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종장 신의 한 수, 인간의 한 수 (83/84)

최종장 신의 한 수, 인간의 한 수

1

강대한 마법이 은의 전당을 휘몰아친다. 전당을 떠받드는 두꺼운 기둥들이 수수깡처럼 부러지고 굳건한 합금의 벽이 가루가 되어 무너진다. 은의 시대 폭격조차도 견딜 수 있는 고대의 전당이 처참할 정도로 초토화된다.

광포하게 날뛰는 파괴 속에서도 레펜하르트 일행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고통과 공포를 이겨 내며 혼신을 다해 싸우고 또 싸웠다.

하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완전해진 인류의 신, 세이어.

그에겐 어떠한 허점도 사각도 없었다.

결국 비명을 지르며 타시드가 불길에 휩싸여 나가떨어졌다. 마력 폭풍에 휘말린 이니야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완전한 빛의 검, 러스의 일루미네이터마저도 부러졌다. 강렬한 전격이 마켈린과 실란을 내리치니 신과 여신의 가호도 이를 막지 못했다. 두 사람 다 감전되어 눈알을 까뒤집으며 혼절해 버렸다.

이제 세이어 앞에 선 것은 단둘.

불굴의 육체와 지구력을 지닌 권왕 레펜하르트와, 가공할 재생력의 소유자인 트롤 구루 아틸카뿐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오러를 끌어 올리며 세이어를 향해 몸을 날렸다.

“타아아앗!”

아틸카 역시 마찬가지였다. 혈정광폭화를 건 채 주술적 허밍을 길게 외친다.

“오오오오!”

사력을 다한 둘의 공격은 굉장한 위력을 담고 있었다. 두터운 세이어의 마력장이 연신 깨져 갔다.

그러나 세이어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가 양손을 교차했다.

“소용없노라.”

검은 소용돌이, 블랙 스파이럴 가드가 둘의 공격을 막아 냈다. 그리고 이내 양팔을 벌리며 마법을 구사한다.

“임페리얼 버스트, 플레임 데스 레이.”

마법에서 오러, 그리고 다시 마법을 이으니 전혀 딜레이가 없다. 강대한 폭염이 레펜하르트를 그대로 덮쳤다. 폭음과 함께 그가 불길에 휩싸여 뒤로 날려 갔다.

“으으윽!”

아틸카에게도 송곳 같은 불길이 무수히 관통했다. 그러나 그는 밀려나지 않았다.

“큭! 이 정도쯤은!”

재생력을 일깨우며 억지로 아틸카가 거리를 좁혀 파고들었다. 세이어가 손을 들어 허공을 휘저었다.

“역시 트롤의 재생력은 귀찮구나.”

보이지 않는 손아귀가 아틸카의 사지를 얽맸다. 오러 유저의 기본기 중 하나인 영기염동이었다. 원래는 멀리 떨어진 도구를 주워 오는 정도로 쓰는 기술이지만 세이어의 막대한 오러를 바탕으로 하니 광폭화한 트롤의 거구마저도 허공에 붙잡아 버린다.

“이, 이런!”

버둥대는 아틸카를 향해 세이어가 시동 언령을 내뱉었다.

“블러드 컨트롤.”

아틸카의 전신 상처를 통해 수많은 핏줄기가 분출되기 시작했다.

“원래 트롤의 재생력은 그 피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파아아아앗…….

엄청난 양의 혈액이 허공으로 솟구쳐 그대로 불타올랐다. 혈액을 빼앗긴 아틸카의 푸른 피부가 점점 발갛게 변했다. 근육질 거구가 점점 쪼그라들며 눈동자가 빛을 잃기 시작했다.

“으, 으으으…….”

“저런? 피를 더 뽑으면 죽겠군.”

세이어가 마법을 멈추고 그를 멀리 던졌다. 탈진 상태가 된 아틸카가 맥없이 날아가 기둥에 부딪친 뒤 바닥을 나뒹굴었다. 잠시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바로 고개를 꺾는다. 너무 많은 피를 잃은 것이다.

“저 자식…….”

쓰러진 채 레펜하르트는 인상을 썼다. 아까부터 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지금 아틸카를 보니 확실해졌다.

‘세이어, 저자는 일부러 우릴 죽이지 않고 있어!’

아틸카뿐 아니라, 쓰러진 동료 중 죽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 전투 불능이 되었을 뿐이다. 이건 단순히 운이 좋다고 치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애초에 세이어가 세밀하게 위력을 조정했다는 의미다.

분노로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우릴 가지고 노는 거냐!”

“내게 그런 악취미는 없노라.”

세이어는 그런 이유로 이들을 살려 둔 것이 아니었다.

“그대는 세상을 너무도 망쳐 놓았다. 이를 되돌리는 것은 내게도 쉬운 일이 아니겠더구나.”

시공융합포, 니르바나로 대륙의 절반을 날리고 모든 이종족의 씨를 말릴 준비를 하고 있는 세이어였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인류의 기억까지 날릴 수는 없다.

인류의 인식은 이미 바뀌어 버렸다. 대륙의 반이 사라진다 해도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이종족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를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인류를 위해 작은 선물을 하려 함이다.”

살아남은 이들에게 보여 줘야 한다. 그대들이 두려워하던 존재가 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위대한 신의 위엄 앞에선 그 무엇도 하찮을 뿐이라고.

그것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레펜하르트의 동료, 안타레스의 중추들인 것이다.

“나의 종들에게 넘기면 알아서 잘할 테지.”

모든 힘을 잃고 몰락한 이종족의 우두머리들을 전시하는 것, 짐승이나 다름없는 몰골이 된 비참한 이단자들의 모습을 보여 주어 인류의 자긍심을 회복시키는 것, 이는 세이어 교단이 오래전부터 해 오던 일이다.

“그게 악취미란 거다!”

기가 차 레펜하르트는 악을 썼다. 세이어가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그대들을 희롱하는 것은 약자를 괴롭히는 감정적 통쾌함 외엔 전혀 이득이 없다. 그러나 나의 교단에 넘긴다면 인류를 깨우치는 데 현실적인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크으…….”

레펜하르트는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절대 저런 일이 일어나게 할 순 없다. 재차 전투에 임하는 그를 보며 세이어가 문득 실소했다.

“재미있구나.”

그는 테스론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결국 끝까지 남은 이는 권왕뿐이라는 것이.”

마왕 레펜하르트를 상대로 끝까지 남은 이는 권왕 테스론이었다. 비록 테스론은 사라졌지만 그의 육체는 여전히 남아 이 자리에 홀로 버티고 서 있다. 역시 운명은 돌고 도는 것인가?

“하지만 아쉽게도 난 그대가 아니지.”

당시의 레펜하르트는 극도로 지친 상태였다. 그렇기에 테스론의 마지막 일격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세이어는 그렇지 않다. 비록 레펜하르트의 동료들을 상대하느라 상당한 마력과 오러를 소모하긴 했지만 여전히 여유가 남아 있다.

세이어가 손을 들어 레펜하르트를 가리켰다.

“염려치 마라, 인간의 마법사여. 그대는 동료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저자는 살려 둘 생각이 없다. 그의 지식과 지혜는 너무 위험하다. 확실하게 끊어 버려야 한다.

“그 육체는 소멸될 것이며, 그 영혼은 내게 깃들 것이다. 그대의 지식과 지혜는 신의 양분이 되어 영원히 살아가리라.”

레펜하르트가 애써 투지를 일깨웠다.

“누가 그렇게 되게 놔둔다더냐!”

하지만 어떻게 싸워야 하지? 고집스러운 투지와 별개로, 가슴 한쪽에선 절망이 내려앉고 있었다.

세이어가 새로 손에 넣은 힘은 단순한 오러가 아니었다. 짐 언브레이커블과 맞먹는 불굴의 신체야말로 그의 진정한 힘이다. 단지 그뿐이면 이렇게까지 절망적이진 않겠지만 저 육체에 세이어의 방대한 마력이 뒷받침되면 그야말로 끔찍한 악몽이 된다.

레펜하르트의 머리 위로 날아오르며 세이어가 손을 내리쳤다.

“쓰러져라.”

마법과 오러가 뒤섞여 레펜하르트를 난타했다. 이를 갈며 그도 마주 주먹을 내뻗었다.

“웃기지 마라!”

한차례의 격돌 후 레펜하르트는 또다시 피를 흘리며 날려 갔다.

“커어억!”

역시 힘의 격차가 너무 컸다. 정면 대결론 승산이 없었다. 공격도 방어도, 그 사이의 전환과 연계도 완벽했다. 차라리 예전처럼 10서클 마법이라도 구사하면 어떻게든 빈틈을 파고들어 보겠는데 이미 한번 당한 후라 그런지 세이어는 철저히 안전한 마법만을 사용하고 있었다. 굳이 10서클을 쓰지 않고 압도적인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것이다.

‘제길, 방법이 없어…….’

쓰러진 레펜하르트 위로 세이어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피투성이의 가슴팍을 발로 짓밟으며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벌레처럼 짓밟아 주마.”

“으윽…….”

신음하며 레펜하르트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다. 겉보기엔 그저 세이어가 밟고 있는 걸로만 보이지만, 실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압박이 육체 전체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덩치가 워낙 커서 밟는 것도 쉽지가 않구나, 하하하.”

웃으며 세이어가 마무리를 하려던 찰나.

“임페리얼 버스…… 음?”

갑자기 세이어가 오른팔을 들어 마력장을 펼쳤다. 레펜하르트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황금빛 유성이 세이어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콰쾅!

유성이 마력장과 충돌했다. 무지막지한 빛의 파문이 퍼져 나와 은의 전당을 뒤덮었다. 요란한 폭발과 함께 공기가 찢어지며 뇌성이 울렸다.

쩌어엉!

그 덕에 세이어의 압박이 사라졌다. 허겁지겁 레펜하르트가 몸을 빼내 뒤로 피했다.

‘사, 살았다!’

유성 속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2.5미터의 거구가 깃털처럼 가볍게 공중제비를 넘으며 바닥에 안착한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듯한―그리고 실제로도 안 들어가는― 두꺼운 근육질 육체 위로 새하얀 수염과 백발이 휘날린다.

“미안하다, 제자야. 조금 늦었다.”

거구의 노인을 바라보며 세이어가 빙그레 웃었다.

“그렇군, 그대가 있었지?”

레펜하르트가 눈을 크게 떴다.

“사부?”

☆ ☆ ☆

헝클어진 백발, 떡 벌어진 어깨 아래 우람한 등이 드러난다. 전신 곳곳에는 피가 묻어 있다. 여기저기 찢긴 자상도 보인다. 바지자락도 여기저기 찢어져 볼품없이 나부낀다. 검성 바나텔과의 사투로 인한 흔적이었다.

그럼에도 권황 제라드는 철탑처럼 굳건히 대지를 디디고 서 있었다. 흔들림 없는 거악 같은 기세가 거구의 노인으로부터 강렬히 흘러나온다.

레펜하르트가 놀라 물었다.

“몸은 괜찮은 겁니까, 사부?”

사실 그는 이 자리에 제라드가 나타날 거란 기대를 하지 않았다. 바나텔과 제라드의 실력은 필적하니, 설사 제라드가 이긴다 해도 전력이 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보아하니 멀쩡한 것 같다. 꽤 지저분해지긴 했지만.

제라드가 씨익 웃었다.

“그 포션 되게 좋더구나, 제자야.”

아틸카를 갈아 마신 것은 레펜하르트 일행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 바나텔을 쓰러뜨리셨습니까?”

“운이 좋았지. 종이 한 장 차이였다. 한 번 더 붙는다면 어찌 될진 나도 모르겠구나, 허허허.”

너털웃음을 흘리던 제라드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졌다.

“……그 친구에게 더 이상 그럴 기회는 없지만.”

평생의 호적수를 물리친 것치곤 그리 즐거워 보이는 표정이 아니었다. 도리어 묘하게 허탈한 느낌도 든다. 상대의 죽음을 순수하게 기뻐할 만큼 그와 바나텔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라드는 이내 표정을 폈다.

“뭐, 그건 그거고…….”

도로 ‘짐 언브레이커블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와 이글거리는 시선을 세이어에게 보낸다.

“오랜만이다? 인류의 신인가 뭔가.”

불경한 말투지만 세이어는 개의치 않았다. 그저 무감각한 눈으로 제라드를 응시한다.

“죄 많은 자의 후예여, 결국 그대도 이 자리에 도달했구나.”

갑자기 제라드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얼씨구? 이 녀석, 제법 사람 됐네?”

놀란 레펜하르트가 제라드를 바라보았다. 설마 기감만으로 세이어와 아카식 드라이브의 관계를 알아챈 건가? 짐 언브레이커블의 오러에 그런 효용도 있다는 건 금시초문이다.

“사부도 세이어의 신성 단절을 느끼실 수 있으십니까?”

“응? 그게 뭔 소리냐?”

“예? 지금 사람 됐다고…….”

여전히 레펜하르트는 자신의 무문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은 ‘인류의 신과 아카식의 관계’ 같은 사소한(!) 문제는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예전엔 말라비틀어진 개가죽 쪼가리였는데 이젠 얼추 사내다운 티가 나잖냐?”

제라드는 그저 현 세이어의 ‘꽤나 탄탄한 육체’를 두고 한 말일 뿐이었다. 상식적으론 과대평가라고 해야 옳겠지만, 짐 언브레이커블 기준에선 과소평가가 맞다.

“…….”

기가 막혀 레펜하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역시 한번 짐 언브레이커블은 영원히 짐 언브레이커블인 모양이다.

‘저기, 그 말라비틀어진 개가죽 쪼가리가 원래는 제 몸이었습니다만?’

어쨌거나, 제라드의 등장은 궁지에 몰린 레펜하르트에겐 실로 반가운 일이었다.

제라드의 합류는 단순히 믿음직한 전력이 늘어난 정도가 아니다. 물론 단순한 무력 비교로만 보면, 레펜하르트 일행이 모두 덤벼도 상대가 안 되었는데 제라드 한 명 가세했다고 딱히 상황이 달라질 리는 없다. 아무리 제라드가 강하다 해도 일행 전원을 합친 것만큼 강하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짐 언브레이커블은 세이어와의 상성이 나쁘지 않지.’

짐 언브레이커블의 전법은 언제나 정면 돌파.

다른 이들에겐 오러를 손에 넣은 세이어가 ‘약점 없는 완벽한 상태’겠지만 짐 언브레이커블에겐 그저 상대가 ‘좀 더’ 강해졌을 뿐이다. 지금의 세이어가 상대라면 제라드가 오히려 더 강력한 아군이다!

‘……좋아, 조금이지만 가능성이 생겼어.’

반색하며 레펜하르트는 사부를 바라보았다. 은의 전당 내부를 힐끔거리던 제라드가 혀를 찼다.

“쯧쯧, 다들 뻗었네?”

“예.”

“독한 놈, 본보기로 삼을 셈이로구나.”

보자마자 제라드는 바로 상황을 알아챘다. 비록 세계의 진리나 고대의 지혜, 마법적 지식 따윈 전무한 그였지만 대신 수십 년의 인생 경험이 있다. 온갖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본 제라드에게 세이어의 의도를 눈치채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참 성격 한번 개 같은 놈이로고.”

연이은 제라드의 폭언에 결국 세이어의 무심이 깨졌다. 문득 발켄슈트가 떠올랐다. 그놈도 참 세이어 속 긁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사실 짐 언브레이커블의 진짜 대단한 점은 대대로 신의 비위를 거스르는 데 특화되었다는 부분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정말이지 더러운 입담은 그놈이랑 똑같구나.”

분노한 세이어가 제라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검은 오러와 마력의 영기가 회오리쳤다.

“네놈만큼은 자비를 베풀지 않겠다. 가장 고통스럽게 죽여 주마.”

제라드도 전신의 오러를 발현시켰다. 순수하리만치 선명한 황금의 오러가 전당 내부를 밝혔다. 여전히 굳건하고, 여전히 흔들림 없는 초월적인 빛이었다.

“그래, 그동안 바나텔 때문에 통 네놈이랑 제대로 붙어 보질 못했지?”

살기 어린 긴장감이 둘 사이에서 소용돌이치며 점점 커져 갔다.

그것이 정점에 다다른 순간.

“이번에야말로 조져 주마!”

제라드가 두 눈을 부라리며 세이어를 향해 돌진했다.

☆ ☆ ☆

철권을 내지르며 제라드가 우렁찬 포효를 터트렸다.

“기격탄!”

지름이 10여 미터가 넘는 거대한 황금빛 구체가 세이어를 노리고 날아든다. 저 엄청난 사이즈에 고작 ‘탄’이라는 명칭이 붙다니, 대륙의 언어학자들이 보면 피를 토하며 규탄할 일이었다.

세이어가 손을 내밀어 여섯 겹의 마력장을 전개했다.

콰콰콰쾅!

폭발이 일어나며 마력장 절반이 날아갔다. 아무리 제라드의 기격탄이 강하다지만, 세이어의 본신 마력을 생각하면 이상할 정도로 결과가 좋다. 예전 제라드가 그와 붙었을 땐 마력장 하나도 채 부수지 못했다.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세이어가 혀를 찼다.

“역시 마력이 많이 떨어졌군.”

정확히는 마력을 마법으로 전환할 때의 순간 출력이 떨어진 것이다. 역시 오러와 마법을 병행하다 보니 집중력 소모가 상당했다. 레펜하르트 일행과 싸우느라 소모된 총 마력량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강하구나, 권황 제라드.”

그럼에도 세이어에겐 아직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인간의 강함일 뿐.”

파리를 쫒듯 세이어가 가볍게 손바람을 저었다. 검은 오러가 간헐천처럼 분출되어 허공의 제라드를 강타했다. 스파이럴 가드를 펼쳐 제라드가 전신을 보호했다. 검은 오러를 갈아 내며 그가 눈을 치켜떴다.

“이거 진짜 오러네?”

사실 보자마자 상대의 기운이 오러임은 알고 있었다. 그저 너무 새까매서 의아했을 뿐이다. 칠흑의 오러는 기나긴 오러 유저의 역사 속에서도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

“역시 속이 시꺼먼 놈이라서……라기보단 오래 산 놈이라 그런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

오러는 그 사람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그 사람이 악당이라 해서 그 색이 까매지진 않는다. 애초에 흰색이 선이고 검은색이 악인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건 어디까지나 일부 인간들의 편견일 뿐이다.

세이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래도 필레나의 영향인 것 같더군.”

이 육신을 만든 이는 네크로맨서 필레나다. 온갖 육체 인자를 조합하며 스며든 그녀의 흑마력이 육체의 생명기에 영향을 주었으니, 오러의 색이 그를 따라가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필레나? 누구냐, 그건?”

제라드는 필레나가 누군지 잘 모르는 것이다. 실은 세이어가 아라난 그라드를 침탈할 때 한번 보았지만, 렐시아도 제대로 기억 못 하는 제라드가 한번 본 여자 따윌 기억할 리 없지.

그리고 기억을 한다 해도 별 상관은 없다.

“알 게 뭐냐? 흰 놈이건 검은 놈이건 패는 맛만 있으면 되지!”

재차 주먹을 움켜쥐며 제라드가 땅을 박찼다.

“가스트리젠! 스트레이트 캐논! 더블 임팩트!”

강철의 육체로부터 파괴의 일격, 일격이 세이어의 사방을 두들겼다. 순환 마력장이 깨지고 재생성되는 걸 반복하며 그 여파로 전당이 가득 흔들렸다.

“타아아아앗!”

그러나 여전히 제라드의 주먹은 세이어에게 닿지 않았다.

“하찮다. 그대의 공격은 그대의 제자만도 못하구나.”

순수한 물리적 위력은 제라드가 위일지 몰라도, 마력장을 부수는 데는 마력과 합일된 레펜하르트의 아케인 오러 쪽이 훨씬 효율적이다. 아무리 두들겨도 마력장이 부서지는 속도보다 생성되는 속도가 더 빠르다.

“정말 그런지 어떤지는 두들겨 보면 알겠지!”

제라드의 공세가 더더욱 빨라졌다. 세이어가 웃었다.

“아까보단 좀 재밌다만, 그래 봤자다.”

검은 오러의 폭풍이 제라드에게 날아들었다. 오러를 두르며 제라드가 전신을 방어했다. 오러 유저로서 대륙의 정점에 서 있는 그였다. 아무리 세이어라도 오러로 제라드를 쓰러트릴 순 없다.

뭐, 처음부터 쓰러트릴 생각도 없었고.

“라이트닝 퍼니시먼트.”

뇌격이 제라드를 강타했다. 허겁지겁 더블 스파이럴 가드를 펼쳤는데도 전신이 벌겋게 익으며 상처가 갈라져 피가 터진다.

“크윽! 역시 이건 세구먼!”

그러나 제라드는 쓰러지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라면 이 일격에 새까만 숯이 되었을 텐데, 비록 상처는 입었을지언정 꿋꿋이 서 있다. 세이어가 눈살을 찌푸렸다.

“확실히 다른 놈들과는 다르군.”

다른 이들을 상대할 땐 그저 방어에만 치중하며 안전한 마법을 날리기만 하면 됐었다. 마법사 특유의 허점을 오러로 메우니, 그것만으로도 러스며 이니야 등은 아무것도 못한 채 쓰러져 갔다.

그러나 제라드는 다르다. 그런 식으로 날린 마법쯤은 저 불굴의 신체로 충분히 막아 내는 것이다. 그를 상대하려면 오러의 힘을 지닌 지금도 어느 정도 리스크를 각오하고 대마법을 구사해야 한다. 제라드 하나가 여럿이서 덤벼들던 레펜하르트의 다른 동료들보다 까다롭다.

‘……희망이 보여!’

상황을 지켜보던 레펜하르트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이대로라면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놈의 방어는 제가 깨겠습니다, 사부!”

권마합신으로 마력과 오러를 융합한 채 레펜하르트가 몸을 날렸다. 그를 보며 세이어가 빈정거렸다.

“둘이서 덤비는 거냐? 짐 언브레이커블은 일대일 대결을 선호하지 않던가?”

천연덕스럽게 제라드가 대꾸했다.

“뭐, 우리 무문 가르침에 여럿이서 사람 패는 건 자제하라고 되어 있긴 하지.”

그리고 음흉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잇는다.

“그런데 여럿이서 신 패지 말란 소린 없거든?”

순식간에 세이어의 등 뒤로 돌아가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제라드가 유쾌하게 외쳤다.

“가자, 제자야!”

“예, 사부!”

전대와 당대의 두 권왕拳王, 짐 언브레이커블의 사제師弟가 동시에 몸을 날렸다.

2

세이어를 포위한 채 제라드와 레펜하르트는 연달아 오러를 내뿜었다. 무자비한 공방이 이어지며 은의 전당 곳곳이 무너져 내렸다. 그 와중에 레펜하르트가 기회를 잡았다. 잠시 세이어의 의식이 제라드에게 쏠린 틈을 타 주먹을 내뻗는다.

“아케인 스트레이트!”

권마합신으로 융합된 오러-마력의 일격이 세이어의 마력장을 깨부숴 무방비 상태로 만들었다. 세이어의 말대로, 마력장에 대해서만큼은 레펜하르트가 제라드보다 위였다. 찬스를 잡은 제라드가 쾌재를 흘리며 몸을 날렸다.

“텅 비었구나, 요놈!”

제라드가 캐터펄트를 연상케 하는 육중한 미들킥을 뻗어 냈다. 순간 세이어가 기합을 터트렸다. 그의 전신에 검은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타앗!”

블랙 스파이럴 가드가 제라드의 킥을 가로막으며 막대한 반발력을 낳았다. 뒤로 튕겨 나며 제라드가 눈을 크게 떴다.

“오잉? 어디서 많이 보던 거다?”

“조심하세요, 사부! 저자는 짐 언브레이커블의 육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호오? 그런 것도 되느냐? 재주도 좋은 양반일세.”

신기해하며 제라드는 재차 몸을 날렸다. 세이어가 마법을 난사해 그의 접근을 막았다. 하지만 스파이럴 가드를 건 제라드는 멧돼지 같은 무식한 돌격으로 모조리 버텨 내며 상대의 코앞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허업!”

육중한 철권이 세이어를 향해 날아들었다. 세이어가 코웃음을 치며 마주 주먹을 내뻗었다.

“흥! 이 육체는 완벽하다!”

이젠 세이어 역시 언브레이커블의 육신을 지니고 있다. 제라드나 레펜하르트와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 것이다. 검게 물든 권격과 황금의 주먹이 허공에서 격돌하며 폭발했다.

콰콰쾅!

“크윽!”

놀랍게도 뒤로 밀려난 것은 세이어였다. 제라드가 눈살을 찌푸리며 외쳤다.

“에이, 아니잖아! 이게 무슨 짐 언브레이커블이야?”

고통스러운 듯 오른팔을 만지며 세이어가 인상을 썼다. 분명 그 역시 제라드와 마찬가지로 불괴불굴의 육신을 지니고 있었다. 여전히 자신의 오른팔은 멀쩡하다.

하지만 충돌로 인한 통증마저 참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 버렸다.

레펜하르트를 바라보며 제라드가 혀를 찼다.

“쯧쯧, 어리석은 제자야.”

확실히 세이어는 스파이럴 가드를 제대로 구사하고 있었다. 그의 육신이 짐 언브레이커블만큼이나 굳건하다는 증거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권왕의 육체를 지녔다는 의미는 아니다.

“마냥 튼튼하다고 다 언브레이커블이 아니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계승자들은 무수한 폭력과 고통, 고문에 가까운 지옥 속에서 수행하며 그 육체를 얻는다. 그것은 단순히 육체를 강철처럼 벼리는 행위만이 아니다. 강철의 육체에 걸맞은, 강철의 정신을 벼리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건 고통도 노력도 없는, 그저 단단하기만 한 육체가 아니냐?”

제라드의 거구가 세이어를 향해 쇄도했다. 주먹을 내지르며 그가 통쾌하게 외쳤다.

“자고로 자신의 아픔을 아는 자만이 타인도 아프게 만들 수 있는 법이지!”

레펜하르트는 눈을 깜빡였다. 저게 원래 저런 말이던가? 뭔가 묘하게 변질된 듯한 느낌이?

어쨌건 지금 제라드의 목소리에는 스스로에 대한 확고한 믿음, 짐 언브레이커블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이 있었다. 쇄도하는 육중한 권격에 세이어가 일부러 오러로 맞섰다. 제라드의 말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콰쾅!

둘의 주먹이 다시 한 번 허공에서 충돌했다. 세이어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뒤로 물러났다.

“으음…….”

신음하며 세이어는 자신의 양팔을 내려다보았다. 필레나가 혼신을 다해 빚은 이 신체는 분명 완벽했다. 육체적 손상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밀려난 것은 이쪽이다.

“그렇군. 확실히 그대 말이 옳다.”

꽤나 추태를 보인 셈이 되었지만 세이어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태연을 가장하며 제라드를 향해 마치 칭찬하듯 말을 건넨다.

“이 육체를 제대로 다루려면 나 역시 좀 더 노력해야 할 것 같구나.”

그는 신이었다.

무릇 신은 하찮은 인간에게 하나하나 반응하지 않는 법이다.

뭐, 그래 봤자 이마 한쪽에 핏줄이 선 것이 꽤나 열받은 기색이 역력하다. 제라드가 빙글거리며 비웃었다.

“신 노릇 하느라 고생이 많구먼.”

“……신이 신 노릇 하는 것이 뭐가 힘들까?”

세이어가 위엄 있게 대꾸했다. 물론 제라드는 그의 위엄 따위 전혀 신경 써 주지 않았지만.

“아무렴? 신이시겠지. 일만 이천 살이나 처먹고도 더럽게 철 안 드는 인류의 신.”

“하하, 미쳐 버린 신이라든가, 뭐 이런 식으로 나올 건 예상했다만…….”

세이어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정말 상종 못할 놈들이구나, 짐 언브레이커블!”

결국 인류의 신은 도로 폭발해 버렸다. 그의 전신에서 영기가 터져 나왔다. 강렬한 기세에 코트 자락이 바람에 나부끼며 펄럭거리는 소리를 낸다. 자세를 잡은 채 제라드가 차분하게 뇌까렸다.

“사람이 사람 노릇 하기도 힘든 세상이다. 사람이 신 노릇 하려니 아귀가 맞을 리가 있겠느냐?”

☆ ☆ ☆

“폭염권! 뇌전권! 질풍기격탄!”

오러와 마력을 융합해 레펜하르트는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목표는 오로지 마력장, 집중된 파괴력에 굳건한 방어가 깨지며 세이어의 본체가 드러났다.

물론 그렇다고 세이어가 무방비인 건 아니다. 마력장이 깨져도 여전히 극강의 오러와 불굴의 육체로 보호받는다.

그 틈을 제라드가 노린다. 황금의 거인이 광휘를 뿌리며 펀치와 킥을 날려 댄다.

세이어도 손발을 놀려 그에 맞섰다. 권과 권, 오러와 오러, 육체와 육체가 충돌하며 굉음을 울렸다. 사방으로 터져 가는 오러 파문 속에서 세이어가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딱히 부상을 입어서는 아니었다.

사실 세이어와 제라드의 육체 능력은 별 차이가 없다. 아니, 실은 세이어 쪽이 더 뛰어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2.5미터의 거구인 제라드에 비해 그는 고작 185센티미터, 체격차가 현격한데도 동등한 충격을 주고받고 있다.

그러나 세이어는 짐 언브레이커블처럼 고통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똑같은 충격을 받아도 제라드는 웃으며 무시하는데…….

‘……나도 모르게 물러서게 되는군.’

그렇다고 마법으로 응수하자니 그것도 쉽지 않다. 레펜하르트의 다른 동료들은 세이어의 마법이 날아들면 전력으로 피하거나 오러 스킬로 막아야 했다. 공격에서 방어로 전환하며 한차례 딜레이가 생기니까. 그래서 오러-마법의 연계로 충분히 연격을 이을 수 있었다.

반면 짐 언브레이커블은 그딴 거 없다.

세이어가 마법을 날리건 말건 죽어라 돌진이다. 마법이 날아오면 스파이럴 가드로 흘리고 잔여 파괴력은 그냥 몸으로 때운다. 피가 나건 근육이 찢어지건 상관치 않고 공격을 이어 간다.

제라드와 레펜하르트를 번갈아 보며 세이어는 혀를 찼다.

“무식한 놈들 같으니…….”

상대가 제라드 한 명이었다면 별문제가 없었다. 그냥 마력장 풀로 전개하고 느긋하게 위력적인 마법을 준비하면 된다. 예전 세이어가 제라드를 농락했을 때처럼.

하지만 지금은 레펜하르트가 그럴 틈을 안 준다.

“아케인 스트라이크! 아케인 제로 임팩트!”

제자란 놈은 작정하고 마력장 부수는 데만 전력을 다하고 있고.

“받아 봐라, 이놈! 으랏차차차차!”

스승이란 놈은 작정하고 달려들기만 한다.

상대를 강제로 힘 대결로 끌어내는 짐 언브레이커블 특유의 전법은 사실 마법사가 마법을 외울 틈을 안 주는 것이 본질, 그야말로 세이어 입장에선 최악의 상성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군.’

세이어가 전투 방식을 바꿨다. 순수한 마력이 그의 전신에서 폭풍처럼 터져 나왔다.

“좋다, 이 멧돼지 같은 놈들!”

마법으로 재구성되지 않은 순수 마력은 파괴력 대비 마력 소모율이 극히 높다. 그런 만큼 세이어의 마력도 빠른 속도로 소모되겠지만…….

‘더 이상 힘을 아낄 필요는 없지.’

저 두 놈만 해치우면 더 이상 적은 없다. 시간이 지나면 아카식 드라이브는 다시 눈을 뜰 것이고, 고갈된 그의 영혼에 다시 신의 권능이 가득 찰 것이다.

마법 쓰려다 계속 뒤통수 맞느니, 전력을 다해 몰아쳐서 반격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쪽이 훨씬 낫다!

“원한다면 힘 대결로 밀어붙여 주마!”

그러자 상황이 반전되었다.

제라드와 레펜하르트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떠올랐다.

“윽? 이거?”

“이런 식으로 나오기 시작했나!”

더 이상 레펜하르트는 세이어의 마력장을 노릴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제라드도 세이어의 빈틈을 파고들 수가 없었다.

시동 언령도, 술식 연산도 없다. 의지가 일어나면 바로 방대한 힘이 현실에 구현된다. 뭔가 해보기도 전에 항거할 수 없는 거력이 둘을 짓누른다!

콰콰콰쾅!

연달아 폭음이 울렸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공세에 제라드와 레펜하르트는 대책 없이 밀리기만 했다. 어떻게든 허점을 노려 반격하려 해도 영 기회가 오질 않았다. 무수한 공격이 이어지며 강철의 육체가 착실히 마모되어 간다.

결국 두 사람은 피투성이가 된 채 구석까지 몰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제라드를 향해 세이어가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핫! 고작 이 정도 실력으로 건방진 혀를 나불거렸느냐?”

“……그럼 약자만 골라 비웃으란 말이냐? 그것 참 사내답고 당당하구먼.”

그 와중에도 제라드는 한 마디를 지지 않았다. 세이어의 표정에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놈! 언제까지 건방을 떨 수 있나 보자!”

정제되지 않은 마력의 빛이 제라드와 레펜하르트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의지와 동시에 발현되는 공격이기에 두 사람도 채 피할 수가 없었다. 불굴의 육체가 찢어지고 터지며 선혈을 흩뿌린다.

“하찮은 인간이여, 신을 능멸한 대가를 받을지어다!”

두 사람을 구석으로 몬 세이어가 여유 있게 술식 마법을 발동시켰다.

“임페리얼 버스트 펜타곤!”

다섯 줄기 폭염이 또아리를 틀며 거대한 파괴로 화한다. 거대한 연계 폭염 주문이 제라드와 레펜하르트를 강타했다.

콰콰콰쾅!

장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태풍에 휩쓸린 가랑잎처럼 제라드와 레펜하르트가 정신없이 날려 갔다. 어찌나 파괴력이 높은지 은의 전당이 절반 가까이 붕괴할 정도다. 신의 옥좌가 흔적도 없이 소멸하며 그 거대한 벽면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자욱한 폭연 사이, 무너진 벽 너머로 찬란한 빛이 비췄다.

“으으으…….”

신음하며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들었다. 정타도 아니고 비껴 맞았는데도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아주 전신이 사정없이 쑤셔 온다.

그가 문득 주위를 바라봤다.

은의 전당 너머는 원통처럼 생긴 거대한 공간이었다. 다섯 개의 금속 링으로 구성된 천구의가 중앙에 위치하고, 그 속에 기하학적 형태의 빛의 문양이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방대한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저것이 아카식 드라이브…….”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레펜하르트는 마법사다운 감탄을 흘렸다. 세이어의 기억을 통해 정체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때 제라드의 신음이 들렸다.

“으으으…….”

“사부? 괜찮으십니까?”

노인의 전신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여기저기 말라붙은 핏자국도 보인다. 입가의 피를 훔치며 제라드가 몸을 일으켰다.

“괘, 괜찮다…….”

일어나는 순간 다리가 휘청거린다. 애써 자세를 바로잡으며 제라드는 몸 상태를 살폈다. 근육 곳곳이 파열되어 전신에 극심한 통증이 끊이질 않는다. 욱신거리는 느낌이 뼈마디 여기저기에 금이 간 것 같다.

“크으, 저 녀석…… 세긴 세구나…….”

숨을 고르며 제라드는 고개를 들었다. 무너진 벽을 통해 세이어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벽과 아카식 드라이브를 번갈아 보며 그가 혀를 찼다.

“이런, 너무 신을 냈나? 자칫하면 아카식 드라이브에 피해를 입힐 뻔했군.”

다행히 아카식 드라이브는 무사했다. 휴면 상태로 돌아섰어도 시스템 외부 방어장은 건재했던 것이다. 휴면 상태부터가 철저한 자가 복구를 위한 것이니, 그동안 방어장을 더욱 강화하는 것은 시스템상 당연한 일이다.

안도한 세이어는 제라드와 레펜하르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만신창이가 된 둘을 보며 그가 눈을 치켜떴다.

“이미 힘의 격차는 충분히 실감했을 터, 아직도 포기하지 않을 테냐?”

물론 짐 언브레이커블에 포기는 없다. 제라드가 재차 투기를 끌어 올렸다. 전신의 통증을 근성으로 무시하며 황금의 오러를 피운다.

“물론이다!”

하지만 어지간한 수단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성품이야 어찌 되었건, 분명 세이어는 신을 자처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못하고 당할 게 뻔하다. 더 늦기 전에 승부를 걸어야 할 때다.

‘모험을 할 수밖에 없는가?’

결심한 제라드가 레펜하르트를 향해 소리쳤다.

“제자야! 딱 십 초만 벌어라!”

“예, 사부!”

제라드가 뭘 노리는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부상당한 육체를 이끌고 레펜하르트가 몸을 날렸다. 세이어가 조소를 흘렸다.

“정말이지 포기할 줄 모르는 놈들이로다.”

레펜하르트와 세이어가 격돌했다. 굉음이 울려 퍼지며 대기가 사방으로 밀려났다. 그 틈에 제라드가 자세를 취했다.

“후우우우…….”

호흡을 고르며 손가락을 정성스럽게 말아 쥔다. 전신에 남은 기력을 모조리 끌어내 손끝으로 모은다. 자세를 낮추며 오른 주먹을 허리춤으로 가져간다.

황금의 오러가 광채를 뿜으며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순수한 파괴의 빛이 찬란한 고리가 되어 제라드의 오른팔을 감싼다.

“하아아압!”

제라드가 기합을 터트렸다. 여덟 개의 고리가 맥동하며 바닥이 요란스럽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궁극기, 캘러미티 혼이었다.

“훗, 마지막 발악을 해 볼 셈이냐?”

상황을 눈치챈 세이어가 바닥을 강하게 내디뎠다. 검은 오러가 분수처럼 솟구쳐 레펜하르트를 강타했다. 이미 상대의 전격을 막고 있던 중이라 레펜하르트로서는 허를 찔린 셈이었다. 신음하며 레펜하르트가 뒤로 날려 갔다.

“크윽!”

이미 제라드의 캘러미티 혼은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다. 레펜하르트를 내팽개친 뒤 세이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시도해 보아라!”

세이어도 마력장을 펼쳤다. 다른 건 몰라도 저 기술만큼은 그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전력을 다해 아홉의 마력장을 전개한 뒤, 거기에 검은 오러까지 융합시킨다. 레펜하르트의 권마합신과 비슷한 계열, 투마융합이라 불리는 은의 시대에서 사용한 오러-마력 합일술이었다.

“그 대가는 네놈의 죽음이다!”

“간다, 이놈!”

제라드가 몸을 날렸다. 한 줄기 유성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순식간에 세이어의 코앞까지 쇄도해 웅장한 일권을 뻗는다. 여덟 파괴의 고리가 한 점으로 수렴되며 파괴력으로 화한다.

“캘러미티 혼!”

유성이 어둠에 충돌했다. 귀청이 찢어질 듯한 굉음을 울렸다. 전당 전체가 요동치며 빛의 파문이 연달아 터졌다.

콰콰콰콰콰쾅!

잠시 후…….

“어리석은 자여, 이 정도로 신을 해할 수 있을 거라 여겼느냐?”

폭연 사이로 멀쩡한 세이어의 모습이 드러났다. 천지를 진동시킬 가공할 일격, 8중첩 캘러미티 혼조차도 감당해 낸 것이다.

☆ ☆ ☆

‘제길! 안 통했나?’

레펜하르트는 이를 갈았다. 제라드의 주먹과 세이어의 마력장이 연신 스파크를 일으키고 있었다. 어떻게든 뚫고 들어가려 하지만 마력장은 굳건한 장벽처럼 제라드의 침범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다.

‘……결국 사부는 9중첩에는 도달하지 못하신 건가?’

그 의문은 세이어도 지니고 있었던 모양이다.

“바나텔을 죽였다기에 꽤 긴장을 했다만…….”

제라드의 주먹을 가로막은 채 세이어는 고개를 저었다.

“어째 별 차이가 없구나?”

제라드의 캘러미티 혼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전혀 발전이 없다. 발켄슈트의 9중첩 캘러미티 혼을 떠올리고 최대로 힘을 끌어낸 세이어 입장에선 살짝 실망마저 느껴질 정도다.

“그대의 시조는 이보다 나았다. 그에겐 미치지 못하는구나.”

세이어의 비난에 제라드가 입을 열었다. 피에 물든 수염 사이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그래. 확실히 9중첩은 아직 무리더만.”

레펜하르트 덕분에 진정한 캘러미티 혼에 대해 알게 되었다. 좋은 제자 둔 덕분에 늘그막에 마법 이론도 꽤나 편하게 배웠다. 시작을 알고, 과정을 알고, 결과를 아니 그 역시 언젠가는 9중첩의 경지를 넘볼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없었다.

9중첩의 진실에 대해 알게 된 게 고작 몇 달 전의 일이다. 그 짧은 시간 내에 궁극의 경지를 넘보고, 심지어 마법을 오러로 바꿔 가면서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

아무리 천하의 제라드라도 그렇게까진 할 수 없다. 세상이 그렇게 만만했으면 역대 짐 언브레이커블의 권왕이 왜 한 명도 9중첩에 도달하지 못했겠는가?

“확실히 초대 조사님의 경지는 아직도 갈 길이 요원하더군…….”

갑자기 제라드의 두 눈에 불꽃이 일렁였다.

“하지만!”

전신 근육이 놀랍도록 부풀어 오르며 거구의 노인이 백발을 휘날리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결과만 같으면 되는 거 아니겠냐!”

웃음을 터트리며 제라드가 왼팔을 들어 올렸다. 주먹을 강하게 쥐며 허리춤으로 가져간다. 여덟 파괴의 고리가 빛을 발하며 왼팔을 감싼다.

“타아아앗!”

이미 오른팔로 캘러미티 혼을 발동시킨 상태에서, 왼팔로도 똑같이 오러의 고리를 띄운 것이다. 그리고 그대로 왼 주먹을 뻗어 내며 우렁찬 기합을 터트린다.

“캘러미티 혼!”

콰아아앙!

근거리 캘러미티 혼이 조금의 파괴력 손실 없이 세이어의 마력장을 내려찍었다. 이번엔 세이어도 아까처럼 태연히 받아넘길 수가 없었다. 마력장이 크게 흔들리며 단숨에 뒤로 밀려갔다.

“으윽!”

하지만 여전히 마력장은 부서지지 않았다.

세이어는 발켄슈트 때를 상정하고 방어장을 펼쳤다. 진짜 9중첩 캘러미티 혼이라도 지금이라면 막을 수 있다. 8중첩을 연속으로 날린 정도론 이 방어를 뚫을 수 없다.

“더블 캘러미티 혼? 제법이구나, 이건 좀 놀랐다.”

……라며 세이어가 혀를 내두를 때였다.

“누가 이게 끝이라더냐?”

제라드가 이번엔 오른 주먹을 내뻗었다. 그것도 그냥 주먹이 아니었다. 여덟 파괴의 고리가 선명하게 빛을 발한다.

“어?”

캘러미티 혼이 또 방어막을 강타했다. 그 순간 세이어는 보았다. 한 점으로 수렴된 여덟 오러 고리가 강타 후 용수철처럼 도로 풀려나며 제라드의 팔에 휘감긴다?

‘이게 뭐야?’

이어서 왼쪽 주먹이 날아왔다. 역시 캘러미티 혼이었다. 오러 고리가 한 점의 파괴력을 낳고 다시 왼팔로 돌아간다. 그럼으로써 캘러미티 혼을 날리고도 여전히 기술이 풀리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다시 오른쪽, 그리고 다시 왼쪽.

콰콰콰콰쾅!

좌우로 연달아 캘러미티 혼이 터져 나왔다. 마력장 위로 무자비한 파괴의 폭격이 쉴 새 없이 터지고 또 터진다.

세이어는 경악했다. 이건 그냥 캘러미티 혼을 양손으로 날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캘러미티 혼의 연타다!

“타아아아앗!”

확실히 제라드는 발켄슈트의 경지엔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역대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계자들 중 선인의 위업에 안주한 이들은 하나도 없다.

“무릇 사내라면 스스로 길을 개척해야 하는 법!”

발켄슈트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 제라드가 찾아낸 그만의 해법.

바나텔의 생을 거둔 무한의 연격이 유성처럼 쏟아져 내렸다.

“캘러미티 러쉬!”

☆ ☆ ☆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흥분한 황소처럼 오직 앞으로만 나선다. 눈부신 황금의 뿔을 들이대며 찌르고, 찌르고, 찌르고, 찌르고 또 찌른다.

제라드는 양손에 오러 고리를 머금은 채 계속 연격을 퍼부었다. 중첩된 빛의 타격이 세이어의 순수 마력장 위로 겹겹이 쌓여 갔다.

파괴 위에 파괴가 닿고 그 파괴 위에 또 파괴가 덧씌워진다.

자신을 잊고, 적을 잊고, 세상을 잊고, 모든 것을 잊은 채 오직 파괴 자체만을 추구한다!

“타아아아아앗!”

날아드는 제라드의 캘러미티 러쉬, 그 본질이 변하기 시작한다. 무한히 쌓여가는 파괴력이 현실을 넘어서 파괴의 이미지, 그 자체로 화한다.

세이어의 안색이 바뀌었다. 그는 이미 이것을 한번 본 적이 있었다.

‘……아카식 이레이저Akashic erasure?’

짐 언브레이커블의 초대 권왕, 발켄슈트.

9중첩에 도달한 그의 캘러미티 혼은 당시의 세이어를 소멸 직전까지 몰았다. 한낱 인간의 몸으로 아카식에 도달해, 찰나일지언정 우주의 정보에 손을 뻗어 존재 기록을 지우는 데 성공했다.

정보를 조작, 재배열하는 아카식 드라이브와 달리 발켄슈트의 그것은 아카식의 극히 일부를 지우는 것에 한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훨씬 저열하고 한계가 있는 힘이다.

그렇다 해도 그것은 틀림없이 신을 죽이는 빛이었다.

그리고 지금 제라드 역시 그 빛을 발하고 있었다.

“끝을 보자, 세이어!”

모든 힘을 쥐어짜며 제라드는 캘러미티 러쉬를 이어 갔다. 이를 악물며 세이어도 모든 힘을 끌어 올렸다.

지금의 그는 방심한 상태가 아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제라드의 공격을 맞이했다. 설사 발켄슈트가 부활해 이 자리에 나타난다 해도 그때와 같은 꼴을 당하진 않는다!

“어림없다, 이놈!”

두 사람으로부터 섬광이 터져 나왔다. 아카식 드라이브와 원통의 공간을 넘어, 찬란한 광휘가 반파된 은의 전당까지 가득 채웠다.

콰콰콰콰콰콰!

그리고…….

“후우우우…….”

길게 내쉬는 숨소리와 함께 무한하게 이어질 것만 같던 캘러미티 러쉬가 끝났다. 빛이 사그라지며 두 개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10년은 더 늙어 보이는, 탈진할 대로 탈진한 제라드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세이어였다.

주먹을 내민 채 제라드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닿지 못했는가?”

세이어는 묘한 표정으로 제라드를 바라보았다. 분노인지 감탄인지 모를 애매한 얼굴이었다.

“정말 그대는 자신의 말을 지켰구나.”

제라드의 깨달음은 발켄슈트와 같지 않았다.

아홉 오러-마력 고리를 중첩시켜 일격에 신성에 닿는 것이 발켄슈트의 9중첩 캘러미티 혼.

반면 제라드의 캘러미티 러쉬는 오러로만 이루어진 8중첩 캘러미티 혼을 때리고 또 때리며 점진적으로 궁극의 파괴에 다다른다. 파괴라는 이미지를 극한까지 추구해 결국 우주의 정보 그 자체에 파괴라는 이미지를 심어 버린다.

비유하자면, 우주의 정보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아예 찢어발기는 방식이랄까?

제라드는 호언장담한대로 자신만의 길을 걸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신성에 닿은 것이다.

“그자는 물론이고 그자의 후예마저 이런 힘을 얻다니…….”

세이어는 고개를 저었다. 기진맥진한 제라드의 얼굴 위로 발켄슈트가 겹쳐 보였다. 언브레이커블 프로젝트를 발동할 때만 해도 설마 이런 결과가 나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눈앞의 이 노인이야말로 신이 낳은 괴물이었다.

“결코 살려 둬선 안 될 놈들이로구나, 짐 언브레이커블.”

세이어의 살의를 느끼며 제라드는 무릎을 꿇었다. 적 앞에서 무릎 꿇는 굴욕을 보이고 싶진 않았지만, 도저히 더 이상 남은 힘이 없었다.

“에구, 여기까지구먼…….”

육체는 물론이고 정신력마저 고갈되었다. 정말이지 한 줌의 힘조차도 남아 있지 않다.

나직한 한마디만을 남긴 채 제라드는 혼절해 버렸다.

“나머진 맡기겠다, 제자야…….”

그러자 세이어의 안색이 변했다. 그러고 보니 레펜하르트를 잊고 있었다!

“아차!”

3

전신의 마력과 오러와 융합한다. 결코 섞일 수 없는 두 기운이 섬세한 흐름을 통해 하나로 통합된다.

“권마합신!”

피투성이가 된 오른팔 위로 찬란한 빛의 고리가 떠오른다. 하나, 둘, 셋, 넷…….

점점 빛의 고리가 늘어나 광채를 드리운다. 일곱 개 파괴의 고리가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맥동한다.

거기에, 마지막 최후의 하나를 덧붙인다.

“천신天神의 권!”

여덟 파괴의 고리가 무시무시한 기세를 사방에 떨쳤다. 레펜하르트는 이를 악다물며 오른 주먹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이걸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저놈이!”

세이어는 당황하며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방어할 여유 따윈 없다. 캘러미티 러쉬를 막기 위해 순간적으로 너무 많은 마력과 오러를 끌어냈다. 고갈된 그릇에 다시 힘을 채우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고작 몇 초에 불과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억겁의 시간이나 다름없다.

“사부가 목숨 걸고 만들어 준 기회다…….”

레펜하르트가 몸을 날렸다. 모든 기력을 한 점에 모아, 모든 의지를 주먹에 실어 일권을 내지른다.

“놓칠 성싶으냐!”

여덟 파괴의 고리가 하나로 집약되며 빛의 창이 되었다. 강대한 재앙의 뿔이 세이어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캘러미티 혼!”

8중첩 캘러미티 혼이 불을 뿜었다. 비록 제라드의 캘러미티 러쉬에 비하면 하찮은 수준이지만 지금의 세이어에겐 죽음의 선고나 다름없다. 시야를 가득 메우는 파괴의 빛을 본 세이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크윽!”

사색이 되어 세이어는 마력을 끌어 올렸다. 아슬아슬하게 마력 일부가 움직였다. 저 공격을 막기엔 모자람이 있는 순수 마력이었지만…….

“대이적 마법, 암천이계!”

10서클 마법을 발동하기에 충분한 마력이기도 했다.

거대한 검은 구멍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저갱의 공간이 재앙의 뿔을 삼키며 대기를 떨쳐 울렸다.

콰콰콰콰쾅!

결국, 레펜하르트의 캘러미티 혼은 아공간 저 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식은땀을 흘리며 세이어가 헛웃음을 흘렸다.

“……진짜 운이 좋았군.”

현재 세이어는 아카식 드라이브와의 연결이 끊어져 있다. 예전처럼 10서클을 짧은 연산만으로 구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찰나의 순간 암천이계를 쓸 수 있었던 건 모두 제라드 덕이었다.

‘만일을 대비한 것이 이런 식으로 쓸모가 있을 줄이야.’

제라드의 캘러미티 혼이 9중첩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한 세이어다. 그래서 혹시 몰라 아공간을 여는 10서클 주문, 암천이계를 준비해 두었다. 그런데 제라드의 공격은 일격이 아니라 연타였기에 암천이계로 막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술식을 준비한 채 그냥 순수 마력장으로 버텨 냈다.

그것이 지금 그의 목숨을 살린 것이다.

“후후후, 인간의 마법사여. 이건 예상치 못한 모양…… 음?”

웃으며 고개를 돌린 세이어의 표정이 굳었다. 어느새 레펜하르트가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예상하고 있었다.”

왼손을 머리 위로 든 채 차분히 입을 연다.

“나도 명색이 마왕이라 불리던 자, 같은 마법사로서 그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는 뻔히 알 수 있지.”

그는 세이어가 암천이계를 준비할 것임을 꿰뚫어 봤다. 자신도 그 상황에서 무조건 인피니티 게이트부터 준비했을 테니까.

“같은 10서클 마법을 연속으로 쓰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고.”

남아 있는 모든 마력을 바닥까지 긁어낸다. 마력 허용량을 아득히 넘어 육체가 버틸 수 있는 한계치까지 끌어내고 또 끌어낸다.

“초월자의 권세!”

전신이 터지고 부서지는 걸 감수하며 끌어낸 마력을 정명한 언령에 의해 조율하고 재배열한다. 나직한 언령이 세상의 흐름을 한 줌 손끝으로 모아 간다.

아홉 개의 마력 고리가 떠올랐다. 마치 캘러미티 혼을 연상케 하는 빛의 고리였다. 하지만 그 마력 고리는 팔이 아닌 레펜하르트의 전신을 두르고 있었다.

“나는 파괴하는 자이자 소멸의 주인, 무한히 날아올라 업에 끊어 만물의 근원을 꿈꾸는 일격…….”

그것은 10서클의 강력한 마법이었다. 하지만 마력 흐름이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은의 시대, 수많은 마법에 통달했던 세이어조차도 생전 처음 보는 기묘한 술식이었다.

‘뭐지, 저 주문은?’

방해하긴 이미 늦었다. 레펜하르트의 마법은 막바지에 도달해 있다.

그렇다고 방어하기도 애매하다. 레펜하르트 말대로 막 암천이계를 쓴 탓에 여파가 남았다. 재차 암천이계 술식을 짜려면 여파가 사라질 때까지 1, 2분 정도는 기다려야 한다.

‘그렇다면…….’

세이어의 어깨 위로 영기가 솟구쳐 올랐다.

“맞받아치면 그만이다.”

남은 마력을 모조리 끌어내 그는 연산에 들어갔다. 저 마법의 정체를 모른다 해도 아무 상관 없었다. 무조건 최강의 마법을 준비하면 되는 것이다.

10서클 최강의 광역 마법이 엘드라스의 아토믹 버스트라면, 10서클 최강의 단일 주문은 바로 알하트란의 무극천광無極天光. 물질 쌍소멸pair annihilation의 힘을 현실에 구현하는 이 마법은 은의 시대 수많은 마법들 중에서도 당당히 최고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술식을 전개하며 세이어가 자신 있게 외쳤다.

“소용없을 것이다! 신성에 닿지 않는 한 이보다 강한 마법은 존재치 않으니!”

그런데 레펜하르트는 오히려 웃었다.

“그래? 그것참 다행이군.”

“……뭐?”

불길한 느낌이 들어 세이어가 인상을 찌푸릴 때였다.

주먹을 앞으로 뻗으며 레펜하르트가 시동어를 외쳤다.

“대이적 마법, 캘러미티 혼!”

☆ ☆ ☆

선인이 남긴 위업을 엿보고, 결과에서 과정을 유추하며, 마왕의 지혜와 지식으로 그것을 재해석한다. 초대 권왕 발켄슈트의 9중첩 캘러미티 혼, 그 위대한 깨달음의 일격을 철저히 분해하고 연구하고 조립하며 순수한 마법으로 재구성한다. 오직 마법의 힘만으로 하늘에 올라 저 멀리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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