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권 제80장 자고로 뒤통수는 안 보이는 놈이 치는 법이다 (81/84)

제80장 자고로 뒤통수는 안 보이는 놈이 치는 법이다

1

실란은 눈을 가늘게 떴다. 통로 끝에는 거대한 공간이 위치해 있었다. 사방이 금속 벽으로 이루어져 높이만도 족히 30미터, 직경은 200미터가 넘는 광대한 규모였다. 미처 몰랐지만 은의 시대 격납고 중 하나였다.

그곳에 필레나와 렐시아, 그리고 어둠의 형상을 띤 수많은 사령인들이 포진해 있었다. 하나같이 격납고 맞은편 입구에 서서 움직이질 않는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실란이 레펜하르트에게 속삭였다.

“더 이상 도망 다니긴 힘들겠죠?”

“그렇지, 뭐.”

그들의 목적지는 저 격납고 너머에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향하려면 이곳을 통과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뭐, 이토록 넓은 지역에 다른 길 하나 없겠냐마는, 적어도 테스론에게서 얻은 정보만으로는 이곳이 유일하다.

“이렇게 된 이상 할 수 없지!”

레펜하르트가 두 팔을 크게 벌렸다.

“하아아앗!”

황금빛 오러와 함께 보랏빛 영기까지 넘실거리기 시작한다. 본격적으로 마력을 끌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아스레일도 실란을 보호하며 전투태세를 취했다.

“제 뒤로 오십시오, 실란 대주교!”

이미 장시간 바포메트 슈트를 사용한지라 정신적 피로감이 상당했지만, 다행히 그는 꽤나 스트레스에 강한 타입이었다. 수많은 오러 유저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이고, 무식한 오크들과 말 안 통하는 이종족들도 열심히 조율해 가며, 그 와중에 말 안 듣는 인간 기사들까지 아득바득 지휘해 온 아스레일이다. 평소에도 워낙 피곤한 인생을 살아온 그에게 이 정도 정신적 압박은 일상인 것이다!

‘……어째 별로 기쁘지 않은 장점이구먼.’

살짝 우울해졌지만, 아스레일은 꿋꿋하게 실란의 앞을 지켰다. 그렇게 레펜하르트 일행이 투지를 끌어내자 필레나가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 도망 다닐 생각은 없나 보네.”

검은 입술을 매만지며 기쁜 듯 그녀가 중얼거린다.

“나의 종들아.”

검은 기류가 일어나 렐시아와 사령인들에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필레나가 깡마른 오른팔을 들었다. 레펜하르트를 가리키며 그녀가 앙칼진 외침을 터트렸다.

“저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어라!”

렐시아와 사령인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공간을 메우며 적을 향해 맹수처럼 저돌적으로 달려든다. 레펜하르트도 사령인들 사이로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좋아! 덤비라고!”

이글거리는 황금빛 오러 사이로, 강렬한 마력이 불을 뿜었다.

“아까와는 다를 거다!”

☆ ☆ ☆

두 사령인이 두 팔을 휘두르며 달려든다. 어둠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사령인들에게 물질적 육신은 없다. 저절로 주먹 부위가 형상을 변환하며 거대한 칼날로 화한다.

휘이이익!

네 자루 칼날이 레펜하르트를 향해 날아들었다. 필레나의 가공할 흑마법에 의해 강화된 이 어둠의 칼날은 어지간한 블레이드 오러와 비교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레펜하르트조차도 감히 몸으로 받아 낼 엄두가 안 나 지금까진 공격을 피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폭염기격탄!”

공세를 피하며 레펜하르트가 양 주먹을 교차해 뻗어 냈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기본기 중 하나인 기격탄이 두 사령인을 강타했다.

“크어어억!”

절규하며 사령인들이 불길에 휩싸여 사라져 갔다. 원래 기격탄의 위력은 이 정도로 강하지 않지만 언데드의 천적은 불과 성광인 법, 기격탄에 깃든 화염계 마법이 사령인들의 암흑 마력을 상쇄시킨 것이다. 다른 사령인이 공격하자 이번엔 불길이 일렁이는 손으로 사령인의 팔을 잡아 그대로 내리찍는다.

퍼억!

바위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사령인이 박살 나 흩어졌다. 연달아 공세가 이어졌다. 주먹질, 발길질마다 불꽃을 휘감은 채 레펜하르트가 한 줄기 폭풍이 되어 사령인들 사이를 몰아쳤다.

“타아아앗!”

손에 잡히는 대로 목을 꺾고 팔다리를 찢고 몸통째 박살을 낸다.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사령인들을 부순 뒤 주먹을 뒤로하고 크게 앞으로 내뻗는다.

“플레임 스트레이트!”

황금빛 오러가 회오리치며 광범위하게 뻗어 나갔다. 오러에 닿는 사령인들마다 불꽃에 휘감겨 타오르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 댔다.

“말했잖아? 아까와는 다를 거라고!”

레펜하르트가 땅을 박찼다. 높이 솟구친 뒤 그대로 몸을 반전시켜 대지를 내리찍는다. 폭음과 함께 이글거리는 황금빛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볼카닉 아발란쉬 킥!”

파동에 휩싸인 사령인들이 죄다 불타오른다. 이걸로 거의 대부분의 사령인들이 파괴되어 버렸다. 지켜보던 필레나가 인상을 썼다.

‘이런…….’

놀라운 무위였다. 아까까지는 충분히 버티던 사령인들이 너무도 맥없이 부서져 간다.

‘과연 마왕이라고까지 불리는 자, 마법을 쓰기 시작하면 이 정도인가?’

필레나를 노려본 채 레펜하르트가 소리쳤다.

“무사한가, 아스레일 경?”

힘겨운 대꾸가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불민한지라 아직 이 여인을 처리하지 못하여…….”

아스레일은 여전히 렐시아와 싸우고 있었다. 실란의 성광에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빠르고 강했다. 벌써 수십 대나 얻어맞은 아스레일이었다. 그나마 바포메트 슈트가 워낙 단단한 물건이라 서 있을 뿐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여기저기 꽤나 망가진 상태다.

뭐, 레펜하르트에겐 그 정도면 충분했다.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용하다! 계속 버티시게!”

애초에 그가 아스레일에게 기대한 건 슈트발 방패 역할이 아닌가? 충분히 아스레일은 기대치만큼 해 주고 있었다.

‘필레나를 해치울 때까지만 시간을 끌어 주면 되니까!’

레펜하르트가 필레나에게로 돌진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아스레일은 침묵했다.

“…….”

기분이 미묘하다. 그는 분명 오러를 각성한 자, 대륙 어딜 가도 숭상받을 무의 극한에 이른 존재였다. 그런데 왜 이 동네에선 이렇게 대접이 박한 걸까?

“으악! 뭐 해요, 아스레일 경? 필라넨스시여!”

잠깐 딴생각한 틈에 렐시아가 아스레일을 노린 것이다. 황급하게 실란이 신성한 망치를 생성해 쏘아 냈다. 공격을 관두고 렐시아가 망치를 피해 몸을 틀었다. 정신이 든 아스레일이 다시 검을 고쳐 쥐었다.

“죄, 죄송합니다. 실란 대주교.”

그래, 궁상은 다 끝나고 떨자.

결심한 아스레일이 눈을 빛내며 기합을 터트렸다.

“타아앗!”

☆ ☆ ☆

아스레일의 상황을 살핀 뒤 레펜하르트는 안색을 굳혔다. 아무래도 오래 버티긴 힘들 것 같다.

“빨리 끝내야겠다, 필레나.”

그녀를 바라보는 레펜하르트의 눈동자는 잔잔했다. 더 이상 흔들림 따윈 없었다. 이미 순수하게 대적자로만 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필레나에겐 어찌 되었건 상관없는 이야기다. 그녀에게 있어서 레펜하르트는 추억조차 그리 없는 어린 시절의 일부일 뿐이니까.

“제법이구나, 마왕.”

두 눈을 번득이며 그녀가 두 팔을 들어 올렸다.

“하나 내가 받은 신의 힘 앞엔 무용지물!”

또다시 필레나 주위로 어둠의 힘이 터져 나온다. 레펜하르트가 몸을 날렸다.

“그렇게는 안 되지!”

흑마법사를 상대할 땐, 최대한 소환체를 무시하고 본체 자체를 해치우는 것이 정통적인 방식이다. 눈 깜짝할 새에 필레나의 코앞까지 도달한 레펜하르트가 일권을 날렸다.

“헙!”

2미터가 넘는 거구의 근육질 거인이 신장 160의 깡마른 가냘픈 여인네에게 무지막지한 주먹질을 날린다. 누가 보면 참으로 가혹한 학대 현장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경우 학대당한 건 필레나 쪽이 아니었다.

콰아앙!

폭발이 일어나며 레펜하르트의 거체가 뒤로 날려 갔다.

“크으윽!”

신음하며 레펜하르트는 애써 몸을 가누었다. 필레나를 가격한 순간, 무지막지한 반발력이 그의 주먹을 때렸다. 어찌나 강렬하던지 뻗은 오른팔이 어긋날 지경이었다.

“뭐였지?”

오러를 끌어 올린 뒤 레펜하르트는 크게 팔을 휘둘렀다. 어긋난 관절이 다시 맞춰지며 도로 팔이 움직였다. 욱신거리는 관절을 오러로 감싸며 레펜하르트는 인상을 썼다.

‘도대체 무슨 수법이지?’

필레나가 무슨 짐 언브레이커블도 아닌데 몸으로 받아친 건 아닐 테고.

‘반발력장? 아냐, 반발력장이 그렇게까지 강할 리는 없는데?’

사령술 계열이라고 딱히 다른 마법보다 방어 마력장이 뛰어나진 않다. 그리고 뛰어나다 할지라도 방금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튼튼한 방어막을 만들었다면, 그냥 방어막이 안 깨지는 걸로 끝이지 방금처럼 팔이 빠질 정도로 무시무시한 반발력이 돌아오지 않는다.

‘마치 내가 날린 주먹이 그대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 그렇군. 흑마력의 공간 왜곡력인가?’

현존하는 마법 중, 10서클도 아니면서 공간에 간섭할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분야가 바로 흑마법이다. 일명 ‘제라드의 선물 사건’에서도 봤듯이, 강력한 사기死氣는 가끔 공간 왜곡을 일으키곤 한다. 하지만 저건 흑마법사가 인위로 제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심지어 전생의 레펜하르트조차도 흑마법에 의한 공간 왜곡은 불가능했다.

‘장난 아닌데? 쟤가 이 정도로 대단한 마법사였나? 마력이야 세이어 덕분이라고 쳐도, 필레나 개인의 역량도 무시 못 할 수준이군.’

사실은 무시 못 할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신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할 수 있겠다. 똑같이 신의 경지 소리 듣던 레펜하르트니까 저 정도 감상으로 끝났지.

필레나가 앞으로 걸어왔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어둠이 공기를 스치며 뱀 같은 소리를 흘린다.

사아아아-!

“……사령인 정도론 그대를 해치울 수 없겠구나, 마왕이여.”

그녀가 쇠 긁는 외침을 이었다.

“일어나라, 나의 기사들이여!”

어둠이 일어나며 인간의 형상을 이루었다. 사령인과 달리 전부 두꺼운 갑옷에 검과 방패를 장비한 모습이다. 서먼 데스맨보다 한 단계 높은 사령 소환술, 서먼 데스 나이츠였다.

“크아아아!”

“산 자…….”

“살아 있는 자다!”

죽음의 기사들이 레펜하르트를 보며 분노의 함성을 터트렸다. 죽은 자는 산 자의 빛을 증오하고 탐하는 법, 그들의 눈에 레펜하르트는 실로 거대한 원한의 대상이었다.

오러는 생명기라 언데드 입장에선 증오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짐 언브레이커블은 제 목숨 챙기는 데는 대륙 최강으로 특화된 무문이 아닌가? 그 생명의 빛은 다른 오러 유저와 비할 바가 아니다.

“산 자여, 죽음과 입 맞출지어다!”

데스 나이트들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레펜하르트에게 덤벼들었다. 흑마법의 위력은 개체가 지닌 원한과 증오에 비례하는 법, 안 그래도 필레나에 의해 몇 배나 강력해진 데스 나이트들이 그 힘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었다.

공세를 받아 내며 레펜하르트가 입맛을 다셨다.

“쳇, 짐 언브레이커블에 이런 단점도 있었군.”

그래도 딱히 당황하진 않았다. 그동안 겪은 짐 언브레이커블의 단점이 한두 개였냐? 이제 와서 새삼 놀랄 이유는 없다. 침착하게 레펜하르트는 공격에 대응했다.

연신 손발을 놀려 적의 공세를 걷어 내고.

“폭염기격탄!”

때론 몸으로 받아 내며.

“파이어 스파이럴 가드!”

착실히 펀치와 킥을 뻗는다.

“타아아앗!”

황금빛 오러와 불꽃의 마력과 죽음의 어둠이 혼탁하게 뒤섞여 미친 듯이 날뛴다. 확실히 데스 나이츠의 위력은 사령인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아무리 마법까지 구사해도 아까처럼 간단히 처리할 수가 없다. 역시 오러와 마법을 섞어 쓰는 것만으론 한계가 있었다.

‘좀 더 밑천을 풀어야겠군!’

결심한 레펜하르트가 데스 나이츠 사이로 뛰어들었다. 사방에 펀치를 쏟아 내며 주문을 외운다.

“플레임 스트라이크 임팩트!”

다양한 혼합 마법 대신, 오직 폭염 마법만을 제로 임팩트에 실어 퍼트린다.

폭염, 폭염, 폭염, 폭염, 폭염!

레펜하르트가 펀치를 날릴 때마다 화염의 기운이 넘실거리며 데스 나이트들을 관통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콰콰콰콰쾅!

연달아 폭발이 일어나며 주위의 데스 나이츠가 싹 쓸렸다. 그 틈에 레펜하르트가 수인을 맺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체술에 맞춘 간략형이 아닌, 제대로 된 소매틱이었다.

“초월자의 권세!”

순간적으로 전신의 마력 출력을 증폭시킨 뒤.

“스펜 델 라타라, 업을 사르는 연옥의 불꽃이여! 내 손에 임하라!”

그가 머리 위로 오른손을 뻗었다.

“이그니션 템페스트!”

불길이 소용돌이치며 솟구쳐 올렸다. 열기의 회오리가 격납고 내부를 뜨겁게 달구며 데스 나이츠를 휘감았다. 휩쓸린 죽음의 기사들이 일그러지며 하나 둘 사라져 갔다.

오오오오오오-!

유부의 비명이 메아리친다. 어찌나 강력한 마법이었는지 그 한 방으로 소환된 데스 나이츠의 4분의 3이 싹 날아가 버렸다. 필레나조차도 기겁할 정도였다.

‘……저게 저렇게까지 강한 마법이었나?’

아무리 화염계 마법이 언데드의 천적이라지만 이건 좀 과하다. 그녀가 소환한 사령인만으로도 짐 언브레이커블의 공세를 충분히 감당할 수준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마법을 썼다지만 사령인보다 몇 배나 강력한 데스 나이트가 저렇게 쉽게 당하다니? 저 마법이 레펜하르트의 오러보다 몇십 배나 강하다는 의미인가?

‘아니, 그건 아니야.’

필레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불살라진 암흑으로부터 상대에 대한 정보가 전해져 온다.

지금껏 레펜하르트가 구사한 마법은 평범한 화염이 아니었다. 세밀하게 필레나의 흑마력에 맞춰, 마력적 파장을 연동시킨 특수한 화염이었다. 화염 자체의 파괴력보다는, 암흑에 간섭해 결합을 깨뜨리는 쪽에 특화된 것이다.

‘그 짧은 순간 마력 결합식을 파악하고 역술식을 짠 다음 바로 실전에 응용했어?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이 아니네.’

그럼에도 필레나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어차피 마왕의 능력에 대해선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인류의 신, 세이어조차도 저자의 마법에 몇 번이나 골머리를 썩였을 정도인데 이쯤이야 놀랄 것도 없다.

그저 침착하게 현 상황을 파악할 뿐.

‘데스 나이츠로 저자의 마법을 상대케 하는 건 그리 효율이 높지 않다. 그렇다면…….’

그녀의 시선이 격납고 반대편으로 향했다. 광기의 마수처럼 날뛰는 젊은 엘프 여인과, 실란의 가호를 받으며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는 아스레일 쪽이었다.

필레나가 엘프 여인의 이름을 외쳤다.

“렐시아!”

☆ ☆ ☆

레펜하르트는 착실히 남은 데스 나이트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폭염권을 연달아 날리며 죽음의 기사들을 하나하나 척살한다. 그러면서 착실하게 필레나와의 거리를 좁힌다. 그녀가 사정거리에 들어온 순간 그가 대지를 박찼다.

쏜살같이 날아든 레펜하르트가 폭염권을 내질렀다. 단, 이번엔 아까처럼 힘을 집중한 일격타가 아니었다.

“타아아아아아앗!”

스냅을 이용해 자잘한, 잽에 가까운 펀치를 수십 발이나 연타로 후려갈긴다. 펀치 중 몇 발은 도로 튕겨 나갔다. 어둠의 장막에 깃든 공간 왜곡력이 공격 자체를 반사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공세의 극히 일부일 뿐이었다. 미처 공간 왜곡을 걸지 못한 남은 영역, 필레나를 감싼 어둠의 장막 전체에 무수한 권격이 적중했다. 어둠의 장막이 흔들리며 연달아 폭음이 터졌다.

“공간 왜곡 같은 고도의 기술을 그렇게 쉽게 제어할 수 있을 리 없잖아?”

레펜하르트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적의 방패가 있다 해도 그건 공격 앞에 세워 놓아야 의미가 있다. 워낙 펀치 수가 많다 보니, 필레나의 제어력으로도 모든 공격을 일일이 신경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아쉽게도 어둠의 장막이 깨지진 않았다. 잽의 연타다 보니 일격의 위력이 낮은 탓이었다. 덕분에 레펜하르트도 자기 힘에 자기 주먹이 상하진 않았지만, 대신 필레나의 방어막을 부수기에는 파괴력이 모자랐다.

‘뭐, 부서질 때까지 계속 후려갈기면 되니 별문제는 없지만.’

폭발에 휘말려 물러서며 필레나가 신음을 흘렸다.

“으음…….”

새삼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딱 한 번 부딪쳤을 뿐인데, 그 한 수만으로 바로 대응법을 찾아 버렸다. 정말이지 남의 약점 하나는 귀신같이 찾아내는 작자다. 이대로라면 아무리 세이어의 신성을 구사하는 필레나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겠지만…….

“마왕이여, 그대를 상대하는 건 내가 아니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레펜하르트 뒤쪽에서 살기가 닥쳐왔다. 앙칼진 외침이 귀청을 찢을 듯 울려 댄다.

“레펜하르트으으으!”

어느새 다가온 렐시아가 길게 뻗어 차는 미들 킥을 날리고 있었다. 엄청난 기운이 관자놀이를 노리고 쇄도한다. 반사적으로 레펜하르트는 오른팔을 들어 방어를 취했다. 순간 육중한 타격이 팔뚝을 강타했다.

“으윽!”

단 일격에, 레펜하르트의 거구가 무려 10여 미터가 넘게 날아가 버렸다. 렐시아를 놓친 아스레일이 놀라 소리쳤다.

“폐, 폐하!”

아스레일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지금 보인 렐시아의 일격은 그를 상대할 때와는 스피드도 위력도 전혀 달랐다.

‘어떻게 된 거지?’

저 정도 위력이면 아무리 바포메트 슈트라도 파손을 피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렇다고 렐시아가 아스레일을 상대하며 일부러 힘을 아꼈을 리도 없지 않은가?

어쨌건 렐시아를 저대로 놔둘 순 없다. 그녀를 상대하는 것이 아스레일, 자신의 임무. 막 아스레일이 렐시아를 쫓으려던 참이었다.

“크오오오!”

레펜하르트를 상대하던 데스 나이트들이 이번엔 거꾸로 아스레일에게 몰려들었다. 실란을 보호해야 하는 그로선 이대로 상대를 무시하고 자리를 뜰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검을 들고 데스 나이트와 맞서기 시작했다.

요란한 폭음과 창칼의 충돌음을 뒤로한 채 레펜하르트가 몸을 일으켰다.

“이런…….”

오러를 일으켜 오른팔을 매만진다. 그렇게 부상을 완화시키며 레펜하르트는 렐시아와 필레나를 번갈아 보았다.

“결국 알아챘나 보군.”

2

바람을 가르며 렐시아가 레펜하르트의 품으로 파고든다. 동시에 양손을 휘저으니 어둠이 일어 올라 두 자루 예리한 단검으로 화한다.

“죽어 버려!”

살기 가득한 외침과 함께 렐시아가 단검을 교차로 그었다. 슬레이어 수준의 기본적인 단검술일 뿐이지만, 그것이 무지막지한 스피드와 결합되니 레펜하르트로서도 도저히 피할 여력이 없었다. 몸을 틀며 그가 마주 펀치를 뻗었다.

“폭염권!”

타오르는 펀치가 카운터로 날아들었다. 그러나 렐시아가 더 빨랐다.

어느새 단검을 거두며 허리를 접어 뒤로 몸을 뺀다. 그렇게 뒤로 덤블링을 하며 그녀가 올려 차기를 날렸다. 섬머솔트 킥이 시원할 정도로 정확하게 레펜하르트의 턱을 강타했다.

“컥!”

목이 뽑히는 듯한 충격과 함께 레펜하르트가 휘청거렸다. 렐시아가 바로 자세를 낮추며 하단 쓸기를 이었다. 상대의 발을 걸어 넘어뜨린 뒤 다시 단검을 휘두르며 맹수처럼 덤벼 온다.

“크아아아!”

숫제 기합도 이젠 짐승의 포효에 더 가까울 지경이다. 사색이 되어 레펜하르트가 두 팔로 몸통을 감쌌다. 그리고 전신의 오러와 마력을 동시에 끌어낸다.

“파이어 스파이럴 가드!”

어둠을 두르고 덤벼드는 렐시아 상대론 순수한 스파이럴 가드보다는 화염 마력과 융합된 쪽이 더 방어력이 높다. 불꽃의 오러 회오리가 두 자루 단검과 충돌해 파문을 터트렸다. 격납고 전체가 흔들리며 렐시아가 뒤로 날려 갔다. 그러나 그리 타격을 받진 않았는지 이내 공중제비를 넘으며 허공에서 자세를 바로 잡는다.

그리고 재차 공격!

“스테반 님의 원수!”

연달아 두 자루 단검을 휘두르고 가녀린 두 다리로 연환퇴를 날린다. 그때마다 레펜하르트의 육체 곳곳에서 격타음이 터졌다.

퍽! 퍽! 퍼벅!

정신없이 날뛰며 렐시아는 레펜하르트의 사방에 공세를 퍼붓고 있었다. 레펜하르트도 애써 반격해 보지만 스피드 차이가 역력해 계속 헛방질이 될 뿐이었다. 심지어 마법은 쓸 틈조차 없었다.

실란이 성표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필라넨스시여! 사특한 어둠을 불사를 정화의 빛을 내려 주소서!”

분홍빛 성광이 레펜하르트와 렐시아를 감쌌다. 하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이미 렐시아는 실란의 신성력에 영향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뭐야? 그럼 왜 도로 저렇게 강해진 거지?”

이해할 수가 없어 실란은 중얼거렸다. 지금 보이는 렐시아의 힘은 아스레일을 상대할 때완 딴판이었다. 마치 처음 조우했을 때의, 레펜하르트와 아스레일을 함께 상대하던 상태로 돌아간 것 같다.

‘하지만 그 힘은 내 신성 주문에 의해 약해진 게 아니었나?’

필레나가 비릿하게 웃었다.

“호호호…….”

실란의 판단은 옳기도, 틀리기도 했다. 분명 렐시아는 그의 신성 주문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스레일이 상대할 수 있을 수준까지 약해진 이유는 아니다.

“어둠의 힘은 원한과 증오에 의해 강해지는 법이지.”

렐시아의 진정한 힘은 레펜하르트에 대한 순수한 증오에서 비롯된다. 스테반의 원수, 사랑하는 이를 잔혹하게 죽인 마왕에 대한 증오가 그녀의 어둠을 몇 배나 증폭시켜 주는 것이다. 반면 아스레일에게는 어떤 원한도 가지지 않았으니 제대로 힘이 발휘될 리 없다.

“당연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녀의 증오는 오롯이 마왕, 그대에게 있음이니.”

피 묻은 입술을 닦으며 레펜하르트가 툴툴거렸다.

“쩝, 최대한 늦게 눈치채 주길 바랐는데.”

그래서 일부러 렐시아를 아스레일에게 밀어 놓았다. 자연스럽게 전투를 전개하며 필레나를 자신이 상대하는 구도로 이끈 것이다. 그에 휘말려 필레나도 무심코 레펜하르트를 상대하며 렐시아로 하여금 ‘아스레일을 상대하라’는 명령을 내려 버렸다. 궁극의 사령술사인 그녀가 벌이기엔 지나치게 기초적인 실수지만, 원래 실수란 저런 곳에서 일어나는 법이다.

“하지만 더 이상은 실수하지 않아.”

검은 눈동자를 일렁이며 필레나가 어둠을 끌어냈다. 자욱한 어둠이 렐시아의 전신으로 스며든다. 한차례 레펜하르트와 격돌하며 지친 그녀의 심신이 또다시 가공할 권능으로 가득 찬다.

“죽어라, 마왕!”

광기에 차 렐시아가 몸을 날렸다. 맞서 전투 자세를 취하며 레펜하르트가 한숨을 쉬었다.

“미치겠네.”

☆ ☆ ☆

근육질 거인이 황금빛 오러를 뿜어 대고 불꽃의 마법을 연신 날린다. 어둠을 전신에 두른 엘프 여인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공세를 피하고 흘려 내며 반격을 가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밀려나는 것은 거인, 레펜하르트 쪽이었다.

“타아앗!”

기합과 함께 렐시아가 허공에서 연달아 킥을 날렸다. 두 팔뚝으로 공격을 막아 냈지만 극심한 충격이 뼛속까지 전해진다.

“크으…….”

아무래도 이대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을 것 같다. 휘청거리며 레펜하르트는 잠시 고민했다.

‘캘러미티 혼을 날려?’

그렇게까지 힘을 써 버리면 세이어를 상대할 여력이 안 남는다. 비록 밑천을 풀기로 마음먹긴 했지만 그래도 최소, 회복이 가능한 수준까진 남겨 놔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나자빠지면 세이어고 뭐고 없잖아?’

그렇다고 렐시아 처리한 다음 세이어에게 나자빠지면 결국 의미 없긴 마찬가지지? 역시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다.

고민하는 와중에도 렐시아의 공세는 계속되고 있었다.

“죽어 버려! 레펜하르트!”

필레나의 지원 역시 계속되고 있었다.

“어둠이여, 일어 오르라!”

사방에서 무자비한 타격이 쉴 새 없이 쏟아진다. 레펜하르트는 정신없이 뒤로 물러섰다. 상황이 애매하니 그저 방어 일변도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호호호!”

광소를 터트리며 필레나가 더더욱 어둠의 힘을 크게 일깨웠다.

“나의 권속이여, 죽음을 딛고 서서 태양을 가려 흑암의 권세를 떨치라!”

한창 전투 중임에도 불구하고 레펜하르트는 쓴웃음을 흘렸다.

‘태양도 없는데 가리긴 뭘…….’

지금 이 격납고는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다. 그럼에도 이토록 밝은 이유는 천장에 네모난 은의 시대 마력등이 무수히 설치되어 있기 때문, 저 언령은 말 그대로 관용구적인 표현일 뿐이다.

마력등을 힐끔대며 레펜하르트가 중얼거렸다.

“확실히 위치가 그리 좋진 않군.”

지금 필레나의 저 엄청난 능력엔 지리상의 이점도 분명 있었다. 화염과 신성력 이상으로 언데드의 천적은 바로 태양광이다. 뙤약볕 아래 유령 나오는 거 본 적 있나? 흑마법사의 최대 금기가 바로 태양 아래 힘을 쓰는 것, 오죽하면 ‘벌건 대낮에 좀비 부르는 바보.’라는 관용구도 있을 정도였다. 너무 전문적이라 마법사가 아니면 별 모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게 문제지만.

아무리 강력한 언데드나 흑마법이라도 태양 아래선 그 위력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기 마련인 것이다. 워낙 밝아서 별로 못 느낄 뿐이지 이곳은 분명 지하다. 그러니 그녀의 흑마력도, 어둠의 권속들도 빛에 전혀 훼손을 입지 않는다.

“이곳은 수십 미터의 지하, 태양의 힘이 전혀 닿지 않는 무저갱이지. 마왕이여, 그대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거만한 어조로 필레나가 선언하듯 외쳤다. 그런데 오히려 그 소리를 들은 순간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가만있자?”

뭔가 떠오른 듯 대뜸 주먹을 내지른다.

“스트레이트 캐논!”

화염 마법을 결합하지 않은, 순수한 오러의 일격이 렐시아에게 쏘아졌다. 그녀가 가볍게 두 팔로 머리를 감싸 간단히 공격을 버텨 냈다.

“타앗!”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두 발을 박차며 뒤로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육중한 거구가 격납고 외벽으로 향한다. 렐시아가 눈을 부라리며 뒤를 쫓았다.

“도망치지 못한다, 마왕!”

그런데 방향이 좀 이상했다. 지금 레펜하르트는 격납고의 통로 쪽이 아닌, 아무것도 없는 벽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필레나는 의아해했다. 벽을 뚫고 달아날 셈일 리는 없었다. 저 벽 너머는 그냥 땅속일 뿐이니까.

‘뭐지? 왜 저기로 향하는 거지?’

렐시아보다 한발 먼저 레펜하르트가 벽에 도달했다. 그가 주먹을 들더니 대뜸 벽에 내리꽂았다.

“분명 테스론 녀석 정보에 의하면 여기였으렷다?”

콰앙!

레펜하르트의 주먹이 벽 안쪽 깊숙이 박힌다. 격납고 내 모든 마력등의 빛이 바뀌었다. 은은한, 마치 달빛에 가까운 광채에서 진짜 대낮처럼 열기를 띤 찬란한 빛으로.

파아아앗!

강렬한 빛이 격납고 전체를 내리쬐었다. 렐시아가 비명을 터트렸다.

“아아악!”

렐시아뿐만이 아니었다. 아스레일을 공격하던 데스 나이트들 또한 비슷한 상태가 되었다.

“아아아아!”

“크어어어!”

격납고 내를 뒤덮고 있던 어둠이 요동치며 눈에 띄게 그 기세를 잃는다. 필레나는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것은 어둠의 마력이 태양 아래 드러났을 때 일어나는 반응이었다.

“도대체 왜?”

벽에 팔을 꽂은 채 레펜하르트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되는구먼, 자연광 조명 모드.”

☆ ☆ ☆

“어둠이여, 장막을 드리워 태양을 가릴지니!”

필레나가 황급히 흑마법을 운용했다. 렐시아와 데스 나이츠들의 전신에 회색빛 기류가 휘감기기 시작했다. 암흑과는 조금 다른 회색빛 장막, 이는 태양이나 성광의 빛을 가리는 또 다른 흑마법의 용법이었다.

빠르게 대응한 덕분에 렐시아와 데스 나이츠들의 상태는 다시 안정되었다. 하지만 필레나의 안색까지 안정되진 않았다.

“어째서?”

격납고 천장을 보며 그녀는 당황을 숨기지 않았다. 놀랍게도 천장에 가득 박힌 수많은 고대 마력등, 그곳에서 명백한 태양광이 내리 쬐이고 있었다.

“분명 마법으로 창조된 인공적인 조명에서 어떻게 태양의 빛이 나오는 거지?”

레펜하르트가 피식거리며 대꾸했다.

“고대인들은 인공적인 마법등에도 태양의 빛을 담는 방법을 알고 있더군.”

필레나가 눈을 깜빡였다. 은의 시대야 워낙 상식을 초월한 기물들이 많으니, 저런 아티팩트도 못 만들었을 리야 없을 것이다.

하지만 왜?

무엇하러 그냥 조명도 충분히 밝은데 굳이 태양광까지 재현한단 말인가?

“잘은 모르겠는데, 고대인들은 태양광을 정기적으로 쬐어 주지 않으면 건강에 안 좋다고 믿은 모양이야. 뭐라더라? 햇볕을 쬐어야 비타 어쩌고가 생긴다던데 이건 뭔 소린지 모르겠고.”

“그건 무슨 헛소리냐? 태양 좀 안 쬐인다고 사람이 죽을 리가 없지 않은가?”

“고대인들이 그리 믿은 거란 소리지. 난들 그 작자들 속을 알 리가 있나?”

둘 다 제법 고대에 대해 많은 지식을 지녔지만, 역시 이런 디테일한 부분까지 이해하긴 힘든 것이다. 현 시대엔 워낙 위험한 것도 많고 병도 많고 죽을 일도 많다. 그까짓 태양 좀 덜 쬐인다고 문제 될 거란 개념 자체가 생길 수 없다. 저건 진짜 사람 죽을 일이 극히 드물어 아주 자잘한 부분까지 신경 써야 할 정도로 문명이 고도화된 곳에서나 나올 법한 상식이니까.

“뭐, 웰빙 조명이라고 이름 붙어 있던데…….”

레펜하르트가 벽에서 주먹을 뽑아냈다.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복잡한 마력선이 함께 딸려 나왔다. 더 이상 원격 조작이 불가능하게 제어 시스템 라인을 통째로 뽑아 버린 것이었다.

“산 사람 몸에 좋은 거면, 죽은 놈 몸에 나쁜 건 당연하지 않겠어?”

☆ ☆ ☆

원래 짐 언브레이커블은 연약한 아녀자에겐 그리 심하게 손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 레펜하르트는 그런 전통을 따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가스트리젠!”

굵직한 앞차기가 렐시아의 몸통으로 날아들었다. 중간 동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공할 스피드의 킥, 하지만 그녀 입장에서 그렇게까지 엄청난 속도는 아니다. 조금 전의 렐시아라면 충분히 피한 뒤 오히려 반격을 가할 수 있었겠지만…….

퍼억!

찔러 오는 킥이 그녀에게 정확히 적중했다. 태양광으로 인해 스피드가 대폭 낮아진 것이다. 간신히 두 팔을 모아 가드해 봤지만 충격이 몸통을 뚫고 등 뒤까지 퍼져 간다.

“으윽!”

뒤로 날려 가는 렐시아를 레펜하르트가 바로 따라잡았다. 양손에 불길을 머금은 채 정신없이 연타를 날린다.

“연환 폭염권!”

좌우 훅과 스트레이트가 쉴 새 없이 렐시아를 두들겼다. 그때마다 어둠이 사라지고 가녀린 엘프의 육체가 비명을 질러 댔다.

“이런! 렐시아!”

당황하며 필레나가 바로 마력을 운용했다. 암흑을 끌어내 무수한 창으로 만든 뒤 허공에 쏘아 낸다. 목표는 레펜하르트가 아닌 격납고 천장이었다. 태양광을 내뿜는 마력등을 부술 셈이었다.

물론 그녀의 의도는 통하지 않았다.

“누가 그리 내버려 둘 것 같나?”

렐시아를 몰아붙이는 와중에도 레펜하르트는 필레나의 견제를 잊지 않았다.

“폭염기격포, 연환!”

수십 줄기의 섬광이 필레나의 암흑창을 부수며 허공을 갈랐다. 상대가 마력등을 노릴 거란 건 쉽게 예상할 수 있기에 충분히 타이밍을 맞출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렐시아에게 공세를 이어 간다.

“여자를 때리는 취미는 없지만…….”

무자비한 권격을 이어 가며 레펜하르트가 소리쳤다.

“명백한 적에게 자비를 베푸는 취미도 이젠 없다!”

‘이젠’이란 단서를 굳이 붙인 이유는 예전엔 그런 멍청한 짓도 자주 저질렀었기 때문이지. 그야말로 세상 무서울 게 없던 시절 이야기랄까?

하지만 더 이상 마왕도 아니고, 세상에 무서운 것도 참 많은 신세가 되어 버렸다. 눈앞의 강적을 봐주는 여유 따윈 부릴 생각 없다!

“골디언 어퍼!”

렐시아의 코앞까지 파고들어 무릎을 굽히고 그대로 주먹을 뻗어 올린다. 강렬한 어퍼컷이 황금빛 기둥을 동반하며 렐시아의 전신을 강타했다.

“아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렐시아의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녀에게 깃든 어둠이 싹 날아가고 전신의 뼈와 근육이 뒤틀려 흉측한 몰골이 드러났다.

“크으…….”

비틀거리며 렐시아는 눈을 부라렸다. 레펜하르트를 향한 그 눈빛은 그야말로 한 자루 칼날 같아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눈빛이 매서워도 사람은 눈빛만으로 죽지 않는다.

“끝을 내겠다.”

양 주먹을 가슴 위로 부딪히며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썼다.

쾅! 쾅! 쾅!

주먹이 부딪칠 때마다 황금빛 파문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하이브리드 캘러미티 혼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순수한 캘러미티 혼은 기력 소모가 심해 함부로 쓸 수 없지만, 지금의 그녀라면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렐시아가 한탄을 흘렸다.

“아아, 스테반 님…….”

끝없는 증오가 아직 그녀를 일으켜 세우곤 있었지만 단지 그뿐.

“결국 제 힘이 모자라 당신의 복수를 하지 못하는군요…….”

결국 그녀의 칼날은 마왕에게 닿지 못했다.

“미안하다.”

다가오며 레펜하르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스테반을 죽인 것에 대한 사과는 아니었다. 그는 죽을 만했고, 그래서 죽였다. 그 사실에는 한 점의 회한도 없다.

“네 눈을 뜨게 해 주지 못해서.”

여섯 빛의 고리가 그의 오른팔에 휘감겼다. 레펜하르트가 주먹을 뻗었다.

“하이브리드 캘러미티 혼!”

☆ ☆ ☆

렐시아는 시체조차 남지 않고 소멸해 버렸다. 레펜하르트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원래부터 시체였다. 필레나의 사령술로 현세에 묶여 움직이고 있었을 뿐이다. 이대로 필레나에게 사역되는 걸 막기 위해선 그 육체를 남길 수가 없다. 또한 육체가 소멸할 정도의 충격이면 그 영혼도 그리 무사하진 못한다. 한동안 영자 정보체가 헝클어질 테니 아무리 필레나라도 그 증오 어린 영혼을 바로 사역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할 짓이 아니군, 이거…….”

입맛이 쓰다.

레펜하르트가 차가운 눈으로 필레나를 노려보았다.

“이제 네 차례다, 필레나.”

그녀가 비웃음을 보였다.

“흥, 그 아이를 처리했다고 승리한 기분이라도 내는 모양이지?”

주먹을 고쳐 쥐며 레펜하르트가 질문을 던졌다.

“네게 남은 카드가 뭐가 있지? 사령인? 데스 나이츠?”

레펜하르트가 발동시킨 태양광에 영향 받은 것은 렐시아뿐만이 아니다. 그녀가 소환한 어둠의 기사들, 그들의 힘도 대폭 약화되었다. 덕분에 대부분의 데스 나이트가 아스레일의 검에 쓰러지고 있었다.

“어떤 흑마법이 있다 해도 렐시아, 그 아이만은 못할 텐데?”

물론 필레나의 마력은 아직도 여유가 넘친다. 아카식 드라이브로부터 힘을 부여받은 그녀는 여전히 무수한 어둠의 힘을 사역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힘으로 무엇을 사역하건, 레펜하르트에게 상처를 주지 못한다면 물량 공세는 의미가 없다. 그는 마왕이며 짐 언브레이커블, 대륙에서 가장 다대일에 익숙한 무문의 후계자다.

“그리고, 저 정도 증오와 원한을 가진 영혼은 쉽게 나오지 않지.”

뭐, 레펜하르트 자신도 그동안 여기저기 원한 산 데가 많다는 것은 인정한다. 워낙 저지른 짓이 많지 않은가? 온갖 전쟁은 다 일으킨 판인데. 그에게 원한 품은 인명 리스트를 작성해 보면 족히 수십 미터는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여인의 한보다 더 깊은 증오는 세상이 아무리 넓다 해도 결코 흔치 않은 법.

“남은 건 너 하나뿐이다, 필레나!”

살기어린 목소리로 레펜하르트가 말했다. 필레나가 요사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호호호, 확실히 그건 그래. 그 아이 정도로 널 증오하는 영혼은 드물지, 마왕. 그런데 말이야…….”

그녀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그 아이 말고는 당신을 증오할 이들이 없을 거라 생각해, 권왕?”

‘권왕?’

흠칫해 레펜하르트는 걸음을 멈췄다. 묘하게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권왕? 갑자기 마왕이 아니라 권왕이라고?

“너무 자신의 무문을 무시하는 것 아니야?”

요사스러운 웃음과 함께 필레나가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오라! 억겁의 시간 속에 방황하는 자들이여, 어둠에 이끌려 이곳에 강림하라!”

검은 장막이 바닥을 달리며 격납고 안을 가득 메웠다. 어둠속에서부터 음습한 목소리가 하나 둘 들려오기 시작했다.

“으으으으…….”

“아아아아…….”

하나 둘, 악령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2미터가 넘는 체구에 바위 같은 근육질의 거인들이다. 얼마나 가공할 사기와 원한이 응축되었는지, 악령임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물질적 존재감이 느껴진다.

“맙소사!”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으악! 저, 저거!”

실란도 비명을 질렀다.

“왜요? 왜들 그럽니까?”

뭣 모르는 아스레일만 당황해 의아할 뿐.

하지만 레펜하르트도 실란도 그의 의문을 풀어 주지 않았다. 지금 둘에겐 아스레일에게 신경 쓸 심적 여유 따윈 없었다. 둘 다 저 악령의 정체를 잘 아는 것이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레펜 씨? 저거, 그때 그거 맞죠?”

“당연하지! 착각할 수가 없는 놈들이잖냐!”

모습을 드러낸 수십의 거인 악령들이 저마다 눈을 부라린다. 지독한 투지와 살기가 그 넓은 격납고를 가득 메운다.

“권왕…….”

“짐 언브레이커블…….”

“부르다 저주받을 그 이름이여!”

“우리의 한을 풀겠다!”

3

“플레임 가스트리젠!”

불꽃을 휘감은 레펜하르트의 앞차기가 눈앞의 악령 거인에게 쏘아졌다. 강렬한 일격이 거인의 명치를 정확히 찔렀다.

그러나 거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암흑 마력을 파해하는 불꽃도, 강철을 꿰뚫는 오러도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이다. 거인이 두 팔로 레펜하르트의 발목을 붙잡았다.

“짐 언브레이커블!”

“이런!”

놀라 레펜하르트는 발목을 빼려 했다. 하지만 꿈쩍도 하질 않는다. 급한 김에 다른 발로 연신 킥을 날려 보았지만 그 역시 소용없다. 쏟아지는 킥을 온몸으로 버텨 내며 오히려 레펜하르트를 크게 돌린다.

“저주받을 권왕이여!”

악령 거인에게 붙잡힌 채 레펜하르트는 제 자리에서 몇 바퀴나 빙빙 돌았다. 곧이어 거인이 레펜하르트를 그대로 내던졌다. 한 줄기 유성처럼 레펜하르트의 거구가 격납고 벽으로 날아가 버렸다.

“래리어트 스윙!”

콰쾅!

끔찍한 충격에 레펜하르트가 피를 토했다.

“커어억!”

뒤이어 다른 악령 거인이 몸을 날린다. 전신 근육을 꿈틀대며 오른팔을 길게 뻗어 낸다.

“기격탄!”

쓰러진 레펜하르트를 향해 거대한 기격탄이 날아들었다. 족히 직경이 5미터는 되어 보이는 사이즈였다.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기겁하며 레펜하르트가 옆으로 몸을 굴렀다.

“으에엑!”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격납고 전체가 흔들린다. 아슬아슬하게 피한 레펜하르트가 기가 차 중얼거렸다.

“뭐, 뭔 놈의 기격탄 위력이…….”

레펜하르트조차도 저 정도 기격탄을 구사하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이었다. 저 거인 악령 하나하나가 6중첩의 경지에 도달한 권왕으로서의 그와 맞먹는 것이다!

그 와중에도 공격이 계속 이어진다.

“우리의 한을 풀겠다!”

폭연을 가르며 거인 하나가 돌진해 온다. 파공음이 일어날 정도로 빠른 돌진이었다. 그 상태로 거인이 킥을 휘둘렀다.

“타이푼 킥!”

어둠의 소용돌이가 단숨에 코앞까지 닥쳤다. 피할 틈이 없어 레펜하르트는 두 팔로 몸을 감쌌다.

“파이어 스파이럴 가드!”

두 줄기 소용돌이가 충돌했다. 레펜하르트가 피를 흘리며 또다시 뒤로 날아갔다. 제때 방어했음에도 워낙 상대의 공격이 강해 제대로 막아 낼 수가 없다.

“크으으윽!”

신음을 토하며 레펜하르트가 애써 반격에 나섰다. 전신의 마력을 오러와 합일시켜 양 주먹에 담아 쏘아 낸다!

“폭염기격탄, 연환!”

악령에겐 상극 중의 상극인 폭염기격탄이 거인들을 향해 쏟아졌다. 그러나 거인들은 피하지 않았다. 하나같이 가슴을 활짝 펴고 똑같은 외침을 터트릴 뿐.

“스파이럴 가드!”

어지간한 수호자 악마도 불태울 폭염의 오러가 공처럼 튕겨 격납고 사방으로 날아가 버렸다. 타격은 고사하고 조금의 흠집조차 주지 못했다.

기겁한 레펜하르트의 코앞으로 거인 하나가 파고들며 주먹을 가져간다.

“당신을 믿었다!”

제로 임팩트가 레펜하르트의 복부를 관통했다. 내장이 진탕되며 레펜하르트가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거인들은 그가 순순히 무릎 꿇도록 놔두질 않았다.

“당신을 따랐다!”

다른 거인 하나가 쓰러지는 레펜하르트의 턱을 올려 쳤다. 골디언 어퍼가 정타로 명중해 그의 육체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두 거인이 땅을 박차며 따라 날아올랐다. 좌우에서 스트레이트 캐논과 타이푼 킥이 동시에 작렬했다.

“그 대가가 이것이냐!”

“이것이란 말이냐!”

육체 곳곳에서 피를 흘리며 레펜하르트가 비명을 터트렸다.

“으아아악!”

☆ ☆ ☆

초대 권왕에게 맞아 죽었던 수많은 초기 짐 언브레이커블의 제자들.

짐 언브레이커블에 대한 원한과 증오를 품은 채 지박령이 된 그들은 원래도 무식하게 강력한 유령들이었다. 러스며 타시드의 블레이드 오러를 거뜬히 막아 내고 레펜하르트의 공세도 버텨 내며, 심지어 실란의 풀 파워 턴 언데드 주문으로도 채 성불시킬 수 없었던 괴물들. 이들 때문에 레펜하르트는 다 잡은 테스론 일행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이 무시무시한 악령들은 당시의 필레나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세이어에게 얻은 권능으로 이들의 주박을 풀었다. 강력한 흑마법으로 대지에 묶인 지박령을 자신의 권속으로 바꾸고, 몇 배나 강화시켜 지배하에 놓았다.

“호호호호…….”

정신없이 얻어터지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필레나는 웃었다. 이들이 나타난 이상 그에게 승산 따윈 없었다.

“이젠 끝이다, 마왕.”

한낱 일개 슬레이어일 뿐인 렐시아를 그 수준까지 끌어올린 필레나다. 물론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렐시아가 지닌 원한과 증오 때문이었기에 다른 이에겐 그 정도의 권능을 부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령인이나 데스 나이츠는 렐시아만 한 힘은 가지질 못했다.

하지만 짐 언브레이커블의 악령들, 그들의 원한과 증오는 렐시아보다 더했음 더했지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처음부터 어지간한 오러 유저급의 무시무시한 악령이다. 완벽하게 필레나의 어둠을 받아들여 그 힘을 키울 수 있는 것이다!

그 결과는 무시무시했다.

“짐 언브레이커블!”

“저주받을 그 이름이여!”

무수한 공세 속에서 레펜하르트는 피투성이가 되었다. 하나하나가 레펜하르트와 비교해도 전혀 떨어지지 않는 괴물들이었다. 인공 태양광도 소용없었다. 저 악령 거인들은 태양광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아니, 렐시아와 악령 거인의 원래 전력 차를 생각해 보면 그나마 약화돼서 저 정도일 것이다.

그런 괴물이 무려 수십이다. 한둘이었으면 어떻게든 마법으로 처리할 수 있겠는데…….

‘이건 너무하잖아!’

도무지 방법이 없어도 너무 없다. 수십 명의 권왕이 일제히 달려드는 셈인데 이걸 무슨 수로 막으라고?

“제기랄!”

치를 떨며 레펜하르트는 연신 도망쳤다. 반격 따윈 엄두도 나질 않았다.

강철의 육체가 퉁퉁 붓고 터지고 피를 흘린다. 뼈 여기저기에도 금이 가고 어긋난다. 그야말로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이토록 두들겨 맞아 본 적은 제라드 밑에서 수행한 이후 처음이다.

제라드나 바나텔, 아니 전생의 자신이라도 이 상황에선 답이 없어 보인다. 이들이라면 세이어라도 가볍게 해치울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뭐, 저 악령들의 힘 자체가 세이어에게서 나오는 것인 만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폐하!”

레펜하르트의 위기에 아스레일이 검을 들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실란을 보호해야 할 임무가 있는 그였지만, 충성을 맹세한 주군이 위험에 닥쳤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바포메트 슈트의 위력을 최대한 끌어 올리며 거대한 보랏빛 블레이드 오러를 휘두른다!

“타아아앗!”

블레이드 오러가 악령 거인 하나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그러나 아스레일의 충성심은 보답받지 못했다. 순간 악령의 전신에 검은 소용돌이가 일어나 검을 튕겨 낸 것이다.

“스파이럴 가드!”

악령 거인이 고개를 돌려 아스레일을 바라보았다. 투지를 터트리며 아스레일이 고함쳤다.

“와라! 사악한 존재여!”

무심한 눈으로 거인이 아스레일에게 주먹을 날렸다. 아스레일이 검을 뒤틀어 공격을 막았다. 비록 오러 유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세지만, 그가 걸친 바포메트 슈트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전설적인 기물이었다.

“네놈 하나쯤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그러자 악령 거인 넷이 더 끼어들었다. 이 자리에 있는 악령은 족히 수십이 넘는 것이다. 이들이 순번 정하고 차례대로 아스레일을 상대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다섯 명의 악령 거인이 아스레일의 사방에서 덤벼들었다. 가볍게 아스레일의 공세를 피해 넘어트리고 자근자근 밟기 시작한다.

퍽! 퍽! 퍼벅!

“큭! 컥! 크어어억!”

뭐 해 보지도 못하고 아스레일은 계속 두들겨 맞았다. 따지고 보면 다섯 명의 레펜하르트를 상대한 셈이니 당연한 이야기다. 그 튼튼한 바포메트 슈트가 반파되며 결국 혼절해 버렸다.

실란이 놀라 소리쳤다.

“아스레일 경!”

다행히 악령들이 그의 숨통을 끊진 않았다. 이들의 증오는 오직 레펜하르트에게만 향한 것, 공격했기에 반격했을 뿐이지 딱히 아스레일에겐 살의나 적의가 없다.

“크으, 이대로 있을 순 없는데!”

부들부들 떨면서도 실란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이미 이 악령들을 한번 조우한 적이 있었다.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저들은 자신을 노리지 않는다. 그러니 함부로 신성력을 쓸 수는 없다. 쓸려면 크게, 최대한의 위력으로 거하게 한 방을 날려야 한다!

레펜하르트가 죽도록 두들겨 맞는 와중에도 실란은 애써 침착하게 신성력을 모았다. 마침내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신성 주문이 완성되었다.

“필라넨스시여! 믿슙니다아아아아!”

분홍빛 섬광이 숫제, 폭발하는 것처럼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격납고 전체가 성광에 휘감겨 찬란한 빛을 발했다. 숨을 헐떡이며 실란이 양손을 내렸다.

“머, 먹혔나?”

개뿔도 먹히지 않았다.

“…….”

사라진 악령 거인은 하나도 없었다. 다들 멀뚱히 실란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실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공격받았다는 걸 인식한 이상, 이제 저들이 자신도 공격할 것 아닌가?

“아, 아으…….”

그렇게 공포에 질려 있는데, 거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2미터가 넘는 수십 명의 근육 괴수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무시무시하기도 하다. 거인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적인가?”

“아니, 그냥 여자다.”

“그것도 애다.”

“무시하자.”

자기들 나름대로 뭔가 결론을 내린 뒤 도로 실란을 무시하고 레펜하르트에게 몰려가 버린다. 얼마나 깃든 사기가 강력했던지, 실란의 성광이 이들에겐 공격인지 아닌지조차도 헷갈리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니 다행이지만, 동시에 피할 수 없는 절망이 엄습한다.

“뭐야, 이게…….”

사색이 되어 실란이 중얼거렸다.

“아무런 대책이 없잖아…….”

☆ ☆ ☆

필레나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속내는 그렇지 못했다. 드러나지 않게, 그녀는 극심한 고통을 견뎌 내는 중이었다.

‘으으으윽!’

가공할 아카식의 권능이 끝없이 흘러들어 온다. 인간에겐 허락되지 않은 그 거대한 힘은 고대의 이주 인류조차도 두려워하던 것, 10서클에 달한 마법사가 아니고선 고대에도 감히 아카식을 접할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그런 엄청난 권능을 다루는 것엔 당연히 대가가 따른다.

‘크으으윽!’

다루는 힘이 크면 클수록 반동도 큰 법.

흑마법이나 렐시아, 혹은 다른 곳에서 싸우고 있는 키린트-제이드며 10인의 오러 유저에게 힘을 부여할 땐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짐 언브레이커블의 악령’들까지 소환하니 그 반동이 막심했다. 저들은 하나이면서 여럿인 존재, 그 엄청난 사기를 다루는 것은 지금의 필레나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되도록 이들을 부르지 않고 렐시아 선에서 레펜하르트를 처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리된 이상 할 수 없지.’

수십의 악령 거인들에게 계속 암흑 마력을 부여하며 필레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괜찮아.’

전신이 분해되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 계속 밀려온다. 그러나 혼절해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애써 참아 내며 그녀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견딜 수 있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견딜 수 있다.

‘저자만…….’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버텨 낼 수 있다.

‘저자만 해치우면…….’

그 어떠한 고통도 희망을 이길 순 없다.

‘테스론을 다시 만날 수 있어!’

이를 악물며 필레나는 두 팔을 들었다. 암흑 파동을 퍼트리며 그녀가 날카로운 외침을 터트렸다.

“가라, 나의 권속들이여! 그 증오를 풀어 헤쳐라!”

☆ ☆ ☆

전투는 종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수많은 악령 거인들이 고함을 지르며 무수한 권격을 쉴 새 없이 퍼붓는다.

“배신자!”

“짐 언브레이커블!”

결국 레펜하르트는 격납고 구석까지 몰렸다. 악령 거인 하나가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거인의 주먹에서 검은 기운이 피어올라 네 개의 암흑의 고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캘러미티 혼!”

네 개의 암흑 고리가 중첩되며 파괴의 어둠으로 화했다. 사실 진짜 캘러미티 혼은 아니고 그냥 겉보기만 비슷한 단순 오러 압축술이다. 하지만 그 위력만큼은 진짜 4중첩 캘러미티 혼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워낙 실린 어둠의 기운이 강대한 것이다.

“죽어라! 권왕의 후계자!”

흑요석의 빛처럼 찬란한 어둠의 광채, 그것을 머금은 채 악령이 그대로 주먹을 내리쳤다.

“크으…….”

신음하며 레펜하르트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앞에 공격이 닥쳐오는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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