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권 제78장 산개 (79/84)

제78장 산개

1

파괴된 신전 내부를 네 사람이 빠르게 주파하고 있었다. 흩어진 레펜하르트 일행, 그중 아틸카와 러스, 타시드, 시리스였다.

미티어로 인해 붕괴된 건물의 파편을 빠르게 타 넘으며 넷은 회색빛 통로와 연결된 커다란 공간에 들어섰다.

“여긴가 보군.”

지도와 공간을 비교해 보며 아틸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러스가 혀를 찼다.

“겨우 찾았군요. 지도가 영 부실해서, 원.”

그들이 받은 세이어 템플 내부 지도, 그것은 곳곳에 공백 상태가 존재했다. 레펜하르트가 드림 다이브에서 얻은 테스론의 정보 자체가 워낙 중구난방이었던 탓이었다.

분명 테스론은 가능한 한 최대한 많은 정보를 레펜하르트에게 전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레펜하르트의 육신을 얻고 마법사의 길을 걸었어도 그는 원래 무인이었고, 그중에서도 유독 무식하기로 명성 높은 짐 언브레이커블이었다. 정보야 열심히 챙겼다지만 도저히 정리 정돈이 되질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레펜하르트가 세이어 템플 지상부에서 굳이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찾은 이유였다. 분명 자신의 위치는 알고 있었다. 또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가 위치한 곳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 위치에서 지하 통로로 가는 길은 모른다.

이런 식이라 현재 아틸카 일행도 여기까지 오는 데 상당한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중간에 적이 나타나지 않아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더 오래 걸렸겠군.”

아틸카의 혼잣말에 시리스가 말을 받았다.

“카를 재상님도 그러셨죠. 만약 세이어가 직접 나서지 않는다면, 아마도 지상부에 병력을 배치하진 않았을 거라고. 그러고 보니 또 레펜하르트 님이 틀렸네?”

일단 세이어가 수하를 움직이는 식으로 나온다면, 레펜하르트는 분명 지상과 지하 모두에 방어 병력이 순차적으로 포진되어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카를은 이번에도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세이어 템플의 정보가 사실이라면 그러진 않을 겁니다. 이쪽의 전력을 알아보기 위해 지상부에도 밑밥 정도야 깔겠지만, 그것이 격파당한 시점에선 굳이 불리한 장소에 병력을 배치할 이유가 없지요. 저 같으면 보다 방어가 쉬운 지하부에 힘을 집중시켜 침입로를 차단할 겁니다.

비록 이유는 틀렸지만―세렐라인은 그저 신성한 지하부에 레펜하르트 일행이 들어오는 게 싫었을 뿐이니까― 그 외엔 제대로 예측했다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아틸카 일행은 이곳까지 이동하는 동안 어떤 저항과도 맞닥뜨리지 않았다.

“하여튼 두 사람 의견 엇갈렸을 때 형님 말이 맞은 적이 없다니까?”

러스가 너스레를 떨며 일루미네이터를 뽑아 들었다.

“그럼 문을 딸까요?”

“부탁하겠네, 러스 경.”

공간 안쪽에 위치한 커다란 금속제 문을 가리키며 아틸카가 말했다.

지하로 향하는 저 거대한 문은 겉보기엔 평범해 보이지만 진철 아다만티움과 진금 엘드릴 합금으로 만들어져 가공할 강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냥 문만 무식하게 튼튼한 것이라면 차라리 벽을 뚫고 가 버리는 방법도 있겠는데, 벽 역시 같은 재질에 마법에 의한 미닫이 형식이라 문과 벽 사이의 부품을 부숴 뜯어내는 방법조차 통하지 않는다.

“명정광폭화라면 부술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역시 되도록 힘을 아껴야겠지.”

아틸카의 손짓에 따라 러스가 문 앞에 서서 발도세를 취했다. 차분히 호흡하며 손가락을 자루에 가져간다.

“후우…….”

그의 비기, 허공검 인피니티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벨 수 있다. 이 기술 앞에선 진금 엘드릴과 달걀 푸딩의 강도 차이는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물론 그 대가로 엄청난 오러양을 소모하게 되니 앞으로 어떤 적과 마주할지 모를 현 시점에서 저 기술을 쓰는 것은 그리 현명한 판단이 아니다.

“굳이 인피니티까지 쓸 필요도 없고.”

러스가 공간의 검을 내뻗었다.

“허공검, 호라이즌!”

블레이드 오러가 공간을 뛰어넘었다.

문은 멀쩡했다. 금 하나 가지 않았다.

그런데 문이 열렸다.

“갑시다.”

러스가 손짓으로 영기염동을 발동하니 거대한 문이 좌우로 스르륵 열린다. 문은 그대로였지만, 그 문을 잠그고 있던 잠금쇠가 풀린 것이다.

지금 러스가 벤 것은 이 무식하게 단단한 문이 아니었다. 바로 이 문의 제어 시스템이었다.

문짝이야 온갖 마법 금속 때려 박아서 튼튼하게 만들었겠지만 그것을 열고 닫는 제어 시스템까지 그렇게 만들 필요는 없다. 어차피 문 안쪽에 있어 손이 닿지 않으니까. 그러나 허공검은 그곳에도 손이 닿는다.

“그런데 정말 형님 말대로 대충 부수기만 해도 잠금 장치가 해제되네요? 보통은 자물쇠가 부서지면 잠긴 상태로 남는 것 아닌가?”

러스의 의문에 답한 것은 이제 제법 마법의 경지가 오른 시리스였다.

“그건 평범한 자물쇠 달린 문 이야기고, 이건 은의 시대 물건이잖아요. 자동화, 무인화된. 혹여나 시스템이 고장 나기라도 하면 사람이 갇힐 수도 있으니, 그걸 감안해 저절로 열리는 구조로 만드는 게 상식이죠.”

“과연, 은의 시대 정도로 발달해 버리면 상식도 우리와는 달라지는군.”

문 안쪽을 살피며 러스는 혀를 내둘렀다. 은의 시대 문명에 대해 혀를 내두른 게 아니었다. 바로 저 말을 알아듣는 자신에 대해서였다.

‘그동안 워낙 이것저것 많이 보고 들었더니 저런 말도 이해가 가네.’

문명이 다르면 상식도 다르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이는 의외로 폭 넓은 경험 없이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자신이 레펜하르트를 따라다니며 얼마나 많은 걸 보고 익혔는지 새삼스레 실감이 난다.

‘가문에 틀어박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죽어라 칼질만 하고 있었다면 절대 이해 못 했겠지.’

러스를 선두로 네 사람이 문 안으로 들어섰다. 지하임에도 불구하고 내부는 밝았다. 벽마다 상당한 광량을 뿜는 마법의 등불이 설치된 덕이다. 길이 1미터에 빛을 발하는 유리 막대기를 등불이라고 하긴 좀 어색하지만.

그렇게 계단을 따라 한참 걷다보니 드디어 통로가 나왔다. 이제까지 보았던 세이어 템플 지상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사방이 금속과 매끈한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니, 사실 대리석은 아니다. 그냥 대리석 비슷한 느낌의 석조 재질일 뿐. 벽마다 복잡한 파이프라인이 오가고 장식인 건지 아니면 용도가 있는지 알 수 없는 부품들이 정신없이 박혀 있었다.

“여기는?”

타시드의 의문에 시리스가 지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공백이네요. 이곳에 대한 정보는 없어요.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진 알겠네요.”

공백으로 그려진 지도 서남쪽에 다른 지구와 연결되는 통로가 보인다. 도로 지도를 챙기며 아틸카 일행이 막 움직이려 할 때였다.

위이잉!

묘한 기계음 소리가 울리며 움직임이 느껴진다. 전혀 인기척이 나지 않았기에 러스와 타시드가 흠칫 놀랐다.

“뭐지?”

아틸카가 두 자루 단봉을 꺼내 들었다.

“편하게 보내 주는 건 여기까지인 듯하구려.”

그냥 장식처럼 보였던 벽면의 부품들, 그것이 일제히 움직이며 형상이 변화한다. 퍼즐처럼 복잡하게 회전하고 재배열되며 하나의 형상을 이룬다. 그 광경은 의외로 아틸카 일행에겐 익숙한 것이었다.

카를 재상이 사용하는 마검 엘드라드, 그것이 검집에서 마갑 형태로 변할 때와 흡사하다.

-가스트 파라 켈 하트!

어느새 이족 보행 형태로 변한 ‘그것’이 고대어를 외치며 붉은 눈빛을 발한다. 메사이어를 뽑으며 시리스가 차갑게 웃었다.

“은의 시대 골렘이군요.”

총 아홉 기의 은의 시대 전투용 골렘이 일제히 두 팔을 든다. 팔뚝이 매섭게 회전하며 불을 뿜었다.

드르르르륵!

☆ ☆ ☆

세이어 템플 지하부는 분명 철저한 방어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웅 이야기에 나오는 식의 마법 함정이라든가 벽에서 솟구치는 칼날, 내려앉는 천장이며 용암이 흐르는 강 따위와는 전혀 궤가 달랐다.

저런 건 보통 온갖 부장품 묻어 놓고 도굴꾼 경계하는 왕의 무덤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다. 그야말로 통행 자체를 허락지 않을 때나 설치하는 함정, 반면 이 세이어 템플은 원래 우주의 알, 은의 시대 아카식 드라이브 제어 플랜트였다. 아침 되면 직원이 출근해서 자기 볼일 보다 밤 되면 퇴근하던 장소란 소리다.

자기 직장 출근하는데 매일같이 솟구치는 칼날 피하고 내려앉는 천장 돌파해 용암이 흐르는 강을 넘어가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필요한 것은 침입자를 파악할 감시 시스템과 그 침입자를 격퇴할 수단이면 족하다.

“황궁도 마법 결계는 감시용으로만 쓰고 방어는 근위대와 경비병이 전담하지, 무슨 괴상한 함정 같은 걸 설치하진 않지요. 은의 시대라고 큰 차이는 없군요.”

데스크를 조작하며 레어폴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쓰게 웃은 이유는 바슈탈론 제국의 옛 역사 때문이었다.

전전대 황제 중 방어를 강화하겠답시고 태양탑의 마법사를 동원해 온갖 강력한 마법 결계를 황궁 곳곳에 설치한 적이 있었다. 평소에는 조용하지만 인가되지 않은 침입자가 들어올 경우 자동으로 발동하는 강력한 마법 함정들, 이는 혹시 모를 암살자며 반역자에 대한 강력한 대처가 되어 주리라 여겼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엄청난 예산을 들여 만든 마법 결계는 만든다고 끝이 아니었다. 유지, 운영하는 데도 엄청난 예산이 들어가는 것이 차라리 근위대며 경비병 월급 주는 것이 몇 배나 싸게 먹혔다.

그렇다고 저 결계 함정이 효과를 보았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암살자는 너무도 쉽게 저 결계를 파훼했다.

그냥 매일 아침 황궁에 출퇴근하는 대신 하나를 골라 인가증을 훔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황궁에 드나드는 이가 매일 수백 명인데 그들 모두가 황궁처럼 철저한 경비 태세를 갖추고 있지는 않으니까.

결국 저 결계의 피해자는 한 명으로 끝났다. 당시 제3황자였던 세트렌이 몰래 밤놀이 가겠답시고 정원 나섰다가 홀랑 타 죽은 뒤 황제는 울면서 모든 결계를 철수시키라 명했다.

“그런 결계를 쓸 만한 곳은 연금술사 길드나 마탑, 아니면 돈도 많고 원한 산 곳도 많은 차탄의 부자들 개인 저택 정도지.”

함정 형태의 방어 시스템은 폐쇄적이고 유동 인구가 적은 곳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

‘그런데 저 경우면 세이어 템플도 해당 요건이 되는데? 음, 그렇군. 둘의 혼합형인가?’

저 골렘들은 말하자면 움직이는 함정이다. 벽에서 갑자기 칼이 나와 침입자를 노린다? 그럼 그냥 그 칼이 계속 침입자를 쫓아가는 쪽이 더 효과적이지 않겠는가? 은의 시대 기술은 이런 것도 가능하다.

‘과연. 그래서 이곳의 방어 시스템이 이런 식인 거군.’

데스크를 조작하는 와중에도 레어폴은 계속 다른 쪽 영상으로 정보를 읽고 있었다.

예순이 넘은 나이임에도 마치 젊은이처럼 빠르게 생각하며 사고를 전개해 명령을 내린다. 그 명령에 따라 골렘들이 충실히 침입자를 격퇴하기 위해 움직인다.

레어폴 뒤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렐라인이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어때, 레어폴? 저들을 처리할 수 있겠어?”

레어폴이 허허 웃었다.

“그럴 리가요? 전투용 골렘 9기 정도로 저 자들을 상대하긴 무리지요.”

☆ ☆ ☆

일루미네이터가 허공을 갈랐다.

“허공검, 인피니티!”

빛의 칼날이 허공에 녹아내린다. 동시에 골렘의 등 뒤로 뻗어 나온다. 고대의 마법 합금으로 만들어진, 내구도만 따지면 아다만드릴 슈트나 드래고닉 아머와 완전히 똑같은 재질의 골렘이 일격에 두 조각이 난다.

콰쾅!

폭발 속에서 타시드도 참마도를 휘둘렀다.

“제라드 소드!”

육중한 일격이 골렘의 머리통을 그대로 으깨 버렸다. 파편이 튀고 끊어진 마력선이 붉은 영기를 뿜으며 흩어졌다. 다른 골렘 2기가 양팔로 불을 뿜었다.

-가스트 파라 켈 하트!

‘침입자는 항복하라’라는 의미의 고대어가 재생되며 콩 볶는 듯한 소음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드르르륵!

홍염의 마탄, 고위 마법사나 사용하는 고도의 마법이 타시드를 노렸다. 어지간한 마법사도 홍염의 마탄은 두세 방 쏘는 것이 전부인데 이 골렘들은 그 강력한 마법을 한 번에 수십 발씩 연사한다.

타타타타타!

타시드는 가뿐히 공격을 피했다. 가공할 전투 예지의 권능이 수십 발이나 되는 모든 홍염의 마탄의 공격 궤도를 모조리 알려 준 것이다.

물론 그 엄청난 정보를 전부 받아들인다면 인간은 미쳐 버릴 뿐이다. 전대의 검성 아인츠발트처럼.

하지만 타시드는 무시했다.

“음, 뭐가 막 보이기는 하는데 잘 모르겠다?”

모르는 것은 반드시 알고야 말겠다는 탐구심은 오크와 그리 인연이 없다. 그냥 대충 보이는 건 피하고 아니다 싶은 건 다카르의 검면으로 막아 버리는 타시드였다.

타타탕!

그리고 다시 일격!

“날벼락 떨구기!”

시간 동결의 힘으로 불굴의 검이 된 다카르가 뇌전의 일격을 골렘에게 내리친다. 또다시 단방에 골렘이 으깨져 버린다.

비기를 아낌없이 구사하며 타시드와 러스는 고대 전투용 골렘을 쉽사리 처리하고 있었다. 이 전투 역시 세이어 측에 모니터링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 정보 유출을 경계해야겠지만, 두 사람 다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미리 들은 카를의 언질 때문이었다.

-지상의 전투 시엔 저들의 눈을 가릴 때까지 비기 사용을 자제하세요. 하지만 지하부에선 그럴 필요 없습니다. 보건 말건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지하로 내려왔다고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대체 왜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지는 모르겠다. 카를도 그 이유까진 설명해 주지 않았다.

-기밀이라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 저를 믿고 움직여 달라고밖에는.

하여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니 마음껏 난리 치는 두 사람이었다.

‘두 사람 다 잘하는구먼.’

러스와 타시드의 활약을 보며 아틸카도 몸을 날렸다. 3미터에 달하는 거구가 골렘들의 머리 위를 장악한다.

“이놈들!”

광폭화한 아틸카는 골렘들과 비교해도 그리 크기 차이가 없다. 거대한 두 팔로 골렘 2기의 머리통을 붙잡은 뒤 풍차처럼 휘두른다.

“날아가라!”

호쾌한 내던지기에 의해 골렘 2기가 나가떨어진다. 광폭화에 의해 강화된 아틸카의 괴력에는 육중한 골렘조차도 수수깡과 다를 바가 없었다.

원래 아틸카의 명정광폭화는 최후의 수단, 전신전력을 다하는 필살기이자 최종기였다. 하지만 그동안 워낙 여러 강자와 뒤섞이며 경험을 쌓은 덕에 아틸카도 이젠 명정광폭화를 상당히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

반쯤 재생력을 남기고 반만 광폭화한 뒤 두 상태의 장점을 모두 취하는 이 방식이라면 몇 번이고 명정광폭화를 구사할 수 있다. 새롭게 얻은 주술적인 힘, 혈정광폭화였다.

단지 문제는…….

-침입자는 항복하라.

위이이잉!

나가떨어진 골렘들이 비틀거리더니 도로 일어나 버렸다. 워낙 탄탄한 재질로 만들어져 내던지는 정도로는 흠집 하나 가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틸카가 직접 부수자니 현재의 혈정광폭화 상태로는 아무래도 파괴력이 모자라다.

드르르륵!

일어난 골렘이 홍염의 마탄을 마구 쏘아 댔다. 아틸카의 전신으로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두 팔로 얼굴을 가리는 것만으로 아틸카는 모든 공격을 감당해 냈다. 현재 구사한 혈정광폭화는 반쪽짜리라 분명 파괴력은 부족하다. 하지만 재생력이 남아 있는 만큼 방어력은 명정광폭화보다 월등히 높은 것이다.

마탄을 버티며 아틸카가 소리쳤다.

“그럼 이놈들도 부탁하오! 아무래도 내 힘으로는 부수기 힘들구먼.”

어느새 골렘 뒤쪽에 자리 잡은 시리스가 빙긋 웃었다.

“맡겨 주세요!”

시미터를 뒤로 뺀 뒤 찌르기 자세를 취한다. 찌르기에 극히 취약한, 오직 베기 용도인 시미터지만 어차피 엘리멘트 스킬을 쓸 땐 검의 형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령합신!”

전신의 정령력을 한데 모아 마력과 합일시켜 일격에 내뿜는다!

“엘리멘틱 스피어!”

강렬한 관통의 빛이 일격에 골렘의 마법 합금 장갑을 꿰뚫고 내부 시스템을 헝클어 놓았다. 관절 구동부에서 마력의 영기를 피워 내며 골렘이 그대로 무너진다.

반대쪽으로 날아간 골렘은 러스가 처리 중이었다.

“허공검, 인피니티!”

아틸카 일행은 전원이 각자 골렘 무리를 상대하지 않았다. 거대화한 아틸카가 주술의 힘으로 적들의 공격을 받아 내며 후방의 러스와 타시드, 시리스에게 밀어낸다. 그럼 세 사람이 각자 무력화된 골렘에 최후의 일격을 꽂아 넣는다.

셋의 필살기는 아직 몸에 익지 않은 기술이라 발동 당시 딜레이를 감수해야 하지만, 이런 식이면 큰 위험부담 없이 전력을 다할 수 있다.

원래는 대세이어전에 대비해 익힌 전술 포메이션, 그러나 각자의 장점으로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는 이 방식은 굳이 세이어가 아니더라도 광범위하게 통용되는 것이다.

점점 전투 불능이 되는 골렘의 수가 늘어났다.

이윽고, 마지막 골렘의 몸통을 참마도 다카르가 박살 내며 전투가 끝났다.

박살난 아홉 기의 골렘 파편을 내려다보며 시리스가 이마를 훔쳤다.

“후우, 생각보다 만만치 않네요.”

“하지만 생각보다 만만했지.”

아틸카의 이어진 말은 모순적이었지만 다들 이해할 수 있었다.

이 골렘들은 분명 강했다. 그야말로 스스로 움직이는 드래고닉 아머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드래고닉 아머를 걸친 오러 유저와 비교하면 심각하게 약했다.

공격도 뻔하고 움직임도 둔하다. 방어력을 제외하곤 차라리 맨몸으로 싸우는 오러 유저와 상대하는 것이 더 편할 정도다.

세이어 템플, 일만 이천 년간 인류를 지배해 온 자의 거처를 방어하는 전력이 고작 이 정도일 리는 없다.

러스가 일루미네이터를 도로 찬 뒤 눈짓을 했다.

“빨리 움직입시다. 앞으로 뭐가 더 나올지 모르니.”

☆ ☆ ☆

박살 난 골렘들을 보면서도 레어폴은 태연했다.

“음, 역시 상대가 안 되는군.”

반면 세렐라인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뭐야? 그랜트 시리즈가 저리 쉽게 부서지다니?”

아틸카 일행의 예상과 달리 전투용 골렘, 그랜트 시리즈는 우주의 알에 비치된 최강의 방어 시스템이었다.

강력한 화력과 어마어마한 내구도를 지닌 그랜트 시리즈는 은의 시대에서도 최고의 성능을 지닌 것으로, 어지간한 마법사나 기공술사들도 상대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우주의 알 자체가 아카식 드라이브가 위치한 최고 중요 지점인데 흔해 빠진 싸구려를 비치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틸카 일행도 골렘의 장갑을 벨 수 있을 정도로 파괴력 높은 기술이 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저리 쉽게 상대했을 리가 없다. 죽어라 두들겨 가며 힘 빼다가 도망가거나 했겠지.

“저자들이 그랜트 시리즈를 저리 쉽게 처리할 수 있을 줄은 몰랐어.”

세렐라인이 손톱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레어폴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걸 왜 모릅니까? 이미 증거가 나왔구먼.”

이들은 지상부에서 고대 전투용 슈트를 걸친 은의 협력자들을 가볍게 처리했다. 저들에겐 아다만드릴 합금을 부술 능력이 확실히 있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식으로 해치웠는지도 이제 골렘과의 전투를 보며 알게 되었다.

‘이상하군. 이제 와서 비기를 노출시킬 것이면 왜 지상에선 굳이 눈을 가린 거지?’

찜찜한 기분이 들어 레어폴이 눈살을 찌푸렸다. 세렐라인이 다시 따졌다.

“그렇게 태연하게 말할 때야, 레어폴? 그랜트 시리즈는 숫자가 한정되어 있다고.”

현재 세이어 템플에 비치된 전투용 골렘의 수는 120기. 사실 그랜트 시리즈의 위력을 생각하면 절대 적은 수는 아니었다. 저 숫자면 1년 안에 대륙의 모든 왕국을 멸망시킬 수도 있는 가공할 전력이다.

하지만 고대 전투용 슈트의 수를 생각하면 아쉬운 것도 사실이었다.

“쩝, 아다만드릴 슈트 같은 건 200기도 넘게 있는데…… 드래고닉 아머도 40~50기는 남았고.”

분명 아다만드릴 슈트나 드래고닉 아머는 귀하디귀한 물건이었다. 은의 시대에서도 저 정도 기물은 극히 소량만 제작되었을 정도다. 그러니까 엘디아와 알하트란을 합쳐서 한, 4,500대 정도?

4,500대가 뭐가 소량이냐 하겠지만 은의 시대 물량과 현 시대의 물량은 개념이 다르다. 저 시대의 전투용 슈트라면 현 시대 기사들의 전마와 비슷한 위치, 전마는 분명 비싸고 귀한 존재지만 그래도 대륙 전체를 합치면 만 단위 숫자가 나온다.

4,500대나 존재했으니, 대부분 유실되었다 해도 세이어 템플에 보관 중인 고대 전투용 슈트의 수는 300기 가까이 되었다. 고대의 대파괴를 생각하면 상당히 많이 남은 셈인데, 이는 우주의 알의 특성 탓이었다.

은의 시대에서도 우주의 알은 최고 기밀 지역, 그런 만큼 이곳이 보호하고 있는 기밀은 아카식 드라이브뿐만이 아니었다. 온갖 마법적, 군사적 아티팩트 역시 우주의 알에 보관 중이었고 개중엔 당시 최고의 군사 기밀이었던 고대 전투용 슈트도 있었다.

반면 그랜트 시리즈는 그 기밀을 지키기 위한 방어 시스템, 방어에 필요한 물량 이상으로 배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현 시대에서도 천 자루의 창을 보관한 무기고를 지키는 것은 고작해야 열댓 명의 보초뿐이지 않은가?

“아다만드릴 슈트는 많은데 쓸 사람이 없으니, 칫.”

투덜대는 세렐라인을 귀여운 듯 보며 레어폴이 입을 열었다.

“세이어 템플의 방어 시스템은 그랜트 시리즈뿐이 아니지요. 엔젤 시리즈도 있지 않습니까?”

“……밥 짓고 빨래하는 애들? 걔네들이 무슨 전력이야?”

“그래도 어지간한 마검사 이상이던데요?”

“그래 봤자 저 이단자들 앞에선 한주먹일걸?”

실제로 한주먹에 날아가는 걸 기록 영상으로 본 적도 있다. 세이어가 레펜하르트를 파악하기 위해 자신의 기억 정보를 리플레이해 영상화하는 과정에서 어깨 너머로.

“그것들로는 저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글쎄요…….”

레어폴이 데스크 반대쪽으로 손을 옮겼다. 그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과연 그럴까요?”

2

얼마나 진입했을까?

또다시 여덟 기의 전투용 골렘이 튀어나왔다. 그것들을 본 러스가 소리쳤다.

“이번엔 나도 아틸카 공 쪽에 낀다! 기운 없어!”

러스의 허공검, 인피니티는 파괴력이 절대적인 반면 오러 소모도 극심하다. 아까 골렘들을 화끈하게 처리하며 너무 오러를 소모해 버려서 지금은 재충전할 시기였다.

러스와 위치를 바꾸며 타시드가 피식거렸다.

“그러게 누가 그런 무식한 기술을 개발하래?”

“크으, 내가 오크에게 무식하단 소릴 듣다니…….”

그래도 반박할 말이 없었다. 이 골렘들보다 몇천, 몇만 배나 단단한 놈들이 나타나도 러스는 한 방에 벨 수 있다. 그야말로 용 잡을 칼로 닭 잡는 꼴이랄까? 문제는 중간 단계가 없어 용 잡는 칼 빼고 나면 닭 잡을 칼도 없다는 것이다.

반면 타시드와 시리스는 아직 여유가 있다. 아틸카와 러스가 골렘들의 움직임을 제어하고 타시드와 시리스가 각자의 비기, 제라드 소드와 엘리멘틱 스피어를 날렸다.

그렇게 싸우니 아까보다 시간은 좀 걸릴지언정 충분히 상대가 된다. 막 골렘 두 기를 해치우고 다른 놈들을 맞서려는 찰나였다.

“응?”

예민한 러스가 인상을 썼다. 골렘들의 뒤로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것도 최소 두 자릿수의 기척이었다. 인간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기묘한 기척.

‘뭐지? 이 괴상한 느낌은?’

홰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흰 옷을 입은 수십의 미남미녀들이 대거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등 뒤에 아름다운 날개를 달고 전신으로 강력한 마력을 풍긴다. 타시드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 천사?”

당황한 다른 이들과 달리 시리스는 저것들과 이미 면식이 있다.

“그때 그놈들이네.”

비웃으며 시리스가 빠르게 말했다.

“저 날개, 순 닭 날개. 없느니만 못한 것들이에요. 붙어 보면 바로 이해하실 거예요.”

골렘들의 머리 위를 날아 천사들이 돌진하기 시작했다. 빛의 칼과 창을 휘두르며 기괴한 음성을 터트린다.

“아아아아아!”

엔젤 보이스, 듣는 이로 하여금 신성함과 압박감을 느껴 투지를 꺾어 버리는 합창이 사방에 메아리쳤다. 뭐, 이들 중 천사들의 합창 듣고 기 꺾일 정도로 무능한 이는 아무도 없으니 별 의미는 없었지만.

“헙!”

기합을 터트리며 타시드가 마주 몸을 날렸다. 허공으로 뛰어올라 블레이드 오러를 뿜어내자 청록색 파문이 사방으로 퍼진다.

천사들이 잽싸게 날개를 퍼덕여 공격을 피했다. 자신의 공격이 빗나갔음에도 오히려 타시드가 웃었다.

“아, 저래서 닭 날개구나.”

처음부터 날개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상대해 보니 시리스의 생뚱맞은 말이 바로 이해가 갔다.

타시드가 본 천사들의 회피 동작은, 날개를 조작해 피한 게 아니라 날개의 공기 저항을 애써 무시하며 피하는 쪽이었다. 차라리 날개를 떼거나 아예 접어 버리고 피했다면 더 수월했을 것이다.

“별거 아니네.”

안도하며 타시드가 다시 검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천사 두 명이 반으로 쪼개져 혈우를 뿌렸다. 반대편의 아틸카도 간단히 천사들의 칼과 창을 튕겨 냈다.

“강하긴 한데, 어색하게 강한 자들이군.”

“그래도 수가 꽤 많군요. 일일이 상대하긴 피곤하니…….”

일루미네이터를 크게 휘두르며 러스가 오러 스킬을 발동했다.

수백 줄기의 살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동시에 그 살기가 순식간에 수백 개의 칼날로 화한다. 날아드는 천사들의 머리 위로 죽음의 비가 쏟아진다.

“팬텀 오브 블레이드!”

실체와 기척을 혼용하는, 허공검의 초기 단계였던 팬텀 디바이드.

허공검을 제대로 익히게 된 후 러스는 더 이상 팬텀 디바이드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기척이 곧 실체가 되는 팬텀 디바이드의 특성은 버리기엔 아까운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팬텀 디바이드에 여기저기서 베낀 레인지 오브 자벨린이며 사우전드 소드 등을 뒤섞어 만든 광역 공격 검술, 팬텀 오브 블레이드였다. 수많은 살기가 곧 수많은 칼날로 변화해 쏟아지는 이 기술은 오러 유저에겐 큰 위협이 못 되겠지만 그 이하 수준의 적들에겐 무시무시한 공격이 된다.

과연, 공포에 질린 천사들의 비명이 사방에 아우성쳤다.

“크아아아!”

“아아악!”

이어질 피 보라를 기대하며 러스는 뿌듯하게 웃었다. 사실 이 기술은 강자와의 대결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었다. 자고로 고수라면 제자리에서 잡병 수십 명쯤은 쓸어버릴 수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오만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랄까?

‘그래, 나도 좀 오만해 보자고! 이 정도 상대론 좀 오만해도 되잖아?’

하늘은 그에게 좀 더 겸손을 가르치려는 모양이었다.

-침입자는 항복하라!

시기적절하게 남은 여섯 기의 골렘이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팬텀 오브 블레이드에 몸통채로 돌진하며 폭염의 마탄을 연사한다.

드르르륵!

수백 발의 마탄이 러스 일행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황급히 일행이 저마다 공격을 피하고 또 막는다. 그 사이에 천사들 대부분은 무사히 공세에서 빠져나갔다. 골렘들이 러스의 팬텀 오브 블레이드를 몽땅 그 무식하게 단단한 몸통으로 대신 받아 버린 것이다.

“아우, 대부분 빠져나갔네.”

실망감에 러스가 인상을 썼다.

‘기껏 개발해서 겨우 써먹을 기회 좀 생겼다 했는데 고작 천사 서너 마리 해치운 게 다냐?’

상황은 단순히 실망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물러선 천사들의 움직임이 갑자기 절도 있게 변하더니, 골렘들과 연계해 공세를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아아아아!”

엔젤 보이스를 터트리며 천사들의 창칼이 사방에서 쏟아진다. 평소라면 가볍게 상대할 수 있겠지만 천사들의 공격은 철저히 골렘들 뒤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천사들을 노리려 해도 골렘들이 방해가 되어 몸을 뺄 수가 없다. 그렇다고 골렘들을 처리하자니 어지간한 기술로는 흠집도 안 난다.

“쳇, 정령합신!”

골렘부터 처리하기 위해 시리스가 필살기를 준비했다. 그러나 술식은 완성되지 못했다. 둔한 골렘의 움직임 사이로 천사들의 공격이 교묘히 들어온 탓이다.

“엘리멘틱 스…… 큭! 쓸 기회를 안 주네.”

아틸카 일행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이, 이거…….”

“까다로워졌는데?”

골렘을 해치울 정도로 강력한 기술은 천사들의 방해로 구사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천사들을 먼저 해치우자니 골렘의 공격력을 무시할 수가 없다.

골렘의 머리 위를 밟고 공중제비를 넘으며 아틸카가 일격을 날렸다.

“타앗!”

천사 하나가 단봉의 일격에 박살이 났다. 이 와중에도 교묘하게 적들의 허점을 찾아 파고든 것은 분명 아틸카의 경험과 기량이 녹록치 않다는 증거, 하지만 그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수십 번의 회피와 수 싸움, 그리고 공방을 주고받으며 겨우 기회를 잡았는데 결과는 고작 마검사 수준의 천사 하나 해치운 게 전부다.

아틸카가 혀를 찼다.

“역시 만만치 않군.”

☆ ☆ ☆

“헤에? 쟤들 쓸모 있네?”

영상을 지켜보며 세렐라인은 감탄했다. 러스 일행에게 투입한 엔젤 시리즈의 힘은 솔직히 그리 높지 않다. 그래서 아예 전력으로 치부하지도 않고 있었는데…….

“당연히 쓸모 있지요.”

세렐라인의 감탄에 레어폴이 고개를 저었다.

단단하지만 둔한 골렘, 빠르고 날래지만 상대적으로 약한 엔젤 시리즈.

각자 따로 놓고 보면 약점이 명확하지만 함께 움직이면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며 오히려 전투적 우위에 서는 것이다.

“괜히 군대에 편제가 있는 게 아닙니다. 중갑병과 보병, 궁병 등이 제대로 된 전략 하에 움직이면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되니까요.”

물론 이 모든 것은 레어폴의 지휘 없이는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어느 타이밍에 어느 전력을 투입하고 뺄지, 어떤 식으로 전투에 임하고 어떤 식으로 보조할지 상세히 명령해 주어야 한다. 그냥 무턱대고 함께 보낸다고 저런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덕분에 영상 속 아틸카 일행은 꽤나 고전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쇄도하는 공세를 용케 버티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점점 지쳐 가는 게 보인다.

세렐라인이 기대하며 물었다.

“그럼 저들은 저기서 처리할 수 있을까?”

레어폴은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힘들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절대적인 전력 차가 꽤 심해요. 하지만 저들을 지치게 만들기엔 충분하겠지요. 그리고 우리에겐 아직도 상당한 수의 병력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새하얀 레어폴의 백발을 쓰다듬으며 세렐라인이 방싯거렸다.

“역시! 우리 레어폴이야! 믿음직하다니까!”

“……제 나이가 예순이 넘었는데 머리를 쓰다듬으시다니.”

쓴웃음을 지었지만 레어폴은 굳이 세렐라인의 손길을 쳐 내지 않았다. 본인도 내심 기분이 나쁘진 않았나 보다.

영상을 조작하며 그가 말했다.

“이걸로 저쪽은 일단 발을 묶었습니다만.”

조작한 영상이 다른 쪽을 비췄다. 보랏빛 머리의 엘프 여검사가 전신으로 냉기를 퍼트리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레어폴의 목소리가 조금 심각해졌다.

“저쪽은 이런 식으로는 안 될 것 같군요.”

☆ ☆ ☆

검을 늘어뜨린 채 이니야가 중얼거렸다.

“북해의 숨결.”

새하얀 안개가 사방으로 퍼져 간다. 수십 명의 천사들과 9기의 골렘들, 달려드는 이들이 모두 냉기의 안개에 휩싸여 얼어붙는다. 하지만 그 정도로 저들의 공세를 막을 순 없었다.

천사들은 강력한 마력으로 전신을 보호하고 있어 냉기에 대한 저항력이 있었다.

골렘들에겐 애초에 이 정도 냉기쯤에는 전혀 영향받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몸통과 가공할 마법 결계가 있다.

표면이 서리가 낄 정도로 차가운 냉기 속에서도 천사와 골렘들은 거의 움직임에 제한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더더욱 투지를 불태우며 이니야 일행에게 칼과 창을 들이댄다.

엔젤 보이스가 울리고.

“아아아아아!”

고대의 기계음이 뒤를 따랐다.

-침입자는 항복하라!

북해의 숨결을 발동한 채 이니야가 검을 들었다. 그녀의 검이 순간 번뜩였다. 은빛의 블레이드 오러가 너무도 깔끔한, 완벽하게 가까운 직선을 그렸다.

“서리 여왕의 지배.”

천사들이 일제히 폭발했다. 수십 명의 천사들의 체내에서 날카로운 고드름이 뻗어 나와 피와 살점의 안개로 화한다. 무시무시한 귀곡성이 귀가 따갑게 울려 퍼졌다.

“꺄아아아아아!”

골렘들의 움직임도 동시에 멎었다.

골렘의 아다만드릴 합금 갑옷은 멀쩡했지만 각 구동부는 이야기가 달랐다. 잘 돌아가던 톱니바퀴에 갑자기 이물질이 끼면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체내에 수많은 얼음이란 이물질이 생겨나니 아무리 은의 시대 고대 기물이라도 움직일 방법이 없다.

-침……입자…… 항…….

파직거리며 어긋난 부품 사이로 마력의 영기를 질질 흘리더니 이내 작동 불능이 되어 버린다.

마검 엘드라드를 쥔 채 뒤에서 대기 중이던 카를이 감탄을 터트렸다.

“정말 왕비 전하의 능력은 보면 볼수록 기가 차는군요.”

성표를 매만지던 마켈린 역시 비슷한 표정이었다.

“이미 저쯤 되면 검술도 뭐도 아닌데? 오러 유저는 저런 것도 가능한가?”

저 수많은 적들을 상대로 카를과 마켈린은 나서지도 않았다. 이니야 혼자서, 그것도 단 일격에 수십의 천사와 골렘들을 해치운 것이다. 그것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로!

제라드도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저건 오러 유저라서 가능한 게 아냐. 저 아이라서 가능한 게지. 역사적으로도 저 정도 능력을 지닌 오러 유저가 나왔단 소린 들은 적이 없다.”

유달리 다른 무문의 평가에 박한 짐 언브레이커블이 솔직히 감탄할 정도로 현재 이니야의 능력은 압도적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저도 상당히 힘을 소모했어요. 상대가 계속 물량 공세로 나서기 전에 어서 움직이지요.”

성큼성큼 이니야가 길을 나선다. 레펜하르트 곁을 떠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예전의 ‘여왕 모드’로 돌아간 그녀였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지만 저쯤 되면 이중인격이 아닌가 라는 의심이 들 지경이다.

뒤를 따르며 마켈린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지 싶은데. 이니야 양이 지칠 땐 제라드 공이 나서면 되는 것 아닌가?”

실제로 이번 공세 전, 골렘들만으로 공격을 받았을 땐 이니야는 나서지도 않았다. 제라드 홀로 주먹질, 발길질, 오러질(?) 몇 번 한 것으로 깔끔히 처리했던 것이다.

이니야와 제라드가 번갈아 공격을 감당하며 체력을 유지한다면, 그리고 카를이 보조하고 마켈린 자신이 회복을 빠르게 도우면 아무리 상대가 물량 공세로 나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면에서 왜 카를 재상이 제라드 공을 이쪽에 붙였는지는 좀 의아하더구려. 차라리 아틸카 공과 바꾸는 쪽이 힘 균형이 좀 더 맞지 않나?”

아틸카가 결코 약하진 않다. 비록 러스와 타시드가 많이 성장하긴 했지만 그래도 안타레스 공국에서 무력 서열을 매겨 보라면 제라드와 레펜하르트, 이니야에 이은 4인자 정도는 된다. 즉, 현재의 이니야보다는 전력상 밑이란 소리다.

그런데 굳이 제라드라는 최강 전력을 이니야와 함께 다니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것이 마켈린의 의문이었다.

카를이 고개를 저었다.

“제라드 공은 전력 외입니다.”

이니야와 제라드도 동감의 뜻을 표했다.

“그렇겠지요. 은의 현자들이라면…….”

“들고 나올 수법이 뻔하니까 말이지.”

☆ ☆ ☆

“역시 권황 제라드와 눈의 여왕은 만만찮습니다. 방어 전력 절반 이상을 저곳에 투입해야 할 것 같군요.”

레어폴의 근심에 이번엔 세렐라인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레어폴.”

“괜찮다고요?”

의아해하는 레어폴을 보며 세렐라인이 방싯방싯 웃었다. 그에게 잘난 척할 수 있게 된 것이 꽤 기분 좋다는 표정이었다.

“그 부분은 이미 내가 처리했거든?”

☆ ☆ ☆

갑자기 제라드가 발을 멈췄다.

“허허…….”

이니야도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드디어 나타났군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정황을 파악한 카를이 웃었다.

“역시 그렇게 된 겁니까?”

마켈린만 왕방울 같은 눈을 끔벅거리고 있었다.

“뭔데? 뭔 일이 생긴 거요?”

해답은 금방 나왔다.

콰아앙!

가공할 폭발과 함께 통로 저편이 붕괴된다. 붕괴된 통로 너머로 거대한 지하 광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족히 100여 미터가 넘는 넓이가 높이만도 수십 미터에 가까운, 그동안 세이어 템플 언더그라운드를 잠입하며 몇 번이나 봐 왔던 공간이었다.

마켈린이 ‘도대체 은의 시대에는 어디다 써먹으려고 땅 밑에 이런 무식하게 큰 공간을 지었대? 우리 드워프도 이렇게는 안 한다.’라고 의아해했을 정도로 드넓은 광장.

그 한가운데 진홍빛의 투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후후후.”

한 자루 검을 가볍게 든 채 전신으로 붉은 기운을 흘리고 있는 강퍅한 인상의 노인.

그가 제라드를 보며 허허롭게 웃었다.

“요즘 자주 보는구나, 제라드.”

제라드 역시 마주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말이다, 바나텔.”

검성 바나텔. 제라드와 함께 대륙 최강의 자리를 양분하는 그가 드넓은 광장 중앙에 홀로 서 있었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 가공할 위압감이 느껴져 카를과 마켈린이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우우…….”

“으, 저 괴물이 이곳에 있다니…….”

반면 제라드와 이니야는 태연했다. 이니야가 제라드를 돌아보며 물었다.

“함께 움직이는 건 여기까지네요.”

“그렇구나. 해야 할 일이 생겼으니.”

주먹을 쥐며 제라드가 흥분한 얼굴로 걸어간다.

애초에 카를이 제라드를 전력 외로 치부한 이유가 이것이었다. 은의 현자라면, 반드시 바나텔을 투입해 제라드와 붙게 만들 거란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상식 있는 무인이라면 누구나 저리 생각했을 테니까.

물론 무인이 아닌 프리스트, 마켈린은 황당해 물었다.

“아니, 제라드 공? 지금 저자를 홀로 상대하실 셈이오?”

“물론이오.”

“……지금 상황에서 왜 굳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안타레스의 존폐가 걸린, 무려 인류의 신을 상대하는 싸움이다. 당장이라도 이니야, 카를과 힘을 합쳐 저자를 상대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굳이 여기서 저 자와 일대일 대결을 펼칠 이유가 없지 않소?”

제라드가 태연히 대꾸했다.

“마켈린 공, 그대의 말이 옳소.”

“마침 저자는 홀로 나타났으니, 다 같이 힘을 합쳐 싸우면 아무리 검성 바나텔이라도 우리 상대는 되지 않을 터인데?”

“그 말 역시 옳소.”

입으론 계속 동의하면서도 제라드는 여전히 홀로 싸우겠다는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이니야와 카를 역시 마찬가지, 둘 다 전혀 끼어들 기미가 없었다. 제라드 혼자 싸우는 것이 당연하다는 눈치였다.

“아니, 왜…….”

당황한 마켈린을 향해 이니야가 조용히 말했다.

“평생을 싸워 온 호적수와의 대결입니다. 세계의 존망 따위 하찮은 것을 생각할 이유가 없으시겠지요.”

그리고 그녀는 태연히 발걸음을 옮긴다. 바로 옆에 바나텔이 서 있는데도 공격 따윈 할 리가 없다는 듯 반대편으로 향한다. 카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심지어 제라드며 바나텔에게 인사까지 건네고 있었다.

“그럼 두 분 수고하십시오. 나중에 뵙게 되는 것이 어느 분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길을 막아야 할 바나텔이 도리어 손을 내저었다.

“방해된다. 어서 꺼져라.”

그렇게 이니야와 카를, 마켈린이 광장 저편으로 떠났다. 마켈린만이 불안한 듯 연신 뒤를 돌아보았지만, 바나텔은 끝까지 그들을 저지하지 않았다. 그저 이글거리는 눈으로 눈앞의 제라드를 노려볼 뿐.

문득 제라드가 입을 열었다.

“인류의 신이라는 작자가 용케 네놈 혼자 보냈구나? 이것저것 딸려 주고 싶어 하지 않더냐?”

바나텔이 피식거렸다.

“세이어께선 아무 말씀 없으셨다. 그리고 그녀는 생각보다 무인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더군.”

무인도 뭣도 아니지만, 세렐라인은 80년이란 세월 동안 다양한 사람들을 보아 왔다. 경지에 오른 무인, 특히 검성이나 권왕쯤 되는 절대적인 초인이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는지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조력은 필요 없지요, 바나텔 공? 어차피 당신이 홀로 나서면 권황 역시 홀로 나설 테니까.’

‘물론이오, 신의 오른편이여. 누가 감히 우리들의 대결에 끼어든단 말이오? 그런 놈이 있다면 내가 먼저 베어 버리겠지!’

설사 일국의, 세계의 운명이 걸리고 신과 인류의 존망이 달린 장대한 전투라 해도 바나텔과 제라드는 둘만의 대결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무인에게 있어 호적수란 존재.

그래서 카를은 제라드를 전력 외로 놓고 계획에서 아예 빼 버렸다.

그래서 세렐라인도 바나텔을 오직 제라드만을 상대하게 했다.

전략적으로도 양쪽 모두에게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각자 상대의 가장 큰 전력 중 하나를 무력화시킨 셈인 것이다.

진홍색 오러를 끌어 올리며 바나텔이 검을 뽑았다.

“너도 나도 늙었다, 제라드. 슬슬 이 지겨운 악연을 끝내자!”

황금빛 오러로 전신을 휘감으며 제라드도 자세를 잡았다.

“전적으로 동감이다, 바나텔!”

두 사람의 오러가 점점 더 위세를 크게 떨치며 광장 전체를 뒤흔들었다. 바닥이 요동치고 대기가 일그러지며 광장 구석구석까지 투기가 넘실대며 흘러넘친다.

어느 순간.

“타앗!”

“허업!”

두 줄기 섬광이 서로 충돌했다.

3

우르르릉!

등 뒤에서 요란한 폭음이 들려온다. 흠칫하며 카를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런. 드디어 두 분이 시작하신 모양이군요.”

마켈린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라드 공은 괜찮은 건가? 바나텔이란 자는 듣자 하니 절대 제라드 공의 밑이 아니라 하던데…….”

나직하게 마켈린이 기도를 올렸다. 제라드의 승리를 기원하는 기도문이었다. 그 모습을 본 이니야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다 강한 자가 살고, 약자는 죽겠지요. 그들의 승패는 그들의 손에 달린 것, 기도한다고 결과가 변하진 않을 겁니다.”

허허 웃으며 마켈린이 너스레를 떨었다.

“내 직업이 이래 봬도 그 기도로 먹고 사는 직종이오만?”

이니야의 안색이 변했다. 생각해 보니 상대는 알 포트의 교황이었다. 성직자에게 할 소린 아니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제야 흠칫해 사과하는 이니야를 보며 마켈린이 고개를 저었다.

“이니야 양은 역시 폐하와 있어야 해. 평소엔 왜 그렇게 인간미가 없나?”

“……엘프라서?”

엘프라서 ‘인간’미가 없다는 식의 농담인 모양이었다. 마켈린이 더욱 혀를 찼다.

“거봐, 폐하 곁을 떠나니 농담도 영 부실하잖아? 지금 그거 웃으라고 한 말인가?”

“아니, 저…….”

이니야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덕분에 어깨의 긴장도 좀 풀어진다. 마켈린이 그 틈에 신성 주문을 발동시켰다.

“이제야 좀 긴장을 푸는구먼? 알 포트시여, 당신의 종에게 활기의 빛을 내려 주소서.”

가공할 마켈린의 신성력이 이니야의 전신으로 스며들며 지친 육신에 활력을 불어 넣어 준다. 덕분에 이니야의 오러 재생력도 보다 원활해졌다.

오러와 신성력은 어울리지 않으니, 신성 회복으로 바로 오러를 회복시킬 순 없다. 하지만 오러의 기반이 되는 육체의 피로를 지우고 상처를 재생시키면 오러 회복 속도 역시 훨씬 빨라진다.

그렇게 이니야를 회복시키며 마켈린이 점잖게 입을 열었다.

“원래 약사들도 그러잖소? 약발 잘 받으려면 몸에 힘 빼라고. 신성 주문도 별 차이 없지.”

“확실히 제가 좀 긴장하긴 했나 보네요.”

순순히 승복하며 이니야는 숨을 골랐다. 과연, 조금 전의 전투로 소모된 오러가 급격히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어깨의 긴장을 빼니 육체의 회복 역시 훨씬 빠르다.

잠시 후, 이니야가 생기가 도는 얼굴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전투를 치르기 전과 거의 차이 없는 컨디션이었다. 이 정도면 다시 적이 나타나도 연달아 북해의 숨결과 서리 여왕의 지배를 구사하는 데 별 차질이 없을 것 같았다.

“이래서 카를 재상이 마켈린 공과 저를 붙이신 거군요?”

“왕비 전하의 약점은 체력, 하지만 마켈린 공이 있다면 그 약점도 충분히 없어질 테니까요.”

없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마켈린의 가공할 신성력이면 거의 짐 언브레이커블과 맞먹는 무한 체력의 소유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두 분이 힘을 합친다면, 아까 같은 공격이 계속되어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겠지요.”

카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다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아아아아!”

홰치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엔젤 보이스. 그리고 섬뜩한 기계음의 고대어.

-침입자는 항복하라!

또다시 10여 기의 골렘들과 수십 마리의 천사들이 사방에서 나타난다. 반경 30미터쯤 되는 사각의 공간 여기저기서 적들의 살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른다.

이니야가 숨을 내쉬었다.

“후우우우…….”

폭염의 마탄이 쏟아지고 천사들이 일제히 공세를 펼친다. 그들을 모두 시야에 넣으며 그녀가 은빛의 오러를 떨쳤다.

“북해의 숨결!”

냉기의 안개가 삽시간에 사각의 공간을 가득 잠식하고.

“서리 여왕의 지배.”

한 줄기 블레이드 오러가 완벽한 선을 긋는다.

수십 송이의 붉은 얼음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 ☆ ☆

“……또 다 죽었는데?”

“그렇군요.”

세렐라인의 말에 레어폴이 어깨를 으쓱거린다. 세렐라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레어폴? 쟤들은 엔젤 시리즈도 안 통하잖아?”

이니야의 전투 장면을 유심히 보며 레어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틸카 일행을 고전케 만든 골렘과 엔젤 시리즈의 합공은 이니야에겐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상성이 안 맞는군요. 하긴, 눈의 여왕의 저 기술은 특히 다수의 전장에서 빛을 발휘한다고 했었지.”

아틸카 일행이 이니야 하나보다 약하다고 볼 순 없다. 그보다는 상성의 문제다. 골렘이나 엔젤 시리즈가 저 냉기와 오러 물질화를 이용한 공격에 너무 취약한 것이다.

“어쩔 거야?”

발을 동동 구르는 세렐라인에게 레어폴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누님. 아직 생각해 둔 것이 있으니까요. 권황 때문에 투입 시기를 두고 보고 있었지만, 눈의 여왕 혼자 남은 상황이라면 충분히 먹힐 겁니다.”

실제로 그는 방법이 있었다. 처음부터 염두에 두었던 방법이.

“그랜트 시리즈와 엔젤 시리즈를 투입한 건 눈의 여왕의 전투 정보를 보다 확실히 파악하기 위해서였을 뿐입니다. 덕분에 대응법도 충분히 나왔어요.”

“……아까운 골렘을 수십 기씩 해먹은 게 고작 적의 정보 탐색이었다고?”

“적의 정보를 파악하는 데 이 정도면 싸게 먹힌 것입니다만?”

물품 관리자인 세렐라인 입장에선 날아간 골렘이 하염없이 아깝겠지만, 군사학의 권위자인 레어폴 입장에선 반드시 필요한 행위였다. 제대로 된 정보가 전투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아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저들과 직접 상대한 오러 유저의 존재가 아쉽군. 생존자가 있다면 오러의 흐름이나 기술 딜레이 등의 상세 정보도 손에 넣을 수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오러 스킬은 영상으로, 눈으로만 보는 걸론 정보 입수의 한계가 명확하다. 어떤 식으로, 어떤 흐름을 타고 어떤 기세로 발동하는지 알아야 비로소 제대로 된 대처 방식을 세울 텐데, 그건 직접 상대해 본 오러 유저의 기감이 아니고선 무리다.

재밍 마력에 의해 방해받지 않았다면 슈트를 통해 은의 협력자가 느끼는 감각을 간접적으로 전달받음으로서 충분히 데이터를 모을 수 있었겠지만…….

‘아, 그래서 아까는 일부러 우리 눈을 가린 건가? 상대가 오러 유저가 아니라면 이쪽도 비기의 전모를 전부 파악하지 못할 테니…….’

생각해 보니 이것도 좀 이상하다. 그렇다는 건 레펜하르트는 은의 현자 측의 감시 시스템, 오러 유저의 체내 반응을 통해 데이터를 입수하는 방식까지 파악하고 있다는 소리가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논리의 비약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래도 이게 가장 가능성 높은 추론이긴 하군.’

그렇게 결론짓고 레어폴은 데스크 조작을 이었다. 보고 있던 세렐라인이 의아해했다.

“저쪽에 병력을 더 투입하려고? 그랜트 시리즈는 이제 80여 기 정도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런데 보아하니 그랜트 시리즈 쪽에 명령을 내리는 것 같지가 않았다.

“대신 아다만드릴 슈트와 드래고닉 아머가 250여 대 가까이 남지 않았습니까?”

“……쓸 사람도 없는 전투용 슈트가 수백 대가 남으면 뭐하는데?”

세렐라인이라고 고대 전투용 슈트의 존재를 몰라서 안 썼던 것이 아니다. 쓸 사람이 없잖아, 쓸 사람이!

레어폴이 노안 가득 미소를 띠웠다.

“왜 쓸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시죠?”

“없으니까 없다고 그러지? 아니면 지금 갑자기 하늘에서 250명의 오러 유저가 뚝 떨어진대?”

“이 경우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땅에서 솟는 쪽이겠지요.”

세렐라인이 귀엽게 눈을 깜빡였다.

“……웅?”

☆ ☆ ☆

제라드와 바나텔이 격돌한 광장, 그 광장과 연결된 통로와 사각의 공간을 넘어 이제 이니야 일행은 굵은 파이프가 어지럽게 박힌 공장 지역을 지나고 있었다.

파이프 사이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던 이니야가 갑자기 전투 자세를 잡고 주위를 경계했다.

“적입니까?”

카를과 마켈린도 긴장하며 주위를 살폈다. 이들은 이니야처럼 예리한 기감으로 기척을 느낄 수 없으니 그녀의 반응에 항시 따를 수밖에 없다.

인상을 찌푸리며 이니야가 뇌까렸다.

“느낌이 좀…… 다르군요.”

요란하게 등장하던 세이어의 천사들, 그들과 이번의 기척은 뭔가 달랐다. 새로운 적이 분명했다.

과연, 잠시 후 수십의 커다란 그림자가 파이프라인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매끈한 표면에 2.3미터의 거체를 지닌 인간형 금속 물체, 이니야는 눈을 깜빡였다. 꽤나 익숙한 외형이었다.

‘아다만드릴 슈트?’

그럴 리는 없었다.

지금 나타난 그림자의 숫자는 족히 50이 넘었다. 그리고 아다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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