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
소녀의 세상은 넓고도 좁았다.
아직은 팔도 짧고, 다리도 짧은 소녀에게 소녀의 집은 너무 컸다. 그리고 그 세상에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곤 소녀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소녀의 세상은 넓었다.
하지만 그 집이 소녀의 세상의 전부였다. 그래서 소녀의 세상은 좁았다.
소녀는 언제나 혼자였다. 아직 어린 소녀의 생에서 되돌아볼 세월이 얼마나 되겠느냐마는, 적어도 소녀의 기억에 소녀 외의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소녀에겐 가족이 둘 있었다. 하나는 아침을 약속하는 여명 호의 인공지능이었고, 다른 하나는 집의 중심부에 언제나 죽은 듯이 앉아 있는 남자였다.
소녀는 인공지능을 유모라 불렀고, 남자를 아빠라 불렀다.
유모는 승무원 생존 유지 장치를 기동해 소녀에게 의식주를 제공했다. 기계음으로나마 말과 언어를 가르쳤고, 그 밖에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었다.
아빠는 언제나 아무 말도 없었다. 하지만 소녀는 종종 아빠를 찾아갔다. 그 무릎에 앉아 혼자서라도 양껏 떠들었다.
혼자서 놀고, 혼자서 떠들고.
소녀는 언제나 웃었지만 언제나 외로웠다. 오랜 세월 동안 노후화된 인공지능은 천 년 전 부여받았던 감정을 대부분 상실한 상태였다. 말없는 아빠는 너무도 차가워서 소녀에게 온기를 나눠 줄 수 없었다.
어느 날인가 큰마음을 먹고 집을 나서 보려 했던 소녀는 집 밖에 펼쳐진 그저 하얗기만 한 벌판을 보고 집을 나서기를 포기했다. 아직 어렸던 소녀에게 집 밖은 감히 나설 엄두가 나지 않는 곳이었다.
그날 이후로 소녀는 예전처럼 늘 웃기만 하진 않았다. 가끔씩은 훌쩍이며 울었다.
그리고 점점 우는 날이 늘어 가던 어느 날, 소녀가 아빠의 무릎에 앉아 깜박 졸고 있던 날,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녀는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소녀의 눈앞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보였다. 검은 야구 모자와 검은 티셔츠, 하얀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이었다.
잠시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던 소녀는 이내 확신했다. 여인을 와락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엄마!”
여인은 그런 소녀를 마주 안아 주었다. 따스한 온기를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소녀의 등을 토닥이며 이렇게 말했다.
“언니는 네 엄마가 아니야.”
소녀는 이번에도 깜짝 놀라 여인의 가슴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녀의 머리칼은 순백이었고, 여인의 머리칼 역시 순백이었다.
소녀의 눈동자는 한쪽은 빨갛고, 한쪽은 파랬다. 하지만 여인은 양쪽 모두 붉었다.
소녀는 혼란을 느꼈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여인의 말이 맞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여인은 그런 소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이마에 쪽 소리 나게 뽀뽀를 해 주었다.
“이름이 뭐니?”
“시안.”
“그래, 시안. 예쁜 이름이네?”
칭찬에 소녀, 시안은 해맑게 웃었다. 여인의 가슴에 다시금 얼굴을 파묻으며 물었다.
“그럼… 엄… 아니, 언니는 이름이 뭐야?”
여인은 안고 있던 소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최고라고밖에 표현 못할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로드 카시리온. 친한 사람들은 로카라고 부른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