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권 제81장 Knockin' on Heaven's Door (82/84)

제81장 Knockin' on Heaven's Door

1

인간과 신의 대결도, 세계의 존망도 상관치 않는다.

인류의 미래니, 대륙의 패러다임이니, 세상의 변화니 하는 것도 전부 관심 밖이다.

중요한 건 단 하나!

눈앞의 상대, 평생의 호적수를 쓰러뜨리는 것뿐이다!

콰콰콰쾅!

폭음이 끝없이 울려 퍼진다. 폭발 속에서 검성 바나텔이 검을 휘두르고 권황 제라드가 주먹을 내뻗는다. 진홍색과 황금색 오러가 연신 충돌하고 또 충돌하며 쉴 새 없이 충격파를 발한다. 벽마다 구멍이 뚫리고 천장이 무너지고 바닥이 여기저기 푹푹 꺼진다.

명색이 우주의 알, 고대에서도 특별하게 강력한 구조를 지닌 방어형 건축물이었다. 현세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강인한 재질이지만 이 둘의 격돌을 감당하기엔 역시 역부족이었다. 두 빛의 오러가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주위가 만신창이가 되어 간다.

“잘근잘근 으깨 주마, 바나텔!”

“내가 할 소리다, 제라드! 그 잘난 배때기를 쭉 갈라 내장을 뽑아 주마!”

전신이 피로 물들어 있었지만 두 사람 다 자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그저 평생 갈고닦은 기량을 총동원해 싸우고 또 싸운다.

그러던 중이었다.

갑자기 주위를 밝히던 빛이 꺼지고 짙은 어둠이 깔렸다.

“응?”

“뭐지, 이건?”

제라드와 바나텔은 잠시 뒤로 물러나 사방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희미한 붉은 빛이 비치며 어둠이 희미하게 가셨다. 바나텔은 인상을 썼다.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제라드가 빙그레 웃었다.

“잘난 제자 놈이 뭔가 했나 보군.”

작전이야 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레펜하르트와 카를이 아무 꿍꿍이 없이 이곳에 왔다는 것조차 모를 정돈 아니다. 애당초 그의 제자는 생각이 너무 많아 무술이 더딘 녀석 아니었나?

‘……근데 그 녀석, 20대 후반인데 벌써 6중첩이잖아? 사실 더딘 것도 아니네?’

바나텔이 주위를 보며 차갑게 뇌까렸다.

“아무래도 상황이 예사롭지 않군.”

진홍색 오러가 검을 중심으로 거대하게 뻗어 나온다. 순식간에 드넓은 지하공간이 홍염의 오러로 넘실거린다. 바나텔의 필살기, 참성검 아틀라스의 기둥이었다.

“결판을 내겠다, 제라드!”

넘쳐흐르던 진홍빛 오러가 초극압축되며 한 자루 빛의 몽둥이가 된다. 관통격의 자세를 잡는 바나텔을 보며 제라드도 허리춤으로 주먹을 가져갔다.

“아포칼릭스 스팅거인가? 그걸론 힘들다는 걸 알 텐데?”

이미 두 사람은 자신의 궁극기, 아포칼립스 스팅거와 캘러미티 혼으로 한차례 격돌한 후였다. 처음 부딪쳤을 땐 서로의 위력을 잘 몰라 증폭된 파괴력의 여파에 둘 다 걸레짝이 되었지만, 이미 한번 겪은 후라 예전처럼 함께 쓰러지는 상황은 피한 것이다. 뭐, 그래 봤자 차근차근 피해가 쌓여 결과적으로 걸레짝이 된 건 마찬가지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다!”

웅웅웅웅!

바나텔의 검이 요란스러운 검명을 떨친다. 원래 검이 울 땐 은은하다는 식의 표현을 쓰는데, 얼마나 맺힌 기운이 방대한지 검명이 우렁차기 그지없다.

검을 겨누며 바나텔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받아 보아라, 아폴칼립스 스팅거 리비전!”

“음?”

제라드는 한쪽 눈을 치켜떴다. 리비전revision? 개정판이란 의미인가?

‘뭐가 개정판이라는 거야? 그냥 똑같은데?’

무식하게 많은 블레이드 오러를 무식하게 꾸역꾸역 뭉쳐다가 무식하게 푹푹 쑤셔 대는 기술이 아포칼립스 스팅거다. 지금 바나텔의 자세나 기세는 예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때 압축된 진홍색 블레이드 오러에 변화가 일어났다.

위이이이잉!

몽둥이 같던 둔탁한 오러가 칼날처럼 예리해지며 그 표면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돌기 시작한다.

“어?”

경악해 제라드가 입을 쩍 벌렸다. 더 이상 아포칼립스 스팅거는 무식한 오러 몽둥이가 아니었다. 평범한 다른 오러 유저들처럼 한 자루 날카로운 검이 되었다!

“좋아! 성공했어! 하하하하하!”

통쾌해하며 바나텔가 마음껏 웃음을 터트렸다.

“봤느냐, 제라드? 드디어 오러에 절삭력을 담는 데 성공했다!”

어이가 없어 제라드는 헛웃음을 흘렸다.

“자, 잘났다, 그것참…….”

아무리 평범한 오러 유저라도 한 넉 달이면 익힐 수 있는 것이 저 오러 절삭력 부여 운용이다. 재능 좀 있다 싶으면 사나흘 만에 터득하기도 한다. 진정 하늘이 내린 천재라면…….

‘러스, 그 녀석은 한 4초 걸렸다던가?’

러스나 타시드 같은 경우엔 오러 각성하자마자 바로 절삭력을 담아 휘두를 수 있었지. 그 쉬운 걸 40년 넘게 걸려서 이제야 성공해 놓고 저리 좋아하는 것이다. 게다가 말투 보니까, 완벽히 익힌 것도 아니고 그간 계속 시도했는데 이제야 성공한 눈치다. 뭔가 호적수로서 서글퍼질 지경이다.

하지만 제라드는 이내 표정을 굳혔다.

‘가만, 이거 비웃을 게 아닌데?’

생각해 보니 보통 상황이 아니었다. 쌩 몽둥이 오러였던 아포칼립스 스팅거로도 바나텔은 제라드의 8중첩 캘러미티 혼에 필적했다. 그리고 몽둥이에 맞는 것과 칼에 찔리는 것, 어느 쪽이 더 위험한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파파파파팟!

가공할 기운이 예기를 띤 채 제라드의 전신을 압박해 온다. 제라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와 닿는 기세만으로도 저 기술이 예전의 아포칼립스 스팅거와 얼마나 다른지 실감이 났다. 캘러미티 혼 8중첩으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질 않는다.

“후후후…….”

그러나 제라드는 오히려 호승심을 끌어 올렸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호탕하게 외친다.

“좋다! 오너라, 바나텔!”

관통격의 자세를 취한 채 바나텔이 몸을 날렸다.

“타아아아앗!”

흥분과 기대, 두려움과 불안이 공존한다. 제라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어떤 때에도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았던 일격을 준비하며 당대의 권황은 눈을 빛냈다.

“캘러미티 혼!”

☆ ☆ ☆

우르르릉!

사방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세렐라인과 레어폴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서 있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극심한 진동이었다.

“꺄아악!”

“크윽! 누님,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간신히 일어나며 레어폴이 세렐라인을 다그쳤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모든 시스템이 정지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파악되지 않았다.

아카식 드라이브가 침묵한 지금, 제어실 내부는 희미한 마력등만이 간신히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비상 조명 시스템이 작동한 덕이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이제 안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조작도 명령도 먹히지 않았다. 심지어 이 제어실을 나가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공간 포털은 물론이고 문조차도 열리지 않는다.

“모르겠어…… 아무것도 모르겠어…….”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던 이 제어실이 이젠 그들의 감옥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 속에서 세렐라인은 무지無知의 공포에 떨었다.

그러던 중이었다.

“세렐라인.”

음성이 들렸다. 그녀의 정신에 직접 와 닿는 마법 음성이었다. 세렐라인이 제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세이어시여…….”

차분한 음성이 이어졌다.

“나를 실망시켰구나.”

“요, 용서를…….”

머리를 조아리며 그녀는 벌벌 떨었다. 신을 실망시켰으니 그 진노가 두려웠다.

그러나 세이어는 그리 분노하지 않은 듯했다.

“물론 용서한다, 나의 딸아.”

그것은 딸을 사랑하는 아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무가치한 사물을 보는 무관심에 가까운 음성이었다.

“네 능력이 미천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거늘, 어찌 그것을 탓하겠느냐?”

등골이 오싹해 세렐라인은 더더욱 떨었다. 그리고 물었다.

“이제 어찌하오리까?”

자신이 실패했으니 저 이단자들이 감히 세이어를 침탈하려 들 것이었다. 그녀의 신의 안위가 걱정된다.

“기다려라.”

세이어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나의 뜻은 펼쳐질 것이다.”

☆ ☆ ☆

세이어는 눈을 떴다. 수많은 수정 화면과 입체 영상, 복잡한 기기들이 가득 찬 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눈앞의 화면을 보며 인류의 신은 중얼거렸다.

“역시 멈췄군.”

시공융합포 니르바나Nirvana를 가동시키기 위해 쉴 새 없이 돌아가던 제어 코드 연산이 정지되었다. 아카식 드라이브가 휴면 상태로 들어간 탓이었다.

“묘한 기분인데…….”

니르바나의 가동이 정지된 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니었다. 어차피 아카식 드라이브의 침묵은 일시적일 뿐이다. 금방 재가동되어 원래대로의 작업을 재개할 것이니 굳이 걱정할 일이 되지 못한다.

“아카식과 분리된 것이 이런 느낌이었나?”

자그마치 일만 이천 년, 상상하기도 어려운 억겁의 시간 동안 아카식 드라이브는 한시도 쉬지 않고 세이어에게 영향을 끼쳐 왔다. 자유와 상실감을 동시에 느끼며 그는 피식거렸다.

“그렇군, 내가 왜 안 어울리는 짓을 했나 했더니 아카식 드라이브의 영향이었어.”

레펜하르트 일행이 쳐들어왔을 때, 사실 세이어는 먼저 나서 싸우려 했다. 그런데 순간 변덕이 생겨 수하들을 움직이게 하고 그냥 자리를 지켰다. 평소의 자신답지 않은 선택이었다.

아카식 드라이브가 멈추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신성은 모험을 허락하지 않지.”

그간 세이어는 레펜하르트를 어느 정도 무시하고 있었다. 아카식의 무한한 힘을 다룰 수 있는 그에게 있어, 레펜하르트는 아무리 상식을 초월한 짓을 저지른다 해도 한낱 인간일 뿐이었다.

그러나 정작 아카식 드라이브 자체는 레펜하르트를 무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레펜하르트는 몇 번이나 아카식 시스템의 전지 영역을 속이고 상식을 벗어난 결과를 내놓았다. 마음 없는 신에게 있어 그 사실은 현재가 아닌 미래의 위협이었다. 현재로선 별 위험이 없다 해도, 미래엔 어떤 수법으로 자신을 위험에 처하게 할지 모른다.

그래서 아카식 드라이브는 스스로를 보호할 가장 강력한 검, 세이어를 본체에서 멀리 떨어트리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 세이어를 앞세워 대적자를 모두 처리하는, 빠르지만 위험한 방법보다는 수하들을 먼저 내세워 상대의 숨은 패를 모두 드러내게 하는 느리지만 확실한 길을 택했다.

과연, 레펜하르트에겐 숨겨진 패가 있었다.

“용케도 알아냈구나, 인간의 마왕이여.”

세이어는 새삼 레펜하르트의 능력에 감탄했다.

정보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자의 손에 들어갈 때 비로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는 법이다.

세이어의 의식 속에서 테스론은 자신이 뭘 아는지도 모른 채 수많은 정보를 닥치는 대로 쓸어 모았다. 그 정보 속에는 아카식 백업 시스템의 존재도 있었다. 하지만 테스론은 그걸 ‘알고’ 있었을 뿐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마치 왕성에 몰래 들어간 도둑이 읽을 줄도 모르는 수많은 서류들을 몽땅 훔친 것과 비슷하달까? 그리고 그 서류들은 고스란히 레펜하르트에게 전해졌다.

저 절세의 마왕은 가공할 통찰력과 지혜로 엉망진창의 정보 소용돌이 내에서 보석만을 골라냈다. 그 결과 세이어 템플이 돌파되었고 필레나의 언데드 군세가 패했으며 결국엔 아카식 드라이브마저 침묵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 정보를 토대로 작전에 응용하는 능력도 나무랄 데가 없군.”

저 작전의 가장 큰 장점은, 세이어가 어떤 식으로 나와도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이어가 나서지 않고 수하만을 부린 결과, 아카식 드라이브는 정지되었다. 그럼 세이어가 직접 나섰으면 뭐가 달랐을까?

그건 아니다. 그랬다면 갈라진 다른 일행이 백업 시스템을 부수어 똑같은 결과를 낳았겠지. 레펜하르트의 패를 모르는 한, 아카식 드라이브는 어떤 식으로든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뭐, 사실 이건 레펜하르트가 아니라 카를이 잘나서 이룬 결과였지만.

세이어는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군, 고작 인간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이제 그는 아카식의 가호를 받지 못한다. 강대한 권능과 마력은 여전히 지니고 있지만 그것에 한계가 생겼다. 평소처럼 죽음에서 부활하거나 고갈된 신성을 다시 채우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일만 이천 년의 삶 속에서 이토록 위기에 처했던 적이 있었던가?

그런데도 세이어의 표정엔 그다지 위기감이 없었다, 오히려 안도에 가까운 미소가 떠올라 있다.

“결국 아카식의 선택이 옳았다는 건가?”

아카식 전지 영역은 세이어로 하여금 먼저 나서기보단 기다리기를 종용했다. 얼핏 보기엔 양쪽 모두 어차피 결과가 같아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달랐다.

“덕분에 시간을 벌 수 있었으니.”

중얼거리며 세이어가 손가락을 튀겼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혀를 찼다.

“아, 포털 시스템이 막혔지, 참.”

대신 품에서 작은 깃털 하나를 꺼낸다. 깃털을 날리며 세이어가 뇌까렸다.

“이동. 생명마학 중앙 제어실.”

깃털이 소멸하며 환한 빛이 전신을 감쌌다. 곧이어 세이어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 ☆ ☆

비상 조명이 흐릿하게 사물을 밝히는 한 강철의 방. 수많은 원통형 수조가 가득한 그곳은 수천 년 동안 인류의 신이 자신의 새로운 육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R.X 시리즈, 성배 계획, 언브레이커블 프로젝트가 기획되었고 진행되었다.

그곳에 홀연히 한 사내가 나타났다. 검은 장발의 머리칼에 날씬한 체구를 지닌 놀라운 미모의 청년, 레펜하르트의 육신을 입고 있는 세이어였다.

제단에 모습을 드러낸 세이어는 천천히 수조들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이어시여.

세이어는 고개를 돌렸다. 여인의 형상을 한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며 입을 열고 있었다.

-용서하소서…….

그림자 사이로 연기처럼 새하얀 재가 떠다닌다. 재와 어둠만으로 이루어진 허상, 그걸 보며 세이어는 혀를 찼다.

“무리했구나, 필레나. 더 이상 현세에 존재할 여력이 없는가?”

세이어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재와 어둠이 사르르 흘러내렸다.

“미안하구나. 신성이 침묵했으니 지금의 내 힘으로는 그대를 구원할 방도가 없다.”

환영처럼 흔들리며 필레나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제어를 벗어난 아카식의 권능은 그녀의 심기체를 철저히 파괴했다. 이제 그녀는 그저 해가 뜨기 전 잠깐 반짝이는 새벽녘의 아침 이슬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직 현세에 머물고 있었다. 아직 포기할 수 없는 집착이 있었기에.

세이어가 필레나에게서 손을 뗐다. 그리고 수조를 돌아보며 무심히 물었다.

“완성되었느냐?”

-……예.

수조의 혼탁한 액체 속엔 한 벌거벗은 남성의 육신이 떠 있었다. 전신이 탄탄한 근육질에 완벽한 균형을 지닌 청발의 아름다운 사내였다.

푸른 머리에 엘프와 드워프를 섞은 듯한 외모를 지닌 그는 명백히 인간이 아니었다. 지금은 사라진 아득한 고대의 선주 종족인 것이다. 바로 인류의 신, 세이어처럼.

하지만 그렇다고 세이어의 원육체인 것도 아니다. 선주 종족임에도 불구하고 수조 속 사내는 현 세이어의 육체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로 전생의 마왕, 레펜하르트의 얼굴이다. 또한 전신이 강인한 전사처럼 고도로 단련되어 있었으니 테스론 시절의 육체와도 비슷해 보인다.

세이어는 중얼거렸다.

“이것이 완성되기 전 그자를 맞이했다면 위험했겠지.”

자신이 그동안 움직이지 않은 것은 이 육체를 위함이었다. 세이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구현할 수 없었던, 필레나의 능력으로만 조정 가능했던 이 육신이야말로 인류의 신이 가져야 할 진정한 신체神體이니까.

-신체를 깨우겠나이다…….

필레나가 연기처럼 스르르 수조 앞으로 다가섰다. 입가에 손을 가져가며 수조를 향해 훅 분다. 어둠의 여왕, 사상 최강의 흑마법사인 그녀가 영혼에 남은 마지막 기운을 끌어내 잠든 신체에 일깨움의 숨결을 불어 넣는다.

두근-!

심장이 뛰었다.

혼탁한 수조 속 용액이 부글거리며 공기 방울을 토하기 시작했다.

“명하신 바를 행했습니다, 세이어시여.”

촛불에 비친 그림자처럼 연신 흔들리며 필레나는 고개를 돌렸다.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그녀가 인류의 신을 바라보았다. 뭔가를 갈구하는 눈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다. 이미 세이어는 그녀를 구할 수 없다. 그런데 무엇을 바라고 저런 눈빛을 하는가?

세이어는 알고 있었다.

“그대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는 필레나에게 약속했다. 레펜하르트의 목을 들고 오면 그녀의 원을 들어주겠노라고. 그리고 그녀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대는 대가를 받기에 충분한 자격을 지녔으니…….”

자비로운 표정으로 세이어가 말했다.

“그대는 사랑하는 이의 영혼과 육신을 다시 얻게 될 것이다.”

필레나가 세이어를 위해 행한 일은 결코 적지 않다. 그는 결코 약속을 어길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필레나는 이제 곧 사라진다. 그렇기에 세이어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묻겠다, 여인이여.”

그녀의 진정한 바람이 무엇인지를.

“네가 원하는 것은 테스론이 살아나는 것이냐, 아니면 테스론과 함께하는 것이냐?”

필레나는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여인의 미소라지만, 이미 악령이 되어 버린 그녀가 환하게 웃는 모습은 그저 기괴할 뿐이다.

-저는…….

뒤틀린 미소, 섬뜩한 눈빛으로 그녀는 소원을 말했다.

인류의 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뜻을 알겠다.”

갑자기 세이어의 눈동자가 빛을 잃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으며 핏발 선 두 눈을 드러낸다. 머리를 양손으로 움켜쥔 채 고통 어린 비명을 터트린다.

“으아아악!”

그곳에 더 이상 세이어는 없었다. 있는 것은 무한의 어둠 속에서 고통받으며 미쳐 가던 테스론뿐이었다. 갑작스레 밀려오는 현세의 감각은 그에게 격통일 뿐인 것이다.

필레나가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테스론!

검은 그림자가 테스론의 전신을 휘감았다.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사지를 얽매며 사이한 기운을 흩뿌린다.

-아아, 테스론…….

“피, 필레나?”

당황하며 테스론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필레나? 이게 필레나인가?

그의 눈에 비친 것은 필레나가 아니었다. 필레나의 모습을 한, 재와 어둠으로 이루어진 정체불명의 무언가일 뿐이다!

“뭐, 뭐야!”

필레나가 두 팔을 벌려 테스론의 허리를 껴안는다. 사랑하는 이를 느끼며 더더욱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든다.

-테스론…….

잿가루가 흘러들어 온다. 어둠이 스며들어 온다. 눈, 코, 입, 귀, 전신을 통해 끔찍한 사기가 밀려오고 있다. 테스론이 경악해 소리쳤다.

“무슨…… 무슨 짓이야?”

필레나가 감당해야 했던 아카식 제어의 반동, 그것이 테스론에게도 똑같이 스며들고 있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피부가 갈라지고 피가 솟구치고 내장이 쥐어뜯기고 뼈에 금이 간다.

“크, 크어어억!”

피를 토하며 테스론은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다. 손가락과 발가락, 사지 말단이 재가 되어 천천히 흩어져 갔다. 테스론의 눈동자가 극심한 공포의 빛으로 물들었다.

“정신 차려, 필레나아아!”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제 떨어지지 않을 거야…….

단지 사랑하는 이의 품에 포근히 안겨.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야…….

그이의 온기를 만끽할 뿐.

암흑이 두 사람을 감쌌다. 어둠이 입을 열어 공허를 드러낸다. 무저갱이 열리고 테스론과 필레나의 영혼이 산산이 갈리며 무無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필레나가 눈웃음을 쳤다. 집착과 광기가 눈동자 위로 선명히 빛났다. 그녀가 부끄럽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이제 영원히 함께야, 테스론…….

“으아아악!”

테스론은 절규했다. 사력을 다해 현세에 손을 뻗으며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그는 이미 어둠에 완전히 먹히고 있었다.

“필레나아아아!”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결국 두 연인은 현세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재와 어둠이 바람에 휘날려 허공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완벽한 침묵이 공간을 메웠다.

갑자기 수조가 박살 났다.

콰쾅!

혼탁한 액체가 넘실거리며 바닥으로 흐르며 근육질 사내가 수조 밖으로 걸어 나왔다. 깨진 수조 파편이 무수히 떨어졌지만, 알몸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상처가 없다. 조각 같은 몸을 드러내며 사내가 숨을 내쉬었다.

“후우우우…….”

사내가 눈을 떴다. 푸른 머리칼 아래 흑요석 같은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둘 다 완전히 사라졌나?”

상황을 살핀 뒤 사내는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필레나와 약속했다.

자신의 숙업을 풀어 준다면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테스론을 다시 그녀에게 돌려주겠다고.

그것은 테스론의 영혼이 깃든 육체까지 함께 돌려주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레펜하르트의 육체가 지닌 재능은 지나치게 위험하다. 그래서 원래는 테스론의 영혼을 다른 육신으로 옮겨 살려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테스론은 세이어의 기억을 통해 너무도 많은 걸 보게 되었다. 위대한 신의 진실은 결코 세상에 알려져선 안 되는 것이니, 무한의 어둠에 던져 그 영혼의 모든 기억을 지워 버리려 했다. 어설프게 지워서는 희대의 네크로맨서 필레나가 도로 기억을 되살려 버릴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어떻게든 필레나와의 약속은 지킬 셈이었던 것이다. 모든 기억을 지우고 백치가 된다면 그 영혼은 이미 테스론이라 할 수도 없겠지만, 어쨌건 ‘돌려준다는 약속’을 어기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상황이 이리되었으니, 만약 필레나가 테스론이라도 살려 달라는 식으로 나온다면 거부하고 소멸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녀의 소원이 그의 뜻과 같아…….

“약속은 어기지 않았다.”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모든 것은 뜻한 바대로 되었고, 그는 이제 원하던 새로운 육체를 얻었다.

사내가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완벽하군.”

레펜하르트의 외모에 테스론의 몸을 가진 선주 종족의 사내, 세이어는 흐뭇하게 웃었다.

“이걸로 일만 이천 년을 더 버틸 수 있게 되었다.”

2

아카식 드라이브가 침묵하자 더 이상의 저항은 없었다. 그토록 몰려오던 골렘들이나 천사병, 심지어 아다만드릴 슈트를 걸친 R.X 시리즈도 모두 물러났다. 제어가 사라지자 대기 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덕분에 아틸카 일행은 더 이상의 전투 없이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미리 받은 지도를 바탕으로 체력을 조절해 가며 언더그라운드 중심을 향해 달려간다.

이윽고, 커다란 방과 연결된 금속질의 터널이 나왔다. 아치형의 터널을 바라보며 아틸카가 말했다.

“여긴가?”

터널 끝은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아틸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인류의 신 세이어, 그리고 고대의 신성을 담은 아카식 드라이브의 본체가 저 너머에 있다.

하지만 아틸카 일행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팔다리를 풀며 러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가 제일 가까웠나 보군요.”

다른 일행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니야며 레펜하르트 일행도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들 체력은 괜찮은가?”

터널을 응시한 채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관에 한발 넣은 상태였지만, 지금은 전신에 상처 하나 없고 기력도 충만해 보였다. 미리 준비한 힐링 포션과 특제 회복수 덕분이었다.

이니야며 시리스, 아스레일 등이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레펜하르트 님.”

“완벽한 상태는 아니지만 전투엔 지장 없어요.”

“그 포션 진짜 효력 좋더군요, 폐하.”

실란이 가느다란 두 팔로 알통 포즈를 취하며 으쓱거렸다.

“완전 멀쩡해요, 걱정 마요, 레펜 씨.”

모두들 컨디션을 상당히 회복한 모습이었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멀쩡해야지. 아틸카를 갈아 마셨는데.”

“……네?”

“잠깐, 레펜 씨? 지금 뭐라고?”

뭔가 굉장히 흘려들을 수 없는 듯한 이야기를 들은 기분이? 이니야며 실란이 기묘한 표정을 지었고 러스와 타시드는 또 한 번 열심히 딴청을 피웠다. 레펜하르트가 화제를 바꿨다.

“사부는? 사부는 연락 안 됐나?”

카를이나 시리스와 달리 제라드나 세르펠에겐 마법적 소양이 없다. 그래서 레펜하르트는 그 둘에게 따로 마력 충전식 1회용 통신 마도구를 만들어 주었다. 손가락만 달려 있으면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조작법이 쉬운 물건이라 세르펠도 쉽게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카를이 고개를 저었다.

“전혀 응답 없습니다. 아마 연락하실 겨를이 없지 싶은데요.”

잠시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설마 사부가 당했나?’

그러나 그는 이내 안색을 폈다. 제라드 성격에, 한창 전투 중 연락 온다고 신경 쓸 리가 없는 것이다.

‘싸우느라 정신 팔려서 통신기 있다는 사실조차 까먹었을 확률이 더 높지?’

하여튼, 언제까지고 제라드를 기다릴 수만은 없다. 아카식 드라이브의 휴면은 제한 시간이 있고, 그들은 이미 세이어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휘이이잉…….

어둠뿐인 터널에선 음산한 바람 소리만 들려오고 있었다. 두려움을 숨기지 않은 채 시리스가 물었다.

“저곳에 세이어가 있을까요?”

그녀는 혹여, 세이어가 이대로 도망쳤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사실 세이어 입장에선 굳이 지금 같은 위기에 전투를 벌일 이유가 없다. 그냥 몸을 빼 잠시 숨어 아카식 드라이브가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니까.

카를이 뺨을 긁었다.

“뭐, 세이어가 없다고 딱히 우리가 불리하진 않지요. 아카식 드라이브 본체를 아무 방해 없이 부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카를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없었다. 확실히 세이어가 자신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아카식 드라이브를 비운 채 이탈할 리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레펜하르트 일행이 텅 빈 아카식 드라이브를 제대로 부술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워낙 복구 시스템이 철저하니, 파괴할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세이어 입장에선 자리를 지키나 비우나 모두 장단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확신을 할 수는 없군요.”

그때, 레펜하르트가 단언하듯 말했다.

“있다.”

추측이나 짐작이 아니었다. 그는 터널 너머 어둠을 바라보며 확신을 느끼고 있었다.

“느껴진다.”

어둠 너머, 강대한 힘이 존재한다. 그 거대한 권능은 차분히 갈무리되어 자신의 기세를 은은히 사방에 흩뿌리고 있다. 너무도 명확해 결코 착각할 수 없는 존재감이다.

“아주 노골적으로 손짓하고 있군.”

앞장서서 레페하르트가 터널로 한발 들어섰다.

“자, 그럼 초대에 응해 볼까?”

☆ ☆ ☆

터널 끝은 거대한 전당이었다.

커다란 기둥이 무수히 들어서 천장을 받친다. 벽마다 복잡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져 있고 천장마다 휘황찬란한 마력등이 촘촘히 박혀 내부를 밝힌다. 주위를 둘러보며 아스레일이 중얼거렸다.

“마치 왕궁의 알현장 같군요.”

“스케일이 무지막지하다는 걸 제외하면 말이지.”

카를의 말대로, 전당은 높이가 40여 미터에 직경은 200여 미터가 넘었다. 천장을 받치는 기둥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건물 6층 높이에 달한다. 질릴 정도로 거대한 공간이었지만 레펜하르트 일행은 시큰둥했다.

그간 격납고니 실험실이니 연구소니 하는 식으로 이 정도 거대한 공간은 질리게 본 것이다. 이제 와서 딱히 사이즈에 감탄할 시기는 지났다.

마켈린이 호기롭게 외쳤다.

“흥! 그랜드 포지 중앙 광장도 이 정도는 됐거든? 이제 와 놀랄 것도 없다!”

“그나저나…….”

문득 레펜하르트가 카를과 아스레일을 돌아보았다.

“자네들은 싸울 수 있겠나?”

두 사람이 가진 고대 무구, 엘드릴 기간투스와 바포메트 슈트를 두고 한 말이었다.

이곳에서 벌인 사투 덕분에 저 강력한 고대 아티팩트들은 이미 걸레짝이 되었다. 다른 일행들이야 아무리 상처 입어도 아틸카 좀 갈아 마시면(?) 낫겠지만 아티팩트는 그렇게 바로 회복되지 않는다. 워낙 여기저기 부서져서 언제 기동 정지될지 모를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생각은 없다.

“저는 아직 싸울 수 있습니다, 폐하!”

“걱정 마십시오. 다른 사람 발목 잡지는 않을 테니까요.”

아스레일도 카를도 투지를 불태웠다. 그야말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직한 모습이었다. 뭐, 레펜하르트는 전혀 감명받은 기색이 아니었지만.

“발목이란 게 잡히기 싫다고 안 잡히나? 그냥 힘없으면 잡히는 거지.”

투덜대며 레펜하르트가 두 사람의 갑옷에 마력 감지를 걸었다. 반파된 엘드릴 기간투스와 바포메트 슈트에 마력을 흘려 상태를 살핀다.

‘많이 부서지긴 부서졌네. 비상 전투 모드로 들어갔잖아?’

마력과 오러 증폭력은 극히 낮아지고, 아티팩트에 내장된 출력 대부분이 사용자의 생명 보호를 위해 방어 쪽에 집중되어 있다. 방어력은 원래의 80퍼센트 정도, 공격력은 20퍼센트 이하로까지 떨어진 상태다.

“그래도 방패 노릇은 할 수 있겠군.”

어차피 이들에게 바란 건 공격력이 아니라 적의 공격을 대신 맞아 줄 방패 역할일 뿐이었다. 공격력을 바랐다면 스탈라나 다른 오러 유저들을 굳이 돌려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죽어도 원망 말게.”

레펜하르트의 허락이 떨어졌다. 아스레일이 기뻐하며 외쳤다.

“안타레스를 위해서라면 웃으며 죽을 수 있습니다!”

카를도 함께 웃었다.

“죽는 건 상관없지만 지면 원망할 겁니다. 그러니 꼭 이기십시오.”

그렇게 걸음을 옮기며 레펜하르트 일행은 전당 내부를 계속 이동했다.

이윽고 저 멀리, 전당 끝자락에 위치한 커다란 왕좌가 보였다. 복잡한 기계 장치가 얼키설키 얽혀 수많은 파이프라인과 연결된 강철의 왕좌에 푸른 머리칼의 한 사내가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류의 신, 세이어였다.

☆ ☆ ☆

세이어 템플 언더그라운드의 심장부, 은의 전당.

지상 최대의 웅장함을 자랑하는 이 거대한 홀 안에 한 무리의 남녀가 모여 있었다.

성별과 나이를 초월해 모인, 모두가 대륙에서 손꼽히는 강자들이었다.

결코 부서지지 않는다는 강철의 육체를 지닌, 짐 언브레이커블의 당대 계승자이자 세계를 한 번 파멸시킬 뻔한 전설의 마왕 레펜하르트.

한 자루 검으로 영혼조차 얼려 버린다는 엘프 최강의 검사, 눈의 여왕 이니야.

불사의 육체, 무한한 자연의 힘을 다루는 트롤 주술사, 혈신 아틸카.

여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필라넨스의 신관, 실란 필 마르시스.

그리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일일이 짚어 주기엔 숫자가 좀 많구먼.’

일행을 둘러보며 레펜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자리에 있는 그의 동료들은 무려 아홉 명, 전생 때 알렉스 일행의 거의 두 배다. 정말이지 용케 아무도 잃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싶을 정도다.

‘카를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

어쨌거나 기분이 묘하다. 운명의 재귀再歸가 느껴지는 상황이랄까?

전생의 마왕 레펜하르트는 반대편 위치에 서서 대륙의 강자들과 맞서 싸웠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자신과 함께한다. 검성 사이러스는 배신의 기사 러스가 되었고 테스론은 자신의 육체가 되었다. 엘린은 사라지고 그의 아비였던 실란이 이 자리에 있다. 물론 빛의 마도사 제이드는 없지만…….

‘그런 놈 따윈 필요 없고.’

전생의 사천왕 역시 건재하다. 시리스, 아틸카, 마켈린, 타시드. 관계가 조금 변하긴 했어도 여전히 든든한 동료로 이 자리까지 함께 왔다.

현생의 새로운 인연도 생겼다. 이니야, 카를, 아스레일. 모두가 소중하고 귀한 동료들이었다.

‘실로 많은 것이 바뀌었어.’

아니, 어쩌면 그리 변한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레펜하르트와의 인연이 없었다면 저들은 여전히 전생의 행보를 걸어, 전생의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래, 정말 변한 것은 내 자신이겠지.’

이제 마지막 한 걸음만 내디디면 오랜 숙원이 이루어진다. 흥분을 애써 가라앉히며 레펜하르트는 단상을 올려다보았다.

인류의 신, 세이어.

그는 다리를 꼰 채 턱을 괸 오만한 자세로 일행을 오시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카식 드라이브의 침묵으로 인해 신성과의 연결이 끊어졌을 텐데도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세이어가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잘도 왔구나, 인간의 마법사여.”

레펜하르트가 대꾸했다.

“그렇게 어렵진 않았다. 세이어.”

실은 필레나 때문에 죽을 뻔했었지만, 그는 애써 태연을 가장했다. 싸우기도 전에 기세에서 밀리고 들어갈 수는 없다.

문득 세이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습이 많이 변했군?”

확실히, 더 이상 레펜하르트는 예전 테스론의 얼굴이 아니었다.

이제는 완연히 검은빛을 띠는 흑갈색 머리칼 아래 차분한 검은 눈동자가 빛을 발한다. 우락부락한 인상 대신 선이 굵으면서도 이지적인 인상이 안면 가득 담겨 있다. 권왕의 육체 위로 지고의 마법사였던 마왕의 모습이 겹쳐진다.

레펜하르트도 비슷한 표정으로 세이어를 바라보았다.

“그거, 내 육체가 아닌 것 같은데.”

전생의 육체와 얼굴은 같지만, 지금 세이어의 머리칼은 아름다운 푸른색이었다. 적어도 인간에게선 절대 나올 수 없는 색상이다. 귀도 짧고 뾰족하다. 세이어의 원 종족이었던 선주 종족의 육체인 것이다.

게다가 몸도 달라졌다. 빼빼 마른 마법사의 육체가 아니라 어깨도 넓고 전신이 알차게 단련되어 보인다.

“그대의 육체는 자격 있는 자가 거두어 갔다. 원래 육신이 아쉬운가?”

“전혀 미련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제 와서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지.”

“그렇군.”

마치 오랜만에 만나 안부를 묻는 듯한 담담한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말투뿐, 단상과 홀 사이에서 점점 짙은 살기가 회오리치며 커져만 간다.

“솔직히 말하겠다, 인간의 마법사여.”

갑자기 세이어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감탄하고 있노라.”

일행의 안색이 굳었다. 인류의 신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참으로 훌륭히 내 힘을 묶었구나.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다.”

세이어가 강철의 왕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평소의 백색 로브 대신, 제국 특유의 귀족적인 복식 위에 새하얀 긴 코트를 걸친 차림이었다. 분명 천인데도 금속처럼 표면이 반짝이며 메탈릭한 빛을 낸다.

“그래서 더더욱 묻고 싶구나.”

세이어가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정말 믿고 있는 것이냐?”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방대한 마력이 넘실거리며 이 넓은 은의 전당을 가득 메운다. 압도적이고 절대적인 힘이 일행의 어깨를 강하게 짓누른다.

“한낱 인간의 힘으로, 신을 해할 수 있다고?”

가공할 영기의 압박에 모두가 치를 떨었다.

“큭!”

“젠장, 뭔 기세가 이리…….”

역시 상대는 인류의 신이다. 비록 신성이 없다 해도 그저 마법의 힘만으로도 세상을 멸할 수 있는 존재!

그러나 레펜하르트는 태연했다. 세상을 멸할 수 있는 존재라고?

‘그 정도는 전생의 나도 가능했거든?’

지금도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다. 그저 준비 기간이 너무 오래 걸릴 뿐이지.

그래서 그는 신의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물론이다, 세이어.”

근육질의 양어깨에서 황금빛 오러와 보랏빛 영기가 흘러나왔다. 다른 일행들도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반파된 갑옷을 걸친 채 아스레일과 카를이 앞으로 나섰다. 이니야와 러스, 타시드가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태세로 무릎을 살짝 낮췄다. 시리스와 아틸카가 좌우로 이동하고 마켈린과 실란이 후방으로 빠지며 성표를 꺼내 들었다.

주먹을 들어 올리며 레펜하르트가 차갑게 뇌까렸다.

“이제 모든 것을 끝내겠다!”

긴장된 공기가 사방에 퍼졌다. 주위를 둘러보며 세이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그대의 뜻인가?”

인류의 신이 가볍게 손가락질을 했다.

“그럼 오너라, 신에게 대적해 그 뜻을 펼쳐 보아라.”

3

레펜하르트가 앞으로 나섰다. 미리 준비해 둔 마법을 발동시키며 강대한 언령을 토한다.

“A.M.P 쇼크웨이브!”

부채꼴 모양의 푸른 파동이 세이어를 덮치며 퍼져 갔다. 개량한 국지형 A.M.P 쇼크웨이브였다. 함부로 마력을 낭비할 수도 없을뿐더러 시리스며 카를, 아스레일처럼 아티팩트를 지닌 아군이 있으니 오리지널 광역 A.M.P 쇼크웨이브를 쓸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그런 만큼 세이어에게도 충분히 피할 여력이 있었지만…….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세이어는 푸른 파동을 그대로 맞았다. 그리고 비웃었다.

“애꿎은 마력만 낭비했구나, 인간의 마법사여. 지금의 나는 도구의 힘 따위는 빌리지 않노라.”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 마법은 그냥 불빛과 전혀 다를 게 없다. 당연히 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한 아무리 개량해 필요 마력을 줄였다 해도 10서클은 10서클, 마력 소모는 상당히 크다. 그러니 굳이 레펜하르트의 마법을 방해할 이유도 없다. 알아서 제 힘 깎겠다는데 말려 무엇하리?

쓴웃음을 지으며 레펜하르트가 뒤로 물러났다.

“그럴 거라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모험을 할 순 없는 노릇이잖나?”

“그건 그렇군, 그럼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인 게냐?”

레펜하르트와 교차하며 러스와 타시드가 몸을 날렸다.

“타아앗!”

“간다앗!”

명령이 채 떨어지기 전에, 둘은 세이어의 좌우로 빠르게 돌진했다. 바쁜 와중에도 이들은 최종전을 대비해 수없이 손발을 맞추며 전술을 연습해 왔다. 세이어를 상대로 실전도 한번 겪어 보았다. 굳이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이미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다.

“굉천월광!”

“벼락 떨구기!”

푸른색과 청록색의 블레이드 오러가 검광을 번뜩였다. 이니야와 시리스도 바로 뒤를 따랐다.

“동토의 칼날!”

“엘리멘트!”

사방에서 닥쳐오는 파괴의 빛을 보며 세이어가 코웃음을 쳤다.

“또 이런 식이군.”

코트 자락이 펄럭이며 그의 전신에 희뿌연 막이 중첩되어 생겨났다. 순환 마력 방어장이었다. 겹겹이 감싼 방어장과 세 줄기 블레이드 오러, 백색의 정령 섬광이 충돌했다. 폭발이 일었고, 역시나 아무 일 없었다.

“이건 이미 한번 겪었다. 또 통할 거라 보느냐?”

세이어가 오른손을 들었다. 전 같았으면 짜증을 내며 광역 마법을 흩뿌렸겠지만, 그도 이제 이 전법에 대해 잘 안다.

“매스 라이트닝 홀.”

파직거리는 수십의 전격 구체가 세이어를 중심으로 생성되었다. 구체들이 사방으로 번개를 내뿜으며 흡입력을 발휘,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움직임이 느려진 타시드며 시리스가 인상을 썼다.

“응?”

“이런!”

상대의 움직임을 억제시키는 타입의 광역 마법을 구사한 것이었다. 예전의 광역 마법이 파리를 휘저어 대충 쫓는 것이라면 이건 살충제를 뿌리는 것과 비슷하달까? 이젠 세이어도 저 ‘날파리’들이 의외로 치명적이란 사실을 아는 것이다.

“이번엔 도망치기 쉽지 않을 게다.”

하지만 상황은 기대대로 되지 않았다. 몸을 빼기 힘들다는 걸 파악하자마자 모두 대응을 바꾼 탓이었다.

“영원의 빙벽!”

이니야 주위로 얼음벽이 생성되어 전격 구체와 충돌, 폭음과 함께 구체가 소멸되어 버린다.

“레이븐 실드!”

러스도 청색 오러의 날개를 펼쳐 전신을 감싸 전격을 막아 냈다. 바실리 출신의 자유 오러 유저, 크로아틀 경의 비기였다.

타시드와 시리스는 굳이 방어하지도 않았다.

전투 예지를 지닌 타시드는 저 복잡한 전격의 소용돌이와 흡입력 사이에서도 빠져나갈 틈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몸을 틀며 타시드가 모든 전격을 피해 안전권 밖으로 벗어났다.

시리스 경우엔 더 쉬웠다. 신고 있는 마법의 부츠를 발동시키기만 하면 된다.

“블링크!”

그렇게 넷 모두 안전하게 전격 구체의 공격을 피했다. 세이어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응이 빠른데?”

수법을 바꿨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너무나 자연스럽게 위기를 벗어난다. 마치 이럴 줄 알고 미리 연습했던 것 같다.

레펜하르트가 조롱하듯 말했다.

“알렉스 놈들이 내게 덤빈 게 한두 번인 줄 알아? 처음 당하는 놈의 심리만 아는 게 아니야. 두 번째 당하는 놈의 심리도 잘 안다고!”

전생의 그도 처음 이 전법에 당한 뒤 꽤나 경각심을 가졌다. 그래서 그 후엔 더 이상 알렉스 일행을 무시하지 않고 진지하게 상대했다. 그때마다 알렉스 일행은 전법을 바꾸고 또 바꿔 가며 마왕에게 덤벼들었다.

‘나도 두 번째 싸울 땐 연환 마법만 엄청 썼었지. 도저히 맞춰서 잡을 자신이 없었거든.’

세이어 딴에는 방법을 바꾼 것이겠지만, 그것조차도 레펜하르트의 예상 내였던 것이다. 이미 이런 식의 반격이 나올 거란 걸 아는 이상 피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럼 이건 어떠냐?”

세이어가 다른 마법을 준비했다.

“프리즌 빔, 소닉 버스터, 플라즈마 볼, 다크 캐논…….”

6서클의 다양한 공격 마법이 순식간에 발동되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뒤이어 세이어가 주먹을 쥐었다.

“체인 라이트닝!”

전격의 사슬이 발동된 마법들 사이로 흐르며 거대한 번개 그물을 형성시킨다. 이미 날린 마법과 체인 라이트닝이 연동하며 연쇄 반응을 일으켜 네 사람을 덮쳤다. 상대를 강제로 피하게 만들고, 그 자리에 마법의 위력을 집중시키는 방식이었다. 세이어가 중얼거렸다.

“이거라면 막지도 피하지도 못하겠지?”

그러나 이조차도 레펜하르트의 예상대로였다.

“아스레일!”

아스레일이 허겁지겁 몸을 날렸다.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연습 기간이 짧아 아직 레펜하르트의 지시가 필요한 것이다. 이미 카를은 지시가 떨어지기도 전에 움직인 후다.

“타아아앗!”

아스레일이 전격의 사슬로 몸을 던졌다. 엘드릴 기간투스를 걸친 카를도 반대편으로 돌진했다.

파지지직!

무식하게도 두 사람은 저 마법의 연쇄에 통째로 몸을 던져 버린 것이다.

발동된 마법의 특성상, 덫에 먹이가 걸리면 모든 위력이 그쪽으로 쏠리게 되어 있다.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이 뒤로 튕겨 나갔다. 세이어가 혀를 찼다.

“두 놈이 그냥 몸으로 모든 위력을 감당해 버렸구나.”

워낙 걸친 갑옷의 방어력이 높은지라 둘 다 별 부상은 없었다. 그리고 그 덕에 러스며 이니야 등은 아무런 피해 없이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야말로 제대로 방패 역할을 했다 하겠다.

“고맙소, 재상!”

“고마워요, 아스레일 경!”

감사를 표하며 타시드와 시리스가 재차 몸을 날렸다.

“다시 간다, 벼락 떨구기!”

“내 검에 깃들어 줘요, 우다르 묠니르!”

두 자루 전격의 검이 세이어의 방어막을 두들겼다. 전당 내부에 폭음이 울렸다.

콰콰콰쾅!

뒤이어 이니야와 러스도 뛰어들었다.

“동토의 칼날!”

“허공검, 인피니티!”

순간 세이어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순간적으로 뒤로 10여 미터 이상 물러나며 신음을 터트린다.

“윽!”

동시에 세이어가 서 있던 자리에 깊숙한 참격의 흔적이 남았다. 검을 거두며 러스가 아쉬운 듯 손가락을 튕겼다.

“쳇! 안 속네?”

방어장을 두들기는 척하며 은근슬쩍 공간 절단의 검을 날린 것이다. 식은땀을 흘리며 세이어는 베인 바닥을 바라보았다.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하…….”

러스의 허공검, 인피니티는 상대가 신이고 마왕이건 간에 무조건 썰어 버릴 수 있는 사기적인 기술, 그리고 아카식 드라이브가 침묵한 지금의 그는 평소처럼 신성에 의한 부활을 할 수가 없다.

“……죽을 뻔했네?”

미리 레펜하르트 일행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 놓아 러스의 자세를 보고 허공검임을 간파했으니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허무하게 일만 이천 년 생을 마감할 뻔했다.

러스를 바라보며 세이어가 피식거렸다.

“의외로 치사한 구석이 있구나, 배신의 기사여.”

타시드가 어금니를 씰룩거리며 대꾸했다.

“의외로가 아니라 저 녀석은 원래 치사해.”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남이 평생 걸려 갈고닦은 기술 만날 때마다 쏙쏙 빼먹는 놈이 치사하지 않다면 세상에 안 치사한 인간이 누가 있겠냐?

물론 러스 입장에선 억울한 소리였다.

“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그런 소리 하면 안 되지! 나만 베꼈냐? 너도 그 기술 죄다 베껴서 쓰고 있잖아!”

친구랍시고 기껏 뽑아 먹은 기술 열심히 가르쳐 줬더니 저런 배은망덕한!

친우에게 눈을 흘기며 러스가 또다시 세이어에게 덤벼들었다. 타시드도 바로 가세했다. 다카르를 크게 휘두르며 우렁찬 외침을 터트린다.

“굉천월광!”

청록색 블레이드 오러가 빛을 발했다. 그 뒤를 러스가 이어받았다.

“암천성광!”

푸른 블레이드 오러가 찌르기로 공간을 수놓는다. 타시드가 재차 참마도를 올려 치며 청록색 오러 구체를 생성했다.

“경천일광!”

순식간에 세이어의 주위로 두 종류 오러가 빼곡하게 맺혔다. 어쩌니 저쩌니 해도 사이좋은 두 사람이다. 말다툼을 하면서도 정작 연계는 완벽했다. 마치 한 사람이 펼친 것처럼 자로 잰 듯한 합수 연격, 러스 혼자서 발동시킬 때보다 훨씬 빨리 모든 기술이 완성되었다.

감탄하며 세이어가 마력 방어장을 펼쳤다.

“유쾌한 우정이로고!”

그 위로 러스가 일루미네이터를 내리쳤다.

“파천검, 트리니티!”

콰콰콰쾅!

무수한 폭발이 일어났다. 이번 공격은 위력이 만만치 않았다. 세이어를 둘러싼 일곱 방어장 중 무려 세 개가 박살 날 정도였다.

“호오, 예전보다 더 강해졌구나.”

그래 봤자 여전히 세이어 본체에는 타격이 없다. 폭연 속에서 세이어가 손바닥을 뒤집었다.

“매스 아케인 블렛.”

수십 발의 마력 섬광탄이 러스와 타시드를 노리고 쏟아졌다. 미리 대비했기에 두 사람 다 간단히 공격을 피했다. 세이어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맞힐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확실히 대비는 잘한 것 같구나, 하지만…….”

마력의 기류를 전신에 두른 채 세이어가 레펜하르트를 노려보았다. 그는 아까부터 주먹을 쥔 채 계속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세이어의 집중력이 흔들리지 않아 파고들 틈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방심하지 않으면 의미 없긴 마찬가지가 아니냐?”

그런데 오히려 레펜하르트는 미소를 지었다.

“과연 그럴까?”

여전히 모든 것이 예상대로라는 듯한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숨 돌리고 있던 두 엘프 여인에게 턱짓을 했다.

“그럼 계속 간다!”

이니야와 시리스가 몸을 날렸다.

“네! 레펜하르트 님!”

☆ ☆ ☆

러스와 타시드, 이니야와 시리스가 연신 세이어의 주위를 맴돌며 공격을 가했다. 세이어의 반격이 이어질 때마다 카를과 아스레일이 투입되어 방패 역할을 수행하고, 기회가 날 때마다 아틸카가 주술력으로 모두를 보조한다.

그래도 인류의 신, 세이어에겐 날파리 이상의 의미는 없다. 아니, 예전보다 다들 많이 강해지긴 했으니 그래도 메뚜기 수준은 되려나?

“그래 봤자 둘 다 하찮은 벌레이긴 마찬가지.”

여유로운 태도로 세이어가 연신 마법을 떨쳐 냈다. 광폭한 마력이 은의 전당을 가득 불었다. 러스며 타시드, 시리스가 이를 악물었다.

“크윽! 역시…….”

“뭐가 나올지 미리 알아도…….”

“피하기가 쉽지 않네.”

인간 입장에선 왱왱대는 날파리가 짜증 나겠지만, 날아다니는 파리 입장에선 생사가 걸린 문제다. 당연히 시간이 지날수록 체력과 기력이 뭉텅이로 깎여 나간다.

다행히 이들 뒤엔 강력한 두 명의 성직자가 있었다.

“알 포트여!”

“필라넨스시여!”

마켈린과 실란이 각자 성광을 발하며 싸우는 동료들에게 투지와 회복의 힘을 부여한다. 마켈린의 성광이 이니야와 아틸카와 아스레일에게, 실란의 성광이 러스와 타시드, 시리스, 카를에게 내려져 그들의 힘을 회복시킨다.

문득 마켈린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어? 언제 저 아이의 신성력이 나보다 높아진 거지?”

마켈린이 세 명을 감당한 반면, 실란은 네 명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필라넨스의 분홍빛 성광이 알 포트의 은빛 성광보다 더 위세가 크다. 알 포트의 교황인 마켈린보다 필라넨스의 일개 추기경인 실란이 더 신성력이 높다는 증거다.

“이게 어찌 된 건가?”

마켈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실란이 송구스럽다는 듯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 그게…… 드워프들 중에 필라넨스로 개종한 양반들이 워낙 많아서…….”

그동안 실란의 신성력이 비정상적으로 쑥쑥 자란 이유가 이것이었다. 본인의 재능도 재능이었지만, 그보다는 그가 필라넨스로 개종시킨 이종족 숫자가 워낙 엄청난 것이다. 여행 초기엔 그렇게까지 늘지 않았지만 안타레스 건국하고 필라넨스 신전 새로 세운 뒤론 어마어마한 숫자의 신도가 새로 유입되었다. 그러니 실란에게 주어지는 여신의 권능도 기하급수적으로 늘 수밖에.

“허어…….”

기가 막혀 마켈린은 실란을 노려보았다.

이럴 수가! 귀여운 동종업계 후배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내부 스파이였단 말인가!

실란이 머쓱해하며 연신 머리를 긁었다.

“죄, 죄송해요오오…….”

어쨌거나, 지금은 알 포트 교단과 필라넨스 교단의 밥그릇 다툼이 중요한 게 아니다. 투덜대면서도 마켈린은 계속 일행들에게 신성 가호를 내렸다. 실란도 시리스와 카를에게 더욱 성광을 집중했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종에게 무한한 은총을 내리소서!”

조금씩 느려지던 두 사람의 움직임에 다시 활기가 돌았다. 전신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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