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장 돌입
1
부서진 벽면을 통해 들어가니 먼지로 더럽혀진 백색 공간이 시야에 잡힌다. 세이어 템플 내부를 둘러보며 카를이 중얼거렸다.
“의외로 내부가 평범하군요?”
사실 평범하다는 표현엔 좀 어폐가 있다. 분명 세이어 템플은 굉장한 건축물이었다. 복잡한 조각이 아로새겨진 거대한 기둥들과 끝없이 펼쳐진 회랑, 아름다운 타일이 벽면을 장식한 홀, 반파된 지금도 지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신전과도 비교를 거부할 정도로 아름답고 웅장한 건축물이다.
그럼에도 카를이 평범하다고 여긴 이유가 있었다.
‘딱히 은의 시대 문명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데…….’
그는 이미 한번 은의 시대 문명을 접한 적이 있다. 바포메트 슈트를 얻었던 북의 극지, 그곳에 위치한 은의 현자들의 전진기지를 탐색했을 때.
강철과 마법 금속으로 이루어진 구조, 돌을 녹여 바른 듯 일체형으로 이루어진 수백 미터의 기둥과 벽들. 그 전진기지는 분명 이 시대의 상식을 아득히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구조물이었다.
그에 비해 지금 보이는 세이어 템플은 그 크기가 웅장하긴 해도 분명 현 시대 수준의 건축물이다.
드림 다이브를 통해 이미 이곳의 정보를 알고 있는 레펜하르트가 설명해 주었다.
“그럴 수밖에. 여기는 반파된 우주의 알에 덧붙인 부분일 뿐이거든.”
파괴된 부위에 후일 은의 현자가 현 시대 양식의 신전 건물을 다시 올린 것이다. 그러니 기술적, 문명적으로 별 대단한 게 없어 보이는 게 당연하다.
“그럼 미티어로 별 피해는 못 주었겠군요.”
“그렇겠지.”
아쉬워하는 카를을 뒤로한 채 레펜하르트는 내부를 살펴보았다. 테스론에게서 넘겨받은 정보에 의하면 이곳의 실질적인 중추는 지하에 위치해 있다.
“일단은 그 통로를 찾아야겠어.”
걸음을 옮기며 레펜하르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닥에 거하게 한 방 날려 길을 뻥 뚫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문득 들긴 했지만…….
‘혹시 모르니 함부로 움직일 순 없지.’
어지간한 던전이라면 다 설치되어 있는 물리적 충격 확산 방어장, 당연히 세이어 템플도 비슷한 방어 시스템이 구비되어 있을 터였다.
잘못하면 구멍이 뚫리는 게 아니라 건물 일대가 폭삭 무너져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수백 톤의 파편에 깔리고 살아남아 기어 나올 수 있을 정도면 레펜하르트 본인이나 제라드 정도…….
‘……가 아닌가?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들도 어지간해서는 다 살아남겠군.’
실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고 한 소리였는데, 생각해 보니 예전과 다르게 지금 레펜하르트 일행은 전원 대륙 최강자급인 것이다. 심지어 카를이나 아스레일도 마갑의 힘이라면 충분히 저 정도 충격을 버틸 수 있다. 실란이나 마켈린만 잘 챙기면 다들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다.
‘정 길 못 찾으면 저 방식도 고려해 봐야겠군.’
물론 제일 좋은 방법은 그냥 내려가는 길을 찾는 거다. 그렇게 레펜하르트는 계속 탐색을 시도했다. 그러는 동안 다른 일행은 전투태세를 취한 채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행 전원이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서진 기둥 사이로 한 무리의 인기척이 느껴진 것이다. 이니야며 제라드가 빙긋 웃었다.
“음?”
“아, 드디어 나타나셨나?”
다들 오러 유저답게 저 멀리서 누군가가 나타나기만 해도 바로 알아챈다. 오러 유저와 궤는 다르지만 아틸카나 시리스 역시 기척을 감지하는 특유의 수법이 있으니 반응이 동일하다.
뭐, 사실 전원이 같은 반응인 것은 아니었다.
“응? 뭔데?”
“뭐가 나왔어요?”
프리스트인 마켈린과 실란은 당연히 아무것도 못 느꼈다. 그리고 마갑 엘드라드 빼고 나면 그냥 평범한 기사일 뿐인 카를도 마찬가지. (2미터 거구에 알찬 근육질이고 맨손으로 통나무도 찢을 수 있으며 한 손으로 달려드는 황소를 엎어 메치는 카를이지만, 여기선 평범한 게 맞다.)
“음, 역시 오러 유저라 다들 감이 좋으시군. 난 모르겠던데.”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겠어요.”
부끄러워하며 아스레일이 고개를 숙였다. 오러를 각성하긴 했지만 아직 그는 기감을 펼쳐 주위를 파악하는 수법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것이다.
타시드가 위로를 건넸다.
“오러 유저 된 지 하루 지났는데 벌써 기감이 그 정도로 발달하면 아스레일 경이 러스급의 천재겠지. 당연한 일이오.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지.”
“……그럼 러스 경은 하루 만에 가능했단 소립니까?”
“저놈이야 워낙 천재잖소?”
“타시드 경은 얼마나 걸렸습니까?”
“난 워낙 둔해서 한 사흘 걸렸지.”
“…….”
참고로 각성한 오러 유저가 제대로 기감을 발휘하는 데 걸리는 수련 기간은 평균 반년 정도다.
‘아, 이 사람들 재수 없다.’
어쨌든, 기둥 사이로 한 무리의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원 새하얀 로브 차림에 무장을 한 이들이었다. 숫자는 대략 열 명 정도.
어둠 속에서 그들의 인상착의가 드러나자 카를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야, 이거 유명인들 아니신가?”
☆ ☆ ☆
그들은 전원 대륙의 이름난 오러 유저들이었다. 바슈탈론 제국의 레하탄 경이며 오스만트, 그라임의 체이스와 할라인의 세르네스, 자유 기사인 마스라과 카텔 등 이미 대륙 전역에 명성을 떨치는 이들.
“세이어 신도가 아니라고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저들도 은의 현자 쪽이었단 말이지?”
심지어 그 속엔 크로방스의 오러 유저, 그란디아드 경도 있었다.
50대의 건장한 기사가 검을 든 채 레펜하르트 일행을 향해 미소를 짓는다.
“오랜만이군, 러스 경.”
전쟁에 불참한 그란디아드 경이지만 러스와는 안면이 있었다. 전후 처리 시, 불참한 대귀족들에게 보상금을 뜯어낼 때 대표로 잠시 만났을 뿐인지라 별로 좋은 인연은 아니지만.
러스가 기가 막혀 물었다.
“그란디아드 경? 당신이 이곳에 있다니? 크로방스는 안타레스의 동맹국임을 모르는 겁니까?”
“지금의 난 지고한 신의 사도, 은의 협력자. 신의 위엄 앞에 인간의 국경 따윈 하찮을 뿐이다.”
당당하게 대답하는 그란디아드의 표정에 국가에 대해 충성을 맹세한 기사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레펜하르트가 카를을 보며 실실 웃었다.
“거봐, 내가 오러 유저 수입하지 말자고 했잖소?”
“그러게 말입니다. 큰일 날 뻔했네.”
“……?”
의아해하며 그란디아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슈탈론의 오스만트가 정색을 하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어리석은 이단자들! 감히 그 더러운 발로 성역을 더럽혔으니 그 죄는 죽음으로도 갚지 못할 터!”
호통을 터트리며 오러를 끌어낸다. 전신으로 회색빛 오러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다른 은의 협력자들도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세이어의 이름으로 그대들을 처단하겠다!”
열 명의 오러 유저가 동시에 오러를 발하니 그것만으로도 발치가 흔들린다. 실로 강대한 기운이었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리고 한쪽 눈을 치켜뜨며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무슨 수로?”
확실히 저들의 기세는 가공했다. 예전 바나텔을 따라 안타레스 백국을 침공했던 그 오러 유저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즉, 반대로 말하면 고작해야 그 오러 유저들 정도 수준이란 소리다.
“진지하게 물어보는 건데, 대체 무슨 수를 쓰겠다는 거요?”
기다렸다는 듯 제라드가 황금빛 오러를 펼쳤다.
콰아앙!
광풍이 불며 가공할 기세가 공간을 가득 점유한다. 열 명의 은의 협력자가 피운 기운이 아침 이슬처럼 싹 날아가 버린다. 은의 협력자들이 기세에 밀려 뒷걸음질을 쳤다.
“으윽!”
“과연 권황 제라드!”
“정말이지 인간이 아니군, 저 괴물은…….”
태산 같은 거구를 내세우며 제라드가 살기 어린 미소를 띠운다.
“애송이들이 제법 기운을 펼칠 줄 아는구나. 허허허.”
비아냥을 섞어 레펜하르트가 말을 맺었다.
“농담 아니고, 그냥 사부 혼자 나서도 다 해결될 것 같은데?”
굳이 제라드까지 갈 필요도 없다. 당시에도 레펜하르트며 이니야, 아틸카는 홀로 다른 오러 유저 두셋을 상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타시드나 러스도 그때에 비해 실력이 크게 올랐다. 아무리 봐도 저들만으로 지금의 레펜하르트 일행을 상대하라는 건 자살하란 소리나 같다.
그럼에도 오스만트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곳이 성역이 아니라면 그렇겠지.”
갑자기 오스만트가 오른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세이어께서 우리를 가호하신다!”
다른 은의 협력자들도 똑같은 자세를 취한다. 그리고 동시에 외침을 터트린다.
“오라! 아다만드릴 슈트!”
“소환, 드래고닉 아머!”
열 명의 오러 유저들 머리 위로 열 개의 공간 포털이 열렸다. 검은 공허의 구멍이 저마다 거대한 마갑을 토해 낸다. 테스론이 사용했던 고대의 기물, 단 하나만으로 대륙의 정세를 뒤흔들 수 있는 초월적인 기물이 동시다발적으로 저들의 몸을 감싼다.
레펜하르트가 놀라 중얼거렸다.
“뭐야? 저거 저렇게 많이 있는 거였어?”
순식간에 10인의 강철 거인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저들의 전신에서 오러 폭풍이 엄청난 기세로 뿜어져 나왔다.
파아아아아!
어찌나 강렬한 기운인지 제라드가 뒷걸음질을 칠 정도였다. 긴장하며 제라드가 안색을 굳혔다.
“큭! 이건 좀 센데…….”
반면 다른 일행들은 그리 긴장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저 뭔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볼 뿐.
과연, 레펜하르트가 빙그레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아다만드릴 슈트며 드래고닉 아머가 저렇게 많이 있었다는 건 좀 놀라운 일이었지만…….
“얘들은 어째 발전이 없냐?”
그리고 느닷없이 몸을 날린다.
“허업!”
순식간에 레펜하르트가 적들의 중앙으로 날아들었다. 놀라며 은의 협력자들이 방어 자세를 갖췄다. 그러나 레펜하르트는 굳이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저, 저들이 공간 포털을 열 때부터 미리 준비해 둔 마법의 시동어를 외칠 뿐.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우렁찬 고함을 터트린다.
“대이적 마법, A.M.P 쇼크웨이브!”
푸른 파문이 10여 미터 정도 퍼지다 사라졌다. 정확히 범위를 조절해 은의 협력자들만 영향권 안에 넣은 것이다. 과연 예상대로, 모두의 슈트가 일시 정지되어 버렸다.
주먹을 거두며 레펜하르트가 조소했다.
“바보냐? 한번 당하고도 똑같은 수법을 쓰게?”
은의 현자도 바보는 아니었던 것 같다.
“큭! 역시!”
“이렇게 나오는군!”
기다렸다는 듯이 다들 슈트를 벗어 던진다. 원래 저게 마법 없이는 벗겨지는 게 아닌데, 아마도 뭔가 수동 조작이 가능하도록 만든 모양이었다.
도로 맨몸이 된 오스만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듣던 대로군. 그대가 모든 아티팩트를 무용지물로 만든다는 것이.”
그리고 다시 허공에 손을 든다. 다시 외침을 터트린다.
“오라! 아다만드릴 슈트!”
“소환, 드래고닉 아머!”
철컹철컹!
도로 10인의 강철 거인이 나타났다. 방금 무효화된 슈트를 다시 걸친 것이 아니다. 그 슈트들은 고철덩어리가 되어 바닥을 뒹굴고 있고, 새 슈트 열 개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황당해 레펜하르트가 뇌까렸다.
“뭐야? 비축분이 또 있었어?”
하지만 그도 대책이 없는 건 아니었다.
“열심히 살아서 다행이네.”
재차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다.
“이는 드리워지는 베일, 흐름을 막은 둑이자 기세를 꺾는 방패며 은은히 날려 고요히 잠드는 소요小搖의 이적이라…….”
예전엔 A.M.P 쇼크웨이브 한 번 쓰면 마력이 대폭 날아가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레펜하르트도 놀진 않았다. 전생과 달리 사방신의 유물과 동기동조화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A.M.P 쇼크웨이브도 개조에 개조를 거듭했다. 마법의 반발력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한 술식을 싹 다 빼서 마력 소모를 줄이고 연타가 가능한 방식으로.
“이제 국지형 A.M.P 쇼크웨이브라면 몇 번은 더 쓸 수 있거든?”
웃으며 레펜하르트가 다시 몸을 날렸다. 다시 한 번 강철 거인들 가운데로 뛰어들어 대지를 내리찍는다.
“A.M.P 쇼크웨이브!”
퍼엉!
은의 협력자들이 또다시 허겁지겁 고철덩어리가 된 슈트를 벗어 던진다. 낄낄 웃으며 레펜하르트가 비아냥을 던졌다.
“자, 이제는 어쩌실 텐가?”
참으로 획기적이면서, 동시에 진부한 대꾸가 돌아왔다.
“오라, 아다만드릴 슈트!”
“소환, 드래고닉 아머!”
“자, 잠깐?”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거 대체 몇 대나 비축하고 있는 거야?”
☆ ☆ ☆
단말 제어실에서 영상을 살펴보며 세렐라인이 싸늘하게 웃었다.
“호호호, 마왕 레펜하르트여, 분명 그대의 능력은 놀랍기 그지없어.”
그러나 이곳은 세이어 템플, 인류의 신이 직접 머무는 신성한 장소.
이곳에 비치된 고대 기물의 숫자는 은의 현자가 보유한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애당초 은의 현자도 이곳에서 허락된 극히 일부만을 보관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곳이야말로 고대의 모든 힘이 집결된 중추 중의 중추다.
“어쩔 테지? 또 그 마법을 쓸 텐가?”
어떤 아티팩트를 투입한다 해도 저 마법 앞에서는 분명 무용지물일 것이다. 몇 번이고 반복해도 결과는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그 마법이 마음껏 펑펑 날릴 만큼 만만한 마법은 아닐 텐데?”
아무리 개조를 하고 범위를 줄인다 해도 10서클 마법이었다. 저런 엄청난 권능을 수십, 수백 번이고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 걸 펑펑 날린다면 오히려 환영이다. 레펜하르트의 마력을 착실하게 깎아 먹을 수 있을 테니까!
“얼마든지 무효화시켜 봐라! 그때마다 새로운 걸 던져 주마!”
☆ ☆ ☆
당황해 레펜하르트는 뒤로 물러섰다. 오스만트는 굳이 그를 쫓지 않았다. 그저 자세를 취한 채 의아해할 뿐.
“음? 이게 끝인가? 그 마법을 더 쓰진 않는 건가?”
그 말투에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어쩐지 주문 외우고 있을 때도 영 반응이 없더라니.’
주문 못 외우게 훼방 놓으려는 시도도 할 법하건만 멀뚱히 보고만 있어 좀 이상하게 여기긴 했다. 이건 애초에 레펜하르트의 A.M.P 쇼크웨이브를 소모시키려 했다는 소리다. 실제로 두 번의 A.M.P 쇼크웨이브 덕에 현재 사방신의 유물의 마력은 상당히 소모되었다. 아무리 개조했다지만 그래도 10서클 마법, 마력 소모율은 여전히 무시무시하다.
‘젠장, 상대를 너무 무시했나. 이쪽 수법 알면서도 빤하게 나온다면 응당 속셈이 있다는 소린데 그걸 미처 생각 못 하다니…….’
역시 레펜하르트도 세이어와 비슷한 데가 있다. 둘 다 ‘내 지식이 절대적이니 그 지식 밖의 상황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사고방식의 소유자인 것이다. 실로 오만한 자의 숙명이라 하겠다.
‘아우, 나도 아직 멀었군. 반성하자.’
레펜하르트를 지켜보던 오스만트가 껄껄 웃었다.
“그렇군. 그 마법은 더는 없는 건가?”
그리고 힘차게 검을 뽑아 든다.
“그렇다면!”
다른 은의 협력자들도 저마다 검을 뽑아 들고 자세를 갖춘다. 살기가 사방을 뒤덮었다.
“이제 신벌을 내리겠다!”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거 시작부터 계획 어긋나네.”
“폐하의 계획은 그렇지요. 제가 그래서 그거, 현실성 없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레펜하르트를 뒤로 하며 카를이 엘드라드의 칼집을 들어 올렸다.
“쓸모없어진 계획 후딱 내다 버리고 이제부턴 제 계획대로 하시죠?”
“그래야겠군.”
고개를 끄덕이며 레펜하르트가 외쳤다.
“카를, 아스레일, 아틸카, 실란. 내 주위에서 나를 경호하게!”
카를과 아스레일이 저마다 엘드릴 기간투스와 바포메트 슈트를 소환했다. 거대한 강철 기사가 레펜하르트의 좌우를 철저히 호위한다. 전방에서는 아틸카가 애용하는 병기, ‘어머니 은혜’를 든 채 눈을 부라리고 후위에서 실란이 신성력을 끌어 올리며 긴장 어린 표정을 짓는다.
레펜하르트가 제자리에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남은 이들은 저들을 상대해!”
이니야와 시리스, 러스와 타시드가 무기를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 뒤에서 마켈린이 신성 가호를 준비했다.
다들 이미 카를로부터 따로 언질을 들었는지라 계획이 바뀌어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아니, 타시드며 러스 같은 경우엔 오히려 안도하는 표정이기도 했다.
“결국 카를 재상님 예상대로 흘러가네. 은인의 예측도 잘 맞긴 하는데, 보통은 재상님 쪽이 적중 확률이 높더라고.”
“그치? 카를 재상이랑 형님이랑 의견 갈렸을 때 형님 말이 맞는 꼴을 못 봤다, 내가.”
“……어이, 거기 두 사람? 닥치고 위치나 잡으시지?”
투덜대며 한 소리 던진뒤 레펜하르트가 제라드를 돌아보았다.
“사부께선 어쩌시렵니까?”
다른 이들과 달리 제라드에겐 명령을 내릴 수가 없는 것이다. 뭐, 어차피 별문제는 없겠지만.
“내가 싸움 마다하는 것 보았느냐?”
안 그래도 아까 잠깐 밀린 게 영 자존심이 상했던 터다. 으르렁대며 제라드가 주먹을 매만진다. 오스만트가 인상을 썼다.
“우리를 상대로 그대들만 나설 셈이냐?”
뭐, 투구에 가려져 있어 보이진 않았지만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러스가 일루미네이터의 자루를 쥐며 손가락을 살기를 피웠다.
“흥! 그까짓 고철덩어리가 무서워서 가만있었던 줄 아는가?”
양쪽의 살기와 투지가 점점 피어올라 아지랑이처럼 공간을 일그러뜨린다.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합을 터트렸다.
“타아아앗!”
수십 줄기의 광채가 호선을 그리며 중앙에서 맞붙기 시작했다.
2
용의 갑옷을 걸친 오스만트가 대검을 휘두르며 포효했다.
“울어라! 바하무트!”
드래고닉 아머에 맞춰 제작된 은의 시대 아티팩트, 전설 속 용의 이름을 딴 2미터의 대검이 블레이드 오러를 내뿜으며 허공을 갈랐다. 오스만트가 평소 애용하던 검은 아니지만 그렇기에 이 대검은 더더욱 상식을 초월한 성능을 지니고 있다. 블레이드 오러와 함께 새하얀 냉기와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동반해 날아들었다.
제라드는 코웃음을 쳤다.
“가소롭구나! 스파이럴 가드!”
오러의 소용돌이로 상대의 공세를 그냥 뭉개 버리며 압도적인 거구가 포탄처럼 쏘아진다. 순식간에 블레이드 오러를 깨부수며 황금빛 일권을 뻗는다.
“네놈이나 울어라!”
쾅!
묵직한 타격이 오스만트의 명치를 정확히 찔렀다. 진철 아다만티움의 강도를 지니고 마력 금속을 구조적으로 짜 넣어 외부 충격의 관통조차 차단하는 절세 무구가 일격에 우그러지며 오스만트에게까지 충격을 준다.
“크윽!”
신음을 흘리며 오스만트가 뒤로 물러섰다. 울지는 않았지만 울고 싶을 만큼 아프긴 했다. 짐 언브레이커블은 사소한 손짓 몸짓조차도 일격 필살이라더니 정녕 명성이 허언이 아니다.
움푹 들어간 드래고닉 아머의 가슴께를 내려다보며 오스만트가 혀를 내둘렀다.
“과연 권황…… 단순히 지른 일격조차도 이 정도란 말인가?”
제라드도 혀를 내두르긴 마찬가지였다.
“진짜 단단하긴 하네.”
주먹이 욱신거릴 정도로 강하게 날린 일격이었는데 고작 조금 구겨지고 만 것이다. 다른 두 명의 은의 협력자들이 몸을 날리며 소리쳤다.
“권황 제라드여, 그대의 강함은 분명 독보적!”
“그러나 신의 위엄 앞에선 하찮은 인간의 강함일 뿐이다!”
적갈색과 남색의 블레이드 오러가 교차하며 제라드의 좌우를 압박한다. 스피드나 궤도는 평범하지만 그 안에 실린 위력은 제라드조차도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저 찬란한 오러에는 스파이럴 가드로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파괴력이 실려 있다.
그러나 제라드는 오히려 크게 웃었다.
“그래! 워낙 허약한 놈들이니 그런 거라도 걸쳐야 싸울 맛이 나겠지!”
두 은의 협력자와 제라드가 허공에서 충돌했다. 두 팔을 놀려 블레이드 오러의 방향을 뒤틀며 제라드는 연거푸 발차기를 날렸다. 킥의 회오리가 아다만드릴 슈트를 걸친 두 오러 유저의 전신을 두들겨 댄다. 그러나 이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큭, 이, 이 정도로는…….”
“세이어의 가호를 뚫을 수 없다!”
충격이 쌓이긴 해도 저들은 쓰러지지 않았다. 여기저기 우그러지긴 해도 저들의 슈트 역시 부서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슈트가 우그러진 만큼 제라드의 전신에도 상처가 생겼다. 상처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붉은 선, 그저 회초리로 스친 듯한 가벼운 흔적에 불과했지만 은의 협력자들에겐 실로 놀라운 결과다.
순식간에 몇 십 번의 공방이 오갔다. 조금씩 은의 협력자들, 그들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역시 세이어의 가호는 굉장했다. 역시 신의 위엄은 엄청났다.
“흐흐, 아무리 짐 언브레이커블이더라도 결국 인간의 자식일 뿐이로구나.”
제라드를 삼면으로 포위하며 오스만트가 기고만장하게 외쳤다.
“오늘 그 전설을 끝내 주마!”
☆ ☆ ☆
“고작 이 정도인가, 이름 높은 눈의 여왕이여?”
드래고닉 아머를 걸친 할라인의 세르네스가 흥분해 소리친다. 냉정하게 검을 휘둘러 상대의 공세를 흘리며 이니야가 입을 삐죽였다.
“그런 소린 한 방이라도 제대로 먹인 다음에 하시지?”
그녀는 두 명의 은의 협력자를 상대하고 있었다. 좌우로 밀려오는 블레이드 오러의 해일 속에서 화려한 검술로 응수한다. 베고 찌르고 밀고 당기고 쳐 내고 흘리는 모든 것이 하나의 동작, 하나의 흐름이 되어 눈보라처럼 몰아친다.
실로 극의에 다다른 움직임이었다. 두 사람이 덤볐음에도 그들은 아직 이니야의 머리칼 하나 건드려 보지 못할 정도로.
문제는 이니야도 저들을 ‘건드려 보기만’ 했다는 것이다.
“백야의 눈보라!”
어지러운 검화 속에서 이니야가 은빛 블레이드 오러를 연달아 쏘아 냈다. 절묘한 타이밍에 날아든 것이라 채 세르네스도 대응하지 못했다. 냉기의 칼날이 갑옷에 적중해 눈꽃을 피우며 굉음을 흘렸다.
콰앙!
“크윽, 이 정도쯤이야…….”
그러나 세르네스는 잠시 흔들렸을 뿐 이내 자세를 바로잡고 반격에 나섰다. 공세를 피하며 이니야가 재차 검을 떨쳤다.
“동토의 칼날!”
이번엔 세르네스도 경시하지 않았다. 검을 들고 마주 블레이드 오러를 뿜으며 혼신을 다한다.
“타앗!”
오러와 오러가 충돌해 서로 상쇄되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이니야가 중얼거렸다.
“제법 잘하네.”
환검에 속하는 백야의 눈보라는 연타라는 특성상 일격의 위력이 낮다. 그 정도론 이들이 걸친 아다만드릴 슈트나 드래고닉 아머를 뚫고 충격을 줄 수가 없다. 그래서 보통은 동토의 칼날을 쓰기 전 우세를 점하는 데 쓰는 기술인데…….
‘역시 갑옷에 익숙한 기사들다워.’
이들은 결코 동토의 칼날만큼은 좌시하지 않는다. 자잘한 백야의 눈보라는 무시해도 동토의 칼날쯤 되면 바로 경계한다. 그리고 슈트의 힘으로 증폭된 저들의 블레이드 오러는 동토의 칼날을 부수고 오히려 반격할 정도의 위력이 있다. 그 공방이 굉장히 세련되어서 아무리 이니야라도 사이의 허점을 찌르기가 힘들다.
세르네스와 함께 그녀를 상대하던 오러 유저, 그라임의 체이스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방어력을 이용하는 전법은 짐 언브레이커블만의 전유물이 아니지! 자신의 갑옷도 사용하지 못하는 기사가 과연 있을까?”
비록 오러 유저가 된 뒤 의미가 많이 퇴색되긴 했지만 이들은 여전히 기사였다.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기마에 올라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전장의 전사들, 갑옷의 방어도를 믿고 상대의 공격을 골라 무시할 건 무시하고 위력적인 건 받아치는 방식은 원래 갑옷 입은 기사들의 기본적인 전투 스타일이다.
솔직히 튼튼한 몸 믿고 때리건 말건 밀어붙이는 게 무슨 획기적인 전법은 아니지 않은가? 뒷산 멧돼지도 저러고 사는데? 짐 언브레이커블이 획기적인 건 맨몸으로 저 방법을 가능케 하는 무식한 육체 쪽이지 전술 쪽은 아니다.
하여튼, 그런 이유로 고대의 아티팩트 걸친 이 은의 협력자들은 꽤나 자연스럽게 슈트를 사용하고 있었다. 현재 브렉티스처럼 온갖 마법이며 술식을 통해 슈트의 성능을 100퍼센트 끌어내진 못하지만 대신 평소 전장에 나설 때처럼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감각으로 싸움에 임한다.
이니야가 중얼거렸다.
“역시, 익숙함도 강함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네.”
광신의 외침을 터트리며 세르네스가 연신 공세를 퍼부었다.
“이단자여, 세이어의 이름으로 피를 흘려라!”
☆ ☆ ☆
다른 쪽에선 러스와 타시드, 시리스도 저마다 은의 협력자들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성장 속도를 보인 러스와 타시드는 이제 고대 슈트를 걸친 은의 협력자를 상대로도 각자 둘씩 상대하며 분투하는 중, 시리스도 한 명을 상대로 용맹을 떨치고 있다.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고대 아티팩트의 힘 앞에서도 레펜하르트 일행은 용케 쓰러지지 않고 차분히 전투를 벌였다.
그렇게 시간이 좀 흐르자 그란디아드 경이 의문을 느꼈다.
‘왜지? 왜 아직도 이자들을 해치우지 못하는 거지?’
저들의 실력과 기량이 자신들보다 위라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자신들 역시 결코 약자는 아니다.
하나하나가 대륙에서 명성을 떨치던 경험 많은 오러 유저, 거기에 초월적인 무구인 아다만드릴 슈트며 드래고닉 아머까지 걸쳤다. 게다가 숫자도 두 배나 많다.
아무리 레펜하르트 일행이 저들에 비해 실력이 우위라지만 이 정도면 그 차이를 메우고도 남을 수준이다.
그런데, 하나같이 쓰러지지 않는다. 아니, 쓰러지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공방 속에서도 그리 위기에 처하질 않는다. 심지어 광기의 발렌시아조차도 슈트 사용 중인 은의 협력자와 일대일로 밀리지 않고 있다. 원래 그녀의 객관적 실력이라면 맨몸의 오러 유저보다 조금 나은 수준인데도.
‘어째서?’
이유는 알고 있다. 이들이 이 전투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은의 협력자들의 공격을 받아치고 반격한다. 굳이 갑옷을 부수고 강타를 넣으려 하지 않는다. 밀거나 중심을 흐트러트리는 수법을 노리고 화려한 연격으로 눈을 속인다. 이렇게 하면 상대에게 치명상을 먹이긴 어려우나 스스로의 몸을 지키긴 쉽다.
말은 쉽게 했지만,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늑대 사냥에 익숙하다고 호랑이 사냥도 익숙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다만드릴 슈트와 드래고닉 아머를 걸친 은의 협력자들은 기본적인 파워, 오러 위력, 방어력, 스피드며 기감 등이 월등하게 올라가며 그에 따라 상대하는 감각도 상당히 뒤틀린다. 단순히 노련해서, 갑옷 입은 상대와 싸워 본 경험이 많다고 익숙하게 대할 순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저들은 이상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전투에 임하고 있다.
그란디아드 경뿐 아니라 다른 은의 협력자들도 비슷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이놈들은 왜 이리 이 싸움에 익숙한 거지?’
세르네스의 공격을 받아 흘리며 이니야가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역시, 익숙함도 강함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니까.”
실제로 그녀는 이 전투 상황이 익숙했다. 이니야뿐 아니라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이 그랬다.
이들은 바로 전날, 바포메트 슈트를 입은 아스레일과 하루 종일 신 나게 대련을 하고 온 것이다.
제라드가 피식 웃었다.
“아스레일 녀석 훈련시키려고 굴린 건데 엉뚱하게 우리들이 덕을 봤구나.”
고대의 전투용 슈트를 입은 자와 싸우는 것이 어떤 감각인지쯤은 아스레일 경을 상대하며 지겹게 익혔다. 물론 이들과 아스레일 경의 수준은 상당히 차이가 났지만, 대신 아다만드릴 슈트나 드래고닉 아머와 바포메트 슈트의 수준 차도 상당하다 보니 서로 상쇄가 되어 실제로 상대하는 감각은 별 차이가 없었다.
덕분에 열 명의 은의 협력자들은 고대 슈트까지 사용하고도 고작 다섯의 레펜하르트 일행을 상대로 승기를 잡지 못하고 장기전을 펼치는 중이었다. 그란디아드가 마갑의 투구 속에서 미간을 찌푸렸다.
‘제길, 어서 이들을 처리하고 저자를 해치워야 하는데.’
안 그래도 아까부터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는 레펜하르트가 계속 거슬리던 차다. 분명 뭔가 준비하는 것 같으니 어서 방해해야 한다.
그때 러스가 일루미네이터를 휘두르며 그란디아드 경의 상념을 깼다.
“흩날리는 꽃잎!”
화려한 검술로 상대와의 거리를 벌린 뒤 레펜하르트를 돌아본다. 러스가 소리쳤다.
“그런데 형님? 아직 멀었습니까? 충분히 익숙해진 것 같은데요?”
레펜하르트가 눈을 떴다.
“안 그래도 슬슬 끝났다.”
가부좌를 풀고 거구를 일으킨다. 양손을 교묘히 움직여 수인을 맺더니 레펜하르트가 마법을 발동시켰다.
“재밍 아케인 채트!”
무수한 은색 빛의 파편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지붕을 뚫고 벽을 뚫고 주위의 모든 것을 무시하며 순수한 마력 형태로 흩어져간다.
기겁해 뒤로 물러서며 은의 협력자들이 방어 태세를 갖췄다.
“뭐지?”
“또 그 수법인가?”
A.M.P 쇼크웨이브는 현재 이들이 가장 경계하는 마법이었다. 아무리 슈트가 무제한 리필(?)된다 하더라도 소환과 장착 사이엔 꽤나 위험한 딜레이가 있는 것이다. 은의 현자들이 잽싸게 수동 조작을 준비하며 전투용 슈트의 상태를 살폈다.
슈트는 멀쩡했다. 아무런 이상 없이 잘 움직이고 있었다.
“그 수법은 아닌가?”
“그럼 뭔 짓을 한 거지?”
일루미네이터를 빙글 돌리며 러스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형님께서, 네놈들의 눈과 귀를 막으셨지.”
☆ ☆ ☆
지지지직!
갑자기 영상 전체에 노이즈가 끼더니 이내 입체 영상이 일그러지며 온갖 복잡한 색채의 파편이 상황을 가렸다.
“이거 왜 이래?”
놀라 세렐라인이 콘솔을 조작했다. 뭐, 조작한다곤 해도 누르던 버튼 더더욱 신경질적으로 연타하는 게 전부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사용자일 뿐, 은의 시대 엔지니어처럼 이 아티팩트에 대한 구조를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니니 저것 외에 방법이 없다.
당연히, 아무리 버튼을 눌러 대도 영상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세렐라인이 소리쳤다.
“응답하라, 오스만트! 상황을 보고해!”
인간의 음성 대신 괴이한 소음이 돌아온다.
즈즈즈즈!
“어떻게 된 거지?”
당황하며 세렐라인은 제어실의 다른 영상들을 바라보았다. 세이어 템플 내부를 비추는 다른 영상들 쪽은 멀쩡했다. 오직 레펜하르트 일행이 있는 지상부 홀 쪽만 망가진 상태.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저자가 또 무슨 수를 썼나?”
☆ ☆ ☆
홀 사방에 맴도는 재밍 마력의 파동을 느끼며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제대로 잘 먹혔군.”
저들이 고대 전투용 슈트를 다시 소환하는 걸 보며 그는 확신했다. 이곳의 시스템을 이용해 세이어가 자신들을 보고 있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저들이 A.M.P 쇼크웨이브를 맞고도 재소환이 가능할 리 없었다. 브렉티스의 사례도 있듯, A.M.P 쇼크웨이브는 저 슈트를 부르는 아티팩트도 같이 무효화시킨다. 그런데도 소환이 된 걸 보면 저들이 소환 아티팩트를 지니고 있는 게 아니라 세이어 템플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던져 주었다는 소리다.
‘역시 카를 말대로야.’
원래 감시 결계에 재밍 마력을 덮어 상대의 눈과 귀를 가리는 것은 레펜하르트가 애용하는 방법 중 하나다. 물론 세이어 템플의 감시 시스템은 현세의 마법학과 궤를 달리하기에 아무리 레펜하르트라도 기존의 재밍 마법 술식을 쓸 수는 없다. 하지만 현재 그는 마스테라다 던전을 가동시키며 우주의 알, 그 시스템 일부에 대한 정보를 얻은 것이다. 이것을 드림 다이브 때 얻은 정보와 합산하니 이곳의 감시를 가로막을 수 있을 정도의 정보가 나와 주었다.
“그런데 오래는 못 가겠군. 역시 은의 시대는 만만치 않아.”
원래 레펜하르트의 재밍 마법은 마력이 소모될 때까지 계속 감시 결계를 방해한다. 그 기간은 보통 이삼일 정도.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퍼진 재밍 마력 파편이 무서운 속도로 사라지는 것이 느껴진다. 훼방을 받은 감시 시스템이 재밍 마력 파편의 파장을 분석해 결계를 복구 중인 것이다. 이대로라면 한 2, 3분 정도면 다시 감시 결계가 작동될 것이다.
“그래도 3분이면 충분하지.”
레펜하르트가 고함을 질렀다.
“이제 저들은 우리를 보지 못합니다! 끝내시오, 여러분!”
러스가 바로 움직였다.
“타아앗!”
두 명의 강철 거인을 향해 일루미네이터가 검광을 흩뿌린다. 당연히 그 검광은 불꽃을 튀기며 갑옷의 표면을 미끄러질 뿐, 은의 협력자들도 마주 응수했다. 한 차례 공방이 오가자 러스가 검세를 취했다.
“허공검, 호라이즌!”
발도세에서 이어지는 거창한 참격, 그러나 은의 협력자들은 간단히 그 공격을 받아 냈다.
“또 그 짓인가?”
“이해할 수가 없군. 아무 쓸모 없거늘!”
아까부터 이어지는 저 필살기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느껴지는 오러에 비해 위력이 그리 높지 않았다. 평범한 블레이드 오러보다 기세는 몇 배나 강한 주제에, 정작 맞아 보면 그냥 둔탁한 충격만 조금 오고 끝이다.
상대의 반응에 러스가 내심 중얼거렸다.
‘그래, 안 먹히는 줄이야 아까부터 알고 있었지.’
오러라는 에너지를 공간 이동시키는 허공검, 호라이즌은 저 고대의 전투용 슈트에는 그리 먹히지 않는다. 똑같은 고대 전투용 슈트를 사용하던 테스론을 상대할 때 이미 확인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계속 이 짓을 해 온 이유가 있다.
‘반응 보니 충분히 익숙해졌군.’
러스가 다시 검세를 취했다. 가공할 오러의 기운이 폭증하며 발도세에서 쏟아지는 거창한 참격이 준비된다. 그란디아드 경이 인상을 쓰며 또 방어 태세를 취했다.
“또 그 쓸데없는 짓인가?”
러스가 참격을 날렸다. 똑같은 자세, 똑같은 기운에 똑같은 딜레이를 지닌 일격이지만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
“허공검, 인피니티!”
두 은의 협력자의 목이 단번에 잘려 나갔다. 피분수와 함께 강철 머리통이 허공으로 붕 떠오른다. 단 일격에 진철 아다만티움 합금이 수수깡처럼 베인 것이다.
타시드를 상대하던 자유 기사 마스라가 기겁해 외쳤다.
“맙소사? 어떻게?”
상대에게 파고들며 타시드가 뇌까렸다.
“지금 그쪽을 신경 쓸 때가 아닐 텐데?”
전투 예지를 통해 상대의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대들보로 써도 족할 거대한 참마도가 섬세하고 예리한 궤도를 통해 마스라의 전신을 노린다.
놀란 와중에도 마스라는 침착하게 공격에 대항했다. 아무리 전투 예지로 허점만 노린다 해도, 이 슈트의 방어력과 스피드, 감각 증폭력은 무시무시하다. 상대보다 늦게 움직여도 공격을 막는 것은 별문제가 없다.
참마도 다카르와 마스라의 대검이 충돌하는 순간이었다.
“이번 건 피했어야 했어.”
차갑게 말하며 타시드가 오러를 끌어 올렸다.
“제라드 소드!”
그리고 이내 연계기를 넣는다.
“쌍벼락 떨구기!”
가공할 내려치기가 마스라의 대검을 박살 내며 투구까지 깊숙이 박혔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 가공할 기세에도 불구, 순식간에 박아 넣은 참마도를 빼 다른 은의 협력자에게 날린다. 청록색 블레이드 오러의 올려치기가 상대의 사타구니부터 쇄도한다.
비명과 함께 아다만드릴 슈트와 드래고닉 아머가 산산이 박살 났다. 시간 동결의 검, 제라드 소드의 위력이었다. 타시드가 히죽거렸다.
“아, 잘 먹히는구먼.”
러스는 왜 방어기인 제라드 소드를 공격할 때 쓰냐고 타박했지만, 사실 그건 친우에게 건네는 농담일 뿐이다. 나무 회초리와 쇠몽둥이 중 어느 쪽이 더 아프겠는가? 절대적인 불굴의 검은 그 자체로 이미 훌륭한 공격 무기가 되는 것이다.
맞은편에선 시리스도 마지막 일격을 찌르고 있었다.
“정령합신!”
그녀가 다루는 엘리멘트의 힘, 일곱 정령의 정수가 한 점에 모여 마력과 융합한다. 가공할 마력이 일곱 정령의 힘을 수렴해 가공할 파괴력을 낳는 이 수법은 바로 전생의 시리스, 광기의 발렌시아의 필살기였다.
“엘리멘틱 스피어!”
한 줄기 빛의 창이 두꺼운 아다만드릴 슈트를 뚫고 상대의 명치를 관통한다. 그 광경을 보며 이니야가 쓴웃음을 지었다.
‘용케도 자기 기술로 바꿨네.’
저 기술은 아무리 봐도 이니야 자신의 필살기, 앱솔루트 스피어와 닮아 있었다. 물론 압축과 폭축을 거듭해 위력을 높이는 방식은 너무 고난이도라 못하고 대신 정령력을 합일해 관통하는 방식을 택한 것 같지만, 어쨌건 기본 개념은 비슷하다.
‘자존심만 센 줄 알았더니 인정할 건 인정하는 성격인가 봐?’
시리스에게 점수를 주며 이니야는 흐뭇해했다.
그런데 사실 이게 좀 야료가 있는 것이, 사실 이 기술을 개발한 것은 전생의 시리스다. 레펜하르트야 별로 친하지도 않고 시리스보다도 약했던 전생의 이니야에게 그리 관심이 없었지만, 시리스 입장에서 그녀는 틀림없는 엘프의 2인자이며 무의 경지 자체는 자신보다 높은 검사인 것이다. 병마로 약해졌을 뿐이지.
그래서 전생의 시리스와 이니야는 제법 친분이 있었다. 일단 지금처럼 레펜하르트를 두고 싸울 일도 없지 않은가? 서로를 존경하는 전사로 대하며 기술 교류도 하곤 했다. 그때 탄생한 비기가 바로 이 엘리멘트 스피어, 그리고 그 개념을 현세의 시리스에게 전한 것이 레펜하르트다.
‘당시엔 나도 그냥 마법사였기 때문에 어떤 원리인지는 잘 몰라. 그냥 엘리멘트의 힘을 이니야의 기술로 응용해 만든 기술이란 정도만 알고 있지. 하지만 전생의 네가 가능했으니 지금의 너도 할 수 있지 않겠어? 이제까진 기량이 따르지 않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이젠 시리스, 너도 엘리멘트가 경지에 올랐으니…….’
하필 이니야의 기술이란 것에 시리스는 꽤 반감을 표했다. 하지만 당장 강해지고 싶으니 선택의 여지는 없다. 이니야의 기술을 훔쳐보고 레펜하르트에게 들은 개념을 스스로 되새기며 노력, 또 노력했다. 그래도 워낙 지금 수준이 떨어지는지라 쉽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정령력을 합일해 마력에 싣는 것이 전혀 되질 않는다.
‘대체 전생의 전 어떻게 이런 게 가능했나요, 레펜하르트 님? 도저히 안 되는데…….’
‘그, 글쎄? 나도 그거야 모르지만…….’
사실 전생의 시리스는 성광검 메사이어의 능력을 이용, 마력을 폭주시킨 뒤 그 흐름에 일곱 정령력을 담아 흘리는 수법으로 엘리멘틱 스피어를 구사했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가 그 사실을 알 리가 있나? 그땐 무술엔 눈곱만큼도 관심 없던 마법사였는데.
‘그래도 결과만 비슷하면 되는 것 아닌가?’
정령술은 쓰지 못해도 원리만큼은 잘 아는 레펜하르트다. 그리고 이형의 힘을 모아 잘 버무리는 것에도 이젠 일가견이 생겼다.
그 자리에서 뚝딱 권마합신을 개조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시리스 전용 술식 정령합신, 개조하는 데 고작 한 시간 반 걸렸지만 위력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끄르르…….”
목을 관통당한 은의 협력자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죽음이었다. 메사이어를 거두며 시리스가 인상을 썼다.
‘역시 위력은 좋지만…….’
이니야의 기술을 베꼈다는 건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 옆에 온갖 오러 스킬 다 베끼고 살면서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을 못 느끼는 러스가 있어서 다들 실감을 못 하는 것 같은데, 사실 타인의 기술을 훔친다는 것은 무인에게 있어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지금은 어쩔 수 없지만, 기필코 나만의 기술을 만들고 말겠어.’
시리스의 내심도 모르고 이니야는 좋아하고 있었다. 자기 기술을 열심히 연구해 저 경지까지 올랐으니 솔직히 대견스럽다.
‘제자가 생겼다면 이런 기분일까? 하긴, 레펜하르트 님의 딸 같은 아이라면, 내게도 딸 같은 아이 아니겠어? 잘해 줘야지, 음.’
하여튼 다들 자신의 상대를 깔끔하게 처리했다. 검을 고쳐 쥐며 이니야가 눈을 빛냈다.
‘그럼 나도 슬슬…….’
눈보라를 연상케 하는 냉기의 검화가 화려하게 시야를 수놓는다. 동료들의 죽음에 놀란 세르네스와 체이스가 신중히 방어 태세에 들어갔다. 이번엔, 뭔가 아까와 느낌이 다르다!
‘뭐지? 뭔가 숨겨 둔 수법인가?’
과연 철저히 방어 태세로 들어선 덕분에 둘 다 연격을 막아 낼 수 있었다. 비록 상대의 공격에 실린 냉기의 오러가 갑옷을 뚫고 스며들어 두 팔이 저리긴 하지만, 그래도 공격 자체는 훌륭히 막았…….
콰직!
갑자기 세르네스의 팔뚝이 폭발했다. 아니, 폭발과는 좀 다른 현상이다. 느닷없이 팔뚝 안쪽, 뼈와 근육, 혈관으로 이루어진 그곳에서 고드름이 터져 나오며 두 팔을 곤죽으로 만들어 버렸다.
“크아아악!”
양팔을 잃은 세르네스가 비명을 지른다. 체이스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세르네스 경?”
양팔을 잃었다지만 그것은 슈트 내의 일일 뿐. 밖으로는 피조차 흐르지 않으니 겉으로 보기엔 두 팔 모두 멀쩡한 걸로만 보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니야가 재차 검을 휘둘렀다.
“하압!”
서리 여왕의 지배Domination of frost queen.
짐 언브레이커블의 비처에서 새롭게 얻은 깨달음, 오러의 완전 물질화를 이용한 궁극의 비검이 또다시 발동되었다. 공방 속에서 상대에게 스며든 냉기가 순식간에 현실의 물질로 탈바꿈했다.
체이스의 두 팔뚝도 박살이 났다.
“으아아악!”
그제야 체이스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했다. 그리고 경악했다.
‘이, 이건 막을 수가 없는 공격이잖아!’
오러 유저끼리 검을 맞대다 보면 서로의 기운이 서로에게 남는 것은 당연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그 잔여 오러가 바로 내부의 폭탄이 되다니?
아주 작은 혈전, 아주 극소의 공기가 혈관으로 들어가기만 해도 죽는 것이 인체다. 아무리 오러 유저고 아무리 단련을 거듭한다 한들 인체 내부에서 갑자기 얼음이라는 물질이 생겨나는데 그걸 막을 수 있는 방법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그리고 저 결과가 가능하다는 것은 곧…….
“오러의 물질화…….”
두 팔을 잃은 체이스가 망연자실했다. 고통 속에서도 상대의 경지에 대한 경외가 떠오르는 것은 그 역시 무인이기 때문일까?
“……다음 대의 검성은 저 여인이 차지하겠구나.”
반면 세르네스는 여전히 이를 갈고 있었다. 이종족에 대한 편견이 극심한 그는 저 놀라운 경지를 보고도 애써 이니야의 기량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제, 제길…… 이런 수법이었냐? 미리 알았더라면 당하지도 않았을 것을…….”
저 수법도 파훼법이 없는 건 아니다. 애초에 충돌을 피하고 철저히 회피 위주로 싸워 체내에 상대의 냉기가 스며드는 걸 허용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단지 현 대륙에 이니야를 상대로 ‘한 대도’ 안 맞고 피할 수 있는 무인이 과연 존재할지가 의문이지만…….
“그래, 그래서 일부러 지금까지 기다렸지.”
이니야야 예외로 치더라도 러스의 허공검 인피니티나 타시드의 제라드 소드, 시리스의 엘리멘트 스피어는 아직 터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기술이다. 위력은 나무랄 데가 없지만 기술의 숙련도는 그리 높지 않다. 미리 알고 경계하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
“저 아이들의 기술이 드러나면 곤란하거든?”
팔을 잃은 두 은의 협력자 사이로 은빛 그림자가 섬광처럼 번득인다. 검을 좌우로 놀리며 이니야의 세검이 가볍게 둘의 목덜미를 치고 지나간다. 세르네스와 체이스의 경추에 냉기가 스며들고, 이내 얼음으로 물질화한다.
“…….”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둘 모두 절명해 버렸다. 깔끔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그녀의 마무리에 제라드가 감탄을 흘렸다.
“역시 저 아이는 대단하구나.”
저 수법이라면 짐 언브레이커블도 만만히 볼 수가 없다. 아무리 강철의 육체라도 체내로 냉기가 스며드는 걸 막을 방법은 없으니까. 워낙 뼛속까지 단단하다보니 체내에 얼음이 생겨도 바로 오러로 녹여 치명상까진 입지 않겠지만, 그래도 일반인이 피멍 드는 정도 상처는 충분히 입게 된다.
“어쨌거나 나도 끝내야지.”
제라드의 거구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순식간에 오스만트에게 접근해 왼 주먹을 갖다 댄다. 오스만트도 잽싸게 회피 동작을 취했지만 마치 예지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따라가며 오른 주먹을 들어 올린다.
“허업!”
왼 주먹이 초근거리 타격, 제로 임팩트를 날린다. 동시에 라이트 펀치가 길게 스트레이트를 찔러 넣는다. 양주먹이 번갈아 한 지점에 충격을 겹친다. 외부와 내부에서 동시에 파괴력이 집중되어 하나로 합일된다.
“더블 임팩트!”
콰쾅!
오스만트가 박살 났다. 사람뿐 아니라 그가 걸치고 있던 고대의 슈트, 드래고닉 아머마저도 일격에 파편이 되어 흩날린다. 사방에 금속과 뼈와 살점과 피 보라가 혼탁한 혈무를 피웠다.
“오스만트 경!”
경악한 다른 상대가 뒤로 물러나려던 차, 제라드가 따라가며 길게 킥을 찔러 넣었다.
“가스트리젠!”
이번에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슈트가 통째로 파괴되며 내부의 사용자까지 동시에 박살이 났다. 이름 높은 오러 유저가 전설적인 고대의 아티팩트를 동원했는데도 눈 깜짝할 사이에 고혼이 되어 버렸다.
쭉 뻗은 다리를 거두며 제라드가 싱글거렸다.
“이 정도야 간단하지.”
분명 이들이 들고 나온 고대 전투용 슈트의 위력은 굉장했다. 평범하던 오러 유저가 저 기물을 씀으로써 족히 캘러미티 혼 5중첩의 경지에 든 짐 언브레이커블의 문도와 맞먹게 되었다.
즉, 기껏해야 5중첩 수준이란 소리다. 제라드가 막 세상 나와서 이래저래 경험 쌓고 권왕이라 불리던 젊은 시절과 비슷한 경지. 8중첩을 넘어 9중첩을 바라보는 지금의 그에겐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니다. 이제까지 질질 끈 건 어디까지나 다른 아이들을 위해서였을 뿐, 마음만 먹었으면 첫 격돌 때 초살시킬 수 있었다.
“이런 놈들 정도면 캘러미티 혼까지 쓸 필요도 없지.”
박살 난 상대로부터 시선을 떼며 제라드가 고개를 돌렸다.
“다 조졌다, 제자야. 이제 어쩔 것이냐?”
카를이며 아스레일을 대동한 채 레펜하르트가 다가오며 대꾸했다.
“제 계획은 파탄 났으니 카를 재상 쪽 계획으로 가야죠, 뭐.”
3
세이어를 상대하는 레펜하르트의 계획은 심플했다.
1. 공간 결계를 돌파한다.
2. 절대 방어 결계도 깨부순다.
3. 그러면 열받은 세이어가 뛰쳐나올 테니 다 같이 힘을 합쳐 그놈을 상대한다.
4. 신성인지 뭔지로 자꾸 원상 복귀될 테니 그냥은 못 잡는다. 그러므로 한 쪽은 세이어를 상대하고, 그 틈에 다른 한쪽이 세이어 템플 깊숙한 곳까지 잠입한다.
5. 아카식 드라이브가 윙윙 돌아가고 있을 테니 얼른 그걸 부순다.
6. 더 이상 회복이 안 되는 세이어를 해치운다.
7. We win!
이 계획을 들은 카를의 반응 역시 심플했다.
-……제정신이십니까?
1, 2번이야 그렇다 치자. 저 부분은 딱히 카를도 반대할 생각 없었다. 그렇지만 3번부터는 어이가 없다.
열받은 세이어가 알아서 뛰쳐나올 거라고? 그리고 아카식 드라이브를 노리는 다른 일행의 존재를 무시한 채 눈앞의 상대에게만 매진할 거라고?
-그럴 리가 없잖아!
세 살 배기 아이도 이보단 전략, 전술을 더 잘 짜겠다!
-어휴, 폐하가 왜 전생 때 그 정도 힘을 지니고도 패하셨는지 알 것 같군요.
-이게 뭐가 이상하오?
-아니, 대체 자기 집 안방에 틀어박혀 부하들 잔뜩 데리고 있는데 멀쩡한 부하들 버려두고 직접 적들을 상대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자신 없는 태도로 레펜하르트가 손을 들었다.
-……나?
하긴, 저게 전생 때의 마왕 레펜하르트가 저지른 짓이기 하지.
-전생 때 그러셨습니까?
-응.
-……왜요?
-그야, 다른 사천왕들은 다들 자기 일족 건사해야 했으니까.
-그렇다고 인류의 군대를 혼자서 다 상대하셨습니까? 자기 죽으면 모든 게 끝이란 걸 잘 알면서도?
-안 죽을 자신은 있었거든. 그리고 꽤 할 만했다고. 당시 제도 레펜하임에 쳐들어온 이백만 대군 중 3분의 1은 나 혼자 처리했는데?
-……혼자서 칠십만 가까이 죽였다고요?
-아니, 다 죽였다는 소린 아니고. 광역 마법이랑 소환 마법으로 상대했으니까 사망자가 그렇게 많이 나오진 않았을 거야. 한 이십만 정도? 음, 부상자는 한 삼십만 정도 나왔겠다.
-…….
순간 테스론의 분노가 절실히 이해가 가는 카를이었다. 역시 ‘저런 것들’은 세상에 존재하면 안 된다.
-지금은 못 하는 짓이니까 그런 눈으로 볼 필요는 없소만? 뭔가 눈빛이 무서워, 재상.
-뭐, 됐습니다. 지금과는 상관없는 세계, 상관없는 시대의 일이니. 하여튼 왜 폐하가 저런 계획을 세웠는지는 이해가 가는군요.
레펜하르트는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저 계획을 수립한 것이다. 역지사지란 말이 이렇게 나쁘게 적용될 수도 있구나 싶어 카를은 잠시 감탄했다.
-하지만 세이어가 저렇게 나올 거란 근거는 없지 않습니까?
-세이어라서 그리 생각하는 것인데?
반문하며 레펜하르트가 첨언했다.
-저놈, 아무리 봐도 전생 때의 나랑 사고 패턴이 비슷하거든? 나도 이젠 세상 돌아가는 법을 좀 알게 되었다고. 상대가 세이어니까 저렇게 나올 거라는 거지 다른 놈이었으면 안 이랬을 걸세.
-그, 그건 그러네요?
이번엔 카를의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레펜하르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여태 보여 준 세이어의 행동 패턴은 꽤나 전생의 레펜하르트와 비슷하다. 또한 레펜하르트는 적어도 세이어의 사고방식에 대해서만큼은 깊은 통찰력을 보여 주었다.
-그래도 세이어가 상식적인 반응을 보이지 말라는 법은 없지요. 일단 저도 나름대로 차선책을 생각해 두겠습니다.
-뭐, 굳이 그럴 필요는…….
여전히 납득 못 하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카를이 타이르듯 말했다.
-차선책을 마련해두는 것은 모든 일의 상식입니다. 무엇보다 차선책이 있어서 손해 볼 건 없지 않습니까?
-워낙 재상이 하는 일이 많으니 그렇지.
확실히 침투 계획이란 건 그냥 수립되는 것이 아니다. 공간 결계와 방어 결계 파훼야 더 건드릴 부분이 없으니 넘어가도 되겠지만, 나머지 부분만으로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