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일지 (45/74)


강철의 기사들 SS #3 일지

4월 15일
안녕하신가, 일기장. 나는 안녕 못하다.
아무래도 며칠 내로 뒤질 것 같아서 마지막 기록을 남겨 보련다.
괴들이 본격적으로 요새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통합 사령부의 원군이 내일 도착한다는데, 사실 별로 기대 안 하고 있다. 모름지기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 아니, 그래도 사실 기대한다. 위에는 뒤질 것 같다고 썼지만 어쩌면 살겠지. 살고 싶다.
아, 젠장. 횡설수설이 되고 있지만 볼펜이니까 지우거나 선을 긋는 짓 따윈 하지 않겠어. 난 사나이니까. 미안하다. 사실 술을 좀 마셨다. 맨 정신으로 버티기에는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다.
전황이 좋지 못하다. 본래는 여기다가 유언이라도 적어 볼까 했는데, 그건 너무 불길한 짓거리 같아서 관두련다.
다시 보자, 일기장아. 꼭이다.

4월 19일.
유언 쓰련다. 시발.
하―멜―이 여―기 있―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제길, 폼 나는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기도하고 싶어졌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졌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구나.

4월 28일.
살아남았다.
요새는 반파되었고, 통합 사령부가 보내 준 원군은 전멸하였고, 요새 주둔 병력도 삼할 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남았다.
기도가 닿았다.
인간을 지키는 강아지 견신 미티어 블루가 지상에 강림해 우리를 위해 싸웠다. 그 덕분에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마침내 보답 받은 기도에 인류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기어코 일어난 기적에 인류는 열광했다.
나도 열광했다. 나도 미티어 블루의 등장에 벅찬 감동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세상의 인류는 결코 자립할 수 없겠구나. 영원히 신에게 기도하고 의지하기를 멈추지 못하겠구나.
그래, 나쁠 것 없겠지.

4월 29일.
인류의 자립이라고 거창하게 쓰긴 했지만 사실 별거 아닌 일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굳이 저놈의 자립이란 것을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나는 생각해 보았다. 미티어 블루의 극적인 등장으로부터 인류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일단은 헤이스팅스 요새다. 인류는 중부 전선을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전선은 뒤로 물러나지 않았고, 인류는 약간이나마 여유를 얻었다.
다음은 희망이다. 개전 이래로 패전만을 거듭해 온 인류에게 이번 승리는 그야말로 천금과도 같았다.
이길 수 있다. 우리도 이길 수 있다. 저 괴들을 물리칠 수 있다.
세 번째는 안도다. 신은 역시 우리를 버리지 않았구나. 우리는 여전히 기도할 대상을 가지고 있구나. 우리에게 기적을 선사할 이는 남아 있구나. 미티어 블루가 왔으니 다른 동물신들도 올지 모른다.
그런 기대, 그런 희망, 그런 생각.
지독한 상실감을 메워 줄 그 무언가.
나는 한발 물러서서 군인의 눈으로 이번 전투를 검토해 보았다.
이번 전투는 엄밀히 말해 인류의 승리가 아니었다. 괴들의 수를 극단적으로 줄인 것은 인류의 힘이었지만, 결국 전투를 끝낸 것은 미티어 블루 개인의 힘이었다.
이 차이는 컸다. 미티어 블루는 희망의 상징은 될 수 있을지언정 모든 전장에 투입될 수 있는 병기는 될 수 없었으니까.
그랬기에 나는 낙관할 수 없었다.

5월 17일.
인간은 언제나 사랑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과 같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고, 섹스를 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기르고, 그 아이가 다시 사랑을 하고.
연화와 폴이 오늘 결혼식을 올렸다. 이 난리통에 제대로 된 결혼식이 가능할 리도 없으니 약식 결혼식이었다.
신랑신부에 나 포함해서 일곱 명이 모인 다음에 30분 만에 후딱 처리해 버린 그런 결혼식이었다.
연화는 웃었고, 폴도 웃었다. 그 자리에 모인 우리도 웃었다.
인류의 절반 이상이 죽어 나간 이 상황에서도, 당장 내일이라도 죽을지 모를 이 상황에서도 우리는 웃을 수 있구나.
키스하는 연화와 폴을 보며 생각했다.
부럽구나. 나도 연애나 해 볼까. 물론 농담이다.

5월 21일.
폴이 죽었다.
미티어 블루도 모두를 구할 수는 없었다.
연화는 하루 종일 울었다.

6월 28일.
미티어 블루는 절대자가 아니다.
때문에 기도하는 인류는 혼란스러웠다.
미티어 블루에게 기도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이 바라는 형태가 되어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개전 이전에 바라던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와는 달랐다. 현재 인류가 미티어 블루에게 바라는 것은 죄다 전쟁에서의 승리뿐이었으니까.
나는 어제 미티어 블루를 보았다. 신이라고는 하지만 겉모습은 작은 소년이었다.
미티어 블루는 지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웃고 있었다.
살아온 세월이 길진 않지만 난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건 정말로 즐거워서 웃는 것이 아니다. 모두를 안심시키기 위해 억지로 쥐어짜 낸 웃음이다.
나는 생각했다.
동물신들은 정말로 슈퍼 히어로구나. 영웅이구나.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다.

8월 12일.
헤이스팅스 요새가 결국 함락 당했다.
통합 사령부는 이 대륙 자체를 포기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8월 13일.
강아지를 지켜보는 고양이 화이트 로커스의 존재가 포착되었다. 그것도 최악의 형태로 말이다.
전투에서 돌아와 용갑주 격납고에서 잠시 쉬고 있던 미티어 블루 앞에 화이트 로커스가 나타났다. 쓸데없는 짓 그만하라며 미티어 블루를 데리고 돌아가려고 했다. 싫다고 버티는 미티어 블루와 언쟁을 벌였다.
그 대화로 격납고에 있는 모두는 명확히 알았다. 동물신들은 정말로 인류를 버렸다. 미티어 블루에 이어서 다른 동물신들도 참전하지 않을까 하던 기대는 박살이 나 버렸다.
복잡한 일이었다.

9월 30일.
사람이 죽는 때는 언제일까.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질 때라는 이야기가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공감이 가지 않았다.
사람이 죽는 때는, 말 그대로 죽었을 때이다.
나는 폴을 기억하지만 폴은 이 자리에 없다.
연화는 지금도 폴 생각에 눈물을 흘리지만 폴은 죽었다. 돌아오지 못한다.
그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얄팍한 개소리.

10월 12일.
결국 통합 사령부는 대륙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바로 그날 반전이 일어났다.
태양의 왕과 달의 여왕의 등장이었다.

8월 17일.
정말로 오랜만에 일지를 적는다. 근 2년 만인 것 같다.
그사이에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세세한 전선의 변화 같은 것은 다른 기록에서도 많을 테니 다루지 않겠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저 기계장치의 신이다.
황금의 시대의 유산 중에 제네식 플렌트라는 것이 있다.
무한한 생산력을 기반으로 ‘희소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박살 낸 제네식 플렌트에 힘입어 황금의 백성은 지상낙원을 이 세상에 구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황금의 백성은 결국 제네식 플렌트를 봉인하였다.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지속적인 제네식 플렌트의 사용이 이 별 자체를 죽음으로 몰고 가기 때문이란다.
아무튼 제네식 플렌트를 봉인되었고, 인류는 다시 ‘희소성’이라는 것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연맹과 동맹으로 갈라져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움질을 벌이는 은의 시대로 돌입하였다.
서문이 길었다. 아무튼, 영웅의 시대의 인류는 제네식 플렌트의 봉인을 해제하였다. 그리고 그 무한한 생산력을 기반으로 하여 자신들의 신을 만들기로 하였다.
신을 만든다.
과연 신이 실존하던 세상의 존재들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구나.
기도를 바칠 대상이 없다면 만든다.
기적을 일으켜 줄 존재가 없다면 만든다.
과연 인간.
이것이 인간.
하지만 저것이 과연 신이 맞는 것일까.
인간의 만들어 낸 존재가 인간의 진실 된 신앙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모든 종교는 결국 인간의 상상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내게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그것과는 개념이 다르다.
기계장치의 신은 말 그대로 기계이다.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인공의 산물이다.
인간이 손에 넣은 것은 결국 신이 아닌 강력한 병기. 자신들을 지켜 줄 슈퍼 히어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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