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이야기
카무이가 사라진 이후에도 태양의 왕과 달의 여왕의 무덤은 여전했다.
한적한 평일의 오후, 장엄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거대한 무덤 앞에 한 쌍의 남녀가 섰다.
남녀 모두 눈에 띄는 복장이었다.
키가 큰 남자는 검정색 고급 양복에 통이 높은 마술사 모자를 쓰고 있었다. 손에는 광택이 도는 금속 지팡이를 쥐었고, 가슴께에는 금색 회중시계를 길게 늘어트렸다. 다소 언밸런스한 염소수염이 자리한 얼굴은 무척이나 수려했고, 속을 알 수 없는 노란 눈동자를 가린 것은 인상적인 외눈 안경이었다.
여자는 매력적이었다. 블룸 펌 파마를 한 풍성한 회색 머리칼은 어깨를 스쳤고, 그녀가 동물신임을 상징하는 하얗고 탐스러운 토끼 귀는 하늘을 향해 쫑긋 솟아 있었다.
타이트한 하얀 블라우스와 검은 재킷은 여인의 육감적인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냈고, 훤히 드러낸 하반신은 매끄러운 각선미를 세상에 자랑했다.
커다랗고 동그란 안경은 무척이나 귀여운 느낌이었지만 여인이 가진 본연의 요염함을 완전히 감추기에는 부족했다.
여인은, 이상한 나라에서 온 토끼 묘신 패스파인더는 한숨을 길게 토했다.
“결국엔 실패했어.”
카무이는 패했고 인류는 건재했다. 이번에야말로 초토화 실험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남자는, 사기꾼 모자 장수 천년백작 생 제르몽은 가볍게 혀를 찼다.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시게. 실패가 아니니까. 얻은 것이 많아.”
천년백작은 지팡이를 휙휙 돌리며 무덤에 가까이 다가섰다. 새하얀 묘비에는 태양의 왕과 달의 여왕의 업적이 하나하나 세밀하게 적혀 있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호 의지는 전멸했어. 터무니없이 증가했던 4세대 인간종도 엄청나게 줄어들었지. 충분한 성과야.”
수호 의지는 전멸했고, 세상은 새로운 수호 의지를 낳을 여력을 잃었다. 못해도 앞으로 천 년간은 새로운 수호 의지가 탄생할 일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묘신 패스파인더는 여전히 볼멘소리를 토했다.
“존자들이 전멸한 건 천 년 전 일이잖아. 거기다 마지막에 못 본 거야? 그 미친 계집년이 룰 브레이크Rule Break를 완성시킨 꼴을? 어째 일을 벌일 때마다 룰 브레이커가 늘어나는 기분이야. 거기다 이번 룰 브레이커는 그 미친 창녀의 양딸이라고. 하여간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어.”
룰 브레이커. 붕괴 위협을 일으킬 수 있는 압도적인 존재들.
천년백작은 지팡이로 땅을 짚었다. 패스파인더와 달리 여유로운 목소리를 토했다.
“절대무적이라면 어차피 단발성이야. 창시자인 괴력난신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기술이니 그렇게 크게 걱정할 필요 없어. 그리고… 이것 역시 어쩔 수 없는 흐름이란 생각이 드는군.”
“흐름은 개뿔. 이러다 왕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우리가 다 털리겠다. 요새는 차라리 레이디 일렌시아의 방식이 더 맞는 게 아닌가 싶어. 이렇게 간접적으로만 나서는 것도 이제 신물이 나.”
“하지만 패스파인더. 그래서 장미 기사단은 저 검은 불꽃과 싸우느라 그 세를 많이 잃지 않았는가. 아직 전면전을 벌이기에는 일러. 우린 왕의 가신이다. 왕께서 돌아오시기를 기다려야 해.”
검은 불꽃 진. 세상 광시곡에서 태어난 사신.
세상 주명곡에서 있었던 사건 이후로 얼마나 많은 수의 쏜즈 나이트들이 그의 흑염 아래 사라졌던가.
“알았어, 알았어. 누가 천 년 동안 지치지 않는 마법사랄까 봐 참을성도 좋아요.”
패스파인더는 자세를 바로 했다. 하늘을 우러렀다. 습관처럼 선창했다.
“모든 것은―”
생 제르몽 역시 고개를 들었다. 패스파인더의 목소리에 맞추어 말을 이었다.
“왕께서 돌아오시는―”
그분. 모든 세상 걸쳐 유일한 왕. 언제고 돌아오실 자신들의 왕.
패스파인더와 생 제르몽은 시선을 맞추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해 온 왕의 가신으로서 목소리를 함께했다.
“그날을 위해.”
패스파인더와 천년백작은 함께 웃었다.
“다음 이야기는 다음 세상에서.”
천년백작은 세상 일광SunShine으로 통하는 게이트를 열었다. 세상 무적함대Armada와 작별했다.
<나이트 사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