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7.
여자는 멍한 얼굴로 실험실의 하얀 벽을 바라보았다.
하얗고 짧은 천 쪼가리 밖으로 드러난 가늘고 긴 팔다리는 상처투성이였다. 아니, 사실 얼굴을 제외한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여자는 엘프였다.
은의 시대에 다목적으로 만들어진 타입 엘프 가운데서도, 전투를 상정해 만든 요정왕 시리즈의 최고 걸작이었다.
여자에게는 사자심왕이라는 이명이 있었다. 레이그란츠라는 이름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선 아무도 그녀를 그런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은의 시대의 인류는 둘로 갈라져 길고 오랜 싸움을 반복하고 있었다. 황금의 시대처럼 하나 된 번영 같은 것은 없었다. 연맹과 동맹이라는,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나 싶은 두 세력은 수백 년 동안 질리지도 않고 처절하게 싸웠다.
레이그란츠는 연맹의 병기였다.
태어나자마자 전쟁터에 투입되었고, 그 이후 수십 년 동안 단 하루도 전선을 떠난 적이 없었다. 전장은 지상에 펼쳐진 지옥이었다. 깔끔하고 아름답고 숭고한 죽음 따위는 없었다. 더욱이 병기로서 투입된 엘프들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했다. 인류에게 있어 엘프는 소모품이었으니까.
그래도 레이그란츠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하나라도 더 많은 동족을 살리기 위해, 하나라도 더 많은 아군을 구하기 위해 언제나 최전선에서 맹렬히 싸웠다.
울고 싶을 때도 울음을 참았다. 언제나 웃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러하듯 한계는 존재했다.
11년 전 첫눈이 내리던 날, 레이그란츠는 동맹에 붙잡혔다.
분전 끝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었다. 연맹에서 동맹으로 팔아넘겨졌다. 휴전의 상징으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공물의 일부가 되었다.
레이그란츠는 연맹의 병사들에게 있어 붉은 수호신이었다.
레이그란츠는 동맹의 병사들에게 있어 최악의 흉적이었다.
실험실에 끌려온 첫날 레이그란츠는 처음 보는 남자에게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은 뒤 유린당했다. 그 남자는 자신을 자벨이라 말했다. 레이그란츠가 3년 전 목을 벤 월링턴 대장의 아들이었다.
실험실에는 레이그란츠에게 원한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레이그란츠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원한을 푸는 인류를 동정했다.
학문적 목적보다는 고통을 주는 데 주력한 실험이 나날이 이어졌다. 질리지도 않는지 매일같이 유린이 이어졌다.
5년째 되는 날, 레이그란츠는 한계에 봉착했다. 더 이상 웃지 못했다.
레이그란츠는 울었다. 어째서 자신을 팔아넘긴 것이냐며 연맹의 인사들을 원망했다. 자신이 그들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싸웠는데, 그 지옥 같은 전장에서 얼마나 많은 연맹의 목숨들을 지켰는데.
‘하지만 그만큼 많은 동맹의 목숨을 앗아 갔지.’
연맹에게 있어 레이그란츠 자신은 그저 물건에 지나지 않지. 소모품인 엘프들에게 영웅 같은 것은 필요 없으니까.
다시 5년이 지났을 때, 레이그란츠는 원망하는 것을 관두었다. 그냥 텅 빈 인형처럼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1년이 지난 어느 날, 자신 위에서 짐승처럼 헉헉거리는 사내들을 보며 레이그란츠는 문득 떠올렸다.
‘이제 죽는구나.’
그런 느낌이 왔다. 아쉬움이나 공포는 없었다. 그저 이제는 이 고통이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사내들이 떠나고 레이그란츠는 일어나지 못했다. 감은 눈 역시 뜨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푸른 눈의 남자가 내려다보았다.
남자는 가만히 앉아 손을 뻗었다. 레이그란츠의 붉은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나는 창천룡 무현.”
남자의 손에서 푸른빛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