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0.
헤이스팅스 요새는 함락되기 직전이었다.
일주일간에 걸친 괴들의 맹공으로 이미 요새는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다. 대륙 동남부의 무수한 요새들이 그러했듯이 헤이스팅스 요새 역시 존자들에게 함락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요새의 병사들은 싸우고 있으나 머릿속으로는 죽음을 생각했다.
이미 대륙 동남부는 괴멸했다. 인류의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중부 전선 최후의 보루라는 이곳 역시 이제는 끝이었다.
요새 사령관 제임스 중장은 말없이 앉아 스크린을 보았다. 푸른색은 인간이요, 붉은색은 적이었다.
푸른색이 너무 적었다. 중부 전선 최후의 보루를 지키기 위해 7개 함대와 30만의 전투용 클론 부대와 인류 최강의 전투함 ‘폭풍의 아성’이 참전한 것이 엊그제 같건만, 그것들은 더 이상 없었다. 모두 죽거나 부서져 사라졌다.
오퍼레이터들은 훈련받은 대로 상황을 보고했지만 목소리는 이미 절망에 젖어 있었다. 자리에 엎드려 흐느껴 우는 자도 있었다.
붉은색 점이 늘어만 갔다. 1만을 넘어 10만을 넘어 20만을 넘어 그 수는 이제 50만을 넘었다.
헤이스팅스 요새는 이제 함락되리라. 저 증오스런 열두 존자는 대륙 동남부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대륙 중부를 유린할 터였다. 인간들의 씨를 말리기 위한 학살 행위를 이어 나갈 터였다.
‘최후의 최후까지 항전하라. 그리하여 의무를 다하라.’
인류 연맹 통합 사령부로부터 보내진 최후 명령문을 보며 제임스 중장은 깊은 숨을 삼켰다. 괴들에게 잡아먹히는 최후는 사양이라며 3일 전 자살한 융 대장의 얼굴을 떠올렸다.
제임스는 기도하고 싶었다. 기적을 바라고 싶었다.
하지만 기도를 들어줄 신들은 인류를 버렸다. 동물신들은 인간들의 대지를 떠나 수호의지들이 잠들어 있다는 약속의 땅으로 떠났다.
때문에 기도할 수 없었다.
기도해도 기도를 들어줄 이가 없었다.
기적을 바라나 기적을 내려 줄 이가 없었다.
‘괴들을 최대한 요새 내부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자폭한다.’
소리 죽여 뇌까린 제임스는 자폭 스위치 위에 손을 가져갔다. 하나둘 사라져 가는 푸른색 점들을 보며 눈을 감았다.
닿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기도했다. 기적을 바랐다.
‘죽고 싶지 않아.’
요새에 있는 모두의 마음, 모두의 생각, 모두의 바람.
마침내 외벽이 파괴됐다. 괴들은 괴성을 토하며 헤이스팅스 요새의 메인 게이트에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온통 절망으로 물든 검은 하늘을 가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닿지 않을 기도에 응답하는 자가 하나 있었다.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기적을 일으키려는 자가 있었다.
“크허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포효가 세상을 뒤덮었다. 하늘로부터 강림한 한줄기 푸른 섬광이 괴들의 바다를 갈라놓았다. 수천에 달하는 괴들을 한순간에 소멸시키며 질주한 그것은 부서지기 직전의 메인 게이트 앞에 버티고 섰다. 백만을 헤아리는 괴들의 군세 앞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요새 안의 모두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시작으로 스크린에 비치는 작은 소년의 뒷모습에 참고 참았던 감정을 터트렸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울부짖었다.
소년의 이름은 견신 미티어 블루.
인류를 저버리지 않은 단 하나의 신.
인간을 지키는 강아지, 견신 미티어 블루는 다시 한 번 포효했다. 인류를 지키기 위한 싸움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