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6.(5권) (48/74)


Chapter 36.

부대는 고립되었다.
통신은 끊긴 지 오래였고, 식량과 탄환 역시 이제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레이첼 고디나는 부대의 지휘관이었다. 본래는 소대장에 불과했지만 하나둘 윗사람들이 죽어 나간 끝에 지금은 대대 전체를 이끌고 있었다. 워낙에 많이들 죽어 나간 끝에 남은 병력은 이제 중대급 이하였지만,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죽음이 머지않았다.
레이첼은 고립된 가운데 다시 한 번 더 고립되었다. 함께하고 있는 것은 본래부터 이끌고 있던 소대의 분대원 5명이 전부였다.
레이첼은 반파된 벙커에 틀어박혔다. 잔해를 쌓아 엉성하게나마 엄폐물을 만들었고, 남은 전투식량으로 분대원들과 최후의 만찬을 즐겼다. 맛은 없었지만 그래도 울지는 않았다.
울지 않았다. 이제 겨우 17살 된 소년병이 총 한 번 쏴 보지 못하고 머리가 꿰뚫려 죽었을 때도, 존경해 마지않던 대대장님이 죽었을 때도, 통신을 통해 일가친척 모두가 살고 있는 도시가 궤멸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레이첼은 울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에도 울지 않았다.
레이첼은 위장용 크림이 담긴 용기에 부착된 손거울을 보았다. 레이첼이 보였다. 붉은 머리칼의 레이첼은 다 죽어 가는 얼굴로나마 웃고 있었다.
통신이 끊겼지만 레이첼은 직감했다.
헤이스팅스 요새는 함락되었을 거다. 중부 전선 최후의 요새인 그곳에 인간종이 그 어떤 병력을 때려 박았든 저 존자의 무리들을 막지는 못했을 거다.
헤이스팅스 요새가 뚫리면 중부 전선 전체가 뚫린다. 그리고 그것은 대륙의 서부도 동부와 마찬가지로 괴들의 세력권 내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죽겠지, 많은 사람들이 죽겠지.
“소위님.”
올가 하사의 부름에 레이첼은 고개를 들었다. 올가는 별말 없이 벙커 밖을 가리켰다. 괴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레이첼은 우는 대신 험상궂게 웃었다. 분대원들 역시 저마다의 화기로 벙커 밖을 겨냥했다.
“Let’s Rock!”
미하일 상병이 제멋대로 떠들었지만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벙커를 향해 달려오는 괴들을 향해 미친 듯이 연사를 퍼부었다.
레이첼은 알았다.
이제 잠시 후면 자신과 분대원들은 고깃덩어리가 되어 죽겠지. 저 괴들에게 뜯어 먹혀 죽겠지.
레이첼은 울지 않았다.
현실은 그런 것이었으니까.
기도해도 들어줄 신 같은 것은 없다.
힘들 때만 부탁한다고 기적을 일으켜 주는 신 또한 없다.
울부짖는다 하여 그것을 듣고 달려와 줄 히어로 같은 것은 없다.
그러니 싸우자. 최후의 최후까지 자신의 힘으로 싸우자.
“크아아아아아아앙―!”
괴가 포효했다. 레이첼의 총탄 따위 무시하며 뛰어올라 날카로운 촉수로 레이첼과 분대원들의 화기 모두를 박살 냈다.
레이첼은 포기했다. 올가는 아직도 싸울 생각인지 수류탄을 챙겼지만, 미하일 상병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뭐라도 집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레이첼은 담담히 현실을 받아들였다.
괴를 보았다.
4미터 정도 되는 크기에 붉은 각질로 온몸이 감싸인, 등 뒤로 돋아난 칼날 같은 촉수만 제한다면 마치 오랑우탄 같은 괴였다.
괴는 오른손을 들었다.
올가는 안전핀을 뽑았다.
미하일은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레이첼은 울었다. 참고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도와줘. 살려 줘. 누구라도 좋으니까 제발!
그리고 그 부름에 응답했다.
울부짖음을 듣고 달려온 자가 있었다.
간절한 기도에 부응해 기적을 선사하고자 하는 자가 있었다.
굉음이 울림과 동시에 괴가 폭발했다. 산산이 흩날리는 잔해 앞에 푸른 머리칼의 소년 하나가 오롯이 섰다.
“괜찮아, 이제 전부 괜찮아.”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한마디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린 푸른 유성.
인간의 히어로, 인간의 수호신.
작은 등과 어깨로 인류 전체의 목숨을 지키려 하는 단 하나뿐인 신.
소년은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너무나 좋아하는 인류의 웃음을 지키기 위해, 인류가 흘린 눈물을 거두기 위해 뛰어올랐다.
레이첼은 그런 소년의 뒷모습을 보았다. 다시 한 번 울부짖었다.
기쁨과 환호의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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