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권
제79장 어둠의 여왕
1
바슈탈론 제국 내에서 차기 검성으로 추앙받던 키린트.
태양탑의 미래라고까지 불렸던 대마법사 제이드.
제국 최고위층이기도 한 두 사람의 현재는 너무도 비참한 몰골이었다. 영광스러운 지위를 지녔던 저들에게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저런 끔찍한 괴물이 되어 나타났단 말인가?
……라고는 해도 뭐, 이제 와서까지 그 이유를 궁금해하는 이는 딱히 없었다.
“또 세이어가 뭔가 했겠지.”
“그러게.”
“그동안 못 볼 꼴을 좀 많이 봤어야지?”
그동안 보고 겪은 것들이 워낙 기상천외하다 보니 죽은 키린트와 제이드가 합체(?)해서 다시 나타난 것쯤은 호기심조차 일어나지 않을 지경이다. 그래서 러스 일행은 쓸데없는 궁금증 따위 깔끔하게 갖다 버리고 현실적인 대응을 하고 있었다.
상황이야 어찌 되었건 저들은 적.
그렇다면 그냥 해치워 버리면 될 일이다.
“크아아아!”
울부짖으며 괴물은 열 개의 손톱을 휘둘렀다. 열 줄기 은청색 블레이드 오러가 채찍처럼 흐느적거리며 러스의 눈앞에 쇄도했다.
“하압!”
짧은 기합과 함께 러스는 일루미네이터를 빙글 돌렸다. 단순히 원을 그리는 동작일 뿐이지만 그것이 천부적 재능을 바탕으로 완벽한 균형을 지닌 검, 일루미네이터를 통해 흘러나오면 눈앞의 모든 것을 흘려 버리는 가공할 검술이 된다.
파아아앗!
열 줄기 블레이드 오러가 청색 오러의 파동에 휘감기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것이 러스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평소라면 흘리기와 동시에 바로 역습을 가할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저 괴수가 날리는 공세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크아아!”
다시 포효하며 괴수, 한때 키린트이자 제이드로 불리었던 그것이 재차 블레이드 오러를 쏘아 냈다. 지극히 야성적이고 본능적인 외침을 터트리면서도, 쇄도하는 공쇄는 그 무엇보다도 세련되었고 이성적이다. 도저히 허점을 파악해 파고들 틈이 없다.
“쳇!”
욕설을 흘리며 러스는 반격을 포기하고 피했다. 그 뒤로 타시드가 달려들었다.
“날벼락 떨구기!”
러스가 물러서는 타이밍에 정확히 맞춰 덤벼든 것이라 괴물도 미처 반응할 틈이 없었다. 벌써 몇 년이나 대련에 대련을 거듭하며 호흡을 맞춰 온 두 사람이었다. 청록색의 오러가 한 줄기 벼락이 되어 괴물의 머리 위로 내리쳐졌다.
그러나 이 자리엔 저 괴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아아!”
노래하며 천사들이 창을 던져 왔다.
드르르륵!
사방을 포위한 골렘들이 연달아 마탄을 쏘아 댔다.
마력이 깃든 투창과 이글거리는 마탄이 참마도, 다카르를 내리치는 타시드를 정확히 노린다. 순간 타시드는 두 개의 현실을 보았다.
자신의 다카르가 괴물의 머리통을 쪼개고, 그 대가로 마탄과 투창에 꿰뚫려 피 흘리며 물러나는 자신.
다카르를 거두고 방어로 돌아서며, 마탄과 투창을 걷어 낸 뒤 아무런 성과 없이 물러서는 자신.
타시드는 후자를 택했다. 그의 애병, 다카르가 궤도를 바꾸어 방어 스타일로 돌아선다. 이미 모든 공격 궤적을 알고 있는 만큼 수십 발의 공세라도 일일이 막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콰콰콰콰쾅!
폭발과 함께 마탄과 투창의 비가 모조리 빗나가 굉음을 낳았다. 괴물로부터 거리를 벌리며 타시드가 혀를 찼다.
“젠장, 골치 아프네.”
골렘들에게 연달아 엘리멘트를 쏘아 대던 시리스가 잠시 기회를 잡았다.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몸을 뺀 뒤 허공에서 허리를 비틀어 두 자루 시미터를 교차해 날린다.
“엘리멘틱 스피어!”
정령합신을 통해 증폭된 마력과 엘리멘트를 합일, 진철 아다만티움조차 꿰뚫는 일격이 괴물의 뒷통수를 노렸다. 러스에게 모든 공격을 집중하고 있던 괴물 속의 키린트 입장에선 그야말로 허를 찔린 일격이었다.
하지만 괴물 속의 제이드에겐 뻔히 보이는 공격이기도 했다.
“재로 만들어 주마, 천한 엘프 년! 플레임 퍼니시먼트!”
괴물의 목 뒤가 갈라지며 흉악한 이빨이 드러났다. 쩍 벌린 입에서 불길이 쏟아져 나왔다. 엘리멘틱 스피어로 뚫지 못할 정도의 공격은 아니지만, 그 경우 시리스 자신도 저 불길에 휩싸이게 될 터다. 그녀가 신고 있는 부츠를 가동시켰다.
“블링크!”
시리스가 허공에서 사라지고 그 자리를 불길의 강이 메웠다. 어느새 석실 반대편에 나타난 그녀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대가리가 두 개니 심리적 허점을 노리는 수법 자체가 안 먹히네.’
마음 같아선 다시 한 번 공세를 취하고 싶었지만, 시리스는 일단 물러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다른 천사와 골렘 무리가 그녀를 향한 공격을 재개한 것이다.
드르르르륵!
골렘의 마탄을 피해 연신 마법을 날리며, 그 와중에 천사들의 투창도 피해가며, 또 간간히 날아오는 제이드의 마법에도 신경 써 가며 시리스는 연신 블링크로 공간 여기저기를 번쩍번쩍 이동했다. 그리고 치를 떨었다.
‘아우! 골치 아파!’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 아니 난전이었다.
천사와 골렘들은 착실히 대열을 갖춰 조직적인 공격을 감행한다. 그 공세의 중심에 괴물이 있다. 키린트와 제이드가 융합되어 인간도 뭣도 아닌 끔찍한 괴물로 재탄생한 존재, 멋대로 날뛸 뿐인 저 괴물은 러스와 타시드, 시리스와 아틸카 할 거 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마구잡이 공격을 해 대고 있었다. 문제는 과녁을 정하는 게 마구잡이였을 뿐 공격 자체는 세련된 오러와 고도의 마법이었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천사와 골렘들이 저 괴물의 엉망진창인 움직임에도 철저히 호흡을 맞춘다는 것이다.
괴물의 공격에 대비하다 보면 천사가 뒤에서 습격을 하고, 그걸 감당하고 반격하려 하면 어느새 골렘의 마탄이 측면을 치고 들어온다. 정신없이 일루미네이터를 휘두르며 러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도저히 허공검을 쓸 틈이 없는데…….’
타시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방에서 공세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순차적으로 사라진다. 연달아 파상공격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니 도저히 강력한 일격을 날릴 틈이 없다. 전투 예지를 발동해 허점을 찾아보려 해도 의미가 없었다. 아무리 몇 초 앞의 미래를 미리 보아도…….
‘내가 처맞는 미래밖에 없잖아! 아오! 이걸 어쩌라고!’
점점 수세로 몰리는 러스 일행을 향해 괴물이 통쾌한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하!”
☆ ☆ ☆
“잘한다! 레어폴!”
영상을 보며 세렐라인은 신바람을 냈다. 키린트와 제이드가 합쳐진 저 괴물은 분명 강력했지만, 이토록 상대를 압박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천사와 골렘 무리가 저 괴물을 철저히 백업하기 때문이다. 지금 레어폴은 전혀 통제가 안 되는 괴물의 움직임에 맞춰서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공격 진영을 계속 조작하고 있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퀸 하나가 멋대로 움직이는 체스판에서, 그때마다 모든 말의 움직임을 유동적으로 맞춰 가며 체스를 두고 있달까?
“대단해. 이런 건 아마 레어폴밖에 못할 거야.”
세렐라인의 칭찬에도 레어폴은 그리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영상을 보며 더더욱 안색을 굳힌 채 연신 손가락을 놀린다.
“음…….”
문득 레어폴이 신음을 흘렸다. 세렐라인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응? 왜 그래, 레어폴?”
레어폴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단하군. 트롤…….”
대신 더더욱 손동작을 빨리하며 감탄사를 흘릴 뿐이었다.
“이걸 대응한단 말인가? 듣던 것 이상으로 현명한 자로군.”
☆ ☆ ☆
정신없이 사방의 공격을 막고, 또 피하던 중이었다. 문득 러스는 깨달았다.
‘어째 좀 편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타시드와 시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분 탓인가?”
“공세가 좀 뜸해진 거 같은데…….”
기분 탓이 아니었다. 정말로 들어오는 공격의 수가 줄었다. 물론 괴물이 아까보다 공격을 덜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키린트-제이드는 여전히 광기에 휩싸여 러스 일행을 노리고 있었다.
“죽어라! 러스!”
“죽어라! 엘프 년!”
키린트와 제이드가 저마다 원한 섞인 외침을 토하며 오러와 마법을 날린다. 흉악하게 일그러진 거구로 연신 몸을 날려 공세를 퍼붓고 또 퍼붓는다. 그러나 다들 용케도 공세를 피하고 있었다. 아까와 달리, 천사와 골렘의 공세가 현저히 줄어든 것이다.
혈정광폭화를 건 채 전장을 누비는 아틸카의 활약 덕분이었다.
“한 줄기 낙수가 바위를 꿰뚫는도다!”
관통력을 담은 주술의 빛이 골렘들 사이로 길게 뻗어 갔다. 그 공격 자체에 피해 입은 적은 많지 않았다. 천사 두 개체, 그리고 골렘 1기가 휘말려 부상과 파손을 입은 정도였다. 저 정도의 주술력을 구사하고 이 결과라면, 솔직히 아틸카가 손해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아틸카의 일격은 절묘하게, 적절한 타이밍으로 천사와 골렘의 흐름을 끊었다. 막 괴물의 배후로 돌아가 러스와 시리스에게 마탄을 날리려던 골렘들의 발이 묶였고, 타시드를 향해 창을 던지려던 천사들이 엉거주춤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
연달아 손가락을 튀기며 아틸카가 소리쳤다.
“이것들은 내가 맡겠네! 그대들은 저 괴물에게만 집중하시게!”
충격파가 연신 전장을 가로지른다. 그때마다 천사와 골렘의 움직임이 방해받는다. 한 방, 한 방이 적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적이 움직이는 공간, 상대를 공격하려는 타이밍을 가로막는 것이다.
영상을 통해 천사와 골렘을 조작하고 있던 레어폴이 혀를 내둘렀다.
“혈신 아틸카,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나?”
보고 있던 세렐라인이 눈을 깜빡였다.
“뭔데? 뭘 하고 있는 건데?”
“지금 저 트롤은…….”
레어폴이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무슨 짓을 하는지를 파악해 먼저 선수를 치고 있는 겁니다.”
현재 레어폴은 멋대로 날뛰는 괴물의 움직임에 맞춰 천사와 골렘들을 가장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즉, 괴물의 움직임을 보면 레어폴이 어떤 식으로 천사와 골렘들을 조작할지를 미리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레어폴이 혀를 찼다.
“거참, 오래 살다 보니 트롤과 수 싸움을 하는 일이 다 생기는군.”
영상 속에서 거대한 근육질 트롤이 쉴 새 없이 천사와 골렘 사이를 누빈다.
“누가 이들을 조작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아틸카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올바른 흐름을 읽을 수 있다면, 움직임을 예측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주술력을 담은 두 자루 단봉이 연신 빛을 발한다. 천사의 하울링이 울려 퍼지고 불길의 마탄이 허공을 가른다. 혼탁한 전장 속에서 러스와 타시드, 시리스가 괴물과 본격적으로 붙기 시작한다.
뒤를 노리는 놈들이 없으니 한결 괴물을 상대하기가 수월해졌다. 전투 예지를 통해 기회를 잡은 타시드가 괴물의 좌측으로 파고들어 일격을 날렸다.
“날벼락 떨구기!”
타이밍에 맞춰 시리스도 함께 파고들었다.
“엘리멘틱 스피어!”
그러나 보조가 없다 해도 괴물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괴물 속의 키린트가 울부짖었다.
“크오오!”
괴물 속의 제이드가 영창했다.
“프리스매틱 배리어!”
허공에 교차한 은청색의 오러가 탄력성을 띤 채 타시드의 일격을 받아 냈다. 일곱 속성의 무지갯빛 마력 방어막이 시리스의 엘리멘틱 스피어를 오히려 튕겨 버렸다. 설사 천사나 골렘의 지원이 없다 해도 저 괴물은 충분히 강한 것이다.
타시드와 시리스가 이를 갈며 자세를 고치던 찰나였다. 거대한 트롤이 갑자기 둘 사이로 뛰어들었다. 혈정 광폭화 상태의 아틸카였다.
“어머니여! 가호하소서!”
고함을 지르며 아틸카가 자신의 애명, ‘어머니 은혜’를 교차해 내리그었다. 눈부신 빛이 괴물을 스쳐 지나가더니, 엉뚱하게 뒤쪽 바닥에 작렬했다. 가공할 폭발과 함께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났다.
시리스가 황당해하며 아틸카를 돌아보았다.
“아니, 왜 저기다 공격을?”
그녀뿐 아니라 모두가 대체 왜 저런 짓을 하나 의아해하던 차…….
“이런!”
영상을 보던 레어폴이 노안을 한껏 찡그렸다.
“저런 수가 있었나?”
아틸카가 빙그레 웃었다.
“걸렸군.”
파괴된 바닥의 연기 사이로 한 검사의 모습이 보였다. 한 손을 검 자루에 가져간 채 발도 자세를 취한 모습, 아틸카의 일격으로 잠시 시야에서 사라진 러스가 어느새 공격 태세를 완비한 채 괴물을 노려보고 있었다.
검을 뽑아 휘두르며 러스가 눈을 빛냈다.
“허공검, 인피니티!”
☆ ☆ ☆
일루미네이터가 허공에 한 줄기 선을 긋는다. 그 무엇보다도 빠르고 정확한 일격, 그 뒤로 공간이 공허의 입을 벌린다. 보이지 않는 거력이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권능을 싣고 괴물의 정수리를 내리친다.
“크아아아!”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며 괴물은 포효를 토해 냈다. 열 줄기 블레이드 오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은청색 오러가 둥근 방어장을 형성한다. 방어장 뒤로는 가느다란 오러의 실이 복잡하게 얽혀 탄성을 지닌 또 하나의 방어막을 형성한다. 강철의 강도를 지닌 방어장, 비단처럼 부드럽고 질긴 방어막, 회오리치며 모든 것을 튕기는 소용돌이, 순식간에 몇 겹이나 되는 오러 가드 스킬이 괴물의 전신을 완벽하게 보호한다. 괴물 속에 깃든 희대의 천재 오러 유저, 키린트의 재능이 최대한 개화한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아케인 배리어, 루나틱 실드! 프리스매틱 배리어! 포스 필드!”
괴물의 또 다른 머리, 제이드가 고도의 방어 마법을 줄줄이 발동한다. 온갖 마법 방어장이 오러 가드 사이로 촘촘히 틀어박힌다.
오러와 마법의 연계 속에서 괴물은 가장 완벽한 방어 형태를 취했다. 키린트와 제이드의 천부적 재능이 괴물의 육체에 힘입어 몇 배나 증폭되었으니, 설사 권황 제라드나 검성 바나텔이라 해도 일격에 이 방어를 부수는 것은 불가능할 터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무용이었다.
번쩍!
빛이 괴물을 통과해 지나갔다. 괴물의 전신이 너무도 간단히 둘로 쪼개졌다. 둘로 갈라진 괴물이 피고름을 토하며 신음을 흘렸다.
“끄어어어…….”
러스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훗, 날리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일단 날린 다음엔 뭐든지 벨 수 있거든?”
아무리 강력한 오러와 마법으로 무장해 봤자 그것은 현실이라는 공간 안에 존재하는 것, 공간 그 자체를 베어 버리는 러스의 진정한 허공검, 인피니티는 모든 방어를 무시한다.
‘뭐, 저 녀석 빼고.’
힐끔 타시드를 보며 어깨를 으쓱거린 뒤 러스는 검을 거뒀다. 아틸카가 쾌재를 터트렸다.
“잘했네! 러스 경!”
“나머지도 어서 처리하죠.”
무시무시한 피로가 어깨를 누르고 있었지만 러스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천사와 골렘 무리를 노려보았다. 예상외의 상황에 당황했는지 천사와 골렘 무리는 더 이상 공격을 시도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타시드가 무기를 고쳐 쥐며 눈을 빛냈다.
“자, 마저 끝내 버리자고.”
☆ ☆ ☆
영상을 바라보며 레어폴은 면목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쩝, 끝났네요.”
세렐라인도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게, 끝났네?”
이미 상당한 수의 천사와 골렘들을 잃었다. 거기에 ‘괴물’마저 당해 버렸으니 적어도 저곳에서 러스 일행을 처리할 수단은 없었다. 다른 지역에서 병력을 보충해 처음부터 다시 압박하는 수밖에.
‘혈신 아틸카…… 대단한데? 이단의 현자 말고도 저런 두뇌파가 안타레스 진영에 있었다니.’
그렇게 레어폴이 영상 속의 아틸카를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그나저나 이젠 어쩐다?”
세렐라인이 데스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뭐하니, 레어폴? 이번 판 끝났으니 다음 판 시작해야지?”
“……예?”
☆ ☆ ☆
쓰러진 괴물을 뒤로하며 러스가 걸음을 옮겼다. 타시드와 시리스도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막 괴물의 시체를 스쳐 지나갈 때였다.
“그륵!”
쓰러진 괴물의 입에서 기이한 숨소리와 함께 피고름이 흘러나왔다. 잠시 흠칫 놀랐지만 러스는 이내 표정을 평온히 했다. 죽은 시체에서 고여 있던 공기가 빠져나가는 광경은 전장을 오래 겪다 보면 의외로 흔하게 볼 수 있으니까.
“그르르륵!”
하지만 쪼개진 시체가 꿈틀거리며 다시 일어나더니, 맹렬한 기세로 남은 반신半身을 재생하는 모습은 절대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다.
“뭐, 뭐야!”
당황하며 러스 일행은 괴물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다시 몸을 일으킨 괴물이 촉수를 뻗어 남은 반신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자신의 육체를 흡수하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잃은 신체 부위를 회복시킨다.
“크아아아아!”
두 발로 다시 대지를 디딘 괴물이 포효를 터트린다. 날카로운 열 개의 손톱이 재차 돋아나며 은청색 블레이드 오러가 찬란히 분출한다.
콰콰콰콰쾅!
가공할 오러의 기세에 석실 전체가 흔들리며 광풍이 불었다. 아틸카의 안색이 굳었다.
“저것도 몇 번이나 살아나는 놈이었나? 너무하잖아, 이거!”
괴물의 머리가 재차 열렸다. 진득한 체액에 뒤덮인 두 사람의 얼굴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키린트가 러스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사이러스!”
제이드가 시리스를 향해 울부짖었다.
“엘프 마녀!”
탁해 빠진 눈빛으로 괴물이 러스 일행을 노려본다. 그들의 입에서 똑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겠다!”
어이가 없어 타시드가 인상을 팍 구겼다.
“아오! 또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야?”
2
십여 줄기의 블레이드 오러가 동시에 날아든다. 전부 틀에 대고 찍은 듯 똑같은 형태, 똑같은 색상의 오러가 금속 갑옷을 걸친 이들에 의해 뿜어져 나온다. 고대 병기, 아다만드릴 슈트를 걸친 R.X 시리즈였다.
공세의 중심에 선 이니야가 자세를 낮추며 칼날을 바닥으로 늘어트렸다.
“영원의 빙벽!”
은빛 오러를 머금은 칼날이 그녀를 중심으로 커다란 원을 그린다. 이내 냉기가 솟구쳐 사방에 거대한 얼음의 장막이 형성된다. 원추형으로 솟구친 얼음 기둥이 쏟아지는 블레이드 오러를 모조리 튕겨 냈다.
정확히 말하면 튕겨 냈다기보단 미끄러지게 만들었다는 쪽이 옳았다. 방패 형태로 구현하던 예전의 ‘영원의 빙벽’과 달리, 매끈한 원추 형태의 얼음 장벽은 타점을 정확히 노리기가 힘든 것이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비처에서 깨달음을 얻은 그녀는 이제 기존의 오러 스킬 역시 훨씬 효율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그렇게 공세를 걷어 내며 바로 이니야가 반격에 나섰다.
“타앗!”
영원의 빙벽이 깨지며 무수한 얼음 파편으로 화한다. 수많은 얼음 조각이 사방으로 흩날려 반짝이며 시야를 희롱한다. 단순히 눈을 어지럽히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다. 오러가 실린 얼음 조각이 사방을 뒤덮으니 오러 유저의 기감조차도 일순 흔들린다. 시각과 기감, 모두를 방해받은 R.X 시리즈가 잠시 상대를 놓치고 헤맨다.
“휘날리는 눈꽃!”
이니야의 검이 화려한 난무를 펼쳤다. 수십, 수백의 검화가 일시에 피어나며 그녀의 신형이 상대의 진영을 관통해 스쳐 지나갔다. 냉기가 실린 은빛 오러가 아홉이나 되는 R.X 시리즈를 동시에 두들겼다.
하지만 다들 별 부상은 입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다만드릴 슈트의 가공할 방어도 방어고, 또 환검 계열인 ‘휘날리는 눈꽃’은 일격의 위력보다는 다수의 타격을 명중시키는 기술이기에 그리 위력이 강하지 못한 것이다. 예전의 그녀라면 적어도 동토의 칼날, 기회가 된다면 최강기인 앱솔루트 스피어를 준비했겠지. 그쯤은 되어야 아다만드릴 슈트를 부술 정도의 파괴력을 보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한 단계 더 높이 도약한 지금의 이니야에게는 굳이 저런 행위가 필요 없다.
“서리 여왕의 지배.”
R.X 시리즈를 등진 채 이니야가 허공을 가볍게 그었다. 그녀의 의지가 현세에 관여하며 오러가 실존하는 물질, 얼음의 형태로 재창조된다.
“크아아악!”
아홉 명의 R.X 시리즈가 비명을 토했다. 체내로 스며든 이니야의 오러가 얼음 조각으로 변하며 신체 내부를 곤죽으로 만든 것이다. 여전히 아다만드릴 슈트는 불변, 조금의 손상도 입지 않았지만 그 속의 R.X 시리즈는 피를 토하며 숨이 끊어져 버렸다.
그란디아드가 혀를 찼다.
“진짜 이해가 안 가네. 어떻게 저런 짓을 하는 거지?”
파괴력이고 뭐고 전혀 상관없고, 그냥 칼침 한번 맞기만 하면 무조건 죽는다. 당하는 입장에선 치가 떨릴 정도로 억울한 기술이다. 저 여인을 상대하려면 최대한 접촉을 피한 채 원거리 오러 스킬만으로 승부를 보아야 하는데 R.X 시리즈에게는 그 정도 기량이 없다.
“그러니 우리가 처리해야 하는데…….”
“대체 이 기술은 뭐야? 완전 사기잖아!”
이니야의 검술에 대항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오러 유저, 어둠의 여왕에 의해 부활한 그들은 짙은 냉기의 안개에 휩싸여 발이 묶여 있었다. 이젠 대륙 내에서도 알려질 대로 알려진 북해의 숨결 탓이었다.
“에잇, 귀찮다!”
그란디아드가 치를 떨며 전신의 오러를 증폭시켜 몸을 날렸다. 자꾸 전신을 휘감는 냉기를 힘만으로 강제로 떨쳐 내는 것이다. 원래 북해의 숨결은 세밀하지만 위력 자체는 그리 높지 않아 오러 유저 상대론 이니야도 그리 자주 쓰지 않는다. 기껏해야 움직임을 봉쇄하거나 하는 견제기 정도?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흥!”
코웃음을 치며 이니야가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날아오른 그란디아드의 정면에 냉기가 응집되며 거대한 얼음창이 형성되더니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이 정도론 어림없다!”
그란디아드가 블레이드 오러를 떨쳐 얼음창을 모조리 부수며 계속 돌진했다. 그러자 이번엔 발밑에서 얼음 기둥이 석순처럼 솟구치며 그의 하반신을 노린다. 상하로 이어지는 공격에 그란디아드가 일순 집중이 흩어지는 찰나.
“하아앗!”
이니야가 몸을 날렸다. 그녀의 은빛 오러가 찬란히 빛나며 수십 개의 잔상을 남긴다. 화려한 검광이 그란디아드를 스쳐 지나갔다. 마치 검의 빛 자체가 그를 통과한 듯한 광경, 이내 피부를 뚫고 십수 개의 얼음조각이 솟구쳤다. 한기 속에서 붉은 선혈을 뿜으며 그가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악!”
그 광경을 본 오르만트가 치를 떨었다.
“크으, 실로 무시무시한 경지로다.”
지금의 이니야는 서리 여왕의 지배, 오러 물질화의 권능을 북해의 숨결과 섞어 전장 자체를 자신의 의지로 뒤바꿀 수 있는 것이다. 실로 눈의 여왕이라는 이명이 부끄럽지 않은 능력이었다. 수십 명의 아다만드릴 슈트를 걸친 R.X 시리즈, 고대의 슈트와 융합해 부활한 10인의 오러 유저를 상대로도 그녀는 전혀 밀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밀리지 않는 것이 전부이기도 했다…….
“하아, 또 하나 해치웠네.”
쓰러진 그란디아드를 보며 이니야가 힘겹게 혼잣말을 뇌까렸다. 등 뒤에서 시큰둥한 대꾸가 들려왔다. 마켈린을 보호하던 카를이었다.
“대신 저놈이 일어났습니다.”
카를의 손가락이 반대편 바닥을 가리킨다. 피투성이의 기사 하나가 다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란디아드보다 먼저 쓰러졌던 10인의 오러 유저 중 하나, 체이스 경이었다. 분명 서리 여왕의 지배에 의해 체내가 곤죽이 되어 절명한 상태였는데, 왠지 쓰러진 채 꿈틀꿈틀하더니 다시 눈을 뜬 것이다.
“아우…….”
인상을 쓰며 이니야가 재차 몸을 날렸다. 조금 전과 비슷한 상황이 이어졌다. 오러 번쩍번쩍, 검광 번쩍번쩍, 몇십 번의 공방이 오가고 오스만트가 서리 여왕의 지배에 의해 쓰러졌다.
“하아, 하나 더 해치웠어요.”
우울한 카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번엔 저 작자가 일어나는군요.”
방금 쓰러졌던 그란디아드가 언제 당했냐는 듯 슬그머니 되살아나 도로 전투태세를 취한다. 이니야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댔다.
“미치겠네…….”
아까부터 계속 이런 식이었다.
사실 저 기괴한 기계화 오러 유저(이런 표현이 옳을지 모르겠지만, 딱히 다른 표현을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한 명 한 명이 대륙을 떨쳐 울리던 강자들, 거기에 고대 슈트와 융합해 더더욱 실력이 올라간 터다.
아무리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 몇 단계 앞서 나간 이니야라 할지라도 전심전력을 다해야 겨우 쓰러트릴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수십 명의 R.X 시리즈도 있다. 혼잡한 난전 속에서 몇 번이나 사선을 넘어 가며 수많은 공세와 공세 사이를 뚫고 간신히 기회를 잡아 겨우 하나 해치우면 다른 놈이 도로 일어나 버리다니…….
“마음 같아선 그냥 재생도 못하게 산산조각 내 버리고 싶지만 그것도 힘들고…….”
카를이 침착하게 대꾸했다.
“저들의 저 끔찍한 모습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겠지요.”
사람 몸에 금속을 박아 넣는 저 끔찍한 짓거리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는데, 막상 상대하니 상당히 까다롭다. 서리 여왕의 지배는 갑옷 속의 맨살은 곤죽으로 만들 수 있지만 진철과 진은의 합금 갑옷을 부술 정도 파괴력은 없다. 금속 갑옷과 융합된 이상 신체 일부를 파괴할 순 있어도 신체 자체를 잘라 낼 순 없는 것이다.
“애초에 계속 되살릴 작정으로 저런 몰골로 만든 것처럼 보입니다, 왕비 전하.”
카를의 설명에 이니야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려 인류의 신과 상대하는 결전이다. 당연히 쉬운 싸움이 될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싸움이 이런 식으로 진행될 줄은 몰랐다.
“세이어란 놈은 아는 게 물량 공세밖에 없나요? 징그럽네, 진짜.”
“하긴, 제국의 이념이 저거긴 했지요.”
그 와중에도 적들은 계속 몰려오고 있었다. 등 뒤에서 마켈린의 기도가 들려왔다.
“알 포트시여! 그대의 종에게 한없는 은총을 내리소서!”
지친 심신에 새롭게 활력이 깃든다. 이니야가 검을 고쳐 쥐었다.
“고마워요, 마켈린 공.”
오러를 퍼트리며 또다시 전장으로 몸을 날린다.
“서리 여왕의 지배!”
☆ ☆ ☆
칠흑의 영기를 휘감은 채 서 있는 눈앞의 여인, 레펜하르트는 그녀를 보며 복잡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필레나…….”
필레나 레이그림, 혹독했던 마탑의 삶 속에서 유일한 빛이 되어 주었던 소중한 소꿉친구…….
‘……라고 할 정도는 사실 아니지?’
솔직히 말하면 레펜하르트의 어린 시절, 마탑에서의 삶은 분명 짜증 나고 귀찮긴 했지만 가혹하거나 학대받았다곤 할 수 없었다. 딱히 밥 굶긴 것도 아니고 무슨 성적, 육체적 학대를 받은 것도 아니니까.
그저 그 나이 때 어린아이가 받아야 할 부모의 사랑이나 정서적 보살핌이 없었을 뿐이다.
자기 자신만을 아는 어른 마법사들, 그 보이지 않는 질시와 경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분명 어린아이에게 있어 괴로운 성장 과정이리라. 하지만 마탑에 들어가기 전의 레펜하르트는 눈에 뻔히 보이는 질시와 대놓고 경계하는 마을 사람들을 보며 살았다. 그 때에 비하면 제때 밥 나오고 찬바람 안 드는 침대에서 자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게다가 과연 어린 레펜의 삶이라고 남들에 비해 특히 힘들었나?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이 시대 평민들의 삶은 고단하다. 어린 레펜이 부모 없이 힘겹게 살았다지만 부모를 둔 아이들의 삶도 그리 순탄하진 못하다.
아동 교육 개념도 없고 평민들 대부분이 일자무식, 술 먹은 아버지가 부지깽이로 자녀를 두들겨 패는 것 정도는 이야깃거리조차 되지 못하는 시대에서 딱히 부모가 있다고 행복한 삶은 사는 아이가 몇이나 될까? 그에 비하면 오히려 절대적 재능을 타고나 일찌감치 인정을 받은 레펜하르트가 오히려 더 나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 마탑의 삶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필레나와의 추억도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덕분에 지금 필레나를 바라보는 레펜하르트의 눈빛은 심란할 수밖에 없었다.
‘복잡하군.’
지금의 필레나는 적이다. 이 명백한 사실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아무리 적이 되었다지만 그녀를 해할 수 없다?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그녀와의 추억이 소중하진 않다.
하지만 아무리 큰 의미가 없다 해도 그녀는 분명 어린 시절의 유일한 친구였다. 순수하게 적의를 표하기엔 그 추억이 마음 한구석에서 발목을 잡는다.
이도 저도 아닌 회색의 감정.
결국 레펜하르트는 어중간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군, 필레나.”
필레나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검은 영기가 꿈틀거렸다. 뒤에 선 렐시아는 움직이지 않은 채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명령이 떨어지지 않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한 모습이다.
“마왕 레펜하르트.”
레펜하르트를 바라보며 필레나가 입을 열었다. 기묘한 쇳소리가 여인의 음성과 섞여 공간을 울렸다.
“어설픈 투지, 빈약한 적의로군.”
자신의 심정을 정확히 짚은 필레나의 말에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오랜만이라고 한 것은 비단 테스론과 함께 만났던 그때를 짚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단 오히려 더 먼 과거, 어린 시절의 필레나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지.
“그럴 수밖에. 당신은 모르겠지만 그대는 사실…….”
그때 필레나가 그의 말을 끊었다.
“알고 있어.”
“응?”
흠칫 놀라 레펜하르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체처럼 딱딱한 필레나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랜만이야. 잘난 척하는 꼬맹이.”
잘난 척하는 꼬맹이, 자신보다 두 살이나 어린 주제에 온갖 독특한 마법 이론을 개발해 별거 아니란 듯 툭툭 던지던 레펜을 향해, 필레나가 눈을 흘기며 부르곤 했던 별명.
“……알고 있었나?”
테스론은 레펜하르트의 시공 회귀에 대해 알고 있으니 필레나에게 말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예전에 만났을 땐 전혀 모르고 있던 눈치였었는데?
“세이어께서 진실을 들려주셨다.”
레펜하르트는 납득했다. 세이어는 테스론의 기억을 모두 볼 수 있다. 또 테스론과 달리 저 사실을 필레나에게 말하는 것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겠지.
“……그런 것치곤 별로 반가워하는 눈빛이 아니군.”
어린 시절의 자신을 알면서도 필레나의 눈빛은 여전히 냉혹할 뿐이었다. 자신과 달리 그 시절의 추억에 일 푼의 가치조차 두지 않는 모습이다. 솔직히 말해서 살짝 섭섭하기도 하다.
“……당시의 내가 참 싸가지 없었다는 걸 부인하진 않겠다만, 그래도 나름대론 우리가 꽤 친하게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자 필레나가 웃었다.
“친하게 지냈던 건 맞지.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야.”
동시에 그녀의 전신에서 검은 영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사실이 무슨 의미가 있지?”
그녀의 말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렐시아가 갑자기 몸을 날렸다.
“하압!”
강렬한 흑마법을 전신에 휘감고 화살처럼 쏘아져 레펜하르트에게 돌진한다. 아스레일이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나섰다.
“어림없다!”
기합을 터트리며 전신의 힘을 모조리 끌어낸다. 보랏빛 블레이드 오러가 바포메트 슈트에 의해 증폭되어 거력으로 화한다. 칠흑의 기운과 보랏빛 오러가 허공에서 충돌했다. 가공할 충격파가 일어나 사방으로 파문이 퍼져 나갔다.
콰아앙!
놀랍게도 이번엔 아스레일이 밀리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대책 없이 한 대 맞고 엎어졌던 걸 생각하면 상당한 쾌거다. 뒤에서 보조하는 실란의 힘 덕분인 듯했다.
“필라넨스시여! 사특한 어둠을 사르는 정화의 빛을 내려 주소서!”
오러 유저인 레펜하르트나 아스레일이 상대라면 실란의 보조 주문은 그리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어둠의 힘에 의해 움직이는 렐시아라면 실란의 힘이 최대로 발휘될 수 있다. 상대의 힘이 흑마법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고 전술을 바꾼 것이다.
성표를 쥔 채 실란이 연신 신성력을 떨쳐 냈다. 약화된 렐시아와 아스레일이 대등한 공방을 주고받으며 대기를 떨쳐 울렸다. 실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시금 양손을 들어 올리며 신성한 기도를 올린다.
“필라넨스시여! 가호의 빛을 내려 주소서!”
실란을 중심으로 빛의 폭풍이 일어났다. 필레나의 표정이 매서워졌다.
“어둠이여! 내게 임하라!”
그녀가 양손을 들어 올렸다. 어둠의 여왕으로부터 검은 폭풍이 일어나 신성한 바람을 누르며 불었다. 분홍색 폭풍이 회오리치며 공간의 어둠과 충돌해 굉음을 울렸다.
콰콰콰콰쾅!
실란의 빛을 밀어내며 필레나가 섬뜩한 외침을 터트렸다.
“난 그대의 목이 필요하다, 마왕! 중요한 것은 그것뿐이야!”
☆ ☆ ☆
검은 폭풍 속에서 필레나는 레펜하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어린 시절의 그리움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레펜하르트.
테스론과 육체가 바뀌었던 진정한 그녀의 소꿉친구.
그 사실은 지금의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눈앞의 저 거구의 근육질 사내가 그녀가 기억하는 잘난 척하는 꼬맹이였다고? 어린 시절 친하게 지냈던 아이가 사실은 테스론이 아니라 저자였다고?
‘그래서?’
분명 레펜하르트로 인해 그녀가 얻은 것은 적지 않았다.
원래 마법사는 제자에게 쉽게 마법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남자라면 죽도록 하인처럼 시중을 들고 아부를 떨어야 마법사의 기분이나 변덕에 따라 겨우 지식의 한 자락을 얻을 수 있다. 여자는 더 가혹하다. 남자 마법사에게 열심히 다리를 벌리고 애완견처럼 재롱을 피워야 겨우 마법서 한 장이라도 더 들여다볼 수 있다.
오죽하면 이런 말조차도 있다.
세상의 모든 창녀가 여마법사는 아니지만, 세상의 모든 여마법사는 창녀라고.
어린 시절 레펜하르트가 가르쳐 주었던 것이 있었기에 그녀는 충실하게 기본을 닦을 수 있었다. 그 점에 있어선 분명 고마워하고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기억하고 있다.
그녀가 열일곱 살이 되던 해, 어느 날 갑자기 변해 버린 그녀의 소꿉친구.
스스로를 테스론이라 부르며,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던 그 아이를 기억하고 있다.
분명 그 아이는 그녀가 알고 있던 소꿉친구가 아니었다. 성격도 기억도, 모든 것이 다른 누군가였다. 하지만 당시의 그녀는 그 사실을 몰랐다. 그저 병으로 인한 것이라 생각하고 평소처럼 그 아이를 대했다.
그 아이는 자라 청년이 되었다. 오러라는 놀라운 힘도 손에 넣었다. 그 힘으로 그녀에게 마법의 지식을 주었다. 덕분에 그녀는 알몸으로 다른 사내의 침상에 오르지 않고도 마법사가 될 수 있었다.
반면 진짜 레펜하르트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다.
이젠 그녀도 세이어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바뀌지 않았던 또 다른 세상에서 자신이 어찌 되었었는지.
그는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정상적인 여마법사들처럼 그녀가 성적으로 착취당하며 결국 성병에 걸려 죽어 가는 와중에도 오직 자신의 길만을 걷느라 바빴다고 했다.
그녀를 지켜 주고 보살펴 준 것은 변해버린 아이, 테스론이었다. 오만하기 그지없던 어린아이, 레펜하르트가 아니었다. 그 기간이 무려 10년이 넘었다.
세상 누구보다도 소중한 이를 위해서, 그저 소꿉친구일 뿐 아무런 감정도 관계도 없는 이의 목이 필요하다면, 대체 망설일 이유가 하나라도 있을까?
어둠의 힘을 일렁이며 그녀는 살기를 담아 소꿉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죽어, 레펜하르트!”
☆ ☆ ☆
“아케인 스파이럴 가드!”
필레나의 공격을 방어하며 레펜하르트는 인상을 썼다. 밀려오는 어둠의 힘마다 뚜렷한 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흔들림 따윈 전혀 없는 확고한 살기, 그와 달리 상대를 죽이는 데 한 치의 고민조차도 없는 살기다.
‘끙,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이야기인가?’
레펜하르트에게 필레나와의 추억은 마탑에서 살아온 세월의 거의 전부다. 십몇 년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그는 필레나와 함께 있었다.
반면 지금의 필레나에게 레펜하르트와의 추억은 고작해야 3, 4년에 불과한 것이다. 그 이후는 모조리 테스론과 지냈다. 그녀 입장에선 진짜 어린 시절, 한때의 소꿉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그녀가 레펜하르트에게 미련을 가질 이유가 뭐가 있겠나?
‘나도 딱히 필레나를 신경 쓰고 살진 않았고 말이지.’
레펜하르트는 쓰게 웃었다. 전생의 자신에게 필레나가 정말 의미 있는 존재였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솔직히 나이 먹고는 완전히 잊고 살았는데?
그러니 레펜하르트 입장에서도 딱히 필레나에게 미련을 가질 이유는 전혀 없지만…….
“어둠이여, 일어나라! 그대의 여왕에게 복종하라!”
필레나의 손짓에 따라 바닥에서 검은 형체가 솟아올라 인간의 형태를 취한다. 검은 형체가 저마다 손발을 휘저으며 레펜하르트를 압박해 간다.
“연환 기격탄!”
황금빛 오러탄을 날리며 레펜하르트도 반격했다. 동시에 정신을 집중해 필레나를 둘러싼 검은 영기를 관찰한다. 상대의 흑마법 메커니즘을 파악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끙!”
그런데 심란해서 영 집중이 되질 않는다. 미련 가질 이유가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필레나는 그의 인생에서 몇 안 되는, 그나마 친구라고 불릴 만한 존재다. 워낙 성격이 성격인지라 원체 친구가 없기도 했고…….
‘……라기보단, 전생의 내가 친구가 있긴 있었나?’
문득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전생을 아무리 되새겨 봐도, 어째 인간과 친하게 지낸 기억은 거의 없다. 이종족들, 사천왕이라 불리던 시리스나 타시드, 마켈린과 아틸카도 친구라기보다는 소중한 연인이나 부하 쪽의 관계다. 잘 생각해 보니 정말 친구라 부를 만한 관계는 필레나 정도밖에 없는 것 같다?
‘헉? 나 진짜 친구 없었네?’
게다가 친구가 동등한 존재를 의미한다면, 현생의 지금도 딱히 친구라 할 만한 이가 떠오르지 않는다. 왕따라니, 낯가림 심하니 하며 구박했던 러스조차도 전생엔 테스론이 있었고, 지금은 타시드와 우정을 나누고 있는데!
‘이럴 수가! 나 사실은 러스 녀석보다도 사회성 없는 놈이었나?’
엉뚱한 자아 성찰 탓에 레펜하르트는 자괴감에 빠졌다. 덕분에 집중력은 더욱 깨져 자꾸 필레나의 검은 폭풍에 뒤로 밀린다. 보다 못한 실란이 빽 소리를 질렀다.
“뭐 해요, 레펜 씨!”
안 그래도 신성력 퍼붓느라 피곤해 죽겠는데 레펜하르트 저 작자의 태도가 아까부터 계속 걸린다. 전심전력으로 상대해도 모자랄 판에 뭔가 딴생각하는 티가 옆에서 봐도 역력한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머쓱해하며 사과했다.
“미, 미안…….”
필레나를 보며 실란이 말을 이었다.
“상대가 저 여자라서 그런 거예요? 아무리 어릴 적 친구라도 지금은 분명한 적이거든요?”
“꼭 그렇다기보다는, 난 전생이나 현생이나 참 친구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말이지. 부하나 연인은 있어도.”
오러를 펼쳐 실란에게 가는 압박을 걷어 내며 레펜하르트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실란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래요?”
살짝 눈을 흘기며 레펜하르트를 노려본다.
“그런데 말이죠, 난 딱히 레펜 씨 부하는 아니거든요?”
순간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굳었다.
충격을 받은 얼굴로 눈앞의 소년을 멍하니 바라본다. 이 시대로 회귀해 또다시 세상에 나설 때부터 함께해 왔던 소년, 그는 여전히 아름다운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자신에게 당연하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몇 년을 같이 어울려 놓고 뭘 이제 와서 뜬금없이 나는 친구가 적다 타령인 거예요? 나 참.”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실소를 터트렸다.
“하하핫!”
뜬금없는 그 웃음에 실란은 물론, 필레나조차도 당황해 잠시 멈칫거린다. 덕분에 불어 대던 기류가 가라앉으며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실란이 입을 삐죽거렸다.
“또 시작이다. 거, 느닷없이 처웃는 버릇 좀 고쳐요. 그거 되게 이상해 보인다고.”
구박하는 실란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빙그레 웃었다. 왠지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농담마저 나올 정도로.
“그래, 실란. 네 말이 옳아. 넌 부하가 아니라 내 연인으로 알려져 있지, 아마?”
“아악! 그런 농담 좀 함부로 하지 말라니까요? 그러니까 이니야 왕비 전하가 계신데도 아직도 그놈의 헛소문이 안 가라앉잖아!”
확실히, 이니야의 존재가 공표된 후 실란에 대한 소문이 조금 변하긴 했다. 권왕 레펜하르트의 ‘연인’에서 ‘애첩’으로.
“크으! 진짜 어서 장가가든가 해야지, 아오!”
실란의 발작을 무시한 채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다시 필레나에게로 향했다. 변모한 레펜하르트의 태도를 경계한 듯, 그녀는 일단 어둠을 거둔 채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래, 모든 것은 바뀌었지.’
양손을 들고, 제대로 자세를 잡는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불괴 불굴의 황금빛 오러가 근육질 육체 위로 찬란히 불타오른다.
레펜하르트가 진지하게 말했다.
“원호해 줘, 실란. 저 여인을 처리해야겠다.”
더 이상 그 눈빛에 흔들림은 남아 있지 않았다.
☆ ☆ ☆
고오오오오-!
지옥에서 울리는 듯한 귀곡성과 함께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가 일어난다. 검은 팔다리가 솟구치고 이내 인간의 형체가 되어 암흑을 두른 채 전장을 질주한다.
“가라! 사령인들아!”
필레나의 명에 복종해 어둠의 인형체, 사령인들이 레펜하르트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사방을 에워싸고 손발을 뻗는데, 그때마다 팔다리며 손톱이 죽죽 늘어나 예리한 칼날로 변한다.
“스파이럴 가드!”
오러의 소용돌이로 어둠의 공세를 갈아 버리며 레펜하르트도 몸을 날렸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당대 계승자, 권왕의 육체가 마음껏 날뛰며 사령인들의 전신을 두들겼다. 펀치며 킥이 상대를 타격할 때마다 육중한 굉음이 공간 가득 울렸다.
쾅! 쾅! 콰쾅!
그러나 사령인들은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오러가 실린 일격을 정타로 맞고도 조금 비틀거릴 뿐 결코 흩어지지 않는다. 레펜하르트가 혀를 내둘렀다.
“거참, 이게 원래 이렇게 강한 마법이 아닌데?”
사령인을 창조하는 흑마법, ‘서먼 데드맨’은 원한령이나 사령에 흑마력을 입혀 물질계로 소환하는 8서클 주문이다. 최강의 흑마법사이기도 했던 전생의 레펜하르트가 이 주문을 쓸 경우, 그는 어지간한 일류 기사 이상의 전투력을 지닌 사령인을 소환할 수 있었다.
즉, 마왕이라 불리던 전생의 그조차도 사령인에게 일류 기사 이상의 전투력은 부여하지 못했다는 소리다.
그런데 필레나의 사령인은 차원이 달랐다.
고오오오-!
귀곡성과 함께 사령인들이 레펜하르트의 전신에 공격을 가한다. 팔다리를 놀려 상대의 공세를 걷어 낼 때마다 뻐근한 충격이 느껴진다. 오러로 감싼 짐 언브레이커블의 육체에 이 정도 타격이라니? 렐시아만은 못해도 어지간한 수호자급 악마 수준인 것이다. 이 정도면 어둠의 여왕이라는 칭호도 마냥 허세라 할 수 없다.
‘진짜 흑마법만큼은 나보다 훨씬 위로군.’
뭐, 그렇다고 딱히 레펜하르트가 자존심에 상처 입을 이유는 없었다.
흑마법은 마법이면서 마법의 틀에서 벗어난 무언가다. 자연 현상을 다루는 다른 마법과 달리 뒤틀린 인간의 영혼을 다루는 흑마법은 기본적으로 모순을 바탕으로 발현된다.
자신이 다루는 어둠의 힘을 그 누구보다 경멸하면서 동시에 그 누구보다도 동정하고,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면서 그 무엇보다도 증오해야 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흑마법의 본질.
쉽게 말해서 오락가락하는 감정적인 성격일수록 대성하는 분야랄까? 정신병자 넘쳐 나는 마법사 중에서도 유독 흑마법사가 또라이가 많은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레펜하르트 입장에선 거저 줘도 갖기 싫은 재능이라 하겠다.
‘그런데 필레나가 이렇게까지 오락가락하는 성격은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테스론을 잃고 휙 돌아 버린 게 영향이 컸던 모양이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공세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일어나 오르라! 어둠이여! 흑암의 눈물 앞에 그 불길을 일구어라!”
아스레일과 싸우는 렐시아에게도 끝없이 어둠의 마력을 부여하고, 수많은 사령인들을 움직이면서, 동시에 검은 영기의 폭풍으로 레펜하르트 일행을 쉴 새 없이 몰아붙인다.
다행히 상대가 흑마법인 만큼 천적도 명확했다.
“필라넨스시여!”
성표를 치켜들며 실란이 소리 높여 외쳤다.
“빛을 내려 주소서!”
분홍색 성광이 사령인들의 머리 위로 강렬하게 내리쬐었다. 검은 폭풍이 일어나 성광을 가로막았다. 실란이 다시 외쳤다.
“좀 더 내려 주소서!”
검은 영기와 핑크빛 성광이 허공에서 충돌하며 정신없이 휘몰아친다. 점점 밀리자 실란의 표정도 다급해졌다.
“필라넨스 님! 빛! 빛! 빛!”
빛을 내려 달라는 건지, 빚진 거 갚으라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막 읊어 대는 신성 주문이었다. 뭐,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만 여전히 위력 하나는 발군이다. 다시금 성광이 빛을 발하며 사령인들의 위력도 대폭 약해졌다. 렐시아의 기세도 크게 꺾였다. 덕분에 전투는 팽팽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실란의 원호가 없었다면 아무리 바포메트 슈트를 걸친 아스레일이라도 렐시아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을 테고, 레펜하르트도 마법 없이 오러의 힘만으로 사령인들을 상대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 틈을 타 레펜하르트는 찬찬히 필레나에 대한 탐색을 이어 갔다.
‘확실히 흑마법만큼은 궁극에 다다랐군.’
사령을 조율하는 것도, 어둠의 힘을 제어하는 것도, 세밀하게 흑마력과 영기를 치환해 극도로 효율적인 현세 물리력으로 바꾸는 것 모두 완벽하다. 틀림없이 지금의 필레나는 은의 시대 이후 최강의 흑마법사였다.
‘그런데…… 아무리 흑마력 조물락거리는 데 도통했다 해도 근간이 되는 마력은 필요한 법이잖아?’
사령인들을 정신없이 상대하면서도 차분하게 계산을 잇는다. 필레나가 보이는 위력과, 그녀가 선택한 흑마법의 효율을 역산해 최대한 근사치에 달하는 해답을 내놓는다.
‘이 정도면 아무리 낮게 쳐줘도 필레나의 현 마력이 거의 왕년 내 수준은 되어야 한다는 소리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현생도 아닌 전생의 레펜하르트는 그야말로 마법의 궁극체나 다름없었다. 그런 레펜하르트가 쉰이 다 되어서야 겨우 그 정도 마력을 손에 넣었는데 이제 겨우 서른을 넘보는 필레나의 마력이 그와 맞먹는다고?
‘그럴 리가 있나!’
아무리 세상이 넓다지만 자신과 맞먹는 마법적 재능을 가진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언할 수 있다. 참으로 시건방지고 오만한 생각이란 건 레펜하르트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사실인데.
‘필레나가 그 정도로 잘난 애였으면 어렸을 때 내가 몰라봤을 리가 없지.’
확신을 가지고 레펜하르트는 눈을 빛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이다.
“세이어겠지?”
세이어의 신성, 아카식은 곧바로 현세에 부여되지 않는다. 현재의 세이어에게 그런 능력은 없다. 동네 주민 A, B, C가 곧바로 초월적인 강자가 되어 나타나지 않는 것이 그 증거다. 그렇다면 보나마나 예전의 이라나드 공작처럼, 몸 어딘가에 괴기한 아티팩트를 박고 있다는 소리.
“타아아앗!”
레펜하르트가 기합을 터트리며 전신의 오러를 폭발적으로 끌어 올렸다. 황금빛 광풍이 주변의 사령인을 밀어낸다. 사령인의 머리 위로 날아오르며 그가 연달아 검은 폭풍을 향해 주먹질, 발길질을 퍼부었다. 황금빛 오러가 검은 영기와 충돌하는 걸 보며 필레나가 무뚝뚝하게 외쳤다.
“소용없다! 그대의 오러는 이 어둠을 뚫지 못할지니!”
“오러는 그렇지.”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레펜하르트가 외침을 이었다.
“파이널 스트라이크 임팩트!”
휘두른 주먹질, 발길질이 그대로 마법의 소매틱이 된다. 그 움직임을 바탕으로 마력이 정해진 술식을 따라 흘러가며 현세에 구현된다. 그 상태로 레펜하르트가 검은 영기를 향해 연달아 제로 임팩트를 날렸다. 뇌전, 화염, 어둠, 빙설, 항마, 파괴, 광풍의 마법이 제로 임팩트와 합일해 폭풍을 가르며 쏟아졌다.
콰콰콰콰콰쾅!
순식간에 검은 장막이 뚫리며 레펜하르트의 신형이 필레나의 코앞까지 닥쳐왔다. 무심하던 필레나의 눈빛이 일순 흔들렸다. 주먹을 들며 레펜하르트가 차갑게 웃었다.
“아낄 땐 아끼더라도 쓸 땐 화끈하게 써야지!”
그리고 바닥을 내리찍었다.
“A.M.P 쇼크웨이브!”
푸른 파동이 필레나와 사령인, 검은 폭풍 전역을 뒤덮으며 퍼져 나갔다. 모든 아티팩트를 정지시키는 절대적인 권능이 화려한 빛의 꽃을 피웠다.
파아아앗!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
“일어 오르라! 어둠이여!”
필레나가 다시금 손을 들고 검은 영기를 떨쳐 냈다. 파괴의 바람이 레펜하르트의 전신으로 불어 그의 가슴을 강타했다.
쾅!
순간 숨이 턱 막혀 온다. 쿨럭거리며 레펜하르트가 피를 토했다. 방심하다 아주 제대로 맞은 것이다. 고통 속에서 그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뭐야? 분명 A.M.P 쇼크웨이브가 제대로 발동됐는데?’
자신이 마법을 실수했을 리는 없다. 아예 발동을 못하면 모를까, 할 수 있는 마법을 실수로 실패하는 일 따윈 희대의 천재인 그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A.M.P 쇼크웨이브는 제대로 그 위력을 보였다. 필레나 뒤에서 대기 중이던, 아다만드릴 슈트를 걸친 R.X 시리즈가 하나 둘 쓰러지고 있었으니까.
털썩! 털썩!
그 모습을 보며 필레나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그리고 고개 돌려 레펜하르트를 노려본다.
“……착각이다, 마왕.”
그녀의 눈동자가 검은 불길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내게 주어진 신의 힘을 다루는 데, 도구 따윈 필요 없으니.”
3
“저런, 애꿎은 R.X 시리즈만 피 봤네? 뭐, 저자의 마력을 소모시켰으니 충분히 제 몫은 다한 것 같지만.”
영상을 보며 세렐라인이 혀를 찼다. 레어폴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누님? 저 마법에 영향을 받지 않는 아티팩트도 있었습니까?”
필레나의 가공할 흑마법을 보고도 레어폴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이전에도 금단의 아티팩트를 통해 세이어의 힘을 나눠 받는 경우는 있었다. 당연히 저 여인의 힘도 그런 식일 거라 생각했다.
세렐라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그런 아티팩트는 존재하지 않아. 그래서 일부러 전 대륙의 협력자들을 모은 것 아니겠니? 도구의 힘을 빌리는 자는 모두 저 마법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그럼 더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