 보상이란 마음이 가득 차 있어 죄책감이 들어올 수 없는 것이다.

“깨끗한 돈으로 가져오세요. 추적도 꼬리도 붙을 수 없는 돈.”

물론 법복을 조금 더 빨리 입을 수 있다면 기소권이라는 칼로 그들을 찌르겠지만, 지금은 이것이 열여덟 고등학생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했다.

“그 돈을 받는 순간 결국 너도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거다. 네가 다를 게 뭐니? 폭력을 행사한 놈과 그 폭력을 대가로 돈을 챙기는 너.”

“다를 거 없죠. 그저 가장 현실적인 해결 방법일 뿐입니다. 아직 세상은 거대 재단인 서원 학원과 맞서 싸울 사람이 얼마 없거든요.”

“거기까진 주제를 알고 있어 다행이구나.”

탁!

그의 비릿한 웃음을 보며 나는 차문을 열고 나왔다.

* * *

― 학교폭력예방센터에 YH 재단이라는 이름으로 3억이라는 거금을 기부했습니다. 하지만 YH 재단은 등록되지 않은…….

“어머나! 치우야 이것 봐봐. 세상에 참 좋은 사람이 많지 않니?”

TV를 보던 어머니가 기분 좋은 뉴스에 웃음을 보인다.

“엄마한테 돈을 준 것도 아닌데 그렇게 좋으세요?”

“그럼∼ 나도 같은 고등학생을 키우는 엄마잖니. 저런 큰돈을 기부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그 돈이 치우 너처럼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위해 쓰인다는 것도 너무 좋아.”

앞으로 웃을 일만 가득할 거란 약속.

뭐가 어찌 됐건 지킬 수 있을 거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저는 공부할게요.”

“쉬엄쉬엄해 과일 좀 줄까?”

“괜찮아요.”

방 안에 들어와 낡은 데스크톱의 전원을 켰다.

한참을 기다려도 바탕 화면은 떠오르지 않았다.

기다림이 지루해 방안을 살펴보자 내 기다림의 이유를 설명해 줄 달력이 보였다.

2004년 11월 15일.

어느새 켜진 추억 속 바탕 화면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빌드업을 시작할까?’

앞으로 일어날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머릿속에서 떠올랐지만, 열여덟 고등학생 신분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은 마땅히 생각나지 않았다.

“속 터져 죽겠네.”

인터넷을 열고 답답한 속도로 뉴스들을 찾아보았다.

한참 동안 스크롤을 내리자, 눈과 머리가 번쩍거릴 정도로 자극적인 기사 제목이 보였다.

[법무부, 내년부터 사법 고시 응시 자격 개정.]

[학력 제한 없던 사법 고시, 내년부터 법학 과목 35학점 이수자만 응시 가능.]

딱!

손가락을 튕기자 기억이 더욱 선명해진다.

“그래, 이것부터.”

2006년 1월 1일부터 사법 고시의 응시 자격이 바뀐다.

물론 법대를 들어간 적이 있는 나에겐 별 의미 없는 사건이었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지금 날짜 11월 15일.

내년 1월에 사법 고시를 응시한다면 내년에 치러질 47회 사법 고시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오랜 조폭 생활로 머리가 굳어졌다 하더라도 사법 시험에 합격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한 평이 겨우 넘는 좁은 고시텔 방안에 갇혀 본 것이라곤 기출문제와 답안의 법리 해석문이었다.

잠꼬대를 법조문으로 해댈 정도이니 시간이 지난다고 잊힐 리가 없었다.

“그럼 이걸로 일단 학비 문제는 해결되겠네.”

없는 형편에도 훗날 공부 잘하는 아들에게 원망을 들을까 봐, 어머니는 허리가 휘어지도록 일을 하여 나를 사립학교에 보내셨다.

물론 공립학교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선택이었다.

그 사정을 나도 알고 있는 탓에 공립대에 들어갔지만, 사법 고시생에게는 생각보다 돈 들 곳이 상당히 많았다.

어쨌건, 사법 고시에 합격한 고등학생은 대한민국 유수의 명문대들이 장학금을 주며 데려가려 할 것이다.

“이건 됐고, 지금 급한 건 이사 문제인데.”

내 기억이 맞다면 이제 곧 재개발을 위한 이주가 시작되고, 우리는 두 발조차 뻗기 힘든 좁은 원룸으로 가게 된다.

“쩝, 1억은 남겨 둘 걸 그랬나. 어떻게 보면 2년 동안 폭행당한 합의금인데.”

그렇다고 기부한 돈을 되돌려 달라고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비록 아들 민윤호의 이름을 딴 진짜 재단을 아직 만들지는 못했지만, YH라는 이니셜이 사람들에 머릿속에 새겨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추후에 진짜 YH재단이 설립될 때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성훈산업, 줄기세포에 대규모 투자 예고.]

“흠, 그러고 보니 이런 일도 있었지. 이게 희대의 사기극이라는 걸 이때는 몰랐지만.”

이런 건 관여하지 말자.

어차피 내년이면 밝혀질 텐데.

후회한들 무엇하리, 선택은 자신이 하는 건데.

스크롤을 내리려는 찰나 머릿속에 한 줄기 빛이 지나갔다.

“잠깐만, 성훈산업? 어디서 많이 들어본 기업인데…….”

쾅!

책상을 내려친 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머릿속에 기억이 확실해지자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일 뿐이었다.

나는 곧장 요즘 유행하고 있는 날개 달린 채팅 프로그램을 열었다.

[치우천재] : 야 성훈아!

[성훈이지롱] : 응?

[치우천재] : 너희 아버지 회사 이름이 성훈산업 아니야?

[성훈이지롱] : 응, 맞아!

[치우천재] : 잠깐 나 좀 보자.

[성훈이지롱] : 지금?

[치우천재] : 어. 지금 당장.

외투도 걸치지 않은 채 현관문을 나섰다.

“치우야, 밖에 추워!”

“잠깐 나갔다 올게요!”

* * *

“와….”

성훈이가 알려준 주소로 뛰어가자, 우리 집 근처 풍경과는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다른 곳이 나타났다.

“여기가 너희 집이야?”

이쪽 길로는 올 생각도, 기회도 없었기에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런 고급 주택단지가 있는지 말이다.

그런 고급 주택단지 속에서도 성훈의 집은 다른 집을 몇 개 합쳐 놓은 것마냥 커다란 크기를 자랑했다.

“응, 맞아. 그런데 어쩐 일이야?”

“혹시 너희 아버지 집에 계셔?”

“응, 계시지.”

“잠깐 뵐 수 있을까?”

“괜찮긴 한데 왜?”

“드릴 말씀이 있어 너희 아버지가 꼭 들으셔야 할.”

학창 시절 유일한 친구였던 성훈이.

성훈이가 잘사는 집안인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성훈산업의 장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훗날이었다.

[성훈산업, 결국 부도 방영호 회장 일가족 해외 도피]

뉴스에 자세히 나오지는 않았지만, 익숙한 기업 이름과 그보다 더 익숙한 장남의 이름을 보고 확신했다.

그리고 지금 성훈산업의 명줄을 갉아먹을 쥐를 잡으러 왔다.

쥐약을 든 채.

어쩌면 친구의 집안을 구하고, 우리 집안의 보금자리를 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아버지, 친구 왔어요.”

“응? 친구?”

드라마를 보면 심심치 않게 재벌 집 풍경이 나온다.

대리석 바닥과 거대한 샹들리에.

집에서도 양복을 갖춰 입고 위층 서재에서 내려오는 회장님.

“안녕하세요, 한치우라고 합니다.”

“아, 이번 모의고사 전국 1등 했다는 친구?”

성훈이의 아버지, 방영호 회장은 딱 그런 모습이었다.

“하하, 운이 좋았습니다.”

“운도 실력이지. 그래, 일단 들어오거라.”

어떤 집을 방문해도 1등이라는 수식어는 환영 인사를 받기에 충분했다.

“아주머니, 여기 애들한테 맛있는 것 좀 해 주세요.”

“네, 회장님.”

가정부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 주방으로 들어갔고, 방영호 회장은 시종일관 나에게 미소를 보였다.

“기특하구나, 부모님이 참 좋아하시겠어. 얼굴도 잘생겼고.”

“저…….”

“그럼 재밌게 놀다 가거라. 언제든지 놀러 오고.”

“저, 회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위층으로 향하던 방영호가 뒤를 돌아봤다.

“그냥 아저씨라고 불러.”

“네. 아저씨,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말해 보렴.”

“아저씨와 단둘이 얘기하고 싶습니다.”

“응?”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는 성훈이와 뜻밖의 제안에 황당해하는 방영호 회장이었다.

“흠,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구나.”

계단을 오르는 방영호를 뒤따라 위층 서재로 올라갔다.

3미터는 족히 돼 보이는 책장이 서재 전부를 두르고 있었고, 책장 속에는 책이 빼곡했다.

또 서재 한가운데에는 회의를 위한 응접실이 보였는데, 수십 명이 들어와도 좁지 않을 만큼 꽤나 큰 공간이었다.

“거기 앉으렴.”

“네.”

착.

방영호가 가리킨 응접실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사이언스 학술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래. 그 할말이라는 게 뭔지 이제 말해 보거라.”

“줄기세포에 대규모 투자를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허허, 벌써부터 경제에 관심이 많구나.”

“네. 그래서 회장님이 꼭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그저 호기심 많은 열여덟 고등학생을 대하는 태도의 방영호 회장이었다.

하지만 그 호기심은 곧 관심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황희석 박사의 줄기세포 논문은 조작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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