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필로그 (84/84)

에필로그

세이어와 레펜하르트의 장대한 사투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은의 현자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절대적인 믿음이 꺾인 그들에겐 더 이상 저항할 의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바슈탈론 제국, 그라임 왕국, 할라인 왕국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세렐라인과 레어폴 1세는 세이어 템플과 운명을 함께했으니, 황제를 잃은 바슈탈론 제국은 길리우스 황태자가 제위에 올랐다. 새 황제 길리우스 프라임 바슈탈론 3세와 안타레스의 재상 카를의 주도하에 패전 처리 협상이 시작되었다.

복잡한 외교적 절차를 거쳐 삼국은 상당한 크기의 영토를 빼앗기고 전후 배상금도 물게 되었다. 하지만 세 국가의 국력을 생각하면 무리한 요구라 할 수만은 없었다. 오히려 적당한 조건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카를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패전국에게 지나친 압박을 주면 오히려 부작용이 생긴다는 건 역사가 증명한다. 영토와 배상금은 어디까지나 동맹인 크로방스와 바실리 왕국을 위한 것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안타레스가 요구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모든 이종족 노예 제도를 철폐하라.

마침내, 공식적으로 대륙의 모든 이종족 노예는 사라졌다. 레펜하르트가 꿈꾸던 현실이 세상에 펼쳐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다.

그리고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 ☆ ☆

바실리 왕국 수도, 세일류드.

화창한 초여름의 햇살이 사방으로 내리쬐는 이 아름다운 도시는 지금 축제의 열기가 한창이었다.

거리 곳곳에서 춤과 노래가 흐른다. 광장의 분수마다 맥주와 와인이 넘치고 수많은 인파가 광장을 거닐며 흥겹게 뛰어논다.

미와 사랑의 여신, 필라넨스의 축복이 지상에 내린 ‘여신의 기적’을 축하하는 축제였다.

안타레스의 옛 수도가 위치했던 황량한 아렌드 평야, 그곳은 여신의 기적이 내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변했다. 비록 필라넨스의 성직자들이 겸허하게 그 은총을 여신께 돌려 그 자취는 사라졌으나, 필라넨스의 가호가 이 땅에 임했음은 부동의 사실이었다. 정세가 안정되고 난 뒤 필라넨스 교단은 매년 축제를 열어 그날의 기적을 기념하고 있었다.

이제 축제의 중심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가 열린다.

여신께서 그 누구보다 사랑하시는 자, 필라넨스의 지상 대행자가 광장에 모인 모든 시민들에게 축복을 내리는 순간이다.

드넓은 중앙 광장에 수많은 인파가 빽빽이 들어찼다. 하급 신관 하나가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필라넨스의 지상 대행자, 마르시스 1세께서 나오십니다!”

이윽고 신전이 열리고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금실로 수놓은 순백의 법복을 입고 찬란한 붉은 머리를 곱게 땋아 어깨 위로 늘어트린, 여인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사내였다.

“오오!”

“교황 성하시다!”

현재 대륙에서 가장 큰 교세를 지닌 필라넨스 교단의 교황, 실란 필 마르시스 1세가 광장을 바라보며 천천히 신성한 기도를 올린다.

“아름다운 여신의 자식들이여…….”

분홍빛 성광이 빛의 기둥이 되어 하늘을 치솟고 구름을 뚫는다. 그리고 이내 광장 전체에 은은히 내려앉는다.

“필라넨스의 은총이 여러분께 영원하기를.”

한때 대륙의 주도권을 잡았던 세이어 교단.

인류의 신을 섬기던 이 교단은 철저하게 몰락해 버렸다. 세이어가 사라지며 그가 베풀던 신의 기적도 사라졌으니, 더 이상 세이어의 이름으로 발하는 신성 주문은 효력이 없었다.

무수한 세이어의 성직자들이 하루아침에 무능력자가 되었다.

-아아, 세이어시여!

-어찌 우리를 버리시나이까!

대부분의 세이어 신관들은 패닉에 빠져 울부짖었다. 신께 올리는 기도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힘을 잃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신으로부터, 세이어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세인들 역시 세이어가 교단의 타락을 보다 못해 천벌을 내렸다며 수군거렸다.

세이어 교단은 감히 저 말에 반박을 하지 못했다.

어차피 실상을 모르는 이들은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실상을 아는 자들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위대한 인류의 신이 한낱 인간의 손에 죽어 버렸다는 사실을 어찌 알린단 말인가?

그래도 일반인들은 여전히 세이어를 인류의 창조주로 믿고 있었으니 세이어 신앙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이 필요할 땐 신성 주문을 베푸는 다른 교단을 찾아갔다.

사라진 것은 세이어가 관리하던 우주의 알, 오리지널 아카식 드라이브뿐이다. 일만 이천 년 전 독립한 엘디아며 알 포트, 필라넨스 등 차원과 공간 너머에 존재하는 다른 아카식 시스템은 여전히 신과 여신으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세이어 교단에 눌려 있던 다른 여덟 교단이 대륙 각지에서 위세를 떨쳤다. 그중에서도 가장 교세가 큰 곳이 필라넨스 교단이었다.

안타레스 추기경, 실란 필 마르시스.

그는 아름다운 여신의 기적을 세상에 내렸고, 수많은 이종족에게 필라넨스의 뜻을 설파해 세상을 바꾸는 데 일조했다. 세이어와의 사투가 알려지지 않았다 해도 실란의 업적은 이미 대륙을 진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자연스럽게 교단은 실란을 새로운 교황으로 추대했다. 업적도 위명도 능력도 충분했다. 아니, 다 필요 없고 그냥 여신의 기적 하나만으로도 감히 반대할 이는 없었다.

그 누가 있어 여신의 뜻을 직접 이 땅에 내리겠는가? 필라넨스의 전 교황조차도 기쁘게 교황위를 양도했다.

-비로소 이 자리가 올바른 이에게 향하는도다.

당연히 실란도 처음엔 거절했다. 이제 고작 20대, 심지어 겉보기엔 여전히 10대로 보이는 실란이었다. 교황이란 중책을 맡기엔 너무 어린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필라넨스 교단이 성장하기 위해선 그가 교황이 되는 것이 최선이다. 교단은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실란의 고집은 꺾였다.

분홍빛 성광이 광장 전체를 어루만진다. 거룩한 성광 속에서 시민들, 필라넨스의 신도들은 기뻐했다. 미사가 끝나고 실란이 다시 신전 내로 돌아갔다.

견습 신관 둘이 실란의 법복 위의 예전을 받아 들었다. 다른 고위 신관들도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수고하셨습니다. 마르시스 성하.”

“남은 건 축제의 폐회식뿐이군요. 좀 쉬시지요.”

신전 안쪽에서 예쁘장한 푸른 피부의 트롤 여인이 폴짝거리며 그에게 뛰어온다.

“어, 끝났어, 실란?”

그녀의 불경한 말투에도 다른 신관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상대는 인간도 아니고, 또 하루 이틀 봐 온 광경도 아니었으니까.

“그래, 끝났다. 티티마.”

아틸카의 후계자, 티티마는 여전히 실란과 지내고 있었다.

세상을 떠돌며 스스로의 기량을 키우는 것이 트롤 구루의 수행법이다. 티티마가 선택한 것은 실란 곁에 머물며 그의 힘을 느끼고, 새로운 주술적 깨달음을 얻는 것이었다.

‘뭐, 말은 저렇게 하지만 그냥 같이 있는 게 편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구시렁대며 실란은 걸음을 옮겼다. 자기 방으로 가 쉴 생각이었다. 나이 든 신관들이 따라나서며 말을 건넨다.

“참으로 훌륭한 신성력이었습니다.”

“감동했습니다, 성하.”

“성하의 위엄이 날로 커져 가니 저희도 절로 어깨가 으쓱여지는군요, 허허허.”

실란은 눈을 찌푸렸다. 이 노인네들이 뭔가 칭찬을 하고는 있는데, 그는 이 작자들이 왜 이리 말을 돌리는지 잘 아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본론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교황 성하…….”

“언제쯤 성혼을 하실 생각이신지…….”

“아직 젊으시긴 하지만 그래도 슬슬 성무를 행하셔야…….”

교단 중엔 성직자의 결혼을 금하는 곳도 있지만, 필라넨스 교단 같은 경우는 오히려 결혼이야말로 신관의 의무 중 하나다. 필라넨스는 미와 사랑의 여신, 자신의 사랑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자가 어찌 타인의 사랑을 논하겠는가?

그동안 실란은 워낙 나이가 어리다 보니 아직 결혼 의무에 대해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압박이 들어온다.

“아니, 뭐 저도 좋은 사람 만나면 결혼하고 싶죠. 네.”

그런데 좋은 사람 만나기가 쉬워야 말이지? 결혼이란 게 인륜지대사인데 아무하고나 막 할 순 없는 노릇이다. 이래저래 만남도 가져 봤지만 그간 딱 느낌이 오는 경우가 없었다. 솔직히 실란의 나이가 아직 20대란 걸 감안하면 별로 특이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신관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음, 역시 성하께선 아직 그분을 잊지 못하여…….”

“물론 진정한 사랑은 성별도 초월한다지만…….”

“그분은 이미 결혼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니…….”

“곤란합니다. 필라넨스의 교황이 불륜 스캔들에 휘말리면 그 파장이…….”

실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노신관들을 바라보았다. 이젠 부인하기도 지친다.

“네, 네. 저 그럼 들어가서 쉽니다!”

노친네 잔소리에서 후다닥 도망 나와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간다. 의자에 걸터앉아 머리를 긁적이며 실란이 투덜거렸다.

“알아서들 생각하라지, 흥!”

“왜 그래, 실란?”

어느새 방 안에 들어온 티티마가 실란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분명 방 들어오자마자 문 걸어 잠갔는데 어떻게 저기 서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역시 하루 이틀 일이 아닌지라…….

“그냥 사는 게 너무 피곤해서 그래, 티티마.”

“실란은 쓸데없이 고민이 많아. 근데 왜 안 늙지? 보통 고민 많으면 빨리 늙어야 하는 거 아냐?”

“난 좀 근엄해 보이고 싶거든? 도대체 왜 내 얼굴엔 주름 하나 안 생기는 거야?”

이놈의 피부는 굉장히 대충 관리하는데도 언제나 매끈하기 그지없다. 장발의 머리칼 또한 그렇다. 여전히 아무리 잘라도 잘라도 하룻밤 자면 원상 복구된다. 이왕 이렇게 될 바엔 머리칼 매일 잘라 가발로 팔아 교세에 보태 볼까 하는 생각도 해 봤는데, 자른 머리칼은 하루가 지나면 흔적도 없이 소멸해 있었다.

‘진짜 여신께서 뭔 짓 하시나?’

실란이 허공을 힐끔거렸다. 티티마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 말, 딴 여자들에게 하면 밤에 칼 들고 찾아올지도 몰라.”

“그래서 너한테만 하잖냐.”

“난 여자도 아니냐? 흥흥!”

“……?”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고 실란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축제로 인해 들뜬 거리를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거 레펜 씨가 한 짓이잖아? 이래도 되는 거야?’

사실 그 여신의 기적은 순 레펜하르트가 저지른 짓이고 필라넨스랑은 전혀 상관없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일이 커져서 축제일까지 지정되어 버린 것이다. 참 거국적으로 사기 치고 있는 기분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교단에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고…….’

진실이야 어찌 되었건 시민들은 즐거워하고 있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부유한 이도 가난한 이도 모두 한마음으로 축제를 즐긴다. 거리 한쪽에선 귀족가 하인들이 거리의 부랑아들 상대로 음식을 나누어 주는 모습도 보인다. 축제 덕분에 굶주린 고아들도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게 되었다.

실란은 속 편하게 신경 끄기로 결심했다.

“에라, 다들 기뻐하면 된 거지, 뭘.”

☆ ☆ ☆

아이들에게 빵을 나눠 주며 귀족가 하인들이 호통을 쳤다.

“1인당 하나씩이다. 새치기하지 말고!”

허름한 옷차림의 아이들이 감사해하며 빵을 받아 들고 고개를 숙였다. 비록 싸구려 흑빵이었지만 족히 어른 머리통만 한 크기였다. 아껴 먹으면 족히 이틀은 굶주리지 않을 수 있으리라.

흩어지는 부랑자 아이들 속에 한 소녀가 있었다. 검은 머리에 평범한 얼굴, 살짝 주근깨가 있어 발랄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나이는 열서너 살 정도? 부랑자 아이들 사이에 섞여 빵을 받은 소녀가 종종 걸음으로 뒷골목으로 향했다.

지저분한 뒷골목의 한 건물 그림자 아래, 넝마로 만들어진 천막 같은 것이 보였다. 부랑자 소녀의 집이었다. 가슴팍에 흑빵을 안고 소녀가 기쁜 얼굴로 천막을 걷었다.

“빵 얻어 왔어!”

때가 탄 천막 안에는 열두 살 정도로 보이는 잘생긴 소년이 앉아 있었다. 갈색 머리에 검은 눈동자, 묘하게 고집 세 보이는 인상의 소년이었다. 소녀가 빵을 찢으며 중얼거렸다.

“같이 갔으면 빵을 두 개 받아 올 수 있었을 텐데…….”

소년이 눈을 부라렸다.

“비록 이런 꼴이 되었지만 자존심은 남아 있다. 구걸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래 봤자 구걸해 온 빵을 나눠 먹는 입장에서 이미 자존심은 사라진 거 아닌가?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소녀는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대신 빵을 두 조각으로 나눠 큰 쪽을 소년에게 건넨다.

“얼른 먹어. 배고프지?”

벌써 사흘째 제대로 된 걸 먹어 본 적이 없는 두 사람이다. 소년이 머뭇거리더니 빵조각을 낚아챘다. 처음엔 조금씩 뜯어 입가에 가져가더니, 어느새 통째로 들고 정신없이 베어 문다.

“웁, 웁웁!”

그리고 가슴을 두들긴다. 아무래도 목이 메었나 보다. 소녀가 물병을 건네며 배시시 웃었다.

“천천히 먹어, 테스론.”

물을 삼킨 뒤 소년이 그녀를 힐끔거렸다.

“너도 어서 먹어라, 필레나.”

“응, 응!”

레펜하르트에 의해 살해당했던 그날, 필레나는 테스론과 함께 완전히 소멸한 것처럼 보였다. 세이어도 그녀와 테스론이 사라졌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한 기만이었다.

처음부터 필레나는 세이어를 전혀 믿지 않았다. 충성을 바치고, 복종하고,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행하며 입안의 혀처럼 굴 때도 뒤로는 다른 수단을 마련하고 있었다.

몰래 테스론의 새로운 육신을 만들었다. 그 옆에 자신의 육신도 함께 만들어 뒀다. 세이어의 눈을 피하기 위해 우주의 알이 아닌, 대륙 남부의 버려진 고대 유적을 이용했고, 공간 포털을 연결시켜 언제라도 영혼을 옮길 수 있게 준비해 두었다.

물론 그녀가 일부러 레펜하르트에게 패한 것은 아니다. 원래는 테스론이 더 이상 테스론이 아니게 되기 전, 그와 함께 죽고 싶다는 식으로 나갈 작정이었다. 다행히 좀 더 자연스러운 상황이 연출되어 아무 의심도 받지 않고 그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열두 살의 소년이 된 테스론이 빵을 씹다 말고 투덜거렸다.

“제길, 이런 몸으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

어깨를 움츠리며 필레나가 눈치를 보았다.

“미, 미안해.”

그녀가 원래 준비한 육신은 이런 어린 나이가 아니었다. 한창 때의 젊음을 지닌, 20대 남녀의 육체였다.

하지만 당시의 필레나는 레펜하르트에게 지나치게 타격을 입었다. 그 덕에 자연스럽게 세이어의 눈을 피한 것은 좋은데, 대신 원래의 부활 계획에도 차질이 생겼다.

역류한 아카식이 그녀의 흑마력을 오염시켜 일종의 저주가 된 것이다. 육신의 나이도 줄어들고 오러와 마법을 사용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저 부활하게 된 것만도 천운이었다.

그 결과 테스론과 필레나는 아무 힘도 없는 10대 초반의 어린아이로 되살아났다. 7년이 지난 지금이라면 그래도 10대 후반으로까지는 성장해야겠지만…….

“도대체 이 몸은 언제 자라는 거야?”

테스론이 한숨을 쉬었다. 필레나가 더더욱 몸을 사렸다.

“나,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테스론과 오래 함께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선주 종족의 인자를 넣은 것이 문제였다. 지금 테스론과 필레나는 인간의 몸이면서, 동시에 선주 종족의 수명을 지닌 것이다.

애초에 메테우스 박사가 세이어를 만든 목적 중 하나가 저것이었는데, 그걸 혼자 힘으로 성공해 버린 필레나였다. 어떤 의미에선 그녀야말로 은의 시대조차 초월한 무시무시한 천재라 하겠다.

뭐, 의도는 좋았는데 결과적으로 인생 꼬이는 상황이 되었다.

남들보다 네 배나 수명이 길다 보니 7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10대 초반의 어린 몸이다. 그렇다 보니 한 곳에 머물지를 못한다. 인간이면서 엘프나 드워프 같은 수명을 지닌 이들이 있다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 경우, 레펜하르트에게 그들의 정체가 발각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덕분에 지난 7년간 이들은 세상을 떠돌며 부랑아로 지내야 했다. 아카식의 저주는 여전히 둘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어, 아무리 머릿속에 지식과 지혜가 있어도 오러나 마법을 되살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테스론은 포기하지 않았다.

“기다려, 필레나.”

열심히 배를 채우며 눈을 빛낸다.

“이 저주만 사라지면 내 힘도 돌아온다. 그럼 더 이상 이런 고생은 시키지 않아. 부귀영화를 안겨 주지.”

필레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어찌 되건 상관없었다.

세상엔 오러 유저와 마법사보다 아무 힘도 없는 일반인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리고 그들 대다수는 힘겨운 삶 속에서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고 있다. 오러나 마법의 힘만이 행복을 재는 척도는 아니다.

“괜찮아, 난 지금도 만족해. 테스론.”

부귀영화 따윈 원치 않는다. 매일 배를 곯고 더러운 길바닥에서 자도 괜찮다. 그녀는 이미 절망의 바닥을 보았다. 현실이 아무리 고달프더라도, 지금은 그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기쁘고 즐겁다.

“에헤헤…….”

마침내 자신의 곁으로 돌아온 소중한 이를 보며 필레나는 그저 웃었다.

☆ ☆ ☆

한때 바실리 왕국과 안타레스 공국을 가르던 국경 지대, 재쿼드 평원은 이제 영토 변경으로 인해 안타레스의 중앙에 위치하게 되었다. 구舊 엘드릴 가드가 위치했던 테르마니아 관도와 협곡 사이에 커다란 도시가 세워졌다.

대륙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던 바슈탈론의 수도, 엠퍼러란드보다도 더욱 장대하고 아름다운 도시.

안타레스 제국 황도, 레펜하임이었다.

무조건 항복을 내건 종전 협정 후, 2년 만에 바슈탈론 제국은 왕국으로 격하되었다. 제국에 칭제의 권위를 안긴 것이 세이어 교단인데 그 교단이 몰락했으니 제국도 더 이상 명분이 없는 것이다.

대신 새로운 제국이 탄생했다.

필라넨스의 권위하에 안타레스 공왕 레펜하르트가 칭제를 선포했으니 그는 황제 레펜하르트 1세가 되었다. 안타레스 역시 부서진 아라난 그라드 대신 더욱 웅장한 제국의 수도, ‘레펜하르트의 도시’ 레펜하임을 건설하고 수월하게 제국으로 발돋움했다. 레펜하르트는 끝까지 아라난 그라드란 이름을 고집했지만 이번엔 카를의 결사반대에 가로막혔다. 공국 시절이면 모를까, 제국 수도라면 무조건 건국 황제의 이름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레펜하임 갑시다! 레펜하임!

-싫소! 부끄럽단 말이오!

-자기 성은 안타레스의 지배자라고 지어 놓은 양반이 이제 와서 뭐가 부끄럽다는 겁니까?

-그, 그거랑 이거는 다르지! 그건 그냥 각오하겠다는 의미고…….

-안 달라요. 똑같습니다. 제발 좀 그 이상한 감각 버리시라니까요?

-기분상의 문제야!

-제가 여기까진 말 안 하려고 했는데…… 폐하께서 전에 말씀 안 하셨습니까? 앞으론 제가 뭐라고 하건 토 안 달겠다고?

-앗, 치사하게 그때 이야기를 지금 꺼내다니.

……결국 카를의 뜻이 관철되었다.

그렇게 안타레스 제국이 건국된 지 5년째.

황도 레펜하임의 중심에 위치한 황궁 가이라크에서 웅장한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황궁의 심장부, 심연의 전당.

거대한 홀 상단의 화려한 옥좌 앞에서 시종장이 큰 소리로 외친다.

“엘븐하임의 군주, 엘프와 정령의 수호자, 세계수의 관리자, 엘븐 포레스트의 영주, 엘프 여왕 시리스 발렌시아이십니다!”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갈색 피부의 백금발 엘프 소녀가 중앙 홀로 들어선다. 그 뒤를 백색 관복을 걸친 한 무리의 엘프 남녀가 따라온다. 안타레스 제국 자치령, 엘븐하임의 엘프들이었다.

안타레스 제국이 설립된 지도 어언 5년, 스펠라트 사막은 세계수 니힐렌의 힘으로 초목이 무성한 푸른 대지로 재탄생했다. 세계수를 중심으로 고대의 엘프 왕국이 재건되었고, 이는 안타레스 제국으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시리스 여왕을 필두로 엘프들은 충실히 번영의 길을 걷고 있었다.

시종장의 외침이 이어진다.

“그랜드해머의 지도자, 드워프와 대지의 수호자, 알 포트의 지상 대행자, 마켈린 포트 해머라인 교황 성하이십니다!”

전쟁이 끝난 후 드워프들은 부서진 그랜드 포지를 재건했다. 다른 종족의 도움을 받아 마켈린의 지도하에 힘을 합치니,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웅장한 지저도시가 건설되었다. 이 새로운 도시는 그랜드해머라 명명되었고, 동시에 그 명칭은 안타레스 제국 휘하 드워프 자치령의 이름이 되었다.

“자연의 추구자, 트롤의 대표자, 대수해大樹海의 인도자, 대大구루 아틸카이십니다!”

다른 종족들이 정치 체제를 갖추고 왕국을 건설하는 반면, 트롤들은 여전히 부족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종족과의 연계를 위해서 어느 정도 정부의 형태를 지닌 체제는 필요했다. 그래서 트로리아드와 대수해 플룬탄pluntan에서 존경받는 여러 트롤 구루들이 아틸카와 함께 대표 의회 형태로 일하고 있었다.

“오크라트의 제왕, 페틀랜드의 패자覇者, 검과 오크의 지배자, 칼켄의 검을 이은 자! 오크 대족장 다이카루가 타시드이십니다!”

오크라트를 재건한 뒤 모든 오크들은 타시드를 중심으로 힘을 합쳤다. 드넓은 페틀랜드에 안타레스 오크 자치령을 건설하고 열심히 조상의 전통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

엘프, 드워프, 트롤, 오크.

안타레스의 깃발 아래 뭉친 네 종족은 제국 건설 후 저마다 자치적인 정치 체제를 갖췄다. 인간의 영역은 황제 직할령이 되었으니, 다섯 종족이 자율적으로 살면서도 서로 긴밀히 연계하는 체제가 완성되었다.

마지막으로 시종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칭호가 길었던 다른 이들과 달리 이번엔 꽤 간략했다.

“안타레스의 군주, 우리들의 황제, 레펜하르트 1세…….”

잠깐 목을 가다듬은 후 시종장이 외침을 잇는다.

“……의 대리자, 카를 재상이십니다!”

2미터에 달하는 근육질 거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허리까지 드리우는 검은 수염에 건장한 체구, 누가 봐도 무식한 장수로만 보이지만 사실은 대륙에서 가장 현명한 자라 불리는 안타레스 제국의 재상, 카를이었다.

카를이 모인 이들을 향해 양손을 펼쳤다.

“반갑습니다. 위대한 안타레스의 동맹들이여.”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모인 이들이 살짝 목례한다. 동시에 시리스와 마켈린, 아틸카와 타시드가 카를과 눈빛을 교환했다.

‘레펜하르트 님은 올해도 안 나와요?’

‘아주 그냥 업무에서 손 놨네?’

‘작년에도 못 뵌 것 같은데…….’

‘황제가 너무한 거 아니유?’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행사는 시작되었는데.

시종장이 마지막으로 목청을 높였다.

“제5차 제국 회의를 개시하겠습니다!”

해가 저물 때가 되어서야 제국 회의 1일 차 일정이 모두 끝났다. 복잡한 외교 회의와 담화를 몇 시간이나 지속한 뒤, 각 종족의 수장들은 겨우 업무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저녁노을이 비치는 황궁 가이라크의 한 거실.

정갈한 응접실에 각 종족의 수장들과 카를이 모여 있었다. 테이블에 풀썩 엎어지며 시리스가 구시렁댔다.

“아우, 힘들다아…….”

옆에서 타시드도 뻐드렁니를 득득 갈며 비슷한 소릴 해 대고 있다.

“머리 아파, 머리 아파.”

반면 아틸카나 마켈린은 태연했다. 그들은 세상이 바뀌기 전에도 어차피 비슷한 업무를 해 온 것이다. 역시 경험은 중요하다.

마켈린이 웃으며 두 사람을 타박했다.

“힘들어도 참으시게. 무릇 수장의 자리에 오른 이라면 응당 해내야 할 의무가 아닌가?”

카를 재상도 한마디 첨언한다.

“다른 이들의 위에 선 자가 자기 편의대로 막 살 순 없지요.”

“그 말, 설득력 없다는 거 카를 재상도 알죠?”

시리스가 눈을 흘겼다. 세상 모든 왕국과 제국이 다 저 소릴 해도 안타레스는 그럴 수 없다. 당장 그들이 섬기는 위대한 황제 폐하부터가 이미 자기 편의대로 막 살고 있지 않은가?

카를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여러분이 자기 손으로 신을 죽이고 세상을 구원할 수 있으면 막 살아도 됩니다.”

“쳇, 그렇게 나오다니.”

“……그래요, 평범한 사람은 평범하게 살아야지.”

참 할 말 없게 만드네. 타시드와 시리스가 다시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그때 응접실 문이 열리며 작은 드워프 여인이 티 세트를 들고 나타났다.

“여러분, 차 드세요.”

여인이 티 세트를 테이블 위에 세팅한다. 그녀를 본 시리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틸라 언니, 오랜만이에요!”

“꺄, 시리스, 오랜만!”

손을 잡고 두 사람이 소녀처럼 폴짝폴짝 뛴다. 찻잔을 들며 아틸카가 송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허, 재상 부인께서 어찌 직접 이런 일을…….”

6년 전, 결국 카를은 틸라의 아버지로부터 결혼 승낙을 받아 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두 사람은 금슬 좋게 행복한 부부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종족이 다르다 보니 자식이 없다는 것인데…….

“그거 폐하께서 조금만 기다려 보라고 하셨어요. 연구 성과가 곧 나올 거 같다고.”

희망찬 틸라의 말에 시리스도 환하게 웃었다.

“헤에, 저도 이모가 되는 거네요?”

히죽거리는 두 여인을 보다 말고 문득 아틸카와 마켈린이 의아해했다.

“그런데 올해는 어째 황후께서 안 보이시더구려?”

“듣고 보니 그렇구려, 이니야 씨는 이런 행사 빼먹을 성격이 아닌데.”

전쟁이 끝나고 1년 뒤, 레펜하르트와 이니야는 실란의 주도하에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안타레스가 제국이 되자 이니야도 정식으로 황후가 되었고, 요 근래 계속 레펜하르트의 황제 대행을 맡고 있었다. 작년에 이들이 만났던 황제 대리도 그녀였다.

그런데 어째 올해는 통 보이질 않는 것이다.

틸라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황후께선 독수공방 너무 길다고 폐하 쫓아가셨어요.”

다들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럼 거기 가 있겠네요?”

“그러게, 거기.”

타시드가 그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러스 녀석도 올해는 거기 가 본다고 하던데…….”

☆ ☆ ☆

바실리 왕국 남부, 라키드 산맥의 깊은 험지.

인적 없는 산길을 따라 한 사내가 걷고 있었다. 평범한 여행복 차림의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잘생긴 사내, 대륙 최강자 중 하나로 명성이 높은 검제劍帝 사이러스 폰 테네스였다.

산길 주위를 둘러보며 러스가 중얼거렸다.

“음, 경치 좋네. 그런데 대체 어디야?”

사투의 날 이후 러스는 안타레스를 떠나 가문으로 돌아갔다. 유서스의 죽음으로 인해 후계자가 그밖에 남지 않았던 탓이었다.

아라난 그라드 최후의 날, 유서스는 안타레스 황궁 감옥에 갇혀 있었다. 똑같이 붙잡혀 있던 현자 브렉티스는 오러 유저라 그 참상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유서스는 마갑이 없으면 그냥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결국 세이어의 아토믹 버스트에 의해 유명을 달리했다.

이후 안타레스 제국은 공식적으로 황금기사 유서스의 사망을 발표했다. 그가 쓰던 마갑 엘드라드며 엘드릴 기간투스를 제국 재상 카를이 대놓고 사용 중이었으니 모른 척 입 닫고 있을 순 없었다. 후계자를 잃은 테네스 가문은 몇 번이나 러스를 불렀고, 아무리 가문에 미련 없는 그라도 부모의 부름마저 거부할 순 없었다.

러스가 돌아오자 테네스 가문도 재건에 들어갔다. 폴트 테네스 가주가 복권되었고 러스도 정식 후계자가 되었다. 굳이 안타레스에 마갑 엘드라드의 반환을 요구하진 않았다. 일단 명분도 없었고, 게다가 돌아온 러스야말로 세계 최강의 오러 유저 중 한 명이 아닌가? 이미 오러의 길을 다시 찾았는데 굳이 황금갑옷에 얽매일 이유가 없다.

돌아온 러스는 스스로의 경험을 정립해 테네스 가문에 새로운 검술을 남겼다.

전생 땐 워낙 홀로 잘난 검성이신지라 평범한 이들을 위한 검술 따위 만들지 못한 사이러스였다. 하지만 이번 생에선 여기저기 치이고 죽도록 고민하고 노력하며 힘을 얻은, 약자의 기분을 매우 잘 이해하는 사이러스가 되었다. 깔끔하게 가문의 검술을 만들 수 있었다.

어느 정도 가문이 안정을 되찾자 러스는 다시 떠났다. 자신의 기량을 높이고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대륙 각지의 강자들과 만나 대련을 펼쳤다.

검성 바나텔도, 중압의 기사 키린트도 사라진 현 대륙에서 그는 틀림없이 다른 오러 유저를 압도하는 최강자 중 하나였다. 세인들은 그에게 검제라는 칭호를 붙여 경의를 표했다.

검성이 아니라 굳이 검제라는 새로운 칭호로 불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미 검성의 지위는 다른 여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아, 저긴가?”

걸음을 옮기다 말고 러스가 산기슭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능선 가운데 공터가 보였다. 화려하진 않아도 튼튼하고 정갈한 2층 집 세 채와 커다란 연무장이 설치된 곳이었다. 저택이라 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곳이 인적 드문 깊은 산속이란 걸 감안하면 도대체 어떻게 저런 걸 지었는지 의문스러운 광경이었다.

어쨌건, 목적지가 반대편에 보인다는 의미는…….

“……이 산이 아닌가벼?”

혀를 차며 러스가 발을 굴렸다. 가볍게 허공으로 떠올라 숲 위로 날아간다. 나무 꼭대기를 사뿐사뿐 밟으며 러스는 순식간에 반대편 산에 도착했다. 족히 수백 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리를 몇 걸음 만에 주파해 버린 것이다.

“으차!”

재차 하강해 러스가 공터에 안착했다. 그곳엔 한 여인이 빨래를 널고 있었다. 그녀가 러스를 보더니 눈을 떴다.

“어머나?”

뾰족한 귀에 보랏빛 머리를 지닌, 놀라운 미모의 엘프 여인이었다. 머리를 틀어 올려 나무 비녀를 꽂고 원피스에 앞치마만을 걸친, 상당히 수수한 차림임에도 그 미모는 조금도 퇴색하지 않았다.

여인이 화사하게 웃었다.

“오랜만이네요, 러스 경?”

러스도 미녀를 향해 정중히 목례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수님.”

그녀야말로 러스로 하여금 검제라는 새로운 칭호를 얻게 한 이.

안타레스 제국 황후, 검성 이니야 엘 에네밀러스였다.

“아유, 나 좀 봐. 손님 왔는데 아무 준비도 못 했네.”

이니야가 호들갑을 떨며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제가 며칠 일찍 왔으니까요. 신경 쓰지 마세요.”

대꾸하며 러스는 이니야가 널어놓은 빨래들을 힐끔거렸다. 아무래도 딱히 시중인 따윈 두지 않고 스스로 모든 살림을 하는 것 같았다. 거대한 제국의 황후, 위대한 검성의 지위,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삶은 소박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이 깊은 산속까지 물자 날라서 2층 집을 세 채나 지은 시점에서 이미 소박함과는 거리가 먼 것 같지만, 하여튼 겉보기엔 그렇다는 소리다.

“자, 일단 앉아요. 아직 집 안은 청소가 덜 되어서…….”

얼굴을 붉히며 이니야가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순식간에 얼음으로 된 근사한 티 테이블과 의자가 생겨났다. 오러 물질화의 권능이다. 새삼 감탄하며 러스가 얼음 의자에 앉았다.

‘실력은 여전하시네.’

그리고 한 번 더 감탄했다.

‘아니, 더 느셨군.’

얼음이 차갑지 않다. 얼음이라기보단 아름다운 수정으로 조각한 의자에 가까운 느낌이다. 단지 얼음을 생성하는 것을 넘어서 열 전환조차도 차단한 것이다.

‘으, 갈 길이 멀구먼.’

호승심을 느끼며 러스는 혀를 찼다. 역시 검성 자리 빼앗으려면 좀 더 노력해야 할 것 같다. 뭐, 검제란 칭호도 싫은 건 아니지만 사내라면 응당 최고를 노리고 싶어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는 동안 안에 들어간 이니야가 간단한 다과와 차를 내왔다. 청소 안 된 집 안을 보일 바에야 그냥 마당에서 손님맞이를 할 셈인가 보다.

그런 이니야 뒤로 대여섯 살 정도의 귀여운 여자아이가 졸졸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보랏빛 머리에 검은 눈동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같이 귀엽게 생긴 아이였다. 귓바퀴가 뾰족한 것이 아이가 인간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엘프처럼 길지도, 드워프처럼 짧지도 않은 귀였다. 대충 중간 정도 느낌이랄까?

아이가 러스를 보더니 반색하며 달려왔다.

“러스 삼촌!”

러스도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벌렸다.

“이리 온, 위니스!”

도도도 달려온 아이가 발을 굴렸다. 단숨에 러스의 가슴팍까지 뛰어올라 폴싹 안긴다. 분명 귀엽고 훈훈한 광경이긴 했는데, 지금 저 아이는 자기 신장의 배가 넘는 높이를 쉽게도 뛰어올랐다.

‘……다섯 살짜리 애가 뭔 점프력이…….’

아이를 안은 러스가 이니야를 돌아보며 혀를 내둘렀다.

“역시 형님의 아이군요.”

“애가 자기 아빠를 많이 닮았죠.”

마냥 좋은 듯 이니야가 생글생글 웃었다. 러스는 속으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애가 2.3미터에 알찬 근육질인 아빠를 닮는다는 게 과연 좋은 건가?’

뭐, 지금 보니 이니야 눈에 콩깍지가 씌워져서 그렇지 실제론 엄마를 쏙 빼닮은 아이라 별문제는 없어 보인다. 엄마를 닮았어도 솔직히 서전트 점프 2미터는 우스울 테니까.

안타레스 제국 제1공주, 위니스 엘 에네밀러스 안타레스.

이 귀여운 꼬마 숙녀가 태어난 지도 벌써 5년이 지났다. 당시 러스도 정말 자기 일처럼 기뻐했던 기억이 있다. 단지 불만이라면 위니스란 이름이 너무 흔한, 제국의 공주에게 붙이기엔 좀 격이 맞지 않는 이름이라는 것인데…….

‘그 이름은 그이와 저의 소중한 인연에서 나온 것, 이 아이에게 가장 어울리는 이름이에요.’

러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어쨌건 이유는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건장한 체구의 기사가 마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셨군요, 러스 경.”

이 깊은 산속에서도 기사답게 갑옷을 착용하고 있는 그를 보며 러스도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아스레일 경.”

제국 수호 기사 아스레일 폰 케이토.

비록 바포메트 슈트는 잃었지만 여전히 그는 안타레스 최강의 인간 오러 유저였다. 제라드와 레펜하르트는 인간의 범주로 안 치고, 러스는 테네스 가문으로 돌아갔으며, 나머지 오러 유저는 죄다 이종족이었으니 저 최강이란 단어가 과연 의미가 있냐 싶긴 하지만, 어쨌건 공식적으론 틀림없는 사실이다.

안타레스 제국은 그에게 황제를 수호하는 수호 기사라는 지위를 하사했다. 참으로 명예로운 지위였고, 동시에 순 명예뿐인 지위였다.

솔직히 아스레일더러 누굴 지키라고?

황제는 권왕이고 황후는 검성이다. 뭔 일 터지면 아스레일이 살려 달라고 저 부부에게 달려가야 할 판이다.

그런데 공주, 위니스가 태어났다. 아스레일 입장에선 드디어 진실로 지킬 수 있는 상대를 만난 것이다. 황궁 시절 내내 그는 위니스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지금도 이니야와 위니스를 따라 이 깊은 산속에 와 있었다.

“아스레일 경!”

위니스가 러스 품에서 내려와 졸래졸래 아스레일에게 가 안겼다. 흐뭇한 얼굴로 공주를 안으며 아스레일은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나의 공주님. 당신만은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킬 겁니다.”

왜냐면 저 양반들은 아스레일의 목숨 따위 별로 필요 없기 때문이지.

“……?”

어린아이에겐 이해하기 힘든 푸념이리라. 그 모습에 러스는 실소했다. 그러다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런데 형님께선?”

때마침 건물 뒤쪽 공터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아악!”

아직 앳된 소년의 비명이었다. 그런데 얼마나 처절한지, 돼지 멱을 따도 저리 심금을 울리진 않을 것 같다.

“으갸갸갸갸갹!”

하지만 이 자리의 그 누구도, 심지어 어린 위니스조차도 그 비명에 신경 쓰지 않았다. 다들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저곳인가요?”

“저건 제라드 님이고요.”

고개를 저으며 이니야가 대답했다.

“그이는 도망간 제자 잡으러 갔어요.”

☆ ☆ ☆

깊은 산속, 울창한 수풀 사이로 한 소년이 달린다. 대략 열서너 살 정도 되었을까? 아직 얼굴에 앳된 기색이 역력한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몸은 전혀 달랐다.

어지간한 성인 남자와 맞먹는 큰 키에 전신이 두꺼운 근육질, 양손엔 굳은살이 가득하고 팔이며 다리 근육, 복근은 이게 사람 몸인지 돌인지 구별이 안 갈 지경이다. 8등신의 완벽하게 균형 잡힌 몸, 그야말로 무武를 추구하는 이들의 이상적인 육체라 하겠다.

“헉헉헉!”

소년은 도망치고 있었다. 표정엔 다급함이 가득하고 전신은 땀범벅이다. 단련된 육체가 바위를 거침없이 뛰어넘고 수풀을 수수깡처럼 가른다.

그렇게 얼마나 뛰었을까? 그제야 소년이 잠시 뜀박질을 멈췄다. 정신없이 뒤를 돌아보더니 얼굴 가득 환희의 빛을 띤다.

“됐어! 성공했어!”

자유다! 드디어 벗어났다!

그때였다.

“제자야, 어디 가니?”

어느새 길 앞에서 거구의 30대 사내가 바위에 앉아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컥! 사, 사부!”

소년은 공포에 질렸다. 저 거구의 사내야말로 소년의 사부, 안타레스 제국 황제이자 당대 짐 언브레이커블의 계승자이며 세계 제2의 무투가, 권왕 레펜하르트 왈드 안타레스였다.

“한 두어 달 도망 안 가더니 결국 또 시도했느냐? 쯧쯧.”

뱀 앞의 개구리 신세가 된 근육질 소년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제자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그 역시 제라드 밑에서 수행하며 얼마나 도망치고 싶어 했던가?

하지만 결국 경지에 오르면 이 소년도 레펜하르트에게 감사하게 될 것이다. 레펜하르트 자신도 그랬으니까.

‘그때까진 억지로라도 제자를 상승의 경지로 이끄는 것이 사부의 책임인 법!’

제라드는 그에게 그저 강철의 육체만 준 것이 아니다. 인류의 신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를 관철하는, 강철의 의지 역시 주었다.

아, 이 얼마나 크나큰 사부의 은혜란 말인가!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독하게 마음을 먹어야 한다.

“돌아가자꾸나.”

레펜하르트가 바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주저하던 소년이 뭔가 결심했는지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후우, 이보시오. 그대에게 할 말이 있소.”

“해 보아라.”

“난 사실 이 시대의 사람이 아니오. 난 사실 머나먼 미래에서…… 꽥!”

슬프게도 소년의 말은 채 이어지지도 못했다. 어느새 소년 뒤로 돌아간 레펜하르트가 목덜미를 움켜쥐고 새끼 고양이처럼 들어 올린 탓이다.

“그건 왕년에 내가 써먹었다. 딴거 떠올려라.”

소년이 절망의 표정을 지었다. 문득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런데 난 진짜였잖아?’

유심히 자신의 제자를 바라본다. 당연히 도망가려고 한 소리란 건 알지만 스스로의 사례도 있으니…….

‘……아니겠지?’

그러나 레펜하르트는 이내 신경을 껐다.

‘알맹이가 뭔 상관이냐? 몸뚱이만 튼튼하면 됐지.’

제자를 든 채 레펜하르트는 몸을 날렸다. 근육질 거구가 깃털처럼 가볍게 산길을 주파한다. 소년이 허공에 매달려 연신 발을 동동거렸다. 성인만 한 체구의 소년이었지만 2.3미터의 거구인 그에 비하면 어린애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렇다.

결국 레펜하르트의 신장은 2.3미터에 도달했다.

영혼은 육체에 영향을 주고 육체는 영혼에 영향을 주는 법이라 지금 레펜하르트는 완전히 검은 머리에 흑요석 같은 눈동자로 변해 있었다. 그런데도 이 키만큼은 죽어도 영혼의 영향을 안 받는다! 지고의 마왕, 그 거대한 영혼을 깔끔히 무시하고 제 혼자 무럭무럭 자라서 결국 원래 덩치가 되어 버렸다!

‘역시 이 육체가 괜히 사부에게 선택된 게 아니란 말이지.’

레펜하르트가 공터로 돌아왔다. 그리고 제자를 바닥에 휙 던지며 말했다.

“사부, 잡아 왔어요.”

공터엔 레펜하르트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근육질 노인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을 본 소년이 처절하게 소리쳤다.

“태사부님! 살려 주세요!”

물론 노인은 소년의 소원 따위 들어줄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세계 최강의 무투가, 레펜하르트의 사부인 권황 제라드인 것이다. 오히려 어서 손짓을 하며 서두르기까지 한다.

“늦었구나. 어서 옆에 묶어라.”

소년 입에 재갈이 물렸다. 재 반항할 틈도 없이 착착 나무 말뚝에 묶인다. 이미 옆 나무 말뚝에는 비슷한 또래의 다른 소년 하나가 묶여 있었다. 도망쳤던 소년 못지않게 우람한 덩치였다.

묶여 있던 소년이 그를 보며 슬픈 눈빛을 보냈다.

‘사제! 결국 붙잡혔구나!’

‘사형! 사형도 도망 못 쳤군요.’

눈빛을 교환하며 소년들은 절망에 빠졌다. 레펜하르트가 팔을 걷어붙이며 대나무 몽둥이를 들었다.

“자, 그럼 수련을 마저 하자꾸나.”

질 좋은 할라인산 죽봉이 사정없이 두 소년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소리 없는 비명이 메아리쳤다.

‘으아아악!

‘사람 살려!’

안타레스 제국을 건국하고 2년 뒤, 레펜하르트는 마침내 짐 언브레이커블에 합당한 ‘짐승 같은 놈’을 찾아냈다. 그리고 1년 뒤 ‘더 짐승 같은 놈’도 발견했다.

역대 권왕들이 몇십 년이나 걸렸던 일을 고작 3년 만에 해낸 이유가 있었다. 그는 무식하게 발품 팔아 가며 후계자를 찾아다니지 않았다.

“어느 세월에 두 놈이나 찾으라고? 차라리 그 시간에 후계자 찾는 마법을 개발하고 말겠다!”

2년에 걸친 연구 끝에 세계수를 토대로 한 대륙 전역 서치 아티팩트, ‘레펜하르트의 눈’이 완성되었다. 거기에 짐 언브레이커블의 자격 수치를 넣고 돌려서 3년 만에 둘이나 되는 후계자를 찾아낸 것이다.

‘솔직히 이 방식이면 최소 두 자리는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자격 조건에 맞는 애들이 없단 말이지.’

짐 언브레이커블의 자질은 단순히 재능만이 아니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재능이 개화하며 타이밍이 맞아 줘야 한다. 나이는 10대 초반, 그보다 어리면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파악이 힘들고 그보다 나이가 많으면 자질이 있다 해도 시기가 늦다.

괜히 역대 권왕들이 후계자 찾느라 그 난리를 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대로 한 명씩이라도 찾은 쪽이 기적에 가까운 것이다.

하여튼, 레펜하르트는 훌륭히 제라드의 명을 지켰다. 이제 이 두 제자를 당대의 권왕으로 키우기만 하면 평생의 숙원도 벗게 된다.

“무인이라면 응당 자신의 약한 부분을 단련해 극복해야 하는 법!”

잔혹하게 매질하며 레펜하르트는 우렁차게 외쳤다. 그 속엔 짐 언브레이커블에 대한 굳건한 신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부서지지 않는, 완벽한 불굴의 육체를 만들어라!”

한때는 ‘이 미친 무문, 인류의 미래를 위해 대를 끊어야 하는 게 아닐까?’라며 고민한 적도 있는 레펜하르트다. 하지만 지금 하는 짓을 보면 대를 끊긴커녕 널리 세상에 알려 인간을 해롭게 할 작정인 것 같았다.

괜히 유유상종, 근묵자흑이란 고사성어가 있는 게 아니다. 전생의 마왕은 이제 훌륭한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계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완벽한 육체에 완벽한 정신이 깃든다!”

애들을 두들기며 레펜하르트는 느긋하게 짐 언브레이커블의 가르침, 한때 그가 제라드로부터 들었던 말을 반복했다. 여기에 살짝 어레인지가 붙었는데, 육체 말고 정신 역시 강조하는 부분이 그것이었다.

레펜하르트는 단순히 짐 언브레이커블의 무술만을 소년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다. 원래 짐 언브레이커블은 마법과 오러의 합일에서 출발했으니, 그 전통을 되살릴 생각이었다.

낮에는 죽도록 무술을 수행하고 밤에는 마법을 연마한다.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수면 학습용으로 개조해 꿈속에서도 마법 수행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나마 예전 권왕들은 밤에 잠이라도 푹 잤지, 레펜하르트의 제자들은 밤새도록 꿈속에서 마법 수행을 병행하며 나날이 피폐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쇠와 같다. 쇠도 인간의 육체도 정신도,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점점 더 강해지고 단단해지기 마련이다.”

레펜하르트는 제자들이 망가질까 걱정하지 않았다. 이미 세심하게 모든 점을 고려해 선별한 아이들이었다. 이 아이들이라면 그 어떠한 가혹한 수행도 이겨 내고 훌륭한 차기 권왕이 될 수 있었다.

“너희는 내가 고른 제자들이다! 야수의 육체와 현자의 두뇌를 지닌, 진정한 초인이 될 수 있다!”

레펜하르트가 호탕하게 소리쳤다. 묶인 소년들이 재갈을 통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러 댄다.

‘아, 그러니까 그런 거 되기 싫다고!’

‘누가 그런 거 만들어 달랬냐고!’

물론 소년들의 발악은 가볍게 씹혔다. 옆에서 흐뭇한 눈으로 레펜하르트와 제자들을 보던 제라드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얘들 둘이 같이 하산하면 칭호가 어찌 되나?”

이제까지야 짐 언브레이커블에 권황과 권왕, 둘 이상의 명칭이 필요 없었다. 워낙 수가 적었으니까.

“일권왕? 이권왕?”

“무슨 비밀요원 1, 2호도 아니고 그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럼 소권왕, 대권왕?”

“무슨 식당 가서 요리 소 자, 대 자 시키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내 호칭도 요상해지는구나. 레펜하르트 네 녀석이야 권황으로 불리겠지만 난 그럼 뭐가 되나?”

왕보다 높은 게 황제다. 그럼 황제보다 높은 건?

“무신, 권신, 뭐 많지 않겠어요? 원하시는 거 있음 말씀해 주세요. 카를 시켜서 몰래 퍼뜨리게.”

“됐다. 사람들이 알아서 부르겠지. 생각해 보면 알 게 뭐냐?”

하긴 그렇다. 알 게 뭐냐?

제라드와 떠드는 와중에도 레펜하르트의 손은 놀고 있지 않았다. 얼마나 두들겨 팼는지, 악에 받친 아이들이 턱 힘만으로 두꺼운 재갈을 물어뜯고 고함을 지를 정도였다.

“이 악마들아! 차라리 죽여라!”

“사, 사람 살려어어어어!”

레펜하르트는 기뻐했다. 벌써 이빨로 재갈을 끊을 정도라니, 보통 자질이 아니었다. 기꺼이 이 ‘사랑스러운’ 제자들을 위해 더더욱 수행에 박차를 가한다.

평생 꿈꾸던 소원도 이루었다. 이제 세상은 더 이상 그가 사랑하는 이들을 노예로 여기지 않는다.

평생의 적도 사라졌다. 이제 더 이상 세상을 어지럽히는 인류의 신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평생의 행복도 얻었다.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 수많은 소중한 동료들이 곁에 있었다.

이제 남은 숙원은 하나뿐.

레펜하르트의 손 속이 더욱 매서워졌다. 뉘엿뉘엿 저무는 초여름의 햇살 아래, 짐 언브레이커블의 오랜 가르침이 산속 가득 메아리쳤다.

“믿어라! 인간에게 한계는 없다! 너희들의 육체는 강철이 될 수 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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